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경주 최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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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랑의 표본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2월.
한국에서도 어려운 이웃들의 겨울을 따뜻하게 녹여줄 나눔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딸랑~ 딸랑~”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많은 시민들이 빨간 냄비에 정성을 보태고 여러 모금기관에서 벌이고 있는 이웃돕기행사에도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는데 어려운 때일수록 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나누며 살아온 한국인.
그 중에서도 아낌없는 나눔으로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은 가문이 있다.
진정한 부자의 길을 제시한 최국선
신라가 자랑하는 천재, 최치원의 후손으로 명문가로 꼽혔던 경주 최씨 가문은 병자호란의 영웅인 최진립(崔震立) 장군을 배출하며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경주 최씨 가문이 온 나라의 존경을 받은 것은 최치원의 19세손, 최국선(崔國瑄)대의 일로 개간사업으로 부(富)를 축적한 아버지 최동량(崔東亮)에 이어 집안을 이끌게 된 최국선은 성실함과 노력, 근검과 절약으로 만석꾼의 반열에 이르자 더 이상 재산을 늘리지 않고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특히 1671년 현종 3년에 큰 흉년이 들자 최국선은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고, 곳간을 헐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만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어려운 이웃에 대한 아낌없는 후원을 명하니, 이 날부터 최씨 가문의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이 끓었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에서는 최 부잣집만 찾아가면 살길이 열렸던 것이다.
그렇게 나눔으로 삶의 희망을 얻은 사람들을 보면서 최국선은 집안을 다스리는 지침인 '육훈(六訓)'을 만들었다.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만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 마라.
과객(過客)은 후히 대접하라.
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가문의 명성이나 자신의 영예를 위해 높은 벼슬자리에 나아가기 보다는 낮은 자리에서 이웃들과 함께 살며 세상을 돌보라는 뜻을 가훈으로 새긴 것인데 '깨끗한 부(富)'의 길을 제시한 최국선은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나눔을 실천했다.
임종 때 아들을 불러 서랍에 있던 빚 문서를 가져오게 해 토지나 가옥 문서는 주인에게 돌려주고, 돈을 빌려준 차용증서는 불태워 버린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사람의 도리, 부자의 도리를 실천한 최국선의 유언이 알려지면서 최씨 집안에는 소작인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니 생산성은 절로 높아져 최씨 가문은 3천석에 이르는 1년 쌀 생산량 중 1천 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 석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면서도 3백여 년간 12대에 걸쳐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스스로 만석꾼의 지위를 반납하다.
그렇지만 만석꾼의 명성은 20세기 끝이 났다.
만석의 재산을 모두 소진한 사람은 마지막 최부자, 최준(崔浚)으로 최익현, 손병희, 김성수, 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교류한 최준은 전답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가면서까지 독립자금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자금만으로는 한계가 있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해 상해 임시정부로 군자금을 보냈는데, 10년 만에 부채가 130만엔, 당시 기준으로 쌀 3만 석에 해당되는 돈을 잃고 일제에 이 사실이 알려져 모진 고문도 당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던 최준은 광복 후에는 남은 재산을 대학설립에 쏟아 부으니 후손들에게는 물려줄 돈도, 전답도 없었다.
하지만 진정한 명문가, 최씨 집안의 후예답게 이들은 광복 이후에도 건국훈장조차 신청하지 않은 조상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나눔의 마음이 가장 큰 재산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오늘을 사는 이에게 참다운 사회 지도층의 길을 보여준 최부자집.
스스로 만석꾼의 지위를 반납했지만 지금도 우리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최고의 명문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경주 최부자집이라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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