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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여행

베트남 - 다낭. 후에, 호이안 여행(1)

by 범여(梵如) 2017. 11. 21.

 

베트남 여행

다낭.후에.호이안 3박 5일 일정...그 첫날에

일시: 2017년 11월 15일 ~ 19일(3박 5일)

 

오랫만에 초등학교 동창들과 외국 여행을 가는데 코스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휴양지 다낭으로 정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언 50여년이 지났고 아들.딸을 출가 시키고 손주도 보았지만 지금도

만나면 늘 초등학생 같은 기분이다...나처럼 환갑. 진갑을 지난 친구들도 있고 어린 나이에 학교를

들어온 친구들은 올해 환갑을 지난 친구도 있지만 늘 만나면 반가운 불알친구들이다

서울에서 만나는 25명의 친구중에 21명이 의기투합하여 베트남 다낭으로 여행길에 나선다 

베트남의 국기

서북쪽에서 동남쪽까지 최대길이는 약 1,650km이고 동서간의 최대너비는

북부 550km, 남부 340km 가량이며, 북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라오스·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타이 만, 남쪽과 동쪽으로는 남중국해와 통킹만에

접해 있으며 수도는 하노이이다.

 

BC 3세기 중국의 남쪽으로의 영토 확장이 베트족에까지 이르렀을 때, 홍강 삼각주에

거주하는 베트족이 역사에 등장했는데, 그때부터 베트남 역사의 주요 흐름은 베트남

고급 문화의 원천이 되어온 중국과의 상호작용이었다...베트남은 938년 중국의 통치에서

벗어난 뒤 조공을 받치는 국가로서 중국 황제에게 칠기, 피륙, 상아, 열대 산물들을 바쳤다.

 

그리고 그 대가로 철학·행정·문학 서적들을 받았다. 중국 문화는 베트남 사회 깊숙이

침투했으나, 그것은 하층민들보다는 귀족과 고위 지배층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농촌의 하층민들은 베트남의 독특한 관습과 신념, 언어, 생활습관, 남녀의 사회적 역할

등을 그대로 유지했다.

 

베트남의 왕들은 중국 황제들을 본보기 삼아 베트남 변경에 있는 소수 인종집단으로부터

공납을 거뒀고, 중국의 왕실에 조공을 바치지 않을 때는 그들 스스로를 황제라 불렀다.

베트남의 왕실과 지역사회 간에 존재하는 문화·공간적 격차가 중국과 베트남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통치력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미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베트남의 인구와 국토 면적은 중국의 성 하나와 비슷하며, 대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농촌공동체에 대한 통치의 어려움은 "황제의 칙령은 마을 입구에서 멈춘다."라는 격언에

잘 드러나 있다.

 

베트남 전체지도

베트남은 지배문명과 연계를 갖고, 오랫동안 자국의 목적에 맞게 중국 문명의 사상과

제도 및 기술을 변형시켜왔으며, 이러한 연계와 변형의 양태는 일찍이 중국과 베트남의

역사적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전통을 거부하고 식민화에 싸우는 공산주의를 채택한 것에서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면이 다시 확인되었으며, 그 대응양식은 사회적 개혁을 촉진하기 위해

서양의 제도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20세기에 다시 명백해졌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그 양상은 베트남 공산당이 자유경제주의를 받아들이고

세계 경제로 통합되는 이면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 전략적 흡수와 적절한 변형은

베트남이 세계 최대의 인구과밀 국가 중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루어낸 시장경제 국가가

되도록 했으며, 수도인 하노이는 나라의 북쪽에 위치한다.

 

반면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인 호치민시티(이전의 사이공)는 남쪽에 있다.

베트남은 20세기 중반에 길고 지리한 전쟁의 결과, 1954~75년에 분단을 겪었다.

북베트남이라고 알려진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남베트남이라고 불리던 베트남 공화국으로

나뉜 분단은, 처음에는 군사적 성격이 짙었으나 이후에는 정치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1975년 4월 통일되었고 1976년 7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베트남인이 가장 우세한 인종집단으로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하며, 대표적 소수민족은

북부의 중국인, 몽족, 타이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 눙족·타이(토)족 등과 남부의 고산족·

크메르족·찬족 등이고, 공용어는 베트남어이고 프랑스어·중국어·영어·크메르어도 사용된다.

몽족

몽족 여인의 모습

사상은 유교 철학의 비중이 크며 주요 종교는 불교와 도교인데, 로마 가톨릭교,

이슬람교, 호아하오교, 카오다이교, 개신교 신자도 있다... 출생률과 사망률,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동남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지만 세계 수준에 비추어 비교적

높은 편으로, 인구의 약 2/5가 15세 미만이다. 평균수명은 약 66세이다.

 

베트남 전쟁(1955∼75) 동안 시골에서 도시지역으로 인구의 대이동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남부에서 큰 이동이 있었으며,  20세기 후반 현재 도시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은

전체 인구의 1/5에 달한다...1976년 베트남 정부는 남부지방을 위주로 1986년까지

도시인구 중 1,000만 명을 농촌의 '새 경제구역'으로 재배치하려는 계획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1976∼86년 사이에 새 경제구역에 정착한 인구는 4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5년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졌을 때 약 100만 명의 난민이 베트남을 떠났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해외이민이 금지되기도 했지만, 이후 1975∼79년에도 베트남인과 화교를

포함한 100만 명 가량이 베트남을 탈출한 것으로 추산된다.

호찌민(Ho Chi Minh) 인민위원회 청사

베트남의 역사는 BC 200년경 베트남어를 쓰는 민족언어 집단이 남베트(Nam Viet, 南越)라는

독립 왕국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이들은 한동안 베트남 북동부와 중국 남부를 지배했으나

BC 111년 중국의 전한(前漢)에 점령되었으며,  AD 1세기에는 인도와의 접촉으로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푸난 왕국이 메콩 강 삼각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6세기에 멸망했다.

939년 드디어 북부지역이 약 1,000년에 걸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13세기에 3차례 몽골의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다.

 

1407년 중국에 다시 정복되었지만 거국적 저항운동으로 1428년 마침내 중국인들을 몰아냈다.

레[黎] 왕조 치하에서 중국식 관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국경은 점차 남하했다.

1757년 양분되었다가 1802년 후에 통일왕조의 황제(嘉隆帝)가 된 구엔 안[阮映] 장군에 의해

통일되었으며, 19세기 후반 베트남은 서서히 프랑스에 정복되어 1883∼1939년에는

식민지로, 1939∼45년에는 속령으로 지배를 받았다.

 

1945년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들이 호치민[胡志明]의 영도 아래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다.

7년 동안 프랑스는 독립을 반대했고 호치민이 프랑스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다음 백과 사전 인용

다낭 지도

 

인천발 → 다낭행 비행기표

 

이번 여행을 주관한 총무의 설명을 듣고있는 불알 친구들

 

18시 35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약 4시간 40분간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내리니

열대지방이라 그런지 열기가 후끈하다...곧바로 공항을 빠져나와 가이드 미팅후에 공항에서

20여분 거리인 그랜드 투란 호텔에 투숙을 하는데, 한국과의 시차는 2시간이다

 

호텔에서 바라본 다낭 시내의 모습

베트남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다낭은 한때 북베트남의 사이공이라 불릴만큼 경제적으로

번창했던 곳이며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기지였고, 19세기경에는 프랑스 식민정부의 중요

항구였고, 현재의 베트남 영역을 갖추기 전, 고대 시기에는 참 족의 근거지였던 역사적인 곳이다.

다낭은 한 강(Song Han)을 두고 동쪽의 선짜 반도와 서쪽의 시가지로 나뉘는데, 송한교가 두 지역을 잇는다.

중심 거리는 동서로 뻗은 흥 브엉(Hong Vuong) 거리이다. 한 시장에서 강을 등지고 서쪽으로 가면

도시 윤곽을 알 수 있으며, 흥 브엉 거리 오른쪽으로 극장, 왼쪽으로는 광장이 있고, 그 앞으로

판 쭈찐 거리와 만나는 곳이 다낭의 중심부이다.

북쪽으로 미군 해군 기지가 있었으나 현재는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고, 남쪽으로 차이나

비치와 마블산(五行山: Marble Mountains)이 있으며, 참족 유적지를 제외하고 도시 자체는

볼거리가 별로 없어 후에, 호이안 등을 들르거나 하노이, 호찌민 등 기타 도시로 이동하기

위한 여행자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다.

 

이틀동안 묵었던 그랜드 투란 호텔의 모습

다낭은 베트남 남중부지역의 최대 상업도시이자 항구도시로 베트남의 5개 직할시중의 하나로

호치민, 하노이, 하이퐁에 이어 4번째로 큰 도시이며 다낭의 지명은 참어에서 유래되는데 이는

‘큰 강의 입구’라는 뜻으로 이곳의 기원은 192년 말레이계인인 참족의 거주자가 세운 참파왕국으로

이어지는데 이때부터 다낭은 참족의 거점지역으로 번영을 누리다가 1858년 프랑스가 점령하였고

월남전에는 미군이 다낭을 상륙거점으로 하였으며 그 당시 한국의 청룡부대가 주둔한 곳이란다

다낭의 도심을 가로 지르는 강이름이 서울 시내를 가로 지르는 강의 이름과 같은 한강이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동부 남중국해에 면한 쏜짜반도와 시가지가 구분된다

부근에는 참파왕국의 유적지인 미선유적지가 있고, 시내에는 참파왕국의 유적을 전시한 참박물관이 있다 

 

2일간 묵어야 할 그랜드 투란 호텔(+84 (0) 511-377-8888)

 

호텔입구에서 인증샷

 

다낭의 도로 모습

베트남 중부 꽝남 성의 성도이며 항구도시로  옛 지명은 투란(Tourane.)

인구는 약 80만정도로 화학 · 섬유공업이 발달해 있고 베트남전쟁중 남 · 북 베트남의 국경 근처로

미국군의 군사기지로 확대 사용되었으며  다낭의 도심을 흐르는 한강(Song Han)을 사이에 두고

동부 남중국해에 면한 선짜반도와 시가지로 구분된다

 

호텔 건너편에 니케해변이 펼쳐지고 다낭비치가 보인다.

이 니케해변은 직선 거리로 무려 20km가 넘는 직선거리로 세계에서 가장 긴 해변이라고 한다

참고로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이 2.5km 이라고하니 상상해 보시길...

 

다낭비치 해변에서 바라본 일출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해수욕 하는 사람들이 꽤나 보인다

 

미케비치는 워낙 긴 해변이라 남쪽을 미안비치(My An Beach), 가운데를 미케비치, 그리고 북쪽을

팜반동(Phan Van Dong) 비치로 나누는데 보통은 그냥 전체를 미케비치라고 부른다고 한다

다낭의 기후는 계절풍이 흐르는 전형적인 열대지역으로 뚜렷한 두 계절이 있다. 건기는 2월에 시작하여,

7월까지 이르게 되고, 우기는 8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이고, 연평균 기온은 25.67도이고, 연최고기온은

6,7,8월에 28~30도에 이르고, 11, 1, 2월에 연최저기온 18~23도에 이른다. 

12월부터 2월초까지는 아침/저녁으로는 초가을 날씨이나 한낮에는 더운 여름날씨이므로 일교차를

대비하여 가디건 또는 얇은 점퍼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평균 습도는 82.7% ~ 77.33%, 연평균 강수는 2504.57mm이며 월최고강수는 10~11월에 550~1,000mm,

월최저강수는 1,2,3,4월에 23~40mm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다낭의 미케비치의 모습

 

한국에서 여행온 할매들이 사진을 찍어 달란다

 

미케비치는 마치 해운대에 온 듯한 착각이 들만큼 많이 닮았다

 

미케해변은 미국의 경제 주간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6대 해변에 들만큼 아름다운 해변이다

주변에 관광 호텔들이 많이 들어서 있고 경관들도 참으로 깨끗한 편이다

 

야자수 음료를 파는 아줌마

 

나이 60이 넘어도 초딩이끼리 만나면 늘 어린애다

 

여친들도 어린애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는 초딩이 동창들

 

수영시합을 해서 진 넘들이 맥주를 사는 바람에 이른 아침부터 술파티가 펼쳐진다

호텔 식당에서 조식을 즐긴 다음에 버스가 올 동안에 다시 미케비치 해변을 거닌다

 

이곳은 휴양도시라 그런지 생각보다 거리가 깨끗하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간간히 보이고...

미케 해변미케비치(My Khe Beach) 해변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들의 휴식처로도 알려져 있다.
미케 해변 주위로 크고 작은 리조트들이 있으며, 해변으로 길게 해산물 레스토랑이 많아 맛있는 해산물들도 즐길 수 있다.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여친들...저 할마시들이 아직도 초딩이인줄 착각하는 모양이다

 

버스가 도착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버스를 타고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데 호텔에서 20분 걸리는 그리 멀지 않은 영흥사로 향한다

 

영흥사 주차장

영흥사(링엉사:Linh Ung)는 우리가 묶고 있는 호텔에서 자동차로 약 20분정도 거리에 있는 사찰로

미케해변 끝자락인 손짜(손트라:Son Tra)반도에 위치한 사원으로 67m 높이 해수관음상이 있는 곳이다

 

주차장에 내려서 영흥사로 향하는 길 옆 숲에는 원숭이들이 많이 보인다

 

경내로 들어선다

 

경내 바닥에는 잎을 건드리거나 자극을 주면 움츠러들고 아래로 늘어지는 미모사라

불리는 신경초가 많이 보이는데 친구들은 신기한 지 자꾸만 미모사를 건드린다 

 

반야트리 아래의 석가모니불

 

엄청나게 큰 반야나무

이 나무는 옆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다가 무가우면 그 가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하여

이 나무가 있는 곳에서는 다른 나무들이 살지 못한다고 한다... 이곳 나무는 엄청나게 크다

 

부처님의 탄생 배경을 표현한 조각

부처님께서 탄생하시어 일곱발걸음을 뗀 후 오른손으로 하늘 가리키며

천상천하(天上天下)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유아독존(唯我獨尊)을 하시는 모습

 

이 절터에서 발견되었다는 35억년 된 화석을 설명하는 가이드

이번에 가이드는 손님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기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느낌이다

초반부터 불평불만을 드러내며 아주 불쾌하고 가이드의 기본소양을 갖추지 못한 느낌이다

 

35억년이 되었다는 화석

화석 사이에 나무가 끼어 있는데 가격이 무력 1,600억원(우리돈)이라고 한다

 

뚜꺼비 한마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뒤돌아 본 보리수 나무

 

초딩이 여친들

 

영흥사의 상징인 해수관음상으로 향한다

관세음보살은 현세에 33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바다를 향한 관음보살을 해수관음보살이라 한다

해수관음보살은 주로 바다에 관계된 중생들의 병을 치료해주고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4대 해수관음상은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 남해 보리암, 여수 향일암이다 

 

영흥사 해수 관음상

높이가 67m로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불상으로 2003년도에 어부들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조성된

불상이라고 하며 우리나라 낙산사의 해수관음상의 높이가 16m인 걸 감안하면 이해가 편할 듯...

 

이 해수관음상을 조성한 배경에는 슬픈 사연이 숨어 있다고 한다

1975년 월남 패망 후 보트피플 14,000여명이 자유를 향해 목숨 걸고 배를 타고 가다가 폭격을 당했다고

하는데 그 중 단 3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배와 함께 바다에 수장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생존하신 분이 훗날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 여기에 부지를 구입하고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투자해서 해수관음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건물 30층 높이로 동양에서 가장 높은 해수관음상은 다낭시내와 해변 그리고 동중국해를

온화한 미소로 바라보고 서있는데 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달라는

바람에서 이 해수관음상이 세워졌다고 하는데,  67미터 높이의 해수 관음상은 웅장하다.

‘링엄사’(영응사)를 ‘비밀의 사원’이라고 하는데 부처님께 무슨 소원이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는데 무엇을 빌었는지 발설하면 절대 소원이 이루어 지지 않는데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친구들과 함께 해수관음상 앞에서...

 

해수관음상 몸속에 있는 법당내부

석가모니불이 주불로 좌.우 협시보살로 문수.보현보살이 모셔져 있고 꽃 장식이 많은 점이 특이하다

 

다낭 시내와 미케 해변을 배경으로 바람행님

 

인증샷

 

미케해변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범여

다낭의 미케비치 해변은 영국 BBC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6대 해변 중 하나이다.

20Km 이상 길게 펼쳐진 미케비치 해변은 항상 해변을 즐기는 사람들이 세계에서 모여든다고 한다

 

다낭에는 영흥사가 3군데가 있는데 이곳 쏜찌반도와 바나산 정상,오행산에

있다고 하는데 다낭을 측정할 때는 영흥사 3곳을 기준으로 한다고 한다

 

해수관음상에서 영흥사 경내로 들어선다

 

영흥사 가는 길에서 바라본 쏜찌반동의 모습

 

약간 더운 날씨라 아이스크림 한나씩을 먹는다

영응사(靈應寺)

영응사(링엉사)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베트남전이 끝나가던 시점에 베트남을 탈출하려던

남베트남인들이 다낭항에서 보트피플로 탈출을 시도하다, 북베트남군이 쏘아댄 포탄에 맞아

약 14,000여명의 무고한 인명이 수장된 가운데 이를 뚫고 탈출에 성공한 베트남계 미국인이

미국에서 갖은고생 끝에 크게 성공을 거두어 당시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거금을 기부해

2003년도에 만들어진 찰이라고하며, 이런 사항들이 공공연히 알려지지 못할 정도의 사회

체제였기 때문에 기부 이유등이 비밀에 붙여졌다고 해서 '비밀의 화원'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링엉사 일주문

사찰 양식은 중국풍으로 마치 중국의 사찰에 온듯한 느낌을 준다

 

친구들과 단체사진

 

사찰입구에서 만난 젊은이...데이트를 하는 모양인데 카메라를 들이대니 쑥스럽게 웃는다

 

링엉사 대웅전의 모습

 

링엉사 경내에는 멋진 분재들이 참으로 많이 보인다...마치 분재원에 온듯한 느낌을 준다

 

링엉사 대웅전으로 들어선다

 

링엉사 내부에는 반바지와 모자를 쓰고는 들어갈 수가 없다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아랫도리를 가릴 수 있는 천을 제공한다

 

대웅전을 참배하고 나오면서 바라본 링엉사 일주문과 해수관음상의 모습

 

불자라서 이곳저곳을 참배하다가 보니 항시 다른 사람들보다 늦다

가이드가 자꾸만 시간을 재촉하는 바람에 상당히 짜증이 난다

볼 곳이 참으로 많은데 가이드 일정을 맞추는듯한 느낌이다

 

링엉사 모전탑의 모습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는 다낭 시내에 위치한 다낭 대성당으로 향한다

 

다낭 대성당으로 가는길...차보다 오토바이가 훨씬 더 많다

 

대성당앞에 도착하니 인력거꾼이 씨클로를 타라고 호객행위를 한다

 

다낭 대성당    

1923년 프랑스 식민 통치 시기 건축된 성당으로 풍향계가 돌아가는 독특한 지붕으로

인해 현지인들은 닭 성당이라는 의미인 찐 또아 꽁 가(Chinh Toa Con Ga)라고 부른다.

분홍색 외벽이 인상적이며 일요일 미사 시간에는 신도들이 몰려 장관을 이루며

내부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다

 

 

가이드가 이곳의 관람시간을 15분밖에 안주는 바람에 구경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불교 신자이다 보니 그다지 큰 관심도 없는 편이다

성당 내부는 볼 수가 없도록 굳게 문이 잠겨있고 일반인은 성당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으며 단 베트남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만이 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성당의 외관이 핑크색으로 되어있어 핑크 성당이라고 한다

 

성당 바깥에 있는 성모마리아상

 

다른팀은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을 해주는데 우리는 가이드가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다낭 대성당 입구의 모습

주마간산격으로 주변을 보고는 성당 밖으로 나오는데 성당 주변은 노점상이 많다

 

성당을 나오니 씨클로(인력거)가 있고 자꾸만 한번 타보라고 한다

씨클로에 앉으니 사진을 한장 찍어주는 친절을 베푼다 

 

다낭 대성당을 빠져나와 한 30분을 달린끝에 식당으로 향한다

 

점심식사를 할 식당으로 향하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비는 그치고 원래 쌈디식당이란 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가이드라는 자가 향신료 냄새가 너무 많이나서 한국사람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른곳을

추천하는데 친구들이 동의를 하여 이곳 식당으로 바뀌었는데 이곳에 오면 현지 음식도 먹어봐야

하는게 여행인데 가이드의 흑심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닌지...원래 여행 계획은 비싼 요금을 주고

쇼핑을 안하기로 했는데 쇼핑을 안하기로 했으니 이런곳에서 이익을 착취하려 하는건 아닌지... 

 

음식은 그런대로 먹을만하다...특이한 건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낙타요리도 먹어봤다

1시간정도 식사를 끝내고 다시 버스를 타고 바나힐이 있는 바나산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바나힐에 도착한다

 

바나 힐 (Ba Na Hills)

바나힐은 다낭 시내쪽에서 차량으로 45분정도 소요되는 곳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다낭에서 3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높이가 해발 1,487m에 있는데 베트남을

점령한 프랑스인들이 이 지역을 지배할 때 피서지로 개발한 것이 시초로 이곳은

아무리 더워도 기온이 15도에서 25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명 공중정원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은 프랑스식 건축물과 베트남식 건축물이

대조를 이루면서 마치 일국의 성처럼 느껴지는 곳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바나산 정상에 위치해 있으며 볼거리가 참으로 많은데 지하 3층으로 된 놀이동산도 있다

 

바나힐스 입구의 모습

 

60이 넘은 친구들이 오늘은 모두 다 초딩이 같다

 

바나산 정상의 안개가 가히 환상적이다

 

바나산으로 향하는 케이블카

3개의 케이블카 노선이 있는데 길이가 무려 5.9km라고 하며 중국의 장가계 다음으로 길이가 길다고 한다

 

이 케이블카는 호주의 기술력으로 건설되었다고 하는데 케이블카 아랫쪽은 원시림이

조성되어 있고 엄청난 계곡물이 흘러 내리는데 아찔할 정도의 절개지가 오금을 저리게 한다

 

친구와 함께 케이블카에서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바나산 정상에 도착한다

 

옛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프랑스인들이 타고 다녔던 자동차도 전시되어 있고...

 

우리가 도착하니 공연을 막 끝낸 늘씬한 미녀들이 관람객들을 향해 포즈를 취해주고 있다

 

건축물들이 프랑스식이다

힘이 없었던 베트남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게 마치 일제강점기에 한민족의 비애와 동병상련이 아닐까  

 

케이블카에 내려서자마자 프랑스풍의 성당이 맨 먼저 보인다

이곳의 성당은 미사를 보는 곳이 아니고 관광객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높은곳에 어마어마한 건축물...베트남 사람들의 애환 고스란히 녹아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이 프랑스로부터 해방된 이후 이곳을 불질러 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복원이 되어 관광객 유치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친구들과 인증샷

 

이곳은 마치 롯데월드나 에버랜드 놀이 동산에 온 듯한 느낌이다

놀이기구 타는 건 케이블카 탈때에 요금이 포함되어 있어 모든게 공짜이다

우린 모노레일을 타는데 5분도 안 걸리는 모노레일 한번 타보려고 30분 이상을 기다렸다

 

핫도그를 파는 젊은이들...티없이 맑아 보인다

 

광장에는 짚시들의 공연이 시작되고...

 

고딕식 프랑스풍 건물을 지나 바나산 정상에 있는 사찰로 향한다

 

바나산에 있는 링엉사에 도착한다

이런곳에서는 가이드의 설명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가이드하는 친구는 올라오지도 않았다

 

절 마당에는 포대화상을 모셔논 전각이 보인다

 

포대화상(布袋和尙)은 중국의 스님으로 이름은 계차이고 명주 봉화현

사람이었는데, 몸집이 뚱뚱하고 이마는 늘 찡그려 깊은 주름이 잡혀 있고

커다란 배는 늘어져 이상한 모습을 하고있었다.


말이 일정치 않고 횡설수설 아무말이나 잘 지껄였으며 길을 가다가 피곤하면

아무데서나 잘 눕고 졸리면 어디서라도 잠을 잤으며 언제나 지팡이에 큰 자루를

지니고 다녔는데 필요한 소지품은 모두 그 자루 속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무엇이든 보기만 하면 달라고 하였는데 얻은 물건도 모두 자루 속에

넣고 다니다가 가난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도하고, 먹을 것을 주면

받아먹으면서 조금씩 나누어 자루 속에 넣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별명을

포대화상이라고 붙였다.


특히 날씨 예측이나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잘 예언하였는데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고 계속 어디론가 방황하면서

늘 길을 걸어다니며 일생을 보냈다.


그가 남긴 게송을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一鉢千家飯(일발천가반)바루대 하나로 천 집의 밥을 얻어먹으며

孤身萬里遊(고신만리유)외로운 이 몸 만리 길을 떠다니네

靑日觀人少(청일관인소)맑은 날에도 사람 만나기가 어렵고

問路白雲頭(문로백운두)길을 묻는 사이 머리에는 백발이 내렸네.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고 서기 916년 3월 명주 악림사 행랑 밑 반석에

단정히 앉아서 입적하였는데, 그때도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

彌勒眞彌勒(미륵진미륵) 미륵불 중에도 진짜 미륵불
分身百千億(분신백천억) 백천억 가지로 몸을 나누어
時時示時人(시시시시인) 항상 사람들 앞에 나타나도
時人自不識(시인자불식)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네

그때서야 사람들은 포대화상을 미륵 보살의 화현이라 하여 그 모습을 그려서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   

 

포대화상 뒷쪽에 있는 영봉선사(靈峰禪寺:린쭈아 린추사원 ) 대웅전의 모습

이곳 역시 건축양식이나 불상의 형태는 중국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듯 하다

 

대웅전을 참배하고 다시 마당으로 나온다

 

 

 

영풍보탑(靈風寶塔:린퐁바오탑)의 모습

 

사찰 안내도

 

양정(陽亭)이라고 해놨는데 중국식 전각 형태라 정확한 걸 알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관음전이나 명부전쯤으로 보면 될득 하다

 

최삿갓과 인증샷

 

전각 앞에는 연꽃과 불두화가 많이 있는데 우리나라 꽃과 똑같다

내려오다가 맥주방에서 흑맥주 한잔을 마시고 내려오는데 물가는 상당히 싼 편이다

 

구석구석 돌아봐야 직성이 풀리련만 시간이 없어 광장으로 내려간다

 

아직도 짚시들의 공연은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많은 모양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귀에 익은 음악 고향의 푸른잔디, 제비, 아리랑을 연주하니

情이 많은 민족이라 그런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지갑을 연다...나도 1$ 기부 ㅋㅋㅋ

 

정상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꽃길을 지나고...

 

음악분수가 나오고...예전에 귀에 익은 카펜트스 음악이 흘러 나온다

 

다시 바나힐스 정문

이곳에서 다낭 시내로 들어와서 저녁을 먹고 발마사지 샵으로 향한다

 

발마사지 샵에서 마사지를 받고...

 

호텔로 들어가기가 아쉬워 또 한잔... 룸메이트와 함께 소주 3병을 마시고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