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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9기맥 자료및 산행후기 ♣/한북(오두)기맥(終)

오두지맥 제2구간 - 양지재에서 오두산(통일전망대)까지

by 범여(梵如) 2012. 10. 4.

 

☞ 산행일자: 2012. 10,03

☞ 산행날씨:맑은 날씨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거리: 도상거리 24.2km / 10시간 50분 소요

☞ 산행코스:  양지동고개-용미1리-돌봉산-매봉-미희농산-오산리 출판산업단지-오산리 고개

                   영산 수련원-103봉-120봉-해방교회공원묘지-100봉-도내고개-헬기장-농수로

                    군부대 정문-공장지대- 신성레미콘-1번국도(경의선철도)-VTC공장-다락고개

                     예비군훈련장 진입도로-방호벽-예비군부대-No29 / No80 송전탑-118.8m봉

                    체험사격장 훈련장 -헬기장 공터봉(산불감시초소)-월롱산-헬기장-5번군도

                    245봉-군부대-200봉-21군도-파주물류센터-바구니고개-기독교공원묘지

                   131봉-동화경모공원묘지-각시고개-대광물류센터-일송정식당-탄현지방산업단지

                   GS칼텍스주유소-미경카센터-절개지-99봉-성동사거리-열구니고개-임도

                   2차선 포장도로-117봉-검문소-통일전망대  

☞ 소 재 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월롱면, 금촌읍,교하읍,탄현면

 

 

개천절인 10월 3일에 근교지맥인 오두지맥을 마무리 하기 위해서 이른 새벽에 출발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잠을 깨어 설치다가 늦잠을 자버리는 바람에 아침 6시에 출발을 하려고 주차장에 나오니

가운데 세워 놓은 차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해논 바람에 다시 10분정도를 지체한다.

집을 나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가다 다시 강변북로를 타고 과속을 하여 가다가 벽제에서 김밥 3줄을

사가지고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는 용암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서둘러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용암사 주차장(07:45)

이번 구간은 대중교통으로 아침 일찍 도착하기에는 좀 애매한 구간이다.

그래서 차를 가지고 새벽 4시에 출발을 하려고 하였는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새벽 6시에 집에서 출발하여 고양시 백제 삼거리 김밥집에서 아침겸 점심으로

김밥 3줄과 인근 편의점에서 쥬스 2개를 산 다음에 양지재에 도착하여

용암사(용미리 여래미륵입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행을 시작한다.

차를 세우고 광탄방향으로 5분정도 도로를 따라서 걸어가니 용미1리

버스 정류소와 마을 입간판이 보이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들어선다.

양지마을이란 표시석 뒤로 올라가니 밭이 나오고 군부대 철조망에

잡풀에 철조망이 엉켜있고 많은 이슬이 내려 금새 바지가 다 젖어 버린다.

잡풀이 가득한 숲에는 그래도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반갑기만 하다. 

좌측으로는 양지마을이 보이고 들깨가 심어진 밭과 군부대 철조망 사이로 간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군부대 사이에 빨간색 집 한채가 지맥길을 막고 있다.

부득히 좌측으로 우회하여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 아카시아 나무를 헤쳐 올라가니 묘지가 나오고 밤나무에 밤이 많이 떨어져 있다.

초반에 베낭을 벗어놓고 10분정도 밤을 줏었는데 1되정도는 줏었다.

산행시작 10분도 안되어서 등산화와 바지가 다 젖어 버렸다.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서 길을 가는데 철조망과 찔레꽃이 어우려져

초반부터 수난은 계속되고 시간은 자꾸만 지체된다.

이런곳에서도 아카시아 나무에 선단자들의 표지가가 보이고...

겨우 철조망을 지나니 임도 삼거리가 나오고 이곳에서 숲속으로 올라선다.

봉우리 삼거리(08:20)

능선 정상에 오르니 삼거리가 나오고 좌측으로는 광탄면 장곡리

명곡산으로 가는 길이다. 능선 우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곳곳에 군사시설물들이 보인다.

돌봉산(163m:08:25)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와 장곡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지도상에는

표기조차 되어있지 않은 산이다. 산 정상에는 팔각정과 벤치가 있고

최근에 설치한 듯한 표시석과 상석이 있는것로 보아 행사때 祭를 지내는 모양이다.

우측에는 군 시설물인듯한 폐가옥이 보이고 주민들을 위한 체육시설도 있다.

직진하여 경사 내리막길을 향한다.

분수리 갈림길 삼거리 이정표(←매봉 0.95km/돌봉 0.18km→/분수리↗)

이정표가 있고 이곳에서 90도 꺽어진 매봉으로 향한다.

약수터 갈림길 삼거리 이정표(←돌봉0.48km/매봉 0.65km→/약수터 0.2km↘)가 나오고...

이정표 (←돌봉 0.73km/매봉 0.4km→)를 지나고...

매봉 정상(08:50)

정상에는 벤치가 있고 약간 평평한 곳에 소나무 2그루가 있다. 

매봉 내리막을 내려서니

 이정표 (←간매봉 1.7km/돌봉 1.15km→)가 나온다.

군부대 벙커와 최근에 만든듯한 교통호가 나온다.

全州 李公 묘지을 지나 내려서니 콘크리트 포장임도와 만난다.

미희농원앞(09:10)

포장도로를 내려와서 우측 고개쪽으로 올라간다.

고개 정상에서 좌측 절개지로 올라간다.

야생화는 언제봐도 꾸미지 않은 순수함이 아름답다.

절개지 오름길에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반겨주고...

능선으로 오르니 우측으로 단풍나무를 심은 농장이 있고...

묘지를 가로질러 숲으로 접어드니 우측에 대부지경계란 하얀 팻말이 있다.

졸지에 황천길 갈뻔한 말벌통

이곳은 묘지들이 많아서 그런지 4륜차가 다닐만큼  넓은 임도를 걷는다.

그런데 우측의 조그만 나무에 왕탱이 말벌집이 하나 보인다.

처음엔 조심해서 머리를 숙이는데, 자세히 보니 벌이 한마리도 안보인다.

그래서 더 가까이 갔는데도 벌은 보이지 않는다.

졸지에 욕심이 생긴다. 이 벌통이 오래돼서 벌이 살지 않은걸로 생각하여

벌집을 따서 노보방주(말벌과 벌집을 술로 담근것)를 담그려고 베낭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벌집을 따려는 순간에 갑자기 10여마리의 벌이 나오더니

나한테 달려든다. 순간 땅바닥에 개구리처럼 엎드린다. 그래도 손등에

2방이나 쏘였다. 갑자기 정신이 멍하다. 5분정도 엎드려 있으니 다시 조용하다.

이 왕탱이(말벌)한테 머리 같은곳에 제대로 쏘이면  졸지에 황천길인데... ㅋㅋㅋ

다시 몸을 추스려 임도를 걷는데 철조망이 나타나고

철문을 지나니 묘지들이 나온다.

집사 김 인혁 지묘를 지나서 묘지위로 올라선다.

묘지를 지나서 숲속에 접어드니 군 교통호가 나오고 Y자형 임도가 나온다.

조금 더 올라가서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져서 숲속으로 간다.

잘 가꾸어져 있는 고령박씨 묘지를 4기를 지난다.

숲을 지난다. 이곳에도 밤이 꽤나 떨어져 있다. 또 밤을 줏어 담는다.

좌측으로는 공장을 지어려는지 공장터를 만든 절개지가 나오고...

절개지를 지나니 공장들이 보이고 도로로 내려온다.

동아사료 파주물류센터를 지나고...

페이퍼플라자 입간판을 지나니 카톨릭출판사가 나온다.

소망물류와 매일경제를 지나니 오산리 삼거리가 보인다.

오산리 삼거리(10:00)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오산리와 신산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파주오산 지방산업단지가 있는 삼거리이다. 이 단지는 주로

종이관련 업체들이 많이 입주해 있다. 이곳에서 길을 건너 좌측으로 간다.

영산 수련원 입구(10:02)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회인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운영하는 영산 수련원과 금식기도원, 그리고 추모공원이 있다.

영산 수련원쪽으로 걸어서 간다.

영산 수련원(10:07)

영산 수련원 입구에서 좌측으로 올라서니 금식기도원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 소주차장으로 가서 우측 임도로 올라간다.

임도로 올라서니 순복음교회 공원묘지인 크리스천메모리얼파크가

나오고 묘지 옆길로 올라서니 정자가 보인다.

공원묘지 맨 위에 정자가 있고 좌측 임도를 따라 숲으로 접어든다.

공원묘지 위에서 바라본 광탄면소재지

 

광탄면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술이홀현에 속한 곳이었다.

그 후 통일신라 때에는 한주의 봉성현, 고려 전기에는 양주, 후기에는

양광도의 서원현, 그리고 조선 말기까지 파주군에 속한 곳이었다.
광탄이라는 명칭이 1841년 『파주목읍지』에 이미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그 이전부터

현재의 광탄면과 거의 같은 지역에, 같은 이름으로 불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양주군 백석면과 광적면 양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문산천으로 합류하는데

이것이 넓은 여울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한자말로 광탄(廣灘)이라 한다.

등로에 올라서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아마 이 산 전체가

여의도순복음교회 소유인 모양이다. 곳곳에 기독교 성경문구가 있고

체육시설과 돌로 만든 의자들이 있다.

곳곳에 있는 성경문구

성경문구대로 살면 얼마나 좋으랴... 최근 매스컴 보도를 보면 이 교회도

사정이 너무 복잡한 모양이다. 모든게 너무 크면 문제가 되는 모양이다.

103봉(10:30)

이곳을 좌방산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어디에도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정상에는 삼각점이 있지만 글씨를 식별할 수 없을정도이다.

정상에는 아마 순복음교회 신자인듯한 50대 여인이 의자에 앉아서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주문을 외우듯 계속 중얼거린다.

 

불교에서 “옴마니반메홈” 같은 진언인 모양인데 내 전공이 아니라 모르겠다. 

지맥 등로에서 살짝 비켜있는 103봉에 들렸다가 다시 우측으로 내려와서

내리막을 걸어간다. 좌측에는 커다란 공장지대가 보인다.

종교의 경전구절은 구구절절히 좋은 말씀인데, 실천이 문제이지.

공장지대 안부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순창박씨 가족묘와 또다른 묘지 위를 통과하니 군부대 철조망이 보이고...

군부대 철조망을 통과하는데 길이없어 애를 먹는다.

철조망을 겨우 뚫고 내려오니 우측에 임도가 나오고...

임도로 내려서니  좌측에 군부대 후문이 보이고 다시 10m

아래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철조망과 잡목이 어우려져 나홀로 가는 산꾼을 엄청 괴롭힌다.

이곳에도 밤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탓인지

밤이 지천이다. 보이는것만 주었는데 한 됫박은 될것 같다.

120봉(10:55)

군부대 철책안에 봉우리 정상이 있고  철책을 따라 좌측으로 내려선다.

표지기를 만나고 다시 잡목과 전쟁을 벌이면서 내려가니 임도가 나온다.

임도를 지나니 엄청나게 큰 공원묘지가 나타난다.

해방교회 공원묘지(11:05)

이곳 오두지맥길은 마치 군부대와 묘지만 지나는 느낌이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에다가 死居坡州를 추가해야 할 듯 싶다.

공원묘지 끝부분까지 가서 우측 임도로 올라선다.

임도에서 묘지를 지나 묘지 끝부분에 가면 晋州姜氏의 묘지가 나오고

이곳에서우측 숲속으로 접어 들었다가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진다. 

능선을 타고 내려오니 도로가 나온다. 월롱면서 파주읍으로 연결하는

78번 도로가 지나가는 곳으로 좌측으로는 ‘금강비철금속’이 나타나고

도로로 내려서니 예전에 방호벽을 헐고 한참 터널공사를 하는 중이다.

도내고개(11:35)

고개에는 예전에 탱크 방호벽이 있었곳을 철거하고 도로를 확장

하려는지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다. 이곳에서 좌측 임도로 올라선다.

 

도내리(都內里)는 조선시대 자곡면 지역으로, 도감 벼슬을 한 사람이 살았다

하여 도감골 또는 도감동이라 하였다. 그 마을 위에 있다고 해서 도내고개란다.

임도로 20여m 정도를 올라가다가 우측 숲으로 접어든다.

잠시후에 월롱에서 금촌을 잇는 No 25번 송전탑을 지나면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임도 좌측에는 군 시설물이 어지럽게 방치되어 있고

3789 부대장의 경고문 안내판이  나온다.

헬기장(11:45)

상당히 큰 헬기장이 나타나고 커다란 풍향계가 있다.

이곳에서 임산물을 채취하는 남.녀를 만나고 이곳에서 직진으로 내려간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파주

옛날에는 이 고장을 술이홀현(고구려), 봉성현(신라), 서원현(고려)이라 하다가

이조 태종 무렵에 와서는 원평도호부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으로 왕위에 오르는 바람에 수양대군의 아내가

 정희왕후가 되었고. 왕비는 이곳에 살던 파평 윤씨 윤번의 딸이었다.

그래서 이곳이 왕비의 내향(內鄕)이라고 해서 윤씨의 본관인 '파평'의 '파(坡)'에,

고을 '주(州)'로 이름하고 '파주목(坡州牧)'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파주의 인물로는 율곡 이이 황희정승, 문숙공 윤관장군, 동의보감을 만든 허준
구봉 송익필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 이곳 파주이다. 

헬기장으로 내려서니 길은 잘 보이질 않고 자리공을 비롯한

온갖 잡풀들이 태클을 건다.  나무 사이로 머리를 숙이면서 걷는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좌측으로 공장지대가 보이고 텃밭이 나온다.

이곳에 수로를 조절하는 벨브가 있고 이곳을 돌아 텃밭을 빠져 나온다.

텃밭을 빠져 나오니 수로가 지나는 포장도로가 나온다.

이곳에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는다.

점심이라봐야 김밥 2줄에 식혜하나 그리고 커피 한잔이다.

왕탱이 말벌에게 쏘인 손등이 퉁퉁 붓기 시작한다.

10분안에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도로를 건너서 산속으로 들어간다.

들어가니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보기가 힘이들 정도이다.

이 구간은 길이 아예없거나 군부대 장애물로 인하여 걷기가 참으로 힘든다.

조금을 더 올라가니 이중, 삼중으로 철조망이 처진 군부대가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서 지맥길을 이어가는데 돌쇠대장의 빛바랜

시그널이 반갑게 맞아준다. 우측으로 접어드니 두릅나무가 지천이다.

내년 봄에 이곳 두릅은 범여가 접수했어...ㅋㅋㅋ

이중, 삼중으로 된 철조망을 끼고 우측으로...

꽤나 많이 보이는 두릅나무

군부대 전망대 초소를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총검술 훈련장이 나타나고...

이어서 군부대 후문이 나타난다. 이곳 우측에는 테니스장이 보이고...

포장도로를 가로질러 군부대 철책선을 따라서 계속간다

이곳은 인적이 드문 탓인지 산부추가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군부대 철조망을 계속 따라가니 우측으로 개인소유의 땅인지

군부대 철조망과 맞물려 펜스를 처져 있는 바람에 길이 끊겨있다.

이~ 바부야. 그런다고 내가 돌아가냐. 이런 펜스 넘는건 누워서 떡먹기야.

펜스를 넘어 돌아 나오니 공장지대가 나온다.

공장지대 도로옆에 평상이 하나 있어서 이곳에서 베낭을 베고

누워서 10분정도 휴식을 취한후에 물한모금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난다.

펜스에 막혀있는 오두지맥길.

공장 삼거리(12:35)

이곳에서 좌측 도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도로를 따라서 쭈~욱 올라가는데 우측에는 이화문구산업이 있다.

공장안에 개쉬끼가 내가 이상해 보이는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조금 더 올라오니 좌측으로 3056부대 정문에 면회객 주차장이 있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간다.

꽤나 큰 승일콘크리트 블럭 공장이 있고 이곳에 우측으로...

눈물나게 고마운 시그널... 친절한 금자씨 같다.

위전3리 표시석이 나온다.

 

위전리(葦田里) 조선시대 자곡면 지역으로 다락고개 밑이 되므로

 다락고개·달앗·누현·위전이라 하였다.

위전은 옛날에 마을 주변에 갈대가 무성하고 배가 왕래하였는데

그 후에 갈대를 베고 마을을 이루어 붙인 이름이다.

옛날 에는 지금의 영도국민학교 앞까지 배가 올라왔었다고 한다.

표시석 앞에 있는 신성레미콘 공장 가운데를 질러서 간다.

도로를 넘어서니 각종 폐기물이 방치되어 있고 넓은 공터에

개망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있는 고구마밭을 지나니...

1번국도 / 경의선 철도(12:45)

고구마밭을 지나니 목포에 파주를 잇는 1번 국도가 나온다.

다시 우측으로 철계단을 따라 철로로 내려선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별로없다... 하긴 나처럼 맛이 약간 간 사람이나

이런길을 다니지 누가 댕기겼어...

경의선 철로를 건너서 다시 반대편의 철계단으로 올라선다.

철계단으로 올라서서 텃밭이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걸어간다.

텃밭을 지나고 조그만 숲을 지나니 깔끔한 공장 마당이 나온다.

VTC 공장 마당(13:00)

공장 마당에서 우측 도로를 따라 150m 정도 올라가다가

도로 끝나는 지점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민가가기 직전에

텃밭으로 올라 텃밭을 지나 통과하여 좌측으로 꺽어진다.

다시 도로로 내려오니 좌측으로 (주) 창덕공영이 있고 우측으로 방호벽이 있다.

다락고개(13:10)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에서 금촌읍으로 연결되는 368번 지방도가 지난다.

이곳도 전방지역이라 그런지 도로에 어김없이 대전차 방호벽이 있다.

 

파주市誌에 따르면 월롱은 ‘높은 곳’ 을 뜻하는 우리말 ‘다락‘ 을 한자로 쓴 것이다.

月[월]은 우리말 ’다‘ 나 ’달‘ 을 한자로 쓴 것이고, 籠[롱]은 ’락‘ 이 ’랑‘ 이나 ’롱‘ 으로 변한 것이다.

 실제로 월롱산은 ‘다랑산’ 이라고도 불린다. 월롱산 주변에는 ‘다락고개’, ‘달앗’ 과 같은 지명이 아직도 남아있다.

  통일로를 따라 문산 방면으로 달리면 경의선 월롱역 근처에서 만날 수 있는 고개가 바로 다락고개이다.

다락고개에서 직진하여 도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월계단,청사문화의요람 안내판" 삼거리(13:20)

청주사씨의 "월계단청사문화의요람 안내판"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파주 예비군 훈련장쪽으로 한참을 걸어간다.

淸州史氏 "월계단청사문화의요람 안내판"

예비군 부대쪽 도로를 따라 계속 가는데 또다시 방호벽을 만난다.

조금을 더 가니 도로공사를 하느라고 지맥길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올라서 가니 다시 길이 끊겨 버렸다.

길을 건너 절개지로 올라서니 길은 없어지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길이다

공장 뒤로 돌아가는 걸 포기하고 다시 내려와서 도로를 따라서 공장지대를

지나서 계속 올라가니 파주 예비군대대 정문이 나타난다.

파주 예비군대대 정문(13:35)

부대 정문에서 좌측으로 올라선다.

이곳 지맥길에는 가건물 2채가 점령하고 있어서 좌측으로 우회를 한다.

No29/No80 송전탑이 나타나고...

118.8봉( 13:50)

정상에는 삼각점(△문산452) 이 있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니 서바이벌 사격장이 나타난다.

지나온 송전탑의 모습

서바이벌 사격장을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사격장 끝나는 지점에 에비군들의 오줌통이 나타나고...

사격장을 벗어나니 길은 참으로 좋다.

조금을 내려가니 Y자형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간다.

국유림대부지 간판과 멋진 묘지를 지나고...

갈림길 안부 사거리

 "현위치 1-3 약수터계단" 이정표(↖용상사0.11km, ←덕은리1.3km, →정상1.7km, ↘약수터0.08km)

서서히 고도를 높이면서 올라가니 돌탑이 보이고...

월롱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내가 지나온 구간을 되돌아 본다.

저 멀리 도봉산, 북한산이 아련히 보이고 조그만 발로

참으로 많이도 걸어왔다. 그러나 아직도 갈길이 멀으니...

등로 좌측으로는 월롱산 아래에 있는 용상사가 보인다.

시간이 있으면 꼭 들려보고 싶은 절이건만... 아쉽기만 하다.

 

용상사(龍床寺)는 월롱산 남쪽 사면 중턱에 위치한다. 고려 성종 12년(993), 현종 1년(1010)에 이어

현종 9년 (1018)에 소배압이 거느린 40만의 거란군이 개성까지 쳐들어오게 되자 현종은 민간인

차림으로 이곳 월롱산까지 피신하게 되었다. 다행히 강감찬이 귀주(龜州)에서 승리하면서 나라 안이

평정되자 현종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절을 짓게 하고는 임금이 머물렀다는 뜻으로 용상사(龍床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덕은화주(德隱化主)가 세종 27년(1445)에 중건하였으며 이때 소불석상(小佛石像)을 인근 벽장굴에 조성해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때 승병의 도량이 되었는데 왜군의 시체가 근처 골짜기에 가득하여 한때는 “무덤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으나,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절 이름이 보이고 있고, 1779년에 편찬된 『범우고』에 보면 '절이 지금은 없어졌다'라는 말이 있어 임진왜란

이후 어느 때인가 폐사된 것으로 생각된다. 근대에는 1926년에 정염스님이 폐허가 된 절터에 사찰을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현재의 용상사는 옛 터에서 약간 아래쪽에 터를 닦아 해방 전에 중건되었고,

벽장굴에 있던 석불을 대웅전에 모시게 되었다. 1967년에 대웅전을 다시 개축하면서 서쪽에 삼성각(三聖閣)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소속은 대한불교 일승종(日乘宗)이다. 정통십년명석불좌상(正統十年銘石佛坐像)은

 높이 61cm에 폭이 50cm 정도인 소형불좌상이다. 석불의 전면에는 회칠이 되어 있어 세부적인 특징을 자세히

 관찰하기는 어려우나 목이 짧고 직사각형의 모난 얼굴에 육계가 두툼하다.

바닥에는 “正統十年 乙丑五月○○德隱”이라 새겨져 있어 덕은에 의해 용상사가 중창될 때에 같이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 조성연대는 1445년으로 조선 초기의 불상양식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돌탑봉우리

 "현위치 1-4 바위길" 이정표(←정상1.2km,  ↘약수터0.5km, ↘동문0.8km)

파주시 금촌과 교하의 모습

 

지금의 금촌읍은 백제 근초고왕(346~375)시기에는 백제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었으 며,

이 일대는 천정구(泉井口)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그 후 5세기 고구려에 귀속되었고,

군현 제가 도입됨에 따라 천정구현이 되었다. 이후 557년(진흥왕 18)에 신라의 북한산주(北漢山州)에

속하게 되었고, 삼국통일 후에는 한산주에 속하게 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지방제도가 정비되면 서 교하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시대 당시 교하군은 처음에 양주, 1063년(문종 17)에는 개성부, 그리고 1390년(공양왕 2)에는

양광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394년(태조 3) 교 하현으로 강등되어 한양과 원평군으로

그 소속이 변하다가, 1687년(숙종 13)에는 죄인의 출생 지라는 이유로 혁파되기도 하였으나,

1691년 다시 교하현으로 복구되었다. 1731년(영조7) 교 하 읍치(邑治)가 인조의 능인 장릉의

이전지로 결정되면서 다시 교하군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부군제가 실시되면서

이 지역은 일시 파주에 속했다가 교하군으 로 복귀하였다.

 

현 금촌읍 지역은 1899년(광무 3) 당시 교하군 아동면. 현내면 일대였는데,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시 교하군 아동면의 신금촌. 야동리, 아동리, 금릉리와 현내면의 맥 금리. 검산리 지역.

지석면의 하지석리의 일부지역, 청암면의 갈현리 일부지역, 파주군 자곡면의 용은 동 일부 지역이

병합되어 아동면이라 하였다. 한국전쟁 와중인 1.4후퇴 당시에 군청이 문산리 에서 아동면 금촌리로

옮겨오면서 군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Y갈림길 안부 쉼터

 "현위치 1-7 정상부근쉼터" 이정표(←용상사0.4km,  ↗정상0.7km, ↗LG기숙사1.0km)

에서 우측으로 올라서니 넓은 헬기장이 나타난다.

헬기장 공터 / 산불감시초소(14:20)

넓은 공터가 나오고 정상에는 헬기장과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이곳은 원래 월롱산성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정상 넓은 공터에는 등산객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월롱산성지(月龍山城址)

경기도 기념물 제119호인 월롱산성지는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와 월롱면 덕은리,

그리고 금촌 야동동에 걸쳐 우뚝 솟아 있는 해발 246미터의 월롱산은

예로부터 신산으로 알려져 있다. 월롱산 내령은 크게 두 개의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월롱면 덕은리와 야동동 쪽을 ‘파주 월롱산’이라 하고

 탄현면 금승리 쪽을 ‘교하 월롱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강과 임진강 하구를 통제하였던 백제의 主城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북쪽으로 임진강과 내륙지역 서쪽으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요충지로 서쪽 성의 외벽은 수직으로 절벽을 이루고

성의 내부는 평지성처럼 매우넓어 천연요새다. 산성의 형태는정상부의

내성과 동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가위모양으로 둘러져있다. 

월롱산 서쪽에 월롱산과 해발높이가 비슷한 기간봉이 있으며 이곳에는 측량에 이용된

 기가 꽂혀 있어 깃대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월롱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파주 일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어 월롱산은 천연 요새와 같은 곳이다. 그 동안 문헌적으로 월롱산성이

 존재하고 있음은 보고되었으나 구체적인 산성의 규모와 실체에 대한 조사가 없었다.

 

그러나 경기도박물관의 정밀 학술조사에서 월롱산성이 임진강과 한강 하구지역을 통제하던

초기 백제의 주성 역할을 담당했던 성으로 밝혀졌다. 월롱산성은 동서남북이 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의 외벽은 거의 20미터 이상이 절벽인 자연지형을 이용하였고, 현재 내벽의 대부분은 정연한

 석축형태를 보이지 않고 일부 석재만이 노출되어 있다. 문지는 동문지, 서남문지, 서북문지, 북문지가

 확인되며 동문지와 북문지를 제외한 서남문지와 서북문지는 자연암반을 계단 모양으로 깎아

내면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산 정상에는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고 등산객들이 수시로

월롱산을 찾고 있어 주민들의 체육 및 휴식 공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월롱산성지 표지판에서 길건너 능선을 따라 월롱산으로 향한다.

월롱산은 지맥길에서 10분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지만 아무리

갈길이 멀어도 이 산을 거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간다.

월롱산(月龍山:218.5m:14:27)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 야동동과 월롱면 덕은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고령산 북맥벌판 가운데로 솟은 산정에 배가 떠나는 모양의 형국이 있는데

마치 반달과 모습이 흡사하여 월롱산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옛날 청전구현(교하현)청사가

있어 선성이라 불리기도 한다.산 입구에는 용주서원이 있으며 용상사라는 사찰이 있다.

 전체적인 산세는 육산이지만 능선 곳곳에는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멋진 전망대가

여럿 있고, 특히나 정상부는 육산에서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바위절벽이 있어 마치

해안가의 절벽을 연상케 한다. 정상부의 바위를 오르면 멋진 전망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월롱산 정상에서 오늘 처음 인증샷을 남기고... 역광이라 사진이 영 그렇다.

월롱산 서편쪽의 모습 - 마치 해안가 절벽을 연상케한다.

저멀리 임진강과 북녁땅이 아련히 보인다.

월롱산 정상 아래에는 엄청나게 넓은 공터가 있고 가족단위의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 막걸리 파티가 한창 진행중이다.

올때는 임도로 재빨리 월롱산성지 표지판까지 와서 내리막길

임도를 따라서 계속해서 S자 행태의 포장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월롱산 정상까지 차를 몰고가는 몰염치한 인간도 보인다.

산에는 왜 오는겨... 그냥 도로나 다니시징.

헬기장(14:38)

포장도로 가운데 관리가 잘되어 있는 헬기장에는 자동차들이 많다.

이곳에서 포장도로를 버리고 황토길 비포장도로로 향한다.

조금을 더 진행하면 Y자형 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급격히

꺽어져 내려오면 우측에 하이마트 물류센터와 공장들이 보인다.

숲에서 내려와 도로로 내려오니 우측에 하이마트 북부물류센터가 보이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방호벽을 지나서 우측으로 임도로 올라선다.

금탄고개(14:45)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 야동동에서 탄현면 축현리를 잇는 고개로

2차선 5번 군도가 지나고 있는 곳으로 대전차 방호벽이 설치되어 있다.

임도로 올라서니 묘지 가는길에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묘지에서 바라본 월롱산의 모습

묘지를 계속 올라간다. 맨 위에는 최근에 조성한 듯한 昌寧曺氏의 묘지를

지나서 올라가니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니 군부대 도로가 나온다.

임도에 들어서면 철조망 앞에 ‘Green Zone 월롱기지’라는 입간판이 나온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면 기간산을 군부대가 점령을 하고 있고

우측 내리막길을 내려서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군부대 초소가 나오고

젊은 초병이 이곳은 현재 작전지역이라 위험하니 돌아가라고 한다.

지맥길을 가는 중이니 너무 신경쓰지 마시게 하니까.

무슨 말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초소쪽으로 되돌아 간다.

철조망을 타고 가다가 내려서니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청미래(망개열매)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숲에서 나무들과의 전쟁을 치른다. 온 몸이 할키면서 상처가 나고...

교통호를 따라 진행을 하니 커다란 벙커가 나타나고 아래로 내려서니

묘지 1기가 나오고 좌측으로 도니 차량소리가 들리면서 다시 도로가 나온다.

21번 군도(15:25)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검산동과 탄현면 축현리를 연결하는

21번 군도가 지나가고 이곳도 대전차 방호벽이 있다.

고개 아래에 있는 검산동은 조선 초에 신숙주()가 아버지 묘터를 찾기

 위해 마을 뒷산에 있는 월롱산 남맥() 일대를 샅샅이 뒤진 끝에 마침내

찾아냈다 하여, 묏자리를 검색한 곳이라는 뜻에서 검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오늘은 바람한 점 없어 생각보다 날씨가 무덥다.

식수가 떨어져서 이곳에 있는 동해물산에 들려서 양해를

구하고 식수를 한 통 보충한 다음에 길을 서두른다. 마음이 급하다.

21번 군도에서 산으로 올라서니 묘지가 나오고

좌측으로는 엄청나게 큰 파주물류센터가 보인다.

숲으로 접어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이제부터 스틱을 접고

산악 마라톤 하듯이 뛰기 시작한다. 일몰전에 오두산까지 갈런지...

좌측에 있는 파주 물류센터의 모습

뒤돌아보니 기간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공장지대 위에 있는 묘지를 지나니 안부가 나오고 다시 편한 길을 올라가니...

이곳은 아마 오래전에 산불이 난 흔적이 보이고 소나무 대신에

잡목만 무성하다. 걷기가 불편하다. 갈길은 먼데 해는 기울고...

철조망을 지나서 우측으로 가니 길은 괜찮은 편이다.

조금을 더 지나가니 밤나무에 밤이 꽤 많이 떨어져 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잠깐사이에 꽤 수입이 짭잘하다.

군부대 시설물인 블럭 건물을 지나서 오르막을 오른다.

1차선의 조그만 농로가 나타나고 길을 가로질러 산으로 오른다.

아카시아 나무가 즐비한 곳을 지난다.

다시 편안한 소나무 숲 임도로 달리기를 한다.

또다시 농로가 나타나고 다시 산으로 오른다.

잘 관리된 묘지를 지나 직진을 한다. 조금을 더 지나니 소나무 숲이

계속되고 교통호를 지나 좌측으로 내려서니"신현교회동산" 표지석이

나오면서 도로로 내려선다. 우측으로는 새로 지은듯한 건물들이 보인다.

바구니 고개(16:00)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맥금동에서 탄현면 금산리로

연결하는 310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바로 아래에 법흥3리 버스 정류장이  있다.

도로를 건너서 숲으로 올라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시그널을 확인하고 계속해서 달리기 하듯이 뛰지만 생각보다 걸음이 느리다.

공장 절개지를 지나니 공원묘지 도로가 나온다.

도로를 따라서 걸어가니 기독교 공원묘지가 나온다.

기독교 공원묘지(16:10)

공원묘지를 가로 질러 주차장이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오르막을 올라가는데  저 꼭대기 위에 산불감시초소가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지고...

주차장에서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뒤돌아본 기독교 공원묘지의 모습

131봉(16:18)

기독교 공원묘지 정상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산물감시초소와

군사용으로 만든 철제 종이 있다. 이곳에서 내리막길을 내려

교통호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선다.

131봉에서 바라본 임진강

우리나라 중심부를 동서로 흐르고 있는 임진강은 강원도 안변을 원류로 영풍을 거쳐

이천(伊川), 안협(安峽), 마전(麻田), 삭영(朔寧), 연천(連川)에 이르러

포천(抱川)과 합류 대탄(大灘)을 이룬다.

 

고구려 때 당시 표로하로 호칭되었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조 개국당시 공양왕이

 송도에서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시고 몰래 빠져나와 고랑포에서 돛배를 타고 상류로

도망을 가다 구미연(龜尾淵)에 이르러 배가 파산하여 신주와 배는 강물에 가라앉았고

 왕은 구사일생 강 언덕으로 기어 나왔다. 후에 왕은 원주 지방으로 도망을 가다 결국 간성에서 피살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곳에서 신주를 빠뜨렸다 하여 신지강(神智江) 또는 구미연(龜尾淵),

 구연(仇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율곡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임진강 나루에 있는 화석정에 틈이 날 때마다

들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 마루랑 기둥을 닦도록 하였다. 그리고 임종 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고 하며 봉투를 남겼다.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 4월 그믐밤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 폭풍우가 너무 심해 한치 앞을 볼 수 없었다. 이 때 호종하던 이항복이

율곡이 남긴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다. 화석정에 불이 붙자

 관솔이 타듯 불길이 올라 나루 근처가 대낮 같이 밝아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1593년 환도하면서 이 강에 당도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순국한 병사들의 넋을 달래고자

 나루터 강변 모래사장에 제물을 차려 놓고 위령제를 지내게 된다. 의주파천 당시 4월 그믐밤

 폭풍우 속 노심초사 고생 끝에 이 나루를 건너게 된 쓰라린 아픔과 이강을 지키고자 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용감한 충신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가운데 선조가 통곡하며

“하늘의 도움을 받아 이 나루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구나 하였다”하여 신지강(神智江)이

임진강(臨津江)으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군사용 교통호를 따라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나무숲 사이로 엄청나게 큰 동화경모추모공원이 나타난다. 

숲을 빠져 나오니 동화경모공원 묘지가 나오고 포장도로로 내려간다.

도로로 내려와서 우측 관리동 석물공장을  바라보면서 다시

우측으로 올라서니 돼지풀같은 잡풀이 엉키어 걷기가 불편하다.

잡풀을 헤치고 능선으로 올라서니 능선에 교통호가 나온다.

교통호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가니 벙커가 나온다.

동화경모공원묘지 전망대(16:35)

벙커를 지나니 동화경모공원이 나오고 보도블럭길을 지나니 팔각정이 나온다.

동화경모공원의 모습

이 공원 묘지는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 있으며 실향민들이

통일을 갈망하는 이북 5도민들이 생전에 이루지 못한 망향의 한을

위로하고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긴 후 이북 도민들의 인고와 반공으로

대한민국 발전에 이바지한 그 발자취 등을 자랑스러운 정신적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길이 남길 수 있도록 경모숭조의 참다운

추모기념의 장인 실향민들의 영원한 안식처이다 (동화경모공원 홈페이지 인용)

팔각정에서 우측으로 가서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굽어지는 도로에서 직진으로 내려가니

계단이 나오고 펜스로 막혀있다. 이곳을 월담하여 도로로 내려선다.

각시고개(16:40)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서 금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왕복 4차선

도로가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동화경모공원이 있는 법흥리(法興里)는 조선시대 교하군 현내면 지역으로,

 큰 절이 있어 법회를 자주 열고 불법을 흥왕하게 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황희의 예장 때 문종이 문(文)·덕(德)·지(智)를 넓히도록 교시한 것에 따라

우선 법을 준수하는 데 앞장서자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각시고개 도로 건널목을 건너 우측 골목으로  접어드니

대광물류센터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보현산(普賢山:135m:16:45)

파주시 탄현면 금산리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쇠말뚝 2개가 있고

선답자들의 시그널만 있을 뿐, 그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

 

보현산은 1978년 무장공비 침투로 인해 1,998 발의 지뢰가 묻혀있는 무시무시한 산이었다.

산 주변으론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산이 지뢰산이라니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참 편치 못했을 거 같았다.

 

그 지뢰를 2007년 5월부터 6개월 간에 걸쳐 군부대가 나서 지뢰를 거의 모두

제거하고, 그 해 11월 부터 산책로를 확보해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하지만 아직도

지뢰가 남아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좀 으시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보현산 영지 108고지에 자리한 보현사는 그 창립기원을 명확히 고증할 문헌이 없어

밝히기 어렵고 다만 발굴되어지는 기와만이 말할 수 있으리라! 옛 사찰은 찾을 길 없고

 60여년전 법흥리 대왕산에 계시던 본존을 모셔와 소규모의 사원을 재건하고 세존의 기도 도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6.25 사변으로 다시 불운을 맞아야 했다. 본존은 신라시대 검단선사의 작품으로 전해지며

여러 문헌에서 고증되고 있다. 1,300여년 전에 제작된 본 본존은 우리나라 국보이다."

보현산에서 90도 꺽어져 좌측 아래로 내려간다.

지금부터 길은 상당히 좋고 중간중간에 지뢰 경고문이 보인다.

서울 근교 산행이라 베낭을 가볍게 한 탓에 달리기 하듯

빨리빨리 산을 내려간다. 해가 기우니 마음이 급해진다.

곳곳에 경고문이 자주 눈에 띈다.

좌측으로는 동화경모공원과 공장들이 보인다.

편안한 길을 달리다시피 내려오니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조금 더 내려오니 승공사격장 간판이 있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간다.

좌측으로 내려오니 일송정이란 갈비집이 나오고

이 식당 마당을 가로 질러서 임도로 나선다.

이곳에는 이런 포사격 발사대가 여러곳에 보이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다가 다시 우측으로 가니 정자가 나온다.

임도끝에 도착하니 묘지가 나오고 묘지 아래로 내려선다.

묘지 아래로 내려오니 길은 없고 선답자들의 시그널만 보인다.

식당 건물을 빠져 나오니 도로가 나오고 탄현지방산업단지 입간판이 나온다.

이 입간판을 따라서 우측으로 가도 되지만 직진하여 주유소쪽으로 가도된다.

GS주유소를 지나서 미경카센터가 나오고 그 뒤를 돌아서

들깨가 심어진 텃밭을 따라 급한 오름길을 올라서 간다.

들깨밭을 지나서 깍아지는 듯한 절개지에 오르니 우측에 탄현공단이 나오고

서서히 일몰이 임진강 너머로 몰려온다. 저 강건너 북한지역도 한 눈에 들어온다.

우측에 탄현지방공단이 보이고...

절개지로 올라서는 길은 이렇게 나무가 빽빽하여 걷기가 힘든다.

99봉(17:15)

삼각점(8-9305)이 있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급한 내리막을 내려서 진행을

하는데 이곳에서 훈련 표시용인지 등로 곳곳에 하얀가루가 많이 뿌려져 있다.

저 멀리 임진강이 보이고 우측에 가야할 통일전망대가 보인다.

해는 서산으로 지려는데 자꾸만 마음이 급해진다.

저 건너 산아래에는 파주영어마을이 보인다.

99봉에서 급하게 내려온다 토질이 마사토라서 그런지 상당히 미끄럽다.

이곳도 개발이란 미명아래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마구 벌채를 하는 중이다.

조금 내려오니 건물이 나오고 임대중이라는 표지를 붙혀놨다.

건너편에는 임진강 장어집이 있고 내리막길을 내려가서 우측으로

돌아가니 아울렛점들이 즐비하고 성동사거리가 나온다.

배가 너무 고파서 구멍가게에 들려서 우유와 빵하나를 먹고

10분간의 휴식을 취한다.

성동리(城洞里) 사거리(17:35)
법흥리에서 성동I.C가 있는 자유로로 통하는 19번 국도와 368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성동리는 조선시대 교하군 신오리면 지역으로 오두산성 밑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성동리와 법흥리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성동리라 하였다.

 이 지역은 앞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삼도품과 김포·강화·개풍 땅을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역이다.

잣골·작골이라고도 한다.

열구니 고개(17:40)

성동사거리에서 자유로로 향하는 언덕이 열구니고개란다.

이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파평 윤씨의 묘지를 지나고...

절개지 우측으로는 무인 모텔과 음식점이 있고 다시 건너 절개지로 오른다.

무인호텔 맞은편에도 건물이 들어서려는지 산 전체를 완전히 깔아 뭉개졌다.

절개지를 우회하여 조심스럽게 올라가지만 자꾸만 미끄러진다. 겨우 올라서

숲속으로 들어가는데 이젠 컴컴해져 하는 수 없이 헤드렌턴을 켜고 간다.

절개지에서 바라본 성동리와 임진강 너머 북한땅의 모습

성동리의 마을에도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숲을 빠르게 진행하니 다시 조그만 도로가 나온다

법흥리에서 성동리를 넘어가는 조그만 포장도로인데

이곳 삼거리에서 ‘뜰 茶’라는 이정목 삼거리에서 좌측

숲으로 접어든다

길이 잘 나있는 숲을 달리다시피 내려가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군사용 도로가 Y자형으로 되어있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올라서서

폐타이어로 만든 교통호를 따라서 올라간다.

다시 우측으로 꺽어지니 커다란 콘크리트 구조물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는데 자꾸만 어둠이 짙어져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

교통호를 지나 올라가니 철조망이 처져있고 구멍난 철망사이로 정상에 오른다.

117봉(18:10) 

 정상에는 폐타이어로 만든 벙커봉이 있고 군초소 가 있는데

지금은 사용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서둘러 길을 내려간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임진강 너머 북한땅의 모습

117봉에서 좌측으로 내려서서 가니 ├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측으로 꺽어져 우측 사면길을 돌아 내려서니

통일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이 어둠속에 희미하게 보인다.

오두산성 검문소에서 바라본 어둠속의 오두산(통일전망대) (18:25)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니 검문소가 나오고 젊은 초병 2병이 총을 겨누며

정지 명령을 한다. 가까이 가서 자세한 설명을 하니까. 이곳은 최전방 지역이라

일몰후에는 아무 출입을 하지 못하는 곳이라고 하여 종착지를 300m 앞에두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좌측으로 돌아 내려와야만 했다.

 

오두산전망대는 해발118m에 위치한 고지로,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가

 주도권 장악을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던 관미성지터로 군사적 요충지 이기도하다.

 지금은 서부전선의 최북단으로 남 과 북이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3.2km의 짧은 거리를 새들만이 넘나드는, 남북분단의 안타까운 현장으로 가슴시린 실향민이 많이찾는다.

 

이곳 오두산성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북방전초기지였던 관미성(關彌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오두산성(烏頭山城)은 탄현면 서울에서 문산 방향으로 자유로(自由路)를 달리다 왼쪽으로 보이는

 오두산의 정상부분과 산사면에 띠를 두르듯이(테뫼식) 축성된 석성(石城)이다.

오두산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길목에 위치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는데 주변으로 높은 산이 없어 서쪽으로는 북한 지역이,

남쪽으로는 김포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은 현재 정상에 통일전망대(統一展望臺)가 들어서 있는 그 규모와 원형이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었고 한강과 인접해 있는 가파른 북쪽절벽위에 약 10여m의 성벽이 잔존하고 있다.

산 정상부근에는 여기저기에 성벽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오두산성은 한국전쟁 이후 거의 유실되고 파손되었으나

1990년 9월부터 1991년 11월 사이의 발굴조사 결과 일부 보존이 잘되 남아있는 구간에서

어느 정도의 규모가 확인되었다. 확인되어지는 유물은 삼국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토기(土器), 백자(白磁), 기와(器瓦), 철촉(鐵鏃) 등으로 발굴되어진 성과를 토대로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일부구간을 보존 · 정비하여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오두산성은 문헌 및 고고학적으로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일 가능성이 제기되어 주목받았는데

 백제의 북방전초기지였던 관미성은 병신전쟁(丙申戰爭 ? 396)에서 고구려 광개토왕의 수군이

 백제의 아신왕(阿辛王)을 치고 수도 위례성(慰醴城)을 함락시키기까지 고구려의

남하경로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좌측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택시를 부른다. 그런데 이곳은 철조망을 이중으로

되어있어 어둠속에 빠져 나올 길이 없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고가밑에 개구멍이

하나 있어서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헤이리  예술촌 앞에서 이 지역에 사는 형한테

전화를 하여 형님 차를 타고 용암사 주차장에 와서 愛馬를 타고 집으로 온다.

산행시작 10시간 50분간의 긴 산행끝에 어렵게 지맥 한구간을 마친다.

오늘 수확한 밤과 산초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