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6년 4월 3일
☞산행날씨: 잔뜩 흐린날씨에 가끔 빗방울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30km (반월봉 왕복, 약간의 알바) / 8시간 10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다은마을 정류장-금곡초교-GS주유소-육탄10용사 기념공원 정류장-반송초교 사거리
임도사거리-필봉갈림길-86.8m봉(H)-화성교육청 오산지청앞-헬기장-92m봉-임도-95.5m봉
북오산나들목-예비군훈련장-작은반월봉-죽미고개-UN초전기념비-텃밭-경부선 철로육교
삼미공원-팔각정-꿈두레도서관-육교-암벽훈련장-봉담~동탄간 고속도로-세교터널-여계산
애기바위-공동묘지-안부-석산갈림길(왕복)-126m봉-동물이동통로-92.4m봉-노적봉 갈림길
102.4m봉-노적봉-노적봉갈림길-안부-310번지방도-116.8m봉-수면리갈림길-풍양조공묘지-장수봉
가장동갈림길--73.3m봉-안부-시멘트도로-창원유공묘지-70.6m봉-NO6송전탑-임도-삼거리-폐교
돼지기사식당-썬모텔-314번 지방도-GS25시-82도로 삼거리-벌음삼거리-서부모터스-경주김공묘지
대전기계공업앞-시멘트도로-중앙폴라텍 제2공장-두곡1교-화성유리-자연환기-무명봉-임도
경동나비엔 서탄공장-전주최공 묘지-2차선도로-무명봉-공장도로-미주테크 사거리-밭-65.5m봉
임도-갈림길-선우ENG앞-사거리-대길고물상-(주)성진지관-묘지-37.7m봉-공동묘지-시멘트도로
농로-탄탄전기앞-말머리 마을-배밭 노란물탱크-농로-진위천 합수점
☞소 재 재: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정남면 / 오산시 / 평택시 서탄면
지난 1주일간 정신없이 한 주를 보냈지만 정신이 멍하고 삶에 대한 회의를 엄청 느낀다
사연은 이렇다... 내가 하는 사업은 요즘 주 고객이 40대 후반부터 5~60대 층이고
그렇지 않으면 주로 사무실과 매장쪽의 고객이며 대체적으로 안면으로하는 口傳으로
찿아오는 고객이 많은편이다... 근데 보름전에 누구의 소개로 왔다는 31살짜리
젊은 친구가 찾아와서 인테리어를 의뢰하는데 건설회사에 인테리어 설계를 담당한다면서
계약을 해놓고 수시로 작업을 바꾸고... 소위 말해서 엄청난 갑질을 해대기에 이보게!
젊은이 내가 자네 거래처도 아니고 인테리어를 안다는 친구가 이렇게 바꾸면 인력 조달은
어떻게하며 작업은 언제 마무리 하느냐 하니까... 이 넘이 한다는 얘기가 그럼 시공한
물건을 가져가라면서 잔금 몇백을 주지않고 열흘 이상 애를 먹이는게 아닌가...
그렇다고 누가 소개해서 왔다는데 성질대로 할 수없어 조용히 달래면서 정리를 하려니
오장육부가 다 뒤집어지는게 미칠지경이더라... 겨우 토욜 저녁 늦게 그 건을 마무리하고
나니 모든게 회의가 든다...그래서 옛부터 장사꾼 똥은 개도 안먹는다 그랬던가
엄청난 스트레스가 쌓여 저녁늦게 동네 후배하고 좀 늦게까지 술한잔하고 집에와서 잠에 골아
떨어졌다 일어나니 새벽 5시다... 기분도 그렇고하여 가까운 황구(청명)지맥 마지막 구간을 나선다
금곡초등학교에서 북오산 나들목까지의 지도(박 종율선생 자료인용)
뱅뱅사거리 버스 정류장(05:50)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12분만에 뱅뱅사거리 버스정류장에 오니 어제 저녁에 마신 술 때문인지
아직도 정신이 얼얼하다... 하나 오늘은 산행이라기보다는 도시화된 길을 걷기에 큰 무리는 없을듯 싶다
다은마을 버스정류장(06:55)
뱅뱅사거리에서 06시10분 동탄가는 M4403번 버스를 동탄 다은마을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한 을씨년스러운 날씨이긴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산행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베낭에 레인커버를 씌우고 길을 나선다
금곡초등학교(07:00)
3개월만에 다시 찿은 이곳... 본격적인 산행길에 나서지만 이곳 화성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도시 성장속도가 빨라서 온 천지가 아파트며 공장이라 맥산행하기가 가장 난해한 곳이다
금곡초등학교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니 좌측에 GS주유소가 보이고 주유소앞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육탄 10용사 기념공원 버스 정류장(07:10)
6·25전쟁 발발 이전 1949년으로 가게되는데 그 당시는 한반도가 6·25전쟁으로
휩싸이기 전이었지만 남북간에는 크고 작은 국지전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1949년 5월 4일에 일어났던 전투가 바로 이 10용사로라는 도로명과 관련이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남과 북이 38선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10명의 용사들은 북한군에게 불법
점령당한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포탄을 안고 적진에 뛰어 들었다
당시 김종훈 소령의 지휘에 따라 국군은 7부 능선까지 진출했지만 적에게 그대로 노출되는
경사지대에서 큰 어려움에 빠져있었는데 수적으로도 열세했지만 특히 북한군의 토치카
(지하 참호)에서 맹렬하게 쏘아대는 기관단총 사격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된다
결국 고지 능선에서 우리 국군의 공격이 좌절되면서, 송악산 능선에서 버티고 있는
북한군의 토치카를 파괴하는 것만이 38선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토치카를 직접적으로 파괴시킬 수 있는 무기가 당시에 없었기 때문에, 이를 파괴할
유일한 방법은 특공대를 편성해 육탄으로 위험을 무릎쓰고 공격하는 것이었고 이에 국군 제1사단
11연대는 적진에 폭탄을 안고 뛰어들 용사를 모집하고자 했는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적진을
향해 달려 나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10명의 용사들이 지원을 하게 된다
▲경기도 화성시에 건립된 육탄10용사 공원
가장 먼저 특공대로 자원한 병사는 연대 하사관교육대의 서부덕 이등상사였고,
이어서 김종해 상병 등 그를 따라 지원한 병사들이 모여 10명의 특공대가 구성되었다.
이들은 81mm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장치한 급조 폭발물을 가지고 적진으로 돌격한다.
10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토치카를 파괴한 덕분에 국군은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고 그 결과
137명 사살, 기관단총 등 114정의 무기 노획 등을 이뤄냈고 10용사들은 그 자리에서 산화했다.
안타까운 희생으로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특공대에게는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서부덕 상사는 중위로, 남은 인원들은 상사로 추서되었다.
후에 이들을 ‘육탄10용사’로 부르게 되었고, 이들 10용사 중 3명이 바로 경기도 화성 출신이었다고 한다.
동탄 인근이 그들의 고향인데 그 명단을 보면 김종해 상등병(경기도 화성군 출생으로 동찬초등학교 출신),
윤승원 상등병(경기도 화성군 출생으로 화산초등학교 출신), 이희복 상등병(경기도 화성군 출생)이다.
(자료인용)
그 사건으로 이곳 동탄 신도시에서 ‘10용사로’라는 도로명을 지었다고 한다
반송초교앞 사거리(07:15)
신호를 따라서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에 주다산교회 옆 절개지를 치고 오른다
간벌을 한 다음에 방치된 나뭇가지만 어지럽게 널려있다
영양천공과 부인 영월엄씨의 합장묘를 지난다
묘지 뒷쪽을 걸어 비닐하우스 쪽을 향해가니...
필봉으로 오르는 제도권 등로가 나오고...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걷는다
등로에서 1.2km정도 벗어나 있는 필봉의 모습
필봉(筆峰:144m)은 조선시대 영조 말엽에 정조대왕이 왕위에 올라 효를 다하기 위해서 양주 배봉산에 있는
사도세자의 능을 태안 안녕리 화산으로 능을 이장시키고 또한 능을 가까이서 참배하고자 도성(都城)을
수원으로 이전하여 천도하려 하였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그 실현을 보지 못하고 능행차만 자주 다니셨다.
어느날 능행차 도중 정조대왕은 수원 유수를 불러, 이곳 고을의 이름을 물으셔서 "문시백(文市百)
송산림(松山林)" 이라고 아뢰니 정조대왕은 "문(文)에는 필(筆)이 있는 법이니, 필봉이라 고치라"고 하였다.
안부(07:25)
체육시설이 있는 등로 우측에는 매화꽃이 만발하고...
필봉 갈림길이 나오고 지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필봉갈림길에 있는 이정표
86.8m봉(07:30)
오산교육지청앞 도로(07:33)
내일이 淸明이니 봄은 정녕 맞것만 아직도 난 春來不似春이니...
1주일사이에 완연한 봄이 느껴진다
헬기장(07:40)
92m봉(07:41)
92m봉 지적삼각점 표시석
넓은 공터(07:48)
좌측으로는 경기도 화성교육청 오산지청이 보이고 공터를 가로질러 오른다
이런곳은 여름철에 산꾼들에겐 쥐약이지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들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데 장난이 아니다
95.5m봉(07:52)
95.5m봉 정상 4등 삼각점(△용인 408 / 1987복구)
시멘트 도로(07:55)
우측으로 내려섰다가 좌측 시멘트 도로로 향한다
우측 절개지 아랫쪽으로 수도권 제2순환 고속도로 북오산 요금소가 보인다
도로를 따라가다가 우측으로 내려서서 북오산 나들목 회차로 방향으로 걸어간다
북오산요금소에서 92.4m봉까지의 지도
회차로를 나와서 북오산요금소를 바라보며 좌측의 철계단 방향으로 올라선다
북오산요금소(08:05)
철계단에서 바라본 북오산나들목
북오산 나들목(北烏山交叉路, N.Osan IC)은 경기도 오산시 내삼미동에 설치된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 4번 교차로로 나들목 진출입로는 오산시 외삼미동에
연결되어 있으며 예전에는 세교 나들목(洗橋交叉路, Segyo IC)으로도 불리었다.
철계단을 따라 올라서니...
농장 마당이 나오고.. 마당을 가로질러 산으로 올라서니 예비군 훈련장이 나온다.
예비군 훈련장을 지나 길이없는 능선을 치고 오르니...
비교적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반월봉(半月峰:117.3m:08:15)
경기도 오산시 세교동, 외삼미동,·내삼미동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건릉(健陵; 정조와 효의황후의 무덤)에 딸린 산이라 하여 능산(陵山)이라고도 불린다.
산 서쪽에 죽미령(竹美嶺)이라는 고개가 있는데 1950년 7월 5일 이곳에서 한국전쟁의 유엔군 첫 전투가 벌어졌다.
죽미령에는 이 전투를 기념하고,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82년에 세운 유엔군초전기념비가 있고
반대쪽에는 수도권 제2고속도로 북오산 나들목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반월봉은 정조(正祖) 때 발간된《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수원부지도에 처음 등장한다.
1793년(정조 17년)에 발간된《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에는 삼미면(三美面)으로 나온다.
이후 계속 삼미면으로 불리다, 1831년(순조 31) 발간된《화성지(華城誌)》부터 문시면으로 나온다.
한현우 선생께서는 이곳을 작은 반월봉이라고 적어놨다.
한번도 뵙지는 못했지만 산행 열정만큼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듯 하다
등로 곳곳에 군 시설물이 보이고...잠시후 죽미고개로 내려선다
유엔 창설 후 유엔군의 첫 전투 '오산 죽미령전투'와 유엔군 초전기념관
오산시 경기대로 742 에 위치한 유엔군 초전 기념관은 북한군의 불법 남침이 개시된
1950년 6월 25일에서 10일 뒤인 7월5일. 유엔군이 한국 전쟁에 처음 참전 했다.
일본의 구마모도에 주둔하던 미8군 소속 24보병사단의 스미스 중령이 인솔하는
보병 1대대와 페리중령이 인솔하는 52포병 대대가 항공편으로 부산에 7월 1일
도착 한 후 육로로 오산의 죽미령에 7월 5일 새벽에 도착하였다.
새벽 3시에 빗속을 뚫고 죽미고개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는 도로와 철로부근에
진지를 구축하고 도로를 포함한 좌측 능선에 B중대를, 철로 좌측편에 있는 진지내 우측
고지에는 C중대를 배치하고 105mm포대를 죽미령 후방 수청리에 포진 시켰다
3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보병을 향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아댔고
아군,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져 갔다. 그러나 북한군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동시에 전차가 중앙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은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6시간 15분동안 전투로 탄약과 병력이 소진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2시 30분 퇴각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540명 중 보병 150여 명, 포병 31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으며,
북한군 역시 약 5,000명 중 13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오산 초전(初戰) 기념관
오산 죽미령전투는 유엔군의 참전을 북한군에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이 후 북한국의 불법
남침을 격퇴하기 위해 유엔은 16개국에서 전투병력을 5개국은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했다.
유엔군의 파병은 유엔 창설이후 처음으로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펼친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다.
도로 맞은편에서 바라본 초전기념관
오산시는 이 전투에서 희생된 유엔군의 넋을 추모 하기 위하여 죽미령전투가 있었던
자리에 2013년 4월 유엔군 초전 기념관을 건립하고 매년 한미 양국군 합동으로 위령행사를
거행하고 있으며 유엔군 초전 기념관은 국가보훈처가 현충시설로 지정 고시 하였다.
죽미고개(竹美嶺:08:22)
오산시 세교동과 내삼미동 경계에 있는 고개로 1번국도와 바로옆에 경부선
철로가 지나가며 고개 정상에는 UN군 초전기념비와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예부터 마을에 대나무가 아름답다 해서 죽미, 죽밑, 죽밋이라고 불렸다.
이 명칭은 죽미마을, 검디마을, 능골마을 등 3개 마을을 통칭한 것이다.
먼저 죽미 마을은 내삼미2동 서쪽 죽미령(고개) 밑이다
신호를 따라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에 내삼미동 방향으로 간 다음 우측으로 올라선다
내삼미동(內三美洞)은
1900년대 초 경부선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의 반월봉을 경계로 내삼미리와 외삼미리로 분리된 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문시면 관할이 되었다. 1941년 수원군 오산면 관할을 거쳐,
1960년 화성군 오산읍 관할이 되었으며 1989년 오산읍이 시로 승격할 때 행정동인 신장동의 법정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는데 삼미동(三美洞)은 원래 아름다운 소나무가 많아서 소나무골[松里]로 불렸다.
뒤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길 때 이 지역에 거둥해 송산골의 금로대송(錦老大松),
점이골(현 죽미령)의 대나무, 문시·오미의 오동나무가 아름답다고 해서 삼미가 되었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안산미·증밑이 있고 서쪽으로 경부선 철도가 지나고, 국제연합군 초전비와 문헌서원이 있다.
등로 좌측으로는 수원백씨 문중 묘지가 보인다
수원백씨 문중 묘지를 지나니 舊 UN군 초전기념비가 있다
舊 UN군 초전기념비를 지나니...
지독한 잡목지대가 나오고 조금 지나서 절개지로 내려선다
시멘트 도로를 지나서 밭고랑 사이를 지나간다
밭고랑 좌측 아랫쪽으로는 경부선 철도가 지나고 있는데 초록색 철로 육교쪽으로 간다
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경부선 철로 육교쪽으로 올라선다
경부선 철로육교(08:30)
경부선 철로 육교 위에서 바라본 세마역
육교를 지나니 세마어린이집이 나오는데 좌측으로 꺽어져 삼미공원으로 향한다
삼미공원 초입의 모습
삼미공원쪽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체육시설과 사각정자도 지나고...
삼미공원 갈림길(08:40)
팔각정(08:43)
팔각정 아래 내려서면서 바라본 오산시
팔각정을 내려서니 최신식 건물인 꿈두레도서관이 나온다
꿈두레도서관(08:47)
도서관을 지나 도로로 내려서는데 우측엔 세교파출소가 있다
육교(08:50)
봉담~동탄간 고속도로 아래에 있는 암벽훈련장
고속도로 아래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우측에 있는 신설도로를 따라서 걸어간다
도로 끄트머리에서 좌측의 LH아파트 402동 바라보며 능선으로 오르니...
세교터널 위(09:05)
철계단을 따라서 여계산으로 향한다
초록색 휀스에 가로막혀 갈 수가 없다... 나무를 이용하여 휀스를 넘는다
휀스를 넘으니 잡목으로 등로는 보이질 않고 조금을 지나니 여계산으로 오르는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여계산(如鷄山:159m:09:15)
오산시 금암동·지곶동·세교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산의 형세가 닭의 벼슬처럼 생겼다하여
여계산(如鷄山)이라는 이름이 었으며 조선 중기의 무신인 이괄(李适 1587~1624)이 무술을
연마하던 장군터라는 장소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정상에는 비교적 넓은 공터가 조성되어 있다.
산불초소와 각종운동기구들이 있고 납작삼각점(FOB308)과 기준점과 무명묘지 한기가 정상을 지킨다
경기 남부지역에 있는 오산시의 산 정상에는 그 어디에도 표시석은 보이질 않는다
어느 산꾼이 띠지에다가 여계산이라 붙여 놓은것이 유일하다
애기바위 갈림길(09:18)
여기에서 사고를 친다...이곳까지는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달달 외우다시피 했으니까.
그런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야하는데 독도를 잘못하여 우측으로 향한다
문제의 이정표
애기바위 우측으로 서 있는 이정표에 써있는 애기봉 가는길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그러면서 문제 파악도 안하고 무작정 뚜렸한 길로 부지런히 간다
이곳에는 삼남길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느낌이 이상하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고속도로가 안 나오는데 계속 고속도로가 보인다
그래서 베낭속에 있는 지도를 꺼내 보려는데 어~~~랴 급하게 오느라 지도를 안 가져왔네
참으로 난감하다... 사실 난 혼자 올때는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달달 외우다시피 하면서 나의
머리를 너무 믿기에 걸어가면서 지도를 잘보지 않는 편이라 신경을 안 썼는데 조금 난감하다
하는 수 없이 작년에 이곳을 걸었던 산으로님한테 전화를 걸어 SOS를 요청한다
그리고 다시 여계산 방향으로 되돌아 간다
여계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독산성(禿山城)
독산(禿山)은 벌거숭이산, 대머리산 이라는 뜻이며 이 산에 삼국시대에 쌓았다는 독산성이
있고 성의 정상에 세마대(洗馬臺)가 있는 독산은 독산성·석대산·향로봉 등으로도 불린다.
독산성은 산에 성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향로봉은 멀리서 보면 향로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삼국시대 백제가 독산책(禿山柵)을 세웠다는 기록과, 독산성 안에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약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었고 성 둘레 3,240m, 석축 약 400m와 4개의 성문이 남아 있다.
백제시대에 축조하여 통일신라·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까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1593년(선조 26) 7월 전라도 관찰사겸 순변사
권율(權慄)이 2만의 근왕병(勤王兵)을 모집, 이 성에 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1594년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인근 백성들이 합심하여 허술한 성의 모양을 다시 갖추고 1602년
변응성(邊應星)의 지휘 아래 다시 수축하였으며 1796년(정조 20) 개축하였고 이 당시 성의 둘레는 1,800보(步),
4개의 문이 있었다. 한편 1593년 권율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은
벌거숭이산[禿山]에 축조한 이 성에 물이 없을 것으로 짐작하고 물을 부어 조선군을 조롱하였다그
러나 권율장군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백마를 산 위로 끌어 올려서 쌀을 말에 끼얹져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자
왜군은 이에 속아 퇴각하였다이때부터 이곳을 세마대(洗馬臺)라 불렀다하며, 1592년 여기에 세마대를 세우고
병기창을 두고 무예연습을 하게 하였으며 1957년 세마대를 옛 자리에 복원하였다
다시 돌아온 갈림길(09:40)
금암동 애기바위
금암동은 예로부터 물이 많은 동네로 돌에 얽힌 전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중에서 가슴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산꼭대기의 애기바위는 듣는 사람들을 안타 깝게 한다.
금암동의 서북쪽 산꼭대기(여계산)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칼로 잘려진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모양새를 갖게 된 다음과 같은 슬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선조 25년 조선은 당파싸움과 동시에 일본의 침략으로 수도 한양을 버리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조선팔도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은 왜구들은 명나라 군대의 참전으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약탈지에 대한 노략질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어느 날 왜군을 이끌고 온 장수가 노략질을 위해 금바위골(금암동)에 들어와
금바위 골의 지세를 보고, 앞으로 범상치 않을 인물이 태어날 예감에 위협을 느낀
왜장은 부하들을 시켜 금바위골에서 조곶이(지곶동)로 넘어가는 고개에 길을 내어
산의 기 운을 끊어 놓고, 모든 젊은 남자와 아이들까지 몰살시키고 말았다.
한편, 남편을 왜군의 손에 잃은 젊은 아낙이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는
이상하게 양쪽 어깨죽지 밑에 새의 깃과 같은 작은 날개가 달려 있었다.
이것을 본 젊은 아낙은 아 기가 커서 백성들의 장수가 될 것이라 믿고 아기의 출생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마침 아기의 집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밑에 자리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도 아 기가 태어난 것을 알지 못했다.
젊은 아낙은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바가지를 옷 속에 넣어 만삭의 배를 만 들고 아기를
뒷산 꼭대기에 있는 큰바위 틈에 몰래 갖다 놓고 매일 밤 몰래 산에 올 라가 아기에게 젖을 주었다.
마을 안의 남자란 남자는 모두 죽인 왜장은 안심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마을을 빠져나 가다가 만삭의 몸을 하고 있는 젊은 아낙을 발견했다.
왜장은 배속에 들어있는 아기 가 후환이 될 염려에 젊은 아낙을 잡아와 배를 갈랐다.
그런데 있어야 할 아기는 나 오지 않고 바가지만 깨져 나온 것이다.
아기를 피신시킨 것을 안 왜장은 몹시 화를 내며 젊은 아낙에게 아기를 숨긴 곳을 대 라고 고문했다.
그러나 아기 엄마는 끝내 말하지 않고 고문을 못 이겨 숨을 거두고 말았다.
왜군은 마을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기는 발견할 수 없었다.
아기 엄마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난 새벽, 마을 뒷산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왜장은 부하들을 이끌고 아기 울음소리를 따라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울음 소 리가 나는 곳엔 큰바위가 있어 바위 주변을 뒤져보았지만 아기를 찾을 수 없었다.
왜장은 직접 큰 톱으로 바위를 자르기 시작했고 금바위골에서 태어난 아기장수는 왜군의 손에 죽고 말았다.
왜장의 손에 잘려진 바위를 이때부터 애기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애기바위는 톱으로 잘려진 몸뚱이를 가지고 안타깝게 자리하고 있다
애기바위 유래 안내판
20여분간의 알바를 끝내고 애기바위로 되돌아와 좌측으로 내려서니 공동묘지가 나온다
공동묘지에서 바라본 석산의 모습
안부(09:55)
안부를 가로질러 오르니 로프가 있는 곳이 나오고 석산 갈림길이 나온다
석산 갈림길(10:00)
이곳에서 좌측으로 2분거리에 있는 석산으로 향한다
석산(石山:135.2m:10:02)
석산 정상 삼각점(△용인 452 / 1982복구)
다시 돌아온 석산갈림길(10:05)
이정표에는 좌측으로 석산 정상으로 표시를 해놨다
126m봉(10:08)
정상에는 쉼터와 운동기구와 현위치 석산정상표지판이 있는데 오산시는 이곳을 석상정상이라 부른다.
노적봉 2.4km.세마대5km의 이정표가 서 있고 벤취와 의자가 있는 이곳에서 물한모금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궐리사 방향으로 내려가면 오산시 신장동이다
오산시 신장동은 1899년(광무 3)에는 수원군 문시면·초평면 지역이었고, 1914년
문시면·초평면 외에 어탄면 지역도 일부 포함되었던 매우 복잡한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오산시의 다른 동과 마찬가지로 1989년 궐리 일부와
수청리·금암리·내삼미리·은계리를 통합하여 신장동으로 개편되었다.
행정동인 이 동은 법정동인 수청동·금암동·은계동·내삼미동·궐동(일부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금바위·안삼미·건너마을·독골 등이 있다.
법정동인 궐동은 궐리사(闕里祠)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궐동의 범위는 매우 넓어 오산천변의 북쪽을 경계로 하여 남촌동 관할인 대호밭·궁터마을까지 이른다.
궐리가 문헌상에 등장한 것은 1792년(정조 16)이며, 지금도 궐동을 비롯하여
오산시에는 곡부 공(孔)씨가 많이 살고 있어 궐리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산림환경연구소(구 임업시험장), 농촌지도소 등이 있으며, 경부선 철도와 1번 국도가 지난다.
그러나 전형적인 전원도시로 상업지역은 적고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약간의 휴식을 취한후에 노적봉 방향 이정표를 따라 내려선다
126m봉에서 내려서니 목책이 처져있는 묘지 아래로 오산산업단지가 보이고 그 너머로 가야할 지맥길이 보인다
조금을 더 내려가니 우측 영묘단에는 종친들이 다 모였는지 묘지에 사람들이 많다
아!~~~그러고 보니 내일이 청명이고 모래가 한식날이구나... 나도 내년엔 산소에 가봐야겠다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는 산수유
동물이동통로(10:20)
동물이동통로 주위에는 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고 산수유, 조팝나무, 벌개미취 등이
보이는데 동물의 이동을 도와주는게 아니라 사람들의 산책코스로 만들어 놨다
등로에서 바라본 오산산업단지
다시 등로로 올라서니 우측은 아파트단지, 좌측은 산업단지 개발로 조만간 지맥길이 사라질 듯 싶다
92.4m봉(10:25)
넓은길을 조금 더 오르니 갈림길이 나온다
92.4m봉에서 시멘트 도로까지 지도
갈림길(10:35)
이곳에서 황구(청맥)지맥길은 좌측의 희미한 등로로 꺽어지고 우측은 노적봉으로 가는 길이다.
시간적으로 노적봉을 갖다와도 될 듯 싶어서 노적봉으로 향한다
121.4m봉(10:40)
벌목지 사이로 가야할 노적봉이 보이고...
노적봉(露積峰:160.3m:10:50)
경기도 오산시 서랑동과 화성시 정남면 고지리의 경계 지역에 있는 산이다.
산의 형태가 노적가리(한곳에 수북이 쌓아 둔 곡식 더미)와 비슷하다 하여 노적봉(露積峰)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여인이 단정히 앉은 모양이라 하여 옥녀봉이라고도 부른다. 북쪽 산기슭 아래에는 1955년 축조한 서랑저수지가 있다.
정상은 숲속의 조그만 공터에 삼각점(표시없음)이 있으며, 벤취1개와 운동기구가 있고,
숲속에도 벤취 하나가 있고 능선을 따라 가보면 서쪽끝이 삼각점 공터보다 높아 보인다.
판독이 불가능한 노적봉 정상 삼각점
만개한 산벚꽃 한그루가 산꾼 범여를 반긴다
북쪽 능선 아랫쪽에는 서랑저수지가 보인다
노적봉 내려오는 길에서 바라본 독산성과 세마대
다시 갈림길(11:05)
노적봉까지 왕복 2.3km거리 30분 정도이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갖다왔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안부(11:12)
황구(청명)지맥을 걷는 산꾼들이 별로없는지 산꾼들의 흔적을 만나기가 그리 쉽지않다
아무것도 써있지 않은 빛바랜 시그널 하나가 왜 그리도 반가운지...
310번 도로(11:15)
310번 2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르니 길은 보이질 않고 무조건 치고 오른다
엄나무에 순이 보이기 시작한다
116.8m봉(11:23)
정상에는 운동기구 시설과 나무로 만든 의자, 이정표가 있다
116.8m봉의 이정표
수면리(水面里) 갈림길(11:25)
화성시 정남면 동쪽 끝에 위치한 마을로 예부터 물이 귀하여 농사짓기에 크게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물을 얻기를 원하여 물먼이, 물면이, 수면동이라고 부른데서 수면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수면동이 있다.
묘지를 지나면서 좌측을 바라보니...
등로 좌측아래는 공동묘지가 있고 지나온 여계산과 석산이 보이며 오산시 가장동에 있는
오산산업단지가 보인다... 오늘 산행 등로는 ⊂자 형태로 빙빙 돌아서 지맥길을 걸어간다
또다시 넓은 공터에 자리잡은 묘지를 만난다
묘지위에 서 있는 이정표
豊壤趙公 묘지(11:28)
풍양조공묘지의 좌.우에 있는 묘비석
이른 아침에 집을 나오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탓인지 이른 시간임에도 허기가 진다
까이꺼~~~ 세상사 별거있나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자면 될 것을...
오늘도 풍양조씨의 멋진 亡者 밥상을 빌려 따뜻한 물에다 국수를 끓이고 캔맥주 하나 마시니
세상사 그 어느것도 부럽질 않으니... 근데 젓가락을 가져오질 않아 나무를 꺽어 국수를 먹는다
남은 물로 커피 한잔을 타 마신 다음에 또다시 베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뚜렸한 등로이라 길은 무쟈게 좋다... 정상에 오르니 체육시설이 있는 곳이 나오는데 장수봉인 모양이다
장수봉(將帥峰:122m:11:45)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수면리와 오산시 가장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고 넓고 평평하다
지도상에는 122m봉으로 표기가 되어있고 장수봉에 대한 자료는 전혀없다
조금전에 풍양조공 묘지에는 장수봉이란 이정표가 있으나 정작 정상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는 오산시의 등로관리... 그져 아쉽기만 하다
편안한 등로로 내려서니 우측에는 잣나무 군락지가 보인다
가장동(佳長洞) 갈림길(11:55)
오산시 가장동은 서쪽으로 화성시 정남면, 남쪽으로 서동, 북쪽으로 지곶동과 접한다.
북쪽에 석산(135.3m)이 솟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초평면(楚坪面) 지역이었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수원군 성호면에 편입되었다.
1941년 수원군 오산면 관할을 거쳐, 1960년 화성군 오산읍 관할이 되었다.
1989년 오산읍이 시로 승격할 때 남촌동의 법정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가장자리를 뜻하는 가장골, 또는 마을이 길고 주위가 아름다워 가장(佳長)이라고
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어떤 설이 정확한지는 확실하지 않다.
작은 내[川]인 가장천이 흐르고, 330번 지방도가 동서로 지난다.
면적에 비해 상주 인구가 적고, 주민 대부분이 근교농업에 종사한다.
가장산업단지가 들어서 있고, 요양시설인 오산정신요양원이 있다.
묘지를 따라서 편하게 빠른 속도로 걷는다
73.3m봉(12:00)
여계산 이후로 처음으로 선답자 여영님의 반가운 시그널을 만난다
73.3m봉 삼각점(판독불가)
73.3m봉에서 대전기계공업 앞까지의 지도
안부(12:02)
시멘트 도로를 따라 가다가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창원 유씨 묘지를 지나고...
주택가를 기로질러 오르니...
70.6m봉(12 :10)
NO6송전탑(12:12)
송전탑을 지나니 좌측으로 묘지와 배밭이 보이고...
넓은 임도를 따라서 빠르게 걷는데 빗방울이 한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시멘트도로가 나오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다시 좌측으로 꺽어지니...폐교가 나온다
폐교(12:17)
벚꽃나무가 가로수인 도로를 따라가니...
돼지네 기사식당과 로즈모텔이 보이고...
썬모텔을 지나니... 314번 도로가 지나가는 사거리가 나온다
314번도로(12:20)
편의점에서 목이말라 캔맥주 하나를 사서 마시면서 걷는다
82번 도로(12:30)
벌음 (伐音)삼거리(12:32)
오산시 벌음동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지맥길을 이어간다
벌음동(伐音洞)은 버르미라고도 부르며 이 마을 모퉁이에서 이상한 큰소리가 나면 마을이
편안치 못하다고 하여, 이 소리를 없엔다는 뜻으로 "벌음리(伐音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벌음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고개쪽으로 오르니...
중고차 매매업소인 서부모터스가 보이고...
서부모터스 끄트머리 쪽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능선으로 오른다
참 곱다
의외로 길은 좋다
공장 담벼락을 끼고 지맥길을 이어간다
경주김씨 계림공파 가족묘(12:44)
대전기계공업앞(12:45)
공장 도로를 따라서 직진한다
대전기계공업 앞에서 새말저수지까지 지도
(주)중앙폴라텍 제2공장도 지나고...
쓰레기가 버려져 있는 지저분한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두곡1교앞(12:50)
등로 좌측 아래에는 새로생긴 4차선 도로가 보인다
화성유리 공장을 바라보며 걷는다
화성유리공장을 지나니...
잠시 후 자연환기공장 마당을 지나고...
야트막한 능선으로 올라선다
길은 무쟈게 좋고...
이 능선도 조만간 사라질듯 싶다
황구(청명)지맥 한가운데 경동나비엔 보일러 공장이 점령하고 있다
하는 수 없이 경동나비엔 공장 철조망을 따라서 내려간다
경동나비엔 보일러 공장 신축시 이곳에 고인돌과 유물이 출토된 모양이다
경동나비엔 서탄공장 정문앞(13:05)
공장 좌측으로 오르는데...
수로 우측의 공장안에는 축구장이 보이고...
잡목을 헤치고 능선으로 오르니 바로 아래 전주최공 묘지가 있다
전주최공 묘지(13:15)
내일이 청명이고 모래가 한식이라 그런지 미리 성묘온 가족들을 만나는데
이런곳에 베낭을 메고 다니는 날 보고 나물캐러 다니는 사람인줄 아는가 보다
막걸리 한잔을 권한다... 고맙게 받아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공장 절개지를 따라서 내려간다
2차선 도로(13:17)
4차선도로를 가로질러 올라서니...천주교인이었던 부부묘지가 나온다
산 속에 골프공이 많이 보인다...근처에 인도어골프 연습장이 있나?
무명봉(13:20)
이곳에서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진다
공장지대가 보인다
공장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도도리(道道里),삼거리(13:25)
도도리(道道里)는 마을 전후좌우로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길이 이어져 있어 유래된 이름이다.
(주)미주테크 사거리(13:27)
미주테크 사거리에서 공장도로를 버리고 우측 묘지위로 올라선다
묘지뒤로 올라서니...
밭이 나오고 밭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사거리에서 헤어졌던 공장도로와 만난 다음에 능선으로 올라선다
미주테크 사거리에서 도로를 따라 오는게 편할듯 싶다... 개고생 하지 않으려면...
65.5m봉(13:35)
이곳에서도 반가운 여영님의 시그널을 만난다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임도가 나오는데 ‘평택 섶길’이라는 띠지가 보인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13:42)
이곳에서 직진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좌측에는 축구장이 보인다
등로옆에 있는 축구장
구상나무가 심어져 있는 도로를 지난다
2차선 도로가 나오고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새말저수지가 보인다
신우ENG 공장을 지난다
마두리(馬頭里)사거리(13:50)
사거리를 직진하여 가는데 우측으로 아이디룩이란 공장이 있다
평택시 서탄면에 위치한 마두리는 서쪽으로 황구지천(黃口池川)이 남북으로 흐르며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말머리, 사업소, 나비들, 장춘동(長春洞) 등이 있으며 마두리는 지형이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말머리 또는 마두라 하였다. 서탄면은 마을 전체가 말의 형상으로 생겼는데,
금암리는 말의 심장부, 사리는 꼬리, 회화리는 앞발에,적봉리는 뒷발에, 마두리는 말머리에 해당한다.
나빗들은 말머리 동남쪽에 있는 나비의 형상같이 생긴 넓은 들인 나빗들 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장춘동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 정착한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나비가
봄을 기다리는 것에 비유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마두사거리에서 진위천 합수점까지 지도
대길고물상도 지나고...
(주)승진지관도 지난다
도로를 버리고 묘지방향으로 올라선다
37.7m봉(14:02)
37.7m봉 삼각점(△용인454 / 1987 재설)
묘지를 가로지른 다음에 다시 밭을 가로질러 내려서니...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시멘트 도로(14:05)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배밭으로 나왔는데 이렇게 바뀌었다
우측에는 개사육장인듯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변해버린 배밭을 지나 농로로 나간다
농로 가운데로 내려서는데 저멀리 진위천 합수점이 안개속에 아련히 보인다
탄탄전기 앞(14:13)
2차선 도로에서 좌측 비포장도로를 가는데 우측엔 공장이 있다
마두리 나빗들 마을로 접어드는데 나빗들은 말머리 동남쪽에 있는 나비의 형상같이
생긴 넓은 들인 나빗들 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장춘동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 정착한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나비가 봄을 기다리는 것에 비유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평택시 서탄면 마두리 나빗들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간다
배밭 아래에 있는 집 사이를 지나 마지막 능선으로 오른다
노란저수조(14:17)
어쩌면 이름없는 이곳이 황구(청명)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셈이다
마을로 내려간다
수문(14:20)
이곳에서 합수점까지 도로를 따라서 약 3km 가량을 걸어간다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면서 지루한게 걸어간다...뭔 지랄이여! 산꾼이 산을 걸어야지
황구지천 / 진위천 합수점(15:50)
드디어 황구(청명)지맥의 합수점인 황구지천이 진위천에 입수하는 지점에서 산행을 종료한다
또 지맥 하나를 접수하는 기분은 뭐랄까... 자꾸만 이 맥길에 중독이 되는 느낌이다
황구지천은 경기도 군포시 삼성산(456m)과 의왕시 오봉산에서 발원하는 하천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러 지천이 합쳐지는 이유에서 광교산과 칠보산 · 석성산 · 청명산도 포함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명칭도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있다.
황구지천의 이름이 평택시 황구지리에서 유래한 듯하다. 황구지천의 하구가 황구지리기 때문이다.
다른 설에 의하면 누런 곶이라는 말이 변하면서 황구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천(大川)'으로 소개된다.
옛 명칭으로 유천(柳川)이라고 불렀다는 주장도 있다. 『팔도지도』에 표시된 '유천'이
지금의 황구지천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수원지명총람』에 '황구지'라는 이름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다. 원래 '항곶천(亢串川)'으로도 불리었는데, 항곶천은 바다와
만나던 곳의 옛 지명 항곶진(亢串津, 현재 평택시 서탄면 황구지리)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이 항곶천이 변하여 황구지천으로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합수점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둑방길로 올라 지나가는 차량을 히치하여 서탄면사무소에 도착한다
서탄면소재지(15:30)
이곳은 평택에서 가장 오지에 속하는지 교통이 상당히 불편하다
지나가는 차량을 상대로 앵벌이를 해보지만 쉽지가 않다
하는 수 없이 파출소옆 렌트카 사무실에 들려서 렌트카로 진위역으로 향한다(렌트비 4,000원)
진위역(15:50)
진위역에서 전철을 타고 금정역에 도착하여 4호선 전철을 갈아탄 다음에
사당역에 도착하여 최근 스크린 골프장을 개업한 불알 친구와 함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비도 살살오는데 집에 일찍 가봐야 할 일도 없고해서
양장피에다가 빼갈 2병을 나눠마시고 늦으막하게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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