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17년 02월 25일
☞ 산행날씨: 아주 맑은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18.2km+어프로치 0.2km / 5시간 40분소요
☞ 참석인원: 산으로 아우님과 둘이서
☞ 산행코스: 월암재-김해김공 묘지-288.9m봉-270m봉-경주이공 묘지-NO153송전탑
갈림길-문방리 고개-NO11송전탑-도고산 갈림길-도고산-다시 갈림길
331.3m봉-밀양박공 묘지-성산이공 묘-노석고개-214.5m봉-우주봉의 집
남양공원 묘지-2차선 도로-139.1m봉-우성공원묘지-절충장군 묘지
N084 송전탑-산불감시초소-207.1m봉-쉼터-갈림길-195.8m봉-쉼터
자헌대부 최공 묘지-NO78송전탑-밀양박공 묘지-시멘트 임도-125.8m봉
갈림길-비포장 임도-밀양박씨 묘-임도-밭고랑-밀양박공 묘지
말티고개-무명봉-공단-무명봉-취운향단-73.5m봉-선남농공공단
동래정씨 영묘당-74.1m봉-광영지하차도-30번국도-공장부지-106.7m봉
청진기업-영진토목-무명봉-철강공장-94.7m봉-부성정공-화신가구-공터
팔각정-대나무숲-선원교-합수점
☞ 소 재 지: 경북 성주군 월항면,선남면 / 칠곡군 기산면
요즘 재미나는거라곤 아무것도 없다...TV로 뉴스를 본지도 오래이다
丁酉年(닭의 해)이라서 그런가...지금부터 525년 전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전인 1584년도
정유년이었는데 그 당시 온나라가 사분오열로 나뉘져 싸움을 하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은
8년뒤인 1592년에 왜놈(일본)들에게 조선 반도가 무참히 짓밟혔던 선조들의 악몽은 이 시대의
지도자들은 정녕 모른단 말인가... 토욜만 되면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진행되는 촛불과 태극기
집회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치 지도자 하나 나서서 자제를 요청하는 인간들은 하나도 없고 다들
민초들을 부추겨 자기들 이익에만 골몰하고 있는데, 며칠전에 말레이지아에서 발생한 김 정남
살인사건에는 소위 대권주자라들은 자들은 거기에 대한 해명조차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이꼴 저꼴 안보려고 오늘은 토욜 이른 아침부터 산행에 나선다
이곳은 사드배치 지역으로 시끄러운 성주지역이다...이곳은 사드 배치가 결정되면 두번
다시 올 수없는 곳인데 지난해 1구간을 끝내고 오늘 마지막 구간을 끝내려고...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 남부터미널(07:25)
오늘은 지난번 첫 구간에 동행했던 산으로 아우님과 영암지맥 2구간을 나서기로 하고
남부터미널에서 만나 커피 한잔을 한 다음에 성주로 향하는 버스 플랫홈으로 간다
서울 남부 터미널에서 07시 50분에 출발하여 성주.고령을 거쳐서 합천과 내 고향 의령까지 가는 버스
생각보다 승객은 많다...여느때처럼 버스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가 금강휴게소에 정차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 20분동안 휴게소 주변을 산책하다가 다시 버스에 올라 성주로 향한다
성주버스 정류장(10:55)
난생 처음 와 본 성주읍네 버스 정류장... 근처 해장국집에서 점심으로 해장국을 먹고
택시를 타고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달암재(일명:다람쥐재)로 향한다 (택시요금:10,000원)
월암재(月岩峙:11:45)
국토지리 정보원에서 편찬한 한국지명 유래집 경상편에 보면
월암고개는 영취산에서 도고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안부에 위치한 고개로, 문화천의 분수계 역할을 한다.
이 고개는 성주의 동북쪽 관문에 해당하며, 예로부터 성주와 칠곡을 연결하였다. 지금도 33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다.
월암고개는 『대동여지도』에 월암현(月岩峴)으로 표기되어 있고, 이 지도에는 성주에서 월암고개를
넘어 동안역(東安驛)을 거치고, 다시 낙동강을 건너 인동까지 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고개의 이름이 월현암(月峴巖)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다람티주막[月峴酒幕]이 인근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월암이라는 이름은 고개 남쪽의 산봉우리인 달암산[月岩山]에서 유래하였다.
달암산은 이 산의 바위 위로 달이 떠올라서 붙여졌다는 설과, 이 산에 달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붙여졌다는 설이 전해진다
택시에서 내려 도로에 내리니 도로 주변에 철조망이 처져있어 철조망을 넘어 시멘트 도로로 향한다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우측 계단으로 오른다
능선에서 바라본 월암재
등로에서 바라본 왜관(倭館)
조선시대 일본인이 조선에서 통상을 하던 무역처·숙박처·접대처로서의 기능을 가진 곳을 왜관이라 하였다.
현재 칠곡군의 왜관은 왜관 언저리에 조선 성종때부터 낙동강 하류에서 뱃길을 따라 올라온 왜물(倭物)을
서울에 실어가기 전에 보관해 두었던 창고인 왜물고(倭物庫)가 있었던 데에서 생긴 이름이다.
왜관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말에서 조선시대 초까지 왜구(倭寇)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태종때 일본인 사신이나
교역자들이 머물게 하고 물자를 교역하게 하던 장소였다. 관(官)에서 관리하던 왜관으로는 부산포(초량),
제물포(창원), 염포(울산) 및 서울 동성관(현재 인사동) 등이 있었으며, 시설을 갖추고 관리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수로를 이용하는 일본인들을 위하여 관리한 왜관으로 두모포, 절영도, 가배량 및 초량 등과
낙동강을 이용하는 중간 숙소인 소규모 왜관으로 약목면 관호리, 왜관읍 금산리 강창, 김해, 창원, 화원창 등
5개소 도합 10여개 소를 설치하였는데, 현재는 모두 역사적으로 기록만 남기고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나,
왜관이란 지명으로 칠곡군 왜관에만 남아 있다.
칠곡은 대구를 인접하고 영남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교통이
편리하며 인적·물적 왕래가 많아 상업이 발달할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을 갖추어 있었다.
칠곡을 중앙을 흐르는 낙동강은 대구의 주요한 나루인 화원에 이르고 좀 거슬러 올라오면 현재의 왜관읍
금산리 강창에 창고가 있었다. 현재의 약목면 관호리와 석적읍 중지리 창마에 창고를 두고 낙동강 수운을
이용하여 조세와 군량을 수송하고, 왜국과 무역을 하였다. 조선 세종 때 삼포를 개항하여, 여기에 상륙하는
왜의 사신과 왜상(倭商)들이 가져온 교역품을 배로 실어 화원의 왜물고로 옮겨 비장(備藏)하였다가 진상하거나
일반 상인들에게 매각하였다.
아카시아 나무를 헤치고 능선에 올라서니 반가운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김해김공과 함평노씨 부부묘를 지나... 본격적인 영암지맥 2구간이 시작된다
초반에 능선을 치고 오르는데 바람이 차갑기만 하다
288.9봉(12:00)
288.9봉에서 좌측으로 능선을 타고 지맥길을 이어가는데 등로는 생각보다 부드럽다
270봉(12:10)
이 양반! 하여간에 대단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자기만의 주장으로 산 이름을 작명하는데
부탁입니다... 맥 산꾼들에게 비난을 받으면서 惑世誣民을 하는 이유가 뭣인지요?
지명이란 정확한 고증으로 확인이 되야만 하는데 이곳이 다람쥐봉이라뇨... 이건 아니올씨다
지난 구간에 있는 220.9봉이 월암봉, 달암산이라고 불리고 있고, 월암재(다람쥐재)가 가까워
그렇게 부르는데 이곳은 월암재와도 멀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정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싶으시면 능선 우측 아래 마을이 문방리이니 “문방봉”이 어떠신지...
약간의 넓은 공터가 나오면서 완만한 오름이 시작되고....
무명 묘지를 지나면서 좌측으로 시야가 확보되는데 지난 구간에 걸었던 선석산과 각산(봉화산)이 보인다
좀 특이한 묘비를 만난다
‘慶州 李德炯, 昌原 兪丁生’ 묘비가 조금 특이하다'
본관과 이름, 생몰년도만 적은 묘비이고, 뒷면에는 7남매와 손, 증손까지 이름이 빼꼭하다
등로 아래에는 기산면 행정리 달암티마을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영암지맥의 주봉인 영암산과
선석산, 각산(봉화산)이 보이는 저 곳을 나의 조그만 다리로 걸었다니 뿌듯한 맘이 앞선다
칠곡군 기산면에 있는 행정리(杏亭里)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경지가 넓게 분포하며
낙동강의 지류가 흐르는 곳으로 은행나무 정자가 있으므로 행정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행정,
무리실, 간자골, 달암티마을 등이 있고 행정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행정리의 그것과 같다.
무리실마을은 행정리 중심에 있는 마을이고, 간자골마을은 행정과 무리실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달암티마을은 다람쥐가 많은 고개 밑이 된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하는데 여러 자료를 보면 잘못 기록된 듯 하다
NO153 송전탑(12:24)
갈림길(12:27)
NO153 송전탑을 지나 3분정도 걷다가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져야 한다
무심코 걸었다간 알바하기 딱 좋은 구간으로 독도에 상당히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우측으로 꺽어지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간간이 보이나 등로는 잘 보이질 않는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시멘트 임도가 나온다
문방리 고개(12:29)
칠곡군 기산면 행정리 무래실 마을과 성주군 선남면 문방리 문포마을로 이어지는 고개인데
문방리쪽은 시멘트 도로가 포장되어 뚜렸한 도로가 보이나 칠곡군쪽은 도로가 희미하다
성주군 선남면 문방리(文方里)는 문포리, 대방리, 종산리 등을 병합하면서 문포와 대방의 이름을 따 문방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행정골, 점골, 대방동, 절티골마을 등이 있다. 행정골마을은 살구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점골마을은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대방동마을은 문방리에서 중심되는 마을이고,
문왕개마을은 대방동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절티골마을은 절터가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문방리 고개를 지나니 송전탑이 하나 있고 좌측으로는 도고산이 살짝 보인다
맨발님이 달아둔 격려문구... 언 넘이 이 짓거리를...고얀 넘
좌측으로 도고산이 살짝 보이기 시작하고...
등로 가운데 드럼통이 묻혀 있는데 뭔 용도인지?...뒷간인가?
도고산 갈림길(12:40)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지맥길에서 400여m 떨어져 있는 도고산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중에 유일하게 족보가 있는 산이니, 아무리 갈 길이 멀어도 꼭 갔다와야 할듯 싶다
도고산(道高山:348m:12:46)
칠곡군 기산면 노석리와 성주군 선남면 문방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무명묘지와
3등 삼각점이 있으나 조망은 그리 시원스럽지 않다...조그만 나뭇가지 틈새로 보니 저 멀리
낙동강 건너 언젠가 걸어야 할 황학지맥 능선과 낙동강, 그리고 왜관의 아파트들이 보인다
도고산은 북쪽으로 다람쥐재를 거쳐 각산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노석고개와 연결된다.
산의 동쪽 사면에서는 노티천이 발원하며, 남서쪽에서 발원한 계류들은 문화천으로 흘러가며
동쪽으로 뻗은 능선에는 보물 제655호로 지정된 노석동 마애불상군(老石洞 磨崖佛像群)이 있다.
도고산 중턱에는 일제강점기에 금과 은을 채굴하던 폐광이 있는데, 한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뿜어져 나와
군의 새로운 명소가 되고 있으며,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사료에는 도고산에 대한 기록이 없다.
도고산은 도룡산, 인면산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다. 도룡산은 산의 모양이 용처럼 생겨서
붙여졌다고 하며, 인면산은 사람의 얼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도고산 정상 삼각점(△왜관 303)
많이 마모가 되어서 정확한 판독이 불가능하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설치한 표지판
인증샷을 남기고...
도고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무명묘지
낙동강 너머로 보이는 황학지맥 능선
도고산 정상에서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 간다
이곳 능선에 있는 생강나무는 벌써 봄을 준비한다... 하기야 내일 음력 이월 초하루이니...
다시 도고산 갈림길(12:55)
331.3봉(13:00)
좌측으로 내려서니 등로 가운데 통훈대부를 지낸 달성서공의 묘지인데
通訓大夫는 정삼품으로 요즘으로 치면 1급쯤 되는 직급이란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관리가 안된 성산이공과 부인 강릉최씨 묘지가 보인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서 내려간다
계속 등로에서 만나는 묘지들
노석고개(13:10)
칠곡군 기산면 노석리와 성주군 선남면 문방리를 넘나드는 고개인데
움팍 파인 고개 정상에는 예전에 서낭당의 흔적인듯한 돌무덤이 보인다
이곳에서부터 좌측으로 칠곡군 기산면과 작별을 하고 온전히 성주군 선남면으로 들어선다
조선 시대에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백석, 노곡, 신기 등의
일부를 병합하여 노석이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편입되었다. 1983년 칠곡군에 편입되어,
약목면 동부출장소의 관할을 받았다가 1986년 동부 출장소[죽전·평복·영동·행정·봉산·각산·노석]가
기산면(岐山面)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칠곡군 기산면에 속해있는 노석리(露石里)는 선노로를 따라 자연 마을인 노티[老峙] 마을, 노실[老谷] 마을,
개안[浦內] 마을, 사기점(沙器店) 마을, 흰돌[白石] 마을이 있고. 노티 마을은 노석리의 중심 마을이다.
옛날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나룻배가 이곳에서 소금과 곡식을 내렸다. 도고산 동쪽의 거대한 바위 면에
노석리 마애불상군(보물 제655호)이 있으며, 남쪽의 노실 마을에는 노암 서재(魯庵書齋)가 있다.
노티 남동쪽 낙동강 강변에 개안 마을이 있고, 인근의 사기점 마을에서는 도자기를 구웠다.
흰돌 마을은 노티 북동쪽 낙동강 변의 마을로 흰 돌과 흰 흙이 많이 생산되었다.
옛날에는 노실 나루와 흰돌 나루가 왜관읍의 강창 나루와 연결되었다
등로는 뚜렸하나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쓰러진 잡목들이 갈길 바쁜 범여의 발길을 더디게 한다
214.5봉(13:25)
봉우리에서 내려서니 묘지석으로 쓰였던 대리석들이 마구 널려있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넓은 임도가 나오고 우주봉의 집이란 건물이 나온다
우주봉의 집(13:28)
사회복지 법인인 우주봉의 집을 지나 도로로 내려서니...
엄청난 규모의 천년 임대주택(공원 묘지)이 펼쳐지고...
묘지마다 구역이 나눠져 있다
맞은편의 공원묘지를 바라보면서 걷는다
남양공원 묘지
영암지맥을 걸으면서 유난히도 공원묘지가 많은걸 보면 성주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이 많은 모양이다... 세종대왕의 왕자들 태실도 이곳 성주에 있으니...
역사적으로도 성산가야와 벽진가야가 있었던 곳이 아닌가
갈림길(13:30)
계속해서 만나는 묘지
밀양박씨 묘지들이 많이 보인다
또다른 묘지를 따라서 내려가니...
2차선 도로(13:40)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에서 용신리로 넘어가는 2차선 도로가 나오고 절개지로 내려선다
우측으로는 뭐하는 공장인지는 몰라도 대림 제2공장이란 곳이 보이는데 축사가 있는지
분뇨 냄새가 진동을 한다
도로 좌측으로 올라가서 절개지 능선으로 오르는데 잡목이 상당히 성가시다
139.1봉(13:45)
정상에는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설치한 표지판에는 “△왜관 413” 삼각점이 있다고
표시가 되어 있으나 4등 삼각점은 보이질 않고 국방부 소삼각점만 보인다
쌩뚱맞은 국방부 소삼각점
139.1봉에서 직진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선다
희미한 길을 따라서 내려가니...
공원묘지 조성지인듯 넓은 공터가 나오고 묘지옆에 바람을 피하면서
잠깐 취하며 우유 하나를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오늘은 컨디션은
좋은건지 아님 등로가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서 평균 시속 3.4km로 걷는다
공터에서 바라본 지나온 남양공원 묘지의 모습
잠깐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에...묘지를 따라서 내려가니 우성공원 묘지 입구가 나온다
우성공원 묘지 정문(14:00)
정문을 가로질러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우성공원 묘지 길에서 바라본 지나온 도고산의 모습
우성공원 묘지...규모가 엄청나게 크다...도로 우측엔 절충장군 묘지가 보인다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함평 노팽수묘(14:05)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서반(西班)의 정삼품(正三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있기 때문에 당상관(堂上官)에
속하였으며 따라서 부인이게는 숙부인(淑夫人)의 작호를 내려졌다
조선의 정치구조는 문신 중심이어서, 무반에는 절충장군보다 상위의 품계가 없었고 무신이 2품 이상으로 승진하려면
문반의 품계를 받아야 했고, 양반 관료를 천거하는 인사권, 소속 관원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 포폄권(褒貶權)으로부터
군대의 지휘에 이르기까지 큰 권한을 지녔다. 근무 일수에 관계없이 공덕과 능력에 따라 품계를 올려받거나 현직에
얽매이지 않고 관직에 임명될 수 있었고, 가까운 관계에 있는 자를 같은 관서에 임명하지 않는 상피제(相避制)도
적용받지 않았으며, 입는 옷이나 이용하는 가마 등에서도 그 밑의 당하관(堂下官)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권을 누렸다
절충장군 묘를 지나서 다시 도로를 따라서 오른다
우성공원 묘지 끝(14:10)
공원 묘지 끝부분에는 NO 84 송전탑이 있다
도성리( 박구효자비 →3,870M) 이정표를 따라서 능선으로 접어든다
등로는 아주 좋다...마치 둘레길 걷는 기분이다
산불감시초소(14:18)
207.1봉(14:22)
등로 좌.우로 海松이 우거진 등로를 오른다
쉼터(14:25)
선남면 갈림길(14:27)
조선시대 성주군을 중심으로 하여 南(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洛東江(낙동강)을 이용한 교통수단이
星州牧(성주목)의 유일한 방법이였으며, 浦口(포구)역활을 한 곳이 白石津(백석진), 河山津(하산진)으로
배"船"자를 따서 船南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성주군의 동부에 위치하여 동편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칠곡군과 달성군을 이웃하고 남쪽은 용암면, 서쪽은 성주읍, 북으로는 월항면과 칠곡군 기산면과 접해 있다.
서북에서 동남으로 기름진 평야와 대구―성주로의 30번 국도가 관통되고 있다.
또 월항과 명포로 향하는 군도가 지역개발의 근간이 되고 있다.
대구의 관문으로 련접한 근교지역의 특성과 낙동강의 물과 모래 등의 자원 그리고 복합영농과 공단 확충등
활기찬 고장이다
봉분이 땅바닥에 붙어버린 묘지 2기를 지나고...
195.8봉(14:32)
195.8봉 삼각점은 판독이 불가능하다
편안한 소나무 숲길을 양넘 지갑줏듯 편안하게 걷다보니 졸음이 밀려온다
쉼터(14:38)
쉼터에서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바로 앞에는 선남면소재지가 보이는데
참외하면 성주참외가 가장 유명한데 온 천지가 참외하우스로 뒤덮혀 있다
쉼터에서 내리막으로 내려오니 돌담으로 둘러쌓인 오래된 무덤이 나오는데
가선대부용양위부호군(嘉善大夫龍讓衛 副護軍)경주최공의 묘지이다
가선대부는 통훈대부보다 높은 종2품이고, 부호군은 종4품이니 품계보다 관직이 낮은 경우다.
용양위는 조선 5衛중 하나이고, 부호군은 현재의 직급으로 치면 군대의 대대장급쯤 되는 직급이란다
조은산님 블로그 인용
바로 아래에는 資憲大夫를 지낸 분의 묘비가 있는데 조선 시대 정이품(正二品) 하(下)의 문무관의 품계로
1865(고종 2)년부터는 문무관, 종친, 의빈(儀賓)의 품계와 같이 쓰였으며,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문산계(文散階)의 품계인 정헌대부·자헌대부가 제정되어 그대로 수록되었다.
정2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군·위·좌참찬·우참찬·지사·판서·판윤·대제학·세자좌빈객·세자우빈객·
도총관·제조 등이 있고,정2품관은 1438년 정비된 녹과(祿科)에 의거하여 실직(實職)에 따라 1년에
네 차례에 걸쳐 모두 중미(中米) 12석, 조미(糙米) 40석, 전미(田米) 2석, 황두(黃豆) 18석, 소맥 9석,
주(紬) 5필, 정포(正布) 14필, 저화 8장을 녹봉으로 지급받았다
가선대부보다는 한 직급이 높은 정이품 벼슬이다
묘지에서 아랫마을에서 운동을 왔다는 할머니 4분을 만나는데 산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난다
NO78 송전탑(14:45)
등로에는 방치된 묘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편안한 등로
특이한 형태의 묘지
묘지를 지나면서 등로 우측 아랫쪽으로는 임도가 보인다
건너편에는 채석장인듯한 곳도 보이고...
방치된 의자 하나가 있는 무명봉도 지나고...
시멘트 임도(14:50)
∩형태의 시멘트 임도 우측으로 내려가면 선남면 도성리에 있는 박구효자정려비(朴矩孝子旌閭碑)가 있다
정려(旌閭)는 나라에서 풍속을 장려하기 위해서 충신, 효자, 열녀 등 모범이 되는 사람을 표창하고자
그 사람이 사는 집 앞에 정문(旌門)을 세워 기리던 곳이다
박구(朴矩, ?∼1425)의 호는 동천(東川)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삼년간 묘 곁을 지키면서 한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와 관련된 여러 전설이 전해지고 있을 만큼 그 효성이 지극한 인물이었다.
정려비와 비각은 모두 1535년(중종 30)에 세운 것으로, 원래는 어머니의 묘소 근처인 백천(白川)가에
있었으나, 홍수로 인하여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1818년(순조 18)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이 비는 정려의 조사가 엄격하던 시대에 정표가 내려져 후세에 본보기가 될만하고, 당시의
풍속 등을 고려할 때 역사적·향토적 가치가 충분한 정신문화의 유산이다
임도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른다
125.8봉(14:52)
갈림길(14:55)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급하게 꺽어져야 한다... 독도에 아주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등로 좌측의 길이 없는 곳으로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초반에 등로가 보이질 않다가 조금을 더 내려가면 이내 길은 좋아진다
묘지 너머로 참외 비닐하우스는 마치 바다처럼 보인다
임도(15:00)
등로 사이로 저 멀리 가야산이 아련히 보이고..,
편한 길을 걷으니 졸음은 쏟아지고...
임도(15:02)
유인 밀양박씨 묘지를 지나고...
성산이공과 부인 밀양박씨의 묘지도 만나고...
성주군 선남면 도성리는 대구와 인접한 지역이라서 그런지 골짜기까지 공장이 들어서 있다
도성리(道成里)는 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평지에 자리한 농촌마을로, 서쪽에 낙동강이 흐른다.
마을이 길가에 이룩되었으므로 도성리라 하였는데, 자연마을로는 도성, 중리, 광령, 배나무정, 못둑, 마안골마을 등이 있다.
도성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도성리의 그것과 같다.
중리마을은 도성리에서 중심되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광령마을은 주일 남쪽에 있는 마을로,
광주 이씨가 많이 사는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배나무정마을은 배나무 정자가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
름이고, 못둑마을은 못이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마안골마을은 뒷산이 말 안장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황토밭을 가로지른 다음에...
우측으로 꺽어진다
탱자나무와 아카시아 나무 사이를 지난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밀양박씨 묘지를 많이 만나는데 아마도 집성촌인 모양이다
말티고개(15:07)
야트막한 능선을 내려서니 도성리 지석묘 고분군이 나오는데 이곳이 말티고개이다
선남면 도성리 중리마을에서 못둑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고개에는 도성리 지석묘
고분군이 있고, 좌측에는 재활용 재처리장인듯한 공장 건물이 보인다
도성리 지석묘.고분군
도성리 지석묘 고분군은 지석묘 상석 1기와 가야및 삼국시대 고분군이 분포되어 있다.
이곳에 선사시대의 청동기 유적, 삼국시대의 석곽이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의
자연환경, 경작지, 기후 등의 제반 여건이 사람이 생활하기 적합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머지 않은 곳에 낙동강이 흐르고 백천유역과 더불어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육로를 통한 교통, 경제가 활성화되기 이전에는 낙동강과 백천이 큰 운송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묘지의 축대로 조성한남방식 덮개돌 상부에여러개의 성혈이 남아있다
지석묘 고분군 안내판
전봇대 뒷쪽으로 돌아서 밭으로 올라선 다음에...
밭 두둑으로 올라서니 좌측의 공장같은 건물은 재활용품 재처리장이다
동래정공과 부인 김녕김씨 묘지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등로는 전혀없다
이곳에 오르지 않고 묘지 우측으로 가로질러 가는게 시간을 줄이는 방법일 듯...
무명봉(15:12)
무명봉에서 2시 방향으로 내려서니 묘지가 나오고 넓은 임도가 보인다
공장지대(15:18)
공장 건물들이 영암 지맥길을 삼켜 버렸다
공장 가운데 도로를 가로질러 올라서니...
좌측으로 나우테크 콤프레샤 공장이 보이고...
쓰레기가 나뒹구는 공터가 나오고...
다시 능선으로 올라선다
무명봉(15:25)
잡목을 헤치고 내려오니 대나무밭이 나오고...
남쪽이라 그런지 매화꽃이 피기 시작한다.
취운향당(翠雲香堂:15:28)
전통향 복원에 매진하고 있는 성주 취운향당은 능혜스님이 “향이 수승화강과 오장육부통경락작용에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찬 기운은 올리고 더운 기운은 내리는 수승화강(水乘火降)은 머리를 차게 해 건강을 지키는 기본원리. 이런 효능이 없는
향은 향이 아니라는 것이 스님의 주장이다. 인체 장기들 간의 순환을 돕는다.
향은 마음을 안정 시키고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어 명상이나 수행할 때 켜 놓아도 좋다.
이밖에 천식, 비염, 아토피 질환 및 새집 증후군에도 효과가 있다. 향연기는 또 집먼지나 진드기를 퇴치하기도 한다.
취운향당에서 도로를 따라서 좌측으로 오른 다음에 공장을 끼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공장 담벼락을 따라서 가는데 찔레꽃 가시나무가 엄청나게 범여를 괴롭힌다
공장 담벼락을 지나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니...묘지가 나오고...
73.5봉(15:38)
천주교인 묘지를 만나고...
묘지 우측 공터 너머로 해인사를 품고있는 가야산이 보인다
묘지를 끼고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밭 가운데 지나 내려서니...
선남농공공단(15:43)
87번 도로를 가로 지른 다음에...
공장 마당을 지나고...
공장 담벼락으로 올라서니...
편안한 임도가 나오고...
동래정씨 달천공파 영모당(15:50)
74.1봉(15:52)
급경사로 내려서니...30번 국도가 보인다
가장 빠른 방법이 30번 국도를 무단횡단 하는 것인데 중앙분리대가 너무 높고
성주에서 대구로 향하는 차량 통행이 생각보다 많아서 포기하고 지하차도쪽으로 향한다
ㅓ자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광영지하차도(15:57)
지하차도를 지난 다음에 좌측으로 꺽어진다
대신정기화물을 지나니...
만석농약사 표시석이 보이는데 십자가 표시가 있다... 기독교인만 오라는 것인가?
30번 국도(16:00)
성주 가야산 만물상 아치가 있는 곳에서 우측 공단 조성지로 오른다
공단 조성지에 오르니 허기가 지기 시작하여 산으로 아우님과 베낭을 내려놓고
바람이 불지 않는 곳을 자리잡아 가지고 온 도리야끼에다가 쥬스 하나로 허기를 면한다
공장 조성지를 지나 능선으로 오른다
능선으로 오르니 아카시아를 비롯한 잡목들이 엄청나게 태클을 건다
오늘 산행중에 가장 힘이 드는곳이다
106.7봉(16:25)
106.7봉 끄트머리에 오니 머리가 하해지는 느낌이다
천길 낭떠리지 절개지가 앞을 가로막아 도저히 갈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되돌아 간다
가야할 등로의 궤적
되돌아 내려오니 맨발님의 시그널이 보이는데 이 분도 되돌아 내려간 모양이다
길은 전혀없고 내가 길을 만들어서 내려간다
로프가 있는 곳을 지나 절개지로 내려서니...
청진기업이란 건물이 보이고 도로에서 좌측으로 향한다
영진토목 사무실 표지판이 보이고...
공장 사이로 가로 지른 다음에...
좌측 채석장으로 올라선다
뒤돌아 본 106.7봉의 모습
채석장 맨 윗쪽으로 오른 다음에...
절개지로 올라선다
이곳 역시 길은 없고 잡목의 저항은 심하고... 내가 뭣이 아쉬워 개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개고생하면서 내려오니 철강공장 마당이 나온다
철강공장 3공장을 지나니 간이 화장실이 나오고 다시 능선으로 오른다
이곳 역시 아카시아를 비롯한 잡목들의 저항이 엄청 심하다
94.7봉(16:50)
대단들 해요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무명묘지가 나오고...
공단 도로(17:00)
도로 맞은편에는 부성정공 공장을 보면서 우측 도로로 간 다음에...
화신가구 표지판이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화신가구 공장에서 좌측 비포장 도로로 올라선다
녹슨 컨테이너가 보이고...
공터(15:05)
성주 참외단지와 백천(白川)의 모습
백천(白川)은 경상북도 성주군의 초전면 월곡리의 백마산에서 발원하여 월항면을 거쳐
선남면 선원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발원지에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용봉리에
이르러 신거리고개에서 발원한 지류와 합류한 뒤, 남쪽으로 꺾이어 월항면의 남서쪽을 흐르다가
선남면을 관통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백천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하류에는 후포평야라는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영남지도』에는 전백천(前白川)과 후백천(後白川)이 그려져 있다.
유로로 보아 이 중 후백천이 백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전백천은 현재의 이천(伊川)으로 보인다.
『조선지지자료』에 배내라는 한글이름과 함께 기재되어 있다
영암지맥 합수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곳에서 아침에 월암재까지 갔던 택시를 콜한다
팔각정(17:15)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지 흉가(凶家)처럼 을씨년스럽게만 보인다
팔각정 좌측 아래에는 대흥사 지붕이 보이고...
합수점을 바라보면서 내려선다
대밭이 나오고 노란 물탱크를 바라보면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대나무숲을 헤집고 내려가니...
민가가 나오고 영암지맥 합수점에 있는 선원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민가 뒷쪽의 밭을 지나 도로로 내려선다
도로 좌측에는 오리고기 제조업체인 (주)낙동 건물이 있다.
67번 도로(17:22)
선원교
성주에서 달성군 다사읍으로 이어지는 선원교에서 좌측 뚝방길로 향한다
제방뚝에서 바라본 선원교
회천(영암)지맥 합수점(17:25)
성주군 초전면 산불감시초소(효자봉)에서 조금 지난 분기점에 출발한 영암지맥 길
오늘 드디어 이곳 낙동강과 백천이 합쳐지는 이곳에 맥이 입수하면서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무던히도 힘들었던 영암지맥 길.... 국가 안보를 위해 사드가 배치되면 걸을 수 없는 이 길을
미리 마쳤다는 안도감이 긴장이 풀리는듯 하다...합수점에서 인증샷을 마치고 제방으로 오른다
낙동강 너머로는 비슬산이 아련히 보이는데 내년쯤이면 비슬산 언저리를 걷고 있겠지
제방뚝으로 올라서니 콜한 택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15분만에 성주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성주시외버스 터미널(17:50)
성주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서울가는 버스를 타야하는 산으로님과 왜관을 거쳐
구미로 가야하는 범여...시간적으로 15분정도 여유가 있어서 버스 정류장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캔맥주에다 오뎅으로 축하주를 마시고 각자 헤어진다
산으로 아우님은 서울가는 버스에 오르고, 난 구미로 가서 내일 진권아우와
감천 남(금오)지맥 마지막 구간을 마치고 서울로 갈 계획이다
성주에서 왜관가는 버스표
난생 처음 희안한 버스를 타본다... 산으로 아우님이 서울가는 버스를 타는걸 보고 나오는데
왜관가는 버스가 있기에 왜관으로 가냐고 기사에게 물으니 간다고 하기에 버스에 오른다
그런데 왠걸...조금전에 탔던 택시기사에게 들은 얘기로는 성주읍에서 왜관까지 40분이면
간다고 얘기를 들었는데 1시간 가까이 버스가 달렸는데도 왜관은 보이지 않고, 계명대 입구역
성서 I.C가 나오는게 아닌가... 이곳은 왜관이 아니고 대구쪽이 아닌가... 기사에게 물으니 왜관을
가긴 가는데 대구 시내를 돌아서 왜관으로 가는 버스라고 한다
이 버스는 대구시내 구석구석을 다 돌아서 왜관까지 가는데 2시간 50분이 소요된다고 한다
기사에게 그러면 돌아간다고 얘기 해줘야 할꺼 아니냐고 하니까... 기사 왈 ‘선생님이 왜관 가느냐고
묻길래 왜관 간다고 했는데 내가 뭐 잘못이냐’고 반문을 하는데 기가 막힌다
하긴 기사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이 시간이면 서울가는 시간과 같으니 황당하다
왜관북부 버스정류장(20:50)
성주에서 나를 태운 250번 버스는 대구 시내를 다 돌다가 지쳤는지 비산동에 있는
대구 북부버스정류장에 19시 30분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30분동안을 서 있다가
20시에 왜관으로 출발하여 왜관 북부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하는데 미치겠다
거기다가 핸드폰 배터리는 다되어 구미에서 만나기로 한 진권아우와 연락할 방법이 없다
왜관에서 구미가는 버스
왜관에서 곧바로 구미가는 버스에 오른다...맨 앞좌석에 앉자서 기사에게 구미터미널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고
물으니까 50분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기사양반이 어느 산에 가셨다오느냐고 묻길래 ‘다람쥐재에서 백천까지 갔다’
오는중이라 하니까, 지맥 산행을 하시는군요 하는게 아닌가... 어! 이 친구 사람볼 줄 아네
그러면서 자기도 백두대간을 왕복했다고 하면서 따끈한 베지밀 하나를 건네준다
둘이서 맥산행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보니 버스는 구미버스 터미널앞에
도착하고 아우가 예약한 모텔로 가니 진권아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저녁을 먹지 않았으니 배는 무쟈게 고프고하여 둘이서 여관을 나와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 한병을 마시고 샤워를 한 다음에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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