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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옛날 옛적에...

50여년 전의 우리의 자화상

by 범여(梵如) 2012. 6. 15.

 

 

 

☞ 불과 50여년 전의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

♠ 풍요로움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신 옛날 어린이들 ♠

누더기 옷에 헐벗고 굶주림에 살았어도
따스한 온정이 흐르던 시절 이었습니다.



추운겨울 냉기가 감도는 방에서 나와 따듯한 햇볕에서
늘 언몸을 녹이곤 했지요. 헤진 옷을 입고 살아도 다들
그렇게 사니 부끄러움이 뭔지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어머니~ 추운겨울 양말이 없어 맨발이
시려도 어머니 등에 업히면 엄마 품에서 나는 젖내음과 따
듯하고 포금함은 지금도 잊을 수 가 없었습니다.
투방집=나무로 얼기 설기 쌓아서 흙으로 빈 공간을 막아서
지은 집입니다.




소 외양간에 창을 만들어 소 여물을 먹이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소가 재산목록 1호였으며 사람은 굶어도 소는 늘 따근하게 쇠
죽을 끓여서 주곤했지요. 물론 소없는 집이 대다수였지만....




두메산골 추운 겨울을 나기위해 월동 준비를 해놓은 장작더미
앞의 세모자입니다. 초라한 모습과 천진 난만한 표정이 가슴을
찡하게 만듭니다.




굴피나무 껍질로 지붕을 덮어놓은 너와라는 지붕이지요.




겨우살이를 위해 준비해둔 옥수수와 산골의 가정의 풍경입니다.
옥수수 죽이나 감자등으로 연명하며 겨울 나기를 했지요.




아이를 업고 김을 메는 우리들 어머님




신문팔이, 신문배달 참으로 어렵게들 사셨습니다.




추수가 끝난 동구밖 들판은 아이들의 놀이터로서 최고였지요.




어촌의 아이들이 부모님의 일손을 도와 어포를 말리는 중입니다.




생활은 어려워도 꿈과 희망이 넘첬던 시절이었습니다.
텃밭의 짚더미는 추위도 녹여주고 놀이터로 활용되고....



 

학교 다녀오면 의례 부모님 일손을 돕고 밤이돼야 숙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가물 가물한 호롱불 밑에서 꾸벅 꾸벅
졸면서 숙제하다 머리카락 많이들 태웠었지요. 연필심
마져도 품질이 좋지 않아 <침을 발라 두어자 쓰고 또 침 바르고...



암닭이 알을 놓기가 바쁘게 책보허리에 메고 따듯한 계란을
들고 학교로 내달렸지요. 문방구에 가서 계란으로 공책이나
연필등 학용품으로 물물 교환했답니다.뛰어가다 엎어져
계란은 깨지고 눈물 콧물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금방 낳은 계란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



학교 다녀와선 어김없이 지게지고 밭으로,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가곤 했지요



가축들도 거두고, 한겨울에 고무신 신고 신발이 꽁꽁 얼서서
발에 붙어 떨어지지도 않았답니다. 그때는 동상 안 걸린
아이들이 이상했지요



설걷이를 하기 위해 빈그릇 솥가마등을 안고 동네 우물가로
설걷이를 하러 가는 모습입니다. 가마솥 뚜겅을 머리에 쓰고
가는 모습이 설걷이를 많이 해본 솜씨 같습니다.



지게를 못지는 여자아이들은 나무를 묶어서 머리에 이고
산에서 내려오다 많이도 굴르고 다치고......



먹고 살기위해 학교 다녀오면 길거리로 구두딱이, 껌팔이,
신문팔이 무엇이든 했답니다.



구두를 닦는 아이의 표정이 무척이나 고달퍼 보입니다.



어머니의 바쁜 일손을 돕고 있읍니다. 요즘 머리에 물건 이고
다닐 수 있는 어린이들은 아마 없겠지요.



부모님들은 공사장이나 들에 나가고 어린들은 학교 다녀와서
동네의 잔 일거리들은 다 하였지요.



곡괭이나 삽질도 잘했지요.



당시 정부에서 덩그러니 학교 교실 하나 지어주면 나머지
모든 공사는 학생들 차지 였습니다. 돌을 이고 지고 학교
축대 쌓는 작업을 하고 있네요. 머리에 돌을이고 있는
어린이 모습.. 돌을 어깨에 맨 아이...



배타고 나가 부모님 일손도 돕고.....



소먹이러 가고...비록 힘들게 살았어도 국경일이면,
산골마을 독가에서도 꼭꼭 태극기 게양 했지요...



초가집 앞 텃밭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네요.



한겨울 강아지를 안고 따라로운 햇볕을 쬐고있습니다...
강아지 안으면 온몸이 따듯했지요...돌아가면서 안고,
순서를 기다리는 두어린이 표정이...*^^*



엄마가 세수시켜 줄 때면 제인 먼저 코풀어! 하시고 ...
따듯하게 물데워서 어린 동생들을 돌아가며 세수를
시키셨지요.



아파도 병원이 없어서, 너무 멀어서, 늘 집에는 아까징끼
(머큐롬)을 비치해두고 발라주시곤 했지요. 자식의 아픈
고통을 대신하듯 어머니의 표정이 너무도 안타깝게 보입니다.



이발관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동네 한 두곳 이발기계 있는
집에가서 머리를 깎고 했지요. 부실한 기계로 머리털 뽑혀서
눈물은 줄줄...



간혹 사회 복지가들이 학교 찾아오시어 사탕이나 먹을것을 전해주시고...



아이를 등에 업고 갯벌에서 하루 종일 일하시곤 밤이면 아고고
허리야! 고통으로 잠못 이루시던 우리 어머님들 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