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기 판옥선, 거북선의 전술적 구조[장학근교수님 자료에서 발췌]
1. 서론
2. 조선군선의 선형 변화
3. 군선으로서 거북선 구조
4. 결론
1. 서론
이순신은 임진왜란 7년 전쟁 중, 해전을 모두 승리하여 국난을 극복한 민족의 영웅이다. 그가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을 받게된 것은 군인의 수, 군인의 정예도, 무기, 군량, 후방 지원체제 등 전비체제 전반에 걸쳐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가 열세했던 상황에서 국난을 극복하고 귀중한 생명을 조국에 받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순신의 행적과 그가 창제했다는 거북선이 한민족에게 숭모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결과 거북선이 실체 이상으로 미화되고 신비화되었다.
본고는 주변상황에 따라 우리 나라 군선의 선형 변화현상을 통해 거북선이 출현하게 된 배경과 임란 당시 해전에서의 돌격선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거북선의 구조, 그리고 임란 이후 제기된 거북선 개조론을 고찰하여 신비에 싸여 온 거북선의 실체를 밝혀 보려 하였다.
2. 조선군선의 선형 변화
선초의 군선은 맹선제였다. 대맹선은 수군 80명, 중맹선은 수군 60명, 소맹선은수군 30명이 승선할 수 있는 배였다.
세조 13년에 마무리된 맹선제는 평시에는 조운선으로 전시에는 군선으로 이용되었다. 진관체제라는 방위개념에 따라 전국 해안에 배치되었던 맹선들은 왜구의 침탈을 방어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실전에 배치된 맹선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즉 "해상에서 왜구를 만나면 속도가 느리고 기동이 둔하여 왜구선을 추격하나 따라잡지 못했다."
조선의 군선인 맹선은 왜구를 제압하기 위해 많은 인원과 무기, 그리고 군량을 적제하고 해안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해적질을 목적으로 조선연해를 침입하는 왜구의 선박은 조선의 맹선에 비해 선체가 작고 날렵했다. 따라서 왜구선을 목격하고 추격했지만 선체가 둔하여 나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 수군들은 왜구선을 나포키 위해 왜군선과 크기가 유사한 비거도선이라는 소형 경쾌선을 임기응변적 군선으로 활용하였다. 비거도선이란 당시 어로 작업을 위해 만들어진 소형 선박이었다.
맹선제는 선체가 둔하고 속력이 느려 왜구를 추격할 수 없다는 건의와 현지에서 비거도선과 같은 소형 경쾌선을 제작하여 왜구방어에 이용된다는 보고는 세종때부터 연산조까지 계속 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맹선제를 개선하여 속력이 빠른 군선 건조가 요구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의 군선이 소형 경쾌선으로 선형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삼포왜란이 발생했다. 삼포왜란이란 중종 5년 제포 염포 부산포에 살고 있던 왜인들이 조선의 각종 제한조치에 불만을 품고 대마도 왜인들과 연계하여 삼포에서 일으킨 대규모 반란 행위였다.
당시 왜인들은 제포와 부산포 첨사와 인근지역 주민을 살상하고 대대적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였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중앙관을 파견하고 경상도의 전 수군을 동원하여 왜란을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형경쾌선으로의 선형변화가 행양방위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이 다음과 같이 지적되었다. "단지 소형선이 사용되고 있었는데, 소형선이 비록 속력이 빨라 왜선을 추격할 수는 있었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부적합했습니다. 그것은 군졸과 병기를 많이 승선시키 지 못하여, 적선을 추적했으나 적들이 칼을 들고 돌입해 오면 비록 용감한 우리 병사라도 당해내지 못합니다. 이제 대선으로 대처하면 선체가 높아 적들이 기어 오르지 못하고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고 화포를 소면 적을 쉽게 제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포왜란 이후 소형경쾌선이 해전에 부적합하다고 지적된 것은 군졸과 무기를 충분히 적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형경쾌선으로 왜구선을 추격했지만 백병전에 능한 왜구들은 쉽게 우리 군선으로 돌입하여 추격한 우리 군선을 역으로 제압했다는 것이다. 또한 삼포왜란은 대규모 왜인들의 침탈 행위로서 종전 소규모의 왜구 침탈과는 그 성격이 다른 준 국제전이었다. 전쟁에 준한 대규모의 침략에서는 소형 경쾌선이 군선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삼포왜란부터 을묘왜변이 일어난 중종, 명종 년간에 야기된 각종 왜변에서 조선의 경쾌선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례를 들어 여러 전략가들은 선제 개혁론을 제기했다. 그 중 관중추부사 송흠의 선제개혁안은 판옥선 출현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저 당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면이 판으로 옥을 만들었고, 그안이 넓어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고, 항해와 전투에 필요한 기구와 무기를 싣지 않은 것이 없으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적이 없어 해전을 하면 모두 승리합니다. 우리 나라 군선은 이것과 달이 연해 요해처에 별도의 전함을 준비하지 않아 비록 공선과 사선의 척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선체가 협소하고 사면이 트여서 적의 공격을 막아줄 방패막이가 없습니다. 군선 만들 때 감독하여 당선과 같이 판을 사용한 방패를 설치하도록 하십시오"
송흠의 선제개혁론은 맹선제로의 복귀가 아니었다. 그는 군선이 갖추어야 할 중요 요소중의 하나인 연력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인원과 무기를 충분히 적재하면서, 전투시 아군의 피해를 감소할 수 있는 새로운 선제를 주장한 것이다. 즉 당선이라고 지칭되는 명나라의 군선이 사면을 판으로 옥을 만들어 승조원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을 분더러, 우리의 적인 "왜구선도 옥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우리도 판옥선을 만들어 해양방위에 임해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판옥선은 이와 같이 주변국의 선형변화에 대처하고 국제전에 대비하기 위해 중종, 명종때 출현한 군선이다. 판옥선이 비록 명나라와 일본의 선형을 참조하긴 했으나 명과 일본의 군선에 비해 안전성과 전투 능력이 우수한 군선이었음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입증되고 있다.
즉 명나라의 옥선인 '누선이 선체가 너무 커 노로서는 운행할 수 없다.'는 명나라 정략가의 자체평가 나 '일본의 누각선은 선체가 좁고 판자가 얇아 대포를 적재할 수 없었다는 조선 전략가의 분석'이 바로 조선의 판옥선이 주변국의 군선보다 우수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판옥선이 견고성과 안전성에서는 명과 일본의 군선보다 우수했지만 속력만은 일본의 군선보다 열세였음이 다음 기록에서 입증되고 있다.
"선조: 사람들이 왜선은 적은데 우리 배는 크다고 한다. 저들이 우리처럼 큰 배를 만들어 대포를 싣고 오면 어찌하겠는가?
이항복: 황윤길등의 말을 들으니 우리의 배보다 큰 적선이 많다고 하엿습니다. 그러나 임진년 이후 접전처에서 큰 배를 보지 못했습니다. 황신이 판옥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갔을 적엔 왜인들이 그 제도를 보고 좋아하였으나, 느리고 무거운 것을 싫어하여 만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배 부림에 있어서도 우리는 3풍(순풍,황풍,역풍)을 사용하는데, 저들은 1풍(순풍)만을 쓸 뿐 황풍이나 역풍을 쓰지 못합니다."
위 대화 내용 중 조선의 판옥선이 왜선에 비해 선체가 크고 견고하여 화포를 적재할 수 있었으나. 일본 사람들은 판옥선이 왜선에 비해 선체가 크고 견고하여 화포를 적재할 수 있었으나, 일본 사람들은 판옥선의 속력이 느린 것을 싫어하여 전투능력이 우수한 판옥선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 사람들이 선체가 허약하여 화포를 적재하지 못한 점을 보완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그들 군선의 장점인 속력의 빠름을 지속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것은 조선의 판옥선이 일본의 군선과 비교하여 속력이 느린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수군은 판옥선의 단점인 느린 속력을 범 사용으로 보안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투국면에 돌입했을 때 군선의 범을 사용하지 않고도 원활한 기동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둔한 판옥선으로 기동이 원활한 왜선을 추격 제압할 수 없었다. 고대 해전은 화포의 사정거리가 단거리였으므로 자연히 근접전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전투국면에 돌입하면 범보다 노에 의존하여 기동해야만 했다.
판옥선의 이러한 전술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거북선이 출현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충무공 이순신은 거북선을 전투에 투입한 후 거북선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계속 지자포, 현자포를 쏘고 뒤이어 포환과 활, 돌을 비와 우박이 퍼붓듯 하니 적의 사기가 이미 꺽이어 물에 빠져 죽기 바쁘니 이것이 해전에 쉬운 점입니다."
속력이 느린 판옥선에 앞서 거북선을 돌진시켜 기선을 제압한 후 화력이 우수한 판옥선으로 승세를 굳혔다는 이순신의 보고는 바로 판옥선의 단점인 속력의 느린 점을 보완하기 위해 거북선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판옥선은 속력이 느리다는 점만 제외하면 선체가 경고하고 커서 적이 기어 올라와 백병전을 할 수 없고, 인원과 화포를 많이 적제하고 있어 강력한 전투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며 화포를 구사하기 때문에 여타의 군선보다 강력한 화력과 명중률이 우수한 장점을 지닌 군선이었다.
판옥선이 이러한 장점을 지니게 된 것은 판옥선의 구조가 3층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계가 밝힌 판옥선의 층별 용도는 1층이 병사들의 침실, 무기, 군량등을 적제하는 곳이며, 2층은 노군과 사부들이 임무를 수행하는 곳이고, 3층은 화포와 포요원이 위치
하는 곳이다.
판옥선은 선체위에 2층의 판옥 구조물을 첨가 설치하여 2층에 노젖는 적군과 활쏘는 사부를 위치시키고 3층에 포요원을 배치시켰다. 그 결과 사부의 안전을 도모하고 포의 사정거리와 명중률을 높이게 되었다.
그러나 판옥선은 선체가 커 기둥의 불편이 있고 포요원이 사상되는 전투적 결함이 발생하자 이를 보완키 위해 거북선이 출현케 된 것이다. 따라서 거북선은 판옥선의 장점을 유지하고 단점을 보완키 위해 선형이 변화된 군선이었다. 이순신이 당포해전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신이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술회한 것은 바로 거북선이 판옥선의 장점을 유지하고 단점으로 보완한 신형군선이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3. 군선으로서 거북선 구조
1)총통과 이판
거북선은 전투시 판옥선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한 신형 군선이다. 판옥선의 전술적 장점은 승조원의 임무에 따라 그들의 위치를 구분했다는 것이다. 즉 전투시 대기요원은 1층인 저판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고, 노꾼과 활쏘는 요원은 2층인 갑판에 그리고 포요원은 3층인 옥상에 위치시켰다. 그 결과 전투시 혼잡은 피하고 노군과 사부가 안전하게 배를 운항 할 수 있게 하였으며,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고 화포를 구사함으로써 사정거리와 명중률을 높혔다.
그러나 전투중에 옥상에 위치한 포요원이 사상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옥상부분에 덮개가 없기 때문에 적의 조총에 노출됨으로써 야기된 현상이었다. 이순신은 적을 제압하는 데 주력무기인 총통의 효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포요원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방안을 구상하였다. 그것이 바로 개방된 옥상에 덮개를 하는 방안이었다. <충무공 전서>에는 이 과정을 디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배 위에는 판자를 덮고 판자위에 십자로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겨우 다닐만하게 하고 그 밖에는 모두 송곳칼을 꽃았는데 .... 총구멍은 전후 좌우에 각각 6개씩으로 큰 탄환을 쏜다" "이판위에 거북무늬를 그렸고 그 곳 좌우에 각각 문에 두 개 있으며, 거북머리 아래 대포 구멍이 두 개, 고판 좌우에 대포 구멍이 각각 한 개, 현판 난간좌우에 대포 구멍이 열 개, 복판 좌우에 대포 구멍이 각각 6개이며, 좌우 노는 여덟개이다" 위 기록 중 전반부는 임란당시 거북선을 묘사한 것이며, 후반부는 충무공 전서가 편찬된 당시의 거북선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충무공 전서는 이러한 사정을 구분치 않고 합쳐 기록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독자들이 거북선 구조를 이해하는데 혼란을 초래케 하였다. 임란당시 거북선의 포혈은 좌우 각각 6개였다. 그것은 돌격선의 임무에 적당한 화력이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해전 승리의 요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군선이 일본의 군선보다 선체가 크고 견고한 장점이 있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거북선의 선체가 점차 커졌던 것이다.
선체가 커진것과 비례하여 화포의 적재도 증가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사정은 나타내는 것이 위 인용문중 후반부이며 이는 임진란 당시의 거북선이 아니라 충무공전서가 발간되는 정보 당시의 거북선을 묘사한 것이다. 임란 당시 거북선에는 좌우 각각 6문의 포를 적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총 12문의 총통을 어느 곳에 위치 시켰느냐 하는 것이다. 위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이판 "좌우에 대포구멍이 각각 6개"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판이란 거북선의 덮개를 말한다. 덮개 좌우에 6개의 포문이 있다는 것은 거북선에 '판옥선의 옥상에 해당하는 상갑판'이 있어 그 곳에 총 12문의 총통을 좌우 6문씩 나누어 그것을 밖으로 향하게 배치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포의 위치를 3층에 별도로 배치한 것은 포를 쏘면서 노를 저을 수 있게 하여 군선으로서의 기능을 최대로 살리자는 것이며 포연을 빨리 배출하여 군사들의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는 전술적인 의도를 참작한 것이었다.
또한 총통 발사시 심한 포성으로 지휘 통신 체제가 와해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거북선 연구 결과가 거북선을 2층구조로 파악함으로써 전투시 '포를 쏘면 노를 사용치 못하고 노를 사용하면 포를 쏘지 못하는 조잡한 군선'으로 전략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2) 노의 모양과 위치
노의 위치와 모양은 선박의 속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임란 당시 거북선은 돌격선의 임무를 성실히 달성하여 그 명성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거북선의 기동성을 증명할 수 있는 노의 모양과 위치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거북선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인 충무공 전서 마저도 통영 구선은 노가 좌우 각각 10개, 좌수영 거북선은 노가 좌우 8개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따름이다.
거북선의 노의 모양과 위치 문제에 관하여 과학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사람은 미국인 언더우드씨였다. 그는 박사 학위 논문인 <한국의 선박>에서 거북선의 노를 서양의 바이킹노로 비정하고 노의 위치도 수군의 침실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와 같은 추론은 한국 전통배의 특성을 모른체 서양배를 거북선에 대입한 오류의 소산이었다. 언더우드가 제안한 성야식 노를 부인하고 한국의 전통노인 조선식 노를 거북선에 사용했다고 주장한 사람은 남천우교수였다. 남교수는 그의 저서 <유물의 재발견>에서 판옥을 가목위에 세워 노를 판옥안에서 젖도록 하였다. 이 혁신적인 제안은 이의없이 받아들여져 이후 거북선 모양의 제작과 연구서에는 모두 남교수의 제안을 채택하고 있다.
남교수의 제안에 다르면 거북선의 안전장치인 판옥이 완벽하여 승조원의 사상자가 발생할 수 없다. 그러나 <충무공전서>에는 다음과 같이 거북선 승조원중에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이순신 스스로 중앙에 보고 하고 있다.
"본영 거북선 사병인 사삿집 종 김말손, 정춘...등이 철환을 맞아 전사하였다. 신이 타고 있는 배의 노군이며 토병인 김국, 백법, 김연국, 보자기 장등, 고풍손, 방답1선의 격군인 토병 간들메, 수군 정귀현, 그곳 거북선 격군인 수군 김윤방, 서우동, 김인산, 김가응적, 이수배, 송상적....본영 거북선의 격군이며 토병인 김연호,종억기,홍윤세,정걸,장수,최통한,구군 정희종,조언부 박개춘, 전거지등이 철환에 맞았으나 중상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본영 거북선의 토병 정인어, 박언필...방답1선 격팔군 종 춘호, 종보탐,방답진 거북선 격팔군 종춘세,중연석..등이 철환에 맞았으나 조금 상한 것외에는 달리 다친 사람이 없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보여지듯 한산도 해전과 부산포 해전에서 거북선 승조원 중 사상자가 노를 젖는 격군과 활을 쏘는 사부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남교수의 제안에 따르면 판옥선과 거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바로 2층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 곳은 두터운 판자로 견고한 방패가 둘러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곳에서 전투에 임한 사람들만 사상되었다면 판옥의 설치가 기존의 학설과 큰 차이점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북선의 방패는 격군과 사부의 안전을 위해 설치된 것인데 임한 기간 해전에서 유독 방패로 보호된 격군과 사부중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점과 당시 일본군의 주력무기는 조총이었다는 점, 거북선의 승조원 중 사상자가 모두 조총의 탄환에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거북선의 방패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완벽한 것이 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목공술로 보아 방패를 견고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조총의 탄환이 날라 들어오게 방패를 설치했을까? 그것은 바로 노의 위치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남교수가 비정한 것과 같이 판옥을 가목에서부터 위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노를 가목에 걸치고 노꾼(격군)은 배의 본체안에서 노를 저었기 때문에 노젖는 공간이 개방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이 개방된 곳을 통해 조총의 탄환이 들어와 격군을 사상케 했을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 논리에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추론은 노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료인 거문도 한선의 예에서도 입증되는 것이다.
3) 거북선의 후진
거북선은 일반 선박이 아니라 군선이다. 군선이 갖는 특수한 성질중에 하나는 후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기동상황에 관하여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거북선은 앞으로도 가고 뒤로도 가며 종횡으로 회정하여 빠르기가 나는 것같다."
그런데 기존 거북선 연구 결과에 따르면 거북선은 후진할 수 없다. 임란당시의거북선이 후진 할 수 있다고 햇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모든 연구결과가 후진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연구성과라 할 수 없다 특히 거북선의 임무가 돌격선이었기 때문에 빠른 속력으로 적진속을 돌입하였다가 세가 불리하면 즉시 후진하여 위험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이순신의 각종 기록에서도 거북선이 돌격선이며 적진속을 돌입하여 적 진형을 와해시키고 세가 불리하면 즉시 후진하여 위험을 탈출했다는 기록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임진란 당시 거북선은 어떠한 방법으로 후진 했을까? 거북선을 복원하는데 기본 설계도면으로 활용된 것이 바로 도해사신선의 도면이다..
이것에 의하면 도해사신전에는 14개의 기록이 있다. 이것은 선체를 횡으로 단단하게 묶게 하는 역할과 판옥을 구축하는데 기본 골격의 역할을 하며 노를 저을 때 노를 거는 장소가 된다. 따라서 노를 거는 곳을 양쪽에 설치하고 후진할 경우 방향만 바꾸어 저으면 후진이 용이하다.
다만 가목의 길이를 일정하게 하지 말고 노를 거는 가목만 그 길이를 짧게 하면 노를 물빢으로 뽑아내지 않고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임란 당시 거북선도 가목의 길이를 장단으로 하여 쉽게 후진할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4) 이판의 철갑문제
우리가 거북선을 자랑스러운 민족의 유산으로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는 거북선이 일류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점에 주저함이 없다. 거북선이 철갑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기록은 <이충무공 전서>이다.
"신은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을 걱정하여 기존의 군선과는 다른 모양의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판 위에는 거북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문이 두 개 있으며 거북머리 아래 대포 구멍이 두개...." 위 기록에서 '거북선등에 쇠못을 꽂았다.' '판자 덮게에 거북무늬를 그렸다'는
것이 거북선의 철갑 주장의 유일한 사료이다. 그러나 이 기록만으로는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주장하기는 업렵다. 거북선에 관한 모든 사료에는 '판에 송곳칼을 꽂았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철판위에 송곳칼을 꽂은 것이 아니라 판자위에 송곳칼을 기록을 갖고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다고 주장하기는 무리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군선으로서 철갑과 송곳칼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 송곳칼의 기능은 '적이 거북선에 기어 오르거나 뛰어내리면 송곳칼에 찔리게'하기 위해 설치했다.
그러나 거북선 관련 모든 사료에는 철갑의 기능을 알 아 볼 수 있는 기록은 전무하다. 만일 거북선에 철갑을 설치했다면 그것은 적의 조총이나 불화살을 방어하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임란 당시 일본군의 무기종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66국에서 모은 병사가 50만, 관백이 직접 통솔하는 병사가 50만 도합 1백만,대장 150명, 전마 5만필, 대미도 5만 자루, 참도 10만자루, 장창 10만, 조총 30만, 장도 50만, 삼척도를 휴대하였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은 조총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병전에 필요한 창과 칼류를 휴대하고 있다. 거북선은 일본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군선이었다는 점과 일본군의 무기가 주로 백병전에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철갑을 설치할 이유가 없다고 보여진다. 조총 탄환의 관통을 방어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당시 조총의 관통 능력은 두터운 판자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군도 조선 수군과 같이 불화살을 사용하여 이에 대한 방어책으로 철갑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료가 있다. 명·일간의 강화회담시 방청인 자격으로 일본에 갔다가 귀국한 황진이 선조에게 일본군의 군비태세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고 있다.
"왜놈들이 궁시를 가져가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불을 붙이는 것과 줄을 늦추고 당기는데 요령을 얻기 어려워 궁시에 노력을 기우리지 않고 있습니다..... 선상에 포는 없고 항상 조총을 쏘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불화살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직사 화기인 조총만을 사용했다면 거북선의 현측이 아닌 거북선등에 철갑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불필요한 철갑을 했다면 그 무게로 인해 속력이 크게 감소되어 거북선은 돌격선으로서의 기능을 전혀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임진란 해전에서 거북선이 빠른 기동성으로 돌격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거북선 관련 모든 기록이 거북선이 돌격선으로서의 성실한 임무를 극찬하고 있다.
"수전은 우리나라가 소유한 장점이요 거북선 제도는 승첩에 더욱 긴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이 꺼리는 바가 이 거북선에 있습니다."비변사의 위와 같은 보고는 거북선의 철갑을 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나니라 돌격선의 임무를 성실히 한데 대한 칭찬이었으며 그것은 거북선의 빠른 기동에 의해 얻어진 승첩의 결과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료들을 종합해 볼 때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5) 거북선의 개조론
우리는 거북선을 이순신이 주관하여 만들었고 그것이 임란 해전에서 승첩의 요인이 되었다는 점 때문에 거북선을 완전무결한 군선으로 생각하기 쉽다.
승첩의 중요요인이 되었던 거북선도 임란 후반기에 다음과 같은 결함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군선 건조실무를 맡았던 나대용은 다음과 같이 거북선을 개조하여 새로운 신형 군선인 창선을 만들었다.
"거북선은 전쟁에 사용하기는 좋지만 사수와 격군의 숫자가 판옥선의 125명보다 적지 않고 활을 쏘기에도 불편하기 때문에 각 영에 1척만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순신이 늘 격군을 줄일 방도를 생각하다가 을해년간(1599) 군선 건조를 감독할 때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다른 모양의 배를 만들었는데 칼과 창을 빽빽히 꽃았으므로 이름을 창선이라 하였다. 격군 42명을 나누너 태우고 바다에 나아가 노를 젖게 하였더니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고 활쏘기에 편리함도 판옥선 보다 나았다."
거북선이 '전쟁에 사용하기 좋다'고 전제하면서도 승조원 특히 노를 젖는 격군의 수가 판옥선과 같고 활쏘기에 불편하다'는 지적은 임란을 치루면서 거북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선형 변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선형 변화중에 가장 큰 결점은 선체가 판오선과 같이 비대해져 이제 거북선은 돌격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북선의 선체가 점차 커진 이유는 임진·정유년의 해전에서 판옥선 같이 큰 배에 힘입어 해전의 승리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수군 통제사 이운룡의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조선의 군선이 일본 군선에 비하여 고대, 견실한 장점이 해전 승리의 요인으로 인식되면서 선체의 크기에 따라 해전의 임무가 다르다는 점이 무시되고 모든 군선을 모두 크고 튼튼하게 만들려 하였다.
따라서 거북선도 건조할 때마다 돌격선으로서의 기능이 무시되고 선체가 조금씩 커져 급기야는 거북선의 판옥선과 같은 크기가 되었고, 선체가 커진 거북선은 돌격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전에서는 여전히 돌격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군선이 계속 요구됨으로써 거북선과 별도로 창선이라는 신종군함을 만들어 실전 배치를 위한 타당성 시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 위 인용문의 주된 내용이다. 새로 만든 창선은 거북선이 대형화되면서 갖게 된 두가지의 결함, 즉 활쏘기의 어려운 점과 속력이 느린 단점을 보완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선체는 원래의 거북선 선체인 소형선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4. 결론
우리는 거북선을 국난 극복의 비기로 자랑해 왔다. 그러면서 거북선의 실체를 밝히기 보다 신비화하고 미화하는 관점을 맞추어 왔다. 그 결과 거북선을 임란의 주력 군선으로 오인하였고 잘못된 관점하에 복원된 거북선은 실제 운행될 수 없는 군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투시 군선의 기본능력인 포를 쏘면서 노를 저을 수 있는 군선의 기본능력인 포를 쏘면서 노를 저을 수 있는 군선과는 반대로 포를 쏘면 노를 젖지 못하는 군선을 만들어 놓고 완벽한 고증을 거쳐 제작한 군선이라고 고집하고 있다. 그것은 시대상황과 요청에 의해서 선형이 변화되었다는 점을 무시한 데서 야기된 오류였다.
거북선은 돌격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제작된 군선이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군선인 판옥선의 장점을 유지하고 단점을 보완하였다. 즉 판옥선의 장점은 포를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면서 발사함으로써 사정 거리를 늘리고 명중률을 높였다. 그리고 격군과 사부를 판옥으로 보호하여 전투 사기를 고양하였다. 그러나 선체가 크고 속력이 느린 단점이 있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이 지닌 화포 구사력의 우수성과 승조원의 안전성을 높인 구조를 계승발전시키고 속력이 느린 점을 보완하였다.
그 방법으로 선체의 구조를 3층으로 하고 덮개를 씌우는 한편 선체를 판옥선보다 작게 만들어 속력을 빠르게 하였다.거북선은 당시 왜군의 무기체계에 따라 방어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철갑을 할 필요가 없었다. 거북선이 군선으로서 훌룡한 점은 철갑을 씌웠기 때문이 아니라 3층 구조를 이루어 전투시 혼란을 방지할 수 있도록 군사를 분산배치하였고 기동과 화력을 동시에 구사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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