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면 리별 지명유래
☆신전리
소재지가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 죽령을 넘나들던 길손들이 말에
물을 먹이며 이곳에서 쉬어가던 길목이자 가축을 도살하기도 했던 마을이라하여
(殺浦停)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고한다.
(새끼실)
풍기군 생현면 지역으로 새로 개척된 마을
(신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명 윗새끼실이라고 부른다.
(매갑)
옛날 독산 밑에 못이 있어 그 주변의 매화나무가 꽃이 지면 그 못에 떨어져 매갑
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향산)
화향정이라는 우물이 있어 향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명 아랫새끼실 이라
고 한다.
매향정-일제 시 인근부락의 선비 30여명이 시세를 탄식하며 향산사이라는 모임을
조직, 그 뒤 2세들이 선조들의 자취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
모송정-고려 말의 충절인 만송당 방순을 추모하여 그 후손인 방상연이 세운 정자
☆생현리
생현1리에 속하는 부락으로 봉우골 서쪽, 백분들 가운데 위치한 취락으로 흰 분토
가 나왔다고 해 (백분)으로 명명케되었다는 설과 부자 100명이 이 마을에서 나왔
다고해 백부리로 일컫는 설이 전해 진다.
(황새목)
안정교 서남쪽에 위치한 마을은 마을 뒷편의 능선이 황새목을 닮은 형국이라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봉우골(봉화골)
조선조때 봉화를 올려 통신수단으로 활용했던 곳이라고 해서 봉화골로 불리워진다.
(큰골)
생현2리에 동편은 매갑마을, 서쪽은 생고개, 남쪽은 봉암리, 북편은 봉화봉과 각각
인접하고 있는 산촌이다. 깊고 큰 골짜기에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해서 큰골로 불리게
되었다.
생고개 마을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마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중국의 이여송을 두려워 한다는 사실을 안 주민들이 피난하여
취락을 형성케 되면서 송곡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고개)
동쪽은 살포정 서편은 용암산 북쪽은 회나무고개와 인접해 있다.
풍기진씨가와 진성이씨가에서 마을을 개척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 앞 200
여미터지점에 수령100년 정도의 회나무가 있다.
이윤정 효자각- 조선 명종 원년(1516년) 마을에서 건립.
현위치는 영주시 안정면 생현2리 431번지.
진성이씨 문중(이대식)에서 관리 하고 있다.
기은정- 풍기진씨가에서 관리하고 있는 이 정자는 한성판관 벼슬을 지닌 진흠조를
추모하기 위해 1920년에 후손들이 건립했다.
이현구선생 충효비
☆봉암리
(외봉암)
마을 뒷편에는 풍기진씨와 관련된 전설이 있는 봉황대바위가 자리잡고 있다. 동쪽
으로는 멀리 줄포마을이 있고, 북으로는 생고개가, 남으로는 봉암리 양지마을이
있다.
(음지마을)
봉암리에서 가장 큰 자연부락인 본 마을이다. 이 마을은 1550년경 창원황씨가에서
개척한 마을로 창원황씨 집성촌이기도 하다.
봉황대-봉암리 뒷산에 봉황대라는 높고 평평한 큰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깨뜨려 버림으로 봉황이 3마리 날아 갔다는 설이 있다. 학가산 순흥비봉
산 한마리는 죽었다는 설이 있다. 이후 풍기진씨는 마을을 떠나게 되고 번성하던
봉암은 논밭으로 변하고 지금은 안봉암 바깥봉암도 변화되었다. 지금도 논밭에서
기와장이 출토되어 과거의 번성함을 짐작할 수 있다.
☆용산리
(어약)
풍수설에 의하면 고기잡이 노인이 낚시대를 물에 드리우는 형국의 명토로서 물과
관련있다하여 어약이라고 불리우는 이 마을은 용산1리 본마을로 1500년 순흥안씨가
에서 개척한 순흥안씨 집성촌이다.
(섬마)
어약마을 남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개천이 흘러 섬같이 보인다 하여 섬마라 유래되었
다고 한다.
(고촌)
본아을인 어약에서 서북쪽에 외롭게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재실)
어약마을 동쪽에 위치하여 순흥안씨 제사가 있다고 하여 재실이라 부른 독가촌이다.
(대촌 또는 대룡산)
용산리의 중심부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은 석재바위, 서쪽은 용암산, 남은 검바위재,
북쪽은 어약들과 어약마을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본래는 순흥부 대룡산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시 1914년 안정면 용산리로 병합되었다.
(사계)
순흥군 대룡산면 사계리였던 이 마을은 창원황씨 세거지자 집성촌이다. 조선중기에
황효공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사계서원이 마을에 소재, 사계마을로 일컬러지고
있다.
영모정-김수희(경주김씨)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
고계정-효자로 알려진 이택진(공주이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95년에 건립한 정자
충효비, 창원황씨 세덕사, 순흥안씨 세덕사(별묘), 명이제, 만지정, 우우정, 용연서원,
서계서원, 농고정, 농고정사, 용산강당, 황씨종택, 서파정, 서낭당 동제, 이택진 효자각-
곳집 (고려장)
☆여륵리
(사무실(미곡)
이 마을은 미곡이라고 부르는데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쌀의 질이 좋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원황씨 집성촌이었으나 현재 몇 가구만 있다.
(큰마(대촌 또는 너르기)
순흥안씨 집성촌이다. 들이 넓다고 해서 너르기 또는 큰마로 명명되었다.
(서당마)
안씨와 황씨 양 가문에서 용산서당을 건립하면서 부터 서당마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서당건물은 철거 되었지만 서당계는 지속되고 있다.
(미산(眉山)마을)
용암산 아래 산기슭에 앉은 마을 지형이 눈썹 형국을 닮아 미산마을로 불려지고 있다.
(점마)
옛날 마을 뒷산 기슭에 옹기를 구워 파는 옹기점이 있었다고 하며 점마(店村)로 불리우게 되었다 하며
1801년(순조 원년)경 창원황씨가에서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탑골)
마을 서쪽 300평정도의 골짜기에 탑이 건립되어 있어 탑골이라고 불리웠으나
이 탑은 1935년경 일본인들이 경복궁으로 이전 현재는 빈터만 남아있다.
☆묵 리
(노루목)
마을 뒷산 형국이 뛰는 노루의 목(장항)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새장터)
지난날, 이 마을에 만석군이 살고 있었는데 도적떼가 성행, 마을 전체가 폐촌 되었다함.
그 뒤 이 마을에 저자(시장)가 서게 되면서, 취락을 형성 현재 2가구 뿐이다.
(반지미)
마을 뒷산은 호산이라 부르며 앞산은 구산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호랑이 앞에 개가 있어야 마을에 재앙이 없다는 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
전주이씨가 개척했다는 설도 있다.
(항고개)
조그마한 항아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항고개라고 불리운다.
1780년경 단양우씨가에서 취락을 형성하였다는 설이 있다.
☆내줄리
(내줄포)
골이깊고 풀이 무성해 풀을 베어낸뒤 마을을 형성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점마)
내줄리 부락의 중간쯤에 위치한 마을로, 옹기를 구워 파는 노점이 있어 점마로 불려지고 있다.
(동명마을)
5번 국도 북측에 살던 19세대의 대추골 주민들이 지난 1977년
국도확포장공사에 의해 매봉산 동쪽 기슭으로 이주 '동쪽의 밝고 따뜻한 마을(東明)'로
불리우게 되었다. 동명마을 조성에는 새마을 지도자 정승호씨의 헌신적인 공이 뒷바침되었다.
청제사-법화종으로 1978년 건립하였으며 여승이 주지임
영광원-정신질환자 요양소. 1982년 건립
암서제-담옹. 정규창 고조인 정약황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맛배지붕의 3칸 기와집
☆일월리
(선 바위)
1850년(조선조 철종9년)경 원주원씨가 입향 마을을 개척 하였다 한다.
남쪽에 바위가 있어 선바우라 불리우며 김해김씨 11가구 원주원씨 5가구 등 자연부랃 중 규모가 제일 큰 마을이다.
마을 뒷편 영선사가 있다
(관사마을)
1935년경 중앙선 철도가 가설되면서 철도직원 관사가 건립 마을이 형성되었다
(닥밭마을)
예로부터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닥밭마을로 불리워졌다 한다.
선바우동제-안정역사 300여미터 상거한 곳에 위치한 이 바위는 3미터 높이의
삼각형 모양으로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동제를 지낸다.
☆안심리
(평장마을)
안심1리 중심부에 위치한 마을로 1339년(고려 공민완 원년)경 평장사 벼슬을 한
영천이씨가 마을을 개척 평장마을로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공주이씨. 의령여씨가 1855년(조선조 헌종9년)경에는 양천김씨가 입향했다.
(뒷섬)
섬과 같은 모양의 흙더미가 있어 뒷섬으로 불리우고 있다.
한때 일흥여씨가 물길을 돌리고 이곳이 명당이라하여 묘를 썼으나 후손들이 이장해 갔다고 한다.
(샛골(간곡)
좌우로 산이 에워싼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언고개(앵현)
평장마을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일흥여씨 효자비가 있었다 전해지나 지금은 없다.
(서제골)
바깥서제골에서 북쪽골짜기로 400미터 쯤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본래 풍기군 동촌면 안심리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영주군 안정면 안심리로 개편된 마을이다.
(바깥서제골)
면소재지(신전)에서 풍기방면으로 5번 국도를 따라
1킬로미터 쯤 가면 오른쪽으로 남원천 다리와 중앙선 철길을 건너게 된다.
이 마을이 서쪽의 서(西) 내(川)를 건너(濟)야 마을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여 서제골로
불리우며 일설에는 이 마을의 입향조인 안경상이 서당을 짓고 아동을 가르쳤다고 해서
서제골이라고 일컬어 진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1726년경 순흥안씨가에서 이 마을에 정착 취락을 형성했다고 한다
안심터널-6.25당시 인민군은 화약, 총기류등을 이곳에 보관
☆옹암리
(독바우)
옹암리의 본동으로 풍기읍 산법리와 이 마을의 경계 부근에 항아리 모양의 바위가 있어 독바우로 불리우게 되었다.
예언서인 정감록에 의하면 이 마을은 피난지로 알려진 삼암지간중 한 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새고개)
독바우의 일부 주민들이 작은 고개를 넘어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고 해서
새고개라는 명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선돌(입석)
북쪽산 중턱에 높이 6미터의 바위가 있어 선돌로 불려지게 되었다 한다.
동제-마을 앞 동구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동제를 지냈으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등 시대적 조류에 밀려 중단되고 동구나무도 고사되고 말았다.
☆단촌리
(잣골)
잣나무가 무성해 잣골로 불리워지게 됐다. 풍수설에 의하면 남원천과
양백산사이에 위치하여 협곡이 접해있고 무풍무석한 피난지여서 각 문중의
선비들이 입향 취락이 형성되었다는 설이 전해온다.
(저술)
마을에는 닥나무와 소나무가 많이 자생, 마을이름을 저송으로 명명하게 되었으며
다시 저술이라는 현재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홈다리(홍교)
중국의 주자가 구곡신동을 찬양한 홍교일촌이라는 글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단촌 1리의 유일한 자연부락이다.
천연기념물 느티나무-저술마을 입구에 있는 수령700년 쯤 되는 나무. 천연기념물 273호.
수고 15.5미터. 면적 300평. 매년 정월보름 자정 무렵에 인선된 마을 주민이 제사를 지냄.
동구나무-천연기념물인 느티나무와 비슷한 시기에 심은 나무가 있다.
일제의 군국주의가 대동화 전쟁에 대비 나무 일부를 베어 총개머리판의 제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대평리
(광석)
마을앞에 위치한 이 반석은 넓이다 150평 정도 쯤 되며 바위 주변에 넓은들을
광석들이라 한다
(지뱅이 고개(대평재)
대평에서 순흥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청룡산 허리를 잘라 고갯길을 내었다.
☆오계리
(대촌)
속칭 오계라 일컫는 부락으로 본동에 해당된다
(새마(신촌)
1980년경 본동의 주택이 과밀, 이곳으로 이거 새 마을을 형성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경주최씨 세거지이다
<교촌>
오계초등학교가 위치 교촌으로 불리우고 있다. 현재는 오계초등학교는 폐교되었다.
(보치골)
인동장씨, 단양우씨가에서 1419년,1489년경에 차례로 입향, 세거해 오고 있다.
오계2리에 속하는 자연부락으로 보치나무가 자생해 보치골로 불리운다.
효자각 : 1907년 효자 장복식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위해 건립한 효자각이 있다
☆동촌리
<피끝(우음)>
1456년(세조2년) 세조에 의해 순흥부에 유배되었던 금성대원군은 순흥부사 이포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중, 사전전모가 탈로, 역모에 가담한 사람들을 순흥 청다리 아래서 살해하니
그 피가 흘러 이 마을 앞 죽계천에서 끝이 났다고 해서 피끝 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박태진(朴台進)의 아내 무안박씨-우음리에 사는 박태진<진사 박성원의 아들 >의 아내는 선달 박종원의 딸이다.
시부모를 봉양함에 성력을 다하고 남편을 섬김에 극진했다.
신유년 겨울에 남편이 염병에 걸려, 온갖 정성으로 구호하다가, 증세가 위독함에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니 거의 끊어졌던 숨이 살아나 차츰 회복되었다.
이윽고 부인이 그병에 감염되어 드디어 숨을 거두니 뭇사람들이 <남편의 병을 대신했다>하며 그 착함을 기렸다.
(안마)
산을 병풍처럼 안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피끝과 함께 밀양박씨 집성촌이다.
(새터)
피끝마을의 민가가 밀집하메 새로 취락을 형성 새터로 불려지게 되었다.
(합도(조개섬)
마을 앞 반경 3미터 가량 규모의 흙더미가 마치 섬처럼 앉아있는 주변으로 조개가
자생 이 흙더미를 조개섬이라 하였으며 이 이름을 따 마을이르을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마을의 부자가 늘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등 번성하는 속설이 전래. 홍구로 인하여 없어지자
전래의 속설에 따라 다시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군도골)조선 숙종임금이 암행, 이 고을에 들렀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
동제-마을 뒷산인 미궐봉 중턱에 있는 성황당에서 매년 음력 정월 보름 자정에 제사를 지냄
오리나무골 샘물-동촌2동 마을 뒷편에 위치한 샘물로 식수는 물론 차고 시원해 땀띠 제거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영모정-단종 때 명신인 박심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
박심문의 충절-
죽헌제-
출천지효-박태훈
조개섬마을의 박진사집-
펌 -글
'지명 유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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