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불교 공부

불교의 이해와 신행 - (2)

by 범여(梵如) 2014. 2. 27.

제 2장 불교의 세계관

 

1. 세계관의 의미

21세기 현대는 정상적인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다.

평범한 상식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하여 문제가 더욱 악화되 는 현상이 일상화되고 있다.

최근에 겪었던 일을 갖고 생각해 보면, 지난번 미국에서 있었던 ‘9.11테러’에 대한 ‘부시’의

대응은 몰상식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방적인 테러전쟁을 동조하고 나선 선진국들의

행태도 상식이 없기 는 매한가지다. 적어도 부시가 일말의 양심과 상식이 있었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테러의 원인을 찾는 일이어야 했다.

 

선진국들도 원인을 찾아 바로 잡아가도록 제안하고, 촉구하고, 협조하는 상식적인 길을 갔어야 마땅했다.

만일 ‘부시’가 테러의 원인을 찾아 바로 잡으려는 상식을 지켰다면 결코 전쟁으로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세계가 공감하고 환영하며,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문제가 다루어졌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부시’는 상식의 길을 무시해 버렸다. 선진국들도 손뼉을 치며 목소리를 함께 했다.

그 결과 가장 비인간 적이고도 야만적인 전쟁으로 나타났다. 전쟁은 무엇을 가져왔는가?

살상과 파괴로 삶을 황폐화시켰다. 분노와 증오 에 불을 지폈다. 테러의 불씨를 온 세계에 퍼뜨렸다.

상식의 부재가 우리 삶을 병들게 하고, 21세기를 야만의 시대 로 후퇴시켰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 모두의 일상이 몰상식에 길들여져 있음이다.

너나없이 건강한 상식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다.

 

21세기 현대사회가 모순과 혼란에 빠지게 되는 원인도 인생의 기본 상식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개개 인의 일상적 삶이 갈등과 대립으로 얼룩지게 되는 까닭도 인생의 기본 상식의 부재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살 이에서 기본 상식으로 확립해야 할 첫째 조건으로 무엇이 있을까?

두말 할 것도 없이 올바른 세계관을 확립하는 일 이다. 분명 세계관은 삶의 방향과 내용을 좌우하는

근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현대를 살고 있는 대다수 우리들은 삶에 대한 기본 상식에 대해 무관심하다.

인생의 기본 상식이어야 할 세계관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시대에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인생의 건강한 상식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인생의 기본 상식이어야 할 세계관의 의미를 상식적으로 음미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인 사전적 정의로 세계관이란 세계(삶)에 대해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세계와 인간의 관계는 물론 삶의 방향과 가치에 대한 올바른 안목의 근간이 바로 세계관인 것이다.

이 말을 요약하면 아마도 세계관이란 ‘세 계 또는 삶에 대한 올바른 방향과 길에 대한 안목과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경험과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삶에 있어서 세계관이 갖는 의미는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인생의 기본 상식으로서 세계관에 대한 깊은 관심 과 고민을 할 때 개인도, 사회도 희망적일 수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세계관의 중요

멀고 긴 여행을 예로 삼아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우리가 먼 여행을 떠나려고 할 때 반드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멋진 여행을 위해서는 여행에 필요한 준비를 얼마나 잘 했느냐가 관건이 된다.

물론 성공적인 여행 이 되도록 하려면 어느 것 한 가지라도 소홀함 없이 치밀하게 준비해야 하는 것은 상식일 터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도 최우선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빠져서 안 되는 필수 조건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사실 여행에 필요한 사항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이미 준비되어 있거나 아니면 조금만 챙기면 되는 것들이다.

특별히 마음 써서 준비해야 할 것은 딱 한 가지이다.

그것은 여행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에 대한 올바른 방향과 위 치 그리고 길에 대한

이해와 지식과 확신이다. 목적지에 대한 방향과 길을 제대로 알지 못할 경우 여행을 위한

온갖 준비와 모든 노력들이 헛수고가 되고 만다. 심혈을 기울여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가고자

했던 목적지로부터 자꾸만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여행의 예를 삶에 직결시켜 보면 여행의 기본 상식인 목적지의 방향과 위치와 길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바로 세계관인 것이다. 세계관은 곧 삶의 방향과 내용 또는 삶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여행의 예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생길에 있어서 세계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불교 는 세계관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허망분별 또는 전도몽상의 소견으로 수행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고

가야할 곳은 동쪽인데 자 꾸 서쪽으로 달려가는 꼴이다. 원효 『발심수행장』

 

이와 같이 불교의 스승들은 허망분별의 소견으로 살아가는 한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여러 경전에서도 전도몽상의 사고방식으로 삶의 문제를 다루는 한, 천지를 진동시키는 변화와 업적을

이룬다 하더라도 여전히 고통과 불행의 악순환을 되풀이 할 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이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허망분별’, ‘전도몽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연기 (緣起)ㆍ무아(無我)의 세계관에 대한 무지와 왜곡된 사상과 정신을 의미한다. 연기ㆍ무아의

세계관에 어긋나는 사 상과 정신으로 삶의 문제를 다루는 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또는 봉사

코끼리 만지는 격이 될 뿐이라는 뜻이다.

 

이제 연기ㆍ무아 세계관의 확립 여부는 불교수행의 첫걸음이면서 동시에 신행활동의 근본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세계[存在]가 연기의 존재임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터득해 가는것을 지혜라고 하고,

연기ㆍ무아의 사상과 정신을 체득하여 살아가는 것을 동체대비행이라고 한다.

연기ㆍ무아의 지혜는 반드시 동체대비행으로 나타 나게 되고 동체대비행은 지혜를 더욱 빛나게 한다.

연기법의 세계관이 아니면 동체대비행(同體大悲行)이 나올 수 없고 동체대비행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이미 올바른 불교 안목이 아니다.

 

불교공부의 옳고 그름의 판단근거는 연기법의 사상과 정신에 있다.

참선, 교학, 율학, 남방불 교, 북방불교, 참여불교, 수행불교 등 모든 것이 연기ㆍ무아사상에

입각할 때 비로소 불교적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 이다. 다시 말해서 연기ㆍ무아의 세계관에

근거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격식의 불교공부도 정법 불교공부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3. 불교의 세계관

불교에서는 세계를 관계의 존재라고 한다.

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세계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기본 세계관은 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그물처럼 이루어져 있는 것이 세계요 삶인 만큼 따로 따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삶의 문제를 나누어 사고하는 것은 불교적으로 옳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세계관이라는 제목으로 문제를 다루는 까닭이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으므로 이해하는 데 도움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실적으 로 불가피하게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언제나 총체적 관계성의 의미로

설명되고 있음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진실로 열의를 기울여 사유하는 성자에게 법의 참된 모습이 밝혀질 때 일체의 모든 의혹 사라졌으니,

연기의 도리를 알았으므로…. 『자설경(自說經)』

 

고요히 명상에 잠긴 수행자에게 진실의 법칙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순간 모든 의혹이 사라졌으니 괴로움의 발생 과 소멸의 원인을 알아낸 까닭이다.

『마하박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 자신의 감흥을 읊은 내용이다.

 

깨달음을 통해 밝혀낸 진리가 연기법임이 분명하게 잘 드러나 있다. 보통 ‘존재의 실상을 깨달았다.

’ 또는 ‘진실의 법칙을 밝혀냈다.’고 한다. 수행을 통해 밝혀낸 ‘존재 의 실상’ 또는 ‘진실의 법칙’이 연기법인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 또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연기법이라고 한다는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영원한 진리라고 했다.

여래의 출현 여부에 관계없이 본래 부터 존재하는 영원한 법칙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이 팔만 사천가지라고 하지만 그 어떤 내용도 연기법을 벗어난 가르침은 없다.

연기법은 불교의 전부이다. 연기법을 벗어나면 그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영원한 법칙으로서의 연기법, 불교의 기본으로서의 연기법, 불교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연기법은 어떤 내용인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잡아함경』

 

일반적으로 연기법의 공식처럼 평가되는 경구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세계)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 총체적 관계에 의해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것을 뜻한다.

 

불교의 핵심인 연기법의 세계관을 가장 깊고 풍부하게 다 루는 경전이 『화엄경』이다.

특히 심오하고 불가사의한 연기법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멋진 비유가

인드라망 즉 제석천 궁전의 그물 비유이다

. 인드라망 비유만큼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연기법의 세계관을 실감나게 잘 드러낸

비유는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를 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제석천 궁전에 투명한 구슬그물(인드라망)이 드리워져 있다.

그물코마다 박힌 투명구슬에는 우주삼라만상의 영상이 찬란하게 투영된다.

삼라만상이 투영된 구슬들은 서로서로 다른 구슬에 투영된다.

이 구슬은 저 구슬에, 저 구슬 은 이 구슬에, 작은 구슬은 큰 구슬에, 큰 구슬은 작은 구슬에 투영된다.

동쪽 구슬은 서쪽 구슬에, 서쪽 구슬은 동쪽 구슬에, 남쪽 구슬은 북쪽 구슬에, 북쪽 구슬은 남쪽 구슬에 투영된다.

너의 구슬은 나의 구슬에, 나의 구슬은 너의 구슬에, 정신의 구슬은 물질의 구슬에, 물질의 구슬은 정신의

구슬에 투영된다. 인간의 구슬은 자연의 구슬에, 자연 의 구슬은 인간의 구슬에, 시간의 구슬은 공간의

구슬에, 공간의 구슬은 시간의 구슬에 투영된다.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들인다.

총체적으로 중중무진하게 투영이 이루어진다. 『화엄경』

 

연기법의 세계관으로 보면 이 세상 어느 것 한 가지도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없다.

시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 정신 과 물질, 중생과 부처, 신과 인간, 너와 나, 과거와 현재, 미래 등

모든 이 중중무진의 관계 속에 성립 전개되고 있다. 영원에서 영원 너머에 이르기까지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총체적 관계 속에 끊임없이 생성변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 는 것이 우주요, 우리들의 삶인 것이다.

 

'♣ 佛 敎 ♣ > 불교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의 이해와 신행 -(4)  (0) 2014.03.28
불교의 이해와 신행 - (3)  (0) 2014.03.07
불교의 이해와 신행 - (1)  (0) 2014.02.17
진언수행  (0) 2014.02.03
간경(看經)수행  (0) 2014.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