백두대간은 무엇인가요?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백두산에서 비롯된 큰 산줄기’라는 뜻으로 백두산에서 시작해서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중심 산줄기입니다.
백두대간은 산줄기, 물줄기의 모양과 방향을 기초로 구분한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인식체계로, 나무의 뿌리와 가지, 줄기가 하나인 것처럼 1400km를 한번도 잘리지 않고 연속되어 국토의 등뼈를 이루며, 14개의 큰 산줄기와 수많은 작은 산줄기로 나뉩니다.
백두대간,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길가의 작은 풀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제대로 된 이름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작은 풀은 더 이상 잡초가 아니라 하나의 의미를 가진 생명으로 다가옵니다.우리 사는 이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땅은 백두산에서 비롯되어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큰 산줄기를 중심으로 생명을 보듬는 물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옛부터 백두대간은 산줄기, 물줄기의 모양과 방향을 기초로 구분한 우리 고유의 지리인식체계로, 오랫동안 사용해온 개념입니다. 나무의 뿌리와 가지, 줄기가 하나이듯 백두대간은 1400km를 한번도 잘리지 않고 국토의 등뼈를 이루며, 14개의 큰 산줄기와 수많은 작은 산줄기로 나뉩니다. 이 산줄기를 따라 한반도의 숲과 동물과 사람들은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곳에 살다가 어디론가 떠나기도 하지만 땅은 계속 그 자리에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키는 땅은 공간적 실체입니다. 그리고 공간적 실체인 땅의 이름은 그 땅이 가진 정체성의 상징입니다.
1000년 전부터 불려온 백두대간은 생명을 보듬고 우리 땅을 아우르는 정체성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그 의미는 사라지고 땅을 자원으로만 인식하는 산맥체계가 들어섰습니다. 백두대간으로 부를 때 땅은 하나의 생명체로 흙은 살로, 물은 피로, 풀 · 나무는 털로 인식되었습니다. 태백산맥으로 불리면서 땅은 생명을 잃고 이용을 위한 자원으로만 인식되었습니다.
이렇듯 산맥으로 불리며 잊혀졌던 백두대간은 1980년대를 지나면서 많은 산악인들과 지리학자의 노력으로 되살아나 이제는 우리 산줄기의 일반용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더불어 백두대간을 지키기 위한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이 1년 전인 2003년 12월에 제정 · 공포되었습니다. 법률을 살펴보면 ‘백두대간’이라 함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금강산 · 설악산 · 태백산 · 소백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큰 산줄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공간적 실체인 백두대간이 법률에서도 살아난 것입니다.
1000년을 넘게 사용해 오고 법률에서도 의미가 명확하게 규정된 백두대간을 우리는 현행지도에서는 여전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자원으로 인식되며 지리부도와 온갖 지도에서 태백산맥으로 불리던 백두대간에게 이제는 제 이름을 불러줄 때입니다.
백두대간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시작으로, 13정맥과 주요 산의 본래 이름을 되찾는 일은 우리 땅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생명체로 여겨 함께 살아가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지도상에 백두대간 이름을 표기하기 위한 청원활동을 통해 백두대간 이름을 되찾는 일!
이 글을 읽은 당신이 할 수 있습니다.
아래 버튼을 누르면 지도에서 백두대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백두대간 이름 되찾기,
이 서명을 녹색연합에서 모아 국토지리정보원에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서명작업을 통해 많은 시민들이 백두대간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고, 청원서는 지도에서 백두대간을 표기하여 만날 수 있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청원서는 제출하였지만 서명운동은 계속 진행됩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백두대간의 올바른 뜻과 서명운동을 알려주세요.
끝으로 얼마 전에 돌아가신 김춘수 님의 시를 덧붙입니다.
백두대간 이름이 살아나서, 백두대간이 우리 삶터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꽃(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이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
Q1. 백두대간은 무엇인가요?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백두산에서 비롯된 큰 산줄기’라는 뜻으로 백두산에서 시작해서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중심 산줄기입니다.
백두대간은 산줄기, 물줄기의 모양과 방향을 기초로 구분한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인식체계로, 나무의 뿌리와 가지, 줄기가 하나인 것처럼 1400km를 한번도 잘리지 않고 연속되어 국토의 등뼈를 이루며, 14개의 큰 산줄기와 수많은 작은 산줄기로 나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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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로 표현한 백두대간
백두대간을 따라 이어진 산에서 모든 물이 샘솟아 마룻금을 중심으로 이쪽 저쪽으로 떨어져 계곡과 강을 이룹니다. 그 물은 결코 산을 건너지 않고, 백두대간을 따라 흘러내린 물은 한강, 금강, 섬진강, 낙동강을 비롯한 우리나라 모든 강의 발원지입니다.
또한 백두대간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회 문화의 측면으로 백두대간은 지역의 역사, 문화가 발생한 곳입니다. 옛날부터 사람은 강을 중심으로 모여 살며 고유의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대간과 정맥은 물길의 경계임을 동시에, 문화의 다름을 구분하는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자연생태의 측면으로 백두대간은 대륙의 야생 동?식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이동통로 및 서식처로서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산림생태계의 보고입니다. 백두대간에는 주목, 사스래, 전나무 같은 희귀한 나무를 포함하여 다양한 산림생태계를 이루고 있으며, 금강초롱, 모데미풀, 꼬리진달래 같은 우리나라 고유 식물종(4,071종)의 33%에 해당하는 1,326종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백두대간은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반달가슴곰, 까막딱따구리, 꼬리치레도롱뇽, 어름치 등의 야생동물 564종(포유류 55종, 조류 365종, 양서?파충류 34종, 어류 110종)의 삶터입니다.
백두대간은 산줄기와 강줄기를 통틀어 말하는 것을 넘어 모든 생명을 품고 있는 지형의 시작점으로 산림생태계의 핵심지역을 아우르고 있으며 나아가 국토전체의 자연환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반도 생태계의 열쇠가 됩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 대표 국립공원인 지리산과 설악산을 포함, 오대산, 소백산, 월악산, 속리산, 덕유산의 7개 국립공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두대간을 이해하고 보전하는 것은 우리 미래를 지키는 일입니다.
Q2. 백두대간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썼나요?
백두대간이라는 말의 사용은 10세기 초,『옥룡기』에 '우리 나라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끝났으니'라는 설명이 등장한 것을 처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 「고려사」, 「경상도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 「산수고」와 「산경표」같은 문헌에서 백두대간에 대한 조상들의 인식과 기록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백두대간은 1000여 년 전부터 사용되어 온 우리나라 고유의 지리인식개념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일제시대를 지나며 산맥론에 묻혀 잊혀졌습니다. 이후 1980년대에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씨가 헌책방에서 「산경표」를 발견하면서 백두대간의 개념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백두대간을 미신이라며 믿지 않았지만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백두대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시민들에게도 친근한 개념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을 제정하여 백두대간의 실체를 법으로도 인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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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광문회의 산경표
Q3.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은 어떻게 다르죠?
앞서 이야기했듯,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땅 위의 실제하는 산과 강을 기초해 그린 실제 지형을 의미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태백산맥은 땅 속의 지질구조, 토양/암석 등을 따라 분류하여 그린 것으로 실제 지형과는 많이 다릅니다. 백두대간은 있는 산줄기를 그대로 표시하였기 때문에 지형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후, 역사, 풍습, 방언, 음악, 지역감정 등 모든 인문지리학적 사실을 설명하는 논리적 근거가 됩니다. 태백산맥은 땅 속의 지질을 반영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선을 표현한 것이기에 실제 지형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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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을 나타내는 산경도
백두대간은 1000년 전부터 사용한 개념이지만 태백산맥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인 고토 분지로가 2년간 조사한 내용으로 만든 것입니다. 고토 분지로의 조사로 만들어진 태백산맥의 개념은 이후 100년간 아무런 검증이나 연구 없이 쓰여 왔습니다. 중/고등학교의 지리교과서를 보면 태백산맥은 다 다르게 표시되어 있을 정도로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의 국토연구원의 '위성영상을 이용한 한반도 산맥체계 재정립 연구' 자료를 살펴보면, “지질구조를 토대로 산맥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산의 규모와 연속성을 중심으로 산맥을 정의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러한 산맥의 특성을 2차적으로 분석할 때 지질구조나 형성시기 등을 탐구하기도 한다. 한반도 산맥체계가 지질구조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는 학계 일부의 주장과 다르게 지질구조와 맞지 않는다는 점이 실증분석결과로 명백히 밝혀지고 있다.”고 되어 있어 산맥개념은 실제 지형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정확한 근거자료와 연구가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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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맥을 나타내는 산맥도
Q4. 백두대간은 지도에 표기해야 하나요?
한마디로 얘기하면 그렇습니다! 국가 지도를 펴내는 목적은 국가의 지리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입니다. 현행지도에는 실제 지형을 나타내는 백두대간이 아닌 땅속 지질을 나타내는 태백산맥을 산줄기를 따라 표기하고 있습니다.
Q5. 그럼 백두대간은 지도에 누가 표기하죠?
국가 발행지도를 만드는 것은 건교부 산하의 국토지리정보원이라는 곳에서 한답니다. 국토지리정보원에는 시?군에 지명위원회가 있고 이곳에서 안건이 결정되면 도지명위원회에 안건이 올라와 결정되고 국립지리원 중앙지명위원회에 올라와 최종결정이 되지요. 하지만 백두대간 같은 경우는 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전국토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군 단위에서 안건으로 올리기는 힘들답니다. 하지만 2003년 12월에 제정된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에 백두대간의 의미가 정의되어 있습니다. 법으로 지정된 국립공원이나 자연생태계보전지역을 지도에 표기하듯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과 관련된 부서에서 백두대간을 지도에 표기하는 것과 관련해서 요청을 한다면 백두대간을 지도에 표기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랍니다.
Q6. 백두대간 지도 표기와 관련해서 정부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아직까지는 백두대간을 국립지리원 발행지도에 표기하는 것과 관련해서 국토지리정보원에서도,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을 다루는 부서인 산림청과 환경부에서도 논의하거나 노력하거나 검토한 적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Q7. 백두대간을 지도에 표기하면 어떤 게 좋죠?
앞서 말했듯 백두대간은 우리나라 지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지리체계이며 지도는 실제의 지리와 지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두대간을 지도에 표기하게 되면 우리 조상들이 천년을 넘게 사용하며 검증된 지리체계를 지도에 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종주를 하는 사람에게도, 지리개념의 백두대간을 실제지리에서 찾고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지도는 좋은 자료가 될 것입니다. 지도에서 백두대간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 땅을 제대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아끼고 보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지리를 정확히 전달해야 하는 지도의 참 목적이 제대로 실현되려면 백두대간은 국가지도에 표기되어야 합니다. 또한 국민들이 백두대간이 품은 우리 땅의 생김새와 산과 물의 원리를 쉽게 이해하여 국토에 대한 애정이 길러진다면 우리 땅을 건강하게 보전하는 활동에도 많은 이들이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Q8.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백두대간을 지도에 표기하기 위해서 먼저 서명을 해주세요. 지금 녹색연합 홈페이지(www.greenkorea.org)와 백두대간홈페이지(www.daegan.org)에서는 백두대간을 국가지도에 표기하기 위한 서명운동이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백두대간을 지도에 표기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널리널리 알려주세요. 백두대간은 백두대간보호법이라는 특별법으로 지키고 보전하려는 곳입니다. 대륙의 많은 생명들이 백두대간을 따라 살고있는 생태적으로 중요한 곳이며, 문화와 역사를 다양하게 이룰 수 있었던 우리 민족의 뼈대가 되는 산줄기입니다. 서명으로 백두대간을 이해하고 지키는 운동을 함께 하는 것은 백두대간보전운동의 첫 시작입니다. 이 첫 발걸음으로 백두대간보전운동을 함께 해주세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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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지도에 백두대간을 표기하는 거리서명 캠페인
*근역강산맹호기상도(槿域江山猛虎氣象圖)
'근역강산맹호기상도(槿域江山猛虎氣象圖)'입니다.
'근역강산'은 학교에서 배운대로 '무궁화가 피어있는 땅'인 우리나라를 말합니다. '맹호'는 용맹스런 호랑이를 뜻하겠죠. '기상'은 기운의 상징, 표상 뭐 이런 뜻이 될 것 같군요. 전체적으로 '우리나라를 용맹스런 호랑이의 기상으로 표현한 그림' 정도가 될 듯 합니다.
* 백두대간 위성사진
'백두대간 이미지' 메뉴 에서 '위성에서 본 백두대간'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위성 사진을 올려 놓았습니다. 땅에서 바라 본 백두대간의 장엄한 이미지를 하늘에서 바라보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선명하게 보이는 애끓는 산하와 땅의 생김새 그리고 옛지도와 함께 보아도 신기하리만큼 비슷하게 묘사된 백두산의 모습 등 마음으로 한발짝 다가선 백두대간을 볼 수 있습니다.
* 옛지도의 백두대간 이미지
* 작은 이미지를 누르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1402년 제작된 원본을 토대로 후대에 다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조선전도를 통해 본 백두대간의 모습. (부분도) |
16세기 중기에 제작된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의 우리 나라 부분. 위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고 역시 백두대간을 검은 색으로 선명하게 표현했다. 백두산과 금강산이 하얀색으로 신비롭게 묘사되어 있다. |
18세기 말(1757년) <동국대전도(조선전도)>. 고산자 김정호에 앞서 지도 제작 기법을 한 단계 끌어 올린 정상기 지도를 모사한 지도로 추측되고 있다. 백두대간을 비롯한 주요 산맥의 흐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특히 이 지도에서는 북방의 윤곽이 이전의 지도에 비해 대단히 정확해졌다. |
18세기 말 <여지도> 의 '조선, 일본, 유구국도' 중의 '조선국도'. 우리 나라의 해안 지방과 압록강, 두만강 연안이 중점적으로 나타나 있다. 백두대간과 강들이 명료하게 그려져 있다. 이 지도는 해안선과 북방 경계 지역의 지명이 자세하고 중점적으로 표시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
18세기 말. 400여개의 섬이 그려져 있어 바다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여지도>의 '아국총도'. 여기서도 백두대간은 녹색의 띠처럼 명확히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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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이렇게 종주했다.
- 백두대간 종주자료집 44권 사례분석.
백두대간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누구보다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산악인들이다. 허구헌날 산 속에 파묻혀 살면서도 이 산줄기가 어디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지 몰랐다가 벼락처럼 떨어진 소리-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
그 후로 산악인들은 갑자기 불거져 나온 이 소리를 확인하고 싶어했다. 정말 산줄기가 끊어지지 않고 백두산까지 이어져 있는지, 풍수지리설에 의한 추상의 개념은 아닌지, 태백산맥이 한반도의 등뼈가 아닌 백두대간에서 가지쳐 나간 낙동정맥이 확실한 지를 자기 발로 걸어서 확인해보고 싶어하는 산꾼들이 꼬리를 물고 종주를 나섰다. 그렇다면 고산자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대간과 정맥을 종주한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
95년 한 해 동안 본지 MM뉴스란에 소개된 종주팀은 23팀(정맥 종주 포함)이다. 종주자의 절반 정도가 본지에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적어도 40팀은 넘을 것이란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비과학적인 조사방법일 수도 자장 정확할 수도 있는, 강원도 갈천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구룡령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1년 내내) 아주머니는 1년에 50팀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종주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종주기간 동안 보통 3, 4팀은 만난다고 한다. 종주기간을 45일로 가정하고 5팀이 종주한다고 보면 대략 40팀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위의 수치를 조합해 볼 때 종주가 활성화 된 92년 이후 5년 동안 적어도 200팀이상이 종주를 했다는 결론이다. 이 글은 이 중 접수한 종주 보고서 44권을 토대로 분석했다.
종주 방식은 어떻게 변했나
백두대간 종주방식은 크게 대학 산악부 종주 - 일반 산악회 종주 - 단독 종주 - 구간 종주 - 안내 종주의 형식으로 바뀌어 왔다. 백두대간이 산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후 실제 종주를 통해 이를 확인하는 작업에 대학산악부가 백두대간 종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름, 겨울 방학이 있어 오랜 시간 동안 산행을 하더라도 별 지장을 받지 않고, 새로운 것에 민감한 청년 정신이 주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한국대학산악연맹은 88년 7월 2일부터 9일까지 백두대간을 15구간으로 나누어 동시다발로 49명이 종주를 했다. 이 때 백두대간 개념이 전국대학산악부로 확산되었고 백두 대간 종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대학산악부의 종주는 주로 방학을 이용, 지원조를 둔 전구간 종주자 2, 3명과 구간별로 한 두명씩 지원 산행(89년 충북대산악부)을 하거나 5, 6명이 전구간을 종주하는 형태 (90년 강릉대산악부)가 일반적이었다. 지원대를 둔 종주 등반은 지금도 가장 많이 행해지는 방식이다.
대학산악부에 의해 불이 당겨진 종주 등반은 91녀도부터 일반 산악회로 퍼져 나갔다. 일반 산악회의 종주 등반은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어 일시 휴직을 하거나 아예 직장을 때려치고 종주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둘이나 셋이 팀을 나눠하던 종주방식에서 산악회에서 후원하는 단독종주나 아예 함께 할 사람이 없어 단독으로 종주하는 방식도 있었다. 종주 등반과 함께 구간종주 방식이 94년도부터 일반 산악회나 개인 종주자들에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무박 2일로 산행을 하고 돌아와 다음 날 출근하는 경우나 집단 휴가를 받아 해마다 구간종주를 하는 경우도 있다.
백두대간 종주 경험이 축적되면서 95년부터 안내종주도 성행하기 시작했다. 안내종주는 개인의 능력으론 종주가 어렵고 산행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반인들도 참가할 수 있어 전문산악인이 아닌 경우에도 종주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등반대장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 만다는 비판도 있다. 이 밖에 지원 종주, 식량을 준비하지 않고 생식으로만 종주, 정맥과 대간을 연결해서 종주(호남, 금남호남, 백두대간 연결 종주) 등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었다.
종주 목적은 무엇일까
백두대간을 종주한 사람들의 일관된 이야기는 우리 산줄기에 대한 애정이다.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던 우리 산줄기를 직접 걸어본다는 데서 숭고한 애국심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한다. 이 숭고한 애국심은 종주를 하면서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승화되어 이북의 백두대간을 종주할 수 있는 그 날을 기원하게 된다. 이 외에도 장기 등반을 통한 등반능력 향상, 해외 원정을 위한 후련 등반,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에 간다는 모험심(안내종주에 참가하는 동호인들의 경우), 기타 개인적인 고민을 해결하려 가는 경우 등 다양한 목적으로 종주가 이루어 지고 있다.
얼마나 걸렸나
백두대간 종주는 종주 방식에 따라 30일에서 10년까지 걸린다. 무지원 단독 종주자의 경우 34일 걸려 종주를 마친 이도 있다. 산나물과 약초로 끼니를 때우는 생식을 하며 종주를 해 기간을 줄였다. 동계종주를 빼놓고 여섯 번 지원을 받는다고 가정할 때 대부분 45일에서 55일 정도 걸린 것으로 나타났다. 동계종주의 경우는 대략 60일에서 70일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해 적설량이 얼마나 되는가가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다.
구간 종주의 경우 한 달에 몇 번 산행을 하는가와 매 번 산행 시 얼만큼 가는가가 종주 기간을 결정한다. 산행 횟수는 보통 40회에서 60회까지 다양하면 기간은 1년에서 3년까지 다양하다.
어느 계절이 가장 힘드나
계절별로 대간과 정맥 종주 팀을 살펴보면 봄 10팀, 여름 21팀, 가을 2팀, 겨울 13팀으로 나타났다. 종주자들은 여름이 가장 종주하기 어렵고 봄이 가장 편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에 종주한 팀이 유난히 많은 것은 여름 방학을 이용해 종주에 나선 대학산악부팀이 많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면 추운 날씨, 폭설, 종주 기간이 길어 겨울이 가장 힘들 것 같지만 오히려 여름보다 쉽다고 한다. 그 이유는 숲이 우거지지 않아 시야가 트여 길을 잃을 염려가 없고,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설산을 만끽할 수 있고, 등반 성취도가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름은 뜨거운 날씨, 정글에서 길찾기의 어려움, 모기나 뱀 등의 공격이 있어 가장 힘들다고 한다. 물만 신경을 쓰면 되는 봄, 가을이 종주하기에 가장 편한 계절이다. 그러나 두 달 정도 종주를 하다보면 계절이 한 번은 바뀐다고 한다.
지원 장소
지원대를 두고 종주를 하는 경우 일주일 단위로 적게는 4번, 많게는 8번 정도의 지원을 받았다. 지원을 받은 장소로는 교통편이 편리한 고개가 많았다.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종주를 하는 경우 대표적인 지원 장소는 육십령, 추풍령, 큰재, 화령재, 불란치재, 이화령, 죽령, 화방재, 피재, 백복령, 삽당령, 대관령, 진고개, 구룡령, 한계령 등이다. 그러나 운행 계획을 세울 때 큰 고개를 중심으로 잡아 놓았다 하더라도 종주하다 길을 잃어 헤매거나 하는 등의 사정으로 인해 지원장소가 바뀌기도 하고 약속한 날 지원장소에 가기 위해 구간을 빼먹는 경우도 종종 있다.
위험 구간
백두대간 종주는 산줄기를 따라 걷는 등반이 주가 되기 때문에 암벽 등반 기술이 필요하거나 목숨 내놓고 지나는 구간은 별로 없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여름철에는 별 어려움이 없이 갈 수 있었던 곳도 살얼음이 얼거나 눈이 쌓이면 위험한 구간이 된다. 종주자들이 뽑은 위험 구간은 육십령에서 장수덕유 사이, 추풍령 휴게소 지나 384봉(채석장이 마루금까지 훼손시켜 없던 절벽이 생겼다), 속리산 문장대에서 눌재, 대야산에서 불란치재, 은티재에서 희양산, 이화령에서 조령 3관문, 차갓재에서 황정산 정상, 망대암산에서 한계령, 마등령에서 황?봉 사이를 꼽는다. 동계에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는 보조 자일을 갖고 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종주자들은 말한다.
독도가 어려운 구간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가장 피곤하고 힘든 일이 산마루금을 찾아 가는 일이라고 한다.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산으로 가 있거나 계곡으로 빠지는 수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다시 돌아가야 하는 짜증스러움과 지원대가 있는 경우 지원날짜에 맞추느라 허둥대며 산행을 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구간을 빼먹기도 한다.
어떤 팀은 보고서에 1. 출발 전 지도 확인, 2. 산행 중 자기 위치 파악, 3. 내리막 길 조심, 4. 순간 느껴지는 이상 감각을 믿을 것, 5. 지도를 불신하지 말 것, 6. 자신의 독도 능력을 괴신하지 말 것 등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전 독도법을 기록해 놓았다.
종주자들이 꼽는 독도가 어려운 구간은 정령치 - 주촌마을 - 88고속도로 지리산 휴게소, 황악산에서 궤방령, 추풍령에서 화령재, 속리산 문장대에서 눌재, 피재에서 덕항산, 삽당령에서 닭목재다. 이 외에도 순간적으로 방심하면 딴 길로 빠지기 쉽상인 곳을 하루에 한 두 번은 만나게 되고 종주를 하다보면 산줄기를 찾아내는 감이 생긴다고 한다.
무엇이 제일 필요한가
종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 아무리 좋은 장비를 갖추었다하더라도 등반 능력이나 팀웍이 무너지면 완주를 하기란 상당히 힘들다. 종주자들이 꼽은 것을 보면, '풍부한 산행 경력', ' 50일 이상을 버텨낼 수 있는 체력', '외로움을 이길 수 있는 인내심', '주말 휴식의 유혹을 뿌리치고 산행지까지 이동할 수 있는 자기 강제성' 등이다.
지원대를 둔 종주팀의 경우 지원대와 헤어지는 순간을 가장 힘든 순간으로 뽑았고, 독도에 실패해 되돌아가야 할 때나, 더위, 추위, 물, 배고품 등이 하산을 유혹하는 손길들이라고 한다.
식량은 무얼 가져갔나
어떤 이는 식량 조건으로 입맛에 맞을 것, 가벼울 것, 영양가가 높을 것, 변하지 않을 것, 포장이 쉬울 것이라고 보고서에 명시했다. 각 산악회마다 배고픔을 달래는 방법이 있었다. 어떤 팀은 간식으로 사탕, 땅콩, 초코파이, 건바나나, 건포도를, 어떤 경우는 비싸더라도 고칼로리 식량으로, 어떤 이는 매 끼니 식량을 개별 포장해 더 먹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어떤 팀은 45일 간의 식량을 지고가 철저하게 가벼운 것을 택했고, 간식은 무조건 산에서 캔 더덕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쌀은 전혀 가져가지 않고 빵만으로 연명했으나 일주일이 지나자 구역질이나 한 끼를 떡라면으로 바꿨고 곶감이 가장 좋은 간식이었다고 한다. 어떤 팀은 식수를 구하기가 어려우면 사각 플라이를 나무 아래 쳐놓고 나무의 이슬을 털어서 식수로 사용했고, 어떤 이는 설탕과 식초를 물에 타서 마시면 갈증 해소에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고 비법을 소개했다. 반찬으로는 대부분 젓갈류를 가져갔고 김치가 있으면 좋지만 무게 때문에 가져 갈 수는 없었다고 한다.
장비는 무얼 가져갔나
장비의 원칙은 '무조건 부피를 줄여라'와 망가지고 찢어진다는 전제아래 '비싼 것보다 싸고 부담없는 것을 사용하라'였다. 김장용 비늘을 배낭 안에 넣으면 방수가 확실하다. 키가 높은 배낭은 피하고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는 방수에 철저히 신경을 써야 한다. 독도를 할 수 없는 곳에서 고도계(오차주의)가 현재의 위치를 찾는데 유용하며 동계엔 고글을 반드시 챙겨야 설맹을 예방할 수 있다. 단체일 경우 호르라기를 준비하면 서로간의 위치를 찾는데 유용하게 쓰이고 의복은 야영할 때 입는 옷과 운행복 두 가지만 가져간 경우도 있다.
종주자들은 가져간 의약품을 대부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사고가 일어날 수 있으므로 반드시 가져가야 한다고 한다. 어떤 팀은 의약품 방수에 특히 신경을 쓰고 알약은 필름통에 넣어 이름을 표기해 두면 좋다고 한다. 더러운 물을 먹을 때가 많아 배탈약은 필수며, 찰과상 등 작은 상처에 유용한 마데카솔, 근육을 푸는 맨소래담 로션 등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어떤 팀은 텐트안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털고 들어가야 진드기에게 피를 빨리는 아픔이 없다고 하며 여름에도 감기 몸살이 올 수 있어 감기약과 식중독에 대비해 지사제를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 특히 땀띠나 사타구니 쓸림에는 아기 엉덩이 진무르지 말라고 바르는 파우다와 여성용 팬티스타킹을 잘라입으면 그만이라고 한다. 화상 치료제나 소화제, 진통제(치통)가 사용된 경우도 있었고, 몸 상태가 안좋을 때 우황청심원을 먹으면 바로 효과를 봐 펄펄난 경우도 있었다 한다. 이 밖에도 압박 붕대와 1회용 반창고, 소독약과 빨간약은 필수, 영양제는 선택 사항이라 한다.
종주 어떻게 변해야 하나
종주자들은 이제 산줄기의 실체 확인 작업은 의미가 없다며 종주 형식의 다양화와 백두대간 이외의 정맥에 관심을 쏟아야 할 때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지역의 특성,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문화 등을 보다 깊이 있게 살펴보는 백두대간 인문지리를 탐구하는 종주를 해야된다'며 ' 백두대간의 마루금만 따라 가는 종주 방식은 변해야 한다' 고 말한다.
서양학과 전공의 어떤 이는 '산에 다니는 사람으로 마루금은 가능하면 정확하게 타야 한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대간자락에 사는 사람들을 보는 것들도 의미있는 일이며 그런 것들이 오히려 작품으로 승화된 것이 많았다.' 고 한다. 어떤 산악회는 백두대간 종주와 아울러 지역의 산줄기를 종주해 지역의 문화와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고자 노력했다. 부산의 어떤 산악회는 낙남정맥 주변의 향토 문화유적을 조사 소개했고, 대구의 어떤 산악회는 대간 상의 주요 고개의 유래와 전설 등을 기록하는 열의를 보였다.
월간 「사람과 산」1996년 3월호에서 정리 편집.
* 산경, 산맥, 산계로 용어를 정리하면...(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아래의 글은 <월간 산>에서 연재하고 있는 '백두대간대장정 7구간, 백학산 -역사지리'에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가 기고한 것입니다. 글을 읽으실 때 이 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에서 최교수는 현재까지 논란이 되어 온 산맥 개념의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고, 현행 지리학계에서 주장하는 산맥 개념을 산계로 재정립하여 산경, 산맥, 산계가 갖는 개념적 장점들을 살려 이 땅을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논의와 관련하여 참고 글로 올립니다.------------------------------------------------------------------
▲ 봉황산 아래의 신봉리 창안 마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반송이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하고 청정한 자태로 서 있다.
‘낮고 평평하여 살기에는 알맞으나 산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전통 산맥이란 외형적 산줄기 경로, 혹은 산의 풍수적 기맥 의미
추풍령에서 화령재에 이르는 구간은 국수봉(680m)과 백학산(615m)을 제외하고는 완만한 구릉성 산지가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계를 이루면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날줄이자 산경(山經)이다. 이 구간의 지형적 특성은 비산비야(非山非野), 혹은 야산(野山)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나지막한 등성이의 연속이다.
이와 관련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擇里誌)에서, ‘속리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맥이 화령과 추풍령이 되었는데, 시내와 산의 그윽한 경치가 있다. 모두 낮고 평평하여 시골 살기에는 알맞으나 산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맥은 화령에 이르러 몸을 추스르다가 급기야 봉황산(740m)으로 일단 한 번 솟구치고는 속리산(1,057m)이라는 백두대간의 큰 허리를 일으키게 된다.
이 구간의 산줄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산경(山經)이라는 개념을 역사지리적으로 고찰해볼 필요를 느낀다. 산경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흔히 산맥(mountain range)이라고 번역되는 학술적인 개념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며, 한국 사회에서 한반도의 산맥체계를 둘러싼 학계와 일반인들의 혼란은 서로 다른 개념이 산맥이라는 같은 용어로 혼용된 데에도 한 원인이 있다.
알다시피 산경이라는 말은 산경표(山經表)라는 조선 후기 신경준(1712-1781)의 저서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용어로서 말 뜻 그대로 산의 날줄, 다시 말해 산줄기의 종적인 계열, 혹은 경로를 말한다. 신경준은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로, 그는 이미 산수경(山水經)이라는 책을 편찬한 바 있다.
산경은 곧 분수계를 의미
산경(山經)이 있으면 마땅히 수경(水經)도 있을 터인즉, 다산 정약용의 대동수경(大東水經)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한강 이북 지방의 주요 하천의 계통과 이에 관련된 자연지리·역사·군사·정치·지역 등의 사실들을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산경이라는 개념은 형태적으로는 산과 산을 이어주는 능선의 날줄적인 계열이고, 이것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인식으로는 분수계(分水界)를 뜻한다.
그러면 산맥이라는 용어의 개념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던 ‘산맥’이라는 용어의 뜻과 근대 지형학적인 산맥이라는 번역어의 개념을 비교해 고찰해 보자. 전통적인 산맥이라는 말을 역사적으로 고증하여 보면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나타난다. 그 첫째는 산경과 같이 산줄기라는 뜻으로 사용됐으며, 또 하나는 산의 기맥이라는 뜻으로 풍수적인 인식체계에서 표현된 말이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제1권의 천지문 편에는 ‘선비산맥(鮮卑山脈)’이라는 소제목이 등장하는데, 그는 여기서 백두산에 이르는 ‘산의 줄기와 가지(枝幹)’를 설명하면서 산맥의 경로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18세기 중엽)의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도 각 지방에 이르는 산줄기의 경로를 기술하는 대목에서 ‘산맥’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이 두 가지 문헌에서 보자면 조선 후기에 산맥이라는 말은 산줄기의 경로, 혹은 지간(枝幹)이라는 뜻으로서, 산경이라는 용어와 유사하게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효종 2년 조의 기사를 보면 ‘파주에 은혈(銀穴)이 있다고 하니 관상감 제조가 지관을 데리고 가서 살피게 하여 산맥을 범하지 않으면 채취할 것을 청하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나온 산맥이라는 개념은 산의 기맥(氣脈)이라는 다분히 풍수적인 의미다. 따라서 전통적인 산맥 개념은 외형적인 산줄기 경로, 혹은 산의 풍수적 기맥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산줄기 개념을 산경, 산맥, 산계로 구분하자
그런데 문제는 현대에 들어와서 근대 서구 지형학의 ‘mountain range’ 개념이 산맥이라는 말로 번역되면서부터 생겨나게 된다. 왜냐 하면 여기서 말하는 산맥이라는 말은 ‘지반운동 또는 지질구조와 관련해 직선상으로 길게 형성된 산지’ 로서 그 개념적 기초가 전통적인 산맥 개념인 외형적 산줄기, 혹은 분수계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지형학적인 산맥 개념은 지질구조에 기초하고 있으며, 형태적으로는 다발 혹은 계열(系列)의 체계이고,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의 학술적 용어다. 이는 산경표와 같은 형태적이고 미시적이며 선적인 경로의 산줄기와는 차이가 난다.
금년 초 국토연구원이 전통적인 산줄기 개념의 산맥체계를 과학적으로 재정립한 연구 결과를 놓고 대한지리학회가 반박한 내용은 정확히 용어와 개념의 혼동이라는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다. 지리학회의 주장에 의하면, 산맥과 분수계(分水界)의 개념은 다르며, 분수계는 유역 분지를 구분하는 능선을 따라 선으로 표현되지만, 산맥은 여러 개의 산줄기가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넓은 폭을 가진 연맥(連脈)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나라 산맥은 한반도만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고, 중국, 연해주, 시베리아에 이르는 동북아시아의 장기간에 걸친 지반구조운동에 따른 광범위한 산맥체계의 일부라고 말했다.
산맥을 일반인들이나 산악계에서는 산줄기의 경로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 지형학계와 현행 교과서에는 지질구조적 개념으로 달리 쓰이고 있는 현실상의 괴리를 푸는 방법은 무엇일까? 문제의 실마리가 산맥이라는 용어의 혼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차라리 근대 지형학적인 산맥 개념은 ‘산계(山系)’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산지체계를 산경·산맥·산계의 세 측면으로 접근할 때 서로를 비교해 보면 산경이라는 용어는 외형적인 산줄기의 경로라는 뜻이 강하고, 산맥이라는 용어는 가시적인 산줄기와 풍수적인 산의 기맥이라는 양면이 내포되어 있으며, 산계라는 말은 지형학적으로 지질구조에 기초한 구조적인 산지체계라는 뜻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렇게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관점을 가질 때 우리는 한반도의 산을 훨씬 다양하고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민들의 생활과 인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산줄기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적인 독특한 풍수사상의 기맥이라는 통찰로 산을 이해할 수도 있고, 거기에다 근대과학의 합리적인 체계로 산지의 구조적인 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맥 논의는 어느 하나가 맞고 틀리다는 양자택일적이고 절대우위적인 논리가 아니라 다양성 있고 상호보완적으로 발전되어야 할 담론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각 측면의 의의를 살펴보자면, 산경이라는 개념은 지역적인 생활권이나 가시적인 산줄기의 체계를 파악하는 데 유리한 반면, 산맥이라는 개념은 산경이라는 개념에 풍수적인 기의 관점을 복합해 산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고, 학술용어로서의 mountain range(산맥)라는 개념은 한반도 전체의 거시적인 산줄기 구조와 체계를 이해하는 데 장점이 있다.
대동여지도에 실제 굵기에 비해 굵은 선으로 표기
이러한 논리로 추풍령에서 화령재에 이르는 산지를 적용시켜 보면 이 구간은 구릉성 산지의 연속이기 때문에 지형학적인 산맥(산계) 개념보다는 전통적인 산경 개념으로 설명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아도 이 구간은 실제적인 산줄기에 비해 굵은 선으로 강조되어 그려지고 있으니 대간 줄기라는 인문적 가치가 개입되어 표현된 것으로 해독할 수 있다.
역사지리적으로 이 지역은 추풍령에서 오도치 구간을 제외하고는 상주의 권역에 속할 뿐만 아니라 상주 서쪽을 종단하는 산지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신라에서 조선에 걸쳐 군사적 요충이자 영남의 대읍이었던 상주의 영향력과 문화적 파급력이 크게 미친 영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간을 형성하는 줄기를 기준으로 동쪽 사면은 상주읍과 인접할 뿐만 아니라 전면으로 비교적 넓은 평야를 확보하고 있어서 수많은 촌락이 형성되어 발달했고, 상주시 청리면의 체화당(華堂)이나 존애원(存愛院) 등 조선조 지배층의 역사유적이 많이 들어섰다. 특히 존애원은 상주의 위상을 잘 드러내주는 현장으로, 상주의 선비들이 존심애물(存心愛物)의 성리학적 가르침을 실천하는 뜻에서 1559년에 설립한 질병퇴치를 위한 사설 의료원이다.
상대적으로 대간 줄기의 서사면 권역은 산지로 에워싸인 좁은 분지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어서 동사면 권역에 비해 마을의 숫자도 적을 뿐더러 촌락의 발달은 더딘 편이었다. 성봉산과 재학산 사이의 골짜기인 공성면 효곡리에는 효곡재사(孝谷齋舍)가 있는데, 이곳은 우곡 송량(宋亮·1534-1618)의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추풍령에서 뻗어 올라가던 대간 줄기가 속리산으로 이어지기 전의 고개인 화령은 상주에 이르는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소재 노수신(盧守愼·1515-1590)의 고향이라고 택리지에는 적고 있다. 소재는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성리학뿐만 아니라 양명학, 불학, 시, 문장과 서도에도 일가를 이룬 분으로 알려져 있다.
화령이 속하는 화서면 면소재지에는 화령장이 지금도 3일과 8일에 선다. 또한 화령장 북쪽으로는 태봉산이라고 있는데, 여기는 연산군 왕자의 태실을 봉안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도 태실금표비(胎室禁標碑)가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보살입상이 현재 면소재지 입구의 국도변에 있는데, 이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여기가 상주로 이르는 주요 고갯마루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화령에서 속리산쪽으로 바라보면 봉황산이 수려한 자태로 산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다. 그 아래 신봉리 창안 마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반송이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하고 청정한 자태를 드러낸다. ‘사람은 나이가 더할수록 근심이 쌓이고, 백발만 늘어나는데 저 노송은 의연히 푸른 산빛을 더하고 있구나.’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월간 산> (2005.7)
_ 출처 : http://www.angangi.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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