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黃眞伊를 거처간 남정네들 ♣
첫 번째 옆집 總角(총각)입니다. 황진이를 짝사랑하여 상사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황진이의 어머니는 그 총각을 절대로 만날 수 없게 하여서 총각은 상사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을 지나가다 땅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진이가 속저고리를
상여에 덮어주었더니 움직였다고 합니다. 황진이는 왜 그 남자가 죽었을까 생각하며
妓生(기생)이 됐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 번째 남자는 개성 유수 송공입니다. 대부인 연회석에 황진이를 초대하였는데 그때 여러 사람들이 황진이의 빼어난 모습을 보고 반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황진이가 유명해지게 되는데요,
황진이는 송공과 그 전부터 함께 지낸 사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 남자는 선전관 이사종입니다. 사신으로 송도를 지나가다 천사원 냇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아주 출중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진이는 그 노래에 빠져 들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황진이가 "개성에 이사종이라는 사람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데 그 사람인가 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알아보게 하였는데 정말 이사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진이가 찾아가 서로 마음속에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이사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여러 밤을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마음에 들었는지 이사종에게
"내 마땅히 당신과 6년을 살아야 겠소"라고
말하고는 이사종의 집에 3년 동안 먹고 살 돈을 가져가서 살고.
3년 후 이사종을 자신의 집으로 대려와 살았으며
6년이 지난 후에는 깨끗이 헤어졌다고 합니다.
이걸 보면 황진이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했으며 당당한
여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보면 계약결혼의 시초이네요.
네 번째 남자는 양곡 소세양입니다. 그 남자는 남자가 여색에 혹함은 남자가아니다! 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내가 황진이와 30일을 지내고 깨끗이 끝내겠다. 라고
큰소리 쳤다고 합니다.
황진이와 30일을 지낸 후 황진이가 송별 소양곡을 불렀는데요,
그걸 듣고 소세양은 나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황진이와 함께 며칠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 남자는 왕족 벽계수입니다. 벽계수는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질 않아 고민하다가
친구인 이달에게 물어 꾀를 내어 황진이 집근처 정자에서
노래 한곡을 크게 부르고 황진이가 따라와서 돌아보지 말고
앞만보고 갔다고 합니다.
그때 황진이가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망공산 할제 쉬어간들 어떠리"
라고 읊었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벽계수가 뒤 돌아 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라 풍유랑이라 말하고 돌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벽계수 '낙마곡'으로도 유명합니다.
여섯 번째 남자는 이생입니다.
황진이가 말년에 금강산 유랑을 하고 싶어 하여 동행을 청해서
함께 금강산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갈 때 이생이 먹을 것을 짊어지고 갔는데 여행도중 다 떨어져서 곳곳의 절을 돌아다니며 황진이가 몸을 팔아 음식을 얻었다고 합니다.
여행이 끝나고 미련도 없이 헤어졌다고 합니다.
일곱 번째 남자는 지족선사입니다. 그는 면벽수련 30년으로 유명했는데요, 그래서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찾아가 유혹했다고 하는데
얼마나 용모가 빼어났던지 면벽수련 30년을 깨고
파계승이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황진이가 정말로 사랑한 사람은
바로 서경덕인데요,
황진이는 서경덕의 학문이 높음을 듣고
서경덕에게 가서 유혹하였으나 넘어오질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고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서경덕은 의연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진이가 감탄하여
"지족선사는 30년 면벽수련에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서경덕은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끝까지
나에게 이르지 않았으니
진정 성인이다."라고 말하고 서경덕에게 제자로
받아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돼었고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 이 세사람을
송도삼절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황진이는 남성위주의 시대를 외려 휘저었고
섹스는 언제나 본인이 선택하고
선도했으나 헤프지 않았으며 시화에 능하고 풍류를 알아
서양 및 중국의 미녀가 단순히 미모로
권력자에게 몸을 맡기고 이름을 날린 것과는
차원이 다른 女人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일의 남자들도 그녀를 그리워하며 "자는가?
누웠는가?"라고 그녀를 흠모하였답니다.
본명은 황진(黃眞, 1511~1551),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그녀가 남긴 시조가 한국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이 될 정도로 뛰어났던,
조선 중종 때의 시인이자 시대를 풍미한 명기(名妓)이며,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삼절로 불리었다.
송도(개성)의 양반 황진사의 서녀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기생이 되었다.
타고난 절색에 명창이었으며 시재(詩才)에도 능해 당대 최고의 명기로
여러가지 일화를 남겼다.
그녀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마을 청년의 상여가
집 앞에 멈추어 움직이지 않은
벽계수를 유혹하여 말에서 떨어지게 한 일. 30년 면벽의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 시킴. 화담 서경덕 선생을 유혹하려다 실패하고
감복하여 제자가 된 일.
이처럼 학자, 문인 등 일류 명사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였는데
그와 교류한 인물로는, 30년 면벽수련으로 유명한
지족선사(萬錫禪師), 대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종실(宗室) 벽계수(碧溪水), 판서(判書) 소세양(蘇世讓),
선전관(宣傳官) 이사종(李士宗), 재상의 아들 이생(李生) 등이 있으며 남사당패와도
오래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만월대 회고(滿月臺懷古)>, < 박연폭포(朴淵瀑布)>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등
7수의 한시와
<동짓달 긴긴밤을 한허리를 베어내어>, <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6수가 있으며
우리 문학사상 가장 빼어난 작품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말년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금강산을 비롯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만행(萬行)하며 세상을 둘러보았으며, "나로 인하여 세상의 남성들이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니...
이 몸을 길가에 묻어 짐승과 벌레가
먹게 하여 타의 경계로 삼도록 하세요" 라는
유언을 남기고 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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