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17년 3월 26일
☞ 산행날씨:흐린 날씨, 짙은 스모그 현상에 상당히 찬바람
☞ 산행거리: 도상거리 18.2km + 어프로치 3.3km / 6시간 5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임도-580m봉-만세봉-천세봉(왕복)-580m봉-느진목재-무명봉-무명봉문봉산
헬기장-폐헬기장(1)-폐헬기장(2)-560m봉-577m봉-심연동갈림길-574m봉-677m봉
655m봉-성주산-540m봉-은선동 냉풍욕장 갈림길-장군봉-보령 냉풍욕장갈림길
560m봉-538m봉-583m봉-521m봉-527m봉-494m봉-안부-496m봉-향천봉-이정표
화산동갈림길-321m봉-346m봉-묘지-444m봉-463m봉-헬기장-성주쉼터 갈림길(1)
왕자봉-한내여중갈림길-체육시설성주쉼터 갈림길(2)-328.7m봉-바래기재
성주암 갈림길-무명봉-대영사갈림길-명천폭포갈림길-무명봉-보령 활공장
옥마산-산불감시초소-MBC중계소-JTB보령중계소-KT중계소-노을 전망대
473m봉-477m봉-452m봉-대천단맥 분기봉-380m봉-385m봉-350m봉-말재
☞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외산면 / 청양군 남양면 / 보령시 청라면, 성주면, 남포면
지난주에 2박3일동안 따뜻한 여수.순천지역으로 골프투어를 갔다오는 바람에 산엘 가지못한
탓인지 1주일내내 몸뚱아리가 찌푸등하니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아 상당히 고전을 한다
이젠 내 몸속의 DNA가 한 주라도 산에 가지 않으면 이상하리만큼 바뀌었다
이번주에는 원래 모 산악회에서 진행하는 낙동정맥길을 따라 갔다가 사룡산 구간에서홀로 밀양(비슬))지맥을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토욜에 거래처 지인의 딸래미 결혼식 연락을 받고꼭 참석을 해야 하기에 산행을
취소를 하고나니 일욜날 갑자기 갈 곳이 없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웅석지맥 한 구간 끝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료를 정리하는데
수헌아우님 한테서 전화가 온다...‘선배님! 차를 가지고 금북기맥 2구간을 가는데 우리 차로 가서
웅천(성주)지맥이나 하시죠’ 하는게 아닌가...갑자기 이게 웬 횡재여... 아시다시피 기.지맥은 1구간
접속구간이 가장 문제이다... 갑자기 양넘 지갑을 줏은 기분이다그것도 새벽 5시에 집 앞까지 차로 모시로 오니...
그저 고맙고 미안할 따름 수헌아우, 낡은모자, 한울탈님 3명이 차량을 가지고 가는데 나는 그냥 덤으로 따라간다
웅천(성주지맥:聖住枝脈)은?
웅천(성주지맥:聖住枝脈)은 금북정맥의 백월산(白月山.560m)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금북기맥의
성태산(星台山.633m)에서 남서쪽으로 가지를 쳐 보령시 웅천앞바다 부사방조제앞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로
웅천천의 좌측 분수령이 되는 도상거리 약33.4km되는 산줄기를 성주지맥(聖住枝脈)이라 칭하는데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웅천천(熊川川)의 죄측 산줄기라 하여 웅천지맥(熊川枝脈)이라 부른다
웅천(성주지맥:聖住枝脈)개념도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4명이 합류하여 이른 새벽에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홍성휴게소에서 해물순두부로 든든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다시 자동차에 올라 계속 달리다가 대천I.C를 빠져나와 부여군 외산면 소재지에서
수헌아우와 헤어져 택시로 웅천(성주)지맥 분기점으로 향한다
웅천(성주)지맥 분기점으로 오르는 방법은 대체적으로 3가지가 있다.
1, 대천에서 버스를 타고 금북정맥 스무재에서 백월산쪽으로 올라 월치를 지나 성태산으로 오르는 방법이
있는데 이럴 경우 대천에서 청양으로 가는 대중교통은 좋으나 거리가 너무 길어 2시간 가까이 소요된다
2, 청양군 남양면 백금리에서 월치를 통해서 성태산으로 오르는 방법이 있는데 요즘 임도 바리게이트를
막아놓아 백금저수지 아래에서 접근하려면 이 또한 거리도 만만찮아 고민이 많다
3, 그래서 찾은 대안이 부여군 외산면소재지에서 지선리로 들어가서 임도로 따라 올라가 느진목재에서
성태산을 찍고 다시 되돌아오는 방법... 이 방법을 내가 가장 싫어하는 방법이다
왜냐면 같은 곳을 다시 돌아오는 걸 난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내 스타일상 가장 싫어하는 부분이지만 나홀로 산행이라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어쩔수가 없다
대천에서 외산면을 향하면서 지난주에 수헌아우님이 금북기맥 1구간에 이용했던 택시를 예약한다
수헌아우는 지티고개로 향하는 난 이곳에서 택시를 타고 지선리를 향하는데 택시기사가 지선리에서
당산나무가 있는 느진목재까지 가자고 하니 그곳은 택시로 갈 수 없다고 한다
이겐 뭔 소리여!... 그럼 난 어떡하라고...이보소 기사 양반 가는데까지 가봅시다 하니까
기사가 마을로 들어서서 마을 촌로에게 물어본다.
기사: 저 윗쪽 고개까지 차가 갈 수 있나요?
촌로: 다른 차들은 다 올라가던데 모르겠소!!!... 특유의 두리뭉실한 충청도식 표현이다
기사에게 강하게 어필한다... 이보쇼 내가 마을까지 오려면 왜 택시를 타것소
이 마을에서 고개까지 올라가려면 최소한 1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이다
택시기사에게 강하게 어필하니 마지못해 가는 눈치인데 생각보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아주 잘되어 있고 마지막 조금만 비포장도로이지만 차량이 다니는데는 문제가 없다
나를 당산나무가 있는 느진목재까지 태워주고 가는 택시
외산면소재지에서 이곳까지 택시요금이 13,000원인데 1,000원을 더 주고 내린다
외산면에서 개인 택시를 하시는 이 분은 이 지역에 무량탄광에서 16년동안 광부생활을 하신 분이란다
느진목재(420m:08:15)
충남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에서 부여군 외산면 지선리와 수신리로 이어지는 넓은 임도가
연결되어 있고 예전의 성황당인듯한 당산나무가 있는 곳에는 새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넓은 임도는 예전에 석탄을 캐서 나르던 도로였다고 한다
조금전에 태워준 택시기사의 말에 의하면 부여군 외산면은 부여군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면소재지로서 생활권의 모든 건 대천읍에 의지하였는데 지선리나 수신리 사람들이 대천장을
다닐 때 넘었던 고개로 기사는 이곳을 상수리재라 하는데 상수리재는 문봉산 아래에 있는 고개라
잘못 알고 있는듯 하다
청라로 내려서는 임도에는 바리게이트가 가로막고 있어 차량통행이 불가능하다
보령시 청라면과 부여군 외산면 이 지역 일대에는 예전에 강원도 못지않은 탄광으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아직도 좌측 보령지역 지도에는 영보광산, 월산광산이 보인다
느진목재에서 웅천(성주)지맥 분기점으로 향한다(08:20)
느진목재에서 성태산으로 오르는 길은 고도를 200이상을 높혀야 하는데 초반에 상당히 깔딱이다
괜스레 초반에 체력을 소진할 필요야 있겠나... 급경사 오름길에 베낭을 숨겨놓고 빈 몸으로 성태산으로 향한다
성태산 천세봉(星台山 千歲峰:623.7m:08:45)
보령시 청라면과 청양군 남양면, 부여군 외산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성주지맥의 분기봉인데
정상석이 넘어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무거운 돌을 바닥에 실리콘으로 처리되어 있다
아마도 얼빠진 업자가 불량으로 시공한 탓이겠다
성태산 천세봉(千歲峰:623.7m) - 2012년 8월12일 금북기맥 첫 구간때의 사진
천세봉 정상에는 넘어진 정상석과 평상,이정표가 보인다
2012년 8월에 금북기맥 첫구간을 시작할 때 나홀로 올랐으니 벌써 몇년째인가?
천세봉 정상의 이정목
생각보다 날씨가 상당히 차갑다... 잠깐 사이에 추위가 엄습해와 서둘러 길을 나선다
본격적인 웅천(성주)지맥 첫 걸음을 내딛는다
성태산 만세봉(星台山 萬歲峰:630m:08:50)
천세봉에서 100m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만세봉은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도 표기되어 있으며
충남 부여군 외산면과 보령시 청라면, 청양군 남양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부여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하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1919년 독립만세 운동 당시 이곳에서 부여 보령 청양.
3개 시군 주민들이 모여 봉화를 올리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정상을 만세봉이라고 하고 다음 봉우리를 천세봉이라 명명 하였다.
부여군에서 세운 정상석 뒷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지형물을 이용하여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느진목재로 향한다
만세봉 좌측 아랫쪽으론 옥가실마을로 이어지는 이정표가 보인다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수신리(水新里)는 문봉산과 성태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에는
능천천이 흐른다.
전형적인 중산간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홍산현 외산내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상신리와 상수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수와 상신의 이름을 따서 수신리라 하고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방고개, 신근이(신근리, 신전리)가 있다. 방고개는 방고개 아래에 있다 하여 붙여졌다.
신근이는 수신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새로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가야할 웅천(성주)지맥 능선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금북정맥 당시 백월산 근처에서 만났던 암석과 같은 유형의 암릉을 만나는데
특이한 점은 오석(烏石)에 규암같은 하얀 차돌들이 박혀있는 것이 특징이다
580m봉(09:02)
칼날능선을 걷는데 산 아래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상당히 차갑다
갈림길에서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져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산길에서 자주 만나는 시그널들
주로 충남지역에서 활동하는 산꾼들(논산의 바랑산님, 보령 잡도리님, 대전 구름나구네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내려오다 벌목한 나뭇가지 뒤에 숨겨둔 베낭을 다시 메고 느진목재로 내려간다
느진목재(09:15)
아침에 택시를 타고 올라왔던 느진목재를 다시 왔다
이곳의 지명유래는 보령이나 부여의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고 알 길도 없다
지리산 왕시루봉 구간에도 느진목재란 지명이 있는데 ‘경사가 늘어진 곳’이란
의미였는데 아마도 똑 같은 뜻이 아닐까? (범여의 생각中에서)
느진목재에서 성태봉 분기봉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55분이 소요되었다
느진목재에서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니 낙엽이 푹신한 등로 양 옆으로는 두릅나무들이 지천이다
무명봉(09:33)
느진목재에서 급한 오르막을 올라서니 무명봉이 나오고 이후는 등로가 아주 편안하다
웅천(성주)지맥 분기점에서 계속 만나는 역암
마치 시멘트에 자갈을 버무려 만든듯한 역암의 대표적으로 많은곳이 진안 마이산이다
그러나 오늘 성태산에서부터 계속해서 만나는데 역암은 퇴적암의 일종으로 크기가
큰 자갈과 그 사이를 작은 모래 알갱이 등으로 이루어진 암석으로 이곳의 역암은
고생대초(약 5억8천만전)부터 바다속에 퇴적된 퇴적층이, 한반도에서 지질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인 중생대(약 2억2천5백만전) 조산운동으로 융기하여 형성되었으며,
오늘 능선에서 자주 만난다
무명봉(09:38)
초반인데 등로는 너무 편하다... 지맥길이 아닌 마치 서울근교 둘레길 걷는 기분이다
문봉산(632m:09:43)
부여군 외산면 지선리와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좌측으로는
만수산으로 갈라지는 능선이 보이고 만수산 아래에는 조선시대에 생육신중 한명이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한 김시습이 출가하여 말년을 보냈던
무량사란 사찰이 있는 곳이다... 문봉산의 위세도 꽤나 괜찮은 곳이건만 이 산에 대한
자료는 어디에도 볼 수가 없어 안타깝기만 한데 준.희선생께서 팻말을 붙혀놨다
능선에는 어디에 썼는지는 몰라도 이런 돌들이 많이 보인다
폐헬기장(09:45)
문봉산 정상에서 2분정도 내려오니 폐헬기장이 나오는데 보령시에서 이곳에다
정상석을 세워놨고, 이정표와 성태산과 만수산에 대한 표지판이 있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이곳이 문봉산 정상은 아니다
좌측으로 내려서면 상수리재로 가는 이정표가 있는데 아침에 지나온 지선리로 이어지는 길이다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지선리는 조선시대 참나무가 많은 지역이라 숯이 유명하였고 백자(白磁)가
생산되었다 하며, 교하노씨와 여산송씨 그리고 전주이씨가 입촌하여 촌락을 이루었고, 본래 홍산군
외산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군폐합에 따라 상비리, 장선리(長仙里), 지단리(芝丹里), 저동 일부를
병합하여 지단(芝丹)과 장선(長仙)의 이름을 따서 지선리(芝仙里)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70년대 초반부터 우량광산이 성황을 이루어 95년까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장선(長仙)마을, 모시를 많이 재배하여 모시울, 모새골, 저동, 마을 주변에
지초가 많은 안쪽 마을이라 하여 지단내(芝丹內) 마을이 있다
보령시에서 설치한 정상석은 정상이 아닌 폐헬기장에다 설치해놨다...행정 편의주의적인 발상이다
정상석이 있는 곳을 지나니 벌목지대가 나온다
좌측 봉우리는 뭘하려는지 산 전체가 발가벗겨져 있고, 바로 앞에 보이는 뾰족한 봉우리가
웅천(성주)지맥 능선이나 저건 성주산(장군봉)이 아니고 장군봉은 그 뒤에 숨어 보이질 않는다
등로 좌측 능선에는 건강한 소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오늘 가야할 옥마봉은 짙은 스모그 현상으로 인해 희미하게 보인다
문봉산을 지나면서부터는 좌측으로는 부여군 외산면에서 보령시 성주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뀌고, 우측은 보령시 청라면이니 좌,우가 온전히 보령시로 접어든다
폐헬기장(09:50)
등로에서 바라본 만수산
천재시인 김시습이 말년에 머물다가 세상 떠난 곳이 저기 보이는 만수산 아래 ‘무량사’이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되자 평생 은둔한 천재시인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난 곳으로 유명하다. 김시습 영정(보물 1497호)이 있다.
10여년전 성지순례를 갔다가 들렸던 무량사에 모셔져 있는 김시습의 진영은 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하다
'매월당시사유록(梅月堂詩四遊錄)' 서두에 실려 있는 김시습의 자화상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붙어있다.
해동에서 최고라고들 말하지
격에 벗어난 이름과 부질없는 명예
네게 어이 해당하랴?
네 형용은 아주 적고
네 말은 너무도 지각없구나
마땅히 너를 두어야 하리
골짜기 속에
폐헬기장(09:52)
폐헬기장 2개를 연달아 지나면서 벌목지로 이어지는 등로는 무쟈게 좋다
560m봉(09:56)
577m봉(10:00)
577m봉에서 급하게 내려서니 심연동으로 이어지는 안부가 나온다
심연동(深淵洞) 갈림길 이정표
심연동 갈림길(10:03)
성주산 휴양림이 있는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심연동이 이어지는 등로가 보이는데
옛부터 깊은 골짜기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심연동((深淵洞)이라 이름지어진 것처럼
골과 골 사이에 흘러내리는 계곡이 깊고 수려하다.
이곳으로 등산객들이 많이 올라오는지 일반 산악회의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이곳부터는 제도권 등산로인지 휴게용 벤취도 보이기 시작한다
574m봉(10:10)
677m봉(10:21)
문봉산에서 바라볼 때 마치 눈썹처럼 보이는 바위가 이곳인데 로프를 타고 올라서니 조망이
굉장히 좋은 곳이나 짙은 스모그 현상으로 인해 전망도 별로이고 중국과 가까운 서해쪽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서울보다 스모그 현상이 훨씬 심한 느낌이다
677m봉 정상에서 바라본 화장골의 모습
성주면 성주리의 화장골계곡은 4km에 이르는 울창한 숲이 장관인 계곡으로 산림욕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특히 이 일대의 계곡은 예로부터 화장골이라 하여 그 수려함이 잘 알려진 곳이다.
성주산 일대에 모란형의 명당8개소(성주8묘)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곳에 감추어져 있다하여
화장골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지금도 명당을 찾으려는 이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기도 하다.
동쪽으로는 백월산과 월치 저수지가 보이고 금북정맥 능선이 스모그에 갇혀 버렸다
665m봉(10:28)
677m봉을 지나 성주산(장군봉)으로 향하는 길에도 역암들이 많이 보인다
역암 아래에 서있는 안내판
뾰족한 바위를 타고 올라서니...
성주산 장군봉 정상이 나온다
성주산 장군봉 정상의 이정표
성주산(聖住山: 677m:10:40)
보령시 청라면과 성주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오서산과 함께 보령을 상징하는 산이다.
신라 태종 무열왕 8세손인 무염(無染)국사가 당나라로 가서 30년 동안 수행한 뒤 귀국하여
성주산에 있는 오합사에 입적하였는데 그 뒤에 사람들이 성승(聖僧)이 살았던 절이라하여
그 절을 성주사라 부르고 성주사가 위치한 산을 '성주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 말기에는 독립 투사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기도 하며
성주산자연휴양림이 들어선 화장골과 심원골 계곡이 유명하다
랑혜무염(朗慧無染:800~857)국사는 ‘광종대사廣宗大師’라고 널리 알려져 있어며 태종무열왕 8세손인
진골출신으로 13세에 五色石寺(설악산)에 출가하였다. 그곳에 머물던 법성法性(중국에서 楞伽禪을 배운 선사)에게
능가경을 배웠다. 이후 무염은 浮石寺로 가서 화엄을 공부하고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들어갔다.
당나라 서안 종남산 지상사에서 또 다시 화엄경을 공부한 뒤, 당시 낙양 불광사(佛光寺)에 머물고 있던
불광여만(佛光 如滿)과 도담(道談)을 나누었는데, 여만은 무염에게 ‘후에 중국의 도가 끊기면 신라에 가서
배워야 한다(吾閱人多矣 罕有如是新羅子矣 他日中國失禪 將問之東夷耶)’라고 칭찬하였다고 전한다.
다음으로 마곡보철(麻谷寶徹)에게서 법을 얻고 그곳 사람들로부터 ‘동방의 대보살’이라 칭하며 존경을 받았다.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무열왕계의 후손인 남포지역의 호족 김흔金昕의 후원을 받아 보령의 성주산문을 개산하였다. 문성왕이 이 소식을 듣고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성주산 정상에서의 인증샷
성주산 장군봉은 성주지맥 봉우리중에 가장 높은 곳인데 장군봉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고려말인 공민왕 시절에 포은 정몽주와 함께 충신으로 추앙받는 김성우 장군과 관련된
봉우리인듯 한데 잠시후에 가야할 또다른 장군봉이 있어 약간은 헷갈린다
김성우 장군의 묘역은 이 산의 북쪽에 있는 청라면 라원리에 있다
고려 말 우리나라의 연안지방에 왜구들이 침범해 백성들의 생명을 빼앗고 곡식을 약탈하는 등
피해가 심하였는데 충청도에서는 보령(保寧)의 남포지방(藍浦地方)의 피해가 가장 컸다.
이에 김성우 장군은 전라우도의 도만호로서 서해안 지역 왜구 토벌에 대한 왕명을 받고
초토사(전란이나 내란이 일어났을 때 해당 지역으로 파견된 정3품 당상관 이상의 문관이나 무관)가 돼
보령 성주산(聖住山)에 진을 치고 왜구를 몰아냈다
성주산 정상 1등 삼각점(△대천11 / 1986복구)
장군봉 정상에서 바라본 오서산과 청라면의 모습
540m봉(10:52)
은선동 냉풍욕장 갈림길(10:54)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은선동(隱仙洞)은 마을모양이 신선이 숨은 모습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예전에 이곳에 석탄광산이 있었는데 석탄 합리화 조치이후 폐광이 되어 냉풍욕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도상의 장군봉(10:58)
예전에 헬기장인듯한 폐헬기장이 보이고 청라면사무소로 이어지는 이정표와 성주산 종합 등산안내도와
보령시에서 설치한 안내도가 보이는 곳에서 직진으로 내려서면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청라면사무소로 가는 이정표가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성주산 등산로 종합 안내도
보령시에서 설치한 안내도
보령냉풍욕장 갈림길(10:59)
보령시 농업기술센터에서 관리하는 냉풍욕장은 예전에 탄광이었는데 지금은 폐광이 되어
여름철 냉풍을 이용하여 양송이 버섯을 재배하던 곳이며 1995년 이후로 7~8월에만
일반인에게 개방을 한다고 한다...냉풍욕장은 더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찬바람은
아래로 내려오는 대류현상 때문에 바깥 기온이 높을수록 내부는 차가워진다고 한다
560m봉(11:10)
좌측의 잣나무숲이 보이는 편안한 등로를 걷는다
탄광의 흔적인가?... 커다란 구덩이가 보인다
등로가 좋아도 너무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산객 한 사람 안보이니 나로서는 금상첨화이다
538m봉(11:05)
오늘 산에서 처음으로 장군봉으로 향하는 등산객 2명을 만난다
583m봉(11:13)
583m봉 정상에 서니 청라면소재지가 시원스레 보인다
충남 보령군 청라면(靑蘿面)의 지명은 댕댕이로 표현하는 ‘푸른 담쟁이가 우거진’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오서산과 성주(聖住)산 사이에 자리하여, 구릉과 곡저가 착잡하게 얽혀 있다.
가장 낮은 곡저에 청천(靑川)저수지가 자리해 있으므로, 청천 저수지의 주변이라고 지역 성격을 표현해도 무리가 없다.
이 저수지는 청천의 유입으로 조성된 것이므로 ‘푸른 하천’에서 지명의 성격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여기에다 ‘담쟁이 집’을 상징하는 나원리(蘿院里)가 있음을 고려한다면, 청천과 나원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
합성한 땅 이름이 바로 청라인 셈이다.
청(靑)에다 나(蘿)의 상징적 지명의 복합으로 ‘푸른 담쟁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탄생된 것이다
이은상은 <동무 생각(思友)>에서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고 작사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라 [靑蘿] - 푸른 담쟁이 (땅 이름 점의 미학, 2008. 5. 15., 부연사) 인용
이정표와 나무말뚝 2개가 있고 좌측으로 성주리로 이어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521m봉(11:20)
아직도 일제시대의 슬픔을 안고사는 소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527m봉(11:25)
이곳을 장군봉이라는 안내판이 있는데 처음 이곳을 산행하는 범여로선 상당히 헷갈린다
장군봉 안내판
527m봉을 내려서자말자 이정표를 만나고...
494m봉(11:28)
494m봉을 내려서니 못생긴(?) 소나무들이 좌.우로 즐비하다... 못생긴 나무들이 산을 지킨다고 했거늘
안부(11:33)
496m봉(11:37)
칼바위 능선을 지나니 향천봉이 나온다
향천봉(香泉峰:519m:11:40)
보령시 청라면 향천리와 성주면 성주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은 벤취가 지키고 있다
지형도상에는 519m봉으로만 표기가 되어 있는데 지명은 향천리에서 따온듯 하다
보령시 청라면에 있는 향천리(香泉里)는 마을이 평지로 청천저수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러 리가 병합되었는데 그 중에 분향리와 임천리의 이름을 따서 향천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불무골, 시루성이, 임적골, 창터 등이 있는데 불무골은 고려 때 김성우장군이 이곳에 풀무간을
두고 병기를 만들어서 침입하는 왜적을 섬멸하였다고 해서 이루어진 이름이다. 시루성이는 시루성 밑에 있는 마을이다.
시루성은 창터 북쪽에 있는 성으로, 꼭대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 있다고 한다.
이 곳에서 김성우 장군이 군사를 훈련하였다고 하며, 임적골은 향천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창터는 고려 때 창고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향천봉에서 내려서면서 좌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가는데 재선충에 감염된 소나무를
벌목하여 훈증하여 타포린으로 싸서 덮어둔 일종의 소나무 무덤들이 많이 보인다
등로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본 청천저수지의 모습
이정표(11:47)
등로가 너무좋고 편하다보니 자꾸만 졸음이 쏟아지는데 잠깐씩 졸면서 걷는다
간간히 휴게용 벤취들이 보이긴 하나 등산객은 오늘 산에서 여태껏 딱 2명만 만났다
화산동 갈림길(11:50)
우측으로 희미한 등로가 보이는데 일반 등산객들의 띠지들이 보인다
321m봉(11:57)
이 이정표 아랫쪽으로 아직 개통되지 않은 청라에서 성주로 이어지는 청라터널이 지나는 곳이다
멋진 쉼터에는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346m봉(12:02)
뒤돌아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온 성주산이 보인다
멋진 암릉구간을 지나 오름길에 무명묘지가 있다
묘지(12:20)
성터의 흔적같은 너덜지대(?)가 나오고...
444m봉(12:22)
444m봉에 올랐다가 다시 되돌아 내려온다
왕자봉으로 향한다
등로가 너무 좋다보니 산행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보령시장님 너무 감사합니다
463m봉(12:26)
갑자기 날씨가 어둑해지더니 진눈깨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헬기장(12:28)
헬기장에 있는 안내문
성주쉼터 갈림길(12:30)
이정표(↑왕자봉 0.1km. ↓장군봉 5.8km. ←성주쉼터 2.1km)가 있다
왕자봉(王子峰:513m:12:33)
보령시 화산동과 명천동, 성주면 성주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제2 성주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데크목 광장에 서니 보령시 대천읍내가 한 눈에 보이지만 짙은 스모그로 인해 그렇게 맑게 보이지는 않는다
정상에는 커다란 돌탑을 중심으로 이정표와 앙증맞은 정상석, 등산로 안내판,
데크목 광장이 있는데 처음 온 범여로서는 상당히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데크목 광장에서 바라본
신읍현(新邑縣)으로 고쳐 결성군(結城郡)의 영현으로 삼았고, 사포현은 남포현으로 고쳐 서림군(西林郡)의
영현으로 삼았고, 신읍현은 고려 초기에 지금의 보령으로 고쳤고, 1018년(고려 현종 9)에 홍주에 예속되었다.
남포현은 그대로 계승하다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가림현(嘉林縣)에 예속시켰다. 지금의 보령 일대는
조선 시대에는 공주목의 남포현과 홍주목의 보령현에 속하던 지역이다.
1397년(태조 6)에 병마도를 폐지하고 전국의 요새지에 15개 진을 설치하면서 충청도에도 3개 진을 설치했는데, 남포가 그 중 하나였으며 보령현은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었고, 1652년(효종 3)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655년에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보령현은 청양현 경계까지 47리이고, 홍주(洪州) 경계까지는 32리 떨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포현 경계까지 29리, 서쪽으로는 황해안까지 19리, 북쪽으로는 결성현 경계까지 25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409리로 기록되어 있다. 근대에 들어서서 1895년 지방관제 개편에 의하여 보령군이 되었으며, 명암면은 우라면으로, 오산외면은 오삼전면으로 개칭되었다. 금신면은 오천군에 이속시켰다. 1914년 남포군의 9개 면과 오천군의 4개 면, 그리고 결성군 가산면 일부와 홍산군 상서면 자멸리를 병합해 다시 보령군으로 개편하였다.
이후 1963년에 대천면이 대천읍으로 승격하였다. 1986년에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하여 분리되었다.
1995년에 도농통합에 따라 대천시와 보령군이 통합되어 보령시가 되었다.
지맥길은 옥마정 이정표를 따라서 내려간다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내려가는데 이곳 왕자봉은 대천읍이 가까운 탓인지 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아직도 일제 잔재의 슬픔을 안고 사는 소나무
예전에 치욕적인 식민지 생활을 겪고서도 아직도 이 민족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맨날 상대방을 헐뜯고, 비방하면서 살아가는 세태... 정말 역겹기만 하다
정신을 못차린 탓에 중국에게 당하고 일본에 치이면서도 이 나라의 정치하는 자들은
민초들의 안위보다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열중하니... 소나무야! 미안하구나
이 범여라는 민초는 너에게 도움이 되질 못하니...
한내여중 갈림길(12:45)
대천의 옛 지명이 한내 (漢川 :커다란 냇가)였던 모양이다
이정표(←한내여중 1.7km. ↑왕자봉 0.5km. ↓옥마정 1.2km)가 있다
소나무 상처의 안내판
체육시설(12:50)
성주쉼터 갈림길(12:51)
이정표(→옥마정 0.7km.↑성주쉼터 0.4km.←왕자봉 1.0km)가 있다
328.7m봉(12:54)
성주쉼터 갈림길에서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오다보니 능선위에 있는
4등 삼각점(△보령434)이 있는 328.7m봉을 놓치는 憂를 범한다
집에와서 선답자의 산행기를 보니... 그래서 지맥길은 갑자기 진로를 바꾸면 안되는 모양이다
바래기재(325m:12:58)
대천읍내에서 성주를 지나 부여군 외산면으로 이어지는 40번도로가 지나가는
성주터널이 이 고개로 아래로 통과하는데 이곳은 왕자봉과 옥마산으로 산행을
하러온 등산객들이 세워논 차량들이 많이보이며 등산 안내도와 사각정자가 보이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를 하는 모양인지 등산화를 청소하는 에어건까지 설치되어 있다
바래기재의 지명유래는 평신(平薪) 동남쪽 성주산 줄기에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바래기재”라고 부른다...남포(藍浦)에서 부여로 통하는 큰 길이 되는 고개로
높은 고개라 하여 망티(望峙)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옛날 남편이 과거를 보러갈 때
그 아내가 이 고개까지 남편을 바래다 주고, 또 이 고개에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하여
바래기재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한다
바래기재에 있는 왕자봉 등산 안내도
바래기재 정상의 모습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이곳 보령출신인 모양이다
옥마산 등산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도로를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옥마산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도로를 오르는데 적사함이 보인다
오늘의 날씨는 생각보다 바람도 차갑고 꽤나 춥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지났는지 허기가 진다
바람을 피하기에는 적사함 안쪽이 안성맞춤일 것 같아 그 안으로 들어가 밥상을 펼친다
점심식사(13:00~13:20)
점심이라봐야 떡집에서 산 경단기 한팩과 쥬스하나... 과일이 전부이다
좋아하는 주님(酒)은 오늘 가져오질 않았는데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만 주치의가 하는 말 ‘김사장님 2개월정도 금주(禁酒)를 하셔야 합니다”
하는데 괜스레 겁이나서 오늘만큼이라도 술을 먹지 말아야지
간단하게 식사를 끝내고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옥마산으로 향한다
도로에서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능선으로 접어 들었다가 다시 도로로 올라서니 반사경이 나오고...
다시 도로를 따라서 옥마산으로 향하는데...
좌측으로는 주차장인듯한 넓은 공터가 보이고...
주차장을 지나니 도로 아랫쪽엔 임도가 보이고 다시 우측의 능선으로 들어선다
이름없는 조그만 봉우리에 올라섰다가 내려서니...
좌측 아랫쪽은 계속해서 옥마산으로 오르는 도로와 같이 간다
상처입은 소나무 아래에 수목장이 보이고...
다시 도로로 내려섰다가...
또다시 우측 능선으로 들어선다
성주암 갈림길(13:40)
도로 우측의 물탱크를 끼고서 걷다가...
적사함 앞에서 또다시 능선으로 올라선다... 임도파들은 쭈~~~욱 도로를 따라가면 되겠다
봄이오는 소리
조그만 무명봉에서 다시 능선을 치고 오르니...
무명봉(13:50)
족보가 있는 봉우리인지 선답자들의 시그널 몇개가 달려있다
타이어로 만든 벙커가 나오고...
대영사 갈림길(13:52)
착한 보령시 산림 담당자들...고맙습니다
대영사. 명천폭포 갈림길(13:56)
보령시 명천동 성주산 기슭 이천마을에 있는 폭포가 명천폭포(鳴川瀑布)이다
물이 바위에서 떨어지는 광경이 절경을 이루면 물이 너무 맑아 깨끗함을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한다
폭포근처는 시원하고 소나무가 우거져서, 또한 많은 산새들이 울어대니 그 풍경을 어찌 글로 표현하랴
라는 한 시인의 싯귀도 있고, 물이 맑아서 잔병이 많은 사람들이 목욕을 하면 몸이 완쾌해진다 하며
옛날 선인들이 찾아와서 놀다가기도 한 폭포라고 한다... 폭포 근처에서 고란초가 자생하고 있다
무명봉(13:58)
암릉구간을 지나니 활공장이 나온다
보령 활공장(14:02)
활공장에서 바라본 대천시내
짙은 스모그 현상으로 인해 모든게 흐릿하기만 하다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즐기는 사람들
패러글라이딩 안내판 뒷쪽으로 들어선다
뒤돌아본 활공장의 모습
옥마산 표지판(14:05)
옥마산(玉馬山:601.6m)은 보령시 남포면과 성주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방송국과 통신사들의 중계기지가 있어 일반인들이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다
옥마산의 지명유래는 후삼국 시대에 견훤의세력하에 있던 이 지역에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56대)은 국운을 알아보기 위해 옥마산 인근에 있는 성주사 주지를
찾아와 의견을 들은 후,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 어디선가 옥마 한 필이 나타나 울부짖으며
앞 길을 막고 방해해 보다 못한 왕을 수행하는 신라의 장군이 화살로 옥마를 쏘아 죽이자
옥마는 땅에 쓰러질 듯 하다가 하늘로 치솟아 북쪽 하늘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에 경순왕은 밤마다 옥마의 악몽에 시달리다가 고려에 항복을 했다고 한다
이 이후부터는 옥마가 죽은 지역이라하여 옥마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대영사와 명천폭포로 향하는 이정표가 있고 뚜렸한 등로에 시그널이 많다
그러나 지맥꾼들의 시그널은 우측으로 향하고 있어서 난 좌측 방향으로 향한다
산불감초소(14:10)
옥마산 정상 아래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지만 무용지물이다
사방이 꽉막혀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데 뭘 감시하겠다는거야
옥마산 정상은 통신사들의 중계기지와 방송사들의 시설물들이 점거하고 있어 출입이 불가능 한 곳이다
옹벽사이의 좁은 통로를 지나니...
MBC 중계소 정문(14:12)
우측에 無限空間 通信道場비가 서 있다
도로를 따라서 좌측으로 내려가니...
TJB보령TV 중계소(14:13)
kt 중계소 정문(14:15)
kt 정문이 보이는데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보이는 막대처럼 생긴 옥마산 정상석은 찾을 길이 없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물어보려해도 개미새끼 한마리도 안보이니 물어볼 수도 없고, 가야할 길이 멀어 포기한다
나중에 집에와서 검색을 해보니... 나처럼 능선으로 오르면 볼 수가 없고, 시멘트 도로를 따라와야 볼 수 있다
kt 정문앞에는 말재 3.3km라는 이정표가 있고 저멀리 잔미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kt중계소의 낡은 철조망을 끼고 내려간다
등산로 입구라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이곳은 성주면 개화리로 이어지는 등로이고 난 말재 방향으로 간다
옥마산 정상은 철조망으로 굳게 닫혀있다
노을전망대(580m:14:18)
옥마산을 한바퀴 삥돌아서 내려오니 데크목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노을전망대란 앙증맞은 표시석이 있다
뒤돌아 본 옥마산 정상의 모습
노을전망대에서 바라본 보령시 남포면의 모습
보령시 남포면은 오석(검은돌)과 벼루로 유명한 곳이다
남포 벼루는 성주산 기슭에서 캐낸 단단한 돌을 쪼아서 만든 벼루로 돌 빛깔이 하도 까매서 이름이 오석(烏石)이라 붙었으며, 여간해서 깨지는 법이 없고 단단해서 물이 스며들지 않으므로 벼루로 쓰이지만, 그만큼 다듬기도 새기기도 어렵다.
그러나 한번 다듬어 놓으면 갈수록 윤이 난다고 한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늦어도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남포 벼루가 유명해졌으리라고 짐작한다. 녹청색돌에 포도무늬를 조각한 벼루를 최상품으로 치는데 이 남포 벼루 제작기능은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전수되고 있다.
이 남포 오석은 벼루뿐만 아니라 무덤의 빗돌로도 최상급으로 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포 오석과 벼루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돌베개) 인용
노을전망대에서 내려서니 자작나무 군락지가 나오지만 등로는 뚜렸하다
473m봉(14:25)
뾰족한 돌무더기가 있는 능선을 지나니...
이정표(옥마봉 0.8km←, 말재2.6kkm→)가 있는 곳을 지난다
등산객이라곤 한명도 안보이는데 쉼터를 비롯한 등로는 아주 잘 관리되어 있다
추락주의라는 팻말이 있는 곳 우측 아래는 절개지라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477m봉(14:28)
암릉구간(14:29)
벤취 하나가 산꾼 범여를 반긴다
또다른 벤취를 만나고...
조그만 암봉이 있는 곳에서 반원형을 그리며 우측으로 꺽어진다
이렇게 길은 좋다... 2주전에 연비지맥을 걸으면서 개고생한 걸 한꺼번에 보상받는 느낌이다
452m봉(14:47)
정상에는 이정표(←옥마봉 1.8km →말재 1.6km)가 서 있다
452m봉 구조이정목
대천단맥 분기봉(14:48)
당경산, 해망산, 생앵산(보령) - 서해안의 삼대 해수욕장인 대천해수욕장과
아름다운 대천항으로 가는 17.6km의 산줄기" 분기점이라는데 우리나라
맥 산행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경수 선생님의 시그널이 걸려있다
신 선생님의 시그널... 오랫만입니다...잘 계시죠?
대천단맥을 지나 너덜길로 내려선다
380m봉(15:05)
좌측으로 만수산과 아미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385m봉(15:08)
좌측의 봉우리로는 오르지 않고 사면길로 말재로 향한다
350m봉(15:13)
묘지 한기가 있는 곳을 내려서니 말재가 나온다
말재(馬峙:15:15)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와 성주면 개화리를 잇는 고개로 큰 당산나무가 2그루있고 대형 등산안내도와
등산로 안내표시판과 이정표(↑개화리 2km,↓남포면 읍내리 1.2km, ←옥마봉 3.4km, →사현마을 2.2km)가 있다
대동여지도에 옥마산 아래 馬峙가 있고 남포(조선시대 藍浦縣)에서 홍산(조선시대 鴻山縣,부여군 홍산면)을
잇는 길목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황당은 아직도 洞祭를 지내는듯한 흔적들이 보인다
우아한 노거수
말재에 있는 안내판
성황당 우측에는 김광현씨 기념비가 있는데 碑文의 내용이 낡아 판독을 할 수가 없다
오늘 산행은 등로가 좋아도 너무 좋아서 마치 양넘 지갑줏듯이 편안한 산행을 한다
생각 같아선 이어니 고개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고, 시간적으로도 충분한데
서울로 가기위해 금북기맥을 마치고 오는 수헌아우님의 차에 꼽싸리 끼어서 귀경을
하려면 말재에서 산행을 종료해야 할 듯 싶다
말재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읍내리로 내려가는 길도 고속도로 같은 느낌이다
말재에서 1km 정도 내려가는 싯점에는 진달래와 생강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잠시후에 금북기맥 2구간을 마친 낡은모자님한테서 전화가 온다
남포면사무소 앞에서 조우하기로 약속을 하고 부지런히 남포면사무소로 향한다
호젓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가니...
이정표가 나오고 읍내리 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 면사무소가 가는길에 남포읍성이 보인다
남포읍성(藍浦邑城15:40: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10호)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석축읍성으로 둘레 890m.
지정면적 11,478㎡. 현재 동·서·남문과 적대(敵臺)·수구(水口)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문종실록』에 의하면, 이 성은 1451년(문종 1) 둘레 2,476척, 높이 12척의 성벽에 높이 3척의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377개를 두었으며,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갖춘 성문이 세 곳이고 적대가 5개나 되는 규모로 축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읍성들은 주로 내륙의 요충지와 해안지대에 쌓았는데, 이 읍성도 조선 초기에 쌓은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중요시된다. 성벽은 높이 4, 5m, 너비 3, 4m이며 평지에 정방형에 가깝게 터를 잡아
바깥면을 돌로 쌓았는데, 아랫부분은 비교적 커다란 깬돌로 쌓고 작은 쐐기돌로 틈을 메웠다.
석재는 성벽의 위로 오를수록 작아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성문은 동·서·남쪽의 세 곳에 세워졌고, 모두가 옹성을 갖추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특히 동문터의
옹성은 비교적 완형에 가깝고 5개의 적대 가운데 지금은 4개의 모서리에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이
확인되며, 동북·동남·남서·북서의 모서리에 둘레 25m 정도 바깥으로 돌출시킨 치(雉)는 조선 초기 읍성들 모두에 시설된
적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안에는 샘이 세 군데 있었고 성 밖에서 물을 끌어들여 저수하도록 시설되었으나, 지금은 수구(水口)가 하나 남아 있다.
서남쪽 모서리에서 서문터 쪽으로 치우쳐서 있는 가로 80㎝, 세로 60㎝의 네모꼴인 수구는 바닥과 천장을
판상장대석(板狀長大石)으로 깔고 덮은 것으로, 지금도 배수구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 성안에는 동북쪽에
관아문과 진서루(鎭西樓)가 남아 있다.
16세기에 이르러서 이웃한 마량진(馬梁鎭)에 진성이 축조되면서 이 성은 이차적인 방어선 구실을 하게 되었다.
문화재 관리가 이렇게 허술해서야...
무너지고, 망가지고 거기다가 읍성에서 쓰레기까지 태우는데도 그래도 방치되어 있다.
그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알려면 문화재 관리를 보라고 했거늘... 대한민국 아직도 한참 멀었다
남포읍성을 지나 도로를 나오니 읍내 버스정류장과 파출소가 보인다
읍내 삼거리(15:50)
읍내 삼거리에서 수헌아우를 기다리는데 바람이 몹시 차갑다
하는 수 없이 바로 아래에 있는 하나로마트가 있기에 거기가서 우유를 하나 사마시고
밖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하나로마트가 운영하는 주유소가 있는데 밖에있는 나를보고
주유소 직원이 추운데 안에서 기다린단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소파에 앉아 있으니
잠이 쏟아진다... 15분정도 꿀맛같은 잠에 빠져있는데 낡은모자님의 전화가 온다
수헌아우의 차를 타고 대천해수욕장 근처의 어시장에 들려 농어 한마리 잡아서 소+맥을
거하게 술한잔하고 서울로 향한다... 의사 선생이 술먹지 말라했는데...
오는 길에도 수헌아우가 집 앞까지 태워주는 바람에 편히왔다...아우님! 복받을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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