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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역사속으로

조선의 개혁가, 조광조

by 범여(梵如) 2012. 4. 19.

 

조선의 개혁가, 조광조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한다

지난 해부터 한국 서점가에 특이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지난 해 5월 출간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인문서로는 이례적으로 출간 11개월 만에 100만 부를 넘어섰고, 지금도 독자들의 폭넓은 관심을 받고 있다.

쫓기듯 삶을 살아가며 작고, 옹색해지고, 팍팍해진 현대인들이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케 하는 이 책을 통해 바른 삶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인데 한국의 이름난 역사 인물 중 ‘정의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당당하게 답할 수 있는 이중 하나는 단연 조광조(趙光祖)일 것이다.

난세, 바른 조선을 꿈꾸다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의 비리에 분노하고 도전하며 직언하는 이들이 존재해 왔다.
한국의 역사에서는 정암(靜庵) 조광조가 그러한 인물이었다.

1482년(성종 13년) 사헌부 감찰을 지낸 조원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조광조는 17세가 되던 해, 어천(평안북도 영변)의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1498년(연산군 4년)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입은 사건】로 인근에 유배되어 있던 김굉필(金宏弼)을 만나게 된다.

사실 조광조가 살던 시대는 성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연산군이 학정을 일삼자 폭군을 왕위에서 내쫓기 위하여 신하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반정(反正)을 내세운 정변이 성공해 새로운 왕(중종)이 권좌에 올랐지만 개혁의 주체였던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이 결국 기득권에 안주하는 등 명분을 목숨처럼 여기는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내세운 나라, 조선이 뿌리째 흔들리던 시기였다.

이러한 난세(亂世)에 강직한 성품의 김굉필을 만나 학문을 사사받은 조광조는 땅에 떨어진 유교 질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온 삶을 걸게 된다.

철인군주론’ 추구하며 유교적 이상 국가 꿈꿔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급제하며 벼슬길에 오른 조광조는 전적ㆍ감찰을 지내다 홍문관 시절, 왕 앞에 나아가 학문을 강의하면서 중종의 신임을 얻게 된다.

연산군 대의 잘못된 정치 관행과 권력형 비리를 개혁하려던 중종은 ‘세상에 근본이 되는 道(도)와 마음은 하나이며 마음의 도가 곧고 굳은 곳에 설 수 있으면 마침내 정치의 실효를 거둘 수 있다’는 조광조의 도학(道學)정치에서 새로운 조선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중종의 신뢰를 얻은 조광조는 기존 훈구 세력의 부패와 비리를 공격하는 한편, 유교적인 도덕을 지방까지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향약(鄕約)을 실시했으며 미신 타파에도 앞장 서 도교 제사를 주관해 온 소격서(昭格署)를 철폐시켰다.

특히 1519년(중종 14년)에는 학문과 덕을 고루 갖춘 사람을 뽑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해 새로운 선비들을 본격적으로 조정에 진출시켰다.

이 과정에서 조광조를 필두로 하는 새로운 선비의 세력은 날로 커 갔고, 기존에 조정을 장악했던 훈구 세력과의 갈등은 깊어만 갔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은 커다란 파문을 몰고 왔다.

원칙과 질서를 지킴에 한 치의 물러섬도 없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한 중종은 반정 참가자 103명을 정국 공신으로 봉했었다.
이에 조광조는 부당하게 공신으로 책정된 사람이 있다고 왕에게 건의했고, 결국 1519년, 76명이 공신 칭호와 지위를 잃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원한을 품은 훈구세력은 남곤ㆍ심정ㆍ홍경주를 중심으로 대궐 후원에 있는 나뭇가지 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글을 꿀로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해 왕의 눈에 띄게 하는 계략을 꾸며
조광조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설상가상으로 1515년부터 4년 동안 개혁 상소를 300번이나 올리는 등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 주장에 염증을 느끼던 중종이 훈구파의 손을 드니 능주(전라남도 화순군)로 유배 갔던 조광조는 기묘년(1591년), 사약을 받고 숨졌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존경하던 유생과 선비는 물론 백성들도 목놓아 울며 나라를 걱정했다.
조광조는 빠르게 당대의 변화를 추구하였으나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참된 정의를 강조한 바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를 앞선다는 것은 결국 당대 사회의 대세와 충돌하게 되니 율곡 이이는 조광조를 두고 "하늘이 그의 이상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어찌 그와 같은 사람을 내었을까?"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오늘날도 조광조의 삶을 통해 어떤 것이 바람직한 인간의 길이고 가치 있는 삶의 길인가를 묻는 이들이 많으니, 양보와 타협을 모르는 올곧은 성품으로 개혁정치를 펼치려 한 조광조.
그는 우리에게 진정한 물음을 던지는 깨어있는 지성이다.

 

/KBS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