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 침묵하는 시대, 님을 부르다. 만해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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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과 그의 시대
한국의 3월은 외침으로 시작된다.
1919년 3월 1일. 나라를 빼앗긴 한민족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리는 만세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4월까지 일어난 1214건의 만세 운동에 참가한 110만 명 중 2만명이 넘는
이가 죽거나 다쳤고, 4만 7천명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자 좌절감이 한민족 사이에
급격히 번졌는데, 이런 상황에서 희망을 불어 넣은 이가 있다.
님은 갔습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민족혼을 담은 시, <님의 침묵>을 통해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한 만해 한용운. 님이 침묵하는
일제 강점기. 님의 소리를 따라 승려로, 시인으로, 독립운동가로 올곧게 살아간 한용운의 삶을 따라가 보자.
불교에 귀의하다만해의 님을 찾아 떠나는 길은 백담사에서 시작된다. 강원도 내설악에 자리한 천년 고찰, 백담사는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태어나 ‘유천’이란 이름으로 스물 여섯 해를 살아온 만해가 ‘용운’이라는 법명을 받고 새롭게 태어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용운은 국운이 기울어 가던 시기, 갑오동학농민운동에 뛰어들고 을미의병에도 참가해 국권회복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1905년,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불자의 길로 들어섰는데, 중생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관세음보살과 지혜의 광명으로 중생을 널리 비추어 끝없는 힘을 준다는 대세지보살을 모신 백담사에서 나라와 민족의 앞날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했던 만해는 1913년 실천적 지침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을 펴내며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했고, 1918년에는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해 수많은 이들의 정신을 깨웠다.
그렇게 승려를 넘어 온 몸으로 붓을 갈아 혼불을 밝힌 만해는 1919년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독립의 불을 밝히다
불교계를 대표해 불교측 인사들의 뜻을 모은 한용운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 대표들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했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 팔각정 단상에는 태극기가 내걸리고 군중들은 뜨거운 목소리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지만 민족 대표들은 일제에 즉시 체포됐고, 한용운은 민족 대표 33인중 가장 많은 7년의 형량을 언도받고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일제가 유독 만해에게 혹독했던 이유는 굽힘없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만해는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흔들림이 없었고,
민족 대표로 참가한 것에 대해 참회서를 쓰라는 일제의 요구에
'우리의 독립은 산 위에서 굴러 내려오는 둥근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 굴러가는
힘이 멈추지 않을 것이니, 대한 독립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자술서가 아닌 독립의 의지가 담긴
글을 건네 오히려 일본인을 숙연하게 했다.
시로 님을 노래하다
1922년, 3년간의 옥살이를 마친 뒤 석방된 만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1926년, 세상을 오가며 3?1 운동에 앞장서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며 얻은 강렬한 깨달음을
시집 <님의 침묵>에 담아 지금 온갖 고난을 겪고 있지만 이 시련을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독립을 맞이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승려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시인으로서 다채로운 삶을 살았지만, ‘님’을 향한 마음은 한결같았던
만해는 이 후 지금의 성북동 집터인 ‘심우장(尋牛莊)’에 머물며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전개하다 1944년, 감옥에 있는 애국 지사들을 생각해
한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은 채 살았던 심우장의 냉돌 위에서 입적했는데, 만해는 우리 곁에 없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믿고 사랑한다면 이별 또한 만남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한국인의 가슴을 치며
지금도 시대가 어둡고, 삶이 힘겨울 때마다 만해의 시를 읊으니...만해가 그리워한 님은 참된 희망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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