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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역사속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왕, 선덕여왕

by 범여(梵如) 2012. 4. 11.

 

한국 최초의 여성왕, 선덕여왕

 

 

  '마담 프레지던트' 시대의 서막
‘마담 프레지던트(Madame President)’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지난 1일, 브라질에서 지우마 호세프(Dilma Vana Rousseff) 후보가 사상 첫 여성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비롯해 올 들어서만 호주, 스위스, 슬로바키아 등 7개국에서 여성이 정상에 오르는 등 21세기 지구촌에는 여성 지도자 열풍이 불고 있는데, 한국에도 최고의 통치권좌에 오른 여성이 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자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선덕여왕이다.

덕만 공주에서 선덕 여왕으로
정확한 출생 연도는 전해지지 않지만,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역사책,《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의 장녀로 태어난 덕만 공주는 632년에 왕위에 올라 1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53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던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23대 법흥왕 이후로는 신라 최고의 신분층인 성골! 즉, 부모가 모두 왕계(王系)로 왕과 함께 왕궁에 사는 지근(枝根)간의 왕족만 권좌에 올라야 한다는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딸인 덕만 공주가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는데,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인 측천무후보다 반세기나 빨랐던 선덕여왕의 즉위가 결코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대내적으로는 즉위 1년 전인 진평왕 53년(631), 덕만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모반이 일어났으며, 대외적으로는 당 태종이 부정적 시각을 천명해 신라와 냉랭한 기류가 조성됐는데,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탄생이 가능했던 이유는 선덕여왕의 타고난 지혜와 총명함 때문이다.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
한국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이해하고 개성적인 상상력으로 해석해낸 고려의 승려, 일연은 <삼국유사>에 ‘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라는 제목을 달아 선덕여왕의 지혜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여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모란 이야기로 당 태종이 모란 그림과 꽃씨를 보내니 여왕이 그림을 보고 향기 없는 꽃이라 말했다. ‘그림 속의 꽃은 아름답지만 벌과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었는데, 뜰에 심어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두 번째는 옥문지(玉門池) 사건이다. 636년 영묘사(靈廟寺)의 옥문지에서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모여 울자, 병사의 형상과 흡사한 개구리의 성낸 모습에서 백제의 침입을 간파한 여왕은 ‘여근곡에 백제 군사들이 숨어 있으니 공격하라’는 명을 내렸고 실제로 여근곡에 매복해 있던 백제 병사를 섬멸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지혜는 도리천 장사 이야기로 여왕은 일찍이 자신이 죽을 날을 예고하고, ‘도리천’에 장사지내달라는 당부했다. 하지만 신하들이 불교의 이상향인 ‘도리천’이 어딘 지를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여왕은 '낭산 남쪽'이라고 말했다. 선덕 여왕은 정말 자신이 예견한 날 세상을 떠났는데, 10년 후 문무대왕이 사천왕사를 여왕의 무덤 아래에 세우는 일이 있었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 했으니, 후세들은 그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됐다.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다
타고난 총명함에 지도력을 겸비한 선덕여왕은 즉위 첫 해부터 전국에 관원을 파견해 진휼(賑恤)하고 농사를 업으로 짓는 백성을 위해 하늘과 별을 관측하는 첨성대를 세우는 등 민심 수습책을 시행했다.

진평왕의 3년 국상이 끝난 634년에는 선친 때부터 쓰던 연호 대신 ‘인평(仁平)’을 사용해 당나라에 대해 자주정신을 견지하고 ‘향기 나는 황제의 절’ 즉, 선덕여왕의 절이란 뜻의 ‘분황사(芬皇寺)’를 건설하는 등 불교의 힘을 빌려 정치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는데, 사실 당시, 외세의 침략에 끝없이 시달리던 신라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642년,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 서쪽 40여 성을 빼앗아갔고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도 고구려·백제의 침공을 받았는데,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원병을 청하고 김유신을 압량주(경산) 군주에 임명해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또 백성들의 단합을 꾀하고 대외적으로 '신라의 위상'을 표방하기 위해 645년 황룡사 9층 목탑을 완성하는 등 신라의 문화 예술 발전에도 공헌했다.


하지만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는 등 ‘첫 번째 여왕’으로서 선구자적 어려움을 치러야 했던 선덕여왕은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열흘 후 반란은 진압됐다.

한 나라의 어머니이기를 선택하다
역사상 첫 여왕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시대가 바뀔 때마다 달랐다. 당과 연합해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한 후 다시 당의 공격을 받은 문무왕 때는 당에 대해 당당했던 여왕을 향한 추모 분위기가 일었고, 신라 하대인 헌안왕대는 여왕의 즉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를 통해 보건대 신라시대 여성의 지위가 딱히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이 등극한 것은 선덕여왕에게는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함으로 난세를 극복하는 힘이 있었고, 실제로 선덕여왕은 죽는 그 순간까지 나라와 백성을 가슴에 품으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으니 역사가 시대를 부르듯 난세의 신라를 이끌었던 선덕여왕의 출현은 필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