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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역사속으로

조선 후기의 지식인, 박지원! 새로운 길을 찾다

by 범여(梵如) 2012. 4. 3.

 

조선 후기의 지식인, 박지원! 새로운 길을 찾다

 

 

문체반정의 대상이 되다


1792년 10월 19일, 정조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명청소품(明淸小品)과 패관잡서(稗官雜書)에 대한 강경한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고,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대대적 검열이 실시했다.

지식인들의 일부 저술에 보이는 타락한 문풍을 바로잡아 고문(古文)을 부흥시킨다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추진된 것인데, 정조는 조선의 문풍을 타락시킨 원흉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지목했다.

1780년, 중국을 여행한 박지원이 체험을 바탕으로 쓴 <열하일기>. 이 글을 쓴 박지원은 누구이고, 이 기행문에는 얼마나 혁신적인 글이 담겨 있기에 <열하일기>는 조선 후기,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일까?

조선 후기 신드롬의 중심


1737년(영조 13년) 2월 5일, 대대로 서울에서 살던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박지원은 ‘붓으로 오악을 누르리라’는 꿈의 예시까지 받을 만큼 출생이 특별했다.

그러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박지원은 그의 나이 16세에 결혼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글을 배우며 학문의 세계에 들어섰고 30세 무렵 실학자 홍대용과 교류하며 서양의 신학문에 눈을 뜨게 된다.

이렇게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에 글을 익힌 탓인지 연암은 독특한 문체와 참신한 사고로 <양반전>을 썼는데, 공부에 전념하느라 가족을 부양하는 데는 무관심한 가난한 선비와 부를 이용해 양반 자리를 샀다가 양반들의 허위 의식에 염증을 느껴 스스로 평민으로 돌아가는 상인을 등장시킨 소설 <양반전>에는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과 해학이 담겨 있다.

그리고 자유롭고 기발한 문체와 양반을 향한 통렬한 고발은 많은 파문과 신선한 돌풍을 일으키며 그를 따르는 선비들을 낳았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이 당대의 이름난 학자들이 연암의 제자들로 18세기 후반 조선 지식사회의 변화를 추동했던 이들을 세상은 ‘북학파’라 불렀는데, 이들이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의 문물도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북학파’로 불린 데는 이유가 있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열하일기>의 집필

사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경험한 조선에는 남한산성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1780년 6월, 사촌형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 축하사절단에 참여하게 된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 말, 한양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5개월 동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됐다.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던 청나라는 중국의 주인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으며 선진 문물을 이끌어가는 신천지였던 것이다.


때문에 짧은 여행 기간 청나라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치밀하게 기록해 26권 10책으로 이루어진 기행문 <열하일기>를 펴낸 박지원은 청나라의 발달한 기술과 유통 구조를 배워서 낙후된 조선을 부강하게 하자는 뜻을 펼쳤고 그의 사상은 연암을 따르던 젊은 학자들로 이어져 ‘북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연암인가?


그렇게 글을 통해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며 중세의 시대를 살아가던 조선에 한 줄기 빛을 던져준 박지원은 북학의 정신을 직접 현장에서 구현하기도 했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 감역’으로 관직에 나아가 한성 판관, 안의 현감, 면천 군수를 거쳐 1801년, 양양 부사로 은퇴할 때까지 백성들의 구휼에 힘쓰고, 수차나 베틀, 물레방아 등을 제작해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연암의 뜨거운 열정은 18세기 조선을 바꾸지 못 한 채 성리학에 위배되는 불온한 사상과 문체가 치부돼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벽에 부딪히게 되었고, 연암은 1805년 생을 마감했는데...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던 박지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표작인 <호질>, <허생전>, <열하일기> 등에는 시대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물을 늘 새롭게 인식했던 깨어있는 지식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이로 인해 탈근대를 외치고 세계화를 지향하는 현대에도 독자들을 매료시키니 조선의 르네상스로 명명되는 18세기.


이 시대가 새로운 시대로 불리는 이유는 신세계를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살다간 연암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