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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역사속으로

세계의 바다를 누벼라, 해상왕 장보고

by 범여(梵如) 2012. 4. 27.

 

세계의 바다를 누벼라, 해상왕 장보고

 

 

 바다를 정복한 자가 세상을 지배 한다
16세기, 유럽의 열강들은 앞 다투어 바다로 진출했다.
국제교역의 핵심 통로인 바다를 제패하는 나라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프랑스 함대를 제압하고 해상권을 장악한 영국 역시 해상무역으로 산업혁명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지금도 식량, 자원, 환경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바다는 인류 최후의 보루로 세계가 앞 다투어 개발하고 있는데, 한민족 중에도 일찍이 바다로 진출한 이가 있다.
1200여 년 전, 동북아시아의 해상권과 무역권을 장악하며 해상왕국을 건설한 해신(海神), 장보고다.

해상왕의 등장
서기 800년이 되기 전, 오늘날의 완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장보고의 본디 이름은 ‘궁복(弓福)’이었다.
출신 배경에 대해 분명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성이 없이 ‘궁복’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미천한 출신으로 짐작되는 그는 일찍이 당나라로 건너가 이름을 장보고로 바꾸고, 군인의 길을 걷는다.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났지만 골품제라는 신분제도에 막혀 재능을 펼칠 수 없었던 장보고는 외국인으로서 신분제의 멍에를 벗어 던지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당나라 행을 택한 것이다. 장보고는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아 30세 무렵에 서주 무령군 소장의 자리에 오르기에 이르렀다.

신라의 귀족 중에는 뛰어난 학문으로 높은 벼슬에 오른 경우가 간혹 있지만, 천민 출신의 신라인이 당에서 출세가도를 달린 것은 장보고가 처음이었다. 승승 장구 장보고의 발길을 다시 신라로 돌린 것은 당나라 곳곳에서 신라인을 노예로 인신매매하는 참상이었다.
통일 신라의 중앙집권체제가 쇄락한 틈을 이용해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만행을 막기 위해 828년, 신라로 귀국해 흥덕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했다.

“신라의 연해는 이름만 신라 땅이지 해적의 소굴과 다름없습니다.
해적들은 신라 백성들을 잡아다가 당나라에 노예로 팔고 있습니다.
소신이 그곳에서 여러 번 불쌍한 동포를 보았고, 더러 구출하기도 했사오나
창해일속(滄海一粟 바닷물 속의 좁쌀 한 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적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장차 그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아뢰나이다.”


당시 절절한 장계로 해적 소탕의 의지를 밝힌 장보고는 마침내 왕의 마음을 얻으며 1만 병사와 함께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 완도)에 진을 설치한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어 수병을 훈련시키니, 장보고의 뛰어난 무예와 전략 앞에 당나라 해적과 일본 왜구가 모두 소탕됐다.

 

동아시아
해상 장악한 한국인

그렇게 근심꺼리를 없앤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신라와 당, 일본을 하나의 경제블록으로 만드는 국제적인 삼각해상무역망을 구축한다.

당나라에 머물 당시, 신라인의 거주지인 신라방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던 상업 활동을 눈여겨보던 장보고는 재당시절의 경험을 활용해 해상무역을 시작한 것인데, 당시 동아시아 3국인 신라, 당(唐), 일본은 중앙통제력의 약화로 국가 간 조공무역이 사무역으로 바뀌는 전환기!

시대의 변화를 읽은 장보고는 840년(문성왕 2년)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는 등 일본과 중국에 존재하던 신라인 사회(신라방)를 강력한 네트워크로 엮으며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동북아 물류와 금융허브를 실현했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 중계무역의 중심이었던 청해진은 중국과 일본, 아라비아, 동방에서 흘러들어온 각종 물품들로 넘쳐났고, 각 나라에서 들어온 물건을 재분류하고 포장해 다시 파는 과정에서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또한 장보고는 세계의 명품 도자기로 극찬을 받는 고려청자의 길도 닦았다.
9세기 무렵 당나라의 도자기는 최첨단 상품으로 신라와 일본, 이슬람까지 탐내던 당나라의 독점 수출 품목이었는데, 당의 수출을 지켜보며 신라에서 직접 도자기를 만들면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장보고는 도자기를 직접 개발하고, 생산케 한 것이다.

실제로 청해진과 가까운 강진이 고려청자의 주요 생산지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데, 카리스마와 결집력으로 모래알 같이 흩어져 있던 신라인을 하나로 모으고, 동북아의 해상교통권과 무역권을 장악했던 장보고는 그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중앙귀족의 견제로 846년 피살되고, 그가 건설한 해상왕국도 청해진이 해체된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장보고,
한민족 최초의 세계인

그러나 청해진을 설치하고 최후를 맞기 전까지 1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해상왕국을 구축한 장보고의 활약은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발하고 있다.

한반도를 벗어나 국제무역을 하고 더 큰 바다로 달려 나간 장보고는 우리 역사에서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놓고, 세계화의 물결이 휘몰아치는 21세기 우리가 갈 길을 제시했기 때문인데 바다를 통해 미래를 개척한 장보고. 그가 가졌던 꿈과 도전정신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