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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불교 공부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사랑

by 범여(梵如) 2013. 3. 9.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후 원효대사와 헤어지는 의상대사

중국 등주에서의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만남

신이한 꿈을 꾼 지엄대사의 문하에 들어가는 의상대사

용이된 선묘낭자의 호위로 무사히 신라로 귀국하는 의상대사

용으로부터 여의보주를 받는 의상대사

낙산사를 창건하는 의상대사

선묘낭자의 도움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는 의상대사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사랑

우리 나라 불교 화엄종을 처음으로 도입한 신라고승 의상대사(625-702)는 신라왕족의 신분으로

경주 황복사에 출가하여 20세에 불문에 귀의하였다. 그가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 유학길에

나선 시기는 진덕여왕 4년(650년)의 일로써 그의 나이 26세였다.

처음 당나라로 떠난 길은 고구려 땅인 요동반도를 거쳐 들어가는 루트였으나 국경에서 고구려군의
검문을 받아 첩자혐의로 체포되어 고생하다가 귀국하였다. 이들은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시도하였는데 의상이 36세 되던 해에 원효와 함께 서해안 당항성(남양, 오늘날 경기도 화성군 해안 추정)에
다다라 당나라로 떠나는 무역선을 기다렸다.
 
당나라에 들어가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시기는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해이고 처음으로 세운 사찰이
강원도 양양 낙산사와 경북 영주 부석사이다. 의상이 당나라로 떠난 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하던
시기였고, 백제가 멸망하면서 서해 바닷길이 열렸으나 아직 고구려는 건재하였던 때였으므로 이 위험한
고구려 내륙 루트를 이용하지 않고 뱃길을 택하여 중국 산동반도 등주로 떠났다. 그 당시 산동반도를
비롯한 황해 연안은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신라방(신라주민 집단 거주지)이 있었고 여기에는
신라인들이 출입하는 사찰도 있었는데 의상이 잠시 머문 곳이 적산 법화원이다.
 
의상대사에 관련한 중국 내 기록은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에 살면서 승려가 된 북송의 찬영이 저술한
송고승전에 전해오고 있으나 우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구체적 기록이 전해오지 않는다.
의상대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부석사 창건 설화에 기록이 전하고 민간 전설에도 전해온다.
그리고 일본 경도 근처 고산사에는 10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신라 여인상이 근세 발견되어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 여인상은 다름 아닌 의상대사와 슬픈 사연을 간직한 당나라 처녀 선묘라고 보고
있으며, 이 절에는 화엄연기라는 불교서적이 전해오는데 이 책에 의상과 선묘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의상이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위해 도착한 곳은 서해안 당주계(신라시대 지명에는 당성, 당항성)이며
그들은 배를 기다리다가 산중에서 노숙하면서 밤중에 비를 만났다. 어둠 속에서 민가를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고 움집을 발견하여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의상과 원효는 밤중에 갈증을 느껴 가까이 고인 물을 달게 마셨다.
먼 여행길에 지치고 피로하여 불편을 잊고 단잠을 잔 뒤 이튿날 날이 새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들이 잠을 잤던
그 자리에 해골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하룻밤을 보낸 곳은 움집이 아니라 피폐해진
무덤 속이었다. 의상은 해골에 고인 물을 자신이 마셨다는 사실을 알고 구토하고 더러움을 느꼈으나 원효는
태연자약한 자세로 오히려 환희에 젖어 있었다.
 
이튿날도 비가 멎지 않자 또 다시 무덤 속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밤중에 귀신이 나타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원효는 이틀동안 무덤 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고
갈파하였다. 즉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원효는 "어젯밤 무덤을 무덤이라고 보지 않고 토굴이라고 생각하여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고,
자리를 옮겨 잠을 자면서 귀신을 만났지만 마음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누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 모든 사물의 형상이 다르게 보고 느끼게 되고 또 생각을 멀리하게 되면 무덤이나
토굴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오직 내 마음 이외 무슨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깨달았으니 당나라에 가지 않고 경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의상은 더 배우기 위해서 홀로 외롭고 험한 길을 택하여 뱃길로 중국을 향했다.
 
서기 661년에 의상이 중국 땅을 밟은 곳은 산동 반도 북쪽 등주였는데 그는 독실한 불교신도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 집에는 아름다운 처녀 선묘가 살고 있어 훗날 신라승려 의상과 인연을 맺게 되지만 의상이 여자를 멀리하므로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의상이 적산에 있는 법화원으로 옮겨 머무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탁발을 나설 때는 선묘가 멀리서 의상을
바라보면서 흠모했다고 한다. 선묘가 절 밖에서 의상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마음을 전하려 했으나 의상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의상은 이곳에서 서쪽 멀리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떠났으며 근처 종남산에서
화엄경을 설법하는 지엄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10년간 삼장(불교의 기본이 되는 경 · 율 · 논)을 배웠다.
 
지엄은 의상에게 귀국하면 널리 화엄종을 보급할 것을 당부하였고 의상은 유학을 마치고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등주 항구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선묘는 자기가 손수
지은 법복을 전해주고자 바닷가로 갔으나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선묘는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는 의상에게 법복이 무사히 전달되도록 마음속으로 빌면서 배를 향하여 던지니 법복은 무사히
의상 품안으로 떨어졌다.

선묘는 평소 독실한 신도로써 의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의상이 불법을 공부하여 득도하고 무사히 귀국하도록
부처님에게 빌었다. 의상이 떠나자 함께 따라 갈 수 없게 되어 선묘는 자신이 용이 되어 달라고 하늘에 빌면서
황해바다에 몸을 던졌다. 하늘이 이에 감읍하여 선묘는 용이 될 수 있었고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면서 신라까지 무사히 보살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신라에 돌아온 의상은 뜻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이상히 여겼지만 나중에서야 용이 된 선묘의 보살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의상이 귀국 후 처음 세운 절은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이고 그 다음이 태백산 근처 봉황산 아래 지은 부석사이다.
문무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에 내려가 명산대천에 사찰을 지으라는 분부를 받고 절터를 정한 곳이 곧 부석사이다.
그는 문무왕 10년(676년)에 이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으나 이미 이곳에 와서 절을 짓고 사는 5백여명의
다른 종파의 불승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의상은 마음속으로 부처님에게 어려움을 호소하자 갑자기 하늘에서
바위로 변한 선묘의 용이 나타나 3일 동안 공중에 머물면서 반대하는 불승들을 향하여 내리칠 듯 위협하니
그들은 두려워서 달아나고 종국에는 굴복하여 새 절을 짓는데 협조하게 되었다.
 
어리고 착한 선묘의 넋이 용이 되어 의상을 보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용이 된 것이다.
선묘가 바위가 되어 땅에 내려앉은 바위를 부석이라 하고 선묘의 도움으로 지어진 이 절의 이름을 부석사 라고 지었다. 현재 부석사에 선묘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은 부석, 선묘각(선묘상을 모신 사당), 선묘정, 석룡이다.
절 동쪽에는 선묘정이 있고 서쪽에는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던 식사용정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아래 묻혀 있는 석룡은 절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데 아미타불 불상아래에 용머리가
묻혀있고 절 마당 석등 아래에 꼬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근세 이 절을 보수할 때 비늘이 새겨져 있는 석룡이
묻혀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며 그 당시 무량수전 앞뜰에서 절단된 용의 허리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원정군으로 참전한 이여송이 우리 나라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인재가 태어날 곳에는
지맥을 많이 끊었다고 하며 그 무렵 이 절의 석룡의 허리가 짤렸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신라시대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야기처럼 의상과 선묘낭자의 사랑은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 가슴에 남아있다.

 

부석의 뜻은 '공중에 떠있는 돌'이라는 뜻이다.
의상대사를 사모하던 당나라 아가씨 선묘라는 여인이
의상대사를 보호하기 위해 큰 바위가 되어 몸을 던져
위험에서 대사를 구했다는 전설이 있다.
아래사진이 바로 선묘각 속에 안치되어 있는 선묘낭자의 모습.
의상대사의 집인 '조사당'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의상대사는 무량수전과 100미터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 사이에
선묘각을 세워두고, 넋을 기렸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유학길을 포기하고 귀국했으나
의상대사는 당나라에 도착하여, 신도의 집에서 머물며 그 집의 딸인 선묘낭자가
의상대사를 사모하게 되나, 의상대사의 거절로 제자가 되어 곁에 머무른다.
유학길을 끝내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의상대사를 따라가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 의상대사의 뱃길을 호위했다는 전설이 있다.

의상대사

 

의상의 생애와 관련한 자료는 비교적 풍부하게 전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자세한 기록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의상전(義湘傳)」이나 부석사(浮石寺)에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 본비(本碑)등이 전하고 있지 않아
다소의 이설도 존재하고 있는 상태이다. 후대에 편찬된 자료들 사이에 서로 다른 내용을 수록하고
있기 대문인데, 이로 인하여 그의 출생년도나 출가년도, 그리고 당나라 유학시기 등에 대해 학자마다
서로 다른 시기를 주장하는 현상도 있어 왔다. 여기서 이들 여러 가지 학설을 모두 소개하기는 어려우며,
비교적 그 타당성이 인정되고 있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하여 생애를 구성해 보도록 하겠다.
 
의상의 생애를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는 자료는 『삼국유사』권4「의상전교(義湘傳敎)」조와
『송고승전(宋高僧傳)』권4「신라국의상전」이다. 하지만 두 자료 모두 생애를 연대기적 형태로
서술한 것이 아니어서 의상의 생애 가운데 상당 부분은 어쩔 수 없이 공백기로 처리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외에도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의 일부 내용, 그리고 대각국사 의천스님의 문집과 기타 중국과
일본에서 찬술된 일부 자료들이 있으나 대부분 이전 자료들에서 보이는 내용들이 중복된 경우가 많다.
여하튼 이들 자료를 종합해 보면 의상의 출생년도는 625년(신라 진평왕 47년)이 분명하다.
삼국전쟁이 극에 달해 있던 시기에 출생한 것이며 그의 부친은 한신(韓信)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었다.
스님의 성씨(姓氏)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김씨(金氏『삼국유사』)와 박씨(朴氏『송고승전』)로 각각 다르게
나타나 있지만, 학계에서는 김씨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그의 집안은 진골귀족이긴
하였지만 당시 신라 정치 권력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집안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의상의 출가시기에 대해서도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그 결과 19세에 출가하였다는 설과

29세에 출가하였다는 설이 함께 제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29세 출가설을 기록하고 있는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며, 따라서 의상의 출가는 19세 때인 643년

(선덕왕 12년)에 이루어진 일로 보고 있다. 스님의 출가 도량은 경주 황복사(皇福寺)로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당시는 신라 왕실의 지원에 의하여 건립된 중요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출가 이후 의상의 승려 생활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당(唐) 유학 시기를 기준으로 하여 유학 이전까지의 국내 수학 시기와 유학 이후의 활동기로 각각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먼저 국내 수학 시기의 행적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 시기에 원효스님과 함께 수행하였을 것이라는 점과 역시 원효와 함께 고구려의 보덕화상(普德和尙)에게

『열반경』과『유마경』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 등은 확인되고 있다.

 

아울러 당시 신라 고승인 낭지(朗智)스님에게도 사상적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모든 승려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의상의 출가 직후 행적도 이후의 승려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원효와의 만남은 의상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사 전체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두 젊은 승려의 만남은 이후 한국불교의 교학 수준을 한 단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비록 선택한 길은

서로 달랐지만 진정한 도반(道伴)으로서의 관계는 의상의 승려 생활과 학문 연구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보덕화상과의 만남도 의상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그가 국제적 안목을 키워

나가는 데 좋은 계기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렇게 의미 있는 수행과 학문 탐구를 계속하고 있던 의상은 인생의 최대 전환기를 마련한다.
원효와 함께 불교 선진국이던 당나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효와 의상의 입당(入唐) 유학에 관계된 일화는 워낙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지만, 여하튼 두 차례의
시도 끝에 결국 원효는 큰 깨달음을 얻으면서 유학을 포기하였고, 의상은 원래 의도했던 대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의상의 입당 유학은 당시 신라불교계의 현실을 감안할 때 너무도 절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가 중국 화엄종에 끼친 영향이라든가 유학 이후 신라 교학 발전에 기여한 공적 등을 고려한다면,
이 때의 유학 결행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로 보는 것이 순리일 듯하다.

 

한편 의상의 유학 시기에 대하서도 몇 가지 설이 제기된 바 있으나 1차 시도는 650년(진덕왕 4년)에 이루어졌고,
2차 시도 즉 당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성취된 시기는 661년(문무왕 1년)으로 보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출가 이후 18년만에 37세의 나이로 드디어 당나라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의상은 중국에 들어가 당시 중국 최고의 화엄학자로 존숭되고 있던 지엄(智儼, 602∼668)의 문하로 들어갔다.
의상과 지엄의 만남에 대해서는 매우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삼국유사』의 다음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영휘(永徽, 650∼655)초년에 당나라 사신의 배가 서쪽으로 돌아가는 편이 있어 거기에 실려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 양주(揚州) 지역에 머물렀는데, 그 고을의 장수인 유지인(劉至仁)이 청하여 관사 안에서 머물게 하였으며
(스님에게 내놓는) 공양이 풍성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스님을
찾아뵈었다.
 
지엄이 그 전날 밤 꿈을 꾸었는데 한 커다란 나무가 해동(海東)에 나서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중국
신주(神州)까지 덮이고 그 위에는 붕새가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 위로 올라가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
한 개가 멀리 빛을 쏘고 있었다. 꿈을 깨어 놀라고 이상히 여기어 집에 물을 뿜어 깨끗이 쓸고 기다렸다.
의상이 마침 그 곳에 이르자 맞이하여 특별한 예우를 하며 조용하게 말했다.
 

"나의 어저께 꿈은 그대가 나를 찾아올 징조였다" 그리고 나서 의상의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삼국유사』권2 「의상전교」조

 

지엄의 꿈에 신이한 조짐이 있었고 그 꿈을 꾼 바로 다음날 의상스님이 찾아왔다는 내용이다.
여하튼 의상은 중국 화엄종의 거장인 지엄의 문하에 큰 어려움 없이 들어 감으로써 보다 넓은
세계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지엄은 중국 화엄종의 개조(開祖)인 두순(杜順)의 법을 이은 제2조로
의상을 각별히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지엄의 문하에서 화엄사상을 탐구하던 의상의 학문은 날로 발전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의 학문을 오히려 능가할 정도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당시 지엄의 수제자로 인정받고 있던 법장(法藏, 643∼712)과의 대비는 화엄사상사 전체에서 주목되는
일이기도 하다. 중국 화엄종의 실질적 정립자로 평가되는 인물이 바로 법장이었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상의 학문보다는 뒤진다는 평가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이후 법장은 자신이 지은
여러 저술을 보내어 의상에게 자문을 청한 것이 있으며 의상은 그의 저술 편찬에 손질을 가할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때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편지는 지금도 전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편지의
끝에 실려 있다.
 
"바라옵건대 상인(上人)께서는 여러 곳에서 함께 지낸 과거의 교분을 잊지 마시고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정도(正道)로써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인편과 서신이 있을 때마다 존몰(存沒 : 안부를 말함)을 물어주소서."
 
중국 화엄종의 실질적 정립자인 법장이 이렇게 존숭할 정도로 의상스님의 학문은 탁월한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의상은 남산(南山) 율종(律宗)의 개조인 도선율사(道宣律師)와 교류하면서 중국 계율학 연구에도 식견을 넓힌 바
있다.
 
이미 중국 내에서도 대단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의상스님은 670년(문무왕 10년) 무렵에 신라로 돌아온다.
다소 급작스러운 귀국으로도 보이는 이 무렵의 일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국의 승상(丞相)인 김흠순(金欽純, 일부에는 金仁問으로도 되어 있음)·김양도(金良圖)등이
당나라에 와서 갇히게 되었다. 고종(高宗)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동쪽을 치려 하니 흠순 등이 가만히
의상에게 일러 먼저 귀국하게 하였다. 함형(咸亨) 원년(670년) 경오년에 의상이 환국하여 그 일을 조정에 전달했다.
신인(神印) 대덕(大德)인 명랑(明朗)에게 명하여 임시로 밀단법(密壇法)을 설치하고 이를 물리치게 하니 이로써
나라의 병란을 면할 수 있었다.

『삼국유사』권4 「의상전교」조

의상의 귀국에 대해『삼국유사』는 이렇게 국가적인 일이 발단이 되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송고승전』과 같은 자료에서는 그가 단지 화엄교학을 전하기 위해 귀국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의상의 불교사적 위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그래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의상이 당시 신라 조정의 정치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는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의상과 신라 왕실, 또는 의상과 당시 정치와의 연관성 여부를 놓고 서로 상반된 견해가
제기되어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의상의 귀국이 지니고 있는 보다 정확한 의의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 결과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그가 스승 지엄의 입적(688년) 이후에도 계속 머무르고 있다가
서둘러 귀국한 데에는 분명 국가적 차원의 이유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을 서둘러 알려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결국 의상스님은 자신의 유학보다 조국 신라의 국가적 안위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었으며

김흠순 등의 권유에 따라 즉각 귀국하는 과단성을 보여 주었다. 이 같은 의상의 모습은 한국불교의

대표적 특성인 호국불교(護國佛敎) 사상과 그대로 연결된다고 하겠다. 구법(求法)의 염원을 간직한

유학승으로서의 모든 상황을 뒤로한 채 조국의 안위에 앞장서고자 했던 모습은 바로 호국불교의

전형적 사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 왕실은 의상의 급보를 전해 듣고 곧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에 의지하여 외침을 물리치고자 하였으며
경주 신유림(神遊林) 근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고 법회를 봉행하였다. 그리고 불법에 의지하여
외침을 물리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성으로 두 차례에 걸친 당의 침공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귀국 이후 의상의 활동은 사찰 창건과 제자 양성에 집중되었으며, 이를 통해 신라 화엄사상의 발전이
폭넓게 이루어질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이 곳 낙산사는 귀국 이후 의상이 최초로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계속해서 부석사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사찰창건을 계속해 나갔으며, 보통 '화엄 10찰'로 부르는 사찰들도
의상이 창건했거나 그의 교학을 중점적으로 전하던 곳이었다. 실제로 그가 얼마나 많은 사찰들을
창건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나라 상당수의 사찰 창건주로 그가 모셔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무렵 창건 또는 중창을 이룩한 사찰 수는 꽤 많은 수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찰 창건과 함께 의상은 수많은 문도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지통(智通), 표훈(表訓) 등의 '10대 제자'를
비롯하여 그의 법회에 모여들었다고 하는 3,000문도에 이르기까지 그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제자는
이루 열거조차 하기 어렵다. 이로써 화엄학은 신라 불교 교학의 가장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종파로써의 발전도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룩할 수 있었다. 그에게 늘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같은 측면에 기인한 결과이다. 이 땅에 화엄학의 기틀을 다져 놓은
의상스님은 702년(성덕왕 1년)에 78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625년 (신라 眞平王 35,37) 신라 계림부(鷄林府) 에서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탄생.
643년 (19세 善德女王 12, 20)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出家).
650년 (26세 眞德女王 4)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꾀하였으나 도중 고구려(高句麗)의 순라군(巡邏軍)에게 잡혀 갇혀 있다가 돌아옴.
652년 (27세 眞德女王 5) 천축산(天竺山) 불영사(佛影寺)창건(創建).
661년 (37세 文武王 元年) 당(唐)나라 사신(使臣)의 배편으로 당(唐)의 양주(楊州)에 도착,유지인(劉至仁)의 관아(官衙)에 머뭄.
662년 (38세 文武王 2)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도착, 당시 중국 최고의 화엄학자로 존숭되고 있는 지엄(智儼)의 제자(弟子)가 되어 화엄(華儼)을 수학(受學)하기 시작.
668년 (44세 文武王 8) 7월에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지음.
7월 27일에 스승 지엄(智儼) 입적(入寂).
670년 (47세 文武王 10) 종남산을 출발, 양주를 거쳐 귀국길에 오름.
672년 (48세 文武王 12년) 귀국. 낙산사 관음굴에서 이주간 기도.
이 때 <백화도장발원문>을 지었고 용과 천신으로부터 여의보주와 수정염주를 전해 받음. 또 이 해에 낙산사 창건.
674년 (50세 文武王 14) 황복사에서 표훈, 진정 지통 등 십대제자에게 (화엄일승법계도)를 가르침.
676년 (52세 文武王 16) 왕의 뜻을 받아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함.
702년 (78세 성덕왕 원년) 입적.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라 시호를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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