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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여행

Story가 있는 대마도 여행 1박 2일(1)

by 범여(梵如) 2018. 2. 1.

일        시: 2018년 1월 29일 ~ 30일

1일차 일정: 부산-이즈하라항-점심식사-골목길 투어-나카라이 문학기념관- 사무라이 거리

                 하치만궁- 신사덕혜옹주 결혼봉축비-가네이시성-대마도 교류센터-쓰시마 호텔


날씨가 추워도 너무 날에는  이젠 산행이 설설 겁이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내가 활동하고 있는 카메라동호회에서 대마도 출사를 가는데

한자리가  비어 있어니 가자고 하기에 특별히 할 일도 없고하여 따라 나선다

2003년도 불교대학원 동창회에서 성지순례를 겸한  대마도 방문이후 15년만에 대마도 투어를 가는 셈이다

대마도 전도

대마도는 동경 129도, 북위 34도의 큐슈(九州)본토에서 132㎞, 한반도에서는 불과 50㎞의 거리에 있는

큐슈 최북단 국경의 섬으로 섬의 전체면적은 709㎢로 거제도보다 조금 크고 제주도보다는 적은 섬이다.

대마도 전체 인구는 4만6천명이며 대마의 수도인 이즈하라에 1만7천명이 살 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나가사키현에 속해 있으며 크게 상도와 하도로 구분한다,

6개의 쵸(町:정)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중심지는 이즈하라이다.


섬 전체의 89%가 산지이며 주민들은 주로 임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 개의 시와 6개의 정(町)으로

구분된 지역 중 이즈하라가 제일 큰 도시이며 히타카츠 가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대마도의 인구 중 약 2만명

정도가 이즈하라에 거주하고 있으며,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어 대마도의 삼나무를 모두 베어내면 일본인구가

약 4년간 벌어들이는 외화수익과 맞먹는다고 한다.




산림이 풍부한 대마도는 섬 전체면적의 89%를 차지하는 산림이 차지하고 있으며 이즈하라마치의

다테라야마’와 미쓰시카마치의 ‘시라다케’에는 원시림이 남아 있어 국가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섬지형은 표고 200~300m의 산이 해안까지 펼처져 있으며 장소에 따라서는 100m의 절벽도 있어

웅장한 자연을 볼  수 있으며 대마도 중앙에 위치한 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은 쓰시마 제일의 절경을

자랑하며‘이키쓰시마국가지정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대마도의 풍부한 자연은 국가천연기념물인‘쓰시마 야마네코’를 비롯하여, 대마도에서만 볼 수 있는 생물과 한반도 등

대륙계의 동식물이 많이 생식하고 있으며또 철새 이동의 중간경로지에 해당하여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관찰지이기도 하다.

참고로 가미아가타마치에서는 이러한 야생동물의 보호, 연구를 위한 장소로써 “쓰시마야생동물센터”가 설치되어 있다.

 

바다로 둘러싸인 대마도는 쓰시마난류의 영향으로 따뜻한 해류가 흐르며 강수량이 많은 해양성기후이다.

봄은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계절풍이 불어 황사가 날라오며, 삼한사온 현상이나타난다.

약 한달간의 장마가 지는 여름은 비교적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데 가을은 때때로 태풍의 영향으로

강수량이 많은 편이지만, 10월경부터는 맑은 날이 많다.

겨울은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강한 계절풍으로 추위가 심해지지만 눈이 내려 쌓이는 일은 드물다.


대마도는 원래 옛부터 한국에 소속된 땅으로 조선시대 중기까지 경상도에 포함되어 있었고 대마도의 영주는

조선의 벼슬을 받았다고 하며 대마도라 부르는 설에 대해 여러 가지 유래설 들이 있지만 주된 세 가지 유래로

중국의 역사서인 위지왜인전에 진도(津島-일어로 쯔시마)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 어원이 되어 대마도라 표기한데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삼한인(옛 한민족)들이 두 개의 섬이라 하여 '두시마' 라 고 불렀다는 설, 일본사람들이 이 섬이

혹은 시라다케의 바위산이 마치 두 마리 말이 마주보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대마(對馬) - 즉 쓰시마라고 불렀다는 것이

어원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다.


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도’ 중 ‘대동총도’의 설명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백두산은 머리이고 대관령은 척추이며 영남지방 대마도와 호남지방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

한반도를 인체에 비유한 선조들의 유기체적 국토관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조선 조정은 대마도를 일본에 어떠한 형태로도 넘겨주거나 양도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하는 저자들은 대마도가 삼국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우리 영토’였다는 지론을 설득력 있게 편다


섬의 89%가 산림이라 주로 산 아래 동서 해안선을 따라 마을이 펼쳐져 있고 주민은 옛날부터 산과 바다에

의존하며 살아왔으며 궁핍한 삶터였으나 한반도와 일본 본토 사이에서 중개역을 하면서 그 존립을 유지해왔다.

반도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해지는 길목이기도 했고, 반도를 괴롭힌 왜구의 거점이기도 했다.  

지금은 한국인들로 인한 관광수입이 이 지역 수입의 1/4 정도이며 관광객의 99%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일본의 신화에 의하면 신들이 일본 최초의 섬으로 만든 땅으로 어쩌면 초기 인종이나 역사의 출발지 같은 땅,

일본의 신시(神市)로 대마도의 섬은 원래 하나였으나 중앙부의 아소만과 인공 수로인 오호나고시라는 운하를

만들어(1672년) 윗섬(上島)과 아랫섬(下島)으로 나누었는데 마주보는 암수의 말처럼 보인다하여

대마도(對馬島)라고 불렀다.

 

대마도와 한반도의 관계는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고 고려시대 몽고의 강요에 의해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1,2차 정벌에

나섰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조선 초에도 왜구들이 자주 와서 괴롭혔기에 대마도 정벌이 있었다.

이후 대마도는 신하의 예를 갖추었고 조선의 통신사들이 12번이나 찾아간 곳도 여기다.

대마도는 조선시대까지 줄곧 조선의 영역으로 기록되어 왔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구한말(1860년 이후)

본이 자기네 영토로 편입했고, 이승만정부 때 대마도 반환요구를 했으나 일본과 연합군 사령부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이즈하라(嚴原) 지도

붉은 색 도로가 대마도의 주도로이며 국도인 382번 도로이다

이 남북을 잇는 이 도로 1971년에 개통된 것이다.

그 이전의 교통은 모두 뱃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대마도 인은 배와 함께 운명을 다한 것이었다.

이 종관도로는 옛날의 사신로(使臣路)였다. 조선통신사가 지나던 길이다. 이 길 주위로 작은 관청들이 있었다

북단인 하타카츠에서 이즈하라까지는 50km-60km의 속도로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제한 속도가 60km이며 구간에 따라 40km인 곳도 많다

길이 좁고 구비가 많으므로 속력을 더 낼 수도 없으며 도로가 2차선으로 된 곳은 사정이

아주 좋은 편이나 대부분의 도로가 일차선인데 그래도 용하게 마주 오는 차를 잘 피해다닌다. 때로는

좁은 길에서 서로 마주치면 후진하여 대피하였다가 다시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인지 660cc 이하의 경차가 대마도 전체 차량의 65%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이즈하라는 13세기에 대마도주가 거주한 곳으로 임진왜란 전 후에도 부산왜관과 교류의 중심지가 이곳이다.

또한 조선통사사들의 행렬이 이 곳을 지나가고  이곳에 머물렀으며 대마도에 조선통신사과 에도에서 나온 관리들이

머문 곳의 표지석이 서 있는데 대마도의 전체 인구가 4만 6천이라는데 이즈하라의 인구가 1만7천 정도라고 한다

서울 잠실 운동장에서 새벽 01시 40분에 관광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향하는데 월욜일 일정이라 가격이

싸다는 이유인지는 몰라도 45인승 버스가 만석인데다가 버스 낡아 난방도 잘 안되고 기사 양반이 조는지는

몰라도 계속해서 브레이크를 자주 밟아대는 바람에 불안해서 잠이 오질 않는다

싼게 비지떡인가... 카메라 동호인들의 장비는 대부분이 고가인지라 카메라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다

그러기에 카메라 베낭은 절대 짐칸에 싣지 않기에 갖고 타기에 좌석이 좁아 다리도 제대로 못피고 부산에

도착하니 엄청나게 피곤하다

부산항 여객터미널

부산항의 일출

여행객을 대신하여 가이드가 출국수속을 밟는다

부산 → 이즈하라 티켓

부산을 출발하여 2시간여 정도 지난 다음에 이즈하라항(嚴元港)에 도착한다

15년전에는 히타카츠(比田港)로 입국했는데 오늘은 반대로 들어왔다

이즈하라 항구의 모습

우리가 타고온 오션플라워호가 보인다

15년이란 세월이 지난 탓인가 변화가 별로없는 일본땅에도 조금은 변한 듯 싶다

남녘땅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날씨가 춥고 바람이 세차다

예전에 없었던 다리가 보이고 고가도로가 새로 생겼는데 고가도로 너머에 표민옥적이

있는데 우리가 타고온 일행중에는 13개 팀이와서 가이드가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내리자마자 사진 몇커트 찍는 사이에 다들 식당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표민옥적을 놓친다


표민옥적(飄民屋跡)

우리나라 남해안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가 풍랑으로 조난되어 대마도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 표류되면 모두

대마도에 있던 표류민 집단 수용소 즉 표민옥에 수용했다가 조선에서 관리가 와서  적절한 협상 후에 귀국시켰다.

여객 터미널에 20미터 정도걸어 오면 해안가에 축대가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까지 표민옥으로 사용되어졌다.

현재는 해상보안자위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자료 - 펌)

일본에 왔다는 걸 실감한다... 차량들이 전부 경차밖에 안보인다

대다수의 차량의 번호판이 노랑색인게 이채롭다

일본에서 노란색의 넘버판은 660cc이하의 자동차로 경자동차로 분류되며, 한국의 소형차에

해당하는 자동차로 일본의 많은 국민들이 애용을 하며 대마도의 차량 65%가 경차라고 한다

간간히 보이는 하얀색 번호판...경차가 아닌 차로서 660이상의 차에 붙이는데 만약 단체버스가

번호판이 흰색이면 정상적인 영업버스가 아니므로 사고가 발생하였을 시 법적보호를 받지 못한다

터미널 주차장에서 짐을 호텔에서 나온 차량에 실어 보내고 식당으로 향한다

조선 통신사 행렬도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일본의 요청에 의해 조선왕실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이다.

조선시대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세종대부터이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뒤 얼마 동안은

 ‘통신(通信)’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부당하다며‘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 1607, 1617, 1624)’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이 3회의 사행에 ‘쇄환(刷還)’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잡혀간 포로의 쇄환이 주요한 파견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좀더 흐른 1636년(인조 14) 이후 통신사라는 명칭을 회복할 수 있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의 파견이 정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전쟁 발발 후 15년의 세월이 지난

1607년(선조 40)에 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강화 교섭에 힘썼다.

1603년 막부를 개설했으나, 당시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다이묘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내치(內治)에 주력해야 하는 입장에서

조선과의 관계 회복은 긴급한 현안이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중엽 쇄국 체제를 택해 당시 정식 외교를 맺은 유일한 나라였던 조선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대외적으로 고립된

일본에게 매우 중요했고, 화적으로 우월한 조선으로부터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일도 시급했다. 조선과의 우호적 관계란

 그들에게 ‘권력의 승인’이라는 의미도 지녀 대내외적으로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607년, 조선은 그들의 강력한 요청에 응하여 사신 파견을 재개하였다.

특히나 통신사 접대 경비가 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많았음을 볼 때 일본이 조선통신사에 대해 할애하는

비중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1655년을 기준으로 하면 대략 100만 냥에 달하는 액수였다.

1709년 당시 에도막부 세입이 76~77만 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통신사 접대 경비가 그들에게 얼마나 부담을 안겨주었던 일인지 알 수 있다. 그처럼 막대한 경비를 들이면서도 조선통신사를 정례적으로 요구했던 저간의 정황이 파악된다.

‘회답 겸 쇄환사’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한 세 차례를 포함해 통신사라는 이름을 회복한 이후

1811년(순조 11)까지 아홉 차례, 총 열두 차례의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에 걸쳐 일본에 보내진 300~500명의 인원은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0개월까지 걸리는 긴 여정에 참여했는데 한양을 출발하여 충주, 안동, 경주, 부산을 지나 쓰시마(對馬島),

이키(壹岐), 아이노시마(藍島), 시모노세키(下關), 가미노세키(上關), 우시마도(牛窓), 무로쓰(室津), 효고(兵庫),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히코네(彦根), 나고야(名古屋), 오카자키(岡崎), 시즈오카(靜岡), 하코네(箱根), 에도(江戶),

닛코(日光, 1636, 1643, 1655)에 이르는 긴 여정에 오르게 된다.


이 가운데 1636(인조 14), 1643(인조 21), 1655(효종 6)년의 세 차례 사행 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묻혀 있는

닛코산(日光山)을 들르는 절차가 추가되어, 조선통신사의 가장 긴 여정은 서울에서 대마도, 에도를 거쳐 닛코까지 이르는 길이 된다.

정사, 부사, 종사관의 삼사(三使)를 비롯하여 통역을 맡은 통사(通事), 제술관, 사자관, 의원, 화원, 자제군관, 서기, 마상재,

전악(典樂), 소동(小童), 기수, 포수, 세악수, 쟁수, 취수, 숙수(熟手), 사공과 격군, 포수, 도척(刀尺), 풍악수 등이 통신사의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업무를 담당했다.


이들의 여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조선과 일본의 교류를 알려주는 역사적 현장 그 자체가

되었고, 통신사행을 다녀와 남긴 수많은 사행록(使行錄)은 조선시대 외교관계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몸속 깊이 새겨진 일본 체험 기록은 오늘날에도 흥미진진하게 읽히고 있다. 국왕의 명을 받아 왕의 국서(國書)를

가지고 에도에 도착하여 이를 전달하는 전명의(傳命儀)까지 행하면 통신사행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마치게 된다.

전명의 이후에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노정에 들어서게 된다

조선통신사 대마도 초청 200주년 기념벽화.

조선통신사는 1607년에 시작하여 1811년까지 12차에 걸쳐 외교사절로 방문했다

이즈하라 시내로 들어선다

식당가는 길에서 뒤돌아 본 이즈하라 항구

이곳도 선거기간인 모양이다... 하는 짓거리는 한국과 똑같은 듯

스시집에서 점심식사

주방장은 손님이 들어와도 아는 척도 안하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듯...

식사를 끝내고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다음에 골목길 투어에 나선다

우리의 목적은 사진 촬영인데 관광객들 따라 다니기가 바쁘다...촬영도 제대로 못하고 앞 사람 신발만 보는 꼴이다

이 좁은 골목길에도 자동차들이 교행을 하면서 다니는게 정말 신기할 정도이다

대마도의 중심지인에는 이즈하라의 소형차가 일색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크락숀 한번 안울리고 다니는게 신기할 정도이다

우리보다 국력이 10배정도 큰 일본은 국가는 부유할 지 몰라도 국민들은 정말 검소하다

조금후에 가야할 하치만궁 신사(八幡宮神社)의 모습

이즈하라천((嚴原川) 의 모습

자그만 개울이라도 참으로 깨끗하고 가끔은 물고기도 보인다... 이즈하라 항으로 흘러간다

다시 골목길 투어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挑水) 문학관으로 향한다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挑水) 문학관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挑水)는 아사히 신문 기자로서 임오군란을 현지 보도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춘향전을 번역하여 아시히 신문을 20회나 연재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挑水)는 일본지폐 5,000엔 속에 인물로 등장하는 히구치이찌요(桶口一葉 :1872-1896)의

스승이자 연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히구찌 이찌요는 너무 가난하여 글을 쓸 수 밖에 없었고 자기 스승을 사랑하다

25세로 짧은 인생을 살았다 간 그녀의 사랑이 문학관 곳곳에 베어 있는 느낌이다


그녀는 아사히 신문 기자였던 나카가이 토스이를 만나  문학수업을 받았는데 「매목」,「섣달 그믐날」,「탁류」,

「까페지기,「흐린강」서정적인 일본 근대 문학사에 남을 대표작을 남겼는데 자기 스승을 뛰어 넘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이룬 셈인데 문학관 안에는 아담한 정자와 우물이 있고 내부에는 간단한 음료를 팔고 그들의 소품을 볼 수 있고

유타카를 입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나카라이토스이 문학관 정문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挑水:1861~1926)

대마도 출신의 기자이자 소설가로 우리나라 고전소설 춘향전을 일본에 소개한 인물로

나카라이 집안은 대대로 대만도 번주의 주치의 가문으로 부산의 왜관에서 의사로 상주하던

아버지를 따라 소년기를 부산에서 보내면서 한국어를 배우게 된다

15세에 귀국하여 동경의 영문학 학원인 공립학사를 졸업하고, 1881년에 오사카 아시히신문의

부산 통신원으로, 1882년에는 특파원 1호로 서울에 파견되어 임오군란에 대한 기사를 게재했다

 같은 해 아시히 신문에다 춘향전을 번역하여 연재하였는데 소설의 줄거리뿐만 아니라, 조선에 관한

조선에 관한 지식이나 해석을 자세히 덧붙혀 독자들에게 좋은 평을 얻었다고 한다

사실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건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이자 연모의 대상이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히구치이찌요(桶口一葉 :1872-1896)

나카라이토스이를 얘기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2004년도에 발행된 일본돈  5,000¥

지폐의 주인공인 히구치이찌요(桶口一葉 :1872-1896)를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메이지(明治維新)시대 최초의 여류 소설가로서 근대 일본 소설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20살의 히구치는 소설가를 지망하여 나카라이(당시 32세)의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온다

근대 소설의 여명기에 여성이라는 제약을 갖고 있으면서도 작가로서 자립하기 위해

분투하였지만 사랑, 돈, 건강 모두를 잃고, 폐결핵으로 25세에 요절하고 만다

그녀의 사후에 남겨진 일기로 인해 나카라이 토스이에 대한 연모의 정이 알려지게 된다

문학관 마당에 있는 우물

문학관 내부의 모습

사무라이 거리

거리는 참으로 깨끗하고 돌로 쌓은 높은 담장이 있는데 이 곳이 방화벽이라 한다.

이 거리가 무사들의 가옥이 있는 곳인데 돌로 담을 쌓아 방화벽으로 만들어 화마로 부터

전통 건물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높은 돌담장 거리가 조성되었는데 이마야시키(今屋敷)라 불리고 있었다

사무라이 저택과 거리

나가라이 토스이 문학관 옆에는 대마도주 가신인 무사들이 살았다는 부케야시키(武家屋)가 보인다. 

마을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일본무사의 가옥과 주위의 돌담은 과거의 그림자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무가저택의 돌담과 조금 다른 형태의 돌담이 있는데 이는 방화벽 돌담으로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사무라이 거리가 있는 나카무라 지구는 하치만구 신사에 인접한 거리로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졌다

무로마치 시대는 아비루씨에 이어 소(宗) 씨가 대마도를 지배했는데 당시10대의  대마도주인 사다구니는 

거점이었던 미네마치 시가를 떠나 후추(현 이즈하라)로 옮겨와서 오닌2년(1468년)에 새 저택(城)을

현재의 쓰시마 남경찰서 부근에 세웠는데, 이 저택은 이후에 나카무라 저택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섬의 중심지로서 후추마을을 정비하게 되었는데, 현재의 나카무라 지구의 모습은 간분시대(1660년대)에

무가저택(武家邸宅)의 그 당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사무라이 거리 방화벽

나카가이 토스이 문학관 거리의 담장은 돌로 가지른하게 쌓았고 일반적인 담장보다 높은데 방화벽이란다

이 담은 화재가 옆집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데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이즈하라에는 대마도번주의

가신들이 자신들의 집을 갖고 있었으며 처마와 처마가 붙어있을 정도로 근접하여 집을 지었다

더군더나 목조 건물이었기 때문에 이런 집들은 한번 화재가 나서 바람이라도 불면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대형화재로 이어졌는데, 1659년 대화재 때는 이즈하라에 있던 1,000호 이상이 불에 탔으며 19

대형화재가 발생했다고 한다


1841년 화재 대비책으로 방화벽을 쌓았으며, 1844년 정월에 세워진 방화벽은 축조일까지 세워져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데, 이 방화벽은 일본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것으로 나가사키현(長崎縣)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며 , 예전에 이곳이 사무라이들이 살았다고 해서 사무라이 거리라고 한다

최초 부중(읻즈하라)관아 터

초대 대마번주 宗義智 동상

이 분은 대마도가 얼마나 좋았으면 100번이나 대마도를 찾아 왔을까?

하치만궁 신사(八幡宮 神社)

어부와 병사를 보호하는 신사라고 하는데 하늘 天모양을 하고 있는 입구의 토리이가 서 있다

대마도의 대표적인 신사인 하치만구 신사는 백제에서 건너가 황제가 된 역사왜곡의 시발점이 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주인공인 신공황후(神功皇后)라고 한다


하치만궁신사

하치만신을 모신 이즈하라의 대표적인 신사로 일본 제14대 주아이천황의 왕후이자 삼한을 정벌했다고 주장하는 

진구왕후를 모신 신사이다.

진구황후(神功皇后)를 모시는 신궁으로 진구황후는 제14대 중애천황(仲哀天皇)의 황후(皇后)이자,

제15대 오진천황(應神天皇)의 어머니이며, 임신을 한 몸으로 삼한(三韓)을 정벌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는 현재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삼한(신라, 가야 등 한반도 )을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를 건설하였다고 하는

가상의 인물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주요한 근거로 내세워지고 있다. 

日本書紀에 의한 능전(陵前) 기록만 있는데 289년부터 389년까지 101세나 살았다는 신화적 기록이다.

임신한 상태에서 혼자 신라를 정벌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조작이다.

조작하기를 좋아하는 일본 옛 역사책을 글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神功황후의 무덤은 나라에 있는데 무덤의 형식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고 한다.

 

입구에 고마이누(狛犬) 두마리가 입구를 지키는데 한마리는 입을 벌리고 다른 한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만물의 시작과 끝을 의미한다고 한다...하치만궁 신사에는 3개의 신사가 있는데 임신한 몸으로 삼한을 정벌했다는

진구왕후의 동상도, 청동으로 만든 신마 동상도 시선을 끈다. 신마의 무릎부분과 허리부분은 많은 관광객이

만지면 자기몸 아픈 부위가 낫는다는 설로 반질반질하다.

하치만궁 경내의 좌측의 돌계단를 올라 가면, 거기에 코니시 마리아 부인과 그 아이의 제를 지내고 있는

今若 · 若宮神社[이마미야 · 와카미야신사]가 있는데 임진왜란시 히데요시는 그의 부하 고니시유끼나가의

딸(마리아)을 대마도 19대도주 요시토시에게 시집보낸다. 요시토시의 부인이 된 마리아는 15살 어린나이로

대마도로 가서 남편과 10년간 잘 살다가 히데요시가 죽고 그의 후예세력과 신예 도꾸가와이예야스파와의

세끼가하라전투에서 패해 유끼나가는 죽고 대마도의 안전을 위해 대마도주는 부인과 이혼을 하게 된다.

결국 그를 그리워하다 마리아는 세상을 뜨게 된 슬픈 스토리가 전한다

하치만신은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창시한 미나모토노 요리모토에 의해 막부의 수호신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하치만신궁은 3개의 신사로 이루져 있는데 가이드는 뭐가 그리도 바쁜지 아예 신사에 오르지도 않고

주차장에서 안내를 하고는 다음 코스로 서둘러 가는 바람에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서둘러 따라간다

고니시 마리아 신사(令宮若宮神社)

이곳에는 고니시 마리아의 혼백을 모신 令宮若宮神社가 있는데 여기 모신 마리아는 조선 침략의 일원이었던

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딸로서 히데요시가 전쟁에 필요한 전략적 차원에서 대마도 번주인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망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좌를 노리자 히데요시 막료의 한 사람이었던 고니시 유끼나가는 勢가 불리함을

의식했으면서도 의리상 히데요시 군단에 가담하여 세끼가하라(關が原)전투에 참여했다가 참변을 당했다.

고니시 마리아는 소오 요시토시로부터 즉시 소박을 당하고 나가사끼로 쫓겨나 신앙생활을 하다 5년 뒤 사망하였다고 한다.

고니시 마리아를 이즈하라에서 제사지내게 된 것은 악령의 재앙을 두려워해서란 말도 있다.

 ‘이마미야 진자’에 모셔진 위패를 보면 “제신(祭神) 오오구니누시 노 미고도(大國主命) 스기와라 미찌쟈네(菅原道眞)”라고만

돼 있고, 고니시 마리아의 이름은 없다. 도꾸가와 이에야쓰가 두려워 그 이름을 숨긴 채 오늘날까지 제사를 지내 왔을 수도 있다.

지금은 신사 앞에 세워진 나무 안내판에 마리아 이름을 밝혀 놓았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카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선봉장이었지만

가톨릭에서는 탄압받는 일본의 가톨릭교도를 보호했다는 이유로 성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마리아신사 앞에는 석등으로 보이는 시설이 있다. 석등이면 보통 짝을 이루는데 이건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고니시 마리아를 쫓아낸 소오 요시토시는 어떤 인물인가?

요시토시는 1588년, 20세의 젊은 나이로 대마도주가 되었고, 25세가 되던 봄, 히데요시로부터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서도록 명을 받아 많은 부하를 잃었는데 5천명이 동원되었는데 고작 2천명밖에는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그것은 평양과 행주산성의 두 싸움에서 크게 당하였기 때문이지만, 대마도를 통과하는 일본본토의 병사들에 의한

약탈과 파괴도 심각했다.

게다가 생명선이라고 할 만한 조선무역의 길마저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렇게 될 것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

장인인 고니시 유끼나가와 짜고 전쟁만은 막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고 대마도는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전쟁 후 대마도의 살길은 오직 조선과의 평화적 관계와 무역이란 것을 다시 한 번 통감했음에 틀림이 없다.

일본군이 패퇴하고 1개월 뒤인 1598년 12월 그는 빠르게도 사람을 조선으로 보냈고, 다음해에는 3월과 6월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 평화의 계기를 잡아보려고 했다. 

누군가 고니시마리아의 영혼을 달래려는지 시라다케(白嶽) 사케를 갖다놨다

하치만구 신사(八幡宮 神社) 정문의 모습

정문 좌측에는 비석에 황금색으로 “奉祝 御大典記念碑”라 적혀 있는데 천왕이 왔다 간 모양이다

보물전을 구경하는데 거금 3,000¥이라니 구경할 일도 없고 가이드는 진작에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하치만구 신사 정문의 모습

하치만구 신사  본전

본전 안에는 일반인들은 거의 들어 갈 수가 없으며 밖에서 손뼉을 치고 예를 올려야 한다고 한다

고마이누(狛犬)

일본의 신사는 절 입구에 가면 사자 모양의 조각상이 있는데 이를 고마이누(狛犬)라고 한다

‘고마‘란 고구려를 뜻하는 말이고,‘이누’는 개를 뜻하는 말이므로 ‘고마이누’란 ‘고구려의 개’라는 뜻이다

일본의 절이나 신사에서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 위키 대백과 사전에서는 고마이누(狛犬)를 설명하길 ‘사자와 개의 모양을 한 상상의 동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스카 시대(飛鳥時代:592~710)에 일본에 건너 왔는데 처음에는 사자 모양으로 두마리를 세웠으나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92)에 들어서 한쪽은 사자모양이고 한쪽은 고구려 개모양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위키백과 사전은 고마이누를 고대 인도에서 부처를 수호했던 사자에서 유래한다고 적고 있다

왜 고마이누(고구려개)라고 불렀는지 어딘가 모르게 좀 궁색한 설명이다

 

 신사를 들어가기 전에 깨끗하게 손을 씻으라고 물통이 있는데 이런건 한국의 사찰에도 洗心井이 있다

하치만궁 신사를 나오는 일행들은 사라져 버리고...

이 조그만 대마도에도 신사들이 참으로 많다

가이드의 말로는 일본인들이 숭배하는 신이 800만개 정도가 되니 일본은 잡신의 나라인 모양이다

불알에 요령소리가 나도록 달려가니 우리 일행이 보이기 시작한다

덕혜옹주에 대한 설명을 하고있는 가이드

덕혜옹주 봉축 기념비

덕혜는 고종과 고종의 세수간 나인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의 신분이었으나 고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조선 왕실의 마지막 왕녀로 1925년 영친왕에 이어 강제로 일본으로 건너가 학습원 여자중등과에 입학하게 된다.

불운은 계속되는데 1931년 5월8일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소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서녀(庶女)라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결혼 후 마음의 병을 얻고 그 병세가 심각해져

1946년 마쓰자와 병원에서 입원하여 귀국 때까지 16년간 병원의 독방에서 지내다 1962년 1월26일 3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귀국후 5년간 병원 치료를 받다가 퇴원하여 낙선재에서 기거하게 된 덕혜옹주는 1989년 4월21일 77세로 영면하였다.


덕혜옹주의 혼이 담겨 있는 곳-금석성(가네이시성)은 대마도주 소 가문이 거주하던 곳이며 아들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한 것이다. 금석성정원가는 길에 덕혜옹주 결혼봉축비가 서 있다.

이왕가종백작가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宗伯爵家御結婚奉祝記念碑)라고 비문에 쓰여 있다.

조선을 이왕가로 격하시켰으니 일본 황실도 아닌 대마도주 아들과 정략결혼이 가능했던 것이다.

비문 옆으로 벚꽃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데 봄철이면 만개한 벚꽃을 보며 덕혜옹주의 슬픈 역사를 되뇌인다고 한다. 

 덕혜옹주 결혼비 앞에서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이 지나 후궁, (사실 후궁이라기보다는 궁녀)에게서 얻은

자식이며, 환갑이 넘어 막내딸을 얻었기 때문에 굉장히 애지중지히였다.

그런데 출생년도가 1912년 즉, 1910년 8월 29일의 한일병합조약보다 약 2년이 지난 뒤 태어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고종은  한일병합조약 이후 어떤 삶을 살았나? 또는 덕혜옹주는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인데

어떻게 옹주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나? 라는 것이 의문스러울 수도 있다. 그것은 좋은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한일병합조약이 어떻게 이루어졌었는가에 대해서는 역사책에서도 자세히 배우지 않는다.

사실 거기엔 약간 껄끄러울 수도 있거나 아니면 부끄러운 것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소위 한일병합에 대한 조약문은 8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상당수가 왕실의 어떤 신분을 보장한다라는 것

즉, 조선왕실이  한일병합조약 이후 일본황실의 아래로 복속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왕가, 이 왕족이라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또 약간의 방계의 사람들은 공족이라 하여 왕족과 공족으로 편입되게 하는 것이였다.

한 마디로 일본 황실, 화족 체제에 속하게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내내 이 조선왕실이 일본 지배자들에게는 바로 그러한 선전의 도구로써 사용이 된 것이었다.

왕족을 죽이지 않고 놔뒀던 이유는 계속해서 영친왕을 이방자 씨와, (일본황실의 자손) 그렇게 결혼시킨 것을

대대적으로 대내외에 홍보를 했다든가 사실 덕혜옹주도 그런 방식으로 강제 국제결혼을 하게 된 것인데 그런 식으로 내선일체다

조선 왕실은 일제강점기에 선전도구로 이용되었는데 덕혜옹주는 그 중의 한 희생양이 아닐까?

가네이시성(金石城)

 대마도주 소 (宗)가문이 거주하던 곳이며 아들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한 것이다.

가네이성 정원가는 길에 덕혜옹주 결혼봉축비가 서 있는데 이왕가종백작가어결혼봉축기념비

(李王家宗伯爵家御結婚奉祝記念碑)라고 비문에 쓰여 있다. 조선을 이왕가로 격하시켰으니

일본 황실도 아닌 대마도주 아들과 정략결혼이 가능했던 것이다. 비문 옆으로 벚꽃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봄철이면 만개한 벚꽃을 보며 덕혜옹주의 슬픈 역사를 되뇌인다고 한다

가네이성 정문인 아쿠라문(檜門)

가네이성 입구 아쿠라문(檜門)은 1665년에 축성되어 1990년도에 복원된 건물인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가네이성(金石城)은 16세기 이후 소(宗) 가문이 거주하던 성으로 내분으로 인해 저택이 소실되자

소  모리카타(宗盛賢)는 가나이시하라에  가네이시 저택을 짓는다

소 요시자네(宗義慕)는 화염으로 큰 피해를 입은 마을을 정비함과 동시에  가네이시 저택 수리에 착수한다

 고쿠분지를 이동시키고, 성벽을 정비하고, 누문을 지었고, 간분 9년(1669년)까지 공사가 진행된 이 저택이

가네이시 성인데 , 성은 가네이시 천을 따라 지어졌으며 석벽으로 축조가 되었다 

이 석벽은 대마도의 돌담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돌담과 성벽이다.

누문을 빠져 나오면 오른쪽으로 네모진 빈터가 나오는데 빈터의 북쪽에는 오다이도코로몬(御台所門)이 있으며

이 성내와 연결되어 있고, 서쪽으로 가면 거처가 있었던 평지가 나오고 같은 방향으로 더 나아가면

17세기말에 지어진 가네이시성 정원이 있는데 1995년에 일본국가 지정 사적으로 등록되었다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 표지판

동경에서 마지막 대마도주의 손자인 소타케유키와 결혼한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기 위하여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 동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1931년에 건립하였는데 1955년 이혼 후

비석이 내동댕이쳤다가 2001년 씨플라워호 대마도 취항 후 한국 관광객이 늘어나자 장사속으로 다시 세웠단다


뒤돌아 본 가네이시성(金石城)

가네이시천(金石川)의 모습

대마도 교류센터

이즈하라 대형마트 역할을 하고 있는데 저녁8시 까지 문을 연다.

대마도 버스환승장의 모습

대마교류센터에서 황단보도를 건너니 쥬하치(十八)은행이 보이고 신사를 지나 쓰시마 호텔에 도착한다

신사(神寺)의 나라인 일본...이곳 대마도도 예외는 아닌듯 한데 쓰시마 호텔로 가는 좁은 골목에도 신사가 보인다
규모가 크고 유명한 신사 뿐 아니라 골목 골목마다 크고 작은 신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일본 전체에는 신사가 10만개 쯤 있다고 한다

만송각

저녁식사는(이시야끼/돌판해물) 특식이 유명한 BBQ 요리인데

돼지고기와 소시지, 꼬치, 가리비를 불판에다 구워 먹는데 맛이

담백하고 깔끔하다...거기다가 시라다케 사케 한병을 반주로 마신다

쓰시마 호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 방 배정을 받은 다음에 로비에서 오늘 찍은 사진의 품평회를 연다

교수님께서 일일이 지도를 해 주시는데 이론보다는 실습 위주로 수업이 이루어지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