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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지명 유래

태조 왕건과 관련된 대구 주변 지명

by 범여(梵如) 2015. 9. 12.

팔공산 비로봉

태조 왕건과 관련된 대구 주변 지명

 

 

고려시대는 대장경 등 목판인쇄물의 판각과 함께 금속활자를 발명한 우리나라 인쇄역사상 간과 할 수 없는

창조적 기술발전의 시대이다. 이 시대를 연 고려 태조 왕건의 발자취가 내 고장 대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구 공산에서의 동수회전(桐藪會戰) : 왕건은 궁예의 폭정을 바로 잡으려는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등에

의해 고려의 왕위에 추대되어 후백제의 견훤과 삼국의 패권을 다투던 중, 927년 후백제가 신라를 정벌하고

약탈하자 친히 정병 1만을 거느리고 대구 공산에서 일전을 벌이니 이를 동수회전(桐藪會戰)이라 한다.

 

 병산대전, 운주대전과 함께 고려 통일전쟁의 3대 전투로 유명한 이 동수회전은 공산 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가장 역사적인 전투이다. 이 전쟁에서 왕건의 대병은 견훤에게 패전하게 되는데,

대패한 왕건은 신숭겸의 지략으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백제군의 추격을 피해 반야월,

안심을 거쳐 대구 앞산 안일사 까지 달아났다고 역사는 전한다.

 

대구시 기념물 제1호 지묘동의 신숭겸 유적지는 이 때 대장이었던 신숭겸 장군의 얼굴이 태조와

흡사하였는데 형세가 막다른 지경까지 이르게 됨을 깨닫게 된 신 장군이 몸으로써 대신 죽을 것을

자청하면서 태조의 옷을 입고 김낙(金樂) 장군과 더불어 적진에 들어가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견원의 군사가 장군을 태조 왕건으로 여기고 그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달아나니 포위하던 군사가

풀리어 태조 왕건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후에 태조 왕건이 장군의 시신을 찾으니 목이 없어

분간할 수 없자 장군의 발아래의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로 인하여 시신을 찾고 장군의 공을 기려

순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후하게 장례를 지냈고 금두상이 도굴될 것을 두려워하며 춘전, 구월산,

팔공산에 똑같은 묘를 만들게 하였다. 지금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는 봉분이 세 개인 장군의 묘소가 있는데,

어느 것이 공의 봉분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태조 왕건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벽상호기위태사개국공신

(壁上虎騎衛太師開國功臣)으로 추봉하고 시장절(諡壯節)이라 하였다. 조선시대까지 충신의 표상으로 받들어진

신숭겸(申崇謙)(?~고려 태조 10, 서기 927)의 원래 이름은 삼능산(三能山)이며 시호는 장절공이다.

 

그의 본명은 능산이며, 광해주(지금의 춘천)사람이다. 어느 날 장군이 태조 왕건을 따라 평산을 거쳐 갈 적에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날고 있었다고 한다. 태조가 여러 장군들에게 기러기를 활로 쏘라고 명하자 장군은

어느 기러기를 쏘아야 할 것인가? 라고 묻고 태조가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히라고 하자 화살 한 대로써

날개를 맞히니 태조가 감탄하여 기러기가 있던 땅을 장군에게 주니 이로써 장군이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대구의 지묘동에 위치한 신숭겸 장군의 유적은 198171일 대구광역시 념물 제1호로 지정 되었다.

 

1. 팔공산(八公山)

동수회전의 배경이 된 공산에서 왕건의 신숭겸, 김낙 등 8명의 충성스러운 장수가 순절 하였기에

후일 팔공산이라 이름하였다.

 

 

2. 왕산(王山)

지묘동 신숭겸 장군 사당인 표충사의 뒷산인데 적병에 포위되었던 왕건이 이 산으로 올라가서,

능선을 타고 세 번 만에 피신한 곳이다. 그래서 왕건이 죽을 것을 이 산 때문에 살았다 하여 왕산이라 했다고 한다.

 

 

3. 일인석(一人石)

태조 왕건이 왕산을 거쳐 피신한 곳이 동화사 뒤의 염불암이다. 여기 일인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왕건이 거기 숨어 앉으니, 수도하던 도승이 첫눈에 왕건인 줄 알고, 그에게 이 자리는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곳인데, 그대는 누구인가? 내려오라고 했더니, “내가 바로 왕이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도승은 절을 하고 길은 안내해 주었다. 그 후 염불암 옆의 그 바위를 왕건이 혼자 앉아 있었다

하여 일인석이라 부른다고 한다.

 

4. 독좌암(獨坐巖)

독지바우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봉무동 노인회관 북쪽 5m지점의 개천가에 있다.

이는 태조 왕건이 지묘에서 참패하여, 충신 명장을 잃고 왕산으로 달아나서, 팔공산의 염

불암 옆 일인석에 앉아 있다가, 다시 파군재를 넘어 봉무동에 있는 독좌암이란 바위에,

홀로 앉아 쉬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5. 파군재(波軍)

불로동에서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리는 길목에 있는 재를 가르키는데, 신숭겸 장군의

군사가 1차로 견원군에 패해서 흩어진 곳으로 알려진 파계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아랫 파군재라 하고,

2차로 패한 동화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윗 파군재라 한다.

 

6. 해안(解顔)

불로동 마을 앞을 해안이라 하는데, 동촌면이라 하기 이전에 해안면이라 했다.

태조가 패잔병을 이끌고 들판을 지나면서 몹시 걱정했는데, 마침내 무사히 통

과하여 수심이 가시고 얼굴을 펼 수 있었다는 뜻에서 생긴 지명이라 한다.

 

7. 반야월(半夜月)과 안심(安心)

왕건이 견훤에 쫓겨 해안 땅을 거쳐 지금의 반야월에 이르니, 밤은 반야(한밤중)이고

달이 떠있었다고 해서 반야월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이곳에 와서야 겨우 안심했다고 하여

안심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8. 실왕리(失王里)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왕건이 나무꾼으로부터 주먹밥을 얻어먹고 허기를 면했다.

나무꾼이 나무를 다 하고 돌아와 보니 사람은 간데없고, 그가 왕이었다는 사실을 나

중에 알고 왕을 잃었다고 붙인 이름인데, 조선 말기에 와서 수치스러운 이름이라 하여시량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하며, 변음되어시랭이라 불리기도 하며 현재위치는 대구 동구 평광동에 있다.

 

9. 미리사(美理寺)

이곳의 전투에서 신숭겸, 김낙 두 장수가 장렬히 전사했던 곳이다.

래서 이곳에 절을 세워 연등을 하고 두 장수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한다.

 

10. 살내천

고려와 백제의 군대가 개울 양쪽에서 서로 대치하여 격전을 치를 때 쏘는

화살이 쌓여 강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11. 무태(無怠)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대구시 북구 서변동을 지나 연경동 지묘 3동 방향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서변동 일대를 지날 때 왕건이 군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태만하지 말라.”라고 당부했다고 해서,

지금도 이 지방은 무태(無怠)라고 불려지고 있다.

 

12. 연경(硏經)

그리고 연경동 부근에 이르렀을 때,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낭하게 들려와

감탄한 마을이라 하여 연경(硏經이라 불려 진다고 한다.

 

13. 나발고개

진군을 계속하면서 지금의 지묘 3동에서 지묘1동으로 가는 고개에서, 적진을 향해 진군의

나팔을 불었다고 하여 나발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견훤의 군사 가

왕건의 군사를 둘러싸고, 쳐들어가며 나팔을 불었다고 해서 나발고개라고도 하고, 왕건의

군사를 깨뜨린 견훤 군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나팔을 불었다고도 한다.

 

14. 탑 들

지금의 지묘 1동 앞들을 탑 들이라고 하는데, 옛날 동수대전에 전사한

신숭겸장군의 원찰인 지묘사의 탑이 남아 있던 곳이라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15. 지묘동(智妙洞)

왕건을 위기에서 구한 신숭겸의 지혜가 오묘하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지묘동 등의

지명이 1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고장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16. 불로동(不老洞)

왕건이 도망치다가 이곳에 이르자 어른들은 피난가고, 아이들만 남아 있어 붙여진 불로동(不老)도 있다.

 

17. 월당(月堂)

왕건이 반야월과 안심을 지나 현재의 대구 중심 네거리인 반월당에 도착했을 때 달이 기울어 반달이 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반달이 떠 있을 때 이곳에 당도하였고 하여 반월당이라고 하였다고한다.

 

18. 안일사(安逸寺)

대구 앞산에 있는 절인데 왕건이 반월당을 거쳐 이곳 절에 이르렀는데, 이곳의 승려가 왕건을

극진히 대접하고 옷을 갈아입히는 등 편안하게 모셨다. 왕건을 비로소 이곳에서 안일을

 맛보았다고 하여 후에 이 절을 안일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19. 표충단

왕건을 대신하여 죽은 신숭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쌓은 단(壇)

 

20. 은적사와 왕굴

견훤의 군사에게 쫓기는 왕건이 이 절 근처의 동굴에 숨어 들었는데(隱跡) 이때 거미줄을

처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왕건이 머물렀던 굴을 왕굴이라고하고 그 아래 샘을 장군수라한다.

은적사라는 이름은 당시의 승려인 영조가 붙였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