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제13(1)
통일된 하나의 진리 덩어리 자체에 과연 나와 너, 남(男)과 여(女), 노(老)와 소(少),
승(僧)과 속(俗), 선(善)과 악(惡)이라는 차별된 분별상이 붙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원만하고 구족하며 생사마저 떠나 보낸 그 자리를 밝혀내어 실상 그대로를 받아 지녀야 합니다.
법(法)답게 받아 지녀야 합니다.
언어와 문자가 붙지 못하고 우리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미치지 못하는
그 자리를 굳이 말로 나타내자면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經)'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딱히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아로새기는 그 마음이 바로 금강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當何名此經이며 我等이
이시 수보리 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
云何奉持하리잇고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是經은 名爲金剛般若波羅蜜이니
운하봉지 불 고수보리 시경 명위금강반야바라밀
以是名字로 汝當奉持 하니라
이시명자 여당봉지
그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며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이경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이름으로써
너희들은 마땅히 받들어 지닐지니라."
부처님께서는 4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기 설법(隨機 說法)을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어떠한 제목을 정해 놓고 목적에 맞게 설법을 하신 것이 아니라 중생들이 근기와
필요에 맞추어 이야기 하다 보니 나중에 하나의 세계를 갖게 되고 통일된 사상이 확립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경전의 중간이나 말미가 되면 "경전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하고
제자들이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뒤 이상적멸분 제 14까지가 『금강경』의 상권입니다.
그래서 상권 바로 앞, 바로 여기에서 이 경의 이름을 묻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살펴 보았지만 불교에서는 경전의 제목이 경전의 내용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동물을 만났을 때 '대방광불화엄경' 하고 세 번 축원해 주면 그 동물은
경의 제목만 듣고도 미혹한 축생의 탈을 벗고 제도된다고 하셨습니다.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며 날카롭고 빛나는 깨달음의 지혜로서 모든 번뇌와 고통이 사라진
완전한 평화와 행복만이 있는 저 언덕에 이르는 가르침'으로 받들어 지니라는 것입니다.
육조 스님도 '마하반야바라밀'을 외우라고 하셨고, 어떤 사찰에서나 개인이 '금강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을 염불처럼 새기기도 합니다.
상을 떠나는 것이 『금강경』의 교훈인데, 금강경이라는 상만은 가져도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금강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단지 이름을 반야바라밀이라고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佛說般若波羅蜜이 卽非般若波羅蜜일새
소이자하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是名般若波羅蜜이니라
시명반야바라밀
"그 까닭이 무엇인가. 수보리야,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상을 떠나는 것이 『금강경』의 교훈인데, 금강경이라는 상만은 가져도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금강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단지 이름을 반야바라밀이라고
붙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이라고 아로새기는 그 마음이 진짜 반야바라밀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이름조차 허망한 것도도 없습니다.
눈 앞에 버젓이 있는 모양조차 허망한데 그까짓 이름은 더 허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과, 사과...."하고 아무리 불러 봐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백 번 불러 보는 것보다 실제 사과가 진짜로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실제의 사과도 무상한데 '사과라는 이름'은 더욱 더 무상한 것입니다.
그것처럼 반야바라밀도 단지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야바라밀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다고 표현하는 것도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들이 깨닫지 못한 중생인 이상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면 납득이 잘 안 될테니까 반야바라밀을 아로새기는 우리들 마음을 반야바라밀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은 무엇이 아니고 단지 그 이름이 무엇이다."하는 표현이 앞으로도 계속 나오므로 좀
"무엇은 무엇이 아니고 단지 그 이름이 무엇이다."하는 표현이 앞으로도 계속 나오므로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만약 부처님께서 지옥의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지옥으로 갔다고 합시다.
이 때 중생이 처해 있는 지옥과 부처님이 가신 지옥이 같은 지옥이겠습니까
다른 지옥이겠습니까.
또 부처님이 가신 그 곳이 과연 지옥이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이 가신 그 지옥은 부처님에게는 지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세계에는 아예 지옥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이 지옥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지옥에 있으니까 우리의 입장이 되어 지옥으로 와서 제도를 했으니까 말이 지옥에 갔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입장에서는 지옥이 지옥이 아니고 그냥 이름이 지옥일 뿐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면 어떤 사람이 형무소에 견학을 갔습니다.
갇혀 있는 사람은 꼼짝달싹을 못하지만 견학간 사람은 이곳, 저 곳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구경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견학간 사람에게는 형무소에 간 것이 형무소에 간 것이 아니고 말이 형무소에 간 것입니다.
이것처럼 반야바라밀은 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所說法不
아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소설법부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如來가 無所說이니이다
수보리 백불언 세존 여래 무소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수보리가 부처님게 사뢰어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녹야원에서 교진여를 비롯한 다섯 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신 후 49년간 하셨던
많고 많은 설법이 수보리의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깡그리 부정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말 한마디에 오히려 부처님의 설법이 더욱 더 꽃을 피우고 설법의 가치가 참답게 활짝 피어 납니다.
공(空)의 도리를 잘 이해하는 수보리가 부처님의 진실을 더욱 빛나게 한 것입니다.
공생(空生) 수보리도 부처님 못지 않게 공(空)의 도리를 잘 나타내 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수보리가 좌선(坐禪)을 하고 있는데 공중에서 꽃비가 뿌려졌습니다.그래서 수보리가 물었습니다.
"꽃을 뿌리는 자가 누구입니까?""하늘의 제석(帝釋)입니다.""어찌하여 꽃을 흩으십니까?"
"존자(尊子)께서 반야바라밀을 잘 설하시어 존중히 꽃 공양을 올립니다.""내가 무엇을 설하였단 말입니까?"
"말씀 없으심이 참다운 설법입니다."이렇게 제석천왕이 수보리를 실답게 칭송하였습니다.
또는 '나무묘법연화경', 대방광불화엄경'을 지성으로 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좋습니다.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는 나의 마음을 얼마나 집중시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옛날에 어느 노보살님이 늘그막에 나도 공부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뒷절에 큰스님이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뵈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여쭈어 보았습니다.
스님은 가풍대로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는 화두를 주고 "즉심이 부처다."라고 해석을 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흔하고 흔한 게 짚신이고 그것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짚신이 부처라고 하니
청천 벽력 같기도 하였지만 큰스님이 거짓말을 하였을 리가 없다고 여겨 일을 할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잠을 잘 때에도 늘 '짚신이 부처, 짚신이 부처....' 하다가 어느 날 환히 밝아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즉심이든 짚신이든 마하반야바라밀하든 관세음보살하든 지장보살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흔히 지장보살이 센 기도고 관세음보살은 약한 기도라고 하는데 그런 원리는 없습니다.
세게하면 센 기도가 되고 약하게 하면 약한 기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초점을 한 곳에 모아 자기 내부에 있는 엄청난 힘에 얼마나 세게 불을 지펴내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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