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역사속으로

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 세상으로 향하는 길을 열다

by 범여(梵如) 2012. 5. 30.

 

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 세상으로 향하는 길을 열다

 

 

 

 

길은 어떻게 여는가?
중국을 대표하는 문학가, 루신은 ‘길은 원래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이 먼저 걸어갔던 곳을 다른 사람들도 계속 걸어가면 어느덧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이 된다는 것인데, 한국 최초의 세계인으로 불리는 신라의 고승, 혜초는 그렇게 1,300년 전! 세상으로 향하는 길을 연 사람이다.

불교의 본고장으로 나는 가리라
8세기 통일 신라의 승려로 704년 태어난 혜초는 어린 나이에 중국 광저우(廣州)에 건너가 719년 천축(인도)에서 온 밀교승,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남인도 출신으로 중국 밀교의 초조(初祖)가 된 금강지의 문하에서 경전을 연구하던 혜초는 훗날(774년), 당나라 대종 황제의 칙령을 받아 기우제를 지내니, 그의 높은 학문과 명성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불법에 매진하던 혜초가 ‘떠날 때는 100명이나 돌아온 자는 한 명도 없다’는 천축여행길의 장도에 오른 것은 723년경으로 추정된다.

천축에서 중국으로 온 스승의 길을 되짚으며 불법(佛法)을 온 몸으로 구하려한 혜초는 광저우를 떠나 뱃길로 동천축에 도착한 후 온갖 간난신고를 이겨내면서 4년간 인도를 비롯한 서역의 여러 지역을 살펴보고 당나라에 돌아온다.
그리고 낯선 이역 땅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여행기로 엮어내니, 그 책이 바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오도릭의 <동유기>, 이븐바투타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와 함께 세계 4대 여행기로 꼽히는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1200년 전 장대한 실크로드를 쉼없이 걸었던 혜초의 기록 <왕오천축국전>
세계 4대 여행기 중 가장 오래된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은 사실 227행 6,000여 자의 한자, 요즘 책 크기에 맞추면 10쪽 남짓한 양이다.
그나마 형체를 알 수 없이 마모된 글자가 160여 자나 된다. 1908년 중국 둔황(敦煌)을 탐험하던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aul Pelliot)가 석굴 속에서 발견한 책자는 저자도, 서명도 알 수 없이 앞뒤가 잘려나갔지만 그 안에는 723년 중국 광저우를 떠나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727년 실크로드 톈산북로의 쿠차로 돌아왔던 혜초의 발자취가 담겨 있었다.

물론 지금 남아있는 여행기는 원본이 아니라, 3권짜리 원본을 간추린 절략본의 사본이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절략본의 앞뒤(1권 전부와 3권의 뒷부분)만 잘려나가고 핵심 부분은 남아있어 여행기의 주요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데, 나라에 따라 기술한 내용이나 분량은 다르지만, 대체로 출발지에서 목적지로 가는 방향과 소요시간, 위치와 규모는 물론 통치 상황과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하여지고 있는지, 또 음식, 의상, 풍습, 산물, 기후 등은 어떠했는지를 순차적으로 기술한 <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8세기 경 인도 풍경을 소략하게나마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실제로 <왕오천축국전>을 읽다보면 동천축 상륙 후, 석가의 열반처와 녹야원 등에 있는 4대 성탑을 순례하고 중천축에 이르러 급고원탑 등 4대 영탑을 둘러보는 모습.... 3개월간 걸어서 남천축(현 데칸고원 지방)에 갔다가 다시 3개월간의 발섭(跋涉:길을 감) 끝에 서천축을 지나 북천축의 수도, 잘란다라에 당도하는 혜초의 긴 여정과 더불어 당시 서역 요충지인 토화라(吐火羅: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 얼마간 머물다 실로 모험의 길일 수밖에 없는 생소한 이슬람 세계로의 서행을 택해 한 달 열흘 만에 대식(大食: 아랍) 치하의 페르시아 땅, 니샤푸르에 종착하는 모험기가 그윽하게 펼쳐진다.

그래서일까? 한 번 책을 잡으면 쉽게 놓을 수 없는 <왕오천축국전>은 다시 토화라를 거쳐 험준한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 당의 안서도호부가 자리잡고 있는 구자(현 쿠차)에 도착할 때까지
글 읽는 이를 계속 길로 인도한다.


또한 혜초는

 ‘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 / 땅 한 모서리 서쪽은 남의 나라 /

남천축 해 떠도 기러기 한 마리 없어 / 누가 내 집으로 돌아가리’


길 곳곳에 5언시를 남기며 이국 풍물을 서정적으로 멋지게 그려내니 8세기, 간결하고 단정한

문장으로 단 6,000자 안에 무려 40여 개의 나라를 담아낸 <왕오천축국전>은 놀랍고 광대하고 아름답다.

맨발의 구도자, 혜초
때문에 해로로 약 9000㎞, 육로로는 약 1만1000㎞에 이르는 4년간의 대장정은 단순한 활자의 엮음을 넘어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고고학적, 인류학적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한국의 첫 세계인이자 문명교류의 선구자였던 혜초는 787년, 83세로 열반할 때까지 신라에

돌아오지 못하고 당나라에서 일생을 마치니 그는 진정 길 위에서 생을 마친 맨발의 구도자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