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상(空思想)
공사상의 전개
공(空)이란 용어는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말로 특히 <반야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 강조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이 말은 자성(自性, svabhava), 실체(實體, dravya),
본성(本性, prakti), 자아(自我, atman) 등과 같이 인간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직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空)이란 용어의 원어는 sunya로서 본래 ‘부풀어 오른’, ‘속이 텅 빈’, ‘공허한’ 등을 의미하여
‘부풀어 오른 모양으로 속이 비어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sunya라는
말이 불교에 도입되어 공(空)으로 한역되고, 특히 <반야경>을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으로 다루어진다.
이 공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취급하여 사상적인 관점에서 논의한 것을 공사상이라 하며 특히
대승불교에서 이러한 공사상을 강조한 사람들을 공론자(空論者)라 부르고, 그들의 주장을 공론(空論)이라 한다.
이러한 공론자는 용수 이후 중관파(中觀派)를 형성하여 공사상을 전개해 가며 그들은 스스로를
공성론자(空性論者)라 불렀다.
<반야경>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공사상은 후에 용수에 이르러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대승불교 철학을 발생시키는 계기가 된다. 용수는 공의 개념이 불타가 깨달은 연기법의
이치와 일치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또한 부파불교 중의 하나인 설일체유부에서 주장한
법의 견해를 비판하여 공은 곧 무자성(無自性)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용수에
의해 명확하게 체계화되는 공사상에 대한 논리는 이미 불타의 근본교설을 전하는 초기불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왜냐하면 불타의 근본사상을 나타내는 것이 다름아닌 연기설이며,
이 연기설을 바탕으로 공을 이론적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의 이론적 전개와 관련하여
불타는 당시 중요한 논쟁의 주제였던 아트만(atman, 自我)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불타는 세간이
공한 것은 아트만이 없는 까닭이며, 그 아트만은 안, 이, 비, 설, 신, 의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
어디에도 없음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초기불전에서는 공의 의미가 무아(無我)설과 밀접히 관련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대승경전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된 것이 <반야경>.으로 이 <반야경>은 후에 <대반야바라밀다경>
600권으로 집대성된다. 이러한 <반야경>에 공통되는 중심사상이 공관(空觀)으로 공관이란 일체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 본성이 공하며, 또한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고 관하는 것을 말한다.
이 <반야경>의 공관은 대승불교 자체의 기본적인 교설이 되고 아울러 대승불교도의 실천적 기반을 이루게 된다.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관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대승불교 이전의 부파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부파불교 가운데 설일체유부의 교리는 <반야경>의 공사상이 출현하는 사상적
배경이 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설일체유부에서 일체법이 존재한다는 실유(實有)의
주장은 <반야경>의 공사상과 대승불교의 중관철학이 발생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부파인 설일체유부는 모든 요소를 법(法)이라 부르고 그 법을 5위75법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일체 존재를 다양한 법의 이름을 분류하고 그리고 그 각각의 법에는 파괴되지 않는 법의 고유한
자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색법, 심법, 심소법, 심불상응법, 무위법의 5위로 구분되는
일체 존재와 그 각각에 속하는 75개의 법은 과거, 현재, 미래를 걸쳐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설일체유부의 법체항유설(法體恒有說)로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야경>은 각각의 법에는
그와 같은 실체, 자성이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공이라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즉 모든 법은 공한 것이기 때문에 고정적인 법의 관념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체법은 다른 법과 조건지워져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정적, 실체적 본성을
갖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무자성인 것으로, 이 무자성인 것은 곧 공인 것이다.
그러나 일체가 공하다는 관찰은 반야바라밀을 실천하여 얻어지는 것으로 이것은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단계가 아니라 지혜의 완성에 도달한 경지에서 얻어진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반야지혜로서
공관은 용수와 그 이후의 사상가들에게 있어 이제설(二諦說)의 입장에서 명확히 그 구분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반야경>은 법의 공을 주장하고 있으며, 공관은 반야바라밀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지혜인 것이다.
공사상의 전개
<반야경>의 공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사람이 용수이며, 이 용수의 대표적인 저술인 <중론>을
중심으로 한 사상을 일반적으로 중관사상이라 말하며, 또 그 중관사상의 흐름을 이어받는 불교 논사들을
중관파라 부른다. 용수는 <중론> 외에도 다수의 저작을 남기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중론>으로
이후 많은 주석서가 씌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용수는 <중론>을 저술하여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 <중론> 속에서 용수는 공사상의 이론적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중론> 제24장 18게에서
‘무릇 연기하고 있는 것, 그것을 우리들은 공성(空性)이라 설한다.
그것은 임의로 시설되어진 것이며, 그것은 중도(中道) 그 자체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게송에서 볼 수 있듯이 용수는 <반야경>에서 공이라고 설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연기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가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제는
모든 사물이 각기 독자적인 존재의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진 까닭에 연기의 관계를 떠나있는 독자적인 성질로서 자성이나
실체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용수는 이러한 연기의 인연관계를 떠나 있는 것을
자성(自性)이라고 부르고 따라서 자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사물이 연기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실체인 자성에 의해 생긴다고 한다면
그 때는 자성이 서로 연기한다는 모순이 될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곧 자성이란 인(因)과 연(緣)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립적인 것이며,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일 없는 항상 고정불변한 존재이지만
실제로 그와 같은 것은 생겨날 수도 있을 수도 없음을 용수는 지적하고 있다.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 연의 상호관계로 생겨나는 것이고 따라서 그와 같은 것은 곧 자성이 없는 까닭에 공인 것이다.
이처럼 용수가 고정불변한 자성의 개념을 부정한 것은 그 자성의 관념이 우리 인간들의 망상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이 자성의 개념은 다양한 인연의 관계를 초월해 영원한 동일성을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특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 내재한 본질적 속성을 가리키고 있다.
즉 우리의 삶의 세계는 수많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약속에 의거한 언어적 세계로서
영원히 변치않는 절대불변의 세계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어를 불변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해 그로 인해 번뇌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론>은 그와 같은 불변적인 성질로서
자성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 삶의 세계가 연기의 이치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중론>이 이처럼 연기법을 바탕으로 무자성, 공에 대한 논리를 수립하여 <반야경>의 공관에 대한
이론적인 체계를 세우고 있지만, 이러한 이론적 체계에 무엇보다 중요한 관점을 용수는 이제설(二諦說)의
정립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2제에 대한 교설은 공에 대한 이해와 직접적인 관계를 보이는 것은
물론, 동시에 용수 이후 <중론>의 주석가들 사이에서 그 견해 차이로 인해 중관파가 둘로 나뉠 정도로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교설이기도 하다. <중론> 제24장에서 용수의 반대자는 만약 일체가 공이라면
사성제, 사향사과(四向四果), 삼보(三寶) 등의 일체도 공하여 모두가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용수는 그 반대자가 공용(空用), 공성(空性), 공의(空意)에 대해 무지한 까닭에
그와 같이 스스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한 뒤 이제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세속제(世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의 2제는 불타가 의거해 설하는 것으로 이 2제에 대한 바른 이해는
진실한 뜻을 아는 관건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2제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용수 이후 <중론>의
주석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나아가 용수는 ‘연기와 공성을 파괴한다면 세간의 일체
언어습관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라고 하여 연기와 공의 이치야말로 세간을 성립시키는 근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세간의 언어 습관인 세속제가 다름아닌 연기와 공을 바탕으로 성립하므로 만약 연기와 공을
부정한다면 세간의 삶을 부정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의 세계가 언어의
세계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변의 자성세계가 아니라 약속과 습관에 의거한 연기의
세계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와 같이 세속제를 성립시키는 바탕으로서 연기와 공
의 이치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제일의제를 알 수도 없고 또한 열반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기와 공의 이치는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경지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반야바라밀의
세계는 곧 제일의제의 진리세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다시 말해 세간의 언어 습관인
세속제가 성립하는 근저로서 연기와 공에 대한 이해야말로 승의의 진리를 알고 열반을 얻게 하는
구체적인 지혜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용수는 2제설을 통해 연기와 공의 이치가 세간을 세간답게 하고
제일의제와 열반을 얻게 하는 구체적인 지혜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였다.
용수는 <중론>에서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관을 연기설과 같은 위치에 놓음으로 공관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대승불교의 역사적 위상을 확립시켰다. 이로 인해 <반야경>으로 대표되는 대승불교는 역
사적으로 그 연원이 불타에게 유래되었음이 분명해지고 아울러 대승불교의 역사적 의미는 더욱 공고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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