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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經典講解

금강경 -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제11

by 범여(梵如) 201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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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제11

 

이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언제나 복(福)을 바라며 도 나름대로 복을 얻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열어 보여 주셨고, 또한 우리들이 불교를 통해 구하는 복은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보다 더 고급스러운 행복을 얻기 위해 불교를 믿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오감(五感)의 충족에서 오는 행복을 뛰어넘어 '해도 한 것이 없고(無爲)', 영원히 새지 않는

복(無漏)'이 완전무결한 행복인 것입니다.


진리를 체득했을 때에 완전한 무위복(無爲福)이 되겠지만, 설사 깨닫지 못햇다 하더라도 보다

높은 정신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그런 방향에 있어서 기쁨을 느끼고 독경, 기도, 염불, 참선을

통해 법희 선열(法喜 禪悅)에 잠길 수 있다면 그 행복은 가히 수승하다고 할 것입니다.

須菩提야 如恒河中所有沙數하야 如是沙等恒河 가 於意云何오
수보리   여항하중소유사수     여시사등항하    어의운하
 
是諸恒河沙가 寧爲多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시제항하사   영위다부   수보리   언       심다
 
世尊하 但諸恒河도 尙多無數온 何況其沙리잇가
세존   단제항하   삼다무수   하황기사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만큼이나 많은 항하가 또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는냐,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단지 항하만이라도 오히려 무수히 많거늘

 하물며 그 모래 수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항하 유역을 기점으로 오랫동안 교화 활동을 폈기 때문에 항하강을 자주 비유로 드셨습니다.

항하는 갠지스 강으로 설산(雪山)에서 시작하여 인도 전역을 돌아 흘러 내리는데 주위 땅이 비옥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문명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실제로 가서 항하의 모래를 만져 보면 우리나라에 있는 모래 한 알을 십여 개로 나눈 것처럼 알갱이가

  매우 가늘기 때문에 마치 가루같이 미세하고 부드럽습니다.

2511킬로 미터나 되는 긴 항하에 있는 그러한 모래 수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나 많은 모래 수만큼의 항하가 있고, 또 그 모든 항하에 있는 모든 모래 수를 다 합한

 모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우리의 상상으로는 감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입니다.

 
須菩提야 我今實言으로 告汝호리니 若有善男子善女人이
수보리   아금실언     고여       약유선남자선여인
 
以七寶로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하야 以用布施하면
이칠보   만이소항하사수삼천대천세계     이용보시
 
得福이 多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득복   다부   수보리   언       심다       세존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칠보로써 저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얻을 복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실다운 말로 일러주십니다.
지금까지도 늘 그래왔지만 중생의 역량으로 제대로 납득을 하지 못할까봐 진실로 이야기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앞의 의법출생분 제 8에서는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를 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비유의 양이 훨신 더 많아집니다.

 

앞에서의 보시만 해도 받게 되는 칭찬은 끝이 없을 터인데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그 때 돌아오는

 보람과 찬탄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어마어마하게 남을 위해 많이 보시했다 하더라도 하루에 모래 한 알이 샌다 치더라도

 세월이 가고 가면 언젠가는 다 새어버리는 유루복(有漏福)이고, 유위복(有爲福)이라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사실 남을 위해 물질로 보시하는 유루복, 유위복을 짓고 주상보시(住相保施)를 하더라도 복을 받기는 받습니다.
'주상 보시는 생천복(生天福)'이라 하여 우선 자기 자신이 흐믓하고 남들로부터 한없는 칭찬을 듣고 그리하여

 천상에도 수백 번을 가겠지만 그 복이 다하고 나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법입니다.

활이나 미사일을 쏠 때 너무 세게 쏘면 땅 표면으로 떨어지지 않고 땅 속으로 떨어집니다.
그것처럼 유위복을 많이 지어 놓았다고 더이상 복을 지으려 하지 않으면 천상락(天上樂)을
실컷 누리고 나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설사 인간 세상으로 온다고 해도 빈천한 삶을 살게 됩니다.
 
죽은 뒤에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습니다.
'제 까짓 게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이렇게 되면 복 지으나 마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항상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꾸준히 복 짓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수행을 본격적으로 하는 사람에게도 '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라고 합니다.
복 짓느라고 일생을 보내고, 복 쓰느라고 일생을 보내고, 복을 다 쓰고 나면 하천하게 일생을 보내게 되니

 삼생을 복 때문에 헛되게 보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 지으려고도 복 받으려고도 하지 말고 영광을 누리려고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유위복에 빠져 있으면 참된 수행자가 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若善男子善女人 이 於此經中에 
불   고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어차경중 

乃至受持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而此福德이 勝前福德이니라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이차복덕   승전복덕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만약 선남지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면 그 복덕이 앞에서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수승하리라."

이 말을 누가 쉽게 믿겠습니까.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삼천대천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하여 받는 복보다

사구게의 가치가 더 있다고 하니 누가 쉽게 납득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게서는 실언(實言)으로 일러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 사구게 뭐 그리 대단한 가치가 있는 소리입니까.
곳곳에서 들을 수 있고 제사만 지내면 읽는 영가의 시식문에도 있는 소리인데 뭐 그리 중요한 것입니까.
만약 어린아이 앞에 진주를 산더미만큼 준다고 해도 어린아이는 그 진주의 가치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좋아하는 여자들은 그 진주의 가치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진주가 값 안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처럼 사구게의 가치, 아니 영원히 새지 않는 무루복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수승(殊勝)하고 다함이 없는 무위복을 깨달으려면 먼저 알아야 합니다.
경을 읽어보고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해 보려면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려고 해도 자기가 알고 있는 한계에서만 할 수 있으니까 다른 방법은 안 나옵니다.
일단 알고 나면 자기가 여러 가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보다 나은 방법을 선택하여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수행 단계를 세 가지 문.사.수(聞 .思.修)라 합니다.


일단 많이 듣고 보고 배워야 합니다.
그 다음 배워 알게 된 것에서 속고하여 자기에게 가치로운 것을 분별해 냅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 것으로 영원히 하겠다고 끝없이 정진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여 꾸준히 닦아가는 것입니다,


완전무결한 진리와 복을 추구하고 가치를 깨달아 가는 것은 바로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끝없이 정진하고 수행하면서 보다 더 넓고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부처님의 일화에도 복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아나율이라는 눈 어두운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 스님의 옷이 다 헤어져 그것을 기우려고 바늘에 실을 꿰려 하였습니다.
눈이 어둡고 늙었기 때문에 아무리 더듬거리며 꿰려 해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나를 위해 복을 지어줄 사람이 없겠는가 바늘귀를 꿰어 주는 조그만 복을 지어줄 사람이 없겠는가.

"하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 때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바늘과 실을 받아다가 실을 꿰어 주었습니다.
아나율은 '아 이 분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부처님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부처님게서 어찌 이런 일을 하십니까.


제가 우리 도반들에게 조그만 복을 짓게 하려는데 어이 부처님께서 이런 하잘 것 없는 복을 지으려 하십니까."
그러자 부처님게서는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복 짓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행복을 위해서 나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두 행복을 찾아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마는 부처님보다 더 열심히 뛰는 분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복이 가장 많은 분이 부처님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을 구해 열심히 정진하고 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자세를 한 번 보십시오.
조금 살만하고 편안해지면 그만 복 지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끝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상대방을 위해, 또 이 세상에 작은 보탬이 되기 위해,

나아가 진리를 얻게 되는 행복을 구하기 위해 오로지 정진(精進)만이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