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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經典講解

금강경 -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제13(2)

by 범여(梵如) 2013.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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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제13(2)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이 是爲多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   시위다부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須菩提야 諸微塵을
수보리   언       심다       세존   수보리   제미진  

如來가 說非微塵일새 是名微塵이며 如來가 說世界도 非世界일새 是名世界니라
여래   설비미진     시명미진     여래   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 대천 세계에 있는 미진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모든 미진을 여래가 설하되 미진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이며,

여래가 설한 세계도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니라."

지금까지는 부처님께서 이름지어 주신 『금강반야바라밀』의 경 이름과 부처님의 남김없는

설법을 부정하였는데 여기에 와서는 우리들이 굳건하게 살아가는 터전인 이 세상을 다 털어 보이십니다.
모여서 이루어낸 세계도 부정합니다.
사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영원하리라 생각하는 세계를 분해해 보면 아주 작은

먼지 밖에 없는데 이 먼지라는 것이 원래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눈에 확실한 큰 덩어리 이 우주 세계라는 것도 결국 무상한 먼지들이 모여

이루어졌으므로 본질에 있어서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그려내는 갖가지의 상을 털어 내었는데 너무나도

확실하고 시작도 없이 있어 왔고 앞으로도 영원 불변토록 존재할 것 같은 이 우주

세계라는 것도 결국에는 무상하고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見如來不아 不也니이다
수보리야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견여래부   불야

世尊하 不可以三十二相으로 得見如來니 何以故오 如來가
세존    불가이삼십이상       득견여래     하이고    여래

說三十二相이 卽是非相일새 是名三十二相이니이다
설삼십이상    즉시비상       시명삼십이상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냐.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고 그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태어나실 때 부터 거룩한 삼십이상(三十二相)을 지니셨습니다.
이 삼십이 길상(吉相)은 오백 생을 거듭하는 동안에 쌓은 선인(善因)에 대한 결과로서 얻게 되었습니다.
가슴에 만(卍)자가 있다.


정상(頂上)에 육계(六繼)가 있다,

미간(眉間)에 백호(白毫)가 있다 등등의 거룩한 삼십이상 중에서도 가장 공덕이 큰 길상은 미간백호상이라고 합니다.
눈썹 사이에 흰 털이 하나 나서 오른쪽으로 말려 있는데 빛을 발하며 부드럽기가 도라면(都羅綿) 같고

정결하기가 눈 같다고 합니다.
다른 나머지 길상의 공덕은 이 백호상의 작은 공덕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상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있으면 천하를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고,

출가를 하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는 길상입니다.
그런 이유로 부처님만이 저 삼십이상을 가지고 있다고해서 삼십이상을 보고 바로 여래다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는 얼른 알아듣고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가까이서 같이 지내는 부처님만이 갖고 있다는

삼십이상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역시 무상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흘러 내리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부처님이 늘 부정을 보이셨는데 여기서는 제자 수보리가 부처님의 삼십이상을 부정해 보입니다.
부처님 스스로 하는 부정보다 제자 수보리가 부처님의 형상을 부정하고 부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우리에게 상이 없음을 더욱 확인시켜 줍니다.
이렇게 또 다시 부처님이 명명한 경 이름, 설법, 미진, 세계, 삼십이상을 부정해 보이는

까닭은 허황되고 무상하며 변화하는 현상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진실한 참다운 모습에

진정으로 눈을 뜨라는 이유에서입니다.


우리들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변하며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육신과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상한 것이 나뿐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버티고 있는 이 땅도, 이 우주도 시시각각 변해갈 뿐입니다.
이렇게 한량없이 변해가니 결국에는 무상한 것이고 고정불변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끝이 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변하는 것은 변하는 대로 다 보내 버리고, 우리가 낱낱이 분별하는 온갖 차별상을 다 쓸어 버리고

난 뒤에도 변하지 않는 것, 쓸리지 않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실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당을 쓸고 방을 치우고 거울을 닦고난 뒤에도 쓸리지 않고 없어지지 않으며 딱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쓰레기와 먼지와 때를 다 제거했을 때 본래의 모습 그대로인 마당과 거울이 확연히 드러나는 법입니다.
이와 같이 흘러가고 변화 무상한 것을 다 떠나보내었을 때에 우리의 참모습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참 마음자리입니다.
이것은 형상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저런 떠오르는 생각과도 구별됩니다.
그러한 많은 생각의 근저(根抵)에서 그러한 생각을 하게 하는 뿌리를 우리의 마음자리로 보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상념들과 참 마음자리의 대비를 다른 경전에서는'객진 번뇌(客塵 煩腦)'라 하였습니다.
'나그네 번뇌'라는 뜻인데  길을 떠난 나그네가 여관에 들어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 나그네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떠나갑니다.
다른 떠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여관 주인입니다.
주인은 떠나지 않고 떠나지지도 않으며 떠날 수도 없습니다.
이 떠나야만 하는 나그네처럼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계속 동요하고 변하고

흘러가는 번뇌 망상을 다 놓아 버려야만 합니다.
여기에 인생을 걸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무상한 번뇌를 다 놓아 버렸을때 때에야 떠나지 않는 주인처럼 우리의 진실한

주인인 참 마음자리가 홀연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진공묘유(眞空 妙有)'라고 합니다.
진실로 텅 비웠을 때 거기에 미묘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울의 먼지를 닦고 닦았을 때 맑고 밝은 거울이 드러나듯이, 모든 나그네는 떠나가도

주인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듯이 지금가지 낱낱이 부정한 이면에는 진실 생명이라는

대긍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파악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