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에 귀의 하옵고.
(3월15일:음2월15일)이 열반재일입니다.
부처님은 기원전 624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544년(2556년 전)에 열반에 들었습니다.
45년의 세월을 인도 곳곳으로 맨발로 다니시면서 숱한 사람을 만나 자비의 마음으로 가르침을 펼치셨다.
일찍이 부처님은 석 달 후에 열반에 드신다고 시중을 드는 아난존자에게 예언하셨다.
이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통곡하며 울부짖고 몸부림을 치며, 애통해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야, 슬퍼하지 말라.
내가 이미 사랑하는 것과는 헤어지게 마련임을 말하지 않았더냐. (愛別離苦)
아난다야, 너희들은 자기를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아라.
(自燈明 自歸依).
법을 등불 삼고 법을 의치처로 삼아라.
(法燈明 法歸依)
모든것은 바뀌어 가니 게으름 없이 힘써 정진하라.
(諸行無常 不放逸精進)
대열반경에 유언을 남기고 음 2월15일에 열반에 드셨다.
우리는 이날을 열반재일로 기념하고 있다
부처님은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나가신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이 세상에 계신다. 다만 중생은 미혹의 번뇌로 마음이 가려있기에 보지 못할 따름이다.
“부처님의 출가 정신은 삶을 바르게 강조하는 것
무소유나 청빈보다는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본질 파악하고
새로운 자기를 만드는 용맹심이 출가의 본뜻 아니겠는가”
3월 8일 오늘은 2천6백여 년 전,
부처님이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속세의 삶을 떠났던 출가재일입니다.
오는 3월 15일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날로,
출가.열반절 기간인 일주일 동안
출가에서 열반까지는 깨달음의 여행이며 부처님의 출가를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부처님의 출가.열반을 기리는 기도, 108배 정진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됩니다.
이월 보름은 부처님의 4대 기념일 중에 하나인 열반재일 입니다. 사찰마다 열반재일을 지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초파일은 아주 성대하게 지내시고 또 성도일은 또 그런대로 기념 행사를 하는 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출가일과 열반일은 부처님의 아주 중요한 기념일인데도 불구하고 챙기지 않는 것 같아요.
부처님의 열반재일이라고 해서 다른 보통 사람들의 제삿날처럼 그렇게 생각 할 것은 아니고,
열반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한번 되새겨 보는 그런 날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또 어떤 사찰에서는 출가 일부터 열반 일까지 큰 법회를 성대하게 지내는 경우도 있고,
또 열반재일에 맞추어서 한 일주일간 법회를 하는 그런 경우도 혹 있기는 있습니다.
열반재일에는 보통 부처님의 열반을 중심으로 해서 부처님의 열반에다
초점을 맞추어서 설해진 경전이 소위 열반경 이지요.
열반경은 부처님께서 훌륭한 성자로서 열반에 드시니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 되게 됩니다.
그렇게 뛰어나신 성자께서도 죽는가? 이 육신은 그런 한계일 수 밖에 없는가? 어떤 성자라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 할 수 밖에 없는가?
그런 문제와 또 부처님께서는 이 육신의 열반과 아울러서 법신(法身)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 법신이라고 하는 것이 딱히 무엇이다 라고 이렇게 드러내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런 모든 존재의 본질
그것이 불성(佛性)이 되든지 진여(眞如)가 되든지 아니면 공성(空性)이 되든지 간에, 그 모든 존재의 불생불멸의
실상(實相)을 이야기 하는 그런 내용이 상당히 제자들도 육신의 변화에 그만 집착하게 되고, 그 것으로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그 너머의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너머 육신의 본질에 대한 사실 다시 말해서 법신에 대한 사실은 잘 모르니까
그 이야기가 상당히 길게 이야기가 되어지고 있습니다.
항상 한가? 항상 하지 않는가? 뭐 이런 이야기 인데 말씀 난 김에 육신은 허망하다
그 뜻은 아니고 모습이 허망할 뿐이지요. 육신도 본질은 허망한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다.
단 그 모습을 변화할 뿐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꾸어갈 뿐이지 그 육신도 본질은 영원한 것이다.
이것이 이제 진여 이고 그것이 곧 공성인 것이고 그것이 불생불멸의 어떤 모든 존재의 실상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적인 상식만 보더라도 가벼운 종이 한 장도 사실 다 없애지 못합니다.
불로 태우고 가루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체로 변하고 또 어떤 다른 형태로 변했을 뿐이지
종이 한 장이 가지고 있는 그 요소는 결국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도저히 다 없앨 수 없다 하는 그런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은 뭐 더 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또 우리가 새로운 물질 새로운 물질 하지만은 사실 새로운 물질도 정말 전혀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
것이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어떤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켜서 신 소재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변화시킨 것이고 변형시킨 것에 불과 한 것이지, 그 본래의 가지고 있는 요소는 전혀 없앨 수도 없고
새롭게 만들어낼 수 없다 하는 것입니다. 종이 한 장도 완전하게 없앨 수 없는 것이 불멸이지요.
또 정말 진정 없었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불생이고 그야말로 불생불멸이지요.
이런 하찮은 물질 종이 한 장도 사실은 알고 보면 불생불멸인데 그 외 다른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습니까?
본래부터 보이지 않는 우리마음의 본성이야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보이는 물질도 불생불멸인데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의 세계야말로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마음도 불생불멸이다. 그
런 불생불멸의 그 본성! 실상을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아주 깊이 일깨웁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시각으로 볼 때
아주 두드러진 내용 중에 하나가, 이 불생불멸입니다. 반야심경도 우리가 불생불멸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에도
是法이 住法位하여 世間相이 常住라.
시법 주법위 세간상 상주
“世間相(세간상)이 常住(상주)라.”
눈 앞에 보이는 이 현실이 상주한다.
불생불멸 한다. 영원 한다
화엄경에도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일체법불생 일체법불멸 약능여시해 제불상현전
모든 것은 생기지도 아니하고
모든 것은 또한 소멸하지도 않는다.
“양릉여시해(若能如是解)”
만약 능히 이 같은 사실을 이해 한다면은
“제불상현전(諸佛常現前)이라”
모든 깨달은 부처님이
항상 눈앞에 나타나 있음을 볼 것이다.
바로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이 사실이 부처님의 경지고 또 그 사실을 하찮은 종이 한 장에서도
그 사실을 우리가 안다면은 그것은 이미 부처님의 경지다.
그래서 “일체법불생 일체법불멸 양릉여시해 제불상현전” 이런 표현을 쓰는 거죠.
제불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눈앞에 나타나 있다. 반야부의 경전이 그렇고 법화부의 법화경이 그렇고 역시
화엄부의 화엄경이 그렇고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을 우리는 대승경전의 가장 대표적인 3대경전이라고 합니다.
물론 반야심경은 금강경의 압축이라고 이렇게 이제 볼 수 있는데 우리가 그와 같이 부처님의 열반재일에는 그 점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는 그런 날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의 내용이고 또 그 후 모든 깨달으신 분들의 살림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불교의 생명이 바로 그 점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는 어떤 행사 어떤 기회 어떤 인연이 되더라도 전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진리의 세계로
전부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열반재일! 열반경의 가르침은 더욱 더 그렇다 라고 하는 것은
오늘 열반재일 불자님들이 좀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또 이제 우리가 열반경에서 잊어서
안 될 한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최후로 공양을 드시고 열반에 드시게 되는데 최후에 공양을 아시는 데로 “순타의 공양이다” 그랬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제 곧 열반에 드실 것인데 최후로 공양을 받아 자셨어요. 그런데 그 때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것을
앞두고 최후의 공양이라고 하니까 그 당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자 하는 그런 지원자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아무리 가난하다 하더라도 부처님께 최후의 공양만은 어떤 사람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뭐 요즘 표현으로 하면은 사찰에 아주 자주 다니던 사람이나 아니면 신도회장 뭐 별별 피치 못할 그런 인연들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의 공양을 사실은 받아 자셔야 하는 그런 입장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순타라고 하는 사람은 별로 이름이 나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부처님은 여러 사람의 공양을 이렇게 올린 것을 살펴 보시고는 이름도 없는 그런 순타의 공양을 받아 드시게 되었습니다.
그랬을 때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얼른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 것으로 왜 나는 부처님께 잘했고
또 그 동안 자주 뵙기도 하고 또 그 사찰에 공로도 많았고 한데 마지막으로 내 공양을 드시지 않고 왜 이름도 없던
순타의 공양을 드시는가? 어떤 이런 질투심과 시기심과 서운함과 뭐 이런 것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광경이 참 아름다운 것이 누구의 공양을 받았는가?
가까이 있는 사람도 잘 모르지요. 그 사람이 순타인지 뭐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순타라고 하는 이름의 그 신도의 공양을 이제 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때 분위기가 그 순타의 공양을 받았느냐 하는 그런 것은 전혀 없고 누군가 한 사람이
“아! 순타 순타 순타!” 이렇게 순타 라고 하는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옆에 사람이 또 ‘순타 순타 순타는 우리들의 축복이고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다.
’ 또 ‘우리를 대신해서 부처님께 대표로 공양을 올린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순타” 하고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그 옆에 사람이 또 순타 순타 하고 그래서 수많은 대중들이 모두 순타의 이름을 아주 반갑게 불렀다고 하는
그런 광경이 전하고 있습니다. 함께 기뻐하는 일이지요.
수희공덕(隨喜功德)수희찬탄(隨喜讚歎)
공덕을 따라서 기뻐한다.
따라서 기뻐하면서 찬탄한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도 보현보살이 실천해야 할 열 가지 덕목이 있는데 결국은 보현행원이란
화엄경의 결론이고 또 불교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결론은 무엇이냐? 보살행 이라는 것이지요. 뭐 도통(道通) 백 번하고 결국 뭐 하자는 것이냐?
보살 행 하자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이제 순타라고 하는 사람의 공양을 함께 따라서 기뻐해주고 찬탄해 주었다고 하는 그
자세 그것은 수희공덕! 다른 사람의 공덕을 따라서 기뻐한다고 하는 그런 덕행이야 말로
우리 불자가 꼭 받들어서 실천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열반재일의 순타의 공양을 받은 그 광경이 또 이런 날 한번쯤 기억을 하면서 수희 공덕이라고 하는 것과
수희 찬탄이라고 하는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함께 진정으로 기뻐하고 마음으로부터 찬탄해줄 줄 아는 그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고 복 받을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그런 내용들을 되새겨 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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