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 아닌 이상 어떤 산에서든 마루금을 통해 다른 어떤 산에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고전지리에서 얘기하는 산자분수령입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른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두 능선 사이에는 계곡이 하나 있고 두 계곡 사이에는 능선이 하나 있다.
산없이 시작되는 강이 없고 강을 품지 않는 산이 없으니 산과 강은 하나이다.
고로 산에서 산으로 가는 길은 반듯이 있고 그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부산지역을 예로 들겠습니다.
부산의 금정산에서 계곡이나 강을 건너지 않고 능선을 걸어 김해의 보배산에 이를 수 있을까요?
언뜻 생각하기에 낙동강에 가로막혀 불가능할 것 같지만 산자분수령의 원칙은 틀림이 없습니다.
우선 금정산은 낙동정맥(몰운대- 강원도 태백의 매봉산까지 이어짐) 상에 있으므로
이 마루금을 따라 낙동강의 발원지인 매봉산까지 돌아가서 백두대간과 만납니다.
그리고는 백두대간을 따라 지리산의 영신봉에 이르고, 계속해서 영신봉에서
낙남정맥을 따라 김해의 보배산에 이르면 됩니다.
두 산은 직선거리로는 20여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물을 건너지 않고
이 두 산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1,000 km가 넘는 산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도를 보고 마루금을 연결하노라면 그 어떤 미로찾기보다 흥미진진하기에 밤을 새는 경우도 많으며, 실제 지도를 들고 산으로 가 그 미로길을 찾아가노라면 우리 선조들의 지리관과 지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우리나라 산줄기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이야기】“
우리 선조(先祖)들은 산(山)과 강(江)을 하나의 유기체적(有機體的)인 자연구조(自然構造)로 보고
그 사이에 얽힌 원리(原理)를 찾는데 지리학(地理學)의 근간(根幹)을 두었다.
여러가지 구구한 이야기들도 많고 아직까지 공인(公認)된 것은 아니지만 1769년 여암 신경준이
펴낸것으로 되어있는 족보(族譜) 형식의 산경표(山經表) 는 지리서(地理書)와 1866년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 지도(大東輿地圖)가 그러한 노력의 한 결실(結實)이라고 볼수가 있을 것 이다.
산경표(山經表)에선 우리산줄기를 1대간(大幹) 1정간(正幹) 13정맥(正脈)으로 분류(分類)해 놓았는데
이 산경표(山經表)를 풀어서 지도로 작성하면 대동여 지도(大東與地圖)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산맥(山脈)과 우리 조상님들이 언급(言及)한 산줄기와 그 둘이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가 배워온 산줄기 예를 들어 태백산맥(太白山脈) 소백산맥(小白山脈) 차령산맥(車嶺山脈)등은 일본이
조선 강점(强占)을 기정사실화 해 가고 있는 무렵인 1903년 일본인 지리학자 고또분지로 가 14개월 동안
우리나라의 지질구조(地質構造)를 연구하고 “韓半島의 地質構造圖”를 발표하면서 그 때까지 통용(通用)되던
1大幹 1正幹 13正脈은 사라지고 산맥(山脈)의 개념(槪念)이 도입(導入)된 것도 모자라서 지리교과서에
실리게된게 현실이다.
여기서 의심스러운 것은 그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그것도 개인이 단시간에 땅속의 지질(地質)을 알아 내어
산줄기의 체계(體系)를 세웠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고 아마도 식민지(植民地) 지하자원(地下資源)을
수탈(收奪)할 목적(目的)으로 그리 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다.
우리산줄기는 땅위에 실존(實存)하는 산과 강에 기초(基礎)하여 산줄기를 그렸으며 그러므로
산줄기는 말 그대로 산에서 산으로만 이어지며 실제 지형(地形)과 일치(一致) 한다.
그러나 일본인이 주장한 산맥(山脈)은 땅속의 지질구조(地質構造)선에 근거(根據)하여 땅 위의
산들을 분류(分類)하였으며 그로 인해 산맥(山脈)선은 도중에 강에 의해 여러 차례 끊기고
실제지형과 전혀 다른 인위적(人爲的)으로 가공(加工)된 산줄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면 우리 산줄기의 기본(基本) 원리(原理)인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뫼산(山) 스스로자(自) 나눌분(分) 물수(水) 고개령(嶺) 한문 해석 그대로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른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라는 뜻이 된다.
더 쉽게 표현하면 “두 능선(稜線) 사이에는 계곡이 하나 있고 두 계곡 사이에는 능선(稜線)이 하나 있다” 라는 말이된다.
그러므로 나라 안에 산(山) 없이 시작되는 강(江)이 없고 강(江)을 품지 않은 산(山) 이 없으니
산(山) 과 강(江)은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에 나라의 물줄기란 물줄기를 모조리 그려 놓으면 나머지 공간이 몽땅 다 산줄기가 되는 것이다.
강은 이골 저골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들이 모이고 모여서 하나의 강이 되어 결국은 바다로
빠져나가는 것이고 산줄기도 마찬가지다.
무질서하게 보여도 절대로 서로 얽히거나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물길이 있는 어느 곳이라도
결국은 하나의 강이 되어 하구(河口)로 흘러 나가며 산줄기가 있는 어느 곳에서든 능선(稜線)만
따라가면 백두산에 도착(倒着)하게 될 것이다.
즉 산에서 산으로 가는 길은 반듯이 있고 그 길은 오직 하나 뿐인 것이다.
만약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육지(陸地)는 많은 섬(島)으로 분리(分離)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는 과정에서 개울과 내와 천이 모여서 강이 되고 강을 에워싸고 있는 산줄기들이 주맥(主脈)이 되는 것이다.
개울과 내와 천을 에워싸고 있는 산줄기들은 결국 강에서 그 흐름을 멈추게 된다.
그래서 주맥(主脈)과 구분(區分)하기 위해 지맥(支脈)이라고 이름을 붙여준다.
여기서 주맥(主脈)에 해당하는 것이 산경표(山經表)에서 언급한 大幹, 正幹, 正脈의 개념(槪念) 이며
뒤에서 이야기 할 기맥(岐脈)도 주맥(主脈)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주맥(主脈)을 이렇게 구분지어 부르는 것은 그 산줄기가 갖고 있는 특수성(特殊性) 내지는
어떠한 필요성(必要性)에 의하여 그리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만하면 우리 산줄기의 개념(槪念)에 대해 이해(理解)가 되었을 것으로 알고 산경표(山經表)에 나오는
우리산줄기와 기맥(岐脈)에 대하여 그 개략적(槪略的)인 것만 간단히 전개(展開)해 보겠다.
먼저 산경표(山經表)란 무엇인가? 무슨 책인가?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신라 시대 도선국사(導善國師)의 “옥룡기”에 “우리나라가 백두(白頭)서 시작하여 지리(智異)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形勢)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 이라.....
”402년 제작된 세계지도인 혼리강리도에 우리의 대간(大幹)과 정맥(正脈)이 그대로 그려져있고
17세기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山脈)의 조종(祖宗)이다....(중략)....
대체로 일직선의 큰산맥(山脈)이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되어 중간에 태백산(太白山)이 되었고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났으니...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산경표(山經表)는 신라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백두대간(白頭大幹)을
그 기둥으로 삼고 거기에서 파생(派生)된 산줄기 강줄기 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서 1750년 훈민정음운해
(訓民正音韻解)를 지어 한글의 과학적 연구(硏究)의 기틀을 다진 여암 신경준이 1770년 영조의 명(命)을
받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집필(執筆)하기 이전인 1769년에 옛부터 발달해온 군현읍지를 재 구성하여
그 때까지 축적(蓄積)된 지리학적(地理學的) 지식(知識)과 정보(情報)를 학문적(學問的)인 체계(體系)를
갖추어 족보형식(族譜型式)으로 편찬(編纂)한 우리 나라의 지리정보(地理情報) 집합서이다.
국가의 행정적인 지원(支援) 아래 공식적으로 편찬(編纂)된 산경표(山經表)의 산줄기 체계(體系)는 바다 건너
욕심많은 인간들이 이 땅을 유린(蹂躪)하기 전까지는 국가(國家)의 공인(公認)된 개념(槪念)으로 인식(認識)되었음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족보형식(族譜型式)으로 편찬(編纂)된 산경표(山經表)에 앞서 잠깐 언급(言及)한 우리나라의 산줄기는
주맥(主脈)의 개념(槪念)으로 1大幹 1正幹 13正脈으로 분류(分類)하고 그 산줄기에 격(格)을 부여(附與)하였다.
그리고 1大幹 1正幹 13正脈에서 갈래쳐 나온 산줄기들을 비록 격(格)이나 이름을 부여(附與)하지는
않았어도 그 흐름을 기록하였다.
우선 백두(白頭)에다 대간(大幹)이라는 격(格)을 주어 이 산줄기를 우리나라 모든 산줄기의 기둥으로 삼았으며
실제로 이 백두대간(白頭大幹)은 나라안의 높고 험한 산들이 대부분 포함(包含) 되어 있으며 나라를
동서(東西)로 양분(兩分)하고있음을 알려주고 동쪽 물길과 서쪽 물길은 절대로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고로 어느 정맥(正脈) 마루금에 서서 좌우(左右)를 내려다보면 그것은 별개의 강을
이루고 있음을 알수가 있으며 그래서 인지 정맥(正脈)의 이름을 대부분 강에서 따오고 있는 것이다.
산경표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낙남정맥(落南正脈)은 낙동강(洛東江)의 남쪽 울타리라는 뜻이다.
즉 지리산 영신봉에서 남쪽으로 갈래쳐 나와 옥산 대곡산 여항산 무학산 천주산
정병산 신어산 낙동강 하구 매리라는 동네에서 끝이 나는 도상거리 약 226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 산줄기는 시종일관 경상남도의 남강 남쪽 바닷가를 달리는 산줄기이다.
지리산 천왕봉 북쪽에서 흐르는 경호강을 따라 오다보면 경호강이 산청군 단성면 에서
남강 이라는 이름으로 바꿔달고 김해 북쪽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잠시 낙동강이 되었다가 바다로 흘러들게 된다
.
청북정맥(淸北正脈)은 청천강의 북쪽 울타리이며 압록강의 남쪽 울타리이다.
고려 때 축성(築城)한 천리장성(千里長城)이 주능선이다.
청남정맥(淸南正脈)은 청천강의 남쪽 울타리이며 대동강의 북쪽 울타리이다.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묘향산 낭림산이 여기에 속한다.
해서정맥(海西正脈)은 지명 이름을 따왔다. 대동강의 남쪽 울타리이며 예성강 북쪽 울타리다.
언진산 멸악산이 여기에 속한다.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은 임진강 북쪽 예성강 남쪽 울타리이다.
판문점에서 훤히 보이는 경기오악(京畿五嶽)중 하나인 개성 송악산이 여기에 속한다.
(경기오악(京畿五嶽) : 화악산 운악산 감악산 관악산 송악산) 한북정맥(漢北正脈)은 반은
북한에 속하고 반은 남한에 속하는 산줄기다.
한강의 북쪽 울타리이며 임진강 남쪽 울타리다.
남한쪽 줄기를 살펴보면 군부대로 요새화 되어 있는 대성산 광덕산 백운산 국망봉 운악산 축석령
양주의 불곡산 한강봉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 노고산 일산의 고봉산을
지나 파주 교하의 장명산에서 그 끝을 맺는다.
남한쪽의 산줄기는 도상거리 약 177km 정도이다.
낙동정맥(洛東正脈)은 말 그대로 낙동강의 동쪽 울타리다.
태백시 피재에서 시종일관 남진을 하는데 그 줄기를 살펴보면 통고산 울진의 유명한 백암온천이 있는 백암산 청송의 비경 국립공원 주왕산,화랑들의 수련장 단석산,훌쩍 영남 알프스로 건너가 고헌산 ,영남알프스의 최고봉 가지산,신불산,취서산.천성산, 관통도로 저지를 위해 45일간 단식을 하고 도룡농소송을 하시는 지율스님이 계시는 천성산 원효산에서 고속도로인 지경고개로 자지러들었다가 부산의 명산 금정산을 일구고 다대포 몰운대에서 벼랑이 되고 파도가 되는 도상거리 약 360km의 산줄기를 한다.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한강의 남쪽 울타리이며 금강의 북쪽 울타리라는 뜻 이다.
속리산 천황봉에서 시작하여 정이품송으로 유명한 보은 말티고개,청주의 상당산성, 좌구산 안성의 칠장산에서 두줄기로 만들어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에게 그 뒤를 잇게 하는 도상거리 약 148km정도의 산줄기를 말한다.
한남정맥(漢南正脈)은 칠장산에서 경기도를 서북방향으로 가르며 한강 하구에서 한북정맥과 임진북 예성남정맥과 서로 얼굴을 맞대다 바다 속에서 만나는 산줄기다. 오롯이 한강 남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그 흐름을 살펴보면 안성의 칠장산 수원의 광교산 안양의 수리산 인천에 있는 3개의 철마산 계양산 가현산을 꿰찬 후 비산비야를 달려 마지막으로 힘주어 밀어올린 강화 대교 앞 문수산에서 끝나는 도상거리 약 180km 정도의 산줄기를 말한다.
금북정맥(錦北正脈)은 칠장산에서 남쪽으로 충청남도 내륙(內陸)을 휘젓고 다니는
산줄기를 말하며 금강의 북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그 흐름을 살펴보면 칠현산 차령 봉수산 백월산 수덕산 가야산 오서산 팔봉산 태안반도의
끝안흥진에서 서해를 지키며 그 흐름을 멈추는 도상거리 약 272km 정도의 산줄기를 말한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자면 일부분만이 금강의 북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그 이유는 기맥(岐脈)부분에서 설명(說明) 드리겠다.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 전북 장수 백운산 근방 영취산에 서
분기(分岐) 하여 장안산 팔공산 진안의 명산 마이산 주화산에서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湖南正脈)의 두줄기로 갈라지는 도상거리 약 63km 정도의 산 줄기를 말한다.
금남정맥 (錦南正脈) 은 금강의 남쪽 울타리를 말하며 주화산에서 호남정맥 (湖南正脈)을 남으로
이별하고 머리를 북쪽으로 틀어 운장산 대둔산 계룡산 부여의 부소산 조룡대 구드레나루에서
끝나는 도상거리 약 168km 정도의 산줄기를 말한다.
그러나 금강의 온전한 남쪽 울타리는 아니다.이 문제도 추후 기맥(岐脈) 부분을 설명할 때 말씀드리겠다.
호남정맥(湖南正脈)은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의 주화산에서 남쪽으로 머리를 틀어 전주의
명산 만덕산 정읍의 내장산 담양의 추월산 광주의 무등산 장흥 제암산 사자산까지는
전라 좌우도를 가르는 분계(分界)이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종주(縱走)시 왼쪽으로 떨어지는 물은
오롯이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물은 전라남북도 바닷가로 떨어지는 몇 개의
강과 천과 내를 이루고 있다고 볼수있다.
바로 이 호남정맥(湖南正脈)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보았을 때 왼쪽은 호남좌도(湖南 左道)라
하여 동진강 만경강 영산강 일대의 비옥한 평야지대로 호남좌도(湖南左道) 농악(農樂)이 발달하였고
오른쪽은 호남우도(湖南右道)라 하여 섬진강 유역(流域)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험준한
산악지대(山岳地帶)로 호남우도(湖南右道) 농악(農樂)이 발달(發達)하였다.
결국 산줄기가 문화적인 면까지 구분(區分) 지어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주맥(主脈)은 아쉬운대로 서술(敍述)하였는데 산경표(山經表)에 이름이 없는
산줄기에 대하여 그 흐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거기에 대한 소견을 피력(披瀝)해보면…산경표(山經表)를 위하여의 저자는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 (披瀝)했는데 기맥(岐脈:갈래질,갈림길,높은산), 지맥(支脈:갈릴,곁가지)으로 부르자고 한다.
여기에서 기맥(岐脈)이란?
독립된 강을 가르는 분수령(分水嶺)이되 강이나 산줄기 크기가 정맥(正脈)보다 그 규모가 작은 것으로써
원칙적으로 그 끝이 바다에 이르는 산줄기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호남정맥(湖南正脈) 내장산에서 분기(分岐)하여 영산강의 북쪽과 서쪽
울타리를 치고 있는 영산북기맥(榮山北岐脈)은 목포 유달산 바닷가에서 끝이 난 다.
또한 이 영산강 남쪽 울타리는 영산남기맥(榮山南岐脈)으로 역시 전남 해남군 화 원 반도 끝에서
목포시가지를 바라보며 서해바다에서 끝을 맺는다.
그런데 해남 땅끝마을이 전국적으로 명소(名所)로 회자(回刺)되고 있고 우리나라 육지(陸地)의
최남단이라는 의미가 깊어 월출산을 지난 벌매산에서 골산인 흑석산으로 빠지는 얼마 안되는
거리를 남겨놓고 남도의 수석전시장인 해남 강진의 주작산,두륜산,달마산,대둔산,도솔봉,땅끝마을
사자봉으로 산줄기의 흐름을 틀어 땅끝기맥이라고 선답자(先踏者)들이 명명하고 말았다.
결국 이 두개의 산줄기는 대부분이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것으로 이름을 지어
부르던지 그 끝만 다를 뿐 산줄기가 주는 의미(意味)는 결국 같은 것이다.
그래서 도도한 흐름을 타고 땅끝마을에서 끝이나는 산줄기를 땅끝기맥(岐脈)이라고 명명(命名)하고
벌매산 이후 진정한 영산강 남쪽 울타리인 흑석산으로 뻗어 화원반도에서 끝이나는
산줄기를 영산남지맥(榮山南支脈)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외도 있다.
정맥(正脈)의 반열(班列)에 들어도 부끄럽지 않은 세(勢)를 가진 한강기맥 (漢江岐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 오대산에서 분기(分岐)하여 시종일관 북한강과 남한강을 나누며 서진하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에서 한강이 되어 산줄기가 끝이 나는 산줄기가 있다
즉 강에서 끝나는 기맥(岐脈)도 있다고 알려준다.
그러나 이 한강기맥(漢江岐脈)은 정맥(正脈)의 반열(班列)에 들어야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산경표(山經表)에서 언급한 산줄기중 백두대간(白頭大幹) 이 그 바톤을 낙남정맥(落南正脈) 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바닷가가 아닌 지리산 천왕봉에서 맥을 마친다.
그리고 금남정맥(錦南正脈)이 바다하곤 너무 거리가 먼 충남 부여읍 부소산 금강변 에서 맥(脈)을 내린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산경표(山經表)에서 조차 어떠한 이유를 가지고 바다와 무관하게
정맥(正脈)의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세(勢)와 길이와 흐름이 산경표(山經表)에서 언급한 어떤 정맥(正脈)보다 뚜렷하고 중후(重厚)하다.
예를 들어 물론 서로 비교(比較)하는 것이 어떠한 큰 실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설명(說明)을 하다보니 비교(比較)하게 되었습니다만...
금남정맥(錦南正脈)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은 그 세(勢)와
길이와 흐름에 있어서 한강기맥(漢江岐脈)을 따르지 못한다.
또한 한남정맥(漢南正脈) 금북정맥(錦北正脈) 낙남정맥(落南正脈)은 그 세(勢)와 흐름에
있어서 한강기맥(漢江岐脈)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산줄기에서 100km 이상 되는 기맥(岐脈) 수준의 산줄기가 2개나 분기(分岐) 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지맥(支脈)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산줄기일까요? 한마디로 강의 지류(支流)를 가르는 산줄기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강에서 그 맥(脈)을 다하는 산줄기를 말한다.
물론 바다로 빠지는 지맥(支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변산지맥(邊山支脈)은 그 끝이 서해바다로 흘러든다. 여수지맥(麗水支脈)과
선운지맥(禪雲支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그 수많은 지맥(支脈)을 단순히 지맥(支脈)이름만 거론할 경우 산줄기의 흐름을 한번에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지맥(支脈)은 대간(大幹), 정간(正幹), 정맥(正脈), 기맥(岐脈)에서 분기(分岐) 한 산줄기로써
어느 정도 그 산세(山勢)가 계속되는 산줄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지맥(支脈)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는 어떻게 이름을 지어야 할까요? 분맥(分脈), 단맥(短脈)이다.
분맥(分脈)이란?
역시 지맥(支脈)과 같이 강의 지류(支流)를 구분(區分)짓는 산줄기로 반듯이 지맥(支脈)에서 분기(分岐)한
산줄기를 말한다.
그 세력(勢力)도 지맥(支脈)과 거의 같은 산줄기로 만약 지맥(支脈)에서 분기(分岐)하지 않았다면
지맥(支脈)으로 부를 수 있는 산줄기를 말한다.
예를 들면 한북천마지맥(漢北天魔支脈) 줄기 중 주금산에서 갈래친 산줄기로 그 세(勢)가 사못
웅장(雄壯)한 산줄기가 하나 더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산이 축령 산이다.그래서 그 산줄기의 이름은 한북천마축령분맥(漢北天魔祝靈分脈)이라고
부른다.
한북정맥(漢北正脈)에서 갈라져 나와 천마지맥(天魔支脈)을 타고 가다 축령산(祝靈山)을 거쳐
북한강에서 그 끝을 다하는 산줄기다.
지금까지의 산줄기는 최소한도 2일 이상 산행을 요구하는 20km 이상의 산줄기를 말하는데 그러면 하루도
안걸리는 짧은 거리지만 뚜렷한 세(勢)를 이루고 있는 산줄기 는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겠습니까?
짧을단자 단맥(短脈)이라고 봅니다.
단맥(短脈)은 大幹, 正幹, 正脈, 岐脈, 支脈, 分脈 즉 모든 산줄기에서 분기(分岐)한다는걸 알수가 있다.
잘 알고 있는 명지산을 예로 들어보면
한북연인명지단맥이 되는 것이다. 즉 한북정맥(漢北正脈)에서 분기(分岐)한 연인지맥에서 다시 분기(分岐)하여
명지산으로 뻗어 나가 강이나 그 지류(支流)에서 끝이 나는 산줄기라고 읽을 수 있 는 것이다.
여기까지 분류(分類)가 되고 산줄기 이름이 정해지면 대한민국 산줄기란 줄기는 거의 모두 다
포함(包含)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표시 안되는 아주 짧은 산줄기가 있다.
남을여자 여맥(餘脈)이다.
단순히 大幹, 正幹, 正脈, 岐脈, 支脈, 分脈, 短脈에서 분기(分岐)하여 무명봉 한두개를 넘으면 끝이나는 산줄기로 굳이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 때만 사용할 수 있겠 지만은 통상 大幹, 正幹, 正脈, 岐脈, 支脈, 分脈, 短脈상에 있는 산으로 묶어버리 되는 산줄기 들이다. (등산학교 강의자료에서)
이상으로 우리나라의 산줄기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나열해 보았으나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산줄기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산악인들이 정의(定議)한것이니 만큼 본 내용이 정확한 표현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음을 밝혀둔다.
산경표에 대한 敷衍 說明을 덧붙이자면....
산경표는 海東道里譜, 箕封方域誌, 山里攷(이상 서울대학교 규장각), 輿地便覽(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海東山經(국립중앙도서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된 책의 일부로서 程里表, 道里表가 전해온다.
모두가 한문으로 된 筆寫本이며, 필자와 연대를 밝히지 않았고 序文이나 跋文도 싣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두 가지 筆寫本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첫째는 규장각 소장의 海東道里譜 중의 山經表,
둘째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의 輿地便覽 중의 산경표가 있는데
이우형은 규장각 소장의 海東道里譜 중 산경표에 대해 무게를 더 두고 있는데 그의 주장은 이렇다.
山經表의 한북정맥 追慕峴에 영종 45년(1769)이라는 연대를 附記하고 있는 점,
여암(旅庵) 신경준이 1781년에 타계한 점,
장서각본 여지편람의 곤책(坤冊)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에는 정조 20년(1796)에 완공된 화성(華城, 수원)이 실려 있는 점 등을 摘示하고 山經表의 출현 시기는 1800년 전후로, 찬표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 월간 『산』, 1993. 6월호에서)
반면에 박용수는 여지편람의 산경표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1769년에 여암 신경준(1712-1781)이 편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영조 40년(1770년)에 완성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는 우리나라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백과사전격인 책이다. 그 중 지리 부분인 여지고를 신경준이 담당했다.
여지편람은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지리를 알기 쉽게 기술한 지리서다.
여지편람은 건책(乾冊)과 곤책(坤冊)으로 구성되어있다. 건책은 내제목(內題目)이 산경표,
곤책은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다.
여지편람은 1769년경 신경준이 영조의 명을 받아 감수, 편찬한 것이다.
여지편람의 건책이 바로 現在 전하는 산경표의 원전이다.
그러므로 산경표의 간행시기는 1769년, 저자는 신경준이다. 라는 뜻을 밝히고 있다.(태백산맥은 없다에서)
山經表에 대해서 또 다른 주장은........
양보경은(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일본 정가당 문고(靜嘉堂文庫)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여지편람은
전혀 다른 내용의 6책으로 된 조선 지도책임을 밝히면서 내용은 다르나 이름이 같은 책이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영조가 동국문헌비고의 편찬 과정을 설명하면서 여지편람의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와 비슷하다고 언급하였으나 장서각본 여지편람은 산경표와 도리표(道里表·『정리표』)로서 문헌통고와는 체제가 다른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장서각본 여지편람을 영조가 신경준에게 감수를 맡겼던 책으로 추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좀더 신중히 검토할 것을 주문하였고....([조선시대의 자연인식 체계], 『한국사 시민강좌』 제14집, 일조각, 1994)
산경표에는 19세기초에 변화된 지명이 기재되어 있고 문헌비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 어려우나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였다.([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 『월간국토』 1999년 5월호)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둘의 산경표를 쉽게 구경할 수가 없는 처지다.
그러면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朝鮮光文會本의 山經表는 어떤 것인가
서지학자들은 影印本이 아닌 독립된 하나의 本으로 인정하고 있다.
1913년대 조선광문회의 산경표는 전 시대에 붓글씨로 써서 발간된 즉 최성우가 소장하고 있던 筆寫本을 참고로 하여 그것을 인쇄용 활자로 바꿔 찍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 조선광문회본의 산경표 표지
어째든 산경표는 朝鮮 후기에 발간되었던 地理書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저자가 누구인지 편찬시기가 언제인지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이 책에는 現存하는 우리나라 산줄기를 사실에 根據하여 15개 산줄기(백두대간, 1정간, 13정맥)로 나누고 1,650여개의 지명과 1,500여개의 산과 고개를 일목요연하게 표기하고, 10대 주요 강줄기를 流域別로 나누어 수록해 놓은 우리민족의 전통지리서 임에는 틀림이 없고 또 당시 國家의 공인된 地理槪念이었으며, 朝鮮時代를 거치는 동안 지리의
근간으로 활약했고 논리 정연한 大 지리 백과사전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전통지리서인 山經表가 후대들에게 묻혀 지며, 특히 日帝의 조선 강점이라는 국가적 환란에는 근 1백년 가까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山經表가 우리 시야에 사라지는 일제시대에는 일본이 조선침략정책의 일환으로 두 차례에 걸쳐서 광물탐사사업을 실시하였다.
그중 학술책임자 자격으로 고토 분지로가 우리나라의 地質을 조사했으며, 그는 조사를 토대로 조선의 산악론, 지질구조도를 동경제국대학 論文集에 발표하게 되며 그 때부터 조선 땅에 山脈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후 日本은 조선 전래의 산줄기체계를 몰아내고 이어지지 않고 단절된 地質槪念인 山脈을 강제로 도입시켜 그후 우리는 1백년 가까이 지질개념을 배우는 비운을 맞았고 또 山經表는 역사속에서 묻혀 지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 서울 인사동 고서점에서 이우형이란 사람에 의해서 1800년대 초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저자미상의 우리 나라 옛 地理書인 山經表를 발견한다
그 후부터 이우형은 산경표에 골몰하기 시작하여 1985년에 大東輿地圖의 再版을 찍어내는데 成功을 한다.
1986년 이우형에 의해서 언론매체에 白頭大幹이라는 用語가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모태로 1988년 한국대학산악연맹, 박용수, 조석필님 등의 연구와 노력으로 地形의 槪念인 大幹, 正脈 등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한 우리 지리체계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산경도
▲ 故 이우형 선생이 제작한 산경도(산경표의 15개 산줄기를 현대지형도의 눈으로 읽도록 제작하였다)
조석필씨는 본인의 또 다른 著書인 태백산맥은 없다에서
산경표를 위한 기본 제안(향후 산경표의 표준으로 확립해야할 과제들)을 피력하고 있는데.....
이 절에서는 산경표에서 지적되고 있는 문제점들과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논란거리는 성격상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당시의 측량기술 수준의 한계에 따른 잘못으로 마땅히
고쳐져야 할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견해 차이에 기인한 혼란으로 적절한 논의 후에 통일되어야 할 것들이다.
논란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산경표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산경표는 18세기의 책이다.
당시의 생각과 명칭, 당시의 측량수준, 당시의 인쇄 능력을 반영하고 있다. 적지 않은 오류가 있고
그에 따른 혼선 또한 만만치 않다.
산경표에서는 지리인식의 원리만 배워오면 충분할 것이다. 나머지는 현대지형도의 눈으로 다시 읽어야한다.
왜냐하면 지리인식으로서의 산경표는 미래의 표준으로 쓰여나가야 할 도구이며 미래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는 체계와 명칭을 갖춰야하는 잣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새로운 체계도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므로 가능성만 열어두기로 한다.
제시한 대안들은 실용성을 중심으로 마련한 것이다. 시급한 것은 어느 쪽이든 하루 빨리 통일안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혼란은 방치할수록 바로잡기 힘들어진다. 책임 있는 기관에서 나서야할 때다.
참고
▲ 海東道里譜는
저자와 편찬연도 모두 미상이다.
조선후기에 우리나라 도로와 산세 등을 정리한 표, 본문은 去京程里表, 山經, 本營으로부터의 거리표,
嶺南道里表로 구성되었다.
去京程里表는 서울로부터 연결되는 도로망을 정리한 것으로서 서북쪽으로 義州, 동북쪽으로 慶興 西水羅, 동쪽으로 平海, 동남쪽으로 釜山, 太白山, 남쪽으로 統營別路, 濟州, 서남쪽으로 忠淸水營, 서쪽으로 江華 등 9개의 大路로 구분하였고 각 대로는 다시 여러 단계의 지선으로 나누었다.
각 道路는 주요 지점을 수록하고 여기에 거리와 分岐의 수를 병기하였으며 분기되는 도로는 첫머리에 방향을 명기하였다.
말미에는 道里總目이라 하여 각 大路의 총 里數를 정리하였다.
[생략]...................
<山經>은 우리나라의 주요 산세를 정리한 것으로서 百頭大幹을 중심으로 長白正幹, 淸北正幹, 淸南正幹, 海西正幹, 臨津北禮成南正幹, 漢北正幹, 洛東正幹, 漢南錦北正幹, 錦南湖南正幹으로 나뉘었다.
각 항목에는 邑治에서의 거리, 山勢의 방향, 分岐, 지리고증, 水營 등의 설치 등을 함께 기록하였다.
[이하 생략]...........................
(서울대학교 규장각)
▲ 輿地便覽은
여지편람, 우리나라의 산맥계통을 밝힌 산경표와 거경정리와 도내의 군현읍치 사이의 거리조견표를 포함하는
程里表가 포함된 지리편람 2책, 필사본, 산경표는 51장이고 정리표는 48장으로 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세로 24.1㎝, 가로 15.1㎝이다.
저자와 제작연대의 표시는 없으나 산경표는 영조 때의 실학자 신경준(申景濬)의 산경표와 동일하고 정리표의 내용은 신경준이 편집하고 그 뒤 증보된(증보문헌비고) 輿地考안에 있는 道里의 내용을 표로 만든 것으로 보아 신경준이 만든 원작을 증보,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경표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산맥계통을 大幹, 正幹, 正脈으로 구분하고 그 계통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白頭大幹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黃土嶺, 厚致嶺, 黃草嶺, 狼林山, 金剛山, 五臺山, 太白山, 小白山, 竹嶺, 德裕山을 거쳐서 智異山에 이르는 한반도의 등뼈산맥을 이루고 있다.
長白正幹은 경성 서쪽 100리에 위치하는 장백산에서 시작하여 동북쪽으로 뻗어 서수라에 이르는 산맥이다.
백두대간에서 서쪽 황해안을 향하여 뻗고 있는 산맥을 정맥(正脈)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청천강을 경계로 청북(淸北)과 청남정맥(淸南正脈)을 구분하고 있다.
즉, 현재의 적유령산맥과 묘향산맥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한북정맥(漢北正脈), 낙동정맥,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남정맥·금북정맥,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남정맥, 호남정맥으로 나누고 있다. 따라서 정맥은 하계의 유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략]....................
또한 정리표에는 증보문헌비고에 없는 거리조견표가 도별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산맥계통과 주요간선도로 및 지로(支路)에 관한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고, 이 책은 지방수령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관료와 선비들에게 널리 이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유사본이 많이 전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지리편람으로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도가 없는 것이 아쉽다(한국학중앙연구원)
▲ 신경준 [申景濬, 1712∼1781]은
본관 고령(高靈), 자 순민(舜民), 호 여암(旅庵),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휘릉별검(徽陵別檢), 전적(典籍), 병조와 예조의 낭관(郞官),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지내고 1762년
서산(瑞山)군수로 나갔다.
이어 장연(長淵)현감, 헌납(獻納), 사간(司諫),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하였다.
1770년 문헌비고(文獻備考) 편찬에서 여지고(輿地考)를 맡아 한 공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어 팔도지도(八道地圖)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였다.
1771년 북청(北靑)부사, 1773년 좌승지(左承旨), 강계(江界)부사, 순천(順天)부사, 이듬해 제주(濟州)목사, 1779년 치사(致仕)하고 고향 순창(淳昌)에 돌아갔다.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성률(聲律), 의복(醫卜), 법률, 기서(奇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고, 실학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한국의 지리학을 개척했다.
1750년에는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지어 한글의 과학적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
저서에는 여암집(旅庵集), 소사문답(素砂問答), 의표도(儀表圖),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경표(山經表), 증정일본운(證正日本韻), 수차도설(水車圖說)이 있다.
▲ 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는 한국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백과전서적인 책이다
목판본, 100권 40책, 영조의 명으로 1769년(영조 45) 편찬에 착수, 1770년에 완성되었다.
체재는 중국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예에 따라 상위(象緯), 여지(輿地),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市?),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의 13고(考)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그 후 이를 다시 증보, 고종 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라 하여 250권으로 간행하였다.
▲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는 상고(上古) 때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총망라하여
분류 정리한 책이다.
활자본, 250권 50책, 문헌비고(文獻備考)라고도 한다.
최초의 편찬은 1770년(영조 46)에 홍봉한(洪鳳漢) 등이 왕명을 받아 상위(象緯), 여지(輿地),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市?),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의 13고(考)로 분류하여 100권으로 만들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라 하였다.
그러나 사실(史實)에 어긋난 점과 누락된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천에 따라 법령(法令)과 제도가 많이 변경되었으므로 1782년(정조 6) 왕명으로 이만운(李萬運) 등에게 이를 바로잡아 보편(補編)토록 하였다.
이것이 제2차의 편찬이며, 9년여에 걸쳐 동국문헌비고의 13고(考)에 대해 오류를 바로잡고 누락된 것을 채우는 한편 새로이 물이(物異), 궁실(宮室), 왕계(王系), 씨족(氏族), 조빙(朝聘), 시호(諡號), 예문(藝文)의 7고(考)를 증보하여 146권을 편성하고 이를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라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간행되지 못하고 100여년 뒤인 고종 광무 연간에 이르러 제3차 보편을 하였다. 즉, 1903년(광무 7)에 특별히 찬집청(撰集廳)을 설치하고 박용대(朴容大) 등 30여 명의 문사들에게 명하여 이를 보수하게 한 것이다.
박용대 등은 5년여에 걸쳐 증보동국문헌비고에 수록된 20고 중에서 물이는 상위에, 궁실은 여지(輿地)에, 시호는 직관에 포함시키고 왕계는 제계(帝系)로 고쳐서 씨족(氏族)에 포함시켰다.
또 조빙을 교빙(交聘)으로 고쳐 상위, 여지, 제계·예, 악, 병, 형, 전부, 재용, 호구, 시적, 교빙, 선거, 학교, 직관, 예문의 16고 250권으로 편성하고 이를 증보문헌비고라 이름 붙여 1908년(융희 2)에 간행하였다.
한국 전통문화에 관한 백과사전으로서 제도, 문물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일본은 강점 후 1910년부터 18년까지 9년 동안 수탈의 目的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조선의 세밀한
지형도를 그렸고 쌀과 곡물을 가져가기 위해 도로와 철도를 냈으며 금 등을 캐가기 위해 地質調査에 광분했다.
그 시기에 조선으로 들어온 사람이 고토 분지로 라는 지질학자다.
그는 일본이 조선침략정책의 일환으로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에 걸쳐 총 14개월 동안 실시한 광물탐사사업의
학술책임자 자격으로 우리나라의 지질을 조사했다.
그 조사를 토대로 "조선남부의 지세(1901년)", "조선북부의 지세(1902년)"를 발표했고 두 논문을 종합하여 체계화한 "조선의 산악론(An Orographic Sketch of Korea)" 및 "지질구조도(1:200,000)"를 동경제국대학 논문집에 발표했다. 그게 1903년이었다.
그 때부터 조선 땅에 山脈이라는 용어가 나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토의 논문은 조선 전래의 산줄기체계와 확연히 다른 것이며, 당시 유행하던 지질학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 산맥분류의 시초가 되었고 체계와 명칭의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듬해인 1904년, 정치지리학 전공의 야쓰쇼에이가 韓國地理를 펴냈다.
일본 동경에서 간행된 그 책의 산맥편에 나오는 산맥지형도는 고토의 연구를 충실히 반영한 것이었다. 다만 거미줄처럼 얽힌 고토의 산맥선들을 단순화시켜 오늘날의 산맥계통도와 유사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다르다.
1905년 조선이 통감부체제로 들어가자 교과서의 내용도 제재를 받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1908년 당시의 지리교과서였던 "高等小學大韓地誌"에 신식 지질개념이 전래의 산줄기인식을 대신한다는 선언이 등장한다(조석필 著 태백산맥은 없다에서)
▲ 조선광문회는 1910년에 설치된 韓國古典 간행기관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정치적으로 다난했던 시기에 학자들의 국민계몽을 위한 활동이 컸다. 그들은 애국적인 견지에서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지식을 널리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국사연구도 민족적인 기개(氣槪)와 자존심을 앙양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광문회에서는 한국의 고전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재인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한국고전을 간행·보급시키는 한편, 민족의 정신적 결합을 기하며 민족문화와 사상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 종사하였다.
최남선(崔南善)이 창설하고 박은식(朴殷植) 등이 관계하였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 해동역사(海東繹史),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경세유표(經世遺表), 상서보전(尙書補傳), 등 17종의 조선총서(朝鮮叢書) 간행하였다.
▲ 朝鮮光文會가 崔誠愚 소장본을 臺本으로 1913년 2월 단행본으로 간행한 산경표 신연활자본에는 편찬자는 알 수 없다. "撰者 未考고 하면서도 서문에서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輿地考를 거론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음을 지적하게 된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山經만이 그 줄기[幹]와 갈래[派]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높이 솟아 어느 산을 이루고 비껴 달리다가 어느 고개에 이르며 굽이돌아 어느 고을을 둘러싸는지를 상세히 싣지 않은 것이 없기에 이야말로 산의 조종을 알려 주는 표라 할 만하다.
산경을 바탕[綱]으로 삼고 옆에 이수(里數)를 조목[目]으로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범위와 경계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 원전으로 삼은 산경에 금상첨화일 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가의 나침반[指南]이 될 만하다 하겠다.
"( 考東方地志論山者類多 摘拔其尤散亂無統 惟輿地考申景濬所撰 山經直 幹波來歷 高起爲某嶽橫馳爲某嶺 回抱爲某治無不詳載 寔爲導
山之祖是表也 以山經爲綱而旁附里數目 而張之全區界境曉然爲指掌 非但爲原經之錦花 實爲地理家之一指南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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