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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일반 계시판

한국의 세시풍속[歲時風俗]

by 범여(梵如) 2013. 2. 8.

한국의 세시풍속[歲時風俗]
◐ 세시풍속[歲時風俗] ◑

세시풍속(歲時風俗)

세시(歲時)·세사(歲事)·월령(月令)·시령(時令) 등으로도 불리고 근래에는 연중행사라는 말도 쓴다.
세시풍속은 태음력(太陰曆)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특히 달의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원래 음력은 태양태음력을 말한다.
이를테면 순전한 음력이 아니라 계절과 역일(曆日)의 조화를 고려하여 태음력을 가미한 태음력과 태양력의 혼합이다.
따라서 세시풍속은 음력과 양력이 혼합된 태음력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한 해를 기준으로 달마다 배분되어 있는 것이다.
달의 주기성과 변화되는 생산성은 한국의 세시풍속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매 절기마다 상이한 풍습을 만들었다.
한국의 세시풍속 역사는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마한의 농공시필기(農功始畢期)인 5월과 10월의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 등은 모두 세시행사로 인정된다.
〈삼국사기〉의 추석·수리(단오)·유두, 〈삼국유사〉의 대보름 기록 등은 모두 삼국시기에 이미 세시풍속의 원형들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고려시대에는 신라시대의 세시풍속이 대체로 전승되었으며 상원의 연등회와 팔관회같이 불교행사이면서 동시에 전국적인 세시행사가 확산되었다.
오늘날의 세시행사로 귀착된 것은 조선시대에 접어들어서이다.
조선시대 세시풍속의 주기는 농경의 주기와 관련되기 때문에 계절의 분류 역시 농경의 각 주기를 따랐다.
24절기를 기준으로 볼 때 한국의 경우 봄은 양력 2월, 음력으로는 정월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세시행사의 모태가 되는 자료는 조선 후기의 세시기들인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경도잡지 京都雜志〉 등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세시행사들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들도 많으나 대개의 풍속들은 이미 사라졌거나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시대변화에 따라 세시의 변화도 필연적이므로 오늘날 현대생활에 알맞게 축소·변형된 것이다. [다음 백과사전-http://enc.daum.net/dic100]


세시풍속(歲時風俗)

세시풍속이란 일년 중 철을 따라서 행하여지는 자연 및 인간사에 관한 행사를 말한다.
한 나라의 세시풍속은 그 나라의 정신의 소산이며, 문화의 소산이므로 아름답고 선량한 세시풍속을 가진 나라는 흥하였고, 퇴폐하고 타락한 세시풍속을 가진 나라는 망하였다.
다른 민족이 한 민족을 침략하여 국토를 빼앗으면 제일 먼저 행하는 정책이 그 민족이 갖고 있는 고유의 미풍양속을 말살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의 옛 세시에 따르는 연중행사등이 기록된 문헌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실기등에 총체적으로 나와 있으나 세시풍속만을 기록한 문헌은 그 수가 적으며 조선 말 홍석모님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유득공님의 경도잡지(京都雜志) 김매순님의 열양세시기(列陽歲時記) 등 몇편이 있다.
우리민족이 예부터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명절의 행사는 농경의례적인것과 민족의 제전과 관계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것은 한 해를 살아가는데 생활의 단조로움에 활력을 불어 넣는 역할을 해왔다.
연초에는 농작의 풍요를 위해서, 파종기에는 그 식물의 생명력의 숙성을 위하여, 그리고 수확기에는 추수의 감사를 위하여 다양한 행사들이 이루어진다.
평소의 일손을 쉬고 시절음식을 준비하고, 명절 옷으로 갈아 입고, 가족이나 부족 단위의 제사 또는 마을 단위의 축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중 행사들은 단순히 생활에 활기를 줄 뿐만이 아니고 그 집단 나름의 사회적인 결합을 재확인 시키기도 하고, 민족적인 일체감을 부활시켜 주기도 한다.[세시풍속과음식-http://my.dreamwiz.com/mylee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