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신라하대 선종의 성립 시기는, 대개 그 시기는 선종구산파 중의 하나인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개조(開祖) 도의(道義)가 귀국하는 헌덕왕 13년(821)부터, 구산파 중 최후의 수미산파(須彌山派)가 창시되는 고려 태조 15년(신라 경순왕 6년, 932)까지의 전후 112년간, 즉 거의 신라하대 전 기간에 걸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 초에도 계속하여 조동종(曹洞宗)이나 법안종(法眼宗) 등 새로운 선종의 종파가 수입되고 있어 그 하한은 더욱 내려잡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종의 성립은 재래의 교종과의 대립항쟁을 피할 수 없었으니, 선종의 입장에 서서 교선의 통합을 주장하던 법안종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다른 한편 이 교선의 대립을 교종의 입장에서 합작하려는 의도로 천태사상의 이해관계를 성립시켰던 고려 광종대(950~975) 까지 내려 잡아야 할 것이다. 이는 대체로 나말여초의 사회적인 전환기와 일치하며, 연구대상의 시기가 길고 그 종파가 분립적임을 감안해야 한다.
2. 선종의 유입
화엄종(華嚴宗)으로 대표되던 교종(敎宗)은 소의경전(所依經典) 즉, 경전에 의하여 그 종파(宗派)를 구별하였다. 이러한 교종은 일찍부터 왕즉불(王卽佛) 사상이나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에 근거를 둔 전생윤회사상(輪廻轉生思想) 등을 내세워 중앙집권체제를 강조하였고, 현실에서의 진골귀족들의 신분적 특권을 옹호하는데 이용되어, 왕실불교 및 귀족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 결과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아래에서 귀족사회의 환영을 받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반 백성에게서 멀어져 갔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에만 치우치게 되었다.
선종(禪宗)은 바로 이러한 교종의 폐단에 대해 반발하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일어난 불교계의 새로운 경향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교종과는 달리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여 경전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복잡한 교리(敎理)를 떠나서 심성(心性)을 도야하는데 치중하였다. 말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원래부터 자리 잡고 있던 불성(佛性)을 깨닫는 것이 바로 불교의 도리를 깨닫는 것(見性悟道, 見性成佛)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선종에서는 이를 위한 방법으로 선(禪) 즉,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제시하였다. 선을 통하여 각자의 마음속에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종은 개인주의적 경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3. 구산 선문의 성립
① 도의(道義)의 가지산파(迦智山派) : 전남 장흥 보림사
원적선사(元寂禪師) 도의(道義)는 선덕왕 5년(784)에 입당하여 강서 홍주 개원사의 서당지장(西當智藏, 735~814)에게서 심인(心印)을 받고 다음에 그와 아울러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 중 삼대사(三大士)의 한사람인 백장회해(百丈懷海)를 찾고 헌덕왕 13년 (821)에 귀국했다. 도의의 귀국은 당시 신라불교계에 대단한 파문을 일으켰는데, 그는 무념무수를 그 필요로 하고 권두를 들며 문답을 전개하는 가운데 심인을 전하려는 남종(南宗)의 선풍을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재래의 교학불교를 기반부터 뒤흔든 이런 새로운 선풍은 경론에 젖어왔던 당시 불교계는 용인되지 못하여, 허탄하다는 비난을 받고 결국 북산북(北山北), 즉 강원 양양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할 수밖에 없었다. 도의는 그의 심인을 염거(廉居)에게 전해주고, 이는 다시 체징(體澄, 804~880)에게로 이어졌다. 체징은 헌안왕 3년(859)에 왕의 소청으로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 주석하고 있다가 경문왕 원년(861)에 더욱 확장하여 가지산파를 이룩했다.
② 홍척(洪陟)의 실상산파(實相山派) : 전북 남원 실상사
홍척은 흥덕왕 3년(827) 전라북도 남원 지리산에 실상사를 개창하고 이곳에서 선풍을 선향하고 실상산파를 형성했다. 그의 문하에는 편운(片雲), 수철(秀澈) 등 수백인이 있었다. 그가 왕실의 귀의를 받고 개산하게 된 이후에는 입당하여 선종을 받아와 각처에서 개산(開山)하는 자가 속출하게 되었으니, 홍척 이후 계속하여 입당한 선사들 중에는 귀국하지 않은 사람과 귀국한 사람이 있었다 한다. 귀국하지 않고 당에서 활약한 사람으로는 정중무상(靜衆無相,) 상산혜각(常山慧覺) 등이며 귀국한 사람으로는 도의와 홍척에 이어 태안철(太安澈), 혜목육(慧目育), 지력문(智力聞) 등을 들고 있다. 골품제도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정치개혁을 모색하고 있던 흥덕왕과 선강태자(宣康太子)에게 홍척이 최초로 귀의를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이것은 선종의 혁명적인 성격에 공감을 느낀 것으로 보여진다.
③ 혜철(惠哲)의 동리산파(桐裏山派) : 전남 곡성 태안사
전라남도 곡성 태안사의 혜철(785-861)은 동리산파의 개산조이다. 그는 일찍이 화엄의 본찰인 부석사에서 화엄을 수학하고 헌덕왕 6년(814)에 입당하여 서당지장으로부터 그 심인을 얻고, 문성왕 원년(839)에 귀국하여 문성왕의 귀의를 받았다. 그의 문하에는 도선(道詵, 827-898)과 여화상(如和尙) 등이 있었으며, 다시 도산의 문하에는 경보(慶甫, 869-947), 여상화의 문하에는 윤다(允多, 864-945) 등이 있었다.
④ 현욱(玄昱)의 봉림산파(鳳林山派) : 경남 창원 봉림사
혜목육(慧目育)은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의 원감국사(圓鑑國師) 현욱(787-868)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입당하여 마조하(馬祖下) 장경회혼(章敬懷渾)의 선을 전하여 경기도 여주 혜목산 고달사에서 도화(道化)를 폈으므로, 혜목산화상(慧目山和尙)이라 일컬었다. 그 후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 855-923)가 현욱의 선풍을 이어받아 경상남도 창원에 봉림사를 세워 크게 선풍을 떨치게 되니 이것이 봉림산파이다. 심희의 문하에는 찬유(璨幽), 경질(景質) 등 오백여인이 있었으며, 특히 그의 제자 중 자적선사(慈寂禪師) 홍준(洪俊)이 있어 봉림산파는 더욱 융성해졌다.
⑤ 도윤(道允)의 사자산파(獅子山派) : 강원 영월 흥녕사(현 법흥사)
사자산파는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 798-868)이 남천보원(南泉普願)의 선을 전하여 문성왕 9년(847)에 귀국한 것을 그의 제자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 826-900)이 계승하여 개창한 것이다. 절중은 헌강왕 8년(882) 강원도 원주 사자산에 주지하자 헌강왕이 ‘사자산흥령선원(師子山興寧禪院)’이라고 선찰 이름을 붙여주고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키도록 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여종(如宗), 홍가(弘可) 등 1천여명이 있었다.
⑥ 범일(梵日)의 사굴산파(闍崛山派) : 강원 강릉 굴상사
통효대사(通曉大師) 범일(810-889)은 역시 마조문하(馬祖門下)인 항주(抗州) 염관제안(鹽官齊安)의 심인을 받아 와 강원도 강릉 굴산사에 주지하여 선풍을 진작하고 있었으니 고산일(孤山日)이 곧 그다. 그의 문하에는 낭원대사(朗圓大師) 개청(開淸, 835-930)과 또한 뒤에 입당하여 석상경제(石霜慶諸)의 심인을 받아 온 낭공대사(郎空大師) 행적(行寂, 832-916)이 있어서 사굴산파의 문풍을 크게 날렸다. 다시 개청의 문하에는 신경(神鏡), 청정(聽靜) 등이 있었으며, 행적의 문하에는 행겸(行謙), 수안(邃安) 등 5백여명이 있었다.
⑦ 무염(無染)의 성주산파(聖住山派) : 충남 보령 성주사
호서지방에서는 낭혜선사(郎慧禪師) 무염(無染, 800-888)이 충청남도 웅천에 성주산파를 개창했다. 그는 마조문하인 마곡보철(麻谷寶徹)의 심인을 받아 가지고 당 무종(武宗) 의 폐불사건을 계기로 귀국하여 문성왕 9년(847)에 충청남도 보령 숭암산 성주사에 주석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성주산파의 선풍을 떨쳤다. 당시의 구산파중에서 제일 번창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무염의 문하에는 당시에 사선(四禪)이라고 불려지던 순부(詢父), 원장(圓藏), 영원(靈源), 현영(玄影)이 있었으며, 그 외에 승량(僧亮), 보신(普愼) 등 근 2천여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 중 특히 원랑선사(圓朗禪師) 대통(大通, 816-883),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 862-930)도 그의 제자였으며, 후일 입당하여 운거도응(雲居道膺)으로부터 조동종(曹洞宗)을 받아와 선종구산파중의 하나인 수미산파를 개창한 진철대사(眞徹大師) 이엄(利嚴, 866-932)도 그과 관계가 깊은 사람이었다.
⑧ 도헌(道憲)의 희양산파(曦陽山派) : 경북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 824-882)은 혜소(慧昭)에게서 남종선(南宗禪)을 이어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조(四祖) 도신(道信)의 법통과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을 아울러 이은 혜은(慧隱)에게서도 그 선풍을 이어받고 있었다. 또한 도헌은 다른 선사들과는 달리 입당하지 않고 선종구산파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개산조(開山祖)가 되었던 점에서도 주목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중국의 선종을 직수입하여 들이던 단계를 벗어나 이제는 중국에서 들어온 선종의 각 종파를 종합. 절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도헌의 문하에는 양부(楊孚), 민휴(敏休) 등이 있었으며, 특히 양부의 문하에는 정진대사(靜眞大師) 극양(棘讓, 878-956)이 있어 극양은 경순왕9년(935)에 의양산에 가서 적화로 폐허가 된 봉암사를 재건하였다.
⑨ 이엄(利嚴)의 수미산파(須彌山派) : 황해 해주 광조사
구산 선문 중 가장 늦게 개창되었다. 김해부 지군부사 소율희(蘇律熙)의 후원 아래 지내던 이엄은, 성주산파의 심광이 머문 충북 영동시 영각산사(靈覺山寺)에 잠시 머문다. 고려가 건국된 918년 왕건의 요청으로 태흥사에 초청되고, 이듬해 사나내원(舍那內院)으로 가며, 932년부터 광조사로 옮겨 후삼국 통일 원년인 936년에 죽었다. 광조사는 이엄을 아끼던 태조에 의해 932년에 창건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63세에 이르렀으나 선풍을 사모해 모여든 구도자들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며 선풍을 진작시켜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수미산파의 전통이 확립되었으며, 이 전통은 고려 왕정을 비치는 등대로 발전했다. 이엄의 제자로는 황보제공(皇甫悌恭)과 왕유 등 전직 고관이 있었으며, 이들의 사상 경향은 대체로 왕정을 보익(補益)하는 성격을 띠었다고 한다.
이렇듯 신라말에 형성된 칠산 선문과 고려초에 형성된 이산 선문은 고려 중기 보조 지눌(1158~1210)에 의해 조계종(曹溪宗)으로 통합된다. 그리고 이렇게 조계선종으로 통합된 구산선문은 한국선의 원류이자 한국 불교의 정체성으로 평가받게 된다. 종래 중국불교의 13종의 하나였던 선법은 신라 하대로부터 고려 중기를 거쳐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상위개념으로 전환하여 나머지 1종 내지 12종을 통합한 선법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 중대 이래 교학의 축에 의해서만 이해해오던 불교의 지평이 이제 선의 새로운 지평과 어우러지면서 불교 이해의 지평이 훨씬 넓어지고 보다 유연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 산문의 개조나 개산조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가풍을 만들어 갔다. 그러한 독자적인 가풍은 이후 한국불교의 새로운 기반으로 자리하게 된다. 무염(無染)의 말 없는 국토(無舌土)와 말 있는 국토(有舌土), 도선(道詵)의 말 없는 말(無說之說)과 법 없는 법(無法之法), 순지(順之)의 표상현법(表相現法), 삼편성불편(三遍成佛篇), 점증실제편(漸證實際篇) 등의 담론이 독자성을 머금은 대표적인 가풍이라 할 것이다.
4. 구산 선문의 지방세력화
「신라하대 선종구산맥의 성립」의 일부 부분을 참조하면,
혜소, 무염, 도헌 등은 모두 중앙세력인 진골신분은 아니었으며, 원래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대에는 이미 육두품 이하로 전락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들 3인 뿐이 아니었다. 그 밖의 다른 선종구산파 개산조들이나 그의 후게자들도 대부분 중앙귀족으로부터 유락하여 지방에 토착화하게 된 사람이거나 지방의 피지배층 안에서 새로 등장하는 육두품 이하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을 통해 선사들의 신분에 대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각 선문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어떠했을까. 이들 선문들은 육두품이나 지방세력에 연결을 가지는 사원들로, 이들 사원에의 기증이나 투탁(投託)행위는 왕실이나 왕실 측근의 귀족에게서 널리 행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찰(願刹)’ 이라는 이름 하에 널리 창설되고 있던 이 사원들은 희사(喜捨)라는 명목의 투탁에 의하여 넓은 장원을 소유하고 면세의 특권을 누림으로써 국가의 수입을 감소시키고 있었다. 국가에서는 이에 대해 일찍부터 인식하고 그것을 금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창사가 왕실이나 귀족들의 위장된 경제기반으로 등장하는 까닭에 그 노력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왕실에 기반을 가졌거나 지방세력에 기반을 가졌든 간에 이러한 사원의 증가는 국가의 수세대상이 되는 공전(公田)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대에 오면서 국가권력의 약화와 더불어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가속화 되어, 드디어 국가경제의 파탄을 초래케 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그 중에도 특히 신라하대에 성립되는 선종구산파는 그 창시자들이 모두 비진골계인 육두품이하의 신분이었으며, 그 사회적 기반이 또한 왕실이나 중앙귀족이 아닌 지방 세력이었던 것은 주목되는 현상이다. 이렇게 몰락한 진골귀족이나 육두품이하의 출신자들이 선종의 승려가 되어, 같은 신분의 지방 세력을 그 사회적 기반으로 하면서 막대한 장원과 전정(田政)을 소유하고 고리대금업을 행하기도 했다. 이는 나말여초의 선종구산파의 각 사원들이 광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그 주위의 상당한 범위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는 하나의 지방세력으로써 등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5. 선문화
당시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했던 교종에 비해 경제적 토대가 약했던 선종은 거두절미, 단도직입의 선문화를 통해 종래의 교학과 차별화를 기했으며, 아울러 자급자족의 생활기반을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교단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노동과 수행의 일치라는 새로운 국면을 제시한 선문화는 국가권력의 영향 속에 있던 신라 교학 교단의 예속성과 몰주체성을 극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제였다. 구산 선문의 개산조들은 중국 선종의 형성과정을 몸소 보고 익히면서 노동과 수행을 일치시켜가는 선문화를 온몸
으로 체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은 귀국과 동시에 자신의 성장배경 위에서 경제적 후원세력들과 결탁하여 각 지역의 산문에서 노동과 수행을 등한시하는 교종의 한계를 극복해 가려고 했다.
① 노동과 수행의 일치
구산 선문의 개산(開山)을 도왔던 시주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사원은 광범위하게 늘어났다. 이들 사원의 경제력 확대로 인해 공전이 감소하였음은 앞서 서술했으므로 차치하고, 광범위하게 확보한 전답을 일구기 위한 산문(山門)의 활동에 대해 주목하도록 하겠다.
드넓은 전답을 일구기 위해서 사찰에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때문에 선사들도 노동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성주산파의 무염은 절을 짓거나 고칠 때에는 반드시 대중들과 함께 하였다. 물 긷고 섶을 질 때도 몸소 했다. 이러한 노동과 수행의 일치는 이미 중국의 선종으로부터 일반화된 것이다. 후발 주자였던 선종이 중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먼저 물적 토대가 되는 자급자족의 생활 기반이 요청되었다.
② 검소와 간소의 문화
선문화는 거두절미, 단도직입의 언표(言表)처럼 검소와 간소를 지향한다. 하지만 신라 중하대의 대표적 교단이었던 유가와 화엄교학은 그 담론이 복잡다단하여 일반인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하대에 전래된 선법은 이들과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선법은 팔만대장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마음 심'자 하나로 정리하기도 하고, 붇다의 일대시교를 '자심'(自心)의 역사로 통찰하기도 한다. 때문에 이러한 거두절미와 단도직입의 선문화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검소와 간소의 문화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선문화는 반드시 필요한 '장엄'이 아니면 일단 모두 생략한다. 선은 자신의 마음(自心)과 자신의 본성(自性)을 밝히는 것에 궁극적 지향이 있기 때문에 다른 무엇에 대한 헌공의 문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심과 자성이 근본이듯이 간소와 검소의 문화는 수행자의 삶의 방식이며 동시에 당시 불교인들의 삶의 양태라고 보았다. 때문에 노동과 수행이 일치되었으며 일상과 직절의 화법이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③ 일상과 직절(直切)의 화법
선이 불립문자, 교외별전 위에서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메시지를 드러내듯이, 선법은 언어 이전 혹은 언어를 넘어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때문에 선은 '말 없는 말'과 '법 없는 법', '할'과 '방', '주먹'과 '눈썹' 등을 통해 직절하게 말하고 있다. 압축과 절제, 파격과 단순의 미학은 선문화의 특징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한 마디' 내지 '한 몸짓'이면 족하다. 그 한 마디와 한 몸짓을 터득하기 위해 무수한 경교를 보고 무량한 세월을 닦는 것이다. 일원상으로 묘사되는 본래면목은 이렇게 단일한 정신을 지향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문화의 전래는 일상과 직절의 화법을 보편화시켰다.
6. 결론
이상에서 진골의 몰락자나 육두품이하의 출신자들이 왕실이나 중앙귀족을 그 사회적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지금까지의 교종불교의 전통적인 권위에 대하여, 반성하고 반항하는 성격을 가진 선종의 승려가 되어 지방의 호족세력을 그 사회적 기반으로 하면서 각처에서 선종 구산파를 성립시키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신라중대의 교학불교의 모순과 한계를 자각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체계로써 선종을 성립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이후의 한국불교사의 전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상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는 자체 내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에, 교선의 대립이 한창일 때에, 그 교선대립의 극복을 목적으로 교의 입장에서 선을 흡수하는 천태사상에 대한 이해체계를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이후 다시 한계점에 이른 천태종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선의 입장에서 교를 포섭하는 조계종을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 하대에 전래된 선은 이 땅에 새로운 문화를 정착시켰다. 이 문화는 신라 중하대 이래 교학 교단이 주도하던 시대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흔히 '선문화'로 표현되는 이 시대의 삶의 양식은 현학적이고 번쇄해 보이는 유가 내지 화엄의 문화와 달리 일상적이고 직절한 문화를 대변했다. 오랫동안 복잡한 문화에 익숙해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선문화는 매우 낯설고도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종래의 가치관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이들은 선문화를 허황된 궤변이라고 몰아쳤다. 하지만 대중들은 골품 귀족 중심의 교학문화와 달리 일상 속에서 누구나 성불할 수 있는 선문화에 대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선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마련되고 능동적으로 그 지평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일부 왕족과 지방 호족들의 지원에 의해 구산 선문이 개산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거점을 확보한 이래 선문화는 일상 속으로 깊게 스며들어가게 된다.
압축과 절제, 파격과 단순의 미학으로 표현되는 선문화는 신라 하대의 변동기에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주도했으며 새로운 사유를 갈망하는 당시 사람들에게 깨달음에로 나아가는 일대 진전의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선 문화의 전래는 신라 중대 이래 경직되고 편향된 불교 이해의 지평에 탄력성과 역동성을 주었다. 그리고 신라말과 고려 초에 자리잡은 구산선문의 형성은 그 개방성과 유연성을 통해 한국문화의 외연을 넓히는 기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최병헌, 「신라하대 선종구산맥의 성립」, 『한국사연구 7』, 1972.
고영섭, 「신라말 선문화의 형태와 발전」,『한국선학 2집』, 1999.
김두진,「나말여초의 교종과 선종」,『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1994.
김철준, 「고려초의 천태학 연구」, 『동서문화 2』,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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