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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한국의 고개22

진고개 진고개 (泥峴:960m)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병내리와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사이의 6번.59번 국도상에 있는 고갯마루이다. 백두대간의 동대산(1,436m)과 노인봉(1,338m)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진고개를 한자화해서 니현(泥峴)이라고 하는데, 『조선지도』와 『대동여지도』에는 이 한자식 지명이 나와 있다. 예전에 이 도로가 포장이 되기 전에 비만 오면 땅이 질어서 진고개란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또 다른 설은 '긴' 하는 강릉 사투리가 '진'이어서 남쪽 비탈이 9km, 북쪽 비탈이 11km여서 도합 50리의 '긴 고개'란 뜻에서 진고개라 했다고도 하는데 대관령의 보조역으로 개설된 도로이며, 강릉 이북의 해안지역에서는 이 길을 이용해 내륙으로 접근하는 것이 거리가 가깝다. 정상에는 산장과 휴게소가.. 2022. 5. 16.
정선 33개 고갯길 유래 정선 33개 고갯길 유래 고갯길 행정 구역 지명유래 및 특징 (1) 성마령 (星摩嶺) 정선군 정선읍 용탄3리 행마동 평창군 미탄면 - 성마령(星摩嶺)은 고개가 높아 별을 만질 수 있다 하여 붙여 진 이름이며, 성마령은 정선으로 드나드는 가장 큰길로서, 제천, 원주, 서울로 가기위해 누구나 필히 넘어야 했던 고개 였다. - 정상부에 올라오면 성마령 비가 서 있으며, 성마령의딤긴 뜻 을 전하고자 시인 구성단 선생의 시와 함께 세웠다고 함. - “아질 아질 성마령 야속하다 관음베류 지옥 같은 정선 읍 내 십년간들 어이가리 지옥 같은 이 정선을 누구따라 아 여 기 왔나!” 라는 1887년 오홍목군수 부인이 이 고개를 넘으 며 읊었다는 아라리 구절을 보더라도 이 고개가 얼마나 힘든 고개였는지 짐작케 함. (2) .. 2021. 5. 26.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영남대로(嶺南大路) 영남대로(嶺南大路) 문경새재는 옛 신라시대에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이 있던 곳이라고 「문경현지(聞慶縣誌)」에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태종 14년(1414년) 조령로(鳥嶺路:새재길)를 관도(官道)로 개통시켰으며, 그 전까지는 문경 관음리에서 충주 미륵리로 넘어가는 하늘재를 통하는 길을 이용하였으나 하늘재는 한참을 돌아서 한양을 가는 길로서 새재개통 이 후 조선조의 간선교통로는 한양에 결절하는 X자형 패턴을 기본 골격으로 삼고 있었다. 한양에서 서북지방으로 뻗은 도로를 '서로'라 하여 의주를 종착지로 정하였으며, 동북지방으로 향하는 도로는 '북로'라 하여 종점은 함경도의 서수라 정하였다. 충청도 서쪽을 지나 전라도로 연결되는 길은 소위 '삼남로'라 하였는데 강진을 종점으로 하였으나 여기에서 제주까지 뱃길로 .. 2015. 12. 4.
조령원(鳥嶺院)과 조령(鳥嶺) 조령원(鳥嶺院)과 조령(鳥嶺) 조령원은 흔히 새재로 잘 알려진 조령에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령산성 안의 제1관문에서 제2관문 사이에 있다. 조령은 '문경새재'라 하여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중요 교통로 상에 있는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태종 14년(1414)에 조령로를 관도(官道)로 개통시킴으로써 이 조령로는 교통로 및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그리하여 숙종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조령에는 이른바 초곡성(主屹關, 제1관문), 중성(鳥谷關, 제2관문), 조령산성(鳥嶺關, 제3관문)을 축조함으로써 관방(關防)으로서 뿐만 아니라 교통상의 요충지가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통행인을 위한 숙박 시설을 설립하였으니 조령원, 동화원, 요광원, 관음원, 화봉원이었다. 그 중 조령원은.. 2015. 10. 25.
새재가 새재인 까닭/문경새재 새재가 새재인 까닭/문경새재 새재는 왜 새재일까? 새재의 '새'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새'가 어떤 의미를 갖느냐에 따라서 새재의 의미는 달라진다. 어떤 이는 조(鳥)를 뜻한다 하고 어떤 이는 초(草)를 뜻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신(新)을 뜻한다 하고 어떤 이는 간(間)을 뜻한다고 한다. 모두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날아다니는 새와 문경새재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새재를 한자로 표기하면 조령(鳥嶺)이다. 조령은 '새들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에서 붙였다고 한다. 문헌에 조령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531년(중종 26)에 완성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의 『문경현 산천조』에는 "조령은 현의 서쪽 27리, 연풍현의 경계에 있는데 초점이라고도 부른다(鳥嶺 在縣西二十七里 延.. 2015. 10. 17.
화령재 지난 겨울에는 눈이 많더니 올봄에는 비가 잦다. 곡우가 가까워지면서 봄비는 청명 한식에 피어 번성했던 꽃잎을 털어내고 땅위의 모든 가지마다 파릇파릇한 새싹을 틔워낸다. 꽃 필 무렵의 산천보다는 아무래도 잎날 무렵의 강산이 좋다. 사람에게도 때로 는 꽃으로 피어 화려했던 날들 잠시 지나가고 온몸에 새잎 돋우어 다시 먼 길로 삶의 행차에 눈뜨는 나이가 있다. 꽃이 진 자리의 추억을 무성한 초록의 잎새가 덮어 햇볕과 뿌리의 섭리를 따라 쉴새없이 더운 숨을 토해낸다. 살아가기 위하여, 생산의 진통과 노역을 일과로 어르면서 무릇 그 시절에 이르러 비로소 한 목숨이 된다. 봄비 속에 길을 떠나 보은으로 갔다. 보은의 신라적 이름은 ‘삼년산(三年山)’이다. 고려에는 ‘보령(保齡, 保令)’이라 부르다가 지금의 이름을 .. 2015. 10. 11.
밀재, 불란치재, 버리미기재 밀재, 불란치재, 버리미기재 고모치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대야산 양쪽으로 각각 걸려있는 고개로 밀재와 불란치재, 그리고 버리미기재가 있다. 밀재는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서 용추계곡을 통하여 오르는 등산로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농바위에서 오르는 등산로가 만나는 곳이며, 밀재의 어원은 버리미기재와 같다. ※ 밀재 - 사진의 좌측이 충북 괴산군 청천면 방향, 우측은 가은읍 완장리 용추계곡, 직진은 대야산 방향임. 불란치재는 '불이 났던 고개'라는 뜻으로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와 충북 청천면 관평리를 이어주던 옛길로서 불란치재는 촛대봉과 곰넘이봉 사이에 지금도 뚜렷한 옛길의 흔적이 남아있다. ※ 불란치재 버리미기재는 불란치재의 역할을 넘겨받아 새로 닦은 2차선 포장도로로서 그 이름은 '벌의 목 고개'라는 뜻.. 2013. 11. 20.
갓바위재와 고모치 갓바위재는 백두대간의 청화산과 조항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고 고모치는 조항산과 대야산 사이에 걸려 있는 고개이다. 이 두 고갯길은 높게 가로막힌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에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를 오가던 고개들이다. ※ 갓바위재 충북 지역인 삼송리 역시 본래는 문경군 가은면에 속했던 마을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문경군 농암면이 되었다가 1962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으로 편입되었는데 삼송리에서 농암면 소재지까지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어 오가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던것 같다. 갓바위재와 고모치는 삼송리가 충북으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궁기리를 경유해서 농암면으로 이어지던 통행로였으며, 그 당시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였던 통행로는 고모치였다. 농암면 궁기리는 견훤의 출생지로 알려진.. 2013. 11. 15.
문경새재와 백두대간 주변 고개들 문경새재와 백두대간 주변 고개들 하늘재는 계립령으로서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阿達羅)왕이 재위 3년(156년)에 북진을 위해 길을 열었으며, 아달라왕(阿達羅) 5년(158년)에 개통된 죽령보다도 2년 먼저 개통된 하늘재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뻗어나갈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로서 신라는 일찍이 하늘재를 교두보로 한강으로 진출하였고,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했다. 조선 태종14년(1414년)에 개통된 문경새재는 이화령이 개설(1925년)되기 전까지 500여년을 사용하였던 유교문화의 성격을 지닌 고개로서 죽령보다 2년 앞서 개설된 불교문화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하늘재(156년)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는 고개이며, 기록에 그다지 남아 전해.. 2013. 1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