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곶의 착항과 역사적 배경, 인물 등 역사지리적 고찰
태안군 남면 신온리 드르니와 안면도 판목을 잇는 안면대교
1. 곶이 섬으로 된 안면도
인류와 자연의 상호작용은 뗄 수도 떨어질 수도 없는 숙명적 관계에 있다.
우리 인간은 지구상 만물의 영장으로서 끊임없이 변화되어 가는 대자연의 섭리 속에서 인간
의 지혜와 슬기를 모두모아 우리 인류사회를 발전시켰으며 인간생활 자체가 원동력이 되어
사회 제 조건의 테두리 안에서 변화와 지배를 받으며 생활을 영위해 왔던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거듭되는 자연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인간생활에 맞게 이용하여 적응시켜 왔으며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이 바로 거대한 바다의 개발이었다.
일찍부터 인류는 강과 바다를 개척하면서 바다와 더불어 살아왔으며 바다에 기대어 삶의 터
전을 마련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울러 해상교통을 발전시키면서 해외로 진출하여
국교를트고 문화를 교류하여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인류공영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서양인들은 일찍이 바다를 차지하는 자가 세계를 먼저 차지한다고까지 익살스러운
말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원대하고도 거창한 바다와 안면도!
그러나 태초에 안면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던 반도이자 안면곶(安眠串)이었다.
그것을 우리조상들이 그 시대에 맞추어 살기 위하여 인력으로써 도전하여 해상교통의
편의를 위하여 착항(鑿項) 함으로써 섬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역사적이고도 획기적인 안면도이 착항내력과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안면곶과 남면 드르니가 지금은 바다가 된 곳
1)안면곶 착항의 기원
원래 안면도는 태안의 백화산을 발원으로 한 지맥이 남으로 치닫으면서 서편으로는 황해 대양과
동편으로는 천수만을 끼고 낮은 구릉으로 굽이굽이 130리 길 안면곶의 남단 영항까지 뻗어내린
안면반도였다.
지금으로부터 약350년전인 조선조 제 16대 인조임금 때 그 안면도의 2/5지점이자 가장 좁은
목이 되는 이른바 굴항포(堀項浦) 또는 별칭 ‘목탄개’라는 곶(串을) 잘라 섬이 되게 하였다고한다.
다만 이런 기록은(서산대관)이나(서산군지)에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즉, 안면도의 착항은 영호남의 세곡선 운항에 편의를 도모하여 조선조 인조때에 영의정
김류가 착통케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막연하고도 희미한 기록과 전언은 뜻있는 이곳 주민으로
하여금 항상 회의를 갖게 하였다. 굴항포(목딴개,목탄개)의 착항 내력, 즉 착항 연대, 착항 위치
착항공사과정 등의 문제가 밝혀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여기저기에 속속들이 드러나는 놀라운 문화사적들의 발견과 발굴을
볼 때 이 문제가 주민들의 궁금증을 더욱 깊어지게만 한다.
그리고 어제의 안면도에서 내일의 안면도로 도약하려는 분기점에 와 있는 현시점에서 이 문제에
천착하는 것은 중요한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우리조상들은 그 시대에 맞도록 편리하게 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잘랐던 굴항포의
백사수도였으며, 또한 오늘날에 와서는 그곳에 다리를 놓고 경적소리를 울리며 백사수도의
절경을 관광하게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안면도의 착항에 관한 구체적이고도 일관성 있는 기록문이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 그리고
역사편찬위원회등의 문헌에는 없다.
여러 가지 자료와 구전되어오는 현장검증 등을 토대로, 전문가들의 견해 등을 종합하여 서술했다.
먼저 <동국여지승람>권19 「서산군 산천조」를 보면 「安眠串 :古安眠所本郡南百里有牧場」
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안면도가 섬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즉<여지승람>을 편찬한 노사신(盧思愼)의 생존시 또는 조선조 11대 중종 (1056~1544년)
시기까지는 안면곶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곶이란‘곶串과 갑(곶갑,산허리갑)岬’이 통하는
어의가 있으며 하나의 소반도(小半島)로해석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23대 정조(1770~1800)16년 (1788)12월26일에 비국당상인 서유린이
안면도의 자염(煮鹽 -바닷물을 달여 소금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계문에서 「安眠島風落松」
운운의 조문들이 들어있는 것을 보면 곶이 섬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곶과 섬의 변천 내역을 알 수 있으며, 그 공간이(중종~정종) 약200년 사이다.
<증보문헌비고)33 서산군 안면곶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략...... 小峰還列谿洞甚多海水吐呑處之境蒲鏡甚佳麗(中略)智山之數千南北往來船
必道於此李之?嘗愛此地山水留習元累日後必鑿此後脈者泰安郡吏房景齡獻議監營鑿其
入海連陸處隊爲一島俗號其鑿處曰掘項蒲」라 하였으며, 또 동국명산기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
후필유착차맥자(後必有鑿此脈者)라고 한 것을 보아서도 섬이 아니고 곶이었음이 분명하다.
사산군지의 상권2의 정렬조에는 「東來鄭氏密陽朴命道(중략).......
夫嘗有事往安眠島覆舟而死不智尸體所在(중략) 韓肅祖癸巳入月命?閭」라는 기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보고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토정 이지함이
전조 때 사람으로 선조11년(1578)에 사망하였으며(당시는곶),정렬부인 동래 정씨가 숙종왕의
장려표창을 받은 것은 숙종계사 8월인데 이는 숙종39년(1713)이 되는 해 이다.
그리고 박명도가 배를 타고 건너간 것은 그 보다 앞선 일로 보아야 한다.
어쨌든 이지함이 사망한 1578년부터 정렬부인 동래 정씨가 기사의 숙종39년(1713)간의
사이가 136년 이니까 100년쯤 되는 것이다.
이상의 기록문으로서 안면도가 섬이 아니고 안면반도(串)이었던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첫째, 정확한 착항연대와 둘째는 착항의 위치 그리고 세 번째는 공사과정
등을 밝혀내는 것이다.
위의 기록문헌으로써는 서산군지에 실려있는 조선조 16대 인조년대에 착항했다는
기록을 충분히 입증할 만한 근거가 되지 못하여 더 깊이 탐색하고 발굴하여 다음문헌을
발견 하였다. 즉, 조선왕조실록인 <인조실록>권지 37 무인 (1638) 정월1일부터 정월 7일 사이
신사일에 걸쳐서 일어난 사안으로써 그 요목을 적어보면 「安眠串松林雜樹」조로서
그 문헌 내용은 다음과 같다.
“漢城判尹,閔?男上箚曰軍鉤之措辯自古多賴於鹽鐵而瑞山泰安乃鹽鐵之利窟也
只綠鹽戶酷被侵虐逃散殆若廣募鹽戶一月之中二十日斯煮許令自取則爭相應募不
患無居人安眠串諸處松木之外雜樹茂盛似此充其煮取之用則患, 無燒木也兩邑濱
海皆是鐵沙募得治匠如鹽戶之,爲以一年所得鹽鐵貿換米穀則不下數萬石矣.
答曰斯陳之事當留念而議處焉” 와 같은 상차문이 있다.
이 글을 간략하게 줄이면 “한성부윤 민향남이 윗전에 상소하여 건의하기를,‘자고로 군대를
양성하고 군비를 갖추려면 염철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산 태안은
염철의 자연 자원이 풍부한 보고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국가에서 관리하고 잘 대우해서
제염업자가 안전하게 전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한다면 잘 될 것 입니다. 그리고 안면곶에는
소나무외에도 잡목이 무성히 많아서 제염을 하는 조건이 매우 좋습니다. 그러니만큼 그
부근 해안에 염전을 만들어 제염을 하게 하여 미곡과 환매를 한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진정한 일은 꼭 기억했다가 의논하여 처리하겠노라.’ 하였다.
이와같이 위 상소문에서 ‘安眠串’이 거듭 표기되었으며상차문이 정월 초하루에 작성된 것인즉
착항연대가 조선조 16대 인조 때 라고 기록한 서산군지는 믿을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본다.
그리고 여기서 기록된안면곶(安眠串) 이라는 곶(串)자 표기가 최종기록이 되고 있다,
그러면 곶(串)자 기록의 마지막을 여기서 멈추고 다음은 문헌상 안면도(安眠島) 기록의
첫 기사를 적어보면 숙종대왕 신록 권지6 숙종3년(1677) 정사8월 조의 요목「湖西安眠島」
라는 것을 들을수 있는데 그 문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丁未引見大臣備局諸局臣命罷湖西安眠島及寧越江凌准陽等三處官家折受
令今後宮家折受母得混請某邑某面從. 閔?權大運之也” 라 하였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 찾아본 문헌중 에서 최초로 안면도(安眠島)라는 ‘섬 도’자의
기록이 보이는 것이다. 이 말을 간결하게 풀이해 보면 “지난 정미년에 인견받은
비국당상의 제신들을 파직시켜 안면도를 비롯하여 영월,강릉,준양등 세 곳으로
내보내고 어전회의를 열어 이르기를, 앞으로는 국가와 궁가를 혼동치 말고 민묵과
권대운 말대로 공명하게 처리하라” 하였다.
판목 나루터와 남면 신온리 드르니 과거에는 안면곶 였던 자리
전술한 두 내용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인조16년(1683년) 1월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안면곶과 숙종3년 (1677)에 기록된 호서안면도와의 공간이 1638~1677년 이니까
39년간이 문제의 착항연대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39년이라는 공백기간에 창항이 이루어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다음의 역사적 배경과 서산군 기록의 태안군리(吏) 방경령 헌의문 등을 종합 분석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고도 신뢰성 있는 방법이라고 하겠다. 이 문헌에는 당시 감영에
헌의하여 안면반도의 목을 파내어서 하나의 섬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그 감영은 충청감영이고, 충청감사에게 헌의했다는 뜻이 된다.
한편 이곳에서 알고 있기로는 두 갈래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인조시대 충청감사
김육(金堉)의 역할로 착항이 사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인조 16년에 영의정 김류(金?)가 착항 사업에 관련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하여 통일성
없는 문제로 대두되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을 때가 많다.이런 것으로 보아 김류와
김육이 안면도 착항과 연관된 것만은 틀림없으리라 생각해서 그 인적사항을 도서출판
삼진사발행<한국사대계>
(1973년 8월 1일
실려있다.
ㅁ 김류는 1571~1648까지의 생존자이고 김육은 1580~1658까지의 생존자이며
ㅁ 김류는 인조16년 2월22일까지 영의정으로 있다가 그해 2월2일에 축출 당했으며
김육은 인조 16년 6월25일에 충청감사에 도임했다.
ㅁ 김류가 인조22년 4월5일에 영의정에 재임명되어 인조24년까지 재임했고 김육은 인조
16년 6월 25일에 충청감사에 도임이후 인조7년7월까지 재임했다.
위와같은 고사(
부상부하간의 관계는 없고 다만 인조16년에 착항 했다고 할 때 그 해 상반기에 김류는
영의정이고 김육은 중반기에 충청감사였으니까 착항공사 과정상 관련은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의정 김류가 재임시에 충청감사에 착항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본다.
아무튼 이 착항문제가 국가차원에서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기 때문에 왕조실록에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그게 보면 국토훼손이니 만큼 태안군리의 헌의를 충청감사
경유 조정에서접수하여 착항 인서만을 인조시 영의정 김류가 내리고 충청감사와 태안군리에게
일임하여 착항 공사를 진행시킨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렇게 보는 것만이 김류와 김육이 착항에
관련되어 문헌에 오르내리고 있는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다 하겠다.
안면도 판목항 나루터 였던 자리에 있는 선바위
또 김육은 충청감사직을 인조17년7월 이후원(
충청감사직 재임기간은 불과 1년이다.
그리고 김육이 충청감사 당시인 인조16년 월에는 저 유명한 대동선혜법(
창안하주청올릴 정도의 명감사일 뿐만 아니라 조야 대중의 신망이 두터웠으며 또 본인의 의욕적인
추진력으로 보아 착항 사업을 무난히 마친 것으로 볼 수 있다.
. 따라서 착항 연대는 인조 16년 그이 충청감사 재직중의 황금기인
9월이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문헌에서 마지막으로 내 비친 “
상차문이 인조16년 정월이었으니까 이 해의 후반기에 착항 서업이 진전되었다는 것을 족히
믿을 수 있다,
또,이 문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조사기록이 있다, 대학도서출판사 발행(1983년)
김의원 저 (한국국토개발사 연구)라는 책자를 보면 필자가
1967년에 촬영한 항공사진을 판독한 결과가 실려 있는데
암석을 깍은 듯한 단애를 목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그러나 이것이 인공적으로 깎은 것인지 자연적으로 이루어졌는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고
부연하고 있다.
다만 이곳의 육상지질을 보면 일부이집만 규암석(
대부분이 편암(
거리이고 보면 그 당시의 원시적 공구라 할지라도 풍화에 약한 편암이나 규암층의
절개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고,또 그곳의 해저기반이 수심 4m 정도밖에
안되니 그리 힘든 공사는 아니었을 것이라며, 이 문제는 앞으로 더 연구해 볼 필요
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실정으로 보더라도 정부 당국으로서는 이 공사에 그리 큰 관심이나 투자를 들이지
않고, 다만 태안군리 방경령이 헌의하고 충청감사를 경유하여 상주된 창항청원에 대하여
승인만 해 주었을 뿐,해당 지역주민이 동원되어 충청감영과 태안군의 지도하에 공사준공
을 본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조선왕조실록이라든지 기타 중요 문헌에서 기록이 빠지지 않았나 한다.
그러면 문헌상 관련된 안면도 착항 내력은 이쯤 해두고 다음으로 착항의 위치와 주변의 유적,
지명 연기설 등 착항 현지활동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판목 나루터와 안면도 백사장항 남면 신온리 드르니 항
2) 안면곶의 착항과 주변의 상황들
이제 그 착항된 곳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안면도 창기리 북서단에 있는 선바위 지선에서
북동으로 해안선 따라 150m 끝머리와 남면신온리의 최단단 돌출부(현재 구연육교 부대 분초막)
구간이 착항 서(西)한계선 지점이며 이곳을 연육교 다리위에서 서쪽 방향으로 내려다
보면 직선거리 약 40m의 수면상으로 최 간조시에는 양안에 걸쳐 울퉁불퉁 솟은암반
[잠은여(潛隱礖)]들이 즐비하게 들어난다. 또 동쪽의 약 150m 전방 지점에 또한 양안에 약간의
아반 잠은여를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동(東의)한계선인 연육흔적 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 동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서(西)한계선 언저리의 잠은여를 목탄개 또는 목딴개,
목딸갱이라고 부른다.
양안에 걸쳐서 다니던 옛길이 있었음을 들어 알았으나 그동안은 그저 무관심 하여왔다고 한다.
굴항포에 연육되었던 산맥 폭은 약 200m이며 착항된 양안의 거리도 약 200m가 된다.
양안의 중심맥이 뻗어내린 서(西) 한계선 아래의 잠은여를 목탄개라고 하는데, 그 지명이
문헌에 나타난 굴항포(掘項浦, 즉‘팔굴’자 ‘목 항’자 ‘게 포’자 이니 목을 파낸 개포이고 보니까
(목판개 또는 목탄개가 되는것이니까)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리고 남면 창항지선 멀리 현
검문소 북방의 산기슭에는 350년 전의 옛길이 지금까지(노폭 1m가 좀 넘는)남아서 조상님들의
희미한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으며, 여로에 지쳤던 선인들의 한숨 소리가 귀에 들려옴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안면도 방면의 옛길은 연육교 공사당시 중장비로 파내어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으며, 오직 하나 착항 작업중 휴식과 점심을 먹던 자리라는 신털이봉만이 근래에
심은 오리나무 그늘 밑에 쓸쓸히 잔영을드러내고 있다.
이로써 안면도 착항에 관련된 기록과 증언을 정리하면 “안면곶 착항은 인조16년(1638년)에 당시
영의정김류와 충청감사 김육이 안면곶 창기리 서북단과 남면 신온리 남단의 굴항포를 절단하여
섬이 되게 하였다.”라고 종합할 수 있다.
3) 안면곶을 착항하게 된 목적과 안흥량(安興梁)의 유래
안면곶을 착항하게 된 동기와 목적은 <서산군지> 권1 착항조의 주석과 같이, 영호남 지방의
세곡선과 호서연안의 세곡선, 그리고 천수만 해안 일대의 일반 선박 및 어선 등의 운항에 안전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실은 고려조 중엽부터 시도했던 태안과 서산간의 좁은 목인 굴포를
착통코저 수차례에 걸쳐서 착공해 오다 실패하고 마침내 안면곶을 착항하게 한것이니,안흥량
항로가 얼마나 난처했던가를 가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안면도 착항후에도 잇따라 안흥량 파선 사고가 발생하여 서산,태안간의 굴포 굴착론
이 다시 대두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되고 그 대안이 나온 바, 설창안의 주장이 채택되어
급기야 현종9년(1668년)에 송시열의 강력한 추진으로 남북 양 해변에 남창과 북창을 건립하였다.
그럼으로써 세곡선은 안흥량을 통과하지 않고 천수만으로 들어와 적돌강을 거슬러 올라가
남창(태안읍 평천리 남창동 소재)에 일단 입고 시켰다가 이곳에서 우마차로 하여금 육로로
운송하여 북창(구도의 상창리,하창리,창평리등에 산재)에 저장시키고 다시 주운에 의하여
한양의 경창으로 수송토록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잦은 폭우로 토사가 막혀서 세곡선의 입출하에
지장에 컷으며, 따라서 경제적,시간적 불합리성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고 급기야는 폐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다시 안흥량의 항로를 멀리 신진도 밖으로 돌려내고 세곡선만은 고달픈 옛날의 항해를 다시
되풀이하게 된 것인 즉 날씨가 좋을 때는 곧바로 안흥을 거쳐 경창으로 직행하였고, 불순한 기상 예감과
격랑 전후에는 천수만으로 진입하여 대기하다가 착항지인 백사수도를 경유하여 안흥량을 통과하게
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이 안흥량의 항로가 너무 험난했기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경고한다는 뜻에서
그 곶 이름을 안행량(難行梁)이라 지어 불렀다. 또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뜻에서 안흥의 지령산에
안파사(安波寺)를 짓고 빌었으며, 백화산의 절벽에는 어풍대(御風坮)라 새겨 지나는 길손의 눈을 끌어
조운의 평안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운중 해상사고가 잇따르자 편히 항해하라는
뜻으로 안행량(安行梁)이라 이름하였다가 안흥량(安興梁)으로 다시 고쳐 불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발행의 <각사등록(各司謄錄)>8 충청도편 3에 의하면 철종14년(동치2년 1863) 10월
29일에 공충도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교헌이 올린 장계에 따르면 금월 4시 오시(午時) 서산 안면도
후망직 이판손이 뛰어와 아뢰기를 전라도 영암군 대동선 1척이 거월19일 저녁물에 안면도 옷점
앞바다 우녀에서 파선되어산산조각이 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 후 고종 19년(1882) 광서(光緖)
8년 8월 7일의 충청도 수군절도사 겸 보령군 도호부사 이교팔의 보고에 의하면 6월 11일 10시에
보령군 주포면 솔섬에 사는 김일귀가 뛰어와 아뢰기를 전라도 부안군 세곡선이 항해 북상중 솔섬
부근의 사격지에서 풍랑에 표류중 이라고 보고해 왔으며,그 뒤 고종 24년(1887), 즉 광서 13년
8월 17일에 충청도 수군절도사 구연창의 보고에 따르면, 금월 12일 태안부사 오정산이 첩정을
보내온바 경상도 영산 세곡선 1척이 초이틀 저녁에 태안 남면의 곰섬 앞바다에서 풍랑에 좌초
파선되었다는 급보를 알리었다는 등등의 기록이 있다. 이처럼 예기치 않은 해상사고가 안흥량의
대형사고 말고도 서해안 곳곳에서 이렇게 자주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 사경을 넘나들던 조상들의 모험과 한이서린 조운역사 1천 년의 세월도
서구문명의 유입과 더불어 종지부를 찍게되었으니, 그 때가 바로 제1한강교가 가설되고
경인철도가 부설되던 고종37년(광무4년,1900)이다. 또 그해 2월에 공포된 화폐조례 공포의
금화본위(金貨本位)제가 채용됨으로써 삼남 세곡선에 의한 조운의 장은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출처 : 안면도지 1990년. 안면도 여행이야기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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