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일승법계도는 신라의 고승 의상 스님이 화엄 사상의 고갱이를
210자의 간결한 시로 줄여 만든 글(법성게)을 도장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가지가지의 꽃으로 장엄된 일승(一乘)의 진리로운 세계의 모습’이라는 뜻으로,
법계도, 법계도서인, 법계도장, 화엄일승법계도장, 화엄법계도, 일승법계도,법성도, 해인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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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도는 흰 종이 위에 붉은 도인의 길과 검은 글자를 써서 만들었는데,
이는 삼종세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고,
가운데의 법자에서 시작하여 같은 중심의 불자에 이르기까지 54개의 모서리를 이루면서
210자의 시가 한 줄로 이어져 있다.
의상 스님은 법계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스스로 묻고 답을 내리고 있다.
(2014.03.02. 불교박람회에서)
(2014.03.16 도리사에서 담음)
어째서 도장의 글이 한 줄로 되어 있는가?
여래의 일음(一音)을 표시하기 위해서다.
어째서 네 면이 있고 네모꼴로 되어 있는가?
사섭(四攝: 보시, 애어, 이행, 동사)•사무량(四無量: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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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이 하나의 길에는 시작과 끝이 없는가?
여래의 선교방편에는 특정한 방법이 없고 대응하는 세계에 알맞게 융통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원교(圓敎: 완전한 가르침)에 해당한다.
어찌하여 시의 글자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가?
수행 방편에는 원인과 결과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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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시의 시작하는 글자와 끝 글자가 가운데에 있는가?
인과의 양위는 법성가내의 진실한 덕용으로서
그 성이 중도(中道)에 있기 때문이다.
시의 글에는 왜 굽이가 많은가?
삼승(三乘: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의 근기와 욕망이 똑같지 않고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2014.02.23. 전등사 범우 주지스님 방에서)
법성원융무이상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고
법성으로 사는 삶이란 나와 너가 상포 포섭과 조화를 이루면서 한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연기의 세계입니다.
연기의 세계를 사는 것을 지혜라고 하며 이때에는 저절로 자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삶 전체가 지혜와 자비로 가득 찬 모습이 법성이기 때문입니다.
제법부동본래적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고 본디 고요하니
생멸•동정을 전체적으로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제한된 시공을 좇는 업상을 떠난 것이 고요한 삶입니다.
법성으로 원융하게 사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본디 고요함입니다.
이는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들의 본디 모습입니다.
무명무상절일체 (無名無相絶一切)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모든 것이 끊겨
우리의 삶은 어떤 이름으로도 어떤 모양으로도
무상•무아의 연속된 흐름과 불연속인 변화의 이중성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생생한 삶은 변화만 있을 뿐, 변화의 주체는 없습니다.
이것을 우주법계의 춤이라고 합니다.
증지소지비여경 (證智所知非餘境) 증지라야 하는 바이지다른 경계 아니네.
나와 너의 분별을 넘어서
전체가 하나의 지(智)로 나타나는 순간이 증지입니다.
능소가 한 삶으로 있는 것.
나와 너가 한 법계가 되어 열린 마음의 활동이 증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성이 그대로 나타난 진여의 모습입니다.
진성심심극미묘 (眞性甚深極微妙) 진성은 깊고 깊으며 가장 미묘해
번뇌가 다 사라진 정적인 해탈의 한 모습에서 잠시도 쉴 새 없이 자기를 연출하고 있음은
참으로 미묘하고 깊은 이치입니다.
이는 진여자성인 연기의 공성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현상이며,
움직이면서 움직이지않으며 시공을 떠난 데서 시공으로 차별되어 나타났으며,
시공의 차별 그대로가 시공을 떠나 있는,
모순의 동일성이기 때문입니다.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자성은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루네.
모든 법들은 지킬 자성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변화가 자성입니다.
변화와 부동, 이것과 저것이 어울려있는 한 장면만이 공성의 장, 무자성의 장입니다.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으며
연기법의 근본 원리는 하나하나의 이것과 저것은 그 자체로 존립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낱낱의 ‘나’가 모두 온 우주만큼이나 큰 생명의 장으로 살고 있고,
우주는 모든 생명의 수만큼 겹쳐진 생명의 우주입니다.
이를 화엄에서는 중중무진이라고 합니다.
일즉일체다즉일( 一卽一切多卽一) 하나 그대로 모든 것이며 모든 것 그대로 하나다
이것과 저것은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장에 함께 있습니다.
우주법계의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그 낱낱이 우주법계를 이루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우주법계의 모든 것이 원인이 되어
낱낱의 얼굴이 존재합니다.
모든 만물이 이 연기실상의 장에서 완전히 동일한 생명을 이루는
전제이자 부분이고, 부분이자 전체입니다.
일미진중함시방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속에 시방을 머금고
화엄에서 나투는 부처님의 세계는 티끌 먼지 하나에서부터 온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대소장단의 어느 것에서나 차별없는 법계이면서 대소장단으로 나툽니다.
이는 언제 어디서나 불성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일체진중역여시 (一切塵中亦如是) 모든 티끌마다 또한 그러해
무명의 한 생각이 온 법계를 무명화하며, 진여의 빈 생각도 온 법계의 울림입니다.
무상의 흐름을 분명히 아는, 마음이 깨어 있는 순간이 법계신의 나툼입니다.
이때에는 티끌 하나하나도 총체적 우주의 빛인 비로자나불의 나툼이 됩니다.
무량원겁즉일념 (無量遠劫卽一念) 한량없는 시간이 한 생각이요
시간도 하나의 법이며 법은 공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시간이면서 오히려 시간 밖에 존재하여
모든 순간의 시간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시간이 ‘공성의 한 순간의 시간’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데서 ‘현재의 한 순간’이 됩니다.
일념즉시무량겁 (一念卽是無量劫) 한 생각이 한량 없는 시간이며
중생의 업이 수행에 따라 지혜로 전환되어
진여공성에서 나투는 시간의 무자성을 여실히 알아차릴 때,
마음에 일어나는 한 순간의 시간이 무량한 시간이 됩니다.
구세십세호상즉 (九世十世互相卽) 구세와 십세가 서로 같지만
연기의 장은 나눌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언제나 연기의 장이라는 총상에서
낱낱이며 이 낱낱이 그대로 연기의 장인 데서만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것입니다.
연기의 장에서 낱낱은 무자성의 공성으로 같고
그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보면 서로 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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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불잡란격별성 (仍不雜亂隔別成) 뒤섞이지 않고 제 모습을 이루네
인연의 조건에 따라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하면 독립된 개별자로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낱낱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뒤섞여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변과의 인연 관계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무상•무아의 변화만이 삶일 수 있고 여기에서 제 모습을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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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시변정각 (初發心時便正覺) 처음 발심한 때가 바른 깨달음이며
세상의 모든 법들은 서로가 서로를 전체로 살게 해주면서 그로써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화엄의 중중무진연기법계이자 그대로 비로자나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한마음’은 부처님의 모든 공덕을 나투는 ‘전체’로서 깨달은 마음입니다.
생사열반상공화 (生死涅槃常共和) 생사와 열반은 늘 함께하고
맑고 고요한 마음. 빈 마음으로생사의 모습을 지켜볼 때,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연기 관계에서의 중도실상일 뿐,
실체가 없는 생사를 보게 됩니다.
곧 생사가 여래법신이고 화엄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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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명연무분별 (理事冥然無分別) 이와 사가 하나되어 분별이 없으니
마음이 마음인 데서 보면 인식 주관으로 한정된 듯하지만
이 마음이 그대로 온갖 대상이 되고, 대상이 대상인 데서 보면
인식대상을 한정된 듯 하지만 이 대상이 그대로 모든 만상으로 나툰 마음이니
마음에서 대상을, 대상에서 마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계를 명연, 곧 차별을 꿰뜷고 혼연일체로 하나된다고 하였습니다.
십불보현대인경 (十佛普賢大人境) 모든 부처님과 부살님과 큰 사람의 경지네
빈 모습 속에 나투는 지혜덕상의 부처님세계가 보리심이며 대원력이니,
십불은 보리심을 말하고 보현 보살은 대원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보리심과 대원력으로 사는 모습을 말로 나타내어 큰 사람의 경지라 하고 있습니다.
능인해인삼매중 (能人海印三昧中) 부처님께서 해인삼매 가운데서
능인이란 비로자나 부처님이자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한정되어 있는 마음을 놓을 때 온 우주의 마음이 스스로 나타납니다.
모든 중생과 사물들이 그 마음 가운데에서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나툽니다.
이처럼 법계연기로 이루어진 중중무진한 생명의 장을 해인삼매, 깨달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번출여의불사의 (繁出如意不思議) 뜻대로 부사의함을 나타내고
해인삼매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중생들과 사물들의 걸림없는 세계,
이와 같은 온갖 생명들의 향연이 빈 마음자리인 여의(如意)에서 뜻대로 나툰 것입니다.
우보익생만허공 (雨寶益生滿虛空)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비가 허공에 가득하니
빈 마음이 되어 조그만 바람마저 없어졌을 때
도솔천의 삶을 뛰어넘어 비로자나 부처님의 삶을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삼라만상 낱낱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혜덕상으로 보배 가운데 보배입니다.
곧 우주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혜덕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중생수기득이익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은 그릇따라 이익을 얻네.
닫힌 마음의 중생업을 버릴 때,
해인삼매 가운데서 동일시공과 무한시공에서 사는 모든 중생과 사물이 제 모습대로
삼계에 살면서 삼계를 벗어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해인삼매의 끝없이 열린 시공에서 한없는 공덕으로 서로 열린 세계의 빛을 나투고 있는 것.
이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이익입니다.
시고행자환본제 (是故行者還本際)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음자리에 돌아와서
수행자란, 생각생각에 개념으로 파악하는 모든 상을 여의고
마음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무념무상으로 무심일 때를 말합니다.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자의 전부입니다.
거짓 없는 빈 마음을 그대로 쓰는 것이 수행자가 자신의 자리에 돌아온 것으로 본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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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식망상필부득 (叵息妄想必不得) 망상을 쉬지 않고는 얻을 수 없으니
우주법계와 함께하는 연기실상 속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생각흐름을 그대로 두고 빈 마음으로 지켜볼 때,
곧 근본 빈 마음자리에서 생각의 흐름을 지켜볼 때,
생각 생각에 부동심을 얻게 되어 그 자체로 망상이 쉬게 되고
본디 마음 자리가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무연선교착여의 (無緣善巧捉如意) 분별을 떠난 교묘한 방편으로 뜻대로 여의보배를 잡아
분별 업이 그저 지켜보느 수행으로 모든 것이 마음자리의 나툼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무연이라 합니다.
또한 마음 없는 데서 마음을 나투어 중생의 세계가 그대로 부처님의 세계를 이루게 하니 방편이라고 합니다.
귀가수분득자량 (歸家隨分得資糧) 집에 돌아가 분에 따라 자량을 얻네
근본마음자리를 드러내는 데는 지금 쓰고 있는 마음 밖에 따로 얻을 자량이 없습니다.
이 마음 그대로 법계 전체에 보배를 보내고 있는 것이고 그 보배로 모든 중생의 온 삶이 있는 것입니다.
이다라니무진보( 以陀羅尼無盡寶) 다라니의 다함 없는 보배로
순간순간 깨어 있는 마음이 법계를 이루는 보배이고,
이 마음은 늘 새롭게 세계를 빛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다함 없는 보배인 깨어 있는 순간순간의 한 마음이 바로 연기법계의 총상이 되어
모든 것을 거두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라니 곧 총지라고 합니다.
장엄법계실보전 (莊嚴法界實寶殿) 법계의 참된 보배궁전을 장엄해
법계의 참된 보배궁전을 장엄하는 것은 깨어 있는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깨어 있는 마음만이 삶의 온전한 모습이고 법계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법계를 장엄하는 다라니의 한없는 보배란 마음 마음이 인연 따라 한없는 모습으로 빛이 되는 것입니다
궁좌실제중도상 (窮坐實際中道床) 마침내 실제의 중도자리에 앉으니
중도의 자리란 어느 특정한 자리가 아니라, 온 생명이 어울려 있는 한 삶으로서의 자리를 말하고
이것을 화엄이라고 합니다. ‘마침내’란 다시 처음을 포함한 말로,
처음과 끝이 없는 데서 처음과 끝을 세우니 그것이 진여법계에서 말하는 중도의 자리입니다.
구래부동명위불 (舊來不動名爲佛) 예부터 움직이지 않아 부처라 이름하네
예부터 그대로인 빈 마음의 중도실천을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형상이나 이념의 명시화를 떠나,
동상의 관계 속의 변화인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이름 붙여진 연기실상을 말합니다.
포교사단 카페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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