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시조, 대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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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대제국, 발해를 만나다
동북 아시아 만주지역에서 229년간 유지되며 통일신라와 함께 한국 역사에 남북국 시대를 연 대제국!
9세기에는 현재의 러시아 연해주까지 진출해, 당시 동북아의 최강국이었던 당나라가 ‘바다 동쪽의 강성한 나라’라는 뜻으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호칭할 만큼 강력한 국세(國勢)를 자랑한 나라는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 발해다.
그러나 멸망 후 유민들은 강제로 이주되고, 수도인 동경성은 잿더미로 변하며 역사를 후세에 전하지 못 한 발해는 오랫동안 한국 역사에서 잊혀 졌는데, 발해 연구의 첫 장을 장식하는 대조영을 통해 가깝고도 먼 제국, 발해에 다가서 보자.
고구려의 유민, 나라를 세우다
668년, 한국 역사상 가장 강한 나라였던 고구려가 신라와 중국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멸망하자 당나라는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고, 고구려의 유민 10만 여 명을 당나라 영주로 이주시켜 압박과 착취를 일삼았다.
이 어둡고 고통스런 세월이 30년이나 흐른 698년.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 지방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랴오허 강을 건너 백두산 동북 지역!
즉 고구려의 옛 땅으로 향한 영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발해의 시조, 대조영이다.
무장인 ‘걸걸중상(乞乞仲象)’의 아들로 정확한 출생연도는 전해지지 않으나, 꺼져가는 불씨와도 같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섰다 결국 전장에서 사망한 부친의 일생을 생각하매, 고구려 말기의 전시 상황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대조영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고구려 대제국의 모습을 다시 찾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북 지역으로 향했는데, 거란족의 반란을 평정한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군대를 파견해 그의 집단을 추격하도록 했으나, 대조영은 지금의 혼하(渾河)와 휘발하(輝發河)의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에서 그들을 맞아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오랜 억류 생활과 계속된 이동 과정으로 체력은 소모됐지만, 강력한 결속력을 가진 집단으로 성장한 고구려 유민들의 전투력은 눈부셨고, 천문령의 지형을 샅샅이 조사해 그 곳에 1000 개의 매복지를 마련한 대조영의 지략은 20만 당나라 병력을 몰아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불타는 용기와 뛰어난 전략으로 천문령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조영은 무려 5,000㎞의 대장정 끝에 698년, 오늘의 지린성 쑹화강 건너편의 동모산에 성을 쌓고, 새 나라 대진국(大震國) 건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세우니 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15대왕 230년간 지속된 발해의 역사
뛰어난 무예와 지략을 갖춘 고구려의 후예가 동모산에 성을 쌓고 터전을 마련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옛 고구려 땅에 흩어져 있던 유민들이 빠르게 모여들며 나라의 기틀이 세워졌고 713년, 대조영은 국호(國號)를 ‘진국(震國)’에서 ‘발해(渤海)’로 바꾸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구려 영광 되찾기에 진력했다.
실제로 삶을 마감하는 719년에도 "고구려의 정신을 잊지 말고 계승하라"는 유언을 남긴 대조영은 '고구려의 왕'이라는 상징성을 띤 시호, 고왕(高王)으로 불리며 후세의 왕들에게 강한 의지를 전했고, 그 뜻은 한반도 북부에서 시베리아까지, 중국 북동부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대제국 건설로 나타났다.
특히 발해의 10대 왕인 선왕은 북으로 흑룡강, 남으로 용흥강까지 차지하며 세력을 크게 넓혔는데, 한반도 전체 면적의 2.2~2.8배에 달할 만큼 광활한 영토에 결국, 당나라도 사신을 보내 발해의 실체를 인정했고, 1,300킬로미터나 떨어진 왜국에서도 발해에 교역과 보호를 요청했다.
그렇게 강대국으로 성장한 발해는 경제 발전과 문화 창달에도 힘을 기울여 교역은 멀리 페르시아까지 이어졌고 수도인 동경성은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선왕 이후 발해는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심해지며 몰락의 길을 걸었고, 중원 진출을 꿈꿨던 거란의 황제 ‘야율아보지’의 공격으로 926년 멸망했다.
깨어나는 발해
230년간 지속한 발해가 막을 내리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 고구려의 정신과 역사를 이어준 발해는 천 년 넘게 망각의 역사 속에 잠들어 있었다.
발해가 없었다면 고구려와 발해 그리고 고려로 이어지는 정신을 잇지 못한 채 끊어진 역사를 갖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대조영의 발해 건국은 그동안 너무 소략하게 다뤄졌는데, 고구려의 옛 영광은 물론 고구려 유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대조영.
이 외로운 영웅이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나와 발해는 한국 역사의 중심에 당당히 자리 매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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