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유래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역사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삼국유사’의 705년 기사”이기에 “대체로 7세기 훨씬 이전에 고구려에서 먼저 지어 불렀다고 인정된다” “당시 사람들은 거의 온 한 해 동안 산이 흰 눈 속에 덮여있다고 하여 이 산의 새와 짐승, 나무와 풀도 희다고까지 표현하였다”면서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있다는 뜻의 백두산이라는 이름도 백산과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이름이며 “백두산의 다른 이름인 장백산이라는 이름은 백두산이라는 이름보다 얼마간 후에 생겨났다” 백두산이라는 산이름이 705년의 기록에 나타난 이후에도 후기신라 때는 널리 쓰이지 않았다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널리 보급된 것은 고려시기였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고구려 때에 생긴 백두산이라는 이름에 대하여서도 친연감이 짙었던 사정과 관련되어있다 고려사’의 세계(왕조의 가계)에서 김관(12세기 중엽의 관리)이 쓴 ‘편년통록’의 기록에는 백두산이름이 세 번 보”이며 “이후 ‘고려사’ 기록에만도 백두산의 이름은 세 곳이나 보인다 이처럼 백두산이라는 이름은 고구려시기에 생겨나 고려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이 숭엄한 감정으로 부르는 산이름으로 되었다 조계산 의 유래 조계산은 전남 순천시 송광/주암면과 승주읍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선암사(仙巖寺)와 승보사찰인 송광사(松廣寺)가 있어 더욱 빛을 발하는 호남의 명산이다. 태고총림(太古叢林)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인 서기 529년에 아도화상(阿度和尙)에 이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승보사찰 송광사는 창건 연대를 정확이 알 수는 없으나 신라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창건당시에는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로 불리었다고 한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가리왕산의 유래 강원도 정선군과 평창군에 걸쳐 위치한 가리왕산은 고산의 준봉답게 그 스케일이 장대하다. 첩첩산중이란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일 정도로 이 일대는 산들이 밀집해 있다. 가리왕산에는 갈왕의 전설이 서린 지명이 많다. 망경대는 갈왕이 이 대에 올라 잃어버린 옛 땅을 바라보며 환국의 날을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시녀암은 갈왕의 시녀들이 이 바위에 올라 서서 고국쪽을 바라보며 부모형제를 그리워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밖에도 갈왕이 난을 피해 숨었던 서심 등이 있다. 가리왕산이란 이름 역시 갈왕과의 인연으로 해서 붙여진 것이다. 역사적 진위여부에 관계없이 갈왕의 전설은 가리왕산을 더욱 그윽하게 하고 있다. 가야산의 유래 가야산의 이름에 대한 유래는 정확치 않다. 해인사가 들어서며 불교의 성지로 추앙 받아 왔기 때문에 석가모니가 성도한 부다가야(인도 가야시 근처)의 가야를 불교와 관계 있는 절 가(伽), 나라이름 야(倻)로 음차해서 '가야'로 하지 않았나 하는 않았나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가야산의 머리가 소머리처럼 생겨서 우두산(牛頭山)이라고도 하는데 소(牛)를 범어로 가야(kata)라고 한다니 '가야'는 이래저래 인도의 범어 내지 불교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다음은 가야산 지역이 옛날 가야국이 있었던 곳이고 이 산이 가야국에서 가장 높고 휼륭한 산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야의 산, 가야산이라 불려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두가지 유래 중 어떤 것이 먼저라고 말하기 곤란하나 해인사 일주문의 현판에는 伽倻山의 '倻'자가 우리나라에만 쓰는 한자로 가야국 즉 나라이름에 쓰고 있는 점이다. 이 야(倻)자를 산이름에 쓰고 있는 것은 이 산이 가야나라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풀이하는데 옳다. 검단산의 유래 경기도 하남시에 위치한 검단산이란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남한산에서 도를 닦던 검단도사가 있었다. 하루는 소년을 만났는데 그 소년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고픈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소년과 만나면서 그 효성에 감동을 받은 검단선사는 소년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검단선사는 깜박 소년과의 약속을 잊었고, 그 사이 소년의 어머니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검단선사는 자신의 경솔을 자책하며 이 산에 은거하게 되었다. 산에서 지내며 검단선사는 수도에 전념해 도를 깨치게 되었다. 그후 검단선사가 있었던 산이라 하여 검단산이라 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설을 가진 때문인지 검단산은 영산의 하나로 추앙받고 있는데 지금도 산악인들이 주축이되 연초마다 이 곳에서 시산제, 산신제를 올리려는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계명산의 유래 충주시에 위치한 계명산은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백제 때의 일이다. 이 산에는 옛날부터 지네가 많았다. 너무 많은 지네로 인해 피해가 자주 발생하였다. 그 수가 점점 늘자 이를 걱정하던 촌로 한사람이 산신령에게 치성을 드렸다. 며칠 후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지네는 닭과 상극이니 닭을 길러보라고 권했다. 촌로는 꿈속에 노인이 일러준대로 닭을 풀어 산에 기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촌로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했던 마을사람들도 얼마 후부터 산에 닭들을 내놓고 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니 과연 이 산에 지네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산에 풀어놓은 닭의 수가 너무 많아졌다. 닭들이 아무것이나 파헤치는 바람에 이곳 부자들이 자꾸 망하게 됐다. 당시 이 산 곳곳에서 닭이 울었기 때문에 계명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관악산의 유래 관악산 정상 부근에 연주대라고 부르는 깍아지른 절벽이 있다. 마치 일부러 만든 것처럼 절묘하게 서있는 연두대에서 북쪽을 보면 서울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에 연주대라는 이름이 붙은 사연은 다음과 같다. 고려가 망하자 고려의 유신 열사람이 이 관악산 절에 숨어살았다. 그들은 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연주대에 올라 송도를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한다. 그래서 임금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연주대가 되었다고 한다. 연주대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노라면 옛 충신의 애통함이 느껴져 마음이 숙연해진다. 또 다른 설이 전해온다. 이성계가 여기에 연주암을 중창했는데 효령대군이 그 아래쪽 지금의 연주암 자리로 위치를 옮겼다. 태종의 첫째와 둘째인 양녕, 효령대군은 아버지가 왕위를 셋째 충녕대군에게 물려줄 뜻을 비치자 대궐을 빠져나와 관악산에서 입산수도 하였다. 그들은 연주대에 올라 한양의 왕궁을 바라보며 아버지 태종을 그리며 지냈다고 전한다. 전망이 뛰어나고 보기드문 절경을 이루고 있어서인지 이래저래 사연 많은 연주대라 할 수 있다. 금산의 유래 금산은 기암괴봉과 깍아지른 암벽, 암릉 등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 산의 본래 이름은 보광산이었다. 옛날 이성계가 왕이 되고자 보리암 아래 있는 '이태조기단'에서 백일기도를 드릴 때였다. 그는 자신이 왕이 되면 이 산을 비단으로 덮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나 조선을 개국한 뒤 이성계는 약속을 지킬 일을 생각하니 난감했다. 이때 사려 깊은 신하가 산 이름을 하사하면 비단보다 오래 갈 것이라고 제안했다. 결국 비단 대신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이란 이름을 내려줌으로써 이성계는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후 이 산은 금산으로 불려지고 있다. 금수산의 유래 금수산은 충북 단양에 위치한 산으로 절경을 자랑한다. 조선 중엽 퇴계 이황은 단양고을의 군수로 재임했다. 그가 단양에 머무는 동안 단양의 절경들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단양에는 이황의 자취가 서려있는 장소가 많다. 단양팔경 중 하나인 옥순봉은 퇴계선생이 석벽에 『단구동문』 이라는 글을 암각하여 단양의 관문이 되었다고 한다. 금수산의 본래 이름은 백악산이었다. 그러나 금수산에 오른 이황이 이 산의 빼어난 경치에 감탄하였고, 산이름도 금수산으로 고쳐부르게 했는데 이는 '비단에 수를 놓았다'는 뜻이다. 금오산의 유래 경북 구미시와 김천시, 칠곡군에 걸쳐있는 금오산은 숱한 역사의 흔적과 불교유적을 간직한 산이다. 금오산(金烏山)이라는 이름은 어느날 이곳을 지나던 아도(阿道)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名山)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고 고려때에는 남숭산(南嵩山)이라 했다. 그 유래는 중국의 황하강 유역 하남성(河南省)에 숭산(嵩山)이라는 중국의 오악(五嶽) 중의 하나로 유명한 산이 있는데 그와 생김새가 비슷하여 숭산이라 이름지었는데 남쪽에 있다해서 남숭산이라 했고 황해도 해주에 북숭산을 두어 남북으로 대칭(對稱)케 하였다. 고려시대 문종( 文宗)은 왕자를 출가시켜 이 산에서 수도(修道)하게 하였고, 훗날 대각국사(大覺國師)로 봉하여 호국불교로 포교와 국정의 자문에 임하도록 했으니 남숭산의 품격과 위상이 역사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내연산의 유래 경북 포항시에 위치한 내연산은 본래는 종남산이라 하였다. 신라 진성여왕이 견훤의 난을 피해 들어온 일 이후로 내연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어 확실한 유래를 알 수가 없다. 내연산에는 천년고찰 보경사가 위치해 있다. 이 사찰은 신라 진평왕 25년(622년)에 세워진 후 지금까지 한번도 폐사된 적이 없는 유서 깊은 곳이다. 옛날 지명법사가 중국 진나라에 가서 공부할 때 어느 도인에게서 8면경을 얻어왔다. 그는 왜구를 물리칠 방책으로 고심하던 진평왕의 도움을 받아 영일 지방에서 오색구름이 덮여 있는 산을 발견하고 8면경을 묻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절을 세운 다음 보경사라 불렀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두륜산의 유래 전남 해남에 위치한 두륜산은 최남단의 지형적 특성을 두루 갖춘 산이다. 해발 703m로 그 기세가 웅장하며 산봉우리의 생김새 또한 중후하고 장엄한 두륜산은 남쪽 끝에 위치한데다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특이한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머나먼 곤륜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백두산에 이르고, 다시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내려와 해남 땅에서 긴 여정을 마쳤다고 믿었다. 그래서 백두산의 '두'와 곤륜산의 '륜'자를 합해 '두륜'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다. 륜자가 '바퀴 륜'자로 바뀐 것은 두륜산 연봉들이 바퀴처럼 둥글게 휘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륜산은 또 대둔산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산이란 뜻의 '듬'에 크다는 뜻의 관형어 '한'이 붙어 한듬-대듬-대둔으로 변한 것으로 풀이한다. 이 산도 금산, 논산, 완주의 대둔과 마친가지로 '한듬산'이었는데 한자화해서 대둔산으로 되었고 중간에 두륜산으로 바뀐 것이다. 명성산의 유래 포천군과 강원도 철원군에 걸쳐 있는 명성산은 울음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명성산, 즉 울음산이라는 이름은 궁예가 자신의 부하였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패한 후 이곳으로 쫓겨와 크게 울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명성산에 이웃한 철원은 901년 송악에 태봉이란 나라를 세웠던 궁예가 두 번째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토양이 기름지고 사람이 살기 좋아 옛부터 풍요의 땅으로 알려져 왔으니 도읍이 들어설 만도 하다. 그 때문인지 명성산 인근지명에는 궁예와 관련된 이름이 많다. 궁예가 도망했다는 패주골, 왕건의 군사가 쫓아오는 것을 살피던 망무봉등이 그것으로 명성산의 얽힌 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백운산의 유래 백운산의 산행기점인 광덕고개는 일명 '카라멜고개'라고 부른다. 그렇게 불리게 된데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도로가 비포장이었던 6.25때의 일이다. 이 지역을 관할하던 사단장이 광덕고개를 오를때면 그의 운전병이 자꾸만 졸았다. 운전병이 졸지않을 방법을 궁리하던 사단장은 방법 하나를 찾아냈다. 그것은 고개를 오를 때 운전병에게 카라멜을 먹이는 것이었다. 그로인해 운전병의 조는 습관이 고쳐졌는지는 모르지만 이 고개 이름이 카라멜 고개로 바뀠다는 것이다. 두 번째 역시 6,25때의 일이다. 미군병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니는데 고개가 높아 너무 힘이 들었다. 그들은 그 지루함과 힘이 드는 것을 잊기 위해 고개를 오를 때 카라멜을 먹었다. 한통을 다 먹고나서야 비로소 고개를 넘었고, 그때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설은 광덕고개의 꾸불꾸불한 모양이 낙타의 등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카멜(Camel: 낙타)이 카라멜로 변하여 카라멜고개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패산의 유래 사패산은 경기도 의정부와 양주에 위치한 산으로 동쪽으로 수락산을, 서남쪽으로 도봉산을 끼고 있다.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사패산은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온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무리 군왕이라도 평범한 이들과 다를바가 없었던 모양이다. 사패산에는 바로 자식을 사랑한 군왕의 마음이 닮겨있어 찾는 이들로 하여금 훈훈함을 느끼게 한다. 조선 선조임금의 여섯째 딸은 정휘옹주였다. 임금은 남달리 옹주를 사랑하였는데 혼기가 찬 딸은 유정량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선조임금은 사가로 시집가는 딸을 위해 산을 하사하는데 사패산이란 이름은 그런 연유로 붙여졌다. 소요산의 유래 소요산은 뛰어난 경치 때문인지 이곳에 자취를 남긴 인물이 많다. 이름의 유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소요산의 아름다움에 반한 두사람이 있었다. 바로 서화담 양봉래과 매월당이었다. 이들은 자주 이 산을 찾았는데 소풍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이 그들의 유유자적하듯 이 산을 소요하는 모습을 보고,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속리산의 유래 이 산은 옛날에는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하여 구봉산 불렸었다. 그후 지명산, 미지산, 형제산, 자하산, 광명산 등의 이름을 거쳐 신라시대에 이르러 지금의 속리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속리산이 이처럼 많은 이름으로 불려진 것은 명산으로서 세인의 관심을 받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속세와 이별하여 수도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라는 의미의 속리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법주사가 창건된 지정된 지 233년후인 신라 선덕왕 (784년) 때의 일이다. 진표율사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들판에서 밭갈이를 하고 있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이했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렇게 뉘우치는 마음이 절실한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감응이 없겠느냐며, 머리를 깎고 진표율사를 따라 입산 수도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후 속리산이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수락산의 유래 수락산은 의정부시와 남양주군을 경계로 위치하고 있다. 산전체가 화강암과 모래로 이루어져 얼핏보기에는 삭막하고 볼품없이 보일 수도 있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락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곳곳에 다양한 볼거리를 지니고 있다. 수락산에는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방랑하였던 김시습의 자취가 어려있다. 세종은 5세때 신동소리를 듣던 김시습을 무척 아꼈다. 당시 세자였던 문종과 어린 세손인 단종을 향해 '너를 귀히 등용할 두 군왕이다\'라고 했을 만큼 김시습의 재주를 높이 샀다. 세월이 흐른 후 수양대군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3일 동안이나 문을 닫고 통곡했다. 그후 책을 불사르고 머리를 깎은 그는 중이 되어 세상을 떠돌았다. 정처없이 발길 닿는대로 다니던 그의 발길이 이곳 수락산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한동안 은거하였던 김시습은 수락산 정상을 비로봉이라 이름짓고 다른 봉우리들도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온다. 식장산의 유래 옛날 식장산 자락에 어린 아들을 둔 가난하고 효성이 지극한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 젊은 부부는 아들로인해 큰 걱정거리가 있었는데, 산과일이건 나물이건 어머니에게 드리면 어린자식이 먹어치우고 어머니에게 몰래 드리기 위해 아들을 업고 나가면 크게 울어대는 통에 어머니가 마음놓고 그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분 밖에 없는 어머니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한 부부는 자식은또 낳을 수 있다는 생각 끝에 아들을 숲속 멀리 묻어 없애기로 했다. 그런데 아들을 묻으러 땅을 파던 부부는 땅 속에서 그릇 하나가 나오자 괴이한 생각이 들어 아들은 다른 날 묻기로 하고 그릇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무심코 이 그릇에 담뱃재를 털었는데 다음날 눈을 떠보니 담뱃재가 그릇 그득히 쌓여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음식을 조금 담아놓았더니 그릇의 음식이 가득 불어나 있었다. 이때부터 이들 부부는 근심이 없어졌다.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려던 부부의 크나큰 효에 하늘도 감탄하여 큰 보물을 내렸던 것이다.부부는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 그릇을 산의 어느 곳에 묻었다고 한다. 밥 그릇이 묻혀있는 산이라 해서 식기산 또는 식장산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월아산의 유래 월아산은 진주시의 상징적인 산으로 금산면과 문산읍, 진성면에 걸쳐 있다. 월아산의 두 개의 봉우리중 북쪽을 달임산이라 부르고, 남쪽 봉우리는 장군대라고 한다. 이 봉우리를 장군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지리적 특성상 진주는 다른 어떤 지방보다도 치열한 왜군과의 격전지일 수 밖에 없었고 백성들은 그들의 살육과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논개가 이곳 진주에서 왜병장을 안고 물에 뛰어들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당시 김덕령 장군은 왜군이 진주로 진격해 오자 월아산에 목책성(木柵成)을 쌓고 왜적을 무찌르는 본영으로 삼았다.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이 봉우리에 장군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월악산의 유래 충북 제천과 충주에 걸쳐있는 월악산은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예전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불렸다. 월악산의 정상을 영봉 또는 국사봉이라 부르는데, 산의 정상을 영봉이라 부르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둘뿐이다. 『 비결잡록』에는 '병화불입지지'라 하여 난리가 나도 안전한 땅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그러나 왜 월형산이란 이름을 붙였고 언제부터 월악산이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길을 없지만 대신 여러 가지 추측이 전해온다. 어떤 이는 월(月)자가 붙은 산이 대개 인가가 많은 지역의 동쪽이나 남쪽에 있어 사람들이 그 산위로 솟은 달을 보게 된다는 것과 연관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근처가 서울이 될 뻔하다가 와락 미끄러져 와락산이라 부른 것이 월악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주왕산의 유래 경북 청송면에 위치한 주왕산은 전설의 산이라고 할만큼 많는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주왕산은 원래 높고 깎아지른 바위들이 골짜기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하여 석병산이라 불렸다. 그후 신라 왕자인 주원이 이 산에 은거하게 되면서 주방산이라 하였고 이후 대둔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신라 때의 일이다. 중국 동진의 왕족인 주도는 스스로 '후주의 천황'이라고 칭하면서 나타났다.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당나라 덕종 15년에 장안으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곽자의에게 패하고 주도는 요동을 거쳐 어찌어찌하여 고려 땅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은신처를 찾던 그는 산 하나를 발견하였다. 지세가 험하고 은거하기에 적합하다 판단한 그는 여기에 머물렀다. 한편 신라 조정은 당의 재촉을 받고 장군을 보내어 주왕을 토벌케 했다. 결국 주왕은 타국땅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후 이 산을 주왕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축령산의 유래 축령산에는 남이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그를 잃은 백성들의 안타까움이 곳곳에 전해지고 있다. 남이섬, 남이바위등 아직도 그의 이름이 붙은 지명들로 해서 그가 역사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인물이 아니라 축령산과 함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된다. 남이(1441∼1468)장군의 본관은 의령으로 그의 어머니가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옹주니 그는 태종의 외손이다. 세조3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남이는 왕의 총애를 받으며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후의 일이다. 궁중에서 숙직을 하던 남이는 혜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묵은 것이 가고 새것이 나타나게 될 징조다.\"라고 해석하였는데 유자광은 왕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했다. 오래전 부터 남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예종은 이것을 빌미로 남이를 제거한다. 이렇게 해서 남이는 스물 여덟의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그가 세상을 뜨자 사람들은 그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가 어려서 무예를 닦던 산을 축령산이라 이름붙였다. 치악산의 유래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자 고려의 유신 운곡은 고향인 치악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그는 고려가 망하기 전 이방원에게 글을 가르쳤던 적이 있다. 왕이 된 태종은 스승 운곡을 찾아 어릴 때 머물며 글을 읽었던 치악산 각림사를 찾았는데, 운곡은 조선의 왕인 그를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의 일화가 관련된 여러 명소가 전해오고 있다. 태종이 잠시 머물었던 횡성군 강림면의 태종대(주필대), 태종이 운곡의 행방을 묻었을 때 할미가 엉뚱하게 가르쳐 주었던 바위, 황지암을 비롯하여 후일 임금에게 거짓말을 한 죄를 뉘우쳐 할미가 빠져 죽은 늪, 노구소(할미소,구연)등이 그곳이다. 이밖에도 운곡이 숨어 살았던 고깔바위(변암)가 치악산 동남쪽에 있으며, 태종의 수레가 지나갔던 수레너미재, 대왕재, 원 통재 등의 고개 이름이 지금도 남아 있다. 비로봉 서쪽의 입석대 아래 원주시 행구동 석경촌에 운곡의 묘가 있으며 바로 아래에 운곡의 재실이기도 한 석경사가 있다. 칠갑산의 유래 197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칠갑산은 정상을 중심으로 아흔아홉계곡을 비롯한 까치내, 냉천계곡, 천장호, 천년고찰인 장곡사 등 절경지대가 펼쳐져 있다.두개의 대웅전으로 유명한 장곡사는 그윽한 산사의 기품이 넘치는 사찰이다. 칠갑산은 본래 이름은 칠악산이었다. 그러나 불교의 영향으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일곱 성인의 칠(七)자와 십이간지의 첫 자인 갑(甲)자를 합하여 붙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산 속에 명당자리가 일곱군데 있다고 해서 연유한 이름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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