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마음, 시의 생각 / 태고 보우선사
春山無伴獨尋幽 [춘산무반독심유]
挾路桃化親杖頭 [협로도화친장두]
一宿上雲疏雨夜 [일숙상운소우야]
禪心詩想兩悠悠 [선심시상양유유]
친구 없이 봄 산 깊숙히 찾으니
길 가의 복사꽃 지팡이에 스치다
부슬비 내리는 상운암의 밤
선의 마음, 시 생각 아슬하구나
이 시는 조선조 중엽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대사의 시이다.
시의 제목은 ‘상운암에서 자다(宿上雲庵)’이다.
암자라하면 조용한 인상부터 갖는 것이 상식이다.
동행도 없다. 창 밖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길 가에 널려 있는 꽃 잎은 지팡이 끝에서 날린다.
주변의 모든 경관이 길을 걷는 나와 함께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저 나일 수 밖에 없고 홀로라는 단어가 어울리도록 혼자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떠 오르는 것이 시상이다.
한 편의 시를 쓰지 않고는 이 외로움을 달랠 수가 없다.
누구에게 보이려는 시가 아니다. 그저 아득한 생각에 솟아나는 마음의 표현이다.
이것이 시요, 이것이 선이다. 문자를 빌려야만이 표현이 가능한 시가 문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선과 어떻게 같은 궤도에 올려 놓을 수 있는 것일까.
스님도 이 시에 선심과 시상이 다 같이 아득하다 하여 그 유원한 멋을 함께 하고 있으니,
서로 처지가 분명 다름에도 불구하고, 반면 같은 자리에서 만날 수가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선이나 시가 모두 깨달음이라는 하나의 선행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곧 깨닫기까지는 시에서 선의 방법을 구해 오는 것이고, 깨닫고 나서는 선이 시에서 표현 방법을 빌려 오는 셈이다.
즉, 말을 거부해야 하는 선의 오묘한 깨달음에서도 끝내 시적 축약된 언어를 빌려와야 한다.
이때 깨달음에서의 상상인 선상이나 시상의 표현에 가장 적절한 것이 시어이다. 그
러므로 선이나 시는 조화롭지 않은 듯하면서도 조화롭고, 논리가 없는 듯하면서도
논리가 있고 목적이 없는 것 같으면서 목적에 들어 맞는다.
이는 삼라만상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것과 같다.
◈ 태고 보우太古普愚(1301∼1382)선사 ◈
고려 말의 고승. 성은 홍씨.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 홍주(洪州)출신.
아버지는 홍연(洪延), 어머니는 정씨이며, 해가 품에 들어오는 태몽이 있었다.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檜巖寺) 광지(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얼마 뒤 가지산(迦智山)으로 가서 수행하였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話頭)를 혼자서 참구하였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였다.
그뒤 불경을 열람하면서 깊이 연구하였으나, 불경의 연구가 수단일 뿐, 진정한 수행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
닫고 선수행(禪修行)에 몰두하였다. 1333년(충숙왕 복위 2) 가을에는 성서감로암(甘露庵)에서 죽기를
결심하고 7일동안 정진 홀연히 깨친 바가 있었다.
1337년 가을에는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모두가 다 사라져 버리면
그것을 부동(不動)이라고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모든 지해(知解)를 타파하였다.
그뒤 송도의 전단원(檀園)에서 조주(趙州)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였으며,
1338년 1월 7일에 대오(大悟)하였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는 중흥사(重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창건하여 5년 동안 머물렀다.
이때 중국 영가대사(永嘉大師)의 <증도가(證道歌)>를 본떠서 유명한 <태고암가> 1편을 지었다
1348년에 귀국하여 중흥사에 머물렀으며, 도를 더욱 깊이 하고자 미원의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4년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보임(保任)하였다 이때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짓기도 하였다.
1363년에 신돈(辛旽)이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불법을 해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므로,
보우는 "나라가 다스려지려면 진승(眞僧)이 그 뜻을 얻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납니다.
왕께서 살피시고 그를 멀리하시면 국가의 큰 다행이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신돈의 횡포가 더욱 심하여졌으므 왕사의 인장을 반납하고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가서 머물렀다.
1368년 여름 신돈의 참언으로 속리산에 금고(禁錮)되었는데, 이듬해 3월 왕이 이를 뉘우치고 다시
소설산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1371년(우왕 7) 겨울에 양산사(陽山寺)로 옮겼는데, 부임하던 날에
우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였다. <태고집(太古集)>에는 그의 사상과 경지를 알게 하는 법어와 시 등이
수록되어 있어 그의 불교에 대한 깊이와 경지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공민왕이 불러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물었을 때는 거룩하고 인자한 마음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요
다스림의 근원이니,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추어 보라고 하였고, 때의 페단과 운수의 변화를 살피지
않고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는 또 왕도의 누적된 폐단,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에 대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고,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인심을 일변하고 정교(政敎)의 혁신을
도모하기를 주장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현재 한국 불교 태고종의 종조(宗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저서로는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2권과 <태고유음(太古遺音)>6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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