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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여행

친구들과 2박 3일 남도 여행

by 범여(梵如) 2026. 7. 17.

☞ 일시: 2026년 06월 11일~13일(2박3일)

☞ 여행날씨: 3일 내내 맑은 날씨에 무더움

☞ 참석인원: 초딩이 동창 22명과 함께

☞ 여행코스: 남해 보리암-다랭이논-낙안읍성-이순신광장-모이핀카페

                    크루즈 관광-사천 케이블카

☞ 소  재 지: 경상남도 사천시, 남해군, 하동군 / 전남 여수시, 순천시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반세기를 지나 어언 60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어렸을 적, 보릿고개를 만나면 하루중에 점심을 먹는 날보다는 굶는 날이

더 많았던 시절도 있었지(물론 안 그랬던 친구들도 있어지만?)...경남 의령군

신반이란 고향에서 자란 친구들...서울이란 낯선 곳에 정착하여 악착(?)같이

열심히 살았던 친구들이 이제는 어었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멋진

노후를 즐기는 노인들의 모습이 참으로 대견하다.

 

나처럼 9살에 학교를 들어갔던 친구들도 꽤있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이

올해가 古稀라 칠순을 기념하는 의미로 23명이 2박3일정으로 여행을 

가기로 한다.

아침 8시 30분에 사당동에서 출발하여 신갈에서 수원 친구들을 태우고

기흥 휴게소에서 총무님이 준비해온 음식으로 아침을 해결하는데, 특히

어렸을 때, 고향에서 자주 먹던 미더덕찜이 입맛을 돋군다.

 

거기에 해장술이 빠지면 되겠는가...막걸리와 소주로 거나하게 한잔 한

다음에 단성휴게소에 들려서 고향에서 온 정락이 친구를 태우고 삼천포로

향하는 길...올해는 내가 회장을  맡아서 그런지 무척이나 신경이 쓰인다.

진주를 지나 삼천포대교 옆에있는 멸치쌈밥으로 유명하다는 식당에

도착하여 멸치회에다, 쌈밥으로 점심을 해결한다...다들 고맙다.

언제까지 이렇게 만지 그 누가 장담을 하겠냐마는 다들 건강을

잘 챙겨 오래오래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아프지 말고...

 

식사를 끝내고 멋진 기념사진까지 남긴다.

古稀기념 촬영

고희(古稀), 70세를 이르는  한자어로, 칠순(七旬)이라고도 하며 같은 

나이를 일컫는 다른 말로 종심(從心)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공자가 일흔을

칠십종심소욕불유구(七十從心所慾 不踰矩)라고 일컬은 데서 유래했으며, 고희와 칠순에

비하면 덜 쓰이는 문구이며, '마음이 하고자 하는대로 하더라도, 법도(法道)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았다' 는 뜻으로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구절이며, 중국에서

이백(李白)과 쌍벽을 이뤘던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補)는 곡강이수(曲江二首)라는 詩에서

칠순을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希)라고 했다

곡강이수(曲江二首) / 두보(杜甫)

 

其一(기일)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
꽃잎 하나 날아도 봄이 줄어드는데
風飄萬點正愁人(풍표만점정수인)
어찌 보리, 바람에 우수수 지는 모양!
且看欲盡花經眼(차간욕진화경안)
눈 앞을 스쳐 사라져 가는 꽃들 바라보면서
莫厭傷多酒入脣(막염상다주입순)
지나치기 쉬운 술 입술 들어옴 마다 마시랴.
江上小堂巢翡翠(강상소당소비취)
강가의 작은 정자(翡翠) 비취 깃들고
苑邊高塚臥麒麟(원변고총와기린)
어원(御苑) 곁 높은 무덤 뒹구는 기린(麒麟)!
細推物理須行樂(세추물리수행낙)
이 세상 모름지기 즐겨야 하리니
何用浮名絆此身(하용부명반차신)
뜬 이름으로 이 몸 매어 무엇 하리? 

 

其二
朝回日日典春衣 (조회일일전춘의)

조정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잡히고,
每向江頭盡醉歸 (매향강두진취귀)

날마다 강가에서 실컷 취해 돌아오네.

酒債尋常行處有 (주채심상행처유)

술값 외상은 가는 곳마다 늘 있는 법,
人生七十古來稀 (인생칠십고래희)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니.
穿花蛺蝶深深見 (천화협접심심견)

꽃 사이를 가르는 나비는 깊숙이 날아들고,
點水蜻蜓款款飛 (점수청정관관비)

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는 느릿느릿 날아가네.
傳語風光共流轉 (전어풍광공류전)

봄 경치에게 전하고 싶구나, 우리 함께 흘러가자고.
暫時相賞莫相違 (잠시상상막상위)

잠시라도 서로 즐기며 어긋나지 말자고.

느긋하게 식사와 행사를 마치고 나오니 시간이 많이 지나가버려 계획했던

스케줄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지만 그게 뭔 대수랴...이번 여행의 첫

코스인 남해 보리암으로 향한다...보리암까지는 생각보다 거리가 멀다.

 

도착을 하니 오후 3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이지만 다행히 평일이라

단체 관광객은 우리밖에 없다...주차장에서 서둘러 버스를 타고

보리암으로 향한다...미니버스에서 내려 보리암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곳에서 평일에는 이곳에서 대형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막차가

오후 4시 20분 차라하여 맘이 급하다...20여년만에 오는 곳이라

맘 같아서는 금산 정상까지 가고 싶지만 보리암만 참배하고 와야겠다

 

소형차만 오를 수 있는 주차장에서 내려 보리암으로 향하는 길에는

20년도 넘은 시절에 성지성례 왔던 그 길과는 달리 길은 너무도 좋다.

가다가 보리암으로 들어서기 전에 만난 쉼터 전망대에 서니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친구들은 마치 국민학교 시절에 소풍 나온듯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매점에서 부처님께 올릴 공양미와 양초를

사고는 친구들보다  먼저 보리암 절집으로 향한다

쉼터에서 바라본 남해 상주해수욕장의 모습

보리암가는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해 금산(錦山:704.9m)

경남 남해군 이동면과 상주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인 남해 금산(錦山)은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명산으로고도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기암괴석과

바다의 조화가 아름다워 많은 등산객과 여행객이 찾는 우리나라 3대 해수

관음상중에 하나가 있는 보리암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 시대 원효대사가 이곳에 보광사라는 절을 짓고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금산(錦山)이란 지명이 바뀌게 된 사연이 이채롭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 다니면서

기도를 하면서 이곳에서도 왕이 되기를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는 "왕이 되면 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주겠다"는 맹세를 했는데,
왕이 된 후 실제로 산을 비단으로 덮으려니 불가능했다

이에 지혜를 발휘하여 '비단 금(錦)' 자를 써서 산 이름을 금산으로 바꾸어
약속을 지켰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산으로
금산에는 38가지의 빼어난 경치가

있다고 하여 '금산 38경'이라 부른다고 한다

계단을 내려서니 보리암(菩提庵)의 주 전각 역할을 하는 보광전(普光殿)이

오랫만에 찾아온 범여를 반긴다...법당으로 들어가서 이번 여행길을 무탈하게

해주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부처님께 공양미를 올린다

 

보광전(普光殿)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보리암의 주법당으로 대웅전 역할을

하고 있는 보광전은 신라 신문왕 3년(683년) 초창이래 여러번의 중건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광전내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인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이 봉안되어

있는 사진을 분명히 카메라에 담았는데 집에와서 사진을 정리하는데

불감(佛龕)이 사라졌다...참으로 아쉽다 

보리암목조관음보살좌상불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5호)

남해 보리암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南海 菩提庵 木造觀音菩薩坐像 佛龕)은

보광전에 모신 주불로 서천축 아유타국 허공주가 모시고 왔다는 관세음보살

(좌보처 남순동자, 우보처 해상용왕) 삼존상이며 목조관음보살좌상불감은

17세기에서 19세기에 유행하던 형식이며 향나무를 조각해 금칠한 것으로

화불이 선명한 보관을 쓰고 대좌 위에 결 가부좌한 관음보살은 하품중생의

수인을 한 오른손에 정병이 들려 있고, 좌우에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새겨진

불감을 세워 협시하는 형태로 보이고 있다.

 

불감(佛龕:불상을 모셔 두는 집 모양으로 된 장식장)

보광전을 참배한 후에 시간이 없어 여러곳을 참배할 수도 없어서

보리암의 렌드마크인 해수관음상으로 향한다

보리암 해수관세음보살상

해수관음성지는 예로부터 남해 보리암,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가 3대 관음성지로

꼽혔으며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 이란 뜻으로 이곳에서 기도발원을

하게되면 그 어느 곳보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잘 받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ㆍ

보리암에서 가장 氣가 강한 곳으로 알려진 해수관세음보살상은 1991년 한 기업가의 원력으로

세워졌는데, 당시 지형적 영향으로 육로로 운반 할 수 없었던 해수관세음보살상은 헬기를

이용하여 탑대에 안치했으며, 좌대는 연꽃문양으로 하좌대와 상좌대로 이루어져 서로 마주 보게

포개져 있으며, 왼손에는 보병을 들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채 가슴에 두었으며

의습(衣褶)은 양어깨를 감싸고 각각의 팔을 휘감으며 아래로 흘러 내렸으며, 흘러내린 옷깃은

그 끝이 살짝 들려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형상이다.

 

* 의습(衣褶)이란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의상에 나타내는, 파도 모양의 늘어진 형상이나

  주름을 말한다

 

보리암 해수관음상은 절벽 위에 세워져 있어 남해안의 다도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풍광이 일품이며, 특히 해수관음상 앞에서 소원을 빌면 하나는

꼭 들어준다는 속설이 있다...바로 옆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석탑이 있다.

보리암전 삼층석탑(菩提庵前 三層石塔)

높이 1.8m, 폭 1.2m로 비교적 규모가 작은 탑으로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인도에서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 건너 오지를 못 하던 중에 파사석을

싣고 무사히 건너왔다고 전해지며, 이 탑은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婆娑石)으로

만들었다고도 하며, 삼층석탑과 해수관세음보살상이 있는 곳은 보리암에서 가장

기(氣)가 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나경을 가지고 가보면 나침반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곳으로 아마도 아래쪽 바위에 자성을 띤 철분이 많아서 그런것 같다.

 

또다른 전설로는 신라의 원효대사가 금산에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원래 김해시

구지봉 산 아래에 있는 호계사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원효대사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그러나 두꺼운 지붕돌과 3단으로 된 지붕돌 밑면 받침 등을 보아, 실제로는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보리암 극락전의 모습

보리암에서 가장 규모가 큰 극락전(極樂殿)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전각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협시불로 모셔져 있으며, 1996년부터 원불을 조성하여 2000년에

완성하였다... 많은 원불이 봉안되어 있다고 하여 만불전(萬佛殿)이라고도 한다. 

국가유산포털에서 소개하고 있는 금산은 다도해에서 유일한 큰 체적의

화강암 산임에도 불구하고 토산(土山) 성격이 강해 남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낙엽수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가을이면 마치 오색 자수판을 보는 듯하며 대규모의 낙엽수림이 화강암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아내며, 이 밖에도 신라 고승인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 등이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을 왔다갔다는 서불의 이야기가 담긴

‘서불과차암’과 춘·추분 때만 볼 수 있다는 노인성(老人星 또는 壽星,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별)과 관련된 전설 등 신비스런 전설이 많은 곳이며, 전국의

3대 기도도량인 보리암이 위치하는 등 상징적인 의미가 많은 명승지이다

 

* 서불(徐巿:생몰연대 미상)은 진(秦)나라 낭야(琅邪) 사람. 방사(方士). 서복(徐福)이라고도

  하며, 진시왕(秦始皇)에게 바다 속에 삼신산(三神山)과 신선이 있다고 상서하면서 이름이

  봉래(蓬萊)와 방장(方丈), 영주(瀛州)라 했다... 진시황의 명령으로 어린 남녀 수천 명을

 거느리고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 바다로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며 지금

 일본에 서불의 무덤이 전한다

 보리암 홈페이지에 따르면, 금산의 바위는 장엄한 기운이 뭉쳐 의젓한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며, 용을 타고 전후좌우 절을 하는 남순동자 바위와 관음조가 읊조리는

듯한 바위들을 거느리고 남쪽 바다 용왕에 무슨 가르침을 내리는 듯하다.

보리암은 이런 바위들을 등지고 놓여 있으며, 금산(錦山)의 한복판에 관음봉을

기대고 위치한 유서 깊은 절이다.
 
보리암은 고대로부터 유래가 깊은 곳으로 가락국 김수로왕도 이곳에서 기도하고

대업을 이루었다고 하며, 왕의 일곱 왕자도 외숙인 장유국사(長有國師) 옥보선인

(玉寶仙人)을 따라 출가하여 남해 낙가산,  금산(錦山) 보리암에서 수도하다가 다시

가야산을 거쳐 지리산 반야봉에서 수도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증명하는 것으로 북방전래설(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보다 292년 앞섰다고 한다.

금산 바위글

바위글의 유래는 우리나라의 다양한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위에 사냥이나 전투에 관련된 그림이나 글, 그리고 역사적인

중요한 인물의 기록, 종교적, 지리적 정보와 법률및 규칙등을

바위에 새긴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바위글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담고있어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곳 금산에는 약 70여곳에 선조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시간만 되면 이곳 저곳을 두루 둘러보고 싶지만, 대형버스주차장으로

가는 버스시간이 얼마 남지않아 보리암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주차장으로 가서 보리암 버스를 타고 내려와 관광버스로 다음

행선지인 다랭이논으로 향한다

응봉산과 설흘산 등산 안내도 - 부산 국제신문에서 스크랩

보리암 주차장에서 다랭이 마을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날씨는 늦은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한여름을 방불케

하지만 남해군의 해안도로를 따라서 가는 길은 환상 그 자체이다.

버스가 한참을 달린후에 다랭이 마을 주차장에 도착한다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가천마을에 있는 다랭이마을...20년도 훨씬

넘은 시절에 다랭이 마을 뒷쪽에 있는 응봉산과 설흘산과 연계한 산행을 할 때, 

산악회를 따라서 와본 마을인데, 예전에 비해 참많이 변했다.

 

다랭이논이 있는 가천마을은 원래 지명 간천(間川)이었는데 조선조 중기에 '갈대가

많은 시냇가가 있다' 고 해서 가천(加川)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다랭이라는 뜻은

'산골짜기 비탈진 곳에 있는 계단식의 좁고 긴 논' 을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 다랑이

또는 달뱅이라고도 부른다.

내 고향 마을도 이곳과 비슷한 다랭이논이 있어서 난 별 감흥이 없는데

도회지 사람들은 이런곳에 환호하는데 산골 출신인 나로서는 다랭이논보다

주차장 뒷쪽에 있는 응봉산과 설흘산이 더 눈에 들어오는 듯 하다

 

다랭이논이란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만든 논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해

생긴 모습 그대로 논을 만들다 보니 논은 넓지 않다

 

이곳에는 가천마을 농부의 ‘삿갓배미’ 사연이 전해오는데 옛날 한 농부가, 힘들게

얻은 땅이다 보니 종종 자기 논을 세어보곤 했는데, 어느 날 논일을 하다가 논을

세어보았더니 논 한 배미가 모자라는 게 아닌가.

 

농부는 잘못 세었나 싶어 다시 세어 보았지만, 논 한 배미는 찾을 수 없었다.

농부는 할 수 없이 포기하고 낙심해 집에 가려고 항상 쓰고 다니던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논 한 배미기가 숨어 있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난 컨디션도 안좋고, 너무 더워서 가천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눈팅이로

가천마을을 감상하는데 저 아래쪽에는 미륵불로도 불리는 암,수바위가

있는 곳으로 남성 성기를 닮은 숫바위는 숫미륵, 임신해 만삭이 된 여성

모습을 한 암바위는 암미륵이라 부르는데 암수바위에는 전설이 내려온다.

 

1751년(영조27)에 남해현령 꿈에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에 묻혀 있는데

그 위로 우마(牛馬)가 지나다녀 시끄럽고 몹시 불편하니 나를 꺼내어 세워주면

필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현령은 꿈이 하도 생생해 노인이

일러준 곳을 찾아 땅속에 묻혀 있던 암수바위를 파내어 미륵불로 봉안하고,

논 다섯 마지기를 희사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마을의 안녕을 빌면서, 귀한 양식인 쌀밥을 땅에 묻어

지신(地神)에게 바치는 ‘밥무덤’도 있며 가천 다랭이 논과 마을은 국가유산

명승이며, CNN이 한국에서 꼭 방문해야 할 아름다운 곳 50곳 중 하나로 선정했다.

지금은 남해 해안를 감상하며 섬을 휘돌아가는 1024번 지방도(남면로)가

지나간다...가천마을은 응봉산과 설흘산 사이 해안 절벽 위 가파른 산비탈을

깎아서 만든  마을로 어촌마을이지만, 해안에 배 댈 곳을 찾지 못해 바다를

뻔히 보고도 물고기를 잡아 생활할 수 없었다... 주민들은 호구지책으로

산비탈을 호미와 곡괭이로 깎아내고 한 뼘이라도 더 농사지을 땅을 마련하려고

석축을 직각으로 쌓아 계단식 논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108층에 이른다 하며

현재 다랭이 마을에는 손바닥만한 10m²에서 1,000m²까지 680개의 논(畓)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다랑이·다랭이 논으로 불리는데, 경사가 얼마나 가파르면

‘쟁기질하던 소도 한눈 팔면 절벽으로 굴러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남해 응봉산(鷹峰山:471.5m)

다랭이마을 주차장 좌측에는  우람한 근육질을 응봉산이 범여를 반긴다.

참으로 오랫만이라 그런지 예전에 응봉산과 설흘산을 걸었던 기억조차 없다

응봉산 오르는 길에는 미륵불로도 불리는 여섯 개 바위 봉우리를 두고

육조문이라 하며, 6명의 부처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다랭이논 주차장에서 바라본 설흘산(雪屹山·481.7m)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에 있는 설흘산은 금산과 함께 남해군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봉수대(경상남도 기념물 제247호)가 있으면 지명은  '눈 설(雪)' ,  '산 우뚝 솟을 흘(屹) '

소흘산으로 불리다가 설흘산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전해지는 유래는 없다

 

산세(山勢)는 해안선을 따라 동서로 뻗어 있으며, 좌측에 있는 응봉산과 연계

산행을 하기도 하며, 동쪽으로는 앵강만(灣), 남해금산, 한려수도, 서쪽으로는

여수 영취산과 돌산도, 남쪽으로는 다랭이 마을과 남해안이 한 눈에 들어오는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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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숙소가 있는 여수로 향한다

기분을 잡쳐버린 여수횟집의 안 좋은 기억.

다랭이마을에서 출발하여 하동, 광양을 거쳐 관광버스가 추천한 

여수에서 유명하다는 횟집에서 1인당 5만원짜리(주류, 음료제외)

저녁식사를 하는데, 난생 처음 이런 횟집은 처음본다...말라 비틀어진

스키다시와 부실한 회에 기분이 확 상한다...처음에는 모든 식사를

취소시키고, 나올까 하다가 쥔장을 불러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핑계,

저 핑계는 되는데, 느낌상 관광버스 기사와 모종의 거래가 있는 느낌이다.

 

이 식당은 주로 단체관광객을 유치하면서 관광버스 기사에게 리베이트를

주고, 싸구려(?) 음식으로 이익을 챙기는 모양인데...하도 괘씸해서 사진을

찍어 여수시에 고발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리더로서 친구들이 기분을 잡칠까봐

억지로 참았는데, 친구들도 나와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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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시오!, 횟집 쥔장 먹는 것으로 장난치면 식당 망하는거 한순간이란 걸

명심하소...기분 같았으면 식당 이름을 공개하고 싶지만 꾹 참고 가요.

열번도 넘게 여수쪽에 골프와 여행을 왔지만 이런 푸대접은 처음이다.

두번다시 여수로는 안 오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숙소로 향한다 

여수 히든베이 호텔

여행을 오기전에 몸상태가 안좋기도 했고, 수면을 취하지 못해 힘들었던

탓인지 호텔에 오자마자 뻗어 버렸는데, 덕분에 오랫만에 꿀잠을 잤다

호텔 주변을 홀로 호젓하게 산책을 하는데 남쪽으로 경도라는 섬이 보인다.

저 섬은 미래에셋증권사가 소유하고 있는 골프장과 리조트가 있는데 예전에

골프에 한참 미쳐 있을 때, 겨울에 2박3일동안 라운딩을 한 곳인데, 이곳에서

바라볼 줄이야 꿈에도 생각을 못했겠지...

새벽에 일어나 호텔 주위를 산책하고 방으로 들어와 사워를 마친 다음에

창문 너머 북쪽을 바라본 사방산과 문덕산(여수시 화양면 소재)의 모습

히든베이 호텔에서 나와 여수 시내의 해장국집에서

식사를 하고 오늘 첫 여행지인 낙안읍성으로 향한다

낙안읍성으로 향하는데 오늘이 마치 월드컵 경기 한국과 체코전이

열리는 날이라 축구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버스에서 축구를 보고,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낙안읍성을 구경하기로 하는데, 버스에서

내리니 따가운 햇볕이 장난이 아니다

순천 낙안읍성(順天 樂安邑城)은 낙안의 진산인 금전산(金錢山), 오봉산, 개운산,

제석산, 백이산이 외곽을 두른 평지인 낙안들에 있는 읍성으로, 낙안은 백제시대에

분차군(分嵯郡)이라 하였고, 파지성(波知城)이 있었다고 한다.

 

757년 경덕왕 때 분령군(分嶺郡)으로 개명되었으며 분령군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낙안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시대에는 종4품 군수가 통치하던 지방 관아였다.

낙안군은 1908년 폐지되어 순천과 보성에 나누어 이속되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세종 6) 9월 전라도 낙안군의 토성이 낮고 작아서

왜변(倭變)이 있으면 지키기 어려우니, 돌을 섞어서 토성 옛터를 좀 넓혀 성을 쌓았다고 한다.

 

낙안 출신의 절제사 김윤길(金贇吉, ?∼1405)이 1394년(태조 3)에 전라도수군첨절제사가

되었고 1397년(태조 6)에 전라도수군도절제사(정3품)로 승진하였으므로 이 무렵

낙안토성이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세종은 우의정 최윤덕(崔潤德) 등을 독려하여

1435년부터 1444년경까지 연해읍성을 거의 석성으로 쌓았고,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낙안읍성이 석성으로 표기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현재와 같은

석축성 형태의 낙악읍성은 15세기 중엽에 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낙안읍성은 조선 초기에 쌓은 석성임에도 불구하고 성문 주변뿐만 아니라 전 구간에 걸쳐

내외벽을 협축식(夾築式)으로 쌓았으며 읍성 외벽의 길이는 1,468m, 내벽의 길이는

1,351m이며, 하부 너비는 4.2∼5.9m, 상부 너비는 3.5∼5.1m, 높이는 3∼5m 정도이다.

낙안읍성 안내도

단체사진

아!...덥다.

그래도 60년지기 불알친구들과의 여행은 즐겁다

매표소를 지나 낙안읍성 동문인 낙풍루를 지나니  잔디밭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거시기 바위가  우리를 반기고...

그 옆에는 나무로 만든 거시기 장승이 있는데, 평일이라 관광객은

별로없지만 어느 지역에서 온 지는 모르지만 우리 또래된 아줌씨들이

부끄러움도 없이 만지고 킬킬대는데, 젊으나 늙으나 거시기는 늘

여인들의 로망인가 보다...

<해동지도>에 그려져 있는 낙안읍성(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소장)

읍성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으로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과는 구별되며, 부(府), 목(牧), 군(郡), 현(縣) 등 행정 구역의

등급에 따라 크기에 차이가 있었고, 크기는 주민의 수(數)와 관계있었다.

 

조선 시대 내륙 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읍성이 있었고, 해안 근처에는 거의

모든 고을에 읍성이 있었으며, 크기는 큰 읍성은 900미터 이상이었고, 중간 규모는

약 450~900m였으며, 작은 것은 300미터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남부 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에는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전국 곳곳에 설치되었다

이들 읍성은 조선 말기까지 존재했으나 1910년 일본의 읍성 철거령 때문에 대부분

철거되었으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읍성 중 대표적인 것은 정조 때 세운 수원읍성이다.

또한 낙안읍성, 비인읍성, 해미읍성, 남포읍성, 동래읍성, 보령읍성, 진도읍성, 경주읍성,

거제읍성, 홍주읍성, 언양읍성 등이 있는데 낙안읍성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다.

 

1983년 국내 최초로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행정 구역상 3개 마을

(동내리, 남내리, 서내리) 85여 가구의 약 300여 명이 100여 채의 초가집에

거주하고 있으며, 관광용으로 세트화한 민속촌이 아니라 실제 남도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것이다.

순천 조계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낙안읍성은 마한 시대부터 선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백제 시대에는 분차, 분사, 부사라고도 불리는 파지성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분령군으로, 고려 시대에는 양악, 낙안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낙안읍성이 현재와 같은 역사 마을로 등장하는 계기는 인조 4년(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다. 태조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김반길 장군이 흙으로 축조한 것을 인조 때 돌로 다시 쌓아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

허나 세종 때 석성으로 축조했다는 설도 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낙안읍성 대장간 옆에있는 주막집에서 시원한

동동주에다 파전으로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하다가 점심을 먹기위해

다시 여수시내로 되돌아 간다.

이순신 광장에서 바라본 종고산(199.5m:여수시 연등동 소재)

산 아래 보이는 건물이 여수공고이고, 진남관은 우측에 있어서

이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개눈에는 똥만 보인다더니

산꾼의 눈에는 산만 보이는 느낌이다...ㅋㅋㅋ

 

진남관(鎭南館:국보 제304호)은 여수시에 있는 건축물로 조선시대 400여년간

수군의 본거지(전라좌수영)로 혹은 구국의 성지로 이용되었고 전승의 사명을

다한 역사적 현장으로 여수를 상징하는 곳으로 진남관 정면에 있는 망해루는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1991년 4월에 재 복원한 2층 누각이며, 1599년(선조 32년)

기해년 12월에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세운 75칸의 거대한 객사이다... 그 후 절도사 이도빈이 1664년 갑진년에

개축하고 숙종42년(1716) 94대 이여옥 수사 때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고 숙종 44년

(1718) 95대 수사 이재면이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객사는 조선 역대 왕들의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정례참배를

행했으며 또한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는 하례를 드리고 나라에 슬픔이 있을 때는

봉도식을 관민일동이 수행해 왔다. 

 

건평 240평,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길이 75cm, 높이 14m, 둘레 2.4m의 기둥 68개가

거대하고 웅장한 모양을 자랑하며 한국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로 조선 초기 객사양식으로서

보기 드문 건물이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고 그 사이의 공간에는 화반을 받쳤는데

이러한 구성의 건축은 주심포 내지는 익공집계통의 수법에 의하여 2출목으로 짜올려서

외목도리를 받쳤으며 건물의 전후면에는 안쪽으로 제2주례에 고주들을 배치하여 그 위에

대량을 가구하였다.

점심식사는 진남관과 이순신장군 광장이 있는 근처 골목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니, 다들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다니는게 힘든

모양이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여수에서 가장 커다는

모이핀 카페 오션점이 있는 돌산도 향한다

모이핀 카페

조그만 도시에 있는 엄청난 규모의 커피집인데, 커피만 파는게 아니라,

빵과 옷, 악세사리 등 기념품들이 있고 남해안이 한 눈에 보이는

뷰가 끝내주는 곳이다...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 후에 크루즈선을 타기위해 오동도 방향으로 향한다

크루즈 여객선 타러가는 길에서 바라본 여수엑스포 광장의 모습

나이 70이 넘었어도 우리끼리 만나면 늘 초딩이 시절로 되돌아 가는 느낌

오늘 저녁에는 모든 걸 내려놓고 멋지게 즐겨보자...

환상적인 여수 밤바다의 모습

부두에서 배는 떠나고 어둠이 짙어지자 크루즈선 3층에서 

불꽃쇼가 시작되는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체면은 바다에

던져 버린체 춤을 추는 모습이 난리다...

30여분간 진행되는 불꽃쑈

여수밤바다를 보며 思索에 잠기다...모든걸 내려놓고...

오늘의 일정을 끝내고 숙소인 히든베이 호텔로 향한다

숙소인 호텔로 들어와서 뭐가 아쉬웠는지 친구들과 호텔 야외광장에서

거하게 간식을 겸한 음주를 즐긴후에 지침을 한 후에 이틀날

조금 일찍 체크 아웃을 하고 여수를 벗어나 하동으로 향한다

.

.

.

1시간을 넘게 달린 다음에 하동I.C근처에 있는 재첩국집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기사가 추천한 하동케이블카를 타러가는데

가는날이 장날이라더니 새로 공사중이라 운행을 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좁은 2차선의 도로를 따라서 40여분을 달린

다음에 사천케이블카장으로 향한다 

사천 케이블카장에서 바라본 삼천포대교의 모습

사천케이블카는 초양도에서 각산까지 이어지는 총거리 약 2.43km,

왕복 20~25분 코스로 산(각산)과 섬, 바다를 아우러며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의 케이블카라고 한다

 

60년을 넘게 인연을 이어가는 불알친구들...

삼천포대교와 각산의 모습

초양도(사천시 늑도동에 속해있는 섬) 케이블카 매표소 주변에는

죽방렴이 참 많이 보인다

 

죽방렴(竹防簾이란 물때를 이용하여 고기가 안으로 들어오면 가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건지는 재래식 어항으로 이곳에서 잡힌 생선은 최고의 횟감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물살이 빠른 바다에 사는 고기는 탄력성이 높아 그 맛이 뛰어나다.

 

죽방렴은 참나무 말목과 말목 사이에 대나무를 주재료로 이용해 발처럼 엮어 만든

그물을 세워 고기를 잡는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대나무 어살이라고도 한다.

죽방렴은 어살의 한 종류인데, ‘전통어로방식-어살(漁箭)’이 2019년 4월 국가무형문화재

(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대표적인 곳이 남해군 삼동면과 창선면 사이에 위치한 지족해협인데 지족해협은

시속 13-15km의 거센 물살이 지나는 좁은 물목으로, 멸치를 대표어종으로 하는

이 일대의 어로작업은 ‘죽방렴’ 으로 불리는 고유한 어획법을 시행하고 있으며,

현재 23개소의 죽방렴이 설치되어 있는 우리나라 전통적 어업경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다음 백과사전 인용)

죽방렴 안내판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니 남해군 창선도와 삼동면 사이에 있는

죽방렴으로 유명한 지족해협이 아스라히 보인다

우측으로는 삼천포항도 보이고...

초양도 매표소 주차장

2박3일간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하동군 진교I.C근처에 있는 유명한

흑돼지 전문 식당에서 허리띠를 풀어놓고 느긋하게 식사를 하는데

3일간의 식사중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듯 하다...쥔장과 직원들도

친절하고 가격대비 가성비가 참 좋았던 느낌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깐 휴식을 취하다가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는데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는지 곧바로 버스안은 카바레로

바뀌더니 노래하고 춤추면서 어찌나 잘 노는지 다들 참으로 대단하다.

 

하동에서 수원까지 장장 5시간 동안 노래하는 모습...아!...나는 그저 부럽기만 하다.

노래방 기계 점수에 따라 벌금(?)을 강제 징수하는데 100여만원이

걷히어 동창회 살림에 많은 보탬이 될 듯 하다...다들 고마우이...자주 만나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