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7년 12월 31일
☞ 산행날씨: 맑음... 그리 춥지않으나 미세먼지 심함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5.3km + 어프로치 약 1.2km / 4시간 30분 소요
☞ 참석인원: 수헌 아우님과 함께
☞ 산행코스: 빛돌공원- 남양홍씨 묘지 입구-광리 갈림길-양일농장 입구-희망블루베리 농원-은율송공 묘지-갈산리 경로회관
상경말 쉼터-무지개 농장-4번국도 지하-1번국도-논산일반산업단지-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지하-묘소봉
고속도로 지하-제일타포린-호남고속철도 지하-정지4리 입구-화정1리 버스정류장-미싯골칼국수-금박재
중리마을 버스정류장-화정리 버스 정류장-성동면사무소-갈림길-함양여씨 종중묘-50.3m봉-상리 갈림길-월명산
갈림길-월명산 공원-71.4m봉-장판고개-61.6m봉-성광초교 갈림길-우곤1리 갈림길-55.5m봉-개척1리 갈림길
우곤1리 갈림길-개척2리갈림길-십자 안부-불암산-팔각정-금강둑 제방-개척들 배수지-금강/논산천 합수점
☞ 소 재 지: 충남 논산시 광석면, 성동면, 강경읍
한해 마지막 지맥길을 서울에서 먼 남암지맥을 하려고 했는데 수헌아우님한테서 전화가 온다
“선배님! 논산(노성)지맥 마무리하시죠” 한다...사실 지난주 연비지맥 첫날 눈길에 미끄러져 다친 무릎의
통증 때문에 긴 산행이 조금 염려가 되었는데 이곳은 非山非野 구간이기도 하지만 노성지맥 첫 구간에
태워준 수헌아우 고교동창이 들머리까지 태워 준다고 하고 간식은 자기가 준비해올테니 선배님은
빈 베낭만메고 오라고 한다...갑자기 양넘 지갑줏은 기분이고 털도 안뽑고 그냥 먹는데 이런 산행을 안 할리가 있나
남암지맥은 다음으로 미룬 다음 ok 싸인을 보내고 06시 20분에 복정역에서 아우님을 만나 논산으로 향하는길에
전날 늦은 시간까지 거하게 한잔을 하는 바람에 내가 차에서 곤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원래는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정안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는데 내가 곤히 잠이들어 깨우지 않고
그 다음 휴게소인 탄천휴게소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고 조금을 더 달린 다음에 들머리인 광석면 사거리에
수헌아우 동창분은 우리를 내려주고 근처인 바랑산으로 산행을 하러간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광석면 사거리(08:40)
광석면 사거리에 있는 빛돌공원에 도착하여 우리를 이곳까지 태워준 수헌아우 고교동창과 헤어지고 산행을 준비한다
빛돌(光石)의 역사와 유래
이곳 광석면 지역은 백제시대에 열야산현(熱也山縣)이었다가 통일산라시대에는 이산현(尼山縣)이었고
그 이후에는 이성현(尼城縣), 은산현(恩山縣), 노성현(魯城縣), 노성군(魯城郡) 등에 속해 이어 오다가
1914년 행정 개편때 논산군 광석면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석 지명의 유래는 처음에는 넓은 들판의 광(廣)과 서 있는 돌(石)이 합하여 광석(廣石)이었다가
1900년대 넓을 광(廣)에서 빛 광(光)으로 표기하여 “光石”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광석(빗돌)은
빛을 내 세상을 밝혀주는 의미를 넘어 빛나는 인물을 상징하기도 한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산행을 시작하다(08:42)
빛돌공원에서 광석면 사거리를 끼고 좌측으로 꺽어지니 우측에 태성관광버스 차고지가 보인다
뒤돌아 본 광석면사거리의 모습
南陽洪氏 묘지 입구(08:44)
오늘 산행은 지난구간 육군항공학교 입구에서부터 계속해 도로로 걸어간다
그리고 산이라 봐야 가장 높은 월명산이 75.9m이니 대간길로 말하면 상주구간이라고 봐야겠지
도로옆에는 밀양박공 묘지가 있다
광리 갈림길(08:47)
2차선 도로를 따라서 오다가 광리(더운들 마을)과 수봉암이 있는 이정석이
있는 곳에서 가운데 시멘트 도로인 농로겸 마을길을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광석면에 있는 광리(光里)는 넓은 돌이 있다 해서 광석(廣石)이라 하던 것이 광석(光石)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서당이 많이 생겨 배우는 사람이 많아 마을을 빛냈다 하여 마을 이름을 광리(光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부락으로는 안더분들, 밧더분들 등이 있는데 넓은 들이 있어서 너분들이라 하였고, 또 인심이 훈훈하여
이 마을에 가면 더운 물과 더운 밥을 준다 하여 더분들, 더운들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갈림길 도로 우측에는 명성테크(주) 간판이 보인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간다
축사가 나오고 요즘 하도 가축병들이 많아서 걸어가는데 조심스럽다
양일농장 입구(08:53)
희망블루베리 농원(08:55)
커다란 축사도 지난다
계속되는 도로
인공수로가 지나가는 갈림길이 나오고 지맥길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대다수 산꾼들은 도로를 따랐고 트랙도 그렇게 되어 있지만
독도상 지맥은 우측으로 이어지는데...
공동묘지 지나 황토밭... 포기하고 시멘트 도로로 되돌아 온다
지맥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36.8m봉을 바라보면서 걷는다
전봇대에 걸려있는 선답자들의 시그널
도로가 좌.우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축사(牛舍)와 묘지밖에 없다
도로 우측에 녹색 휀스가 처져있는 곳은 농업용수가 지나가는 인공수로이고
좌측에는 최근에 조성된 듯한 은율송공의 묘지와 묘비가 보인다
恩律宋公 묘비(09:05)
축사도 지나고...
축사안의 젖소들이 우리가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갈산리 경로회관(09:12)
논산시 광석면에 있는 갈산리는 자연부락으로는 갈미, 큰동네, 날근터, 도래뜸, 산정말, 은동골, 쟁미턱 등이 있다.
마을 앞 넓은 들에서는 쌀이 나오고 산에서는 칡이 많이 나온다 하여 갈미(葛米) 또는 갈산(葛山)이라 하였다.
갈산리 곰솔(사진 - 펌)
갈산리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된 곰솔이 있는데 수령은 300년생으로
추정되며, 2그루가 지정되어 있는데 동쪽곰솔은 높이 16m, 가슴높이 줄기둘레 2.63m, 남쪽곰솔은 높이 12.5m, 가슴높이 줄기둘레 2.2m이며 이 곰솔 두 그루는 논산에서 서북쪽으로 약 3㎞ 떨어진 곳에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데, 곰솔은 흔히 해송(海松)으로 말하며 이곳 두 그루의 해송을 사람들은 쌍군송(雙君松)으로 부르고 있다.
곰솔은 우리나라 남쪽해안에 따라 좁은 대(帶)를 형성하면서 분포하는데 이곳 곰솔은 내륙지방에
치우쳐 자라고 있다는 특이성이 있으며 이 곰솔은 효종때 예조판서를 지낸 권육(權0xA085)이 나이 65세때
관직을 사퇴하고 충청도로 낙향할 뜻을 상소하자 조정에서 이산(尼山: 지금의 魯城) 현감을 제수하였는데
2년 뒤에 67세로 생을 마쳤다... 그 죽음을 애도해서 효종 6년에 왕명으로 경기도 수원에 있는 곰솔의 묘목을 보내어 이곳에 심도록 하고 쌍군송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이곳에 있던 무덤은 1996년 공주선영으로 옮기고 다만 쌍군송만 남아 있으며 곰솔은 우리나라와 일본을 원산지로 하는 극동지역의 수종인데
서해안에 있어서는 수원부근이 분포의 북쪽 한계를 이루고 있다
갈산리 경로회관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수확을 포기한 무우
갈산교회도 지난다...오늘이 일요일인데 교회는 쥐죽은듯이 조용하다
저 나무도 곰솔인가?
소나무 우측 묘소에는 통덕랑을 남원양공의 묘비도 보인다
卍자형 도로가 보인다
상경말 쉼터(09:20)
상경말 쉼터를 지나니 우측엔 나와 종씨인 慶州金公 가족묘가 보인다
우측으로 무지개 농장이 보이고 호남고속철로 보인다
무지개농장(09:25)
지맥길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나...
좌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가려고 하니 이곳은 호남고속철도와 4번국도 천안~논산간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서논산 요금소쪽이라 지맥길을 따라갈 수가 없어 부득히 우회길을 택할 수 밖에 없다
4번국도 지하(09:26)
4번 지하차도를 지나 좌측으로 가는걸 포기하고 우측으로 간다
한꺼번에 호남고속철도, 4번국도, 천안~논산고속도로 뛰어넘어 크게 우측으로 돈다
1번국도(09:35)
1번국도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논산일반산업단지 방향으로 향한다
논산일반산업단지 안내판
논산일반산업단지 삼거리에 있는 수준점
지맥길을 포기하고 논산일반산업단지 도로를 향한다
논산일반산업단지 소공원(09:40)
민주노총 안내 프랑카드
오늘도 갑질에 당하는 당신... 혹시 당신네들이 국민들을 상대로 갑질하는 건 아닌가요
논산일반산업단지의 모습
계속해서 공단도로를 따른다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지하(09:45)
뒤돌아 본 호남고속철도의 모습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서 간다
보이는 하얀 트럭 뒷쪽 능선이 원래의 노성(논산) 지맥길이다
버스 정류장도 있고...
이곳이 원 지맥길인데 산림청 직영 경작지라 출입을 금지하란다
다시 지맥길로 복귀한다(09:50)
지형도상에는 저 윗쪽이 높은정 고개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지나지 않아 확신이 안선다
걷지 못한 원 지맥길의 모습
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마을길로 들어선다
마을길에서 바라본 호남고속철도
마을로 이어지는 계속되는 지맥길
동네의 개쉬끼들이 난리부르스다
마을 끄트머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인공수로를 가로질러...
밭 가운데로 올라선다
묘소봉(10:00)
너무 이른 나이에 生을 마감했군요
묘지에서 바라본 천안~논산간 고속도로와 호남고속철도
묘지를 가로질러 내려선다
고속도로 지하(10:03)
이곳에서부터 광석면과 작별을 하고 논산시 성동면으로 접어든다
호남고속철도를 바라보면서 걷는다
제일타포린(10:05)
호남고속철도 아래(10:06)
정지4리 입구(10:07)
논산시 성동면에 있는 정지리(定止里)는 마을이 평야지대에 자리잡고 있고 서북쪽으로 황하천이 흐르며
정지리 마을은 동지미란 산이 있어 정지라 부르게 되었으며 행정구역은 정지1,2,3,4리가 있고 자연마을은
견티, 구듬재, 난말, 동라, 동지미, 불뭇골 6개 마을이 있는데 구등재는 정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산이
둘러 있어서 우묵하므로 구등재 또는 구등현이라 하며, 이것이 변하여 구토리라 한다.
동지미는 동지미라 하는 산 밑에 있는 마을이고 동라는 동편나촌, 서라는 서편나촌을 뜻하는 마을이다.
화정1리 버스 정류장(10:08)
정리4리를 지나자마자 화정1리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버스정류장 맞은편에는 성동면 노인회관이 자리잡고 있고 지맥길은 계속해서 도로를 따른다
미싯골칼국수 입구(10:10)
금박재(10:12)
논산시 성동면 정지리에 있는 고개로 금박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1988년 논산문화원에서 간행한 『놀뫼의 전설』에 실려 있다
옛날 어느 해에 흉년이 들어 성동면 정지리, 즉 지금의 금박재 고개 아래의 마을 사람들은 먹고 살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렇게 살기 어려운데 왜적이 침입하여 약탈까지 하였다. 이 마을은 주위에 농토가 적고 토질도 나빴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항상 가난에 쪼들리며 살았다. 그래서 이웃 마을 사람들이 ‘부황난 고라실’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씨만은 순진하고 아름다워 한번도 다투는 일 없이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의 금박재 바로 밑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오두막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이들은 어렵게는 살지만 항상 남을 돕고 일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노부부가 들에서 일을 하고 막 고개를 넘어오려고 하는데 보지 못했던 박이 탐스럽게 넝쿨을 뻗으며 자라고 있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고개였지만 한 번도 본적이 없어 더욱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노부부는 그 박이 보통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정성스럽게 가꾸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커다란 박이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하더니 잘 익어갔다.
그중 잘 익은 박을 하나 따다가 켜보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박씨가 박혀 있어야 할 곳마다 금씨가 박혀 있었다.
노부부는,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하며 하늘에 감사드렸다.
그리고 그 금씨를 마을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왜적이 마을에 찾아와 노부부에게 금씨의 출처를 대라고 고문하였다.
노부부가 끝까지 말하지 않자 이들을 가두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 하나가 왜적들에게 박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왜적들은 그 고개에 열려 있는 박들을 따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익지도 않은 박들까지 전부 따다가 박을 탔다. 그때였다.
맑게 개었던 하늘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억수같이 비를 뿌리며 천둥번개까지 내려치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삽시간에 왜적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박이 열려 있던 그 자리에 바위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부터 이 고개는 금박재로 불렸고, 또 바위는 금박바위라고 불렀다
토속정 식당도 지난다
중리마을 버스정류장(10:18)
산행인지 순례길이지...걷는 나도 헷갈린다
화정리 버스 정류장(10:24)
성동면 화정리(花亭里)는 논산천의 지류가 마을 앞에 흐르고 있는데 들 가운데에 통뫼와
홧대벌이 있어 화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이 마을에는 연화부수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연화부수형”은 풍수지리학 용어로 물 위에 떠 있는 연꽃과 흡사하다는 뜻으로 풍수지리학
상으로 길지에 속하며 행정구역은 화정 1,2리로 되어 있고 백자동, 중리, 평전말, 화상, 화정
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백자동은 씨아샘 위쪽의 마을인데 씨아샘은 씨아샘고라당에 있는 샘으로
깊고 물이 풍부하다고 한다... 중리는 화정 중앙에 있는 마을이다
성동면사무소 가기 직전 도로 우측엔 면장, 부면장등의 공적비들이 서 있다
성동면(城東面) 사무소(10:28)
논산시 성동면 동쪽은 논산시내와 광석면(光石面), 서쪽은 금강(錦江)을 경계로 부여군 세도면(世道面),
남쪽은 논산천을 경계로 강경읍, 북쪽은 부여군 석성면과 접하고 있으며 면 전체가 화정들·개척들 등의
평야지대를 이루고 산은 면의 서부에 월명산(月明山)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지형조건으로 전체 면적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어 전형적인 농업지구를 이룬다.
쌀·보리를 중심으로 수박·딸기 및 채소류 재배가 활발하다. 부여~논산 국도 연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며 문화재로는 남양전씨 종중문서(南陽田氏宗中文書:보물 727), 불암산성(佛岩山城)이 있고,
개척리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순교 사적지 제1호인 66인 순교 기념탑이 있다
성동면사무소를 지나 원남1리 마을 표시석을 바라보면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계속해서 도로로 이어지는 지맥길
산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갈림길(10:33)
도로를 버리고 농로를 따르는데 우측으로 인공수로가 흐른다
밭 가운데를 지나니..
전주이공 묘지가 나오고...
다시 밭으로 내려서는데...
지독한 가시가 길을 가로막는다
풍양조공 묘지로 내려선 다음에...
논 가운데로 내려서 우회를 한다...가시는 너무 싫어...
밀양박공 묘지로 올라선 다음에...
황토밭을 지나 조금전에 헤어진 도로를 다시 만난다
초지 너머로 가야할 월명산이 보이고...
다시 도로를 버리고 밭으로 들어선다
마을 도로로 올라선 다음에...
계속 도로를 직진한다
함양여씨 종중묘(10:52)
함양 여씨(咸陽呂氏) 시조 여어매(呂禦梅)는 당나라 한림학사(韓林學士)로서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신라로 동래하였고, 이후 성주군 벽진면에 정착하고 고려시대 전서(典書)를 지냈다. 최초 정착한 곳이
함양(咸陽) 혹은 성산(星山)이라는 설로 인해 함양여씨와 성산여씨로 갈라진다
여어매는 여임청(呂林淸)과 여광유(呂光有) 형제를 두었는데,여임청의 후손인 여자장(呂子章), 여존혁(呂存赫)
형제와 여광유의 후손들이 함양(咸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함양여씨 종중묘를 지나가다가...
목장으로 가기전에 비포장 도로를 벗어나 좌측으로 꺽어진다
부인을 둘씩이나 둔 南原梁公 할아버지 묘지를 지나...
추수가 끝난 논 가운데를 지난다
오늘 산행중에 산으로 들어선다
산도 산같지도 않는 곳에 선답자들의 흔적이 보인다
밤나무 단지를 지난다
50.3m봉(11:05)
시누대 터널을 지나니...
좌측으로 마을이 보인다
상리 마을길(11:10)
논산시 성동면 월성리 상리 마을길을 가로질러 오늘 산행중 가장높은 월명산으로 오른다
월성리(月城里) 마을은 예부터 성벽에 비추어진 달빛의 수려함이 으뜸이라 하여 월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월성 1,2,3리가 있고 자연마을로는 동촌, 월성, 소란말, 자곡매,
삼성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촌은 월성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소란말은 동촌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자곡메는 소란말 뒤에 있는 마을이다.
우측에는 함양여씨 묘지가 보이고...
호화롭게 조성된 함양여씨 묘를 지난다
본격적인 산행을 하는 느낌이다
북서쪽으로는 장항 용당포로 이어지는 금북기맥길이 아련히 보인다
월명산으로 오르는 길은 온통 묘지만 있는 느낌이다
월명산(月明山:75.9m:11:18)
논산시 성동면 월성리와 우곤리 병촌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성동면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한 곳인데 월명산은 해발 76여m에 불과하지만 주변
지역이 온통 평야로 되어 있어 주변을 손쉽게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조망이 뛰어나다
최근에 이곳에서 월명리 산성이 발견되어 아직 정확한 규모와 축성 시기 등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길이 약 1.4㎞이며 토축성인 것으로 추정되며 정상부에 일부 남아있는 구간을 보면 테뫼식 산성으로
보이나 성벽 둘레의 길이를 고려해 볼 때 포곡식 산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금강의 지류인 석성천과 금강의 본류가 멀지 않은 곳에 흐르고 있어 하천을 이용한 이동과
물류 운송을 감시하기 위한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명산 정상 삼각점(△논산301 / 1980재설)
월명산 정상에서 인증샷
정상아래에는 6.25전쟁 희생자 위령단이 보인다
그 아래 따뜻한 묘지에서 수헌아우와 둘이서 40여분간의 휴식을
취하면서 족발에다가 플라스틱 병소주 2병을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갈림길(11:55)
월명산 공원(11:56)
다시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월명산 공원이라고 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쉼터와 수도, 어린이들을 위한 미끄럼틀, 월명산신 제단, 그늘막과
詩, 尋月亭이란 정자에다가 각종 비들이 있는걸 보아 월명산이 성동면의 진산인듯 싶다
월명산 산신제단
심우정과 그늘막 쉼터
어린이 놀이터와 취수장 수도시설
이 지역출신이 지었다는 詩
시인의 약력
尋月亭記백두대간의 영산인 계룡산의 정기를 받고 내려온 월명산 아래 살고 있는 我등은 넓고 기름진
성동들과 생명의 젖줄인 금강물이 흐르니 복된터에 살게된 근원이 飮水四源之也 그러나 작금 물질
만능시대로 자연환경의 훼손은 물론 此에 매년 산불이 나도 잡목이 무성 사람의 진입불가로 헬리콥터의
지원 진화됨을 애석하게 여기는 知己들의 원력으로 一九九八년 南에 四곳에 진입로 東西로...
2000.1.1일에 세웠다는 새천년비
“盡人事待天命쉬운일 같지만 해보면 어렵다못할 것 같은 일도 해보면 다된다
쉽다고 깔보지 말라어렵다고 포기하지 말라
쉬운 일도 신중히 하고어려운 일도 겁내지 말고해보면 결론이 난다“
월명산 공원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다시 길을 나선다
둘레길보다 더 편안한 길을 걷는다
71.4m봉(12:03)
묘지에서 우측으로 향하는데 느낌상 좌측 능선이 지맥길인듯 한데 트랙에는 우측으로 되어있다
능선 아랫쪽엔 태양광이 설치되어 있고...
태양광을 지나면서 살짝 좌측으로 꺽어진다
묘지로 내려서니...799번 지방도가 지나는 장판고개가 나온다
장판고개(12:10)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와 병촌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799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장판고개의 지명유래는 알 길이 없다... 뭔 사연이 있을법한 이름이라 성동면 문화담당에게
문의를 해봤지만 자기는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우곤1리 이장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는데
이장님 역시 잘 알지 못한다고 하니...답답하지만 그냥 패스를 한다
맨발님께서 이곳이 장판 고개라고 합니다
고개로 올라선 다음에 묘지를 지나고...
대밭도 지나는데...
빛바랜 준.희 선생의 표지기가 산꾼을 반긴다...우측으로 살짝 꺽어진 다음에...
밭두렁을 따라서 노성(논산)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불암산으로 향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병촌성결교회
6·25전쟁 때 공산군들이 도주에 앞서 병촌교회 신도 16세대 66명을 한꺼번에 흙구덩이를 파고
쇠스랑과 삽과 몽둥이로 죽여 매장하였던 곳이었는데 그 당시 정수일 집사는 시부모와 3남 1녀의 자녀,
시동생과 어린 조카 등 11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가운데에서도 개인적인 신앙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가족과 교회와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최근에 조성한 듯한 풍양조씨 가족묘가 나온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얼마전에 지나간 듯한 무한도전클럽팀의 시그널이 보인다
지맥길 살짝 우측에 족보가 있는 61.6m봉이 있어 확인을 하러간다
61.6m봉(12:18)
등로에서 바라본 병촌리(甁村里)와 그 너머 논산시내의 모습
논산시 성동면에 위치한 병촌리는 지형이 마치 병과 같이 생겨 병골 또는 병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행정구역은 병촌 1리와 2리, 자연마을로는 까치말, 대중리, 병골, 삼잿골 등이 있으며 까치말은 중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까치와 같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며 삼잿골은 중리와 까치말 중간에
있는 마을로 낮은 재가 있다고 한다... 관광지로는 66인 순교 기념탑이 있다.
6.25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양민들을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집단학살 했는데 이 때 병촌교회 신자 66명도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참히 학살되었는데 성서적이고 성결교회적인 신앙고백을 하면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성광초교 갈림길(12:20)
성광초교 길은 병촌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시누대 사이 등로로 내려서니...
벤취가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우곤1리 갈림길(12:22)
논산시 성동면에 있는 우곤리(牛昆里)는 마을 동쪽으로 금강의 지류인 석성천이 흐르고 있다.
우곤리 마을은 뒤에 있는 산의 형태가 마치 소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우곤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우곤 1,2,3,4리가 있고 자연마을로는 내우곤, 안소곤, 밧소곤, 다르매, 서당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밧소곤은 소곤 바깥에 있는 마을로 석성천 갯가에 있으므로 포전, 또는 포전리라 불리었다
55.5m봉(12:24)
등로 저멀리 언젠가는 걸어야 할 금북기맥에서 갈라져 나온 원진지맥 능선이 아련히 보인다
개척1리 갈림길(12:25)
성동면 개척리(蓋尺里)는 개척들에 자리잡고 있으며 금강의 지류가 마을 옆에 흐르고 있다.
개척리 마을은 물이 흐르고 낮은 산등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개척이라 부르게 되었다.
행정구역은 개척 1,2,3리로 자연마을은 개자, 금성, 나루개, 새말, 딴펄로 이루어져 있다.
딴펄은 개자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에 펄이 외따로 있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며
불암은 동쪽 신촌리에 불암산이 있고 앞에는 개가 있다고 한다.
기념물로 제 152호 성동 은행나무가 있고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전우치가 이 곳을 지나가다
은행나무 지팡이를 꽂았는데 이것이 잘 자라면 전씨가 계속 번창할 것이라고 했다.
그 후 은행나무의 잎이 돋고 가지가 나와 무성한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대밭이 보이고...
우곤1리 갈림길(12:29)
대밭을 따라서 올라가니...
벤취가 나오고...
개척2리 갈림길(12:31)
십자안부(12:33)
잡풀에 갇힌 이정목도 보이고...
이곳이 우리나라 6대 하천인 금강이 흐르는 주변으로 역사가 깊은 병촌성결교회와 개척리, 우곤리 등
인근 마을과 연결하며, 몸과 마음의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힐링과 동시에 성지순례를
할 수 있는 1.5km 구간의 산책로 란다
우측의 편안한 올레길을 버리고 좌측의 험한길을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길이 없는 등로를 치고 오르니 조금전에 헤어졌던 금강올레길을 다시 만난다
불암산(佛岩山:59.5m:12:40)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에 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산 아래 있었던 불암사에서 유래된 듯 하며
예전에 있었던 불암산성은 산 정상부의 능선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길게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동벽과 북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길이가 약 360m 정도 확인되며 서쪽과 남쪽은 성벽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지형상 정상부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체 성벽의 둘레는 이 부분까지 합하면 약 700m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성벽의 축조 방법은
내부를 삭토해서 토루를 쌓아 올린 것으로 보인다. 성 내부에서는 성문이나 건물지, 우물터 등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으며 현재 성벽의 대부분이 이미 붕괴된 상태이며, 산성과 관련된 부대시설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 다만, 주변에서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경질 토기편이 확인된다
논산의 산성은 동부 지역에 높고 험준한 산봉(山峰)에 자리하고 있는 반면에 서부 지역에는 나지막한 구
릉 위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며 불암산성은 서부 지역에 속한 산성으로 금강과 접해 있고 드넓은
논강평야를 끼고 있는 점으로 보아 금강의 방비와 관련되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불암산 정상 삼각점(△논산 401 / 1997복구)
이 산 아래에 있었던 불암사 도승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인데
1981년 논산문화원에서 출간한 『놀뫼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옛날에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 산골에 불암사라는 사찰이 있었다.
불암사에는 학식을 겸비한 도승이 있어 많은 불자들이 찾아왔다.
어느 날 도승은 불상에 벼룩이 까맣게 달라붙은 것을 보았다.
도승은 이것이 불길한 전조라 생각하고 ‘관세음보살’을 외며 벼룩을 잡아 죽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재빠르고 독한 벼룩은 잡히지 않았다.
도승은 벼룩을 남겨 두면 필시 나라에 재앙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벼룩 잡기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끝내 몇 마리는 놓치고 말았다.
이들 벼룩은 도망가면서 “분하다. 다음에 두고 보자!”라고 외쳤다.
도승은 달아나는 벼룩 무리를 보면서 “저것들이 앞으로 큰 화근이 될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번성한 다음 우리나라를 쳐들어올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도승은 그 길로 한양에 올라가 조정의 대신들을 찾아갔다.
도승은 대감을 붙잡고 “국난이 있을 것이니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대감들은 도승에게 ‘미친 중’이라고 하며 비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왜병이 벼룩 떼처럼 몰려왔다. 왜병들은 우리나라 강산을 짓밟고,
특히 논산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 불암사에 불을 질렀다.
당시 불탄 이래로 불암사는 남아 있지 않지만 옛 절터에서 지금도 기와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노성(논산)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불암산을 내려서니 묘지가 나오고...
팔각정을 지나...
계속되는 내리막길
데크목 계단이 나오고...
금강하구언 제방이 나오고 금강제방둑 자전거 도로가 보인다
다들 최근에 나녀갔는지 표지기가 따끈따끈하다
제방둑의 이정표
금강 건너편에는 원진지맥 합수점이 보인다
얼마전에 잔차로 4대강을 종주하신 온누리님과 낡은모자님도 이곳을 지나가셨을꺼야...
뒤돌아 본 불암산의 모습
남들은 잔차타고 이 길을 지나갔는데 범여는 두 다리로 이 길을 걸어간다
개척들 배수지(12:55)
개척들은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 일대에 펼쳐져 있는 평야로 남쪽에서 서류하는 논산천은 중요한 용수 공급원이다.
서쪽에서는 금강 본류가 남쪽으로 흐르고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개척된 평야라고 전한다.
동남쪽에는 강경으로 연결되는 강경대교가 1932년 가설되어 있으며 딴펄, 새말, 신촌(新村) 등은 새롭게 평야가
개척되면서 형성된 마을들이다
제방에서 바라본 강경평야
제방에서 옥녀봉을 바라보면서 우측으로 내려선다
잔차도로라 그런지 잔차 이정표만 보인다
강경읍내를 바라보면서 계속 Go~Go
억새밭 너머로 보이는 옥녀봉
금강/논산천 합수점(13:08)
드디어 금강과 논산천이 합쳐지는 합수점에 도착하면서 논산(노성)지맥을 마무리 한다
남들은 무리하게 한방에 마무리하는 산꾼들도 많았지만 수헌아우와 여유롭게 마무리하니
참으로 마음도 편하고 여유롭다... 2017년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내년을 기약하며 산행을 종료한다
논산(노성)지맥 마무리 인증샷
도로에서 바라본 논산천의 모습
다리에서 바라본 논산(강경)지맥 합수점
지맥 산행을 끝내고 강경읍내로 가는길에 이벤트로 옥녀봉으로 향한다
옥녀봉 가는길
옥녀봉 아래에 있는 해조문이 암각되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암각해조문(巖刻解潮文)
논산시 강경읍 북옥리 142번지의 옥녀봉 남쪽 암벽에 새겨진 조석표(潮汐表)로서 강경포구
밀물과 썰물의 발생 원인과 시각, 높이를 기록한 조석표(潮汐表)로 1860년에 제작하였다.
옥녀봉 남쪽 암벽의 표면을 가로 1.31m, 세로 1.1m의 크기로 갈아낸 후 음각으로 14행
190자의 글자를 새겼으며 제작 당시까지 있었던 조석표는 물발의 세기와 시각의 변화만을
나타냈는데, 암각 해조문(巖刻解潮文)은 처음으로 만조 시각(滿潮時刻)과 물의 높이를
계량화하여 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96년에 논산시 향토유적 제24호로 지정되었다
해조문 안내판
옥녀봉 정상에서 바라본 노성지맥 합수점
강경포구는 천혜적인 내륙항으로 일찍부터 수운(水運)이 발달하여 금강하구의 관문으로
서해에서 들어오는 각종 해산물과 교역들이 이곳에 들어와 전국 각지로 팔려 나갔다
이조 중기무렵 제주에서 미역과 고구마, 좁쌀등을 실은 배들이 강경포구로 드나들었고
중국의 무역선들이 비단과 소금을 싣고 들어와 장삿길을 트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 객주(客主)들이 등장하면서 강경은 서해 수산물 최대시장으로 발전하여 일제 강점기에
경제 수탈 전초기지로 삼으면서 최고의 번성기를 맞게 되었는데 일제시대 초기부터 반세기 동안
성어기(盛魚期)에는 하루에 1백여척의 배들이 포구에 들어와 생선을 산더미처럼 부렸고, 전국에
몰려드는 상인들이 하루에 2, 3만씩 몰려와 성시(成市)를 이루었다
구한말의 수산물 유통 경로는 철저한 객주 중심제로 이들은 전국 각지의 상인들로부터 돈을 모아
출어 자금을 대어주고 잡은 고기를 판매하여 구전(口錢0을 받았다.
이 당시 강경에는 10여척씩 부리는 객주들이 20여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영포대(影泡臺)
옥녀봉 암릉에는 여러곳에 암각화가 참으로 많이 보인다
잠영대(蘸影臺) 각자의 자경(字徑)은 16㎝로 횡서(橫書)하였고, 산주(汕住) 각자의 자경은 25㎝로 종서(縱書)하였다.
옥녀봉(玉女峯) 각자의 자경은 22㎝로 종서(縱書)하였으며, 위용대(爲容臺) 각자의 자경은 24㎝로 횡서(橫書)하였다.
영포대(影泡臺) 각자의 자경은 36㎝로 종서(縱書)하였고, 감당옥롱(鑑塘玉聾) 각자의 자경은 18㎝로 종서하였다.
귀암(龜岩) 각자의 자경은 18㎝로 종서(縱書)하였고, 해조문(海潮文) 각자의 자경은 7㎝로 1860년(철종 11)에
새겨졌으며, 송심두가 썼다. 반조암(返照岩) 각자의 자경은 16㎝로 횡서(橫書)하였다.
옥녀봉의 곳곳에 암각이 흩어져 있어 자세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 암각도 있다.
관리가 잘되지 않아 마모가 심하고 옥녀봉 암각의 경우 풀과 나무들로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현재 9개의 암각이 조사되었는데, 9개 모두 조선시대에 새겨진 것이다
옥녀봉 곰바위
내가 오늘 걸었던 길을 뒤돌아 본다
논산시 강경읍은 원래 원래 조선 시대의 은진현에 속했는데 금강 본류에 인접해 있으면서 넓은 논산평야를
배후에 두고 있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수산물, 농산물의 집산지로 발달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평양 ·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였고 서해안 최대의 수산물 시장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은진)에서 '강경포'라는 지명이 확인된다. 강경포 나루는 일명 강경산 봉화대라고 불리는
옥녀봉 아래에 위치하였으며 '새나루'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진)에는 "강경포는 강경산 아래에 있는 바닷가 나루터[海津]이며 강경산
봉화는 전라도 용안현(龍安縣) 광두원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황화산에 응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옥녀봉에서 바라본 강경읍내
강경은 금강하구의 관문으로 서해에서 들어오는 각종 해산물과 교역물이 들어왔다.
서해 해산물의 집산지인 강경은 해방전후까지 평양, 대구 시장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꼽혔다.
당시 서해에서 잡은 각종 생선들이 모두 강경으로 집산되자 팔고 남은 물량을 오래 보관하기 위하여
염장법과 수산가공법이 발달하였다...지금은 금강하구둑으로 물길이 막힌지 오래지만 강경 사람들의
50년 이상의 젓갈담그기 비법은 그대로 이어져 오늘날에도 전국 제일의 젓갈시장 명성을 지키고 있다.
옛 부둣가인 강경읍 염천동(鹽川洞) 일대에는 지금 30여개의 대형 `젓갈백화점'들이 들어서 있으며
그 젓갈가게들은 모두 50평 이상의 토굴형 대형 저장고를 갖추고 있다.
이 저장고들은 일년 내내 일정한 온도(섭씨 10~15도)를 유지해 토굴 보다도 더 이상적인 토굴효과를 내며
자연토굴에 비해 매우 위생적이라 할 수 있는데 원료는 전남 신안 등 전국에서 제일 좋은 것만 골라, 이곳에서
영양분이 잘 보존된 상태에서 1~2년 동안 적절히 발효된 강경 맛깔젓(새우젓 황석어젓 멸치젓 등)은 감칠 맛이
좋아 밥반찬이나 김치의 원료 또는 자연조미료로 인기가 매우 높다.
옥녀봉 봉수대
옥녀봉(玉女峰:44m:13:27)
논산시 강경읍 북옥리에 있는 옥녀봉의 원지명은 강경산(江景山)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진)에 "강경산(江景山)은 현 서쪽 26리 거리에 있다."라는 내용과
"강경산에 봉수(烽燧)가 있는데 남쪽으로는 전라도 용안현(龍安縣) 광두원산(廣頭院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은진의 황화산에 응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지』(은진)에 '강경산 봉수'라는 지명이 확인된다. 『여지도서』(은진)에
"임천현(林川縣)과의 경계에 있다. 강가에 홀로 솟아 있다."라고 되어 있다.
『여도비지』(은진)에 '강경대'라는 지명으로 수록되어 있고 "앞으로 큰 강을 굽어보고 있다.
강경산은 봉우리가 매우 수려하여 마치 선녀가 단정히 앉아 있는 모양이라고 하며 옥녀의 전설이 서려 있기도 하다.
산 아래로 금강이 흐르고 강경포(江景浦)가 있으며 산위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봉수는 옛날에 불빛과 연기로 상대방에게 연락하던 통신수단으로 봉은 밤에 불빛을 높이들어
알리는 것이며 수는 낮에 연기로 연락을 취하는 방법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옥황상제의 딸이 이곳에 놀러 내려왔다가 그 절경에 심취해, 올라갈 시간을
지나게 되었고 하늘나라에서 들려온 나팔 소리에 서두르다가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해 한쪽 가슴을
드러낸채 하늘로 올라온 모습을 옥황상제가 보고 노발대발하였다.
옛날 이 산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아주 맑았고, 산은 숲으로 우거져 있었으며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이 있어 경치가 더없이 좋았다... 그래서 달 밝은 보름날 하늘나라 선녀들이
이 산마루에 내려와 경치의 아름다움을 즐겼고 맑은 강물에 목욕을 하며 놀았다.
한번 다녀간 선녀들은 영광으로 알고 자랑을 하였지만 옥황상제의 딸은 한번도 내려오지를 못했다.
선녀들이 어찌나 자랑하는지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해 팔월 보름날 옥황상제의 딸은 허락을 받아 이곳에
내려오게 되었으나 그 선녀는 다시 못올 길을 떠나고 마는데 끝내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고 말았다.
지금도 이 산 위에는 봉우리진 곳이 있는데 이 곳을 옥녀가 죽은 자리라 하여 옥녀봉이라 부르고 그녀가
들여다보던 거울은 바위로 변하여 용영대가 되었다고 전하며 이곳에는 강경읍내와 멀리 논산시내, 드넓게
펼쳐진 논강평야와 금강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옥녀봉 정상 삼각점(△논산 449 / 1980복구)
오늘 산행은 일정은 정말 잘 잡은듯 하다
지난주에 다친 무릎에 무리없이 걸었던게 가장 좋았고, 춥지도 덥지도 않고 바람도 전혀 없었다
거기다가 가장 높은 봉우리가 75.9m 였고 조망이 없으니 날씨가 흐려도 아무 불만이 없다
산행의 90% 정도를 도로를 따라서 걸었고 시속 5km 이상을 걸었으니 얼마나 이득인가(휴식시간 제외)
옥녀봉 정상 아래로 내려오니 뭔 넘의 비들이 많은지...
옥녀봉 정상석은 이곳에 있다
강경항일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옥녀봉 유래 안내판은 도로 한참밑에 있다
마을로 내려온 다음에...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옥녀봉 버스 정류장(13:40)
이곳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논산으로 가서 서울가는 고속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이곳은 논산가는 버스가 1시간에 한대씩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아침을 우리를 태워준
수헌님의 고교동창이 자기도 지금 산행이 끝났다고 하면서 우리를 태우러 오겠단다
여기까지 오는 거리가 22km정도 된다고 하는데 조금은 미안하긴 하지만 난 모른척을 한다
그리고 맞은편의 수퍼에서 맥주 2병에 오뎅을 시켜서 점심을 대신하고 난로가에서
잠깐 졸고 있는데 수헌아우 친구가 도착하여 아주 편하게 귀경을 한다... 다들 복받을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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