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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재사(西枝齋舍:국가민속문화재 제182호)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에 있는 조선후기 에 건립된 김성일 관련 건축물로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김성일(金誠一)의 재사로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재사 서쪽 약 5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김성일 신도비의 건립연도가 1634년(인조 12)으로
기록되어 있어 재사는 이보다 늦은 170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일의 묘소가 있는 산 아래의 동쪽 기슭에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앞으로는 밭이 넓게 전개되어 있으며, 약 200m 전방에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통하는 국도가 보인다.
건물의 정면은 누다락집으로 되어 있으며, 안채는 뒤쪽의 경사지를 이용하여 높은 터에 위치하기
때문에 안마루의 바닥높이가 누마루 바닥보다 높다. ㅁ자형 재사의 5칸의 누다락 정면은 누하(樓下)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어간(御間)에 대문을 내었을 뿐, 양옆의 앞쪽은 흙벽으로 막았다.
안마당 쪽을 개방하여 수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누하어간의 대문을 들어서면 각 변이 3칸인
방형 중정에 이르는데, 정면에는 3칸의 대청이 설치되어 있다.
대청 왼쪽의 마당 쪽으로 나앉은 안방은 윗머리의 뒷방을 통하여야 대청으로 직접 출입할 수 있어
동선처리가 석연하지 못한 감이 든다. 대청의 오른쪽에는 2칸통으로 된 윗방과 마루방 1칸, 사랑방
2칸이 차례로 배열되어 앞채의 누마루 측면과 직교하였다.
안대청에서 누마루까지는 난간을 세운 쪽마루로 연결하였다. 앞채의 누마루는 누하에 두리기둥을 두고
누상에는 각주를 세웠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지붕 가구(架構)는 3량가(三樑架)로 사다리꼴 판대공을 사용하였고, 보 밑에 깔아놓은 보아지는
수평으로 길게 뻗어 나와 무력한 감을 준다.
누마루의 정면과 왼쪽 측면 벽은 판벽이며 매 칸의 중앙에 두짝여닫이 널문을 내었고 안마당 쪽은
개방하여 헌함을 설치하였다. 안채는 높은 자연석 축대 위에 각주를 세운 위에 3량가로 구성되었고
사다리꼴 판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올려놓았다.
안대청의 뒷벽에도 각 칸의 중앙에 두짝열개 널문을 달았다. 전면에 누다락이 있는 ㅁ자형 평면으로 된
재사의 일반적인 형식을 보이고 있으나, 경사지를 이용하여 안채 대청바닥을 누마루보다 더 높게 설치한
것이 눈길을 끈다. 간살이나 창호에 부분적인 변형이 다소 가하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 재사건축의
실례로서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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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사(齋舍)란 조상의 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을 말한다.
당연히 무덤 가까이에 있고, 살림집과 달리 사용하는 횟수가 정해져 있다.
이곳은 죽은 자들을 위한 산 자들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조선사회의 중추는 사대부들이었다.
고려시대의 귀족과 달리 이들은 과거를 통해 벼슬을 얻었고, 벼슬에서
물러날 땐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자신의 세거지(世居地)로 돌아왔다.
사대부들은 직업 관료가 아니었다.
급료는 사실상 미미한 것이었고, 그들의 기반은 향촌사회라는 지역적 경제기반 위에 있었다. 조선사회는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제였지만 경제는 지역의 토착 성씨들이 나누고 있었다. 그 결과 가문은 모든 가치에
대해 우위에 있었다.
심지어 과거에 급제해 관료가 되는 것조차 지역사회에서 가문의 존재를 높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도 했다.
제사는 이런 가문의 결속을 위해 문중의 구성원이 모일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
율곡 이이는 조선사회가 안정돼 가던 조선 중기를 이미 쇠락기로 진단했다.
조선은 이미 다양성을 잃고 제도적으로 굳어져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재사건축이 나타난 것도 그 시기다. 피란 가는 임금의 가마에 돌을 던질 정도로 임진란 이후 급격히 무너져 가는
조선사회를 붙들고 매달린 것은 예학(禮學)이었다. 사대부들도 임란 이후의 급격한 사회 변동을 씨족공동체
내에서 다잡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사를 지었다. 기호학파에서는 사계 김장생이, 영남학파에서는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1538∼1593)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가
조선 후기의 예학 이론을 정립해 가던 시기였다.
경북 안동의 서지재사(西枝齋舍)는 1700년 즈음 학봉 김성일의 묘제를 지내기 위한 재실로 건축되었다.
가문과 학파가 일치했던 당시의 씨족들은 학봉의 예학을 바탕으로 안동지역 살림집의 특징인 ‘뜰집’의 형식을
재사건축의 형식으로 옮겼다. 안동 지역의 집들은 산지가 많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대부분 안채가
사랑채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
서지재사는 거의 평지인데도 이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대청의 기단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형식을 지키려는 안간힘과
절제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성리학적 이념이 충돌하고 있다. 한 건축의 전형에서 한 시대가 저무는 모습이라니.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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