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는 백전백승하리라, 최영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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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만 여명’ 작전수행 '최영함'은 최영 장군의 이름에서 착안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 ‘삼호 주얼리호’를 구출하기 위해 지난 1월 21일 전개된 ‘아덴만 여명 작전’은 한국 군 역사에 이정표로 남을 만한 ‘완전한 작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덴만 해역의 여명시간에 맞춰 전격적으로 단행된 ‘삼호 주얼리호 구출작전’은 오전 9시58분, 청해부대의 구축함인 ‘최영함’의 위협 함포 사격 하에 UDT 작전팀이 은밀히 승선하며 시작됐고, 4시간 58분 동안 선교와 기관실, 50여개의 격실을 차례로 장악해 AK 소총과 기관총, RPG-7으로 무장한 해적 13명 전원을 제압하고 피랍된 선원 21명을 안전하게 구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아덴만 여명 작전’을 수행한 ‘최영함’은 호국의 상징으로 연일 회자되고 있는데, 진일보한 해상방위능력을 위해 2006년 건조된 4500t급 차세대 한국형 구축함, ‘최영함’.
그 함명(艦名)을 놓고 고심하던 해군은 각국의 경쟁적인 해상자원 보호정책 대처 등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서 원해작전 능력을 갖춘 함정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기 만들어진 구축함에 고려 말의 명장, 최영 장군의 이름을 붙였다.
최영 장군은 어떤 인물이기에 해양 수호를 위해 건조된 구축함에 그의 이름이 명명된 것일까?
고려 말 환란을 해결하고 고려 왕실을 보호한 수호자
1316년, 공무원을 감찰하는 ‘사헌규정’을 지낸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난 최영은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고려왕실을 지키려 한 명장군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력이 출중해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힌 최영은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왜구를 토벌하면서 무장의 길을 걸었다. 일본의 이키?쓰시마?기타큐슈?세토나이카이 등을 근거지로 삼았던 왜구는 14세기에 이르러 근 40년 동안 한반도의 해안을 괴롭혔는데, 해안에 상륙해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격파하며 이름을 얻기 시작한 최영은 공민왕 1년인 1352년에 일어난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면서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낸다.
원?명 교체기라는 전환기를 활용해 고려의 주권을 되찾고자 했던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원나라에 100여 년간 빼앗겼던 함경도 일대 쌍성총관부의 땅을 되찾는가 하면 훗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함께 남으로는 왜구를 막아내고, 홍건적이 국경을 넘어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점령한 1361년에는 홍건적을 격파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한 것이다.
이 후 공민왕의 항거에 위기를 느낀 원나라가 1364년,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해 군사 1만 명을 보내자 의주에서 섬멸하며 고려 왕실의 수호자로 부상했는데, 이듬 해! 고려 말기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던 신돈의 모략으로 6년간 유배 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신돈 실각 후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중앙 무대로 돌아온 최영 장군은 왜구 격퇴를 비롯해 국내의 대소 반란 토벌 등 80여 차례 전장에 나가 적군을 섬멸하니, 가히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장수였다.
아, 요동정벌이여~
군졸이 한 걸음만 물러서도 목을 벨 정도로 엄격하고, 후퇴를 몰랐던 최영 장군은 명나라의 황제로 즉위한 주원장이 1388년, 원나라의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는 억지 주장을 펴며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려 하자, 요동 정벌을 계획해 압록강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시기가 군사를 움직이기 어려운 여름인 점과 북방으로 병력을 이동하면 남쪽에 왜구가 들끓을 것을 우려해 요동 정벌론에 맞선 이성계가 압록강 하류인 위화도에서 원정군을 돌려 개성에 난입,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막기 위해 싸우다 붙잡혀 목숨을 잃으니, 최영이 죽은 뒤 4년 후인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개창하였고 고려는 사라졌다.
구국의 영원한 이름
그렇게 최영의 삶도, 고려의 역사도 끝이 났지만 백성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아 부친의 유언인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최영은 고위관직에 있을 때도 청렴해 존경을 받았고, 외적이 침입할 때는 늘 선봉에 서며 든든하게 나라를 지켜주었기에 구국(救國)의 상징으로 장군을 따랐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사당을 만들며 숭배하니 고려 왕조를 충성으로 지키려 했던 청렴한 명장의 기상은 21세기 바다를 지키는 한국 해군의 구축함으로 이어져 한국을 지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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