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인도불교
인도불교성립의 배경
1. 역사적 배경
고대 인더스문명은 기원전 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하여 모헨조다로와 하랏파지역에 번성했던 토착민의 문명은 아리얀(a-ryan)족의
도래와 함께 쇠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리얀족은 시베리아 남북과 투르키스탄(Turkestan) 등에 머물던 유목민으로서 기원전 17, 18세기경부터
민족 대이동을 시작하여 기원전 1500년경에 인더스 강 유역으로 진입했다. 아리얀족은 이미 철기문명을
향유하고 있었으며, 아직 청동기시대에 머물러 있던 드라비다족을 흡수, 지배하게 된다.
아리얀족의 도래를 계기로 하여 인도대륙은 철기시대로 접어들었고, 농업의 번성과 함께 농산물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과 농경용 기구 또는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수공업도 성행하였다. 이에 따라 점차 소도시들이
늘어나고 그를 기반으로 새롭게 대두된 자산가 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전제군주가 출현하여 16대국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16대국 중 대부분이 갠지스 강의 동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각 나라의 이름은 앙가, 마가다, 카시, 코살라, 밧지,
말라, 체티, 밤사, 쿠루, 판찰라, 맛차, 수라세나, 앗사카, 아반티, 간다라, 캄보자 등이다. 16대국의 통치형태는
군주정치와 공화정치, 둘로 나누어진다. 밧지국과 말라국은 부족 공화정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을 비롯한 대부분의국가들이 전제적인 국왕이 통치하는 군주정치 형태의 나라였다.
그 중에서 특히 코살라와 마가다가 중심 세력을 이루어 패권을 다투었다.
도시국가들 간의 정복전쟁은 기원전 4세기경까지 이어졌는데, 특히 마가다국의 빔비사라(기원전 582~554년 재위) 왕은
작은 나라들을 정복, 병합하여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닦았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국가의 형성기에 인도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 제도가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원주민이었던 드라비다족을 노예화시키고 아리얀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던 민족의식은 독특한 사회계급 제도인
카스트를 성립시켰는데, 이 제도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4성(姓) 계급은 다음과 같다.
브라만 : 사제계급.
크샤트리야 : 왕족, 귀족, 무사 등의 지배계급.
바이쉬야 : 상인, 평민계급.
슈드라 : 노예계급.
또한 아리얀족의 종교문화는 지배적 사회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아리얀족의 종교는 베다를 중심으로 한 브라만교였다.
브라만교의 성전인 4종의 주요 베다 중에서 『리그베다』는 기원전 2000년부터 1500년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인도의 모든 성스런 지혜의 원천으로서 첫째 가는 문헌으로 꼽힌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아리얀족이 드라비다족을 비롯한 토착 원주민들의 관습이나 문화를 말살하지는 않았으며,
도리어 그들의 종교관을 비롯한 관습과 생활문화 전반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것이
쉬바 신앙과 요가행법이다. 특히 요가는 불교에도 채용되어 수행법으로서 널리 쓰였다.
2. 사문교단
기원전 6세기경에 이르러 종래의 부족적 계급제도가 무너지고, 브라만교의 전통적인 습속이나 의례를 지키는
기풍 또한 점차 약화되었다. 갠지스 강 중류의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전통적 종교였던 브라만교에 대항하는 혁신 사상가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숲 속에서 수행하였다.
그들은 사문(沙門, sraman), 즉 유행자(遊行者)로 불렸는데, 본래 여기저기 방랑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종교적 수행을 목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이를 뜻한다. 사문(沙門)들의 수행공동체를 상가(samha, 僧伽)라고 한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도 사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자이나교의 개조로 꼽히는 마하비라도 그와 같은 사상적
조류 속에서 성장했다. 사문의 사상은 유물론, 불가지론, 영원 불변론, 일부 불변론, 유한 무한론, 회의론, 원자론 등
수백 종에 이르는 유파를 형성하여, 가히 사상의 홍수시대라 불릴 정도였다.
사문들은 정주처가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탁발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헝클어진 머리 모양으로 한 벌의 옷만을 걸치거나 나체 상태로 털투성이의 몸을 드러내 놓고 다니기도 했으며,
손톱을 자르지 않고 길게 기르는 이들도 있었다. 더러는 혼자서 수행하거나 여러 사람이 무리를 이루기도 했으며,
스승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제자들이 함께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양태를 보였던 사문들의 공통점은 기성 종교였던 브라만교의 이상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은 가혹하고 불평등한 카스트제도에 반기를 들었고, 각종 의식과 제례, 동물 희생제 등에 반대하였다.
불교와 자이나교 또한 이러한 사문에 의한 반(反)브라만교 운동의 하나로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세속적인 욕망을 떨치고 해탈이라는 초월적인 희구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 고행했던 사문은 오랫동안 불교교단에서
수행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사문이란 열심히 수행하는 이로서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정진하여 마음의 삼매에 이른다고 한다.
붓다는 사문의 일원으로서 수행을 시작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는, 중도사상을 표방하여 고행수행을 부정하였다.
고행을 통해서는 어떠한 해탈도 얻지 못한다는 붓다의 깨달음은 새로운 사상의 정립을 알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결국 기원전 6세기경에 사문들은 마하비라를 따르는 자이나교단과 고타마 붓다를 따르는 붓다교단으로 크게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붓다가 등장하기까지 사문들이 각각 집단을 이루어 교세를 과시하기도 했으나, 사실상 체계적인 사부대중을
갖춘 교단으로서 정립된 것은 마하비라를 중심으로 한 자이나교단이 최초였다. 붓다 또한 자이나교단의 조직체계를
따라 사부대중을 갖춘 교단으로 발전하는 데는 그다지 긴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붓다 당시의 여러 사상은 서로 간의 대론을 통해서 자웅을 겨루었고 그 흥망이 가려졌다.
그러한 와중에 붓다교단 또한 타 학파와 논쟁을 통해서 크게 성장해 나갔다. 붓다의 교법은 사회ㆍ정치적 상위계층에게도
매력적인 사상으로 수용되었으며, 특히 빔비사라 왕의 재위 연간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경전 곳곳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빔비사라 왕의 불교 외호는 매우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불교
1. 붓다와 제자들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의 생존 연대에 대한 학설은 분분하여 일치하지 않지만, 대략 기원전 500년경에
생존했던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는 데는 이설이 없다. 그의 일생에 대한 많은 일화들은 경전에서 상세히 전하고 있다.
기원전 560년경, 현재의 네팔 남부지역에 자리한 룸비니에서 탄생한 싯다르타는 석가(sa-kya) 부족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의 성씨는 고타마였으며, 싯다르타라는 이름은 ‘목적을 성취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탁월한 지성과 예민한 성격을 지녔던 싯다르타는 극진한 보살핌 아래 왕궁생활을 영위했지만, 결국 세속의 삶을 버리게 된다.
그의 출가 동기는 ‘사문 유관(四門遊觀)’이라는 일화로 전해지듯이, 생로병사를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고자 그의 나이 29세 때 왕궁을 떠나서 수행의 길로 접어들었다. 싯다르타는 약 6년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여러 스승들에게 고행과 명상수행을 배워 익혔다.
베살리(Vesa-lI-)에서는 알라라 칼라마의 지도로 명상법을 배웠고, 라자그리하(Ra-jagr톒a)에서는 웃다카 라마풋타
아래에서 수행했다. 싯다르타는 극심한 고행으로 거의 죽음의 문턱에 이를 정도였으나 진리를 깨칠 수 없었다.
그는 고행을 포기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나서 보리수 아래 고요히 앉아서 선정에 들었다.
선정에 든 싯다르타는 정각(正覺)을 이루고 붓다(부처)가 되었다.
싯다르타의 이 깨달음은 인류세계의 위대한 인본주의 종교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인류의 수많은 종교들이 인간 이외의 어떤 절대자에 귀의하여 믿음을 요구하지만, 싯다르타는
인간을 비롯한 우주 만물의 존재 원리를 깨달아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한 싯다르타는 가장 먼저 이전에 자신과 같이 수행한 다섯 비구를 찾아 가서 첫 가르침을 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두 변(二邊)이 있으니 수행자는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변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붓다의 이 첫 가르침을 불교사에서는 초전법륜이라 하기도 하고 중도 대선언이라 하기도 한다.
모든 인간이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찾으려면 쾌락과 고행이라는 양 극단을 떠난
중도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첫 가르침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때부터 싯다르타는 붓다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붓다는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사성제를 설하였다.
붓다에게서 사성제의 가르침을 듣고, 통찰력과 깨달음, 지혜와 광명을 얻게 된 수행자들은 붓다에게 귀의하게 된다.
붓다의 첫 제자들은 나중에 5비구로 불리는데, 아갸타카운디니야, 아슈와지트, 마하나만, 바드리카, 바슈파 등이었다.
그들은 붓다와 그의 가르침, 즉 불과 법에 귀의한 2귀의자로서 제자가 되었으나, 그 이후의 제자들은 불, 법, 승, 3보에
귀의하는 3귀의자로서 교단의 구성원이 되었다. 점차로 늘어가던 교단의 수행자가 붓다를 포함하여 61명에 이르렀을 때,
붓다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구들아, 떠나라.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세간을 사랑하기 위해,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애정과 안락을 위해,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아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도리에 맞고 언설이 잘 정돈된 법을 설하라.”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청하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고도 세심하게 자신의 지혜를 나누어 주었다.
특히 붓다는 설법할 때마다 다른 이를 위해서 보시하고,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날 것이라는 요지의 가르침으로
인과의 법칙을 강조했다.
2. 교단의 성립과 발전
붓다 당시의 교단은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승가(僧伽)로 유행생활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출가자들은 무소득(無所得)을 기본으로 하는 무소유 생활을 실천하였고, 어떠한 재물이나 가축, 노예 등도 소유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교단의 발전을 바라는 재가자의 보시물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만 갔으며, 붓다에게 귀의하는 자산가들이
기부한 토지와 금전을 토대로 하여 여러 곳에 정사와 사원이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발전과정에서도 교단의 성장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카쉬야파 3형제의 귀의이다. 우루빌바(Uluvilva-) 카쉬야파는 500명의 결발(結髮) 외도(jatㆍila)들을
이끌던 수장이었고, 나디(Nadi) 카쉬야파는 300명의 교도를 이끌던 수장이었으며, 가야(Gaya-) 카쉬야파는
200명의 교도를 이끌던 수장이었는데, 이 세 형제가 나란히 붓다에게 귀의하였다. 그들이 함께 이끌고 온
제자들이 모여 불교교단은 그야말로 대도약을 하게 되었다.
둘째, 빔비사라(Bimbisa-ra) 왕의 외호이다.
붓다의 생존 당시에 마가다국의 왕이었던 빔비사라는 15세에 즉위하여 16세에 불법에 귀의했다고 전한다.
그의 아들 아자타샤투르의 왕위 찬탈로 인해 유폐된 뒤 죽음을 맞았던 빔비사라 왕은 재위 당시에 불교만
후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불교교단에 대해 우호적으로 베풀었던 것은 교단의 발전에 크나큰 힘으로 작용했다.
붓다가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 머물 때, 빔비사라 왕은 12만 명에 이르는 브라만과 장자들과 함께 붓다를
찾아가서 설법을 듣고 나서 귀의했던 일은 매우 유명한 일화다. 그 때 설법을 들었던 12만 명 중에서 11만 명이
법안(法眼)을 얻었고, 1만 명이 붓다에게 귀의했다고 경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셋째, 최초의 승원(僧園), 죽림정사의 설립이다.
라자그리하에 세워진 죽림정사는 그 당시 최강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에 자리함으로써 포교의 본거지로서 큰 역할을 다하였다. 빔비사라 왕이 죽림정사를 세울 때, 그 입지를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선정했다고 전한다.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 가기에 편하며, 이런 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뵙기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고 인적이 드물며, 혼자 지내기에 좋고 좌선하기에 적절한 곳, 바로 그런 곳.’
그 후로 이와 같은 입지가 바로 승원을 세우는 기준이 되었다.
승원은 구조적으로 정사(精舍), 평부옥(平覆屋), 전루(殿樓), 누방(樓房), 굴원(窟院) 등 다양한 양식을 따랐지만,
그 중에서 정사와 굴원이 가장 오랫 동안 사용되었다. 정사는 평지에 벽돌이나 돌로 건립되었고, 굴원은 고원의
암석지대에 인공적인 굴을 뚫어서 만들었다.
현재 남아 있는 굴원과 정사의 흔적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초기교단의 원칙은 유행생활이었지만,
교단의 발전과 더불어서 정주생활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에 정립된 교단의
구성원은 비구와 비구니, 사미와 사미니, 식차마나와 우바새, 우바이 등으로 세분되었다. 초기불교 이래로 불교의
교단은 다양한 구성원 간에도 상호 민주적이며 평등하게 유지되어 왔으며, 이러한 교단 운영법은 붓다 당시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다.
일찍이 붓다는 선언했었다.
“아난다여, 여래에게는 ‘나는 비구 승가를 보살핀다’라든지 ‘비구 승가는 나의 지휘 아래 있다’라는 생각은 없다.”
붓다 당시에도 중앙집권적인 형태로 교단이 운영되지 않았듯이, 후대의 불교교단사에서도 교단 구성원의
자율과 화합을 통해서 유지되었던 것은 당연한 추이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붓다는 5비구의 출가를 계기로 승가(僧伽)를 형성하였고, 이후 여성의 출가를 받아들여 비구니를
포함한 승가공동체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재가 신도들의 시주와 귀의로 우바새, 우바이도 포함된
사부대중(四部大衆) 공동체를 붓다의 교단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교단의 구성원은
흔히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부대중으로 보고 있다.
3. 경전의 결집
붓다의 가르침은 그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었던 제자들에 의해서 구두로 전해졌다.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evamㆍmaya- srutam. 如是我聞).”
이와 같은 서두로 그들은 전법을 시작했다. 본래 붓다는 모든 가르침을 구술로 전달했다.
그의 전 생애 동안 자신이 글로 써서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의 설법을 들었던 수많은 제자와
신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기를 원했으며, 그러한 소망의 결과가 바로 경전으로 남게 된 것이다.
경전편찬은 ‘결집’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결집은 합송(合誦), 합주(合奏), 집회(集會)라고도 한다.
결집의 원어인 상기티(samㆍgI-ti)는 제자들이 한데 모여서 기억하고 있는 가르침을 일제히 읊는 것으로,
이의가 없음을 표시하여 불설(佛說)을 확정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뜻에서 결집은 ‘성전의 편집’을 의미하게 되었다.
요컨대, 경전편찬을 위한 집회가 결집이다. 경전은 바구니에 담아서 보관하던 관습에 따라 세 종류의 바구니,
즉 삼장(三藏)이라 부른다. 삼장은 경장, 율장, 논장으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삼장의 형식으로 불교경전이
완성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걸렸다.
기본적인 경전은 서기 250년경까지 그 대부분이 완성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불교경전은 크리스트교의
바이블이나 이슬람교의 코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양이 방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제1차 결집
가장 최초의 결집은 붓다의 열반 직후에 이루어졌다. 붓다가 입멸하자 몇 가지 우려가 있었다.
즉 그의 가르침이 차츰 없어진다든가, 잘못 전해진다든가, 이론(異論)이 제기된다든가 하는 등의 일이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또 교단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불제자들이 모여 각기 구전으로 기억하고 있던
교법을 함께 합창하여 서로 확인하고 가르침을 정리할 회의, 즉 결집이 이루어졌다.
제1차 결집은 라자그리하에서 500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경장과 율장을 편찬하였다.
그래서 ‘500결집’이라고도 한다.
1차 결집은 라자그리하의 교외에 있던 칠엽굴(七葉窟)에서 이루어졌는데, 마하카쉬야파(maha-ka-syapa)의
주도 아래 아난다(a-nanda)가 경장을 암송하였고, 우팔리(Upa-li)가 율장을 암송하였다고 전한다.
이 때 편찬된 내용은 후대 불교사의 지침이 되는 근본 경전으로서 가장 중요시되었다.
경전을 보면, 붓다는 그 당시 귀족층이 사용하던 고급언어였던 산스크리트어뿐 아니라 베다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민중을 상대로 한 교화 설법에서는 주로 속어였던 마가다어를
사용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최초의 경전 결집, 즉 제1차 결집 당시에 사용된 언어 또한 마가다어라는 것이
합리적인 귀결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근거는 현재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초기 경전 언어로서 기록이 남아 있는
팔리(pa-li)어 속에 몇몇 잔형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제2차 결집
기원전 383년경 제2차 결집이 이루어졌다. 바이샬리(Vaisa-lI-)결집 또는 700결집이라고도 불린다.
붓다의 입멸 후 100년경, 아난다의 제자였던 야사(Yasa, 耶舍) 비구는 바이샬리의 브리지(vr톔i)족 출신의 비구들이
계율에 위반되는 10가지를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700명의 비구들을 바이샬리에 소집하여
그러한 10가지에 대해 심의했다. 그 때 회의에서는 10가지의 사안, 즉 ‘10사(事)’가 옳지 않은 일이고, 그
것을 행하는 자는 이단이라고 간주하였다. 하지만 팔리 율장에서는 10사를 심의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스리랑카의 왕통사(王統史)인 『디파방사(DI-pavam톝a)』와 『마하방사(Maha-vam톝a)』에는 이 심의 다음에
성전의 결집을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 때의 일을 제2차 결집이라고 부른다.
그 당시에 논의되었던 10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금을 뿔 속에 담아서 지니는 것.
둘째, 정오가 지난 뒤 공양하는 것.
셋째, 한 마을에서 탁발을 한 뒤 다른 동네에서 탁발하는 것.
넷째, 한 구역에서 포살을 두 곳 이상 나누어서 하는 것.
다섯째, 어떤 일을 하고 나서 나중에 허가를 받는 것.
여섯째, 선사(先師)들의 행적을 관행으로 삼아 따르는 것.
일곱째, 공양 후에 발효된 우유를 마시는 것.
여덟째, 발효된 과즙을 마시는 것.
아홉째, 앉거나 눕는 자리 깔개를 사용하는 것.
열째, 금이나 은을 시주 받는 것.
이상의 열 가지가 모두 정법(淨法)으로서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던 이들에 대해서, 결집을 통해서
모두 비법(非法)이라고 결의하였던 것이다. 다만 아난다의 직제자로서, 그 당시 법랍 120년에 이르던 최고의
장로 사르바카마는 9가지는 비법(非法)이지만, ‘선사(先師)들의 행적을 관행으로 삼아 따르는 것’은 경우에 따라
인정할 수도 있다고 판정하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그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분분하였던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더욱 첨예한 대립을 낳았고, 분파를 야기시키는 큰 요인으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제1차 결집은 단순히 경과 율의 결집이었으나, 제2차 결집은 율에 대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상 차이가 난다.
제3차 결집
아쇼카 왕은 인도대륙 전역을 하나의 통치권 아래 지배했던 최초의 제왕으로 유명하다.
그는 강력한 무력 통치권을 기반으로 하여 인도대륙을 하나의 정치적 통합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피비린내 나는 정복전쟁을 거듭하던 아쇼카 왕은 기원전 260년경 불교도로 전향했다고 알려져 있다.
불교에 귀의하기 전에 아쇼카 왕은 부왕이었던 빈두사라 왕이 그랬듯이, 아지비카 교도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불교에 귀의한 뒤, 불살생의 원리를 실천하고 공평무사한 정책을 통해서 만인의 인심을 얻은 아쇼카왕이
불교를 위해 공헌한 일들은 지대하다. 수많은 불교승원과 기념탑을 세웠고, 불교도를 위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몸소 붓다의 유적을 찾아가서 참배하였다. 여러 왕비들이 낳은 자녀들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는데, 그들을 곳곳에
전법사로 파견하였다.
이와 같이 불법을 널리 펴던 아쇼카 왕이 즉위 17년째 되던 해,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Pa-tㆍaliputra, 華氏城)에서 목갈리풋타팃사(Moggaliputtatissa)의 주도로
1,000명의 비구를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이를 1,000결집, 화씨성 결집, 1,000집법(集法) 등으로 부른다.
제3차 결집에서는 인도 자체와 스리랑카 등의 외국에 정통 교의를 전하는 성전을 편찬했으며, 논서들을
논장(論藏)으로 집성함으로써 비로소 3장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3장을 편찬하는 데 총 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특히 목갈리풋타팃사는 별도로 『카타밧투(Katha-vatthu, 論事)』를 지어서 그릇된 견해를 논박했다.
이러한 사실은 남전(南傳)의 율장(律藏)이나 『마하방사』와 『디파방사』 등에 기록되어 있다.
제4차 결집
서북 인도를 지배하던 카니슈카 왕(서기 73~103년 재위) 시대에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을 편집했던 일을
가리켜 제4차 결집이라 말한다. 현장(玄斡) 스님이 번역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발(跋)」에 의하면,
제4차 결집은 불멸 400년경에 카슈미르(KasmI-ra)의 환림사(環林寺)에서 이루어졌다.
파르슈와(Pa-rsva) 존자가 카니슈카 왕에게 건의하여 후원을 받아내서 3장에 정통한 500명의 비구들을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그 때 집대성된 것이 총 30만 송(頌) 660만 언(言)에 달하는 대주석서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毗達磨大毘婆沙論)』이었다.
부파불교
1. 교단의 분열
붓다의 입멸 이후 점차로 발전을 거듭하였던 불교교단은 기원전 3세기경에 이르러 마침내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본래 교단의 각 구성원이 평등하게 책임을 지고 서로 존경하는 일미화합(一味和合)을 이상으로 하는 교단이었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차츰 대립과 분열의 모습이 나타났다.
근본 분열
교단의 분열에 대한 전승 내용은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에 차이가 있다.
남전의 문헌으로는 『디파방사(DI-pavam톝a)』와 『마하방사(Maha-vam톝a)』가 있으며, 북전의 기록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이다.
인도의 학승 바수미트라(Vasumitra, 서기 1~2세기경)가 저술한 『이부종륜론』의 서두에서는 붓다가 입멸한 지
100여 년이 흐르자 여러 부파들이 일어나 이롭지 못한 주장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키게 되자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논서를 저술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붓다가 열반한 후 100여 년이 지난 뒤 아쇼카 왕이 재위에 있을 당시에 처음으로 교단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 첫 번째 분파의 원인은 마하데바(Maha-deva)가 주장했던 다섯 가지에 있었다.
그 당시 교단은 용상중(龍象衆), 변비중(邊鄙衆), 다문중(多聞衆), 대덕중(大德衆) 등 네 부류로 나뉘어져 논쟁을 거듭하였다.
그 결과 교단은 대중부(大衆部)와 상좌부(上座部)라는 두 파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를 가리켜 첫 번째 교단의 분열이라는 의미에서 근본 분열이라고 한다.
지말(支末) 분열
한번 분열된 교단에서는 논쟁점이 있을 때마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끼리 따로 갈라져 나와 별개의 부파를 이루었다.
상좌부와 대중부 가운데서 먼저 분열되기 시작한 쪽은 대중부였다고 전한다.
상좌부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졌던 대중부는 근본 분열 이후로 100년 사이에 총 4회의 분열을 거듭했다.
결국 8개 부파가 성립되었는데, 그 근본이었던 대중부와 지말 8부파를 합하여 ‘본말 9부파’라고 한다.
상좌부는 붓다의 입멸 후 300년이 지났을 때,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설산부(雪山部) 둘로 나누어진 것을
시작으로 하여, 100년 동안에 7회의 분열을 거듭하여 총 11개의 지말 부파로 나뉘어졌다.
그런데 대중부가 지말 분열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근본 부파로서의 명맥을 유지했던 것과는 달리, 상좌부의
지위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사료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근본과 지말을 합하여 부르는 숫자에도 차이가 나며,
근본 상좌부의 맥을 정하는 데에도 설이 나뉘고 있다. 대체로 설산부를 근본 상좌부와 동일시하고, ‘본말 11부파’라고 헤아린다.
그리하여 초기 교단은 모두 20개의 부파로 나뉘어졌으나, 그 밖에도 수많은 분파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남전과
북전의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2. 부파 간의 논쟁점과 공과
과연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였던 교단 내의 논쟁점들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먼저 근본 분열을 초래했던 논쟁점, 즉 마하데바의 다섯 가지 주장들은 무엇이었는가?
첫째, 아르하트(arhat, 아라한)는 성욕을 일으킬 수 있다.
둘째, 아르하트는 무지(無知)가 남아 있다.
셋째, 아르하트는 의심이 남아 있다.
넷째, 아르하트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다섯째, 불도(佛道), 즉 길은 소리로써 얻어진다.
마하데바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가 붓다의 참된 가르침이라 주장하였으며, 그에 대한 논박과
논쟁으로 인해서 마침내 교단은 두 파로 나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의 이면에는 사회적 변화가 또 다른 이유로서 작용하였다고 본다.
교단이 지역적으로 확장되고 생활환경이나 사회적 상황들이 변화되면서 고정적인 율장의 내용만으로는
모두 대처할 수 없게 되자 교단 내부에서도 진보와 보수 사이에 의견 충돌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승단 내에서 벌어졌던 온갖 논쟁의 전말을 상세히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부파 분열 당시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문헌들에서 전하는 각 부파 간의 논쟁점들은
그 당시 교단의 최대 관심사가 바로 불법(佛法)에 대한 엄밀한 해석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각 부파 간의 분열은 상호간의 차이를 드러낼지언정 각자가 이해하는 대로 올바른 붓다의 가르침을 계승하고자 노력했던 결과였다.
각 부파의 논쟁 내용은 예컨대 취(聚), 심(心), 삼매(三昧), 천(天)의 4대(大) 등을 비롯하여, 업과 과보의 문제라든지,
출세간법의 문제, 무위법(無爲法)의 인정 여부, 과거와 미래의 실체성이라든지 사물의 실재성 여부, 그리고
깨달음의 문제 등을 비롯한 교리상의 쟁점들을 비롯하여 불탑신앙의 문제 등이다.
사실 『이부종륜론』 등의 문헌에서 전하는 각 부파의 주장점들은 언뜻 보기에 별반 차이가 없는 듯도 하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고 논쟁하였던 교리상의 논점들은 대승불교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대승에 속하는 경전들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수많은 부파가 갈리는 논쟁점들이 보다 더 진전되고
체계화된 형태로 승화된 것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부파불교시대에 이어서 발달한 대승불교의 씨앗이 무엇이었던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명료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원류가 부파시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니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중부의 교리가 바로 대승불교의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유부, 경량부, 화지부,
법장부 등 상좌부의 교리도 대승불교 속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사상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른 사상적 조류와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물줄기를 이루어 가고,
또한 다시 갈리거나, 다시 또 합쳐지면서, 다른 또 하나의 대해(大海)를 이룬다. 불교라는 막막한 대해 속에서
여러 부파의 논쟁과 분파는 작은 개울이거나 아니면 강물이나 또는 파도 거품과 같은 것이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도 엄밀하고 치열하다 못해 번쇄하기 짝이 없다는 혹평까지 들어야만 했던 부파 논사들의
쟁론들이 ‘철학적 불교’라는 튼튼한 주춧돌을 놓고 ‘종교적 불교’라는 튼실한 기둥을 세우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부파 논사들의 불교’가 흔히 지칭하듯이 ‘소승(小乘)’, 즉 작은 수레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인식을 재고(再考)하는 것이 부파불교시대의 논쟁사를 올바로 보는 첩경일지도 모른다. 대승불교시대는
부파불교시대라는 알껍데기를 깨고 나온 거대한 붕새와 같기 때문이다.
대승불교
1. 대승불교의 원류
대승(大乘, maha-ya-na)이란, 깨달음을 향해 가는 커다란 탈것, 혹은 운반하는 방도를 의미하는데,
그런 뜻을 품고서 노력하면 출가와 재가를 불문하고 붓다와 동일한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가르치는데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대승불교란 일반적으로 기원전 1세기경부터 발흥한 새로운 불교운동을 가리킨다.
대승경전을 신봉하고 그 교의에 따라 실천하는 불교수행의 한 체계로서, 현재 남방 불교권을 제외한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의 한역(漢譯) 문화권과 티베트계 문화권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발원과 시기, 그 직접적인 동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료한 정설이 없다.
수많은 설명 중 어느 것도 만족할 만한 것은 없다고 할 만큼 명확하지 않다.
일설에서는 인도에서 대승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50년경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아쇼카 왕의 재위 시기에 대승불교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대승불교의 원류에 대한 설명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부파불교의 발전 양상에서 등장하게 된 운동이라는 설로서, 대중부와 경량부 등
여러 부파의 교리 및 활동이 대승불교의 성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둘째로 불탑신앙의 전개와 더불어서 대승불교가 발전한 것이라는 설로서, 붓다의 유골을 모신 불탑을
중심으로 모여서 붓다의 덕을 찬양하고, 그 힘으로 복과 공덕을 쌓기를 기원하고 있었던 재가 신자를
모체로 하며, 그들에게 붓다의 전기를 이야기하고 가르침을 베풀어 주는 법사들을 지도자로 하여 발흥했다고 한다.
셋째로 대승경전을 비롯한 불전(佛典)문학의 등장과 함께 한다는 설이다.
새로운 운동이 주장하는 바를 널리 퍼뜨리는 법사들은 붓다의 덕을 찬탄하는 새로운 경전을 작성했는데, 그것이 대승경전이다.
초기의 대승경전은 불탑숭배를 설하고, 붓다 앞에서의 참회와 예배를 권하며, 보시 등의 이타행을 설하고 있다.
그러나 운동의 전개에 따라 경전 그 자체의 공덕을 고양하고 그에 대한 숭배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대승경전이 대승불교 그 자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대승불교의 독자적인 교리는 비약적으로 발달했으나
교단으로서는 독자적인 율장이 없는 점 등 그 모습을 명확히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이상과 같이 대승불교의 성립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들을 요약하여 말하기를, 인간이 붓다를 믿어 온 역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붓다가 되어 간 역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점은 고타마 붓다 자신이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고 성취했던 것처럼,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와 같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길을 재차
확인하고 실천하는 길을 모색하는 과정의 역사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2. 대승의 사상과 실천
대승불교는 기존의 붓다관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정립하였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을 끌었다.
대승에서는 신앙의 대상인 붓다의 본원(本願)과 정토(淨土)를 설하고 자비를 찬탄하며, 불신론(佛身論)을 그 중심에 두었다.
대승의 불신론은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붓다, 즉 법신(法身)과 중생제도를 위한 붓다의 시현, 즉 색신(色身)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시방삼세(十方三世)에 수많은 붓다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특히 삼신불(三身佛)이라 하여 불신을 3종으로 구분하였는데, 그 내용은 경우에 따라 다양한 조합으로써 설명된다.
1) 자성신(自性身), 수용신(受用身), 변화신(變化身).
2)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
3)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4) 진신(眞身), 보신(報身), 응신(應身).
5) 법신(法身), 지신(智身), 대비신(大悲身).
6) 법신(法身), 응신(應身), 화신(化身).
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삼신불은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3불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보신은 아미타불, 법신은 비로자나불, 화신은 석가모니불을 꼽는다. 하지만
그 외에도 경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다양한 쌍을 이룬 3불상이 봉안되기도 한다.
옛부터 브라마, 비슈누, 쉬바라는 3신(神)을 숭배하는 인도의 신앙적 전통의 영향으로 불교에서도
3신불을 숭배하는 신앙이 생겨났으며,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찰에서도 3신불을 봉안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신앙적 실천의 주체로서의 보살을 강조했다.
보살이란 보디삿트바(bodhisattva)라는 말을 음역한 것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이라는 뜻이다.
보살은 원래 성불하기 이전의 붓다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고 입문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승화시켰다.
여기에는 대승의 구도자에게 붓다를 닮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이 기존의 아라한이라는 이상을 보살로서 대신한 대승에서는 중생 모두가 해탈을 이룰 때까지 스스로
열반에 들기를 거부하고 중생들 속에서 함께 수행하며 그들의 해탈을 위해 진력한다고 강조했다.
대승의 주창자들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는 불성이 있기 때문에, 집착과 아집으로 인해서 가려진 불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부단한 수행을 쌓아야 한다고 설했다.
그들은 보살행(菩薩行)이라는 실천 덕목을 설하였는데, 여러 종류의 파라미타(pa-ramita-)는 말
그대로 피안에 도달하기 위해서 닦아야 할 수행법들을 총칭한다.
파라미타는 정(定)과 혜(慧)의 2파라미타를 비롯하여, 4파라미타, 6파라미타, 7파라미타, 10파라미타,
32파라미타 등 수없이 많은 조목들이 대승경전에 소개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6파라미타이다.
6파라미타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등으로서 불도수행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들이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6파라미타는 모든 부처를 낳은 어머니이며 모든 부처가
의지하는 보배라고 말할 만큼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한다.
10파라미타는 6파라미타에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 등 네 가지를 더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파라미타 사상에 근거한 가장 이상적인 대보살들로서 문수(文殊), 보현(普賢), 관음(觀音) 등의
여러 보살들이 대승경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파라미타를 실천하는 보살들의 수행에는 그 정도에 따른 단계가 있다는 사상도 정립되었는데, 바로 10지(地) 등의 보살 계위이다.
10지는 보살이 수행하여 성불하기까지 총 52단계의 수행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제41부터 제50단계까지를 10지라 한다.
10지는 차례대로 초지(初地), 2지, 3지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제1 환희지(歡喜地), 제2 이구지(離垢地), 제3 명지(明地),
제4 염지(焰地), 제5 난승지(難勝地), 제6 현전지(現前地), 제7 원행지(遠行地), 제8 부동지(不動地), 제9 선혜지(善慧地),
제10 법운지(法雲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10지에 이르러서야 보살은 비로소 불성(佛性)을 보며 중생을 구제하고 지혜를 갖추기 때문에, 10성(聖)이라는 성인의
칭호를 받는다. 이러한 10지 보살사상은 파라미타의 덕목들과 함께 대승불교를 발전시키는 핵심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대승불교의 실천이 기반이 되었던 진리관은 생사 즉 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설하는 공성(空性) 사상이 근간을 이룬다.
보살은 무주처(無住處) 열반을 이상으로 하여 이타행을 실천하며, 미혹과 깨달음의 동일한 근거로서의 마음에
대해서도 공성에 의해 본질이 해명되어, 여래장(如來藏)이라든가 유심(唯心) 또는 유식(唯識)의 이론을 낳았다.
또한 붓다의 깨달음을 원점으로 하여 제법(諸法)의 연기가 곧 진여(眞如)이며 법계(法界)라고 하며, 그 특색을 공(空)
내지 공성(空性)이라 파악하여, 반야바라밀에 의해 이것을 체득하는 것을 깨달음으로 삼는다.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한 대승불교에서는 그 이전 교단의 가르침이 스스로 아라한이 되어 열반하는 것을 최상 목표로
했던 것은 다른 중생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편협한 가르침이라는 뜻에서 소승(小乘, hI-naya-na)이라고 폄칭하였다.
3. 대승경전
대승불교의 발전과정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붓다의 가르침을 재정비하여 다양한 경전들을 성립시키고 그에 대한 수많은
논서를 편찬했다는 점이다. 대승을 신봉하는 이들은 이러한 경전과 논서를 중심으로 사상을 정립하고 흐름을 확대해 나갔다.
대승경전은 거의 7, 8세기경까지 오랜 시일에 걸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그 수를 헤아리기도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현재 전해지는 한역(漢譯) 경전을 중심으로 볼 때 약 1,200부에 이르며, 티베트어 번역본으로는
약 1,900부에 이를 만큼 방대하다. 대부분의 대승경전은 프라크리트어를 포함한 광의의 산스크리트어로
이루어졌지만, 그 중 대다수의 경전이 현재는 전하지 않으며, 그 일부만 원전이 전해지고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형성된 다양한 대승경전을 시대적으로 구분할 때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한다.
초기 : 1세기경까지로서, 용수(龍樹) 이전에 해당한다.
중기 : 용수 이후 세친(世親)까지, 2~5세기경까지를 말한다.
후기 : 세친 이후, 6세기부터 밀교, 즉 금강승의 성립기인 7세기경까지를 말한다.
이러한 세 단계의 발전을 거치면서 수많은 경전과 논서를 통해서 대승의 사상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대승의 경전들을 내용면에서 구분해 보면, 반야부, 법화부, 화엄부, 보적부, 열반부, 대집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주요 내용으로는 붓다와 보살의 지혜를 찬탄하고, 삼매의 수행과 가치를 강조하며, 대보살과 불제자, 재가 불자들의
실천수행, 법공(法空)과 법신진여사상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전의 편찬에서 그치지 않고, 논서를 통해서
그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펼침으로써 각자의 논지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승경전이 아함부 경전과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아함부에서 고타마 붓다의 권위를 빌어서
경전을 서술했던 것과는 달리, 법사들 스스로 대승의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치중했으며 붓다의 권위에만
전적으로 기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대승이 부파불교 또는 원시불교와는 독립적으로 그 사상을 정립하게
된 계기를 만든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4. 대승교단의 성쇠
대승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주인공들은 바로 설법사(說法師)들이었다.
대승의 시대에 법사들은 스스로 보살도를 수행하면서 대중을 향해 법을 설하고, 대중들은 그 법문을 베껴 쓰고
외우며 널리 펴는 것이 공덕을 쌓는 길이었다. 법사들은 일반적으로 보살이라 불렸으며, 그들은 정법의 수호자이자
교법의 정통적인 전수자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1세기경부터 불교 전법사들은 힌두쿠쉬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포교하기 시작했지만, 인도불교교단은
굽타 왕조의 성립 이후에는 차츰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굽타 왕조는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고 사회질서의 토대가 되는 브라만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그에 따라 브라만교, 즉 힌두교는 급속히 세력을 펼쳐 갔으며, 동시에 불교의 사회적 기반은 약화되었다.
불교교단에서는 중관, 유식학파와 불교논리학파 등의 학문적 성과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힌두교가 중심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힌두교의 지배적 위치는 불교를 비롯한 다른 인도 종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로 인하여
대승불교교단도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더구나 대승을 따르던 재가자들도 인도 일반의 민간신앙과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다라니와 무드라, 만다라 등을 신앙방식으로 채용하여 여러 의식을 통해서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상은 인도불교의 또 다른 발전 양상, 즉 밀교를 성립시키기에 이른다.
인도불교가 국경을 넘어서 드넓게 포교되었던 것과 반비례하여 인도 내에서는 그 세력이 약화되었고
내용면에서도 변용될 수밖에 없었던 연유에 대해서 갖가지 요인들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첫째로 꼽는 이유는 대승의 교의가 발전을 거듭할수록 보살 수행보다는 불법(佛法)에 대한
논의 자체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재가자 중심에서 다시 출가자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또한 전문화됨으로써 사실상 민중의 생활과 괴리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인도국경을 넘어 전파된 대승의 교의는 각 나라의 사상과 결합하여 발전적 수용을 가져왔으나,
정작 인도에서는 소승불교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승불교 또한 쇠멸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밀교
1. 성립 배경
마우리야 왕조 때 아쇼카 왕의 두터운 보호를 받고 성장하기 시작했던 불교교단은 인도 내외로 확장되기에 이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점차 인도의 토착종교와 힌두교 등과 혼합되어 새로운 경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밀교이다.
마우리야 왕조에 버금 가는 통일국가를 이루었던 굽타 왕조 때부터 지배층의 종교로서 확고하게 자리 매김한
힌두교는 사회 전반의 기본 질서로서 그 골격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8세기 중엽에 파탈리푸트라를 수도로 하여
성립한 팔라 왕조의 여러 왕들은 불교를 보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당시 동인도와 벵갈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융성했던 불교는 기존의 대승불교와는 차별화된 교의 내용으로 보다 더 힌두교에 근접한 탄트라불교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와 같이 힌두교와 습합된 탄트라 불교를 대승과 구별하여 금강승이라 하였다.
금강승, 즉 밀교는 인도불교의 최종 발전 단계로서 대승불교의 인도적 변용이라 볼 수 있으나, 밀교교단에서는
자신들의 교의야말로 금강처럼 견고하고 유일 최상의 진리라는 뜻에서 그와 같이 명명한 것이라 한다.
밀교의 교의는 힌두교의 의례와 교의 내용을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채용함으로써 불교 고유의 특징을 상실함과
동시에 힌두교에 동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지만 밀교의 성립 계기를 단순히 힌두교와의 습합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이미 대승경전에서 강조되기 시작하였던 다라니 등의 주력(呪力)은 밀교의 뿌리로서 인정되며, 더 나아가 인도사상의
일반적 토양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밀교의 배경으로서 거론되는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주인 고타마 붓다의 역사적 실체가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부파시대와 대승불교를 거치면서 성립된 다불(多佛)사상, 삼신불설 등은 고타마 붓다를 역사적인 인물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불보살들의 등장함으로써 인도 전래의 신들에게 접근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급기야 힌두교의 만신전 속으로
고타마 붓다가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둘째, 출가의식을 거친 자들도 다시 재가자와 같은 위치로 돌아갈 만큼 교단의 기강이 해이해졌으며,
이는 교단의 지적 활동을 쇠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셋째, 밀교교단에서 출가비구는 주술사(siddha) 내지 마법사(vajra-ca-rya)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힌두교의 쉬바교 또는 비슈누교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탄트라(tantra)는 ‘규정하다, 집행하다, 유지하다, 부양하다’라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 ‘탄트리(tantrㆍ)’에서
파생된 말로서, ‘의식(儀式), 의례, 원칙, 밀교, 경사(經憲), 자손, 가족, 의류, 주문(呪文), 약(藥), 통치 방법, 군대’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인도에서는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나 자이나교 등에서도 밀교적인 색채, 즉 비의적(秘儀的)이고
의례적인 경향이 강한 교의가 담겨 있는 문헌을 가리켜 탄트라로 부른다.
이와 같이 밀교가 발전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였던 곳은 마가다지역의 사원들이었는데 8세기경에 건립되어
융성하다가 13세기 초엽에 무슬림에 의해 파괴되어 해체되고 말았다. 그 때까지는 인도에 명목상이나마 불교교단이
존속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이후 민중의 불교신앙은 사실상 힌두교와 전혀 구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힌두교와 습합된 불교는 현재 네팔에 남아 있다.
네팔에서는 불교가 힌두교의 한 종파에 불과하다고 할 만큼 양자의 구별은 쉽지 않을 정도이다.
2. 교의와 수행법
일반적으로 대중을 향해 널리 개방되어 있으며 세계관 내지 종교적 이상에 도달하는 방법을 명료한 언어로 설하는
통상의 불교를 현교(顯敎)라고 하는 반면에, 비공개적인 교의와 의례를 사자상승(師資相承)에 의해 전수하는
비밀불교를 밀교라고 구분한다.
이러한 특성에 비추어 볼 때, 밀교의 범위를 명확히 구분짓기란 쉽지 않다. 다만 통상적 구분에 따르자면,
그 범위는 ‘탄트라’라고 이름하는 문헌을 중심으로 하여 그에 따라 의례를 행하는 신앙집단을 총칭한다.
현존하는 불교의 문헌 중에서 ‘탄트라’라는 명칭을 지닌 최초의 것으로는 『초회금강정경(初會金剛頂經)』,
일명 일체여래진실섭경(一切如來眞實攝經)이라 불리는 문헌 중의 본분(本分)에 대한 부록에 해당하는 교리분이다.
이 경전에서는 일반적인 구성이라 할 수 있는 ‘서분, 본분, 유통분’이라는 수미일관된 원전 형식이 완비되어 있지
않으며, 개개의 교의 또는 실천, 행법 등에 대한 비교적 짧은 문단이 각각 ‘탄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밀교교단 내부에서는 7세기경에 성립되어 밀교의 2대 경전으로 꼽히는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의
경우와 같이 문헌 명칭 상으로는 수트라를 채용함으로써 현교의 경전처럼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명칭상의 탄트라라는
말에 국한하기보다는 그 내용에 따라 밀교 경전과 범위가 정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밀교의 주요 교의는 대일 여래, 즉 대비로자나불(大毘盧遮那佛)을 중심으로 하여 붓다의 대비(大悲)와 지혜를 상징하는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라는 양계(兩界) 만다라를 통해서, 불성을 지닌 중생이 성불하기 위한 과정과 의례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성불하기 위해서는 붓다의 법신(法身)과 한 몸이 되는 요가, 즉 유가(瑜伽)를 중요시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비밀집회 탄트라』에서 상세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초기 밀교는 흔히 잡밀(雜密)이라 하여 다양하고 잡다한 방식의 의례가 혼합되어 있는 상태였으나, 점차로 교의가
정립되어 순밀(純密)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러한 밀교의 발달 과정은 일반적으로 다음 4단계로 정리한다.
첫째, 소작(所作) 탄트라(kriya--tantra) 단계로서 잡밀경전들이 해당한다.
둘째, 행(行) 탄트라(carya--tantra) 단계로서 순밀을 형성하는 양부(兩部) 대경(大經) 중에서 『대일경』 및
대일경 계통의 경전들이 해당한다.
셋째, 유가(瑜伽) 탄트라(yoga-tantra) 단계로서 『금강정경』 및 금강정경 계통의 경전들이 해당한다.
넷째, 무상유가(無上瑜伽) 탄트라(anuttarayoga-tantra) 단계로서 예외적인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 널리
전승된 적이 없으며, 다만 티베트에서 성행했다. 이는 다시 방편(方便) 부(父) 탄트라, 반야(般若) 모(母)
탄트라, 불이(不二) 탄트라 등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밀교의 교의에 따른 수행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삼밀(三密) 수행법이다.
이는 법신불인 대일 여래가 설하는 세 가지의 비밀스런 법문(法門)으로서 불교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꼽는
세 가지 업, 즉 신(身), 구(口), 의(意)라는 세 가지 통로로써 짓게 되는 업을 기반으로 하여 수행을 쌓음으로써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밀수행법은 밀교 전반에 걸쳐서 강조되는 행법으로서, 7세기경에 인도에서
정립되어 점차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요컨대 삼밀수행이란 입으로는 진언을 암송하고, 손으로는 다양한 수인(手印, mudra-)을 짓고, 마음으로는
불보살의 도상(圖像)을 염상(念想)하는 수행법을 말하는데, 이를 각각 구밀(口密), 신밀(身密), 의밀(意密)이라 한다.
밀교에서는 이와 같은 삼밀을 동시에 수행하라고 권장하였다.
그리고 밀교에서는 세속적인 무명(無明)과 초월적인 명(明)의 이원성을 극복하여 해소시킴으로써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이상을 추구하였다. 더 나아가 가장 세속적인 성적 합일을 초월적인 깨달음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던 밀교의 의도는 종교적인 목적과 세속적인 소망을 동시에 달성하는 데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불교 자체의 쇠멸을 초래하고 말았다.
인도불교의 쇠멸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원인에 대해서는 갖가지 학설들이 제시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라다크리슈난(Sarvepalli Radhakrishnan, 1888~1975년)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되는 근본 원인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비슈누교, 쉬바교, 탄트라 신앙 등과 같은 힌두교의 여러 종파들과 불교가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원인으로서는 불교교단 자체의 쇠진, 왕족을 비롯한 정치적 지배계층의 후원이 감소한 것, 힌두교도의 박해, 이슬람교도의 침입, 교단 내부의 타락과 부패, 분파의 분열로 인한 교단의 쇠미, 재가 신도를 충분히 양성하지 못한 점 등이다.
그 중에서도 첫째로 꼽히는 원인은 이슬람 세력의 인도 침공이다. 10세기 초엽에 터키 무슬림이 인도로 침입하기 시작한
이래로 이슬람교도들이 불교사원들을 파괴했던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신앙에 의하면 사원의
불상들은 한갓 우상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교도들이 불교를 박해하였고, 그들이 인도불교의 조종(弔鐘)을 울린 주도 세력이었던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슬람의 공격에 대해서 불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로서 불교가 금욕적이며 비폭력적인
종교였다는 점을 꼽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도 땅에서 불교가 쇠퇴한 이유는 불교 내부에서 찾는 것이 보다 큰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먼저, 초기 불교가 힌두교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제사의식을 철저히 거부했다는 점이다.
붓다는 전법(傳法)의 초기부터 열반을 성취하는 데는 어떠한 의식이나 제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그러한 가르침은 부파시대까지만 해도 교단 내부에서 행해지는 최소한의 의식 외에 특별한 제의를 행하지
않음으로써 잘 지켜져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승을 거쳐서 밀교에 이르면서 불교에서도 의식은 매우
중시되었고, 힌두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양상을 띠고 말았다.
또한 초기불교에서 부정되었던 유신론적 신앙은 점차로 퇴색되고 각종의 신격들이 불교신앙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더구나 대승의 보살신앙과 다불(多佛)사상은 자력신앙을 중시하던 불교를 타력신앙으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낳았다.
붓다가 최후의 교설에서까지 오로지 강조했던 것은 각자 스스로에게 의지하여 자신을 구원하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구원의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구원자였던 붓다는, 세월의 변용을 거치면서 붓다 그 자신만이
중생을 구원해 주는 최상의 구원자로 등극하고 말았다.
불교는 그 최초에 그러했듯이 항상 민중의 관심과 더불어 성장 발전해 왔다.
물론 상인층과 지배계급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성장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불교교단과 교의의 핵심은
항상 민중의 마음을 읽는 데 있었다. 중생의 고통에서 눈 돌리지 않고 함께 아파하며 그 고통을 위로하고
없애기 위한 승단의 노력이 퇴색되어 갈수록 민중의 마음도 불교에서 멀어져 갔던 것이다.
현대 인도불교
1. 신불교 운동
인도에서 다시 불교가 부흥한 것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신불교 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신불교 운동을 주창했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Dr. 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년)는 마하라슈트라 주의
암바바데(Ambavade)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에 해당하는 마하르(Mahar) 카스트 출신이었다.
마하르 카스트란 거리 청소나 소각 등을 담당하던 소위 ‘불가촉 천민’에 속하는 집단을 말한다.
힌두 사회에서, 불가촉 천민은 다만 탄생함으로써 존재로 인정될 뿐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상층의 힌두계급과는
간접적으로도 접촉할 수 없을 만큼 열등한 신분을 지닌 집단이었다. 실제로 상층계급은 불가촉 천민의 그림자조차
닿기를 꺼려하는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하지만 암베드카르는 정통적인 불교의 교리에 따라서 사회적인 신분차별은
부당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암베드카르가 1956년 10월 14일에 마하라슈트라 주의 나그푸르 시에서 불교에 귀의하는 개종식을 주도했던
첫째 동기도 바로 불교의 인간평등사상에 있었다. 그 당시 집단 개종식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80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 대부분은 하층계급에 속했다. 그 중 50만 명 정도가 불교로 개종했다고 전하는데,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개종했던 것은 유례에 없는 일로서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암베드카르는 개종식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22가지 서약을 선포하였다.
1) 나는 브라만, 비슈누, 마하데바의 신을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
2) 나는 라마와 크리슈나의 신을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
3) 나는 가우리, 가나파티, 그 외 힌두교의 여러 남신, 여신을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
4) ‘신은 화신으로 나타난다’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5) ‘붓다가 비슈누의 화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전승은 오류이다.
6) 나는 조령제(祖靈祭)를 행하지 않는다.
7) 나는 불교에 반하는 어떠한 말과 행위도 하지 않는다.
8) 나는 어떤 의식도 브라만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
9) 나는 전 인류는 평등하다는 주장을 인정한다.
10) 나는 평등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11) 나는 8정도(正道)를 준수한다.
12) 나는 10바라밀을 준수한다.
13) 나는 일체 중생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불살생을 준수한다.
14)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15) 나는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
16) 나는 삿된 음행을 범하지 않는다.
17)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18) 나는 불교의 지혜, 지계, 삼매에 따라 생활하고자 노력한다.
19) 나는 인간을 불평등하게 취급하는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를 받아들인다.
20) 불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21) 나는 이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한다.
22) 나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신성하게 맹세한다.
이와 같은 서약을 외친 암베드카르가 “나와 함께 불교로 귀의할 사람은 일어서시오”라고 말하자
회의장의 참석자 전원이 일어나서 서약을 반복하고 개종하였다고 전한다.
신불교 운동을 주도했던 암베드카르의 궁극적 목적은 불가촉 천민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향유하는 데 있었다.
슈드라의 신분이나 여성으로서는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고 규정하는 힌두교의 불평등을 비판하고, 불교의
평등주의를 고양시킨 암베드카르의 주창은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서 개종한 하층민들의 불교를 지칭하는 말로서 신불교(Neo-Buddhism)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겼지만,
이는 고타마 붓다의 사상과 다르다는 뜻은 아니었다.
암베드카르는 “현대사회에서 수용할 만한 종교는 오직 불교뿐이다. 만약 현대사회가 불교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다른 어떠한 종교도 붓다의 가르침 이상으로 지적이고 과학적인 현대인의 마음에 파고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개종식을 마친 암베드카르는 행사를 마치자마자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개최되는 세계불교도연맹의 개회식에 참석하여
연설하고 나서, 불교 유적지를 순례한 후 뭄바이로 돌아왔다. 그런데 1956년 12월 6일 아침, 그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타계로 인해 하층민들 사이에서 열렬했던 불교로의 개종이 멈출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오히려 나그푸르, 푸나,
아메다바드, 아그라 등지에서 집단적 개종은 계속되었고, 그의 영향력은 생전보다도 사후에 더 크게 발휘되었다.
현재, 신불교 교도들은 암베드카르의 이름인 빔라오(Bhimrao)를 따서 ‘비맘 샤라남 갓차미(Bhimam saranㆍam gacchami)’라고
귀경게의 목록에 편입시켰다. 불ㆍ법ㆍ승 3보에의 귀의만이 아니라 암베드카르에게도 귀의한다는 4보 귀의로 바뀐 것이다.
인도의 불교도들은 암베드카르가 보살과 같다고 여긴다.
인도불교도의 개종에 큰 역할을 했던 그의 공적을 인정한 결과이다. 현재 마하라슈트라 주를 중심으로
암베드카르의 유업을 잇고 있으며 불교로의 개종은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2. 현대 인도불교의 부흥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는 근년에 들어서 불교신자가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은 불교 자체의 부흥이라기보다는 불교를 통해 천민들의
사회적 지위를 개혁하고자 했던 사회운동이었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인도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불교 개종식을 비롯한 불교집회는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2001년 11월 4일에는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전 인도 불가촉민 연합회’의 의장인 람 라즈(Ram Raj)가
주도하는 집단 개종집회가 열렸다. 이 때 운집했던 100만 명에 달하는 하층민들이 불교로 개종하고자 했으나
그 중 8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경찰의 제지를 받고 집회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집회에서 “우리는 더 이상 힌두의 신들에게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라는
선언이 낭독됨으로써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힌두교도와의 충돌을 우려한 정부 측의 강압적인 대응으로 인하여 개종의식이 순조롭게 성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인도불교청년회’, ‘불교도발전협회’ 등 여러 불교단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집회와 의식, 축제 등을 거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타르프라데쉬 주의 상카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석가족의 후손들이 매년 음력 9월 보름에
개최하는 상카시아불교대축제의 경우는 2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행사로서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서 인도에 불교사원을 세우기 위한 각종 모금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해외 불교도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최근 인도의 불교부흥에는 또 다른 요인이 덧붙여진다. 바로 티베트인들의 유입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티베트지역을 중국이 점령한 뒤 거세지는 박해를 피하고자 티베트인들은 국경을 넘기 시작했으며, 1959년에는
약 1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인도로 피난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로도 이어지고 있는 티베트불교도들의 인도 이주는 사
실상 인도불교의 재확산에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으며,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보다도 훨씬 더 강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실제 현실이라고 본다.
고향에서 추방당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티베트불교의 스승들은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불교사상을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도는 티베트불교의 직접적인 수혜자로서 새로운 인도불교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흔히 인도에서 지속적이고 살아 있는 불교로서의 전통은 끊겼다고는 말해 왔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제 불교의 산실에서 재생하는 기미가 확연하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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