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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지리산 산행자료 ♣

지리산,상내봉 벽송사(1200m),빨치산루트

by 범여(梵如) 2012. 9. 8.

 

둘레길이 마치 현대사의 역사탐방만큼이나 의미를 부여한다.

3명의 여자빨치산(정순덕,이은조,이홍희) 중 63 년도에 마지막 여자 빨치산인 이은조가 이곳 선녀굴에서 사살 되었다고 한다.

 

이념이 뭔지도 몰랐을 파르티잔(Partisan)들의 애환과 지리산 기슭에서 살아가는 죄로 수난을 당해야 만 했던 아픈 역사...

아기를 떼어놓고 젖무덤이 퉁퉁 불어 허연 젖을 짜내야만 했던 여자 파르티잔들의 눈물도 보이는 듯 하다.

 

최후의 빨치산 故 정순덕 여인의 진술기록

 

나는 1933년 6월20일(음력) 아버지 정주삼씨와 어머니 진도원씨의

1남4녀 가운데 둘째 딸로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태어났다.

우리 마을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이 마주 닿는 곳.

해발 800m 하늘아래 첫동네로 9가구가 살던 곳이다.

아버지는 평범한 촌부, 어머니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네.

나 역시 여느 산골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랐으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선머슴처럼 일했다.

평온했던 우리 마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가 열 다섯살 때이던 해인 1949년 부터였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말들이 들려오더니만

어느날 반란군들이라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의외로 거칠거나 험악하게 굴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도 밥을 해먹거나 해달라며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봄이던가?
안내원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라는 소개령.

반란군을 소탕한다며 산 아래로 대피하라는 명령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

조상 대대로 살던 동네에서 쫓겨났다.

우리집은 면소재지의 방 한칸에서 살았다.

다행히 그곳 대하리에 고모집이 있었기 때문.

하루 아침에 황망한 꼴을 당한 우리 가족

암소 두마리로 고모네 논을 부치며 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1950년 5월 만 16 나이로 결혼했다.

근처 마을에 성씨 집안의 장남 성석조씨가 나의 남편,

그당시 처음 만난 17살 남편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다.

 

일찍 시집을 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흉년이 3년 겹친 탓.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

남편은 나를 참으로 따뜻이 대해 주었다.

남편은 내가 시집가기 몇해 전 돌림병으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여의고 농사일을 하면서

3살, 6살, 11살 동생들을 돌보는 외로운 사람.

어른들의 조언도 들을 수 없었던 남편은

어린 나이에 순전히 자신의 판단으로 전쟁 직후

인민군 점령 하에서 몇달 동안 '민족 애국 청년단'

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부역행위를 했다.

이것이 남편뿐 아니라 내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인민군은 얼마 못가 철수하고 나자 남편은 빨갱이로 몰렸다.

남편은 당분간 산에 들어가 있어야겠다며 지리산으로 떠났다.

남편이 산으로 들어간 뒤 국군과 경찰이 잇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빨갱이 남편을 찾아오라."는 위협과 폭행

시동생들을 맡았던 나는 변명 한번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토벌대가 찾아와 총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어깨가 빠지는 등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마구 때렸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나는 두려움과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1950년 11월 근처에 살던 숙모에게 몸을 피해야겠다고 전한 뒤

약간의 식량을 이고 일주일간 피신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을 찾아 잠시 몸을 피하려고 들어간 지리산 골짜기에서 13년.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나 자신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빨치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얼마 후 취사부에 들어갔다.

거기서 꿈에 그리던 남편을 만났고 입산이 죄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시간이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1952년 1월 토벌대의 2차 대공세(일명 대성골 천불사건)

지리산에 흩어져 있던 빨치산들이 토벌대 공세에 쫓겨 대성골로 몰려왔다.

토끼몰이 하듯 우리를 몰아넣은 토벌대는 B2 폭격기로 비오듯 포격을 시작

2주간 계속된 공격으로 산속은 온통 불바다

대성골의 빨치산들은 거의 사살되거나 잡혔다.

 

빨치산은 세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총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당시 나는 엄동설한에 혼자 바위틈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일주일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극한 상황에서 이 말을 실감했다.

이 공격에서 나는 살아 남았지만 난리통에 헤어졌던 남편은 죽었다.

그 전까지 밥이나 빨래 허드레일을 하거나 환자간호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정식 전투원이 되었다.

 

군경 토벌대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희생자가 늘었고 빨치산은 위축되었다.

그 와중에 산간지대 주민들도 토벌대에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또 빨치산 내부에 불만을 품고 토벌대에 자수한 고위 간부들도 있었다.

그들이 토벌대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보급이 끊기고 비트가 기습당했다.

 

날이 갈수록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점점 좁아졌다.

정전 이듬해인 1954년 모두 7명 남았던 여자 빨치산.

그 중 한명이 귀순하며 나머지 6명도 신분이 알려졌다.

그후로는 주변의 친척들까지 경찰에 시달렸다.

1954년 말 이은조와 이홍희 나 3인의 여성 빨치산.

이때부터 셋이서 최후의 빨치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추운 겨울을 지리산 속에서 넘기기란 쉽지 않았다.

 

1955년 한해 동안 전북 장수와 무주 덕유산 기백산 월봉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살아남기 위해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1956년 지리산으로 돌아간 우리는 토벌군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고립

식량을 얻기 위해 친척집을 찾고싶어도

친척에게 화가 될까 두려워 갈 수 없었다.

1960년 정부의 통제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협조적이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도움 받았다.

 

하지만, 1961년 겨울 매복 나온 토벌대의 기습으로

총격전 도중에 여자 빨치산 동료였던 이은조를 잃었고

언제 토벌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됐다.

1963년, 경찰은 우리의 정보원이던 나의 먼친척을 위협하고 회유

11월에 접선할 정보를 알고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우리를 기다렸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 집에 들렀던 우리는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동료 이홍희는 사살 당했고 나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로써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고

나의 13년 지리산 속에서의 생활도 끝났다. (자료발췌)

   

 

 

참고용 개념도(화살표 방향으로 몇 해 전에 답사함.)

 

 

 

 

 

 

 

 

 

                           지금은 폐쇄된 벽송사~송대마을구간

  ↑ *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