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15년 10월 23일~24일(무박산행)
☞ 산행날씨:날씨는 맑으나 짙은 박무에 미세먼지 심각
☞ 산행거리: 약 24km / 9시간 50분소요
☞ 참석인원: 인연있는 山友會 따라서
☞ 산행코스: 지리산 국립공원 뱀사골 분소-선인대-요룡대-와운마을 입구-탁용소-병소-병풍소-명선교-
대웅교- 제승대-간장소-막차-화계교-뱀사골탐방지원센터-화계재-548계단-삼도봉
노루목갈림길-철계단-반야봉-삼거리-노루목-임걸령-피아골삼거리-홍수통제 경보기
불로교-피아골대피소-남매폭포-신선교-구제포교-삼홍소-표고막터-직전마을-연곡사-주차장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경남 하동군 화개면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 새해를 맞이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뒤돌아보니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그나마 다행인게 매주 산행을 하면서
건강하다는 걸 확인하게 유일한 樂이라면 樂이다
지난주 나홀로 독조지맥길을 걸으면서 지친 心身을 추스리기 위하여 7월에
백두산을 같이 동료산꾼들과 오늘은 지리산 계곡 능선길에 나선다
밤 11시 사당역에 출발한 버스는 휴게소에서 2번을 쉰 다음에 뱀사골 입구
반선교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니 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생각보다 차갑다.
이곳에서 장비를 정리한 다음에 04시 50분경에 산행을 시작한다
지리산 전체 개념도
피아골에서 연곡사로 가는 개념도
지리산 산행지도 -(펌)
나는 이 지도와 반대방향으로 진행했음
반선교(伴仙橋:04:45)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아무도 제지하는 국공파들이 없는 탓에 뱀사골 산행코스의
깃점인 반선(伴仙)마을을 지나 다리입구에까지 버스가 들어서서 차에서 내린다
차에서 산행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밖을 나오니 생각보다 바람이 차갑다
뱀사골의 지명유래
지금으로 부터 1,300여년 전 이곳에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의 실상사 보다 100여년이
앞선 대찰로 1년에 한 번씩 스님 한 분을 뽑아 칠월 백중날 신선바위에서 기도드리게 하면 신선이
되어 승천한다 하여 이 행사를 해마다 계속하였는데, 이를 기이하게 여긴 고승이 독약이 묻은
옷을 스님에게 입히고 신선바위에 올라 기도드리게 했다한다. 그 날 새벽 괴성과 함께 기도드린
스님은 간곳 없고 계곡내 용소에는 용이 못된 이무기가 죽어 있었다. 그 후 이 계곡을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억울하게 죽은 스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절반의 신선'의
준말로 마을을 반선(伴仙)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리산 국립공원 뱀사골분소(04:55)
04시 55분에 산행을 시작하는데 산행대장을 맡은 신난다님은 약간 조폭(?)스타일이다
선두에서 ‘알파! 신난다’를 외치곤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리는데 버스에서의 멘트와는
전혀 반대이다... 버스에서는 날이 밝을때까지 천천히 가겠다는 약속은 헌신짝 버리듯하고...
사진 몇카트 찍는 사이... 동료들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졸지에 오늘도 맨 꼴찌이다
이 계곡 온 지가 15년 가까이 된듯 싶다...잘 만들어진 데크목 둘레길을 따라 부지런히 걷는다
어둠속 지리산 계곡물은 우렁차게 흐르건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으니 장님 코끼리 만지는 기분이다
1시간만 늦게 출발했어도 뱀사골의 멋진 선경... 생각만해도 아쉽다
시작 하면서 곧바로 만날 수 있는 선인대는 확인도 못하고 동료들의 헤드렌턴 불빛만 보인다
뱀사골하면 한국의 명수(名水)로 통하는데 지리산의 깊고 깊은 산록에서 맑고 깨끗한
물줄기가 빚어져 즐비한 징담을 거쳐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뱀사골의 청정계류는
가히 손색없는 우리나라의 으뜸 물줄기라 부를 만하다.
반야봉,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 사이의 울창한 원시림 지대에서 발원된 물줄기가
기암괴석을 감돌아 흐르면서 절경을 일구어 놓아 뱀사골의 계곡미 또한 장관이다.
우리나라 계곡의 대명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 그만큼 잘 알려져 찾는 이도 많지만
그 품이 너무도 넓고 깊어 쉽게 오염되지 않는다.
남원시 산내면 반선리 집단시설지구에서 토끼봉과 삼도봉 사이의 화개재까지 12km,
장장 39여리의 물줄기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화려한 소(沼)와 담이 뱀사골의 가장 큰 자랑이다.
대표적인 것만 하더라도 선인대,오룡대, 뱀소, 병소, 병풍소, 제승대, 간장소가 그림같이 전개돼
절경을 연출하고 있으며 그리고 뱀사골의 완만하고 고른 경사도를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뱀사골에는 연중 등산객뿐만 아니라 가족단위의 행락객들이 많이 찾아든다
데크목으로 만든 둘레길을 따라 걷는 기분으로 참으로 편하게 산행을 시작한다
어쩌면 매년 지리산을 어느 코스든간에 한두번씩은 와보지만 15여년만에
걷는 이 코스가 가장 편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어둠속이라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는게 조금 아쉽지만...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구름다리로 계곡을
지나는데 힘차게 흐르는 뱀사골의 물소리는 가슴까지 시원하게 한다
요룡대(搖龍臺:05:15)
와운골과 뱀사골의 원류가 합수되는 곳에 30m가 큰 바위가 계곡 상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이 모습이 마치 용이 승천하려고 머리를 흔들며 몸부림치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요룡대라
부르며 일명 ‘흔들바위’라 한다고 하는데 어둠속에 요룡대는 확인하지 못하고 안내판이 대신한다.
요룡대를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어둠속에 시설물이 보이고 화장실... 잠시후 와운교를 건넌다
와운(臥雲)마을 입구 이정표(05:17)
뱀사골 입구에서 이곳까지 2.1km... 아무리 어둠속에 둘레길처럼 편한 길이라곤 하지만
우리 대장님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듯 싶다... 화장실 간 동료들을 기다리다 또다시
정신없이 어둠속에 걷는데 뱀사골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만 범여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와운교를 지나서 와운마을 안내도과 초소가 있는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와운마을은 지리산의 첩첩산중에 있는 마을로 1595년 임진왜란을
피하여 鄭씨 일가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고, 일제시대와 6.25동란때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목기를 제작하여 생계를 유지했고, 1980년대는 한봉(韓蜂)으로 생계를 이었다
와운마을은 이곳에 도로를 따라서 30분 걸리는 거리에 있다고 하며 10여가구가
민박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데 과거에는 산골마을로 영화촬영 장소로도
유명했고 수령이 500~800년된 천년송(千年松:천년기념물 제423호)이 이 마을의
자랑거리라고 하는데 지금은 도로가 잘 나있어 옛 정취는 많이 훼손됐다고 한다
다시 선두에 있던 동료 산꾼들은 빠른 걸음으로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숏다리 범여는
부지런히 따라가는데 길은 엄청 좋지만 본격적인 등로에 접어든 느낌이다
탁용소(濯龍沼:05:25)
큰 뱀이 목욕을 한 후 허물을 벗고 용이되어 하늘로 승천을 하나 이곳 암반위에 떨어져
100여m나 되는 자국이 생겨나고, 그 자국위로 흐르는 물줄기가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도 눈을 감고 지나간다
탁용소 주위가 뱀사골 계곡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고 한다
뱀사골에는 지리산의 다른 등로와는 달리 유난히 다리가 많은데 조그만 다리지만
다리마다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것이 특징이다...금포교를 지나 어둠속을 걸어간다
아직도 짙은 어둠은 계속되고...어둠속에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살았던 뱀소는
보지 못하고 다시 계곡 능선으로 빠르게 올라가니 병소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병소(甁沼:05:55)
소(沼)의 모양이 호리병처럼 생겼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병소 바로 윗쪽엔 병풍교가 나오고 잠시 후 병풍이 두른듯 하다하여
뱀사골의 제1경이라 부르는 병풍소 역시 안내판만 보고 지나간다
두 눈을 뜨고도 장님 노릇하는 뱀사골 산행...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병풍소(屛風沼:06:05)
뱀사골 계곡에는 여울과 소(沼)가 교대로 분포하여 수생태계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소(沼)는 게곡물이 흘러가다 균열이 많이 생긴 약한 바위를 만나면 집중적으로 바위를 깎아
형성되게 되는데 뱀사골 계곡에는 간장소, 병풍소, 병소, 등 다양한 소가 존재하며 그 중에
병풍소(屛風沼)는 계곡물에 의해 깎인 모양이 병풍(屛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명선교(明善橋:06:10)
대웅교(06:15)
대웅교를 지나면서 이정표(←화개재 4.2km, →반선5km)를 만나는데 아무리 길이 좋다고는 하지만
이곳까지 5km를 걸어오는대 1시간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장이 정신이 있는건지 ㅋㅋㅋ
제승대(祭僧臺:720m:06:18)
1,300여년 전 송림사 고승인 정진스님이 불자들의 애환과 시름을 대신하여 제(祭)를 올렸던 장소로
소원의 영험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제승대라 불린다고 한다
어둠속의 제승대
제승대를 지나면서 서서히 주위의 사물이 보이면서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제승교를 지나는데 앞서가는 젊은 여성산꾼이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찍고 있다
어두운데 카메라 앵글에 잡힐까?
날은 밝아지고 앞서가던 동료산꾼들이 베낭을 내리고 계곡으로 내려가 휴식을 취한다
오늘 처음으로 계곡다운 계곡을 본다
뱀사골의 유명한 계곡과 수많은 소(沼)는 어둠속에 다 지나와 버리고... 두고두고 아쉽다
이끼폭포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만나는 곳이다다리를 건너자마자
우측으로 샛길출입금지 표시가 되어 있는 곳이 이끼폭포 가는 갈림길이다
이곳으로 오르면 이끼폭포와 묘향대를 지나 반야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국공파의 강력한 강력한 단속구간이긴 하지만 한번 걸어볼 생각이다
이끼폭포 갈림길을 지나 아름다운 계곡을 끼고 계속 올라가다 다리 아래쪽으로 멋진 간장소가 보인다
간장소교를 지나는 동료산꾼들
간장소(06:55)
간장소는 옛날 영.호남 상인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화개재에서 약 2.7km 아래에
위치한 소(沼)로서 시원한 검푸른 색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옛날 화개재를
넘어오던 소금장수의 소금짐이 이 소에 빠져 간장이 되었다는 설과 이 소의 물을
마시면 간장까지 시원해진다하여 간장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유유교(07:05)
반선교에서 간장소까지는 완만하고 부드러운 길이 이어지다가
간장소를 지나면서 부터는 너덜길 오르막이 이어지기 시작된다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높은 곳을 오를수록 뱀사골 계곡은 가을걷이가 끝나고 冬眠을 준비하고 있다
이정 구조목(07:20)
고비나물
연화교(07:25)
간장소를 지나면서부터 뱀사골의 상류지대는 원시림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껏 편하게 걸어온 등로는 꾸미지 않은 투박한 돌길로 변하지만 그래도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활동하는 지맥길에 비하면 고속도로이긴 하지만
오늘 산행길에는 조금 힘이드는 구간이라는데 난 전혀 그런 느낌이 오질 않는다
이곳을 ‘들돌골(擧石谷)’이라 부르는데 이 돌밭길을 두고 하는 말이란다
막차(1,088m:07:30)
이정표 아래에 ‘막차’라는 표시가 나오는데 예전에 지리산 벌목을 할 때
산판 차량이 드나들 때 쓰는 표시라는데 이곳까지 차량이 올라온 모양이다
이곳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5분 정도의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화개재로 향한다
선봉교(07:38)
다시 오르막을 오르니 좌.우로 희미한 등로들이 겨우 보이는데 이 길은 예전에
도벌꾼들과 해방 전후에 지리산에서 숨어지낸 빨치산들의 루트였다고 한다
우측으로는 반야봉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는 명선봉으로 연결되는 길은듯 싶다
이제 물소리는 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원시림대를 만난다
정리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산의 모습이 운치가 있어 보인다
화개교(07:45)
뱀사골 계곡에서 화개재로 오르는 구간의 마지막 다리이다
산꾼들의 어린애 취급하는 국공파들
맨날 뭐~~~ 하지마라 하면 벌금을 매긴다고 급박을 하는 저 안내판
이꼴저꼴 안보고 다니는 지맥길이 최고라니까...
諸行無常
약수터
뱀사골탐방지원센터 바로 아래에 약수터가 보인다
뱀사골탐방지원센터(08:00)
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하니 아랫쪽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불고
날씨가 차가워 이곳에서 아침상을 펼치려는데 국공파 직원 한명이 나와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 탐방지원센터는 말 그대로 탐방객이 지원하는
곳일 터... 민초들의 祿을 먹고 사는 자들이 민초들 위에 군림하는 저 자세 맘에 안든다
하는 수 없이 200m를 더 올라선 다음 화개재에서 밥상을 펼친다
화개재(花開峙:1,316m:08:00)
전북 남원시 산내면과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 종주 코스중 가장 저지대에 속하는 이 곳 능선안부가 화개재이다.
옛날 화개장터의 소금과 해산물, 남원의 산내와 운봉 그리고 함양의 마천에
내륙 특산물을 봇짐장수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고갯마루를 말한다
헬기장으로 쓰였던 넓은 공터에는 지금 식생대 보호를 위해 출입을 막고있다
화개재에서 바라본 삼도봉의 모습
아~~~! 옛날이여!
아침만찬(08:15 ~ 09:10)
화개재 전망대에서 아침상을 펼치는데 세찬 바람에다 미세먼지의 영향으로
짙은 박무가 가득하여 구스다운 파커를 입었는데도 꽤나 춥다
가져운 선지국을 버너로 데워 팩소주 한잔을 하며 아침을 먹는다.
바로 옆에는 지난 백두산을 같이 같던 동료산꾼들이 바리바리 싸온 음식을
주는 바람에 오랫만에 범여의 입이 호강을 하는데 무겁게 메고 온 것을
얻어 먹으려느니 상당히 미안하다... 넘 잘 먹었습니다... 이 보시공덕 복받을깁니다
화개재 곰다방의 뚱마담
오늘 산행길에 후미 대장을 맡으신 분인데 닉이 ‘날으는 곰’이란다
곰이 나르면 기적이란 이야긴가?...따뜻하게 끓여준 커피 잘 마셨습니다
조폭대장(?)의 살인미소
‘신난다’하고 외치고는 무조건 자기를 따르라는 대장... 7~80년대 군사정부에서나 있을법한
행동이건만 어느 산꾼하나 토를 다는 사람이 없어 내가 보기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내가 이 대장과는 4번째 산행인데 매번 날씨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날씨를 택한다
늘 멋지게 리딩하는 조폭스타일의 대장이지만 왠지 밉지는 않으니... 이것도 인연인가
백두산 동지였던 스쿠버님이 찍어준 범여의 인증샷
삼도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화개재와 토끼봉(卯峰:1534m)의 모습
1시간 가량의 여유로운 아침 만찬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좌측의
날나리봉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뒤돌아보니 맞은편의 토끼봉만 아련히 보인다
토끼봉은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 그러는게 아니고
반야봉에서 볼 때 24방위 가운데 정동(正東)에 해당하는 묘방(卯方)에 해당하고,
묘(卯)는 토끼를 상징하기 때문에, 토끼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좌측으로 반야봉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토끼봉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겨울에 한 번 불을 때면 3개월간 溫氣가 돈다는 ‘亞’자 방으로 유명한 칠불사가 나온다
548계단(09:15)
화개재에서 삼도봉으로 오르는 등로 250m 정도의 구간에 데크목으로
548개의 계단을 만들어 놨는데 이걸두고 540계단 또는 550계단이라 부른다
정확하게 14개월만에 다시 백두대간 능선인 이 길을 걷는다
같이 동행한 백두산 맴버인 하동댁(낵이 생각이 잘 안남)이 이 아래 동네가
자기 친정이란다... 지리산 첩첩산중에서 서울로 시집왔으니 엄청 출세했구먼...
삼도봉(三道峰:1499m:09:35)
전남 구례와 전북 남원, 경남 하동군 화계면이 만나는 곳이라 해서 삼도봉이라 불린다.
원래 삼도봉은 이곳 모양이 불무장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낫의 날' 같다하여
낫날봉 이라 불리다가 "닐리리 맘보'를 연상시키는 "날라리봉"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삼도의 경계면에 있다하여 '삼도봉으로 명명되었다.
이 삼도봉 정상에는 석재가 아닌 강철제질의 구조물로 세워져 있다
이별을 준비하는 산오이풀
무명묘지(09:50)
아마도 전생에 백두대간 산꾼이었던 모양이다... 해발 1,500고지에 묘지가 있으니...
갈림길(09:51)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반야봉으로 오른다
갈림길(10:00)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베낭과 카메라와 스틱만 가지고 반야봉으로 향한다
짙은 박무가 걷힐줄을 모른다
반야봉가는 길에서 만난 철계단(10:15)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며느리밥풀
철난간을 오르며 뒤돌아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이곳에서 노고봉이 멋지게 보이는 곳인데...
반야봉(般若峰:1,732m:10:25)
반야봉은 지리산 10경중 제3경인 반야낙조(般若落照)로 유명한 산이다
지리산 어느곳에서나 이 산은 아기엉덩이 처럼 보이기때문에
"아기궁뎅이처 럼보이는 산이 반야봉이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산의 곡선미가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봉우리이지만 반야봉은 사실 남성을 상징하는 산이다
반야는 산스크리트어의 프라냐(prajna)를 음역한것으로
불교경전의 반야경(般若經)에 의해 알려진 명칭이다.
반야의 뜻은 '절대변하지않는 완전한 지혜'를 의미하므로
지리산에서 지혜를얻는다"라는 말은 반야봉에서 유래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여름날 작열하던 태양이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저편 너머로 숨어들 무렵이면
반야의 하늘은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어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
지리산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는지를 끝없이 되뇌여도 반야봉의 낙조는 모자람이 없다.
반야봉은 운해와 함께 우리에게 인식된다. 늘 발아래 운해를 거느리고 우뚝 솟아 있는 반야봉의
장관은 비경 그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천왕봉의 마고할매가 반야도사를 만나 혼례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야는 훗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며 서쪽으로 떠난 뒤 영영 돌아오지 않고 불도를 닦았다.
그 후 그가 도를 닦았던 산은 반야봉이라 불리면서 남성미를 상징하는 산이 되었지만,
생김새가 한없이 부드러워 여성성도 가지고 있는 산으로 알려졌다.
지리산에는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제석봉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불교와 관련된
지명만으로 나열하면 반야봉을 제일 꼭대기에 있는 봉우리라 해석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완봉이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반야봉을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 말한다.
반야봉보다 높은 제석봉, 중봉, 하봉을 제쳐두고 반야봉을 천왕봉 다음의 제2봉으로 치는 것도
반야봉에는 불교적인 관점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1년만에 왔는데 정상석도 바뀌어버렸다
반야봉은 대부분의 봉우리가 지리주릉에 있는 것과 달리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노고단 방향에서는 노루목에서 곧바로 오르면 되고, 반대 방향인 삼도봉에서는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오르면 된다.
반야봉을 중심으로 등산로는 여러 곳 있었는데, 주릉코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출입통제 구간이다.
달궁 쟁기소에서 시작하는 8km의 길은 원시림에 파묻힌 부드러운 길이고,
심원마을에서 시작하는 9km의 길은 노고단 방면으로 펼쳐지는 부챗살 모양의 전망이 일품이고,
반선마을에서 심마니능선을 경유하는 코스는 지리주릉, 서북능선, 삼정능선이 모두 조망된다.
이 외에도 심원마을에서 대소골, 반선마을에서 뱀사골-이끼폭포를 경유해서 올라오는 코스도
있는데 이 코스 또한 통제 되었다.
반야봉 정상에는 짙은 박무로 인하여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주위의 짙은 박무 가 반야봉의 멋진 仙景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하긴 지리산 진면목을 보려면 3대가 福을 쌓아야 한다고 했거늘
나처럼 제대로 복을 쌓지 않고 무임승차로 지리산의 선경을 감상할 순 없겠지.
반야봉의 또다른 자랑거리는 지리산만의 풍요로움과 고고함과 풍겨주는 반야봉 주변의
구상나무, 분비나무, 신갈나무 등 원수림 수해(樹海) 이다.반야봉 일대는 광양 백운산과
함께 서울대학교 학습림이기도 한 지역이다
언젠가 저 禁線을 넘어서 꼭 한번 걸어보리라... 벌금을 물더라도...
지리산은 1967년 12월 국내최초의국립공원으로지정 전북과 전남, 경남 등의
5개 시,군, 15개읍. 면에,속하는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지리산의 총면적은 약472㎢이고 이는 계룡산 국립공원의 7배,
제주도 면적의4/1이자 서울시 면적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이다
지리산(智異山)의 명칭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는 수많은 隱者들이 이 산에 숨어 도를 닦으며 정진 해왔음을 말해준다.
지리산은 옛날에 지리 또는 두류산이라고도 하였고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으로 불리었으며,
신라시대에는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팔공산을오악이라 하였는 데 그 오악 중 지리산은 남악이라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자(1967년), 최대면적의 육상공원(14억 5천 6백만평)으로서
우리나라 산악의 대표성과 상징성 그리고 역사성을 고루 갖춰 흔히 민족의 영산으로
불릴만큼 우리의 정서속에 깊이 새겨진 자연유산인 지리산(智異山)은 산이 넓은 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두류(頭流), 방장(方丈), 지리(地理또는地利), 불복(不伏),반역(反逆), 적구산(赤拘山)으로 불려온
산 이름에서 벌써 지리산의 속내와 아픔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산맥이 지리산에서 멈추었다 해서두류(頭流)로 한다 라고 썼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산세가 멀리 넓게 둘러있는 산이라는뜻으로 순 우리말 '둘러' '두루'
'두리' 에서 음을 따와 한문으로 쓰다보니 '두류'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야봉 아래 피아골과 목통골의 경계...아니 전남과 경남의
도 경계 역할을 하고 있는 불무장등봉(일명:날나리봉)이 조금씩 보인다
방장산은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중국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지리산을 지칭하는 이름인 동시에 불교적인 의미로도 쓰이는 산 이름이다.현재 쓰고 있는
지리산(智異山)은 쌍계사 앞뜰에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대공탑에서 출발한다.신라 정강왕 2년(887)에
최치원이 쓴 비문에 '지리산(智異山)'이 나온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지리산(地利山)으로 표기 했다가
『삼국유사』는 다시 '지리산(智異山)'을썼으며, 조선시대에 편찬한 『고려사』는 '지리산(智異山)'으로 고쳐 썼다.
'지리산(地利山)'은 지리산이 문수도량이라 하여 문수사리(文殊師利)의 글자를 따서 부른이름이며,
'불복(不伏)'과 '반역(反逆)'은 태조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찾아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에서만 소지(燒紙)가 오르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이유로 태조에 등극한 뒤에
지리산을 불복산, 반역산이라 하고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잠시후 내려가야 할 피아골 계곡도 조금씩 개경(개성)의 뭇남성들의
애간장을 다 태운 황진이 치맛자락처럼 보일락말락...
지리산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반야봉(般若峰)은 생김새가 매우 독특해서 지리산의
어느 방향에서나 가늠자 역할을 하는 봉우리로 불교적 의미에서는 주봉이 된다.
고도를 따진다면 천왕보다는 한참 낮지만 너른 품새나 후덕한 인상으로 보면
지리산의 가장 대표적인 봉우리가 아닐까?
흔히 지리산을 말할 때, ‘지리산의 이중성’이란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는 지리산의
모성적인 포근함과 부성적인 엄격함을 동시에 갖고있는 산이 지리산이 아닐까.
춘향전 경판본에서 월매가 지리산 반야봉을 바라보며 지리산신께 며칠을 기도한
덕에 산신령이 그 정성에 탄복하여 춘향이를 점지 해줬다는 대목이 나온다.
특히 저녁에 서녘 하늘의 해지는 모습인 반야낙조((般若落照)는 지리십경으로 유명하다
다시 갈림길(11:10)
노루목 (1498m:11:10)
노루목이란 이곳의 지형이 노루의 목을 닮았다해서 붙은 지명인데 항간에는
노루가 다니던 길이라는 뜻에서 붙었다한다. 또 다른 일설은 노루목 앞에 있는
바위의 모양새가 노루가 목을 치켜들고 있는 형상이라 노루목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6.25동란 당시 지리산을 지리산을 배경으로 쓴 문순태의 소설 「철쭉제」에는
산에서 세갈림길을 노루목이라 부른다고 적혀 있다
이곳은 반야봉가는 갈림길이다
노루목으로 내려오니 늘 든든한 후미대장님과 백두산을 같이간 분(닉을 모르겠음)이
반야봉으로 향한 동료산꾼들의 베낭을 지키고 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분들은 노루목
까지 왔다가 반야봉으로 향한 모양이다... 갈림길이 있었는디... 엄청 손해보는 장사를 했네요
이곳에서 동료들이 가져온 션한 맥주와 막걸리를 나눠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다
임걸령으로 향하는 호젓한 산죽길을 걸어간다
지리산 종주할 땐 이 구간은 늘 어둠속에 걷다가 밝은날에 걸으니 기분이 묘하다
내리막길을 향하는데 등산객들의 소리가 많이 들린다
임걸령(林傑嶺:1,320m:11:50)
조선 선조때의 좀도둑인 임걸년(林傑年)은 지금의 산청군 시천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의 활동무대는 반야봉 일대였다고 한다.
그는 화계장터에서 넘어오는 보부상을 털거나 인근 사찰을 털었는데 '연려실기술'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참 강성했을때의 임걸년은 지리산의 모든 사찰을 털었다고 한다.
이 고개는 그가 활동한 장소라해서 임걸령(林傑嶺)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숲이 울창해서
고갯마루라고는 여겨지지 않으며 이곳에 있는 샘물은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걸년이(조선조 선조때)같은 시기에 김희, 강대수, 고파 등의 도적들이
지리산과 회문산(回文山), 장성의 노령(蘆嶺) 등 수십개의 산골을 점거하고 서로 내응했다고 한다
임걸년은 주로 팔도행상들의 물건을 일부만 털었고, 또 그것을 모아 빈민을 구제한 의적이었단다
임걸년은 임진왜란 발생 후 전란의 와중에 피폐해지고 흉흉한 민심을 배경으로 도적의 무리중
하나로 지리산 반야봉을 중심으로 최소한 6개월 이상 인근의 사찰과 마을을 털었던 도적의 우두머리였다
임걸령 정상
임걸령에 베낭을 내려놓고 바로 아래에 있는 임걸령 샘에서 물 한바가지를 마신다
산꾼들에겐 지리산이 가장 매력적인 것은 식수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시원하게 물 한바가지 마시고 단체사진을 찍고 피아골 갈림길로 향한다
임걸령 정상에서 단체사진
피아골갈림길(12:00)
지리산 주능선에서 좌측으로 급하게 꺽어진 다음에 피아골로 향한다
봉우리에 오른 다음에 급하게 내리막길로 내려서니...홍수통제 시스템 탑이 나온다
홍수통제 에방 시스템(12:07)
때이른 겨우사리도 보이고...
초암터(12:15)
이곳부터는 등산객들을 많이 만나고 급한 내리막길에 낙엽이 쌓인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약간의 넓은 공터에 등산객들이 술상을 펼치고 있는데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는 거 봤냐...내가 가지고 휴대용 소주 2병은 진작 동이 나버렸고...
넉살좋게 인사를 하고 술한잔 달라고하니... 한 잔은 안되고 석잔은 된다고 하는데
이거 왠 횡재냐...앵벌이 제대로 했구먼...이 분들은 강원도 태백에서 온 분이란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니...태백 황지못 근처에서 복권방을 하는 내 친구를 잘 아는
사람이란다... 세상 참 좁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머루잔 2잔을 더 얻어 마시는데
양놈 지갑을 줏은 느낌이다... 오랫만에 앵벌이 제대로 했구먼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 법정스님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잘 귀를 모은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하에서 주소록을 펼쳐 들 친구들의 눈매를,
그 음성을 기억해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여는 연약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알아차린다.
이 시대 이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연줄로 맺어져
서로가 믿고 기대면서 살아가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잡힐 듯 하면서도 막막한 물음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생자필멸, 회자정리, 그런 것인 줄은 뻔히 알면서도
노상 아쉽고 서운하게 들리는 말이다.
내 차례는 언제 어디서일까 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고 싶다.
이 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서로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용수암 갈림길(12:35)
삼도봉과 임걸령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자꾸만 등산객들이 많아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에는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다시 돌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니 불로교가 나온다
불로교(不老橋:12:50)
피아골의 맨 위쪽에 위치한 불로교 아래는 가뭄탓인지 수량은 그리 많지 않다
불로교를 지나면서 옆사면길을 가는데 좌우에는 산죽이 많이 보인다
피아재 산장으로 들어선다
피아골 대피소(789m:13:00)
지리산의 모든 대피소가 능선상에 위치해 있는데 유일하게 계곡 위치한
대피소가 이곳 피아골 대피소이다...동쪽으로는 불무장등(날나리) 능선이고
서쪽으로는 왕시루봉 능선인 계곡 중앙에 1984년 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졌다
이곳에 대피소를 지을 때 6.25동란 당시의 빨치산의 유해로 추정되는 인골이
2트럭분이나 나왔다 한다
그 때문에 나병에 인골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나병환자들 몰려든 곳이기도 한다
삼도봉과 질매재 방향에서 내려오는 두줄기 물길이 만나는 한가운데 대피소가 있다
이곳 피아골은 해방 전후부터 6.25동란까지 빨치산의 소굴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한다.
작고한 이태씨가 쓴 「남부군」에는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 현상이
곡성전투를 앞두고 이곳 피아골에서 300여명의 대원과 간부들에게 상훈을 수여한 곳이란다
피아골 대피소의 풍경
피아골 대피소에 도착하니 반야봉을 오르지 않은 동료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고
이곳은 등산객들이 바글바글한게 마치 서울 근교 산행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후미를 오길 기다리며 잠깐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계곡을 내려간다
피아골 대피소 좌측으로 가면 질매재에서 노고단과 돼지령으로 이어지는 왕시리봉 능선길이다
동료들은 피아골대피소에 휴식을 취하는데 나와 하양회장님은 연곡사를 참배하기 위해 먼저
출발을 하는데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면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이다
신선교(13:08)
피아골 대피소에서 4km를 계곡을 따라서 내려가야 한다
선녀교(13:15)
선녀교를 지나 철계단을 내려선 다음 다시 오르막을 올랐다가 내려서야 한다
조금 섬뜩한 문구가 적힌 곳을 지나 내려서니 조그만 소(沼)가 보이고 등산객들이 사진 찍기에 분주하다
남매폭포?(13:20)
등로옆에 조그만한 폭포(?) 소(沼)가 있는데 이곳이 남매폭포인듯한데 확신이 안선다
남매폭포는 높이 3~4m의 작은 쌍폭포였는데 폭우로 훼손되어 버린데다가 안내판 조차도 없다
이곳 피아골 연곡천에도 아름다운 소(沼)가 많지만 새벽에 지나온 뱀사골과는 달리 안내판이 없다
피아골로 흐르는 연곡천은 그리 스케일이 크지는 않지만 그 대신에 오밀조밀함은 있다.
지리산중에서 가장 아픔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골짜기이기도 한 곳이 아닐까.
그 중심에는 빨치산이 늘 자리잡고 있다... 빨치산하면 남부군 총사령관 이 현상이 늘
회자되는 인물...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을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오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으로 후퇴하지 못한1952년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던 북한군 잔당들을 제1지대부터 제6지대까지 빨치산으로 조직한다.
소백산(제1지대), 속리산·계룡산(제2지대) 무주·옥천·영동·보은·금산(제6지대).
그리고 그 유명한 이현상의 남부군이 활동한 지리산이 제4지대다.
이들의 임무는 최전선의 남한군대를 후방으로 돌리게 하는거였다.
남원·하동·곡성·구례·보성·광양까지 뻗어나간 빨치산은 결국 지리산을 둘러싸고 활동했음을
말하며, 이들은 즉결처분, 인민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양민들을 학살했다.
전투상황에 따라 인민군들이 산으로 숨는가 하면, 어느 날은 인민군에 쫓기던 국군들도 산에 숨어들었다.
때문에 산에서 내려온 군인이 인민군인지 국군인지조차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들 총부리에 '밥'과 '죽음'이 달려있었다.
우리나라 '빨치산'은 1946년 남조선노동당이 탄압을 받고 불법화되면서 산으로 들어간 좌파인사들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4·3사건, 여수 반란사건 등으로 점점 몸집이 커졌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처 후퇴 못한 인민군 부대들이
산악지대에 남아 빨치산이 됐는데 밤에는 식량 약탈을 하고, 낮에는 빨치산을 잡느라고 산에 불을 놓았다.
이 게릴라전으로 인해 군경 6000여 명과 빨치산 1만여 명이 희생됐다.(당시 국회조사단의 조사에 의하면
8522명의 양민이 빨치산과 내통한 혐의로 처형됐다). 소위 반동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빨치산에게
사형당한 부락민들도 부지기수고, 빨치산에 의해 강제로 징집되어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도 수없이 많다.
가슴아픈 사연을 갖고 있으면서도 내색한번 하지않는 피아골
피아골의 단풍
조선시대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남명(南冥)조식(曺植) 선생은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할 정도로 아름다워 "지리 10경"의 하나인 피아골 단풍이지만
올해는 극심한 가뭄탓인지 예전처럼 그리 썩 예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리산만 들어서며 늘 어머니의
젖가슴만큼이나 푸근함을 느끼는 건 이 범여만의 생각일까?
잠룡소(13:35)
이곳도 안내표지판이 없기는 마찬가지... 뱀사골 계곡의 소와는 대비되는 곳이다
구계포교(13:40)
철제로 만든 출렁다리가 나오고 우측으로 0.5km 지점에 구계폭포가 있어서
구계포교라고 하는데 갑자기 빗방울 한방울씩 떨어지기에 구계폭포 가는걸
포기하고 빠른 걸음으로 직전마을로 향한다
피아골 대피소에서 내려오면서 바라본 피아골의 소(沼)는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실망스럽다... 아침에 지나온 뱀사골에 비해선 속된말로 쨉도 안된다
피아골
전라남도 구례군토지면 내동리와 내서리의 내서천 즉 직전마을에서 피아골 대피소까지의
약4km의계곡으로 그 이름은직전마을이 쓰고 있는 피직(稷)와 밭전(田)으로 피밭골이었으나
언젠부터 인지 모르나 피아골로 부르게 되었으며 임진왜란,한말의 격동기, 여순반란 사건,
6.25전쟁을 겪어면서 피를 많이 흘려‘피의 골짜기’라는 뜻으로 피아골이라 했지만 피(血)와
결부시키는 건 어불성설일듯 하다
오히려 피아골의 이름은 등산로 입구인 직전마을과 관련이 있다.
직(稷)은 오곡의 하나인 기장(피)을 말하며, 직전(稷田)은 그피를 일군 밭을 뜻한다.
척박한 땅에서 피밭을 일궈 주식으로 삼았다는 것이고, 후에 '피밭골'을 부르기
쉽게 피아골로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지리산의 다른 계곡과 달리 피아골의 계곡들은 가슴에 그리 와닿지 않는 느낌이다
잠시 후에 삼홍교가 나오는데 이곳부터 직전마을 입구까지 피아골 자연관찰로라고 한다
피아골 자연 관찰로 안내판
삼홍소라 써있는 이정표를 지나니 삼홍교가 나온다
삼홍교(三紅橋)
1986년 준공된 철제 다리 아래가 삼홍소인데 피아골 단풍이 가장 예쁜 곳이란다
남명 조식 선생이 지었다는 ‘직전 삼홍소(稷田三紅沼)’가 전해 내려온다
흰구름 맑은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가을에 물든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天公)이 나를 위하여 묏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삼홍소(三紅沼:600m:13:48)
단풍이 산에 붉게 타는 산홍(山紅),붉은 단풍이 물에 비추어 물까지 붉게 보이는
수홍(水紅), 산홍과 수홍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붉어 보이는 인홍(人紅)이 있어 삼홍소 라고 한다.
시인 이원규는 피아골을 이렇게 노래했다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절창 핏빛 단풍을 제대로 느끼려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오라는 말일 터이다.
삼홍소 안내판
밥그릇 싸움이 참으로 치열하다
서울대 남부 학습림 공터(14:00)
넓은 공터가 나오고 피아골에 대한 안내판이 서 있다
피아골 지명유래 안내판
피아골 연곡사에 수백명의 승려가 머물러 수행하며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에 이 산골짜기의
척박한 토양에서 피(기장)를 많이 심어 배고픔을 달랬다고 해서 피밭골이라 부르던 것을
점차 변화된 것이란다... 그리고 이 산골마을의 이름이 직전(稷田)인 것도 ‘기장 직(稷)밭 전(田)’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도 서울대 남부 학습림이란다
지나온 반야봉 일대도 서울대 남부 학습림이고, 호남정맥길의 광양
백운산도 서울대학교 남부 학습림인데 이곳을 지리산 원시림이라 하여
산림의 임상실험을 많이 하는 곳으로 생강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신갈나무,
산초와 초피나무 등 다양한 수목의 종류가 있으나 지리산의 다른 지역처럼
아름드리 큰 나무는 별로 보이질 않는데, 예전에 도벌과 전화(戰火)로 인한
피해 때문이라고 한다
뒤돌아 본 피아골의 모습
표고막터(496m:14:05)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표고버섯을 재배한데서 유래한 이름이란다
표고막터부터는 길이 무지하게 좋아진다
예전에 숯가마와 벌목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 생긴 도로란다
이곳도 밥그릇 싸움이 치열합니다
야생 차밭(茶田)인가?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한방울씩 떨어지는 비를 맞지않기 위해서...
드디어 등로를 벗어나 직전마을 입구로 들어선다
직전마을 입구(14:15)
피아골대피소에서 이곳까지 나홀로 걸어왔다
마을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주막들이 보이길래 이곳의 특산물인
구례 산수유막걸리 한잔이 생각나서 주막으로 들어서는데
어~~~랴 버스에다 갈아입을 옷가방에 지갑을 넣어놓고 온 걸 어쩌나
하는 수 없이 입맛만 다시고 부지런히 연곡사 주차장으로 향한다
도로에서 바라본 직전마을의 모습(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소재)
폔션과 주막들이 즐비하다
직전마을 유래비
피아골이란 이곳 화전민들이 곡식 종류의 하나인 피를 많이 재배하여 생긴 이름인 ‘피밭골’에서 유래하였다.
피아골 입구의 직전리(稷田里)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한국전쟁 중 빨치산 전라남북도 총본부가
이곳에 있어, 소탕작전 시 동족상잔의 비극이 서려 있는 곳으로 피의 계곡으로 연상되어 피아골로 더 유명하다.
직전마을 관광안내도
연곡사 일주문(14:45)
연곡사 [鷰谷寺]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지리산 피아골 입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로 545년(신라 진평왕 6) 연기조사가 창건했으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이르기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유명했던 곳으로 절의 이름은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큰 연못에서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법당을 세운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복원되었으나,
1910년 고광순이 의병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왜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다시 불타버렸다.
그뒤 곧 중건했으나 6·25전쟁 때 다시 폐사되었으며, 오랫동안 사찰 내의 분규와 불편한
교통사정으로 인해 재건되지 못하다가 1965년 대웅전만 건립했다.
1981년 정부와 신도들의 지원을 받아서 구법당을 없애고 대신 그 자리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대규모 대웅전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 뒤편에 있는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 제53호)를 비롯하여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 제54호)·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보물 제153호)가 남아 있고,
이 절과 좀 떨어진 곳에 구례 연곡사 3층석탑(보물 제151호)과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보물 제152호)
등이 있으며 1967년 3층석탑을 해체·수리할 때 하층기단에서 동(銅)으로 만든 불입상 1구(동국대학교 박물관)가
발견되었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연곡사는 지금 국화 축제중이다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삼홍루(三紅樓)가 나오고 삼홍루를 통과하니
좌측으로 국화로 장엄한 미륵불과 삼층석탑(보물 제151호)이 보인다
국화로 장엄된 미륵불과 삼층석탑의 모습
뒤돌아본 삼홍루의 모습
전각의 형태가 마치 부석사의 안양문을 연상케 한다
대적광전 가기전 마당에는 쌍미륵불이 있고 국화로 단장한 포토존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연곡사 대적광전(大寂光殿)
대적광전은 불교 사찰에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으로 모시는 당우(堂宇)로서
화엄전(華嚴殿)·비로전(毘盧殿)이라고도 하며 주로 화엄종 사찰에서 본전으로 세우고
비로자나불을 모시며 비로자나불이 있는 연화장(蓮華藏) 세계는 장엄하고 진리의 빛이
가득한 대적정의 세계라 하여 전각 이름을 대적광전이라고 한다.
화엄종의 사찰에서는 주불전이 아닐 경우에는 비로전이라 한다.
화엄전이라는 이름은 《화엄경》에 근거한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한국의 선종사찰에서는 대개 삼신불(三身佛) 사상에 따라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을 삼존불로 모신다.
본존 비로자나불의 수인은 오른손으로 왼손의 검지를 감싸쥔 지권인(智券印)이며, 이것은 이(理)와
지(智), 중생(衆生)과 부처(佛), 어리석음(迷)와 깨달음(悟)이 본래 하나라는 것을 상징한다.
비로자나불의 좌우에는 지혜의 신 문수보살과 덕행의 신인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모시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삼존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두어 모두 5불을 모시기도 한다.
연곡사 관음전
다가오는 10월 28일에 관음전 점안식 준비로 연곡사는 무척 바쁘다
불사라도 조금 했으면 좋으련만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으니 그림의 떡이다
부처님 죄송합니다... 어리석은 중생을 용서하소서...
대적광전 앞에서의 인증샷
대적광전 마당에서 바라본 삼홍루(중앙)와 청허당(좌측)의 모습
연곡사 명부전(冥府殿)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상징하는 사찰 당우 중 하나로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법당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脇侍)로 봉안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며,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한다. 이 밖에도 판관(判官) 2구,
녹사(錄事) 2구, 문 입구에 장군(將軍) 2구 등 모두 29개의 존상(尊像)을 갖추게 된다.
이들 중 주존불인 지장보살은 불교의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겠다는 대원을 세웠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명부전은 조상의 천도를 위한 근본 도량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또 시왕은 지옥에서 죽은 자가 지은 죄의 경중을 가리는 10명의 왕이며, 일반적으로
대표적인 지옥의 왕이라고 생각하는 염라대왕도 이 10명의 지옥왕 가운데 다섯번째 왕이다.
원래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 뒤에는 100일·
소상(小祥)·대상(大祥)까지 열 번에 걸쳐 각 왕에게 살아 있을 때 지은 선악의 업을
심판받게 된다고 하여 죽은 사람의 명복을 위하여 절에서 재(齋)를 모시게 된다.
이 때 명부전에서 재를 모시게 되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자비를 빌려 시왕의 인도 아래
저승의 길을 벗어나 좋은 곳에서 태어나게 하고자 하는 데 있다.
명부전의 주불인 지장보살의 모습
명부전을 배경으로 인증샷
명부전 옆으로 가서 뒷쪽으로 오르면 연곡사 동승탑(국보 제53호), 북승탑(국보 제54호)이 있어
참배를 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배가 엄청나게 아파온다... 하는 수 없이 포기하고 해우소로 향한다
대적광전에 바라본 연곡사
신라 진흥왕 5년(544년) 지리산 서쪽 골짜기에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
제비가 노니는 연못을 보고 상서롭게 여겨 절을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전국 승군
총본산으로 서산·사명대사가 승군을 훈련·총지휘한 호국불교의 산실이다.
연곡사는 화엄사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됐다. 6·25전쟁 때도 지리산
빨치산과 토벌대와의 치열한 전투로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래서인지 연곡사는 가을단풍 때 가장 북적인다. 붉기 때문이다.
연곡사는 이름난 스님이 죽은 뒤에 그 유골을 안치한 부도(浮屠)로 유명한 절이다
조선조 조 21년(1745년) 무렵 연곡사는 왕가에 신주목(위패를 만드는 나무)으로
쓰이는 밤나무를 내는 율목봉산지소(栗木封山之所)로 지정되기도 했다.
해우소 가는 길
연곡사 해우소
우리나라 화장실 가운데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선암사 뒷간(전라남도 문화재 제214호)을
연상케 할 정도로 너무나 흡사하다
문짝도 없는 해우소에 앉아서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나니 아픈 배는 씻은듯이 나은 느낌...
해우소(解憂所)란 뱃속에 쓸데없는 것이 들어 있으면 속이 답답하여 근심 걱정이 생기니
그것을 다 버리라는 뜻에 유래된 뜻에서 佛家에서는 화장실을 해우소라 부른다
해우소에서 시원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나니 아픈 배는 사라지고, 다시 동승탑과
북승탑, 소요대사 부도를 참배하고 싶지만 너무 시간이 지체된 것 갚아 동료들에게 민폐가
될까봐 다음에 연곡사를 자세하게 보기로 하고 주마간산 (走馬看山)격으로 참배하고
일주문을 나서 연곡사 주차장으로 향한다
연곡사 주차장의 노점상
버스에 올라 장비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후미가 올때까지 휴식을 취한 후 식당으로 향한다
고원흑돈 식당(17:30)
연곡사의 정반대에 있는 지리산 고원흑돈(남원시 산동면 관산리 소재)으로 와서
맛있는 돼지고기에 소주로 멋진 저녁만찬을 즐긴 다음에 서울가는 버스에 오른다
예전에 지리산 신년일출 산행때 와 본 곳이데... 고기맛이 괜찮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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