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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여행

베트남 - 다낭. 후에, 호이안 여행(2)

by 범여(梵如) 2017. 11. 23.

첫날부터 가이드가 일정을 확 바꿔 버리는 바람에 여행 스케줄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총무하고 어떤 합의를 봤는지는 모르겠으나 처음에 나눠준 여행 스케줄은 휴지가 돼 버렸다

한 마디 하고 싶으나 친구들과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아 참았는데 심해도 너무 심한것 같다

해외여행을 다니다보면 새벽부터 짐을 싸느라 늘 잠이 모자랐는데 여기는 너무 남아 탈이다

한국과의 시차는 2시간 한국에서 새벽 4시면 잠에서 깨어 돌아 다녔는데 이곳에서 2~3시면

잠에서 깨어났지만 룸메이트한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뒤척거리다 호텔을 빠져 나간다

다낭의 청소부

호텔앞 거리의 모습

가로수가 야자수이다

미케해변의 다낭비치의 모습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에어로빅을 즐기는 다낭 시민들

한국이나 이곳이나 여인들 세상이다

신이났어~~~신이났네

휴양지의 도시답게 호텔들이 많이 보인다

사회주의 국가답지 않게 자유분방하다

내가 투숙하고 있는 그랜드투란 호텔도 보인다

호텔 뒷골목으로 가본다

민초들의 냄새를 맡고 싶어서...

과일 노점상... 파란색인데 열대과일이라 이름을 모르겠다

호텔 뒷골목의 모습

고구마를 팔고있는 아낙네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긴 사람들이  이곳에서 샤워를 한다

빵을 파는 노점상

서민들의 삶은 이곳에서도 팍팍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오토바이가 참으로 많은데 한결같이 백미러가 하나밖에 안보인다

도로에는 차보다 오토바이가 훨씬 많은듯...

호텔에서 가까운 곳에 美福寺란 사찰이 있다

사찰의 형태는 중국 사찰과 흡사하다

바닷가 근처라서 해수관음상도 보인다

부처님전에 누군가 오렌지도 올렸다

미복사 모전탑

저 여인의 간절한 바램은?

출근길에 들려서 향을 피우고 가는 여인

미복사 동자승이 자전거타고 등교하는 모습


스님도 어린애이기는 마찬가지...

학교앞 노점상

애들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등교시키는 학부모들

유치원...애들이 참으로 많다...이 나라는 희망이 보이는 듯

집에서 밥을 안먹는 모양이다

초등학교 정문

애들을 태우고 온 오토바이

호텔로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시간이 엄청남는다

이곳 시간으로 10시 30분 체크아웃...한국시간으로 12시 반이다

밥을 먹고 한숨 자고 나와도 시간이 남는다

잠자러 왔는지 여행을 왔는지... 참으로 한심하다

다음 여행지인 후에시로 떠난다

호텔옆에 있는 구멍가게

다낭 시내를 가르지르고 있는 한강... 서울의 한강과 이름이 똑같다... 큰 강이라는 뜻이다

후에시 가는 길에서 차창 밖으로 바라본 해변

후에를 가면서 가이드 친구가 이번 여행과는 전혀 관련도 없는 커피 이야기가 장황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그런 얘기 집어 치우고 이곳의 역사와 관광에 대한 얘기를 해 달라고 하니 자기는

더 이상 얘기를 안하겠단다... 이런 개넘의 쉬끼를 봤나...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에 다낭에서 가장 높다는 하이반 고개로 차가 올라가는데 마땅한 곳에 사진 촬영을 하게 세월 달라고 하니

세울수가 없다고 하면서 세우게 되면 경찰이 딱지를  뗀다고 하면서 세워주질 않는다... 스케줄에는 하이반 고개 절경

감상이라고 써 있는데 말이다... 이곳을 올라가는데 마치 설악산 미시령 옛길을 올라가는 길 같은데 차창 밖으로 본

절경이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차 안에서 찍은 하이반 고개(Hai Van Pass) 로 가는 길

바람과 구름의 의미라는 하이반 고개...베트남의 남과 북의 경계 지역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에

미군들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낡은 벙커와 건물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게 보인다

예전엔 참파 왕국의 국경이었고 지금은 다낭시와 후에시의 경계이기도 하며 고도가 1,172m란다

지금은 이 고개 아랫쪽으로 6.9km나 되는 터널이 뚫려 있어 현지인들은 잘 안오고 관광객들이

찾아 오는데 차량을 세울 수 없다는 핑계로 가이드 쉬끼가 꼬라지 부리는 바람에 그냥 지나친다

모두투어 여행사... 꽤나 큰 여행사인데 크레임을 걸어야 하나 가이드를 짤라야 하나... 이 여행사

다시는 이용하지 맙시다...금액은 다른곳의 거의 2배인 120만이나 주고 왔는데 서비는 개판이다

하이반 고개를 넘어서 랑코비치로 내려간다

차 안에서 찍은 랑코비취 해변의 모습

내려가는 길에 다른 관광객들은 차를 세워놓고 사진 촬영도 하건만 우리는 그냥간다

하이반 고개 아래로 이어지는 다리도 보인다

차창밖에서 바라본 랑코해변의 쪽배

아침을 먹은지 얼마되지 않아 또 점심을 먹으러 간다... 가이드의 말로는 스케줄이 그렇단다

폼 쥑인다

식당에서 만난 캐나다인 친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여전히 정겹다...그래서 불알친구인갑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조의 흔적을 보기 위해 후에시로 향한다

다낭에서 102km정도 떨어져 있는 후에시는 오랫동안 수도를 해 온 도시로 우리나라의

경주처럼 왕릉을 비롯한 왕조시대의 유물과 흔적들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베트남 중부지역에 위치한 고도(古都) 후에는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Nguyen) 왕조가

143년(1802~1945)동안 이곳을 근거지로 해서 베트남을 통치했다.

한 국가를 수도가 상징하는 의미는 단순히 정치, 경제적 중심지를 넘어서는데 그곳이 후에이다 


후에라는 도시는 우리나라로 치면 천년고도 경주와 같은 곳으로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딴 호아(Than Hoa)로

불렸으며,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1802~1945)의 수도가 된 이후부터 현재의 지명이 되었다.

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최대 격전지가 되어 왕도 대부분이 황폐해졌다.

1990년대 들어 지방 정부가 후에의 가치를 자각하기 시작해 관광지로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1687년 후에에서 5km 북동쪽에 있는 바오 빈(Bao Vinh) 마을에 도시의 성곽이 건설된 이후

1744년 응우옌 씨(阮氏)를 가문으로 하는 남베트남의 수도가 되었고 1802년 프랑스의 도움으로

응우옌 왕조를 건국한 쟈롱 황제가 후에를 수도로 정하였다.

1885년 프랑스는 통킹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왕실로부터 거부당하자 후에를 포위했다.

프랑스 측 자료에 따르면 3일간 지속된 후에 공격에서 왕궁 장서각을 파괴했고, 고가의 귀중품을 훔쳤다고 한다.

또한,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차례로 후에를 탈환하면서 무고한 국민들이 살해되는 살육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후에는 베트남에서 유일하게 유적지 관광이 가능한 도시이며 그래서 입장료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도시이기도 하다.

후에는 흐엉 강(Song Huon)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구시가지와 남쪽의 신시가지로 나뉘며 짱띠엔 다리와 푸쑤언 다리가 양쪽을 잇는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카이딘 왕릉이다

카이딘 왕릉

카이딘 황제(1916~1925)의 묘지로서 다른 왕릉이 중국식으로 조성되었다면 이 왕릉은 베트남과 유럽풍 건축 양식이 인상적이다.

즉 이 시기에 들어 건축 기법에 있어서도 프랑스의 영향이 확산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으며 1920년~1931년까지 12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되었고, 흐엉 강을 따라 남쪽으로 10km 지점에 있는 짜우 추(Chau Chu) 마을에 위치한다.


카이딘황제는 응우옌 왕조[阮王朝]의 후기인 1916년에서 1925년까지 통치하였고, 이 능은 1920년에 짓기 시작하여

1931년에 완성된 서구적인 콘크리트 건축물로 중국식을 본뜬 여타 황제릉과는 확연히 대비되는데, 프랑스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유럽식의 건축 양식이 많이 가미된 것이 특징이다. 석조와 콘크리트로 된 고딕 양식의 건물과 첨탑들은 마치

유럽의 성당과 흡사해 보이고, 심지어는 황제를 호위하는 석상의 얼굴들 중에도 서구적인 얼굴을 찾아볼 수 있다.

황제의 무덤이 위치한 본 건물인 계성전에는 청동에다 금박을 입힌 카이딘 황제의 등신상이 있으며, 황제의 유골은

이 동상 아래 지하 18m 깊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계성전의 벽과 천장은 서양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자기와 유리로 화려하고 현란하게 꾸며져 있다




왕릉 입구에 서면 가장 먼저 유럽 고딕 양식이 시선을 압도하는데 용이 새겨진 난간 사이로 36계단을 오르면 말,

코끼리, 문 · 무관 석상이 세워진 뜰에 다다르고 거기서 다시 26계단을 오르면 중앙으로 황제의 위업을 기리는

2층짜리 팔각형의 사당이 있고, 양쪽으로 유럽식의 높은 탑이 서 있다.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면 3개의 홀로 나눠진 떼인 딘(Thein Dinh)이라는 건물에 도착한다.

내부 벽과 천장은 도자기와 유리로 모자이크 장식을 해 두어 서양 건물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옥좌에는 청동에 금박을 입힌 1톤 무게의 카이딘 황제상이 있고, 그 밑에 황제의 유체가 안치되어 있다

불알친구들

왕궁으로 향하는데 입구의 36계단을 올라가면 중앙에 공덕비와 무덤을 지키는 문무관, 기마, 코끼리상이 두둥이 있다

베트남과 유럽의 고딕 양식이 혼재되어 있으며 20세기초 베트남 건축물을 대표하는 곳이란다



 카이딘 황제의 공적비

베트남 전쟁 중 폐허가 된 왕릉도 있으나 뜨득 황제, 카이딘 황제, 민 망 황제릉은

상대적으로 보존 상태가 좋아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가장 욕을 많이 먹고있는 황제인데 공적비는 화려하다

카이딘 황제릉의 문 · 무관 석상

프랑스 식민지시절 백성을 위하기보다는 프랑스의 꼭두각시 왕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인지 문부 석인상에는 서양인의 얼굴 모습도 볼수 있다




카이딘 왕릉은 카이딘 왕 생존시인 1920년부터 축조를 시작하여 1925년 사망 후 1931년까지 12년에 걸쳐 완공된 능이란다

친구들과 인증샷

카이딘황제는 응우옌 왕조[]의 후기인 1916년에서 1925년까지 통치하였다.

허지만 그는 프랑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황릉을 짓기 위해 농부들에게 세금폭탄을 안겨준

인물로 민초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데 카이딘 황제는 살아서부터 12년동안 자기 왕릉을

짓는데 민초들의 고혈을 빨아서 베트남에서 현존하는 응우엔 왕조중 가장 화려한 능이다

이 능은 1920년에 짓기 시작하여 1931년에 완성된 서구식 콘크리트 건축물로 중국식을

본 뜬 여타 황제릉과는 달리 확연히 대비대는데, 프랑스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유럽식의

건축 양식이 많이 가미된 게 특징이다

왕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꿍디엔딘 건물

석조와 콘크리트로 된 고딕 양식의 건물과 첨탑들은 마치 유럽의 성당과 흡사해 보이고

심지어는 황제를 호위하는 석상의 얼굴중에도 서구적인 얼굴을 찾아볼 수가 있다

황제의 무덤이 위치한 본 건물인 계성전에는 청동에다 금박을 입힌 카이딘 황제의

등신상이 있으며, 황제의 유골은 이 동상 아래 지하 18m 깊이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황제의 유골이 안치된 계성전(啓城殿)

계성전은 3열의 홀로되어 있는데 황릉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로 계성전의 좌우홀은 경비원을 위한 공간이며

가운데는 카이딘 황제의 유물과 위패가 모셔져 있고 자기와 유리 모자이크로 디자인된 인테리어는 매우 아름답다.



이딘 왕의 등신대(等身大)

1920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것인데 실제 카이딘 황제의 크기와 동일하게 만들어졌으며 청동상에 금박을 입혔다고 한다.

등신대 뒷쪽에 있는 부채살 모양의 문양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이며 황제의 유골이 동상 지하 18m 아래에 묻혀있어

만약에 아래를 파게되면 왕릉 전체가 무너지게 해놨는데 도벌꾼들이 지어낸 이야기 같고 실제유골은 후에시에서

10km쯤 떨어진 쩌우쯔 마을에 있다고 한다


크리스탈로 장식된 카이딘 왕의 등신대

카이딘 왕의 생전에 집무하는 모습

베트남풍으로 인증샷

계단옆 용의 모습

여친과 인증샷

이곳에서도 가이드의 재촉이 심해 주마간산격으로 카이딘 왕릉을 구경하고 2번째 왕릉인 뜨득 왕릉으로 향한다

뜨득왕릉 정문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조의 제4대 황제인 뜨득(Tu duc) 황제가 묻힌 왕릉으로

뜨득황제는 1848년~1883년간에 걸쳐 35년간 통치하여 13명의 황제중에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고 가장많은 후궁을 두었던 황제로 당시 밀려오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천주교를 박해하는 등, 마치 우리나라의 대원군처럼 쇄국정책을 폈던 황제이다

뜨득 황제는 104명이나 되는 후궁을 거느리고 호화스런 생활을 했으나 후사가 없어서

왕위를 조카인 동 칸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는 3년에 걸쳐 3,000여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자신의 능을 완성한 뒤, 별장으로 이용했다.

그는 50명의 요리사를 두고, 50종류의 요리를 50명의 하인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했다고 한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으면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데 가이드는 들어오지도 않고 빨리 나온라고 재촉한다

능 주변으로 연못을 파놓아 외침을 침략을 막는 역할을 해놨다

르우끼엠 호수

무덤 주위를 흐르던 시냇물을 파서 호수를 만들고 호수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고 황제는 이 섬에서

작은 동물을 사냥하기도 했는데 이곳이 능묘라기 보다는  마치 궁전의 정원첢 보이는 곳이다

 

마당에서 본 쑹키엠 정자 

뜨득 황제가 생전에 별장으로 사용했던 곳으로 이곳에서 시를 짓거나 읊었다고 한다

돌벽으로 에워싸여 소나무 숲안에 자리잡고 있는 뜨득황제의 왕릉은 응우엔 왕조의 유적중에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225ha중에 걸쳐 펼처져 있고, 50개의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호수 주변의 부속 건물은 목재 기둥으로 만들어진 중국 양식의 단아한 모습이다

뜨득황제의 여름별장

처음엔 황제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된 곳이나 지금은 뜨득황제와 황후, 황제의 어머니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뜨득 왕릉은 1864년부터 3,000여명의 군사가 동원되어 3년에 걸쳐서 완공되었다고 한다

응우엔 왕조시대는 사후에 후계자가 릉을 만드는데 뜨득황제는 후계자가 없어서 생전에 스스로 능을 만들었다

그 왕릉은 별장처럼 지어놓고 정치보다는 그림이나 시를 쓰는데 몰두했으며, 궁녀, 내시, 궁중악사들과 연못위에

배를 뛰어놓고 밤새도록 향락을 즐겼다고 한다

건물의 양식이 중국의 지배를 받았던 영향인지 중국의 냄새가 많이 난다

겸궁문(謙宮門)

겸문이자 사당과 뜨득황제의 유물을 전시한 공간이 나온다

겸궁문에서 불알친구들

겸궁문으로 들어서니 뜨득황제와 황후의 위패가 모셔진 화겸전(和謙殿)이 나온다

화겸전 내부의 모습

황제와 황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뜨득 황제의 유물을 전시해놨다

뜨득황제의 용상

어가(御駕)

화겸전을 둘러본 다음 코스로 이동한다

불알친구들의 여유로움

조그만한 문을 통과하니...

뜨득황제 첫번째 부인(1828~1902)의 릉

코끼리상이 보이고...

궁정 좌우에는 4상의 코끼리상과 말 한쌍과 문인석과 무인석이 세워져 있고 나비아라는 비각이 나온다

뜨득왕릉의 문인석

황제의 신하를 뜻하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한결같이 조그맣다.

그 이유는 뜨득황제의 키가 153cm밖에 안되어 지기보다 키가 큰 사람은 인재로

등용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석상들로 황제의 키보다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뜨득황제가 즉위할 당시에는 농민 봉기와 프랑스의 식민통치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정교하게 배치된 탑과  누각과 다리등이 그 당시의 황제의 화려했던 삶을 보는듯 하다

뜨득황제 공덕비...지금은 보수중이란 관람을 할 수가 없다

베트남에서 현존하는 공덕비중에 가장 크다고하며 무게가 자그마치 20톤이 넘는다고 하는데

황제는 자신의 비문을 손수 썼다고 하며 자신의 업적뿐만 아니라 잘못도 솔직하게 썼다고 한다

이 비석은 후에에서 50km 떨어진 Thnah Hoa에서 운반되었으며 운반하는데만 4년이 걸렸다고 한다 

공덕비 좌우에는 커다란 탑이 서 있다

외부에서 본 뜨득왕릉 정문의 모습

보수중인 공덕비의 모습

뜨득왕릉의 모습

일곱명의 응우엔 황제들 중에 뜨득황제의 가장 호화롭고 아름답다

그는 릉원 전체를 사후 궁전을 대비해 거대한 규모로 지었는데, 배산임수의 풍수지리를

고려해 건물을 배치하였고 연회장, 연못, 다원 등은 비교적 비교적 낮은 산밑에 배치하였다

뜨득왕릉의 무덤은 있는데 황제의 유골은 없다고 한다

유골과 함께 묻은 엄청난 보물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왕릉 조성 작업에 동원되었던

200여명의 인부와 신하들을 모두 참수하여서 왕릉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고 한다 

뜨득왕릉을 대충 돌아보고... 버스로 향하는데 날씨가 생각보다 덥다

왕릉을 감싸고 있는 연못이 마치 오사카성을 연상케 한다

사진찍고 메모를 기록하다가 보니 항상 맨 꼴찌이다

가이드 쉬끼가 빨리 안온다고 지랄이다

다음 코스는 띠엔무 사원으로 가는길에 회장이란 친구가 가이드의 행동에 폭발한다

내가 하고 싶었지만 친구들에 민폐 끼칠까봐 참았는데 회장이 나선 것이다

띠엔무 사원 가는길에 과일 노점상

사찰 주위의 상점들은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비슷해 보인다

모자는 많이 파셨나요?

과일을 하나 사먹는다...베트남은 생각보다 물가가 상당히 싸다

후에시를 가로 지르고 있는 흐엉강의 모습

흐엉강은 한자로 香江이라 부르고 영어 표기로는 Perfume River라고 표기를 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향기로운 쌀이나고 그 향기가 강에 스며들어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티엔무 사원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입구에 티엔무파고다(Thein Mu Pagoda)가 나온다

티엔무파고다(Thein Mu Pagoda)

흐엉강을 바라보면 서 있는 티엔무파고다(Thein Mu Pagoda)는 높이 21m의 팔각형의 7층석탑으로 

다분히 중국적인 냄새가 많이 풍기는 이 석탑은 후에시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불교의 八正道의

가르침을 상징하여 팔각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석탑의 각 층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탑의 영 옆으로는 2개의 정자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는 3톤(3,285kg)이 넘는 거대한 종이 있는데

베트남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 유물이라고 한다

이 종소리는 10km 떨어진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티엔무 사원(靈老寺)

정문에 문이 3개가 있고 편액에는 靈老寺라고 적혀있다

왕실연대기에 따르면, 응우예 호앙은 인근 지역을 여행하다가 빨간색과 파란색 옷을 입고

그곳에 앉아서 뺨을 문지르고 있는 천모(天?)로 알려진 노파로부터 그곳의 전설을 들었다.

노파는 예언하기를 한 영주가 와서 그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언덕에 탑을 세울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예언을 남긴 직후 그녀는 홀연히 사라졌고 이 소식을 듣고 호앙은 이곳에 절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원래의 사원은 작게 지어졌는데 천모로 알려진 노파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도영노사((靈老寺: 티엔무 추)라 하였다.


티엔무파고다를 지나니 대자비(大慈悲)’란 현판이 걸려 있는 작은 문이 나타났다.

좁은 문을 지나니 베트남 양식의 낮은 대웅전이 보이고 대웅전 입구에는 거대한 향로가 놓여있다.

향로 앞에 합장 배례를 하고 대웅전에 올라서니 거대한 청동 포대화상이 호탕하게 웃고 있다.

베트남의 절에는 부처님 상 앞에 포대화상을 모시고 있다. 포대화상은 일정한 거처가 없고,

항상 긴 막대기에 포대 하나를 걸치고 다니면서 동냥을 하고, 어려운 중생을 돌봐주는 선승으로

세간에는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티엔무 사원의 편액

티엔무 사원의 본당으로 향한다

티엔무 사원의 대웅전 모습

유리장 안쪽에 청동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폴란드 사람인 클로이스가 제작한 불상이라고 한다

대웅전 참배를 돕고있는 동자승

대웅전에 들려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고 동자승의 배웅을 받고 나오니 연못에 고기가 가득하다

티엔무 사원에 들리면 봐야할 꼭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입구에 있는 티엔무파고다이고 또 하나는 자동차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부패한 독재정권에 항의해 사이공 미대사관 앞에서소신공양(燒身供養)을 함으로써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고 반전운동에 불길을 당긴 틱꽝득(釋廣德:Thich Quang Duc:1987~1963)스님이 사이공으로

타고 갔던 하늘색 자동차이다

스님은 이 차량에서 휘발유를 몸에 뿌려 소신공양으로 분신하여 사망했다.

독실한 카돌릭 신자였던 독재정권의 디엠 대통령이 국민의 80%가 믿고있는 불교를 탄압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고 석가탄신일 봉충행사를 금지시키며 이에 반발하는 승려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틱꽝득 스님은 1963년 6월 11일 사이공 미 대사관 근처 교차로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제자 승려가 스승의 온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혔고 불길에 휩싸인 스님은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으면서 쓰러졌다...스님의 소신공양을 두고 당시 영부인

역할을 했던 디엠 대통령의 남동생 부인이 “땡중의 바베큐쑈”  라고 비난하자 대학생과 시민들이

반정부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어 46명의 스님들이 분신을 하였다.

결국 공산정권을 막기위해 디엠정부를 지지했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디엠정권의 지지를 철회했고

 디엠 대통령은 1963년 11월 1일 군사 쿠테타로 살해되었다

그 당시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스님은 온 몸은 불타고 사그라들었지만 신기하게도 스님의

심장은 불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았다고 하며 스님의 심장은 지금 하노이 국립은행에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그 당시 스님의 장례식 행렬에는 무려 10만명의 군중이 몰려 들었다고 하며  군사정권은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스님의 관에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지만  스님의 관을

따르는 인파가 무려 7km나 이어졌다고 한다

스님의 소신공양 사진...미국 AP통신 기자이자 저널리스트 맬컴 브라운이 촬영하여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소신공양을 감행하기 이전에 스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앞으로 넘어지면 흉한 것이니 해외로 피신해야 하며,

뒤로 쓰러지면 투쟁이 승리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소신공양의 동영상을 보면 소신공양 중에 불길이 거세지자

쓰러질 듯 앞으로 기울어졌으나, 마지막 혼신의 힘을 쏟아 다시 가부좌 자세로 정좌하며, 결국은 뒤로 쓰러진다.

이건 정말 자유에 대한 갈망이 낳은 기적적인 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인간의 근육은 구부리는 근육이 펴는

근육보다 많기 때문에, 소신되는 사체는 근육들이 수축해 자연스레 안으로 오그라들기 때문이다.

 

스님은 정말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최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몸을 펴고 죽었다.

이 엄청난 장면에 경찰들까지도 넋을 잃고 멍하게 서서 스님을 바라보았고 주위의 승려들은 틱꽝득 스님에게 일제히 절을 올렸다.



베트남 통일전쟁 중에 티엔무 사원은 반체제 수도승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불교도들의 항거 중심이 되었다

푸른색 오스틴 자동차 뒤에는 틱꽝득스님의 소신공양 사진이 거렬 있고, 처마 밑에는 스님의 트지 않는 심장 사진이 걸려 있다.

한 사람의 소신공양이 독재정권을 종식시키는 엄청난 사건이다

다른곳은 대충 훓어보고  뒷쪽의 석탑 방향으로 향한다

저 연꽃은 그 날의 아픈 기억을 알고나 있는지?

티엔무 사원에서의 인증샷

사원 맨 뒷쪽에 있는 7층 석탑

절마당에는 맛있는 두리안도 보이고...

베트남의 슬픈 역사를 보면서 분단의 아픔을 겪고있는 한민족의 동병상련을 느낀다

티엔무 파고다 앞에는 마오자이를 입은 모델들이 사진을 찍고있다

바나나를 팔러가는 아낙네

흐엉강을 바라보면서 주차장으로 향한다

가격을 흥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일행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바나나 하나를 사먹고 마지막으로 후에성으로 향한다

후에성 광장 깃발탑

이 깃발탑은 1807년에 17.4m 높이로 3층 높이의 벽돌로 쌓았으며   그 후 태풍으로 인해 여러차례

파손된 것을 1947년에 37m 높이로 새로 만들었으며 저 곳에 걸린 빨간 깃발은 1968년 북베트남(월맹)인

베트콩이 후에를 24일간 점령하였을 때 걸었던 깃발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남북 분단 시절에는 남베트남(월남)에 속해 있었는데 베트남전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1968년과 1975년 구정 대공세 때 결정적인 타격을 입으면서 왕궁은 폐허로 된 채 남아있는 곳이 많다

 

주차장에서 전동카를 타고 후에성 광장으로 오니 이곳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는 베트남 가이드를 만난다

후에성 입구의 모습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는 베트남 중부에 수도 후에(Hue)’를 건설했다.

흐엉강 하구에 자리 잡은 후에는 북부 하노이에서 540km, 남부 호찌민시에서 644km 떨어진

베트남 중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후에는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가 1082년부터

1945년까지 140년간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후에의 가장 큰 볼거리는 응우옌 왕조 13대에 걸친 황제들이 잠든 황릉인데 황궁과 사원, 황릉과

오래된 건축물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서 있는 후에는 1993후에 기념물 집중지대라는 이름으로

베트남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후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1968년 미군의 구정 폭격으로 유서깊은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이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그 후에도 후에시는 공산주의 세력에 의하여 악명높은 학살이 자행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후에는 '봉건 시대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복원을 미루채 한동안 방치되었다. 



후에성 입구에서 단체사진

응오몬(牛門)

광장에서 응오몬으로 가는 길에는 回자 모양의 연못에 3개의 다리가 있다

응오몬 성벽은 높이가 5m, 길이가 27m, 너비가 5.57m로 벽돌로 쌓아

만들었고 다섯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황제는 중앙의 문으로 다녔다고 한다

응오몬 위에는 망루를 겸한  누각이 있는데 목조에 기와지붕이다

누각의 지붕은 다섯마리의 새가 날아가는 듯하다 하여 응우풍(五鳳樓:NauPhung)이라고 한다

저 오봉루에서는 황제의 중요한 의식이 진행하는 곳이었는데 1945년 8월에는 마지막 왕제였던

바오다이(保大) 황제가 호치민 임시 혁명정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왕조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역사적인 장소라고 한다

후에성은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을 본 떠 만들어서 작은 자금성이라고 하며 외성과 내성으로 나눈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는 베트남 중부에 수도 후에(Hue)’를 건설했다.

흐엉강 하구에 자리 잡은 후에는 북부 하노이에서 540km, 남부 호찌민시에서 644km 떨어진 베트남 중부에 위치하고 있다.

후에는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가 1082년부터 1945년까지 140년간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후에의 가장 큰 볼거리는 응우옌 왕조 13대에 걸친 황제들이 잠든 황릉인데 황궁과 사원, 황릉과 오래된 건축물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서 있는 후에는 1993후에 기념물 집중지대라는 이름으로 베트남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응오몬으로 들어서면  태화전으로 이어지는 넓은길에 문이 있고 양옆으로는 호수가 보이고

삼문으로 된 패방이 보이는데 “正直蕩平”이라 적혀있다...정직함에는 치으침이 없어야 한다

라벤다 향기가 나는 풀구메리아 나무는 잎이 하나도 없다

1802년부터 1945년까지 13대에 걸쳐 이어진 응우엔 왕궁은 성벽으로 쌓여있어 요새이자 궁전이다

이곳의 뜰은 가로 세로 각각 2km 높이 5m의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고 그 성벽은 다시‘ 回 ’자로 쌓여있다

‘ 回 ’자를 담은 물은 후에를 관통하여 흐르는 흐엉강에서 구측한 방어선이 있었다 

1번째 패방을 지나니 연못을 가로 지르는 중도교가 나오고 2번째 패방 위에는 “高明悠久”라는 문구가 보인다

황제의 총명함은 영원하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살았는지...

태화전(太和殿)

황궁에서 가장 큰 건물이며 응우엔 왕조의 정궁으로 지붕은 황금색이다

황제의 즉위식과 생일잔치, 외국대사들의 접견 등이 열리던 곳이고 황제의 주관아래

매월 초하루.보름에 황제의 주관하에 조회가 열린던 곳이다

태화전 앞마당에는 정1품에서부터 정9품까지 아홉개의 품계서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는데

마치 우리나라 경복궁에 온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고 이 태화전은 중국의 자금성 태화전으로 모방한 것이란다

하도 사람들이 많아 뭘 제대로 구경을 할 수가 없고 시간을 짧게주어 모든게 수박 걷기식이다

태화전 뒷쪽에 있는 자금성(紫禁城 )이 있는데 베트남어로는 투깜탄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자금성을 본따서 만든거란다

서쪽에 月英이이란 패방이 나온다...달의 아름다운 기운이란다

동쪽에는 가보진 안했는데  日精이란(해의 정기) 패방이 있다고 한다 

묘문(廟門)

묘문의 현판

성벽에는 전쟁의 아픔인 총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묘문 안으로 들어서니 현임각이 나온다

현임각(顯臨閣)

현임각은 응우엔 황제들을 기리는 태묘(太廟)의 대표적인 전각으로 1824년에 지은 높이 17m의

3층 누각으로 왕궁내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로 선조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민망 황제가 이보다

더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며이곳에서 거행되는 태묘제례악은 유네스코 무형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세조묘 입구의 모습

현임각과 함께 응우엔 황제들을 기리는 대표적인 전각이다

현임각 기단 앞에는 세발로된 아홉개의 청동솥이 놓여있는데 고정(高鼎). 인정(仁鼎). 장정(樟鼎). 영정(英鼎),

의정(議鼎), 순정(順鼎), 선정(宣鼎), 유정(諭鼎), 현정(玄鼎)의 솥으로 1835년 민망 황제 당시에 주조되었고

아홉이라는 숫자는 응우엔 왕조의 아홉 황제를 의미하며 높이 2.4m에 2톤이 넘는 대형 솥이다

세조묘의 모습

세조묘에는 역대 황제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민망황제의 명으로 1822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길이가 54.6m이고 면적은 1,500㎡인데 내무에는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한다

민망황제의 것만 감시원 몰래 한컷을 찍는다

민망황제 위패

응우엔 왕조시대는 2대황제였던 민망왕 시절에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고 한다

그 당시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둘만큼 안정적인 정국이었다고 한다


응우옌 왕조의 2대왕인 민망황제는 1820년부터 1841년까지 재위하며 공식적으로 기록된 자식이

142(78명의 아들과 64명의 딸)이나 되며 일설에 의하면 민망황제가 거느린 후궁이 무려 400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민망황제가 즐겨 마셨던 술이 민망주인데 우리도 한번 먹어봤다


베트남 젊은 여인

카메라를 갖다대니 멋진 포즈를 취해준다


후에성 성벽과 성문

구시가지의 성벽은 응우엔 왕조의 1대 황제인 쟈롱황제가 1804~1833년에 걸쳐 건설하였다

구시가지는 베트남어로  낀딴(Kinh Than:경성이라는 뜻)이고 영어로는 씨타델(Citadel)이다

성벽은 가로.세로 길이가 각각 2km이고 높이는 5m이며 벽돌과 석재를 이용한 성벽에 10개의

성문이 있으며 남쪽이 4개, 동.서.북방향에 각 2개의 성문이 있다

옹궁의 중국의 자금성을 모방하여 지어졌으며 남.북을 축으로 설계되어 건물이 지어졌고

 성벽과 회(回)로 경계를 삼았다

이곳은 무관들의 집무실로 이용하던 곳이란다


반대편에는 문관들의 집무실이 있다

시간에 쫒겨서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서둘러 동문을 빠져 나온다

퇴근시간인가보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다음 장소인 커피집으로 이동한다

흐엉강에서 바라본 낙조

베트남 국가에서 운영한다는 누비라 커피집

베트남은 브라질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커피생산과 수출이 많은 나라라고 한다

베트남 정부는 고산지대의 토지 활용과 소득 증대를 통해 빈곤을 감소시킬 목적으로

커피산업을 육성했다... 현재 베트남의 커피는 90% 이상이 가격이 낮은품종으로

수출량에 비해 수출액이 적고 원두에 비해 가공커피 비중이 낮은 편이란다


원래 베트남은 1860년대에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아라비카 품종의 커피를 심었는데

그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하며, 1990년대에 이르러 남부 고산지대에 로부스타 품종을

심고 일본에서 재배기법을 이용하면서커피의 세계적인 생산대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현재 베트남은 커피에 대한 모든것을 정부주도하에 관리하고 있으며 전 세계 40개국에

수출을 한다고 한다

누비라 커피집에 있는 사향 족제비

누비라 커피카페 내부의 모습

이 카페는 베트남의 위즐 커피를 맛보면서 동시에 사향족제비를 보고 체험할 수 있는 달랏을 제외한

베트남 전역에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유일한 카페라고 한다

커피에 상용되는 원두는 베트남 정통 방식으로 사향족제비로부터 채취. 세척 햇빛에 말린 것으로

부드럽고 향긋하며 자연스럽게 베어 나오는 자연의 깔끔함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한다

또한 현지 농촌의 지역 경제에 도움을 주고자공정 거래를 통한 현지산 원두만 공급을 받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가 아주 비싼 커피라고 하면서 먹어보라고 하는데 난 커피의 무뢰한이라 맛을 잘 모르겠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전신마사지를 받으러 간다

서울식당에서 밥먹고 윗층에 있는 마사지샵에서 2시간의 전신마사지를 받고 숙소로 향한다

숙소는 흐엉강 근처에 있는 후에 임페리얼 호텔인데 아마 중국계인지 아님 화교가 운영하는

호텔인지 모든 장식등이 중국풍이다... 호텔에서 짐을 풀고 친구들과 근처에 있는 호프집으로 향한다

요즘 이곳에 무슨 축제가 있어서 그런지 늦은 시간인데도 활기찬 준위기다

후에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란다

록벤더도 보이고...

외국인들도 많이 보인다...친구들과 늦도록 맥주를 마시는데 생각보다 술값은 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