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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신천(왕방), 소요지맥(終)

신천(왕방)지맥 제2구간 - 오지재에서 청산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3. 2. 9.

 

☞산행일자:  2013년 02월 09일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상당히 추움(동두천 아침기온 -16도) 

산행거리: 도상거리 13.2km / 6시간 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오지재-570m봉-610m봉-674m봉(H)-왕방산-왕방이고개-587m봉-NO23 송전탑

                 통재비고개-610m봉-국사봉-심곡리 갈림길-670m봉-693m봉--490m봉-가마골 고개               

                 하늘봉 갈림길-373봉-임도-294m봉-청산고개

소 재 지:  경기도 동두천시 탑동 / 포천시 포천읍, 신북면

 

내일이 구정 명절인데 고향을 읽어버린 실향민 아닌 실향민(?)이 되어버린 탓에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집에 있어봐야 눈치보이고 친구 넘들하고 술마시는 일이외는

없을것 같아 서울에서 가까운 신천(왕방)지맥 한 구간이나 끝내려고 지도와 자료를 준비하여

새벽 5시 30분에 집을 나서는데 아들이 나가는 걸 보고 추운 날씨에는 좀 쉬라고  하면서

아버지 좋아서 가시는 건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추울때는 안가는게 좋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마살이 기어이 대문을 나서게 한다.

 

나이를 먹으니 고향과 형제지간은 자꾸만 멀어지는 느낌이다.

형제간도 자녀들 출가하기전에 형제간이지 자녀들 출가하고 나면 자기아들, 손자,

며느리가 우선이고 동생들은 자연히 한다리 거쳐 있으니 멀어질 수 밖에 없는 모양이다.

나야 막내라서 자녀들이 출가를 안해서 모르지만 형님들 보니 그렇다.

그래서 자꾸만 멀어지는 느낌이다... 제사를 참석 못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것도 내가 따로 우리 부모님 제사를 구정날 절에서 모시니  그것도 해결되고...

 

서울은 어제 기온이 영하 17도였고 오늘은 조금 누그러져 영하 12도란다.

버스 정류장에 나오니 타야할 버스가 지나가 버린다.

찬바람이 약간 부는 상태에서 10분을 넘게 버스를 기다리는데 손발이 빠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춥다. 버스를 타고 강남구청역에서 지하철 7호선을 타고 도봉산역을 가서

다시 1호선 국철을 바꿔타고 동두천 중앙역에서 하차를 한다.

오늘 산행구간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동두천 중앙역(07:10)

이곳에서 아침을 먹고 산에 가려고 주위에 식당을 찾으니 보이질 않고하여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라도

하나 끓여 먹으려니 편의점도 보이질 않는다. 이리저리 10분을 넘게 헤맨끝에 동두천 큰시장 안으로

가니 문을 연 식당이 있어서 가는데 동두천은 서울보다 훨씬 더 춥다.

그 사이에 발끝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시리다.  아들 말을 들을껄 하는 후회가 들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아들에게 약한모습 보이기 싫어서 식당으로 향한다

동두천 시장안에 있는 식당(07:25)

식당에 들어서 우선 손발부터 난로에 좀 녹이고 식사를 주문하니 오늘은 미역국에

나오는 백반이 괜찮다고 하여 한그릇 시켜 먹는데 오늘 아침에 제사음식 준비하는

중이라면서 부침개를 별도로 한접시를 담아주고 주인 아저씨가 시장분들과 소주를

마시면서 이 추운데 위험하게 혼자서 왜 산에 가느냐고 하면서 소주를 한잔 권한다.

근데 이 분들은 소주를 맥주그라스에가 마신다. 그러면서 맥주 그라스에다 소주를

권하기에 단숨에 들이키니 속이 얼얼하다. 동두천은 서울보다도 기온이 2~3가 낮다고 한다.

백반 한그릇과 부침개 한접시, 술한잔하고 나니 훨씬 덜 추운 느낌이다.

식대 5,000원을 지불하고 시장을 나와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동두천큰시장

구정 명절인데도 불구하고 시장 분위기는 한산하기만 하다.

대형마트에 손님이 다 빼앗긴 탓인가?.

갈수록 자영업자들은 살아가기가 팍팍하기만 하다

범여가 하는 인테리업도 대기업의 횡포와 탐욕으로 힘들긴 마찬가지지만...

시장을 지나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동두천에서  오지재를 거쳐

대진대학으로 가는 50번 버스가 휭하니 지나가버린다

이상하게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머피의 법칙이 계속 이어진다.

버스정류장(07:50)

혹시나 다른 번호의 버스가 있나 기다려도 오지않고 30분에 한대가

있는데 일요일에는 시간이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날씨가 추워도 너무 추워서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오지재로 향한다.

나를 태워주고 가는 택시택시를 타고 20분만에 오지재에 도착하니 택시요금 9.600원이 나온다.

동두천에서 택시 영업을 하는 기사가 오지재를 모른다고 하여 처음엔 좀 난감했다.

오지재(08:15)

경기도 동두천시 탑동에서 포천시 가산면을 잇는 고개로 334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거기 재벽동(滓洞)에 태조가 잠저시(潛邸時)에 전장(田莊:밭이

딸린 별장)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오지는 벽돌과 같은 옹기를 뜻하고 재(滓)는

옹기를 굽고난 찌꺼기를 말하는데  예전에 이곳에 옹기를 굽는 가마터가 있었던 모양이다.

 

도로 아래의 동두천으로 연결되는 계곡이 탑골마을이 있는 계곡이라 하여

이 지역 사람들은 오지재라면 잘 모르고 탑골계곡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산행들머리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지맥 능선으로 향한다.

추워도 너무 춥기에 서있으면 금방 굳어 버릴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부지런히 산으로 오르는데 다행히 이곳은 등산객이 있는지

러셀하는 수고로움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이곳은 왕방산이라는 명산이 있어서 그런지 포천시에서 이정표를 참 잘해놨다.

570m봉(08:36)

현위치 W-10 이정표(←왕방산 2.8km →오지재고개 0.6km ↑대진대학교)가 있고

왕방산 등산시 주의사항 안내판도 있다. 이곳에서 좌측 왕방산으로 향한다.

안부 능선으로 오르니 눈의 양은 많아지고 암릉이 많이 나온다.

610m봉(08:45)

암릉으로 된 봉우리 정상에는 돌탑이 있고 현위치 W-9 이정표(←왕방산 2,7km →오지재고개 0.7km)가 있다.

610m봉 정상 이정표

610m봉에 올랐다가 내리막길 내려가는 길에는 로프가 있긴해도 눈싸인 암릉에다가

눈 아래로는 빙벽으로 되어있어 상당히 위험하다. 스틱을 접고 로프에 의지한 채 내려간다.

610m봉을 내려오니 편안한 안부가 나오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이 쌓여있다.

다시 암릉구간을 만나서 우회를 하고...

능선 아래로는 대진대학교가 희미하게 보인다.

대진대학교는 대순진리회가 운영하는 사학재단이다

현위치 W-8 이정표(←왕방산 2,3km →오지재고개 1.1km ↓임도 ↑대진대학교)가 나오고...

먼저 가신분들이  러셀을 해놔서 아주 편안하게 안부를 걷는다.

현위치 W-7 이정표(←왕방산 1.7km →오지재고개 1.7km ↑포천자작동)

다시 암릉구간을 우회하고...

운무에 휩싸인 포천의 모습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포천의 옛 땅이름은 고려때 지명은 마흘(馬흘), 신라 경덕왕때

 지명은 견성군(堅城郡), 명지성(命旨城)이었다. 포천 옛 고을터는 현재의 시청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2㎞ 떨어진 군내면 청성산에는 백제가 건설한 반월산성이었다.

 고구려에게 빼앗긴 후 고구려인들이 다시 수축했다. 다시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의 연합군에

 함락당하고,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이 땅을 신라식으로 ‘반월산’으로 고쳤다.

 최근 발굴조사에서 이런 여러 사실들을 증명이나 하듯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왕방산과 해룡산 기슭에서

 나말여초 시기에 유행한 미륵석불, 각종토기, 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궁예시대의 역사가 증명되는 유물들이다.

 

포천은 고구려, 신라 도성과 멀리 떨어진 변방지역인데, 견고한 성을 수축할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은 궁예시대의 유물 출토에서 풀렸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왕건의 고려창건 이후에도 지방의 군벌세력과 토호들의 발호, 왕명을 참칭 하면서 항거했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포천지역의 성달, 이달, 서림형제는 포천 영평 일대를 장악 태조 왕건 6년에 군사균형이 깨지면서 황복귀부했고,

양주지역의 군벌 능현은 왕건 즉위 8년만에 귀부하였다. 지금까지 밝혀진 많은 사료와 구전을 통해보면 포천,

양주,연천,철원,가평,산녕,마천,청주,목천 일대 지역은 고려초기 왕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확인할수 있다한다.

장기바위(09:20)

674m봉(09:14)

봉우리 정상에는 헬기장이 자리잡고 있다.

이정표(←정상 1.1km →오지재고개 2.2km ↑진입금지(사격장)

오지재에서 왕방산 구간에는 2군데서 설치한 이정표가 있는데

포천시에서 설치한 이정표에는 왕방산까지 3.4km로 되어 있는데

또다른 이정표에는 3.3km로 되어 있어 상당히 헷갈린다

엄청난 암릉구간을 만나 좌측으로 우회를 한다.

이곳 암릉들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빗살무늬 토기같은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왕방산 가는 안부 능선

왕방산 가기 직전에 만난 헬기장

왕방산 정상 이정표

왕방산 유래의 안내도

왕방산 정상에는 군부대에서 설치한 시설물과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있다.

왕방산(王方山:737.2m:09:45)

경기도 포천시 포천읍과 동두천시 탑동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왕방산은 양주 북쪽 60리 지점에 있고 해룡산 남쪽에

있다”고 되어있다. 『여지도서』에 왕방산은 포천현(縣) 서쪽 10리 해룡산 북쪽에

있는 산으로 세상에 전해오기를 광해군이 일찍이 이 산에서 직접 사냥을 했다고 한다

 

왕방산은 양주목(楊州牧) 산내면(山內面)에 있는데 천보산에 뻗어 나온다고 되어있다.

『대동지지』에 “왕방산은 양주에서 동북으로 60리에 있고 포천과 경계를 이룬다”고

되어있다.『조선지형도』에 ‘왕방산(旺方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포천시의 진산으로 불리워지는 왕방산은 많은 전설과 유래가 전하는 명산이다.

 

872년(신라 헌강왕 3년)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정업을 닦을때 국왕이 친히 행차하여

격려하였다 하여 왕방산이라 이름하였고 그 절을 왕방사라 하였다고 한다.

왕방사지에는 30여년전 청매화상이 현 보덕사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이 산에 있는 사찰(현 보덕사터) 방문, 체류하였다 하여 왕방산이라

불렀고 절을 왕방사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조선 3대 태종이 그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를 모시고 재백골(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에 살때 늘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했다는

유래도 전해진다.

 

또한 왕방산은 고려말에 목은 이색이  세속을 떠나 이 산으로 들어와 삼신암이란 암자를

짓고 은신하였다 하여 국사봉이라고 했는데 왕이 항상 목은을 생각하며

이 산을 바라봤다고 하여 왕망산으로 부른것이 왕방산으로 변했다고 한다.

『지승』「영평현」에는 포천왕망산(抱川王望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산의 남쪽인 포천읍 선단리 기슭에는 강화도령으로 불리웠던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 묘소가 자리잡고 있으며 산 중턱에는 박쥐동굴이라는

자연동굴이 있으나 그 길이를 분명히 측정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표면에 보기에는 높이 1m, 폭2m 굴이 좌,우 쌍갈래로 갈라져 있고  사람들이

들어갈 수 지점에서 다시 수직에서 돌을 던지면 물소리가 날 정도라고 한다.

이 굴은 3.1운동 당시와 6.25동란때 피난처로 사용했다고 한다.

왕방산 정상 삼각점(△ 포천23 1982 재설)

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 견성지(堅城誌)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 산에서 무예를 익히고 사냥을 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도 단오와

추석에 강무(講武·임금이 참관하는 무예시범)를 했다하여 왕방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함흥에 살다가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 왕자의 난 소식을 듣고

비통한 마음을 달래고자  이 산을 찾았다는 다른 유래도 전해지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다.
이와 관련 함흥에서 두문불출하던 이성계를 아들 이방원의 명령으로 모시러 갔던 대신들이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잦아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함경도 안변지역 동북면에서 안변부사인 조사의가 1만 여진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태종이 지역토호세력의 규합을 막기위해 상호군 박순을 파견, 수령들을 회유하였지만

실패해 죽음을 당한 게 후세에 잘못 알려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성계의 묵시적 동의 내지 가담에 따른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삼각대로 인증샷을 남기고...

왕방산에서 호룡곡리 가는 길

왕방정(09:50)

호룡곡리 가는길엔 최근에 설치한듯한 왕방정이란 2층정자가 있다.

가야할 국사봉의 모습

왕방산 정상에서 바라본 해룡산과 지나온 구간의 모습

왕방산 정상에서 두루두루 구경을 하고 다시 내려와 깊이울 유원지 이정표로 향한다.

지금까지 오지재에서 왕방산까지는 춥긴 하였어도 잘 다져진 눈길을

공짜(?)로 걸어왔건만 왕방산에서 국사봉가는 길은 말 그대로 험난한

일정을 예고한다. 왕방산 내리막길부터는 아무도 다니지 않았던 탓에

눈은 무릎까지 차오르고 어디로 가야할 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란 말인가?

조금을 내려오니 새끼손가락보다도 적은 로프가 걸려있고

다행히 싸락눈이라 내리막은 히프로 밀어부쳐 자동 러셀을

하면서 거의 공짜로 내려오니 편안하기만 한데 오르막이

걸리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한발자국 올라서면 다시 미끄러져 원위치...

자꾸만 시간은 걸리고 참으로 난감하기만 하네...

왕방이 고개(10:05)

동두천시 탑동  왕방마을에서 포천시 포천읍 선단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정상이 포천시와 동두천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으로는

왕방산이 남으로는 해룡산으로 이어주는 고개이다.

1950년대만 해도 백주에 호랑이가 나타나 이 고개를 넘어려면

여러사람이 함께 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23번 송전탑(10:23)

587m봉(10:33)

이곳은 등산객들이 많이 다니는지 벤치 2개가 있고 국사봉이라고 표시해 둔

스텐레스 이정표가 떨어진 채 방치되어 있는 곳의 우측으로 꺽어진다.

섣달 그믐날에 액땜을 하네그려...

이곳에서 결국 사고를 당한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는데

무릎까지 쌓인 눈 아래에는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는 눈이 녹아 얼음으로

변해 있어서 스틱으로 내딛는데 그냥 고꾸라지는 바람에 20m 아래로 떨어진다.

덕분에(?) 20m를 공짜로 내려오긴 했지만 나홀로 산행을 하면서 10년 감수를 한다.

다행히 눈속으로 파묻히면서 다친데는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가야할 국사봉이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구조신고 안내 코팅지("현위치→왕방7" 포천소방서)도 보이고...

통재비 고개(10:40)

현위치 W-3 이정표(←국사봉 1.2km →왕방산 1.6km ↓임도 ↑포천(깊이울저수지)를 만난다.

고개에서 국사봉을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되는데 아무도 가지않은

곳에 쌓인 눈은 장난이 아니다. 거기다가 자꾸만 오르면 뒤로

미끄러지고 다시 오르면 또 미끄러지고 점점 힘만 빠진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있는 힘을 다해서 올라간다.

오르막을 올라서니 또다른 오르막이 나타나고

오늘 산행중에 가장 힘이드는 구간이다.

오르막을 오른 다음에 또다시 약간의 내리막을 향해서 내려간다.

내가 온 길을 뒤돌아보니 아무도 밟지않은 눈길을  내 발자국이 엉망으로 만들어놨다.

다시 오름은 시작된다. 주위에는 멋진 낙락장송과 진달래 군락지를 치고 오르는데

기맥과 지맥길에서 자주 만나는 광주의 백계남님의 시그널을 만난다.

쌓인 눈으로 인하여 등로는 보이지 않고 오랜 경험에 인한 감각적으로 길을 찾아가는데

갑자기 머리위로 엄청나게 큰 군용 헬기가 나타나더니만 국사봉 능선을 빙빙돌기 시작한다.

석달 그믐날에 혹 사고라도 생겼단 말인가... 또다시 한바퀴를 돌면서 나를 보는것 같아 불안하다.

이곳의 나무들의 가지는 한결같이 남쪽으로 향해있다.

그만큼 북쪽의 바람들이 심하다는 얘기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기는 지혜... 인간에게 자연은 늘 영원한 스승같다.

나만큼이나 힘들게 살아가는 소나무도 만나고...

610m봉(11:05)

610m봉에서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데 눈은 그리많지

않으나 녹은 눈이 다시 얼음으로 언 암릉을 지나야 하기에 상당히 미끄러운데

웬 넘의 헬기는 벌써 몇번이나 내 머리위로 빙빙돌고 있다.

오늘 내가 걸어온 능선들을 뒤돌아 본다. 왕방산은 자꾸만 시야에서 멀어진다.

헬기장 마지막 오름길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서 좀 나은것 같은데 헬기가 조금전에

헬기장에 착륙을 하여 보급품을 내리는 중이다. 프로펠러 바람으로 내가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고 주위의 멋진 설경을 감상하려는데 미군 한명이 다가와서 나의

팔을 잡고는 위험하다고 하면서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주는데 보급품을 싣는

미군 장병들은 홀로가는 나를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면서 NO1이라고 하는지

이 추운날 홀로 산행을 하는 나를보고 맛이간 넘으로 취급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긴 내가봐도 맛이가긴 간 모양은 맞으니까 ㅋㅋㅋ

헬기장(11:18)

헬기장을 나와서 무릎까지 쌓인 도로를 따라서 후문까지 걸어간다.

미군부대 후문(11:20)

부대 후문 철조망을 끼고 좌측으로 아슬아슬하게 지맥길을 이어간다.

바로 앞에는 동두천의 산중에서 가장 높다는 수위봉(649m)이 한 눈에 들어오면서  

연결되는 능선이 소요지맥인데 언젠가 내가 걸어야 할 능선이다.

미군부대 후문앞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 도봉산과 북한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국사봉(國射峰:754m:11:25)

경기도 동두천시 탑동과 포천시 포천읍과 신북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지금은 정상을 미군부대가 완벽하게 점령(?)하고 있어서 정상 한참 아래인

부대 정문앞에다가 동두천시에서 이정표를 설치해 두었다

조선 세조는 과거를 후회하고 말년에 산수를 벗삼아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찾고 수렵에도 취미를 가졌다.

 하루는 신하들과 함께 칠봉산에 사냥을 나왔다. 수렵할 때는 사방위 중에서 어느한 곳을 정하여

시사(示射)를 하고 그 다음에 사냥이 시작되는데, 이 관례대로 왕은 칠봉산에서 동북방으로

 마주보이는 왕방산의 주봉(主峰)을 겨누어 활을 쏘았다하여 그 주봉을 국사봉(國射峰)이라 칭했다고 한다.

 

국사봉은 이웃에 있는 형님뻘인 왕방산보다도 6.8m가 더 높다.

대동여지도에는 심곡산(深谷山)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봉우리를

중심으로 사방에 탑동계곡, 왕방이계곡, 쇠목계곡, 장림계곡, 깊이울계곡

으로 형성되어 있어 여름철 피서지 계곡으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남서쪽 계곡에 있는 왕방이 마을은 신라 헌강왕 3년(872년) 도선국사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때 왕이 이곳을 방문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탑동에는

왕비가 나왔다는 설도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곳 국사봉은 미군부대가 점령(?) 당한 탓에  정상표지판과

이정표는 미군부대 철책선 옆에 설치가 되어있어 이곳이 정상을 대신하여 조금은

안타깝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국가의 안보을 위한 것이니 어찌하랴.

 

이곳은 이태조가 사냥터로 사용한 강무였으니 지금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인가 보다.

그래서 지명도 전국의 국사봉(國師峰)이 스승의 봉우리로 칭하는데 유독 이곳만이

국사봉(國射峰)이라하여 임금의 사냥터로 칭하였으니...

미군부대 정문에서 군사도로를 내려가는데 빙판으로 된 도로가 아슬아슬하다.

미군들은 도로에 눈을 치우지 않는지 눈이 무릎 가까이까지 온다.

도로에서 20m 정도 내려오니 좌측으로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우측으로

꺽어져서 신천(왕방)지맥길로 이어진다. 좌측엔 소요지맥으로 갈라지는 곳이다.

국사봉 부대 정문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 소요지맥 능선인 소요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소요산군(逍遙山群)인 공주봉, 나한대, 상백운대, 하백운대, 감투봉이 한 눈에 시원스럽게 들어온다.

소요지맥 갈림길

소요지맥(逍遙支脈)이란?

한북정맥 축석령위 285.7m봉에서  분기한 38.5km의 왕방지맥은 천보산, 해룡산, 왕방산을

거쳐 국사봉에서 좌측으로 분기하여 북서진하는 경기도의 소금강이라 불리우는소요산 방향의

산줄기를 따라 수많은 크고 작은 산줄기를 넘고넘어 동두천과 연천군을 지나 말턱고개를 지나

신천에서 맥을 다하는12.9km의 산줄기를 한북 소요지맥이라고 한다.

미군부대 정문 아래에 있는 공터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이곳부터는 정말 바짝 신경을 써야한다. 거기다가 아무도 다니지 않아 지맥길은 잘

보이질 않고 간간히 만나는 선답자들의 시그널만이 이곳이 지맥길임 알게한다.

이곳 국사봉을 지나면서부터는 포천시에서 완전히 庶子 취급을 받는 산이다.

오지재에서 국사봉까지 완벽하게 되어있는 이정표는 고사하고 산꾼 선배님들이

다니지 않았는지 그 흔한 아크릴 이정표나 코팅지로 된 이정표지판 하나 없는 곳이다.

마치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 취급을 받는 산이다... 서자의 설움이 이런건가?

능선 안부를 걷건만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는 안부능선을 감각적으로 간다.

어떤곳은 눈이 허리까지 오고 러셀을 하는데 숏다리인 범여는 이런곳에서 비애를 느낀다.

눈속에 파묻힌 고엽(枯葉)

670m봉(11:43)

러셀은 계속되고 눈의 양은 많아지니 시간은 자꾸만 지체가 된다.

오지재에서 시작하여 아직 한번도 쉬지 못했다. 너무 추운탓에

쉬면 추위를 감당할 수가 없기에... 걷고 또 걷는다.

능선이 잠깐 트인다. 소요산이 멋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능선 아래에는 잣으로 유명한 가평과 가까운 탓인지

잣나무를 많이 조림해놨다. 이곳은 포천잣의 생산지로도 유명한 곳이란다.

자동우량경보 시설물(11:55)

우량경보 시설물을 지나 다시 치고 오르니 조수보호구역이라는 팻말이

넘어진 채로 아무렇게나 방치가 되어있고 이곳에 우측으로 꺽어져

다시 오르막을 향한다. 이곳에 쌓인 눈은 싸락눈이라서 내리막길에는

러셀이 수월하지만 오르막에는 자꾸만 미끄러져 시간이 지체가 된다.

이런 곳에서는 아이젠이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이다.

오르막을 힘들게 치고 오르니 아무런 표식도 없는 지도상에  표기되어

있는 693m봉이 나타난다.

693m봉(12:50)

693m봉에서 오늘 처음으로 10분간의 휴식을 취하면서 지도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아무런 표식도 없고 그 흔한 이정표하나 없다보니 바짝 긴장이 된다.

이곳에서 가지고 온 바케트 빵 한족각과 따뜻한 커피한잔, 그리고 곶감 2개가 점심이다.

그리고 물한모금 마시려니 수통에 있는 물이 꽁꽁 얼어있어 마시는 걸 포기를 하고

다시 우측으로 꺽어져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향한다.

부산 방랑자님이 걸어둔 멋진 시그널을 만나고...

693m봉에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Y자형의 길이 나온다.

우측으로는 심곡리 내려가는 길엔 사람들이 많이 다닌 흔적이 남아있고

좌측으론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다시 아무도 다니지 않은 곳에 길은 보이질 않고 다행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다시 무명봉 능선에 올랐다가 우측으로 내려서니 임도같은 넓은 길이 나온다.

임도를 따라서 편한 걸음으로 내려간다.

내가 가야할 길과...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

갈참나무 군락지가 나오고 이곳에는 재선충 방재작업을 한 흔적을 만난다.

우측 나무사이로는 깊이울 저수지라 불리는 심곡 저수지가 보인다. 

490m봉(13:04)

좌측으로는 잣나무 군락지가 나타난다.

죽고 못사는지 서로가 꼭 껴안고 있는  나무를 만난다.

계속해서 잣나무가 빽빽한 숲을 만나고...

다시 능선으로 올라섰다가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반가운 시그널을 만난다... 2010년도에 낙남정맥을 같이한 자연과 송정님의

부부 시그널을 만나는데 요즘 잘 계시는지 궁금하다.

임도(13:10)

임도가 나온다. 좌측의 펜센이 있는데 어찌나 개쉬끼가 짖어대는지

온 산이 떠들썩하고 임도를 가로질러 다시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을 지나 다시 안부로 내려서니 펜션단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펜션단지는 눈으로 파묻혀 있고 이곳은 오프로드 자동차를 즐기는 동호인

주택인지 온통 사륜차들만 서 있고 일부 주택에는 사람들이 살고있다.

서낭당 갈림길(13:20)

펜션단지로 내려서니 예전에 성낭터였는지 노거수 한그루가 서있는데

특이한 것은 이 낮은곳의 나무에 커다란 겨우사리가 달려있다.

나무에 올라가서 겨우사리을 충분히 딸 수 곳에 있는데 너무 추워서 포기를 한다. 

션단지에서 우측 능선으로 접어드는데 이곳에서 개쉬끼 3마리가

금방이라도 물것처럼 달라든다. 스틱으로 한 넘을 강하게 내리치니

죽을듯이 짖어댄다. 이윽고 능선위로 올라서니 이 넘들은 물러난다

조금을 올라서니 이곳은 송전탑을 설치하면서 망가진 산림을 복구하기 위하여

새로운 조경을 한곳을 만나고 잠시후에 정상에 올라서니 하늘봉 갈림길이 나온다.

하늘봉 갈림길(13:25)

이곳에서 우측으로 30분을 가면 하늘봉이 나온다고 하는데

너무 추워서 별로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하여 좌측 지맥길로 향한다

이곳은 펜션단지 사람들의 산책코스인 모양이다. 발자국이 보인다.

나무사이로 지나온 693m봉도 보이고...

7번 송전탑(13:28)

임도(13:34)

계속 안부 능선을 걸어내려오니  임도가 나타나고...

임도를 지나서 다시 능선 안부를 걸어서 내려오니 가마골이 나온다. 

가마골(13:43)

가마골 임도로  내려서니 우측으로 한북정맥 능선인 광덕산과 함께

조금 옆에는 궁예의 한많은 사연이 많은 백운산, 국망봉, 도마치봉들이 보인다

가마골 임도에서 펜션지대가 가다가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송전탑 복구지역이 나온다.

송전탑 복구 능선으로 올라서니 NO 6 송전탑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 능선을 타고 지맥길을 이어간다.

이곳은 온통 송전탑 천지이다.동서남북으로 송전탑이 설치되어 있다.

2번 송전탑  능선에서 지나온 693m봉과 그 너머 국사봉이 아련히 보인다

2번 송전탑을 지나니...373m봉이 나온다.

373m봉(13:57).

이곳에서 좌측로 편안한 안부능선을 걸어간다.

능선길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빨간리본이 계속 이어진다.

다시 294m봉에 올라섰다가 임도로 내려서는데 잣나무가 빽빽하다

잣나무 임도를 내려오니 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오늘 산행 날머리인 청산고개가 나타난다.

청산고개(칠월리고개:14:15)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갈월리와 계류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동두천과 포천을 잇는 344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칠월리는 소둔지 동쪽에 있는 마을로 칠월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아주 추운 날씨에 신천(왕방)지맥 한구간을 끝낸 희열을

느끼면서 스틱을 접고 아이젠을 벗어면서 산행을 마무리 한다.

아이젠을 벗고 장비를 정리하는 사이에 포천에서 동두천으로 가는 57번 버스는

지나가 버린다. 이상하게 오늘은 머피의 법칙은 계속되고 참으로 난감하다.

하는 수 없이 장비정리를 마치고 칠월리 정류장으로 향한다.

버스 정류장 가는길에 잔치국수를 파는 글마르 카페가 나온다.

버스는 늦었겠다... 배는 고프고 하여 잔치국수 한그릇

먹으려고 들어서니까 쥔장 아주머니는 이 추운 날씨에 어디서

오냐고 하니까 “오지재에서 이곳까지 왔다고 하니까 오늘처럼

추운 날씨에... 하면서 약간 맛이간 사람처럼 보는것 같다

그러면서 버스 시간표를 물으니 포천으로 가라고 하면서 3분안

버스가 오니 국수는 다음에 드시고 얼른 가라고 한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서둘러 나오니 저 아래서 버스가 올라온다.

신북면 갈월리 마을의 모습

갈월리 버스 정류장(14:40)

버스 정류소에서 버스를 타니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

잠시 눈을 부치는 사이에 포천시내 버스 정류소에 도착을 한다.

포천시외버스  터미널앞 정류장(15:00)

이곳에서 138번 버스를 타고 의정부역으로 향하는데 버스는 가스 충전소에 들려서

가스를 충전한 다음에 의정부로 향하는 바람에 버스에서 커피를 타서 마시고

가지고 온 빵과 곶감으로 허기를 면한 다음에 다시 잠에 빠져든다.

의정부역(16:05)

1시간이 넘은 다음에 의정부 역사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의정부역 플렛홈(16:20)

의정부역에서 전철을 타고 4번을 갈아탄 다음에야 1시간 10분이 지난 다음에

개포동 집에 도착하니 피로가 몰려온다. 집에와서 샤워를 한 다음에 맥주 한병을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