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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내성(문수)지맥(終)

내성(문수)지맥 제1구간 - 분기점에서 다덕현 육교까지

by 범여(梵如) 2019. 6. 16.

☞ 산행일시: 2019년 06월 15일

☞ 산행날씨: 잔뜩 흐린 날씨에 상당히 습함

산행거리: 도상거리 20.4km + 어프로치 2.8km / 11시간 3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도래기재-진달래 터널-이정표-무명봉-550년된 철쭉-무명봉-옥돌봉

                  문수(내성)지맥 분기봉-예천바위 갈림길-공터-옥돌바위 전망대-이정표

                  주실령-983.8m봉 갈림길-헬기장-안부-무명봉-969.6m봉-935m봉-928.4m봉

                  예배령-안부-925m봉-이정표-1,047.3m봉-두내 입구-축서사 갈림길-안부

                  무명봉-문수산-헬기장-안부-1,157.8m봉-안부-안부-무명봉-1,012m봉-930m봉

                  안부-892m봉-묘지-가부재-887.1m봉-갈림길-989.4m봉-임도 사거리-879.6m봉

                  묘지-안부-795.5m봉-고개-720m봉-685m봉-솔당재-707.8m봉-흙목이재-안부

                  묘지-674m봉-669.5m봉-붓든고개-무명봉-675m봉-안부-무명봉-갈방산-583m봉

                  묘지-유인김녕이씨 묘-다덕현 육교

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 경북 봉화군 춘양면, 물야면, 봉성면, 법전면

 

토요일에 산행길에 나선다...월요일에 골프장에서 월례회를 하는 모임의 골프 라운딩이 있기에

일요일에 산행을 하면 아무래도 힘이 들기도 하거니와 같이 라운딩을 하는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칠것 같아서 토요일에 산행을 하고 일요일날 휴식을 취한 다음에 월요일에 나가면 아무래도

스코어도 괜찮을 것이고 동료들에게 덜 미안하겠지...

예전엔 골프를 요즘 산에 미친 것처럼 열심히 필드를 나갔는데 맥길에 미친 이후부터는 골프는

별 재미가 없다... 그러다가 보니 친구들에게 늘 異邦人이 된 느낌이고 또라이 취급을 받는다.

친구들은 만나면 늘 주제가 골프로 시작해서 골프로 끝나는데 난 산으로 시작해서 산으로 끝나니

대화가 될 턱이 없다...거기다가 지난해 6월 큰 수술로 인해 골프채를 잡지 않았으니 걱정이지만

내가 프로 선수도 아니고 친구들 만나러 가는데 보기 플레이면 어떻고 백돌이면 어떠랴...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하여 조금 시원한 곳으로 산행 코스를 잡으려고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대간길 도래기재로 들머리로 잡은 백두대간 팀으로 따라가기로 하고 밤에 집을 나서는데

식구들이 난리다...아직까지 무박은 무리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고집을 부리며 무리하여 대간팀을 따라 나서는데 예전에 대간과 정맥 산행을 했던 영감탱이가

산행 대장을 맡고 있어 편안한 마음으로 따라 나서니 맘이 편하다.

 

밤 12시에 사당역을 출발하여 휴게소 2곳을 들린 다음에 도래기재에 도착하니 새벽 4시가 좀 넘었다.

대체적으로 무박팀들은 새벽 3시쯤에 산행을 시작하여 두어시간 정도는 헤드렌턴을 켜고 산행을

시작하는데 이곳 산악회에서는 4시가 넘은 시간에 산행을 시작하면 20여분 정도만 렌턴을 켜고

산행을 하면 여명이 밝아올 것 같아 참으로 다행스럽다. 

 

문수(내성)지맥(文殊枝脈) 개념도

 

문수(내성)지맥(文殊(乃城)枝脈)이란

백두대간 옥돌봉(1,244m) 서남쪽 280m지점에서 분기하여 서남진하며 낙동강 본류와

내성천을 가르며 문수산(1207.6m), 갈방산(712m), 만리산(791.6m), 용두산(665m),

복두산(509m), 요성산(490m),박달산(580m), 봉수산(569.6m), 천등산(575.4m), 조운산(635m),

학가산(874m), 보문산(641.7m), 대봉산(210m), 검무산(331.6m), 나부산(330m)을 일구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 삼강나루터 앞에서 그 맥을 대하는

도상거리 약 114.5 km 정도되는 산줄기이다.

 

낙동강의 서쪽과 내성천(乃城川)의 동쪽을 흐르는 산줄기로, 백두대간 박달령과 도래기재

사이에 솟은 옥돌봉(1,244m)에서 남으로 갈래친 산줄기는 문수산(文殊山 1207.6m)으로

내려와 봉화군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명호의 만리산(791.6m), 도산의 용두산(665m)을

거쳐 녹전의 봉수산(569.6m), 북후의 불로봉(482m)으로 이어진 뒤 안동의 조운산(朝雲山 635m)을

지나 학가산(鶴駕山 874m)에 이른다.

 

학가산으로 향하는 문수지맥은 조운산에 이르기 전에 다시 한갈래를 나누어 봉정사가 있는

명산 천등산(天燈山 575.4)를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문수지맥의 원 흐름은 학가산에서

보문산(641.7m)으로 이어진 뒤 풍천의 검무산(331.6m)을 거쳐 예천군 지보면의 나부산(334m)을

지나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삼강리(三江里)를 돌아 예천의 명물로 알려진

의성포(義城浦)의 맞은편 절벽인 회룡대(回龍臺)에서 끝난다.

 

옥돌봉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이다. 문수산까지 물야면과 춘양면 경계로 가다가 문수산에서

봉성면을 만나고 이어 동쪽은 법전면을 잠시 스치다가 명호면이 된다. 긴재에서 상운면과

명호면의 경계로 가다가 만리산을 지나 월오현에 이르면 왼쪽(남)은 안동시가 된다.

안동시 녹전면으로 들었다가 박달산에 오르면 영주시와 접한다. 영주시 평은면에 잡시

들었다가 다시 안동으로 빠져나오고, 학가산에 오르면 예천을 만난다.

이후 예천과 안동시계를 따르다가 지보면에 들면 온전히 예천이다.

마지막 회룡포는 예천군 용궁면이고 삼강다리 아래 내성천 건너마을은 문경시가 되는데

수계로 산줄기를 가르는 산으로님이 저술한 대한산경표에는 내성지맥(乃城枝脈) 이라고 하는데

산줄기의 남쪽에 내성천(乃城川)이 흐르고 북쪽으로 백두대간의 줄기가 이어지고 있다.

박성태 선생이 저술한 ‘신산경표’에서는 산줄기에서 가장 높은 문수산(文殊山 1207.6m)의 지명을

따와서 산꾼들 사이에서는 문수지맥(文殊枝脈)이라 불려지고 있다   

 

주요 봉우리와 거리

옥돌봉~1.9~주실령~3.6~예배령~1.8~문수산~3.5~가부재~6.0~갈방산~3.9~옛고개~3.6~경찰비

~4.7~응봉산(-0.3)~3.8~만리산~3.0~월오현~3.5~용두산~3.7~굴고개~0.7~복두산~3.2~방아재

~2.3~박달산~1.7~봉수산~1.1~옛고개~7.3~큰두무재~5.1~조운산~5.4~학가산~5.1~보문산~7.8

~대봉산~5.6~검무산~19.9~나부산~6.3~내성천 .......114.5km

 

종주에 필요한 지도 

1/50000 태백, 춘양, 예안, 안동, 예천(5매)

1/25000 서벽, 문수산, 원둔, 옹천, 감천, 매곡, 풍천, 용궁(8매)

오늘 산행 구간의 지도

원주 치악휴게소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한 다음에 버스는 한참을 버벅거린 다음에 들머리인 도래기재에 도착한다.

지맥 산행을 하면 항상 고민을 하는게 첫구간의 접속이다.

대간이나 정맥 , 큰 지맥에서 가지를 쳐서  나오는 지맥은 늘 접속구간이 길고 경비도 만만찮다.

산악회를 따라 다니면 별 문제가 없지만 나홀로 산행은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대간이나 낙동정맥에 걸쳐있는 봉화, 울진, 영양, 청송, 영덕구간은 육지속의 섬이랄 정도로

오지중의 오지이다...그래도 지금은 교통편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선 아직도 많이

불편하기에 산악회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듯 싶다

도래기재(導驛峙:936m:04:10)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와 우구치리를 이어주는 고갯길로서 고갯마루에는 금정굴로 불리는 터널이 있어

사람과 차량이 통행하였으나 근래에 폐쇄되고 현재는 고갯마루를 관통하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을 이어주는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인 88번지방도가 지나간다.

 

산행 들머리의 도래기재 안내판에는 “서벽리 북서쪽 2Km 거리에 있는 마을이름을 따와서 도래기재라고 한다.

도래기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었기에 역촌마을이라 하여 도역리(導驛里)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음이 되어 현재는 도래기재로 통용되었다. 재넘어 우구치는 골짜기 모양이 소의 입모양을 닮아서

우구치(牛口峙)라 불린다.”고 적혀있는데 영주,봉화의 윤승일님의 글은 금정으로 불리는 우구치는

금광이 열리면서 인구가 수천 명에 이르고 극장이 설치될 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당시 캐낸 금이나

은 등의 광물을 수송하기 위해 도래기재 아래에는 1925년 터널이 뚫렸다.

 

통행이 금지된 지 오래지만 터널은 ‘금정수도’라는 이름표를 단 채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우구치리에서 금정수도까지 광물을 운반하는 삭도를 ‘도래기’라고 부른 데서 고개 이름이

연유했다는 것이 금정광산의 내력을 아는 이들의 말이다. 송아지만 한 금이 묻혀 있다는

금광은 폐광된 지 오래고 금정수도 역시 통행이 금지된 지 오래라고 한다.

쉬영감의 포즈

손주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휴일 저녁 집에서 손주의 재롱을 보고있을 나이에 야심한 새벽에 뭔 지랄인지

쉬 ~영감탱이가 무전기를 메고 대간팀 리딩을 맡고 있는 대장이라니...

그래도 폼은 나는구먼...하기사 난 대장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이니...부러우면 진다는데 그래도 부럽소이다

난 언제쯤 독립군(나홀로 산행)을 면해 보려나...서로의 安山을 기원하면 쉬 영감은 상행선, 나는 하행선을

향하여 산행을 시작한다(04:20)  

도래기재에서 옥돌봉을 향하여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서니 대간길을 지났던 산꾼들의

흔적인 시그널이 어지럽게 걸려있다...나도 이곳을 남진,북진, 남진하며 3번을 지났던 곳이다.  

다음주가 하지(夏至)인데도 黎明은 시작되지 않고 어둠속이다

오르막길에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과 대한민국 최오지의 골짜기 공기는 한없이 달콤하다

산 속이라 그런지 아직도 어둠속이다(04:28)

2017년 4월 30일 3번째 백두대간에는 없었던 구조 이정목이 보인다

어둠속이지만 나홀로 걷는 이 맛...참으로 짜릿한 즐거움과 희열을 느낀다.

베낭속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배정은의 노래‘일장춘몽를 흥얼거리면서 옥돌봉으로 향한다

♩이래저래 살아봐도 일백년 인생이요

♪아둥바둥 살아봐도 일백년 인생이라네

그깟 백년 살아보러 몸부림 쳤소...기껏 백년 살아보러 발버둥 쳤소

수천금을 가졌으도 부족한 마음...수만금을 가졌으도 모자란 마음

천년만년 살거라고 착각하며 살았소...빈손으로 가는 인생

♭인생은 일장춘~~~몽

조금을 더 진행하니 예전의 대간길 등로를 막아놓고 좌측의 우회길을 만들어 놨다.

그러던지 말던지 나는 막아논 직진길의 능선으로 올라간다

진달래 터널(04:40)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나뭇잎 사이로 멀리 일출이 시작되는 느낌이다

날은 완전히 밝아졌기에 렌턴을 베낭에 넣고 옥돌봉으로 향하는데 새벽에 부는 바람은 멈추었고

주위에는 운무가 끼었으니 멋진 장관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정표(15:05)

무명봉(05:15)

코 끝을 지극하는 이 상쾌함...아직도 꿈속에서 헤매는 친구들아

니들이 게 맛을 알어... 노력하는 자만이 이 맛을 알제

나를 산에 맛이 간 넘이라고 또라이 취급은 하지 마시게나 

상상은 자유

등로 주위에는 물푸레나무와 층층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쭉나무가 나온다

보호수로 지정된 550년된 철쭉나무

550년된 철쭉(05:25)

철쭉 군락지를 지난다

무명봉(05:30)

안부를 지나고 옥돌봉으로 올라선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이 싫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을 갖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남의 것을 탐내지도 말며
속이지도 말고


꾸밈 없는 진실 속에서
노력을 하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유혹이란 아름답고 감미롭지만
그 속에는 무서운 우환이 있다


마음의 안일을 하루 빨리 물리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의 오락이나 쾌락에
빠지지도 말고


더러운 모든 것을
달관하지도 말며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아그들의 흔적

옥돌봉 정상의 헬기장

헬기장 너머 우구치리 방향에 숨어있는 옥석산 표지판

옥돌봉(玉石峰:1242m:05:45)

경북 봉화군 춘양면과 물야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옥석산이라고도

부르며 정상 아래의 하얀 바위 탓에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바위는 햇빛을 받으면 예천에서도 보인다 해서 예천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산 아래 마을은 ‘그 빛이 비친다’ 해서 서벽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대동여지도는 백병산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같은 산으로 서북쪽으로는 선달산과 이어지며,

옥돌봉은 한자로 옥석산(玉石山)으로 기록되어서인지

두 가지 이름으로 불러진다.

 

옥돌(玉石)이란 귀한 것과 천한 것, 선과 악 등 상반된 뜻이 합성된 말로 세상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다 함께 존재한다는 뜻으로 나쁜 것이 있어야 좋은 것이 있으며, 좋은 것은 나쁜 것으로 인해 더욱 드러난다는

의미이니 옥과 돌은 서로 화답하며 뒤따르는 존재일 것이다 

옥돌봉 이곳 저곳을 둘러본 다음에 문수(내성)지맥 분기봉으로 향한다

옥돌봉 내려서는 곳에서 병꽃과 산목련을 만난다

산목련(꽃말:수줍음)

전국의 산골짜기 숲 속에 비교적 흔하게 자라는 낙엽 작은키나무로 중국 북부, 일본에도 분포하며 높이는 6-10m다.

겨울눈에 누운 털이 많으며, 잎은 어긋나며 타원형인데 꽃은 5-6월 잎이 난 후에 옆 또는 밑을 향해 피며 흰색이고

향기가 나며 꽃받침잎은 3장, 난형이며, 꽃잎보다 작고 꽃잎은 6-9장이며 도란형이다.

‘산에 자라는 목련’이라는 뜻으로 ‘산목련’이라고도 부르며 북한에서는 ‘목란’이라 부르며, 국화(國花)로 지정하고 있다.

약용으로 쓰인다

문수(내성)지맥 분기봉에 도착한다

문수(내성)지맥 분기봉(1,015m:05:55)

도래기재에서 이곳 분기점까지 2.8km 거리를 1시간 35분만에 도착하였다.

예전의 走力은 나오지 않지만 작년에 좌측 폐를 절반정도 절개하고도 이 정도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며 오늘 가야할 거리도 만만찮지만 예전에 비해

숨이 덜 차는 것 만으로도 너무 기쁘다.

2년전 대간길 지날때 비해서 이정표가 많이 정리되어 깔끔한 느낌이다.

본격적인 지맥길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지맥길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예천바위 갈림길(06:00)

예천바위쪽으로 쳐다보니 숲에 가려져 있고 지금 운무가 심하여 조망이 별로 없을 것 같아 포기한다

줌인한 예천바위

옥돌봉과 옥석산에 대한 자료를 보면 옥돌봉 정상에 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의 빛이

예천까지빛이 난다고 하여 예천바위라 불렀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저 바위를 말하는 모양이다

이곳은 6.25사변때 북괴군과 치열한 격전지로도 유명한 곳이었다고 한다

초반이지만 제도권 등로라 그런지 길은 아주 좋다

공터(06:05)

이정표가 나오고 커다란 바위가 옥돌바위인데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없는 전망대가 있다

옥돌봉은 옥석산(玉石山)이라고도 하며 산봉우리에 있는 흰돌이 옥처럼 보인다 하여 옥돌봉이라 하였다는데
이 바위에서 연유된 이름이 아닌지...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이곳을 옥돌바위라고 기록하고 있다

옥돌바위 전망대(06:07)

바위 좌측에 설치되어 있는 전망대로 올라간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선달산(仙達山:1,236m)은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과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영주시

부석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봉이 김선달을 연상케 하는 선달산의 유래는 여러 갈래로 다양하다.

 

신선이 노닐던 산이란 뜻의 仙達山이 먼저 올라야 할 산의 先達山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남쪽 산기슭 부석사의 浮石을 일컫던 우리말 [선돌]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혹자는 이 산 북동쪽 지능선상의 마대산 동쪽 산기슭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 일대에 위치한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언 봉이 김선달)의 신위를 모신 당집과 묘소에서 그 이름을 유추하기도 한다.

 

先達이란 ‘과거에 급제하고도 아직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는 신분’이라는 뜻과 ‘먼저 올라야 할 산’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선답자 최창남 선생은 '먼저 깨달은 산'이라는 뜻으로 보고 '선(先)'자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 의미에서의 '먼저'가 아니라 '선험(先驗)적인 지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비해 仙達이란 ‘仙道를 추구하는 무리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문수산으로 가는 능선이 뚜렸하게 보인다

 

봉화군은 예로부터 전국에서 '가장 작은 고을 중에 선비는 가장 많은 고을'로 이름나 있으며 (조선 총독부부 문건 등)

따라서 역으로 "봉화지방은 글을 하는 선비들이 많았고 서책(眞書)의 가르침에 따라 문신과 충신 그리고 효자 효녀

열녀 등이 많이 났던 곳으로 이는 옛적부터 내려오는 풍습으로 모든 현민(군민)들이 흠모하고 받들어 왔다"는 의미다


봉화군 소재지의 명칭은 일제시대인 1913년 군청사를 현재의 춘양면 의양3리(현마)에서 내성면(奈城面: 그후

다시 '내(乃)자의 내성면으로 개명) 포저리로 옮기게 되었고, 자유당때 어느 정치인이 군청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우려하여 1956년 군청소재지의 명칭은 군명과 동일하여야 한다는 면민들의 여론에 따라 면명개정(안)이 내성(乃城)면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 같은해 7월 8일 '내성면'을 '봉화면'으로 개명하여 현재의 '봉화읍'으로 이어오고 있다.

지나온 옥돌봉과 분기봉의 모습

날씨가 맑으면 태백산과 함백산까지도 보이련만... 박무로 인해 中天까지 떠오른 해는

구름속에 묻혀 버렸고 태백산과 함백산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쉬~할배는 잘 가고 있겠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西里)의 모습

마을 앞으로 운곡천이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꽃마, 수리봉, 말밭둔지, 큰즐, 거리목 등이 있다.

꽃마는 서벽리와 두내로 통하는 삼거리에 있는 마을로, 문수산에서 바라보면 마을이 꽃봉오리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말밭둔지는 들판의 형상이 곡식을 되는 말(두)과 같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사과농사가 활발하다.

주실령고개에서 시작되는 1.5㎞의 금강소나무 숲은 두내약수터와 연결되는 산책로이자 삼림욕장이 있다

소백산 방향도 오리무중이기는 마찬가지...

전망대에서 내려와 주실령으로 향한다

암릉길을 내려서고...

이정표(06:15)

암릉길을 우회하여 다시 오름길...이정표 윗쪽이 1,152봉이나 누구도 올라간 흔적이 없고

좌측의 내리막 사면길이 뚜렸하여 나 역시 뚜렸한 사면길로 내려간다

사면길로 내려가니...

1,152m봉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만난다.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주실령으로 향한다

춘양면에서 제작한 십승지 띠지를 계속 만난다.

춘양 십승지 지도

정감록에 기록된 10곳의 은신처 십승지(十勝地)중의 하나인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兩白之間)의

2,00년전 무릉도원으로 불리는 '봉화 춘양'인데 서애 류성룡 선생의 일가가 은둔했던 땅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야 있고, 계곡물을 철철 넘쳐 흐르는 곳이라 몸을 숨기고 살면서

곡식거리 부쳐 먹고 살 만한 땅이라고 한다.

 

정감록 비결파에서 십승지 가운데 봉화군 춘양면을 표기한 원문을 보면

‘花山北去 召羅古基 奈城縣東 太白陽面(화산북거 소라고기 내성현동 태백양면)’이라 했다

‘화산(지금의 안동) 북쪽으로 가면 소라국의 옛터로 내성현 동편 태백의 양지를 향한 곳이

지금의 봉화군 춘양면을 말한다 (자료출처: 봉화 인터넷 뉴스)

삼재(전쟁, 굶주림, 역병)을 피해 십승지라고 들어온 난민들의 마음이 얼마나 추웠으면

이름도 춘양(春陽, 봄볕, 봄햇살)이라고 했을까...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주실령 가는 길

주변에는 아직 피지않는 산수국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주실령으로 내려선다

주실령(780m:06:40)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와 춘양면 서벽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오전리쪽은 오전약수가 있고

서벽리쪽은 두내 약수터가 있는데 이 지역이 물이 좋은 모양이다...915번 지방도가 지나가나

교통량의 거의 없는 편이다...사각정자와 이동통신탑이 보이는데 지명의 유래는

옛날에 이곳까지 물이 차 있어 ‘배가 다니던 고개’라 하여 배 '주(舟)' 자를 써서 주실령이라고 부른다고

하나 확실한 어원은 알 수 없다.

오전약수탕 3km 표지판이 보인다.

오전약수탕이 있는 마을은 예전에 쑥밭이란 뜻에 애전(艾田)으로 불리던 곳인데 이 쑥밭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이 지역이 물이 합수되는 지역이라 하천이 범람하여

항상 늪지대였기에 그런 뜻으로 수전(水田)이라 하였는데, 다른말로 쑤뱅이라 불리던 것이 쑥밭으로

변경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이곳 약수물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문둥병 환자들이

약수를 먹고 몸을 씻고 이 지역에 있는 쑥으로 피부에 뜸을 뜨고 달여먹고 하여 병을 고쳤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쑥밭이라 불리웠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오전 약수터는 물야면 오전리 후평장과 춘양 서벽장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던 봇짐장수(褓負商)

곽개천이라는 사람이 서벽장을 보고 주실령을 넘어 후평장으로 가던 어느날 쑥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와 이르기를 "네 옆에 만병을 통치할 수 있는 약수가 있다"고 하였다. 잠에서 깨어 옆을 보니

과연 약물이 솟고 있었고, 조선 제9대 성종(1469 ~ 1494)때 발견된 이 약수는 이듬해 가장 물맛이 좋은

약수를 뽑는 대회에서 전국 최고의 약수로 뽑혔다고 한다.

 

이 약수는 탄산성분이 많아 톡쏘는 맛이 일품이며 주요성분은 유리탄산, 망간, 마그네슘이온, 염소, 중탄산,

칼슘이온, 철분으로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한편, 오전약수탕 주변 등산로는 백두대간

구간으로 최근에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고 있고 맥반석 찜질방이 있어 약수샤워도 즐길 수 있다.

사각정자 옆에는 주실령과 박달령 안내판이 있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식사장소는 안성마춤이라 이곳에서 밥상을 펼친

貧寒한 산꾼의 아침 밥상(06:45~07:00)

나홀로 산행에는 베낭 무게를 줄이지 않을 수가 없기에 먹거리는 늘 빈약하다

다시 길을 나선다(07:05)

아침에 산행을 시작한 도래기재나 이곳 주실령은 봉화군 춘양면인데 백두대간 진부령에서 남진을

하면 강원도 땅을 벗어나 경상도 땅으로 접어드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오지중에 오지가 이곳이다.

얼마나 오지였으면 6.25동란 당시 전쟁이 난 지도 몰랐을 정도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춘양면 서벽리가 한때 전국의 상업지 땅의 공시지가가 가장 낮은 곳이었다고 한다

오름길에 외씨 버선발 둘레길이 나온다

 외씨 버선길 구간 코스

외씨버선길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청정구역인 청송.영양, 봉화, 영월 4개군이 모여

만든 4色의 길로 이 4色길이 합쳐지면 영양 출신인 조지훈 시인의 “승무”에 나오는

외씨버선과 같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산딸기가 지천이다...아무리 가야할 길이 멀어도 그렇지 딸기를 따서 입에다 넣는다

싸리밭이 군락을 이루고 완만한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오름길에 갑자기 배가 고파오기에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시원하고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983.8m봉 갈림길(07:40)

우측으로 가면 삼각점이 있는 983.8m봉이 있고 지맥길은 좌측으로 향한다

우측으로 가니 잡초가 무성한 헬기장이 나오고 이곳에서 10여분을 더 가야 983.8m봉이 있기에...

포기하고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 와서 맥길을 이어간다

헬기장(07:43)

헬기장 아래에는 폐기된 군 교통호가 보인다

등로는 서서히 지맥스러움을 드러낸다

뭔 심사가 저리도 뒤틀렸을까?

안부(07:53)

무명봉(07:57)

등로는 철쭉 군락지이다

뚜렸한 사면길을 벗어나 능선으로 올라선다

969.6m봉(08:10)

준.희 선생의 산패에는 980m봉이나 오룩스 맵에서는 969.6m봉으로 되어있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969.6m봉에서 뚜렸한 사면길 등로로 내려온다

이정표는 죄다 망가져 있다

935m봉(08:20)

좌측으로 살짝 꺽어지고...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928.4m봉(08:32)

금강송들이 자주 보인다

예배령 (禮拜嶺 881m:08:38)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와 물야면 개단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이정표(주실령3.0km, 문수산2.6km)와

죽은 노거수 한그루가 고개를 지키고 있는데 지명의 유래는 퇴계 이황선생이 이 고개를 넘어 다니면서

문수산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하여 예배령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물야면의 오록장과 봉화읍의 장을

보기위해 춘양과 강원도의 영월및 상동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던 고개라고 한다

이 고개는 춘양과 물야를 잇는 가장 짧은 지름길이기는 하지만 산이 높고 가파른 고개라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하룻밤을 묵은 다음에 넘었다고 하며 고개 이름은 조선지형도와 조선지지자료에도 기록되어 있다.

여느 소나무보다 마디가 굵고 반듯하게 솟아오르며 붉은색을 띠는 금강송은 예로부터 국가의 관리를 받는

중요한 건축 재료가 되었고, 재질이 단단하고 뒤틀림이 없어 궁궐 등 주요 건물의 기둥들은 모두 금강송을 사용하였다.

황장목, 적송, 미인송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나무는 대표적 산지인 춘양면의 지명을 빌어 춘양목으로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전국적인 목재 채취 행위에도 불구하고 교통의 오지인 이곳의 금강송은 옛 모습을 지켜냈지만

해방 이후 영주와 봉화를 잇는 경북 내륙 철로가 완공되면서 춘양역을 통하여 많은 목재들이 반출되었다.

안부(08:48)

우측의 뚜렸한 사면길을 버리고 직진의 봉우리로 향한다

925m봉(08:50)

정상에는 대구 마음의 고향 산악회의 시그널 하나만 보인다

다시 내려오니 조금전에 헤어진 사면길을 다시 만나고...

다시 오름길이 시작되고...

으아리(꽃말:아름다운 당신의 마음)

간간히 만나는 선답자들의 흔적...등로가 워낙 뚜렸하여 알바 걱정은 없다

이정표(09:02)

五指松

다시 오르막길은 시작되고...

너덜길을 지난다

1,047.3m봉(09:15)

다시 완만한 내리막길

두내 입구(09:18)

이정표(두내약수탕 2.6km 문수산 1.1km 주실령 4.5km)가 서 있는데 두내약수탕 쪽의 등로는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 있는 두내(斗內)는 마을의 지형의  말(斗) 속같이 생겼다고 하여 불리워진 지명이며

100여년 전 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 내려오는 두내 약수탕은 문수산 자락의 영험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탄산 약수로서 피부와 위장병에 효험이 뛰어나 많은 환자들이 무한정으로 몰려들어 마을 주민들이 이곳

약수터를 묻어 버렸던 것을 1982년에 재발견하였으며 주변을 정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짙은 안개가 밀려온다

축서사 갈림길(09:25)

문수산으로 오르는 최단거리 등산 코스라 그런지 축서사 방향으로 시그널이 많이 걸려 있다

축서사(鷲棲寺)...사진 펌

축사사는 독수리 축(鷲),깃들서(棲),즉 독수리가 사는 절이라는 뜻으로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지혜는

바로 큰 지혜를 가진 문수 보살님을 뜻하며 또 다른 가설로 험준한 뒤쪽 산세가 풍수지리학상으로

독수리의 형국이므로 축서라 명명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축서사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 13년(서기673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로서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절의 스님이 어느날 밤 지금의 개단 초등학교 앞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 광체가 나는 곳으로 달러갔더니 한 동자가 아주 잘 조성된 불상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얼마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리고 불상만 남았다.

 

훗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대사가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 다니다가 현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축서사의 창건이다 이때 산 이름도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해서 문수산이라 한듯하다.

3년 뒤에 의상대사께서는 축서사에서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대찰을 세웠으니 동국화엄제일도량인

부석사인데 흔히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있다.

보탑성전 편액...사진 펌

대웅전 상량문에 의하면 이 절은 광서(光緖)7년(서기 1875년)에만 해도 대웅전,보광전,약사전,선승당,동별당,

서별당,청련당,백화당,범종각등 여러동의 건물이 있었고, 산내 암자만도 상대,도솔암,천수암등 세 개나 되었고

대중이 44명이 살았으며 대웅전 본존불에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하여 기도처로 유명한 사찰이기도 하였으나,

조선조 말기 을사보호조약(서기1905년)과 정미7조약(서기1907년)으로 왜구의 속국화되는 것을 분개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무장봉기하여 항일투쟁할 때 이 곳에도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으로 방화하여

대웅전 1동만 남기고 전소시켰다.

 

축서사에는 석조비로자나불및 목조광배(보물제995호), 괘불탱화(보물1739호). 석등(문화재 자료 제158호).

삼층석탑(문화재 자료 제157호)가 있으며 한국 불교계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이자 학승(學僧)인 무여(無如)

큰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절이다.

문수산 오르는 길에는 안개가 점점 짙어진다

안부(09:35)

무명봉(09:43)

안부로 내려섰다가...

문수산으로 향하는 완만한 오르막길에는 고비나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행여 곰치라도 있을까 봐 군락지 안을 둘러보지만 곰치라는 넘을 코빼기도 안 보인다

문수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문수산(山:1.207.4m:09:50)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봉성면 금봉리, 춘양면 서벽리 경계에 위치한 산『세종실록지리지』에

 "봉화의 진산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봉화)에 "조선 세조 3년에 순흥

문수산()의 물 동쪽 땅을 떼어서 예속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순흥)에 "백병산에서 뻗어 나와 안동 학가산()의 으뜸 줄기를 이룬다."라고 하였고,

『여지도서』(안동)에 "내성현의 북쪽에 있다. 북쪽의 안동 태백산에서 뻗어 나와서 동쪽으로 봉화 갈방산으로

뻗어 나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순흥)에 "지금은 순흥에 속한다."라는 간략한 기사만 나와 있다.

이들 관찬사료의 내용은 지명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시사할 뿐 유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축서사()라는 사찰이 기재되어 있다. 이 산중에는 673년(신라 문무왕 13)에

의상조사(, 625~702)가 창건한 축서사()가 있는데, 향토지에서는 "문수산 아래의 축서사에서

광채가 비쳐 가보니 문수보살이 현신()하였다."라는 축서사 관련설이 언급되어 있다

봉화의 진산()으로 신라시대 때 강원도 평창군 수다사에서 수도하던 자장율사가 태백산을 찾아 헤메던 

"문수보살"이 이 산에 화현하였다 하여 문수산이라 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누대에 고관대작과 노승성불이

난다는 전설이 있으며 문수산은 독수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국이라하고 문수산에 축서사가 자리잡은 터는

독수리가 짐승을 낚아채는 형국이라 해서 축서사(:독수리 취)로 명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불법에서 "날카로운 지혜"는 독수리의 부리와 같은 이치에서 대승보살중에 지혜가 날카롭고 뛰어난 문수보살의

이름을 따서 문수산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다고도 한다.


옛부터 약수가 나는 명산이라고 했는데 문수산 아래는 봉화를 대표하는 3대 청정탄산약수가 위치하고 있고,

물야면의 오전약수, 춘양면의 두내약수, 봉성면의 다덕약수가 그곳이다

문수산 정상 1등 삼각점(△춘양11 / 1995복구)

인증샷

잠수한 산적두목님! 요즘은 어디에 계시나요?

문수산은 숲과 밀려오는 짙은 안개땜에 오늘 조망을 꽝이다

다시 길을 나선다

헬기장(10:00)

이곳을 지나면서부터 오늘 산행의 본격적인 苦行이 시작된다

문수산 헬기장을 지나면서부터는 조망다운 조망은 보이지 않고 숲속만 걸은 셈이다

본격적인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등로는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암릉구간의 칼날 능선이 시작된다

좌측으로 우회해서 올라서니...

안부(10:18)

미역줄기 넝쿨의 태클이 시작된

1,157.8m봉(10:27)

등로 주위는 짙은 안개로 인해 모든게 五里霧中

칼날 능선을 넘으니...

뫳돼지의 체력단련장(?)인듯한 넓은 공터가 나온다

안부(10:34)

칼날 능선으로 이어지는 무명봉

좌측으로 우회한다

다시 칼날 능선을 곡예하듯 걷는데 시간이 상당히 지체된다 

암릉구간 직벽을 조심스레 내려서는데 어찌나 위험한 지 오금이 저려온다 

우회를 할 걸...원칙을 고집하다 직벽을 내려오며 죽는 줄 알았다

안부(10:40)

이곳은 긴 직벽 능선이라 크게 우회를 해야한다

너무 힘이들어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맥산행을 하시는 분이 팔공산맥이라니...우리나라 산줄기 공부 다시 해야겠소이다

두발이 아닌 네발로 기다시피 맥길을 이어간다

우회길을 돌아서 마루금으로 복귀를 한다

무명봉(10:58)

등로에서 바라본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里)의 모습

 자연마을로는 새터, 삼밭골, 배나무골, 숯터골, 당재 등이 있는데 삼밭골은 화전민들이 삼(대마)을

많이 재배하여서 붙여진 이름이고 배나무골은 옛날에 큰 배나무가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옛날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밑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라 하여 며느리가 독에 물을 채우다 쓰러져 죽자,

동네사람들은 며느리의 울분을 들어주기 위하여 지금의 당재를 넘을 때마다 작은돌을 쌓아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그 고개를 당재라 부르게 되었으며 사과, 복수박 등이 유명하다.

굉장히 높은 직벽구간...가느다란 로프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보이는데 그래도 이걸

붙잡지 않으면 내려갈 수가 없어서 운명에 맡기고 로프에 의지한 채 안부로 내려간다

생각보다 상당히 위험하다

안부(11:05)

다시 거대한 암릉구간이 나오고...

우측으로 크게 우회를 한다

1,012m봉(11:15)

누군가가 노란 시그널에 성불산(成佛山)이라고 적어놨는데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와 

춘양면 도심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잡목으로 인해 그저 밋밋한 산이다

우곡리 중대골 우측 산으로 이 산에 처음으로 부처가 들어왔다고 하여 성불산이라 불러왔다

이곳도 정상을 오르지 못하고 우회를 한다

930m봉(11:22)

암릉구간이 나오고 우측으로 우회를 한다

안부(11:27)

893m봉도 오르지 못하고...

우회를 한다

간간히 보이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은 도움을 준다

암릉구간이 벗어놨는지 등로는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끝난줄 알았던 암릉구간을 또다시 만난다.

우회를 한 다음에 마루금으로 올라선다

좌측으로 우회를 한다

잡목사이를 헤치고 내려서니...

우측 아랫쪽엔 벌목지가 보이고 가야할 갈방산과 가부재에서 우곡리로 가는 임도가 보인다

892m봉(12:01)

철쭉 군락지를 지난 다음에...

금강송을 바라 보면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묘지(12:16)

가부재(847m:12:18)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와 봉성면 우곡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넓은 비포장

도로가 지나고 가부재 임도시설 준공 표시석과 임도 바리게이트가 보인다.

지명의 유래는 신라시대 어느 장수가 갑옷을 이곳에 벗어 두었다가 가져간 곳이라 하여

지금까지 가붓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또 다른 설은 부자가 난다는 부자터를 가부골이라

하였는데 현재는 갑옷골로 더 많이 불린다고 한다

가부재 임도 개설 표지판

임도 개설 표지판을 끼고 우측으로 꺽어지자마자 능선으로 올라간다

등로는 좋다

887.1m봉(12:25)

서서히 고도는 높아지고...

코가 땅에 닿을만큼의 급경사 오르막길...이런 곳은 범여에겐 쥐약이다

갈림길(12:40)

숲속을 헤치고 가니...

989.4m봉(12:41)

정상에는 무인 감시카메라와 3등 삼각점이 있는 헬기장이 있다

989.4m봉 3등삼각점(△춘양303 / 2004년 재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오니...임도 사거리가 나온다

임도 사거리(12:47)

독도에 아주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우측의 뚜렸한 사면 등로는 봉성면 우곡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우곡리(里)는 1591년 임진왜란 당시 선조 25년 한양에서 관직을 버리고 피난을 내려온 어느 선비가

지절인골에는 큰 사람이 없어 왜적이 들어오지않아 걱정이 없는 마을이라 하여 우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에는 금강송들이 도열해 있다

876.9m봉(H:13:08)

폐헬기장이 있는 870m봉을 내려서는데 엄청나게 배가 고파온다.

하기사 주실령에서 떡과 커피, 사과 하나를 먹고 여태껏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그러나 베낭에 먹거리라고는 커피 우유 하나와 앙꼬빵 하나 밖에 없다

가야할 거리는 아직도 8km 나 남았는데... 일단 허기를 면하기 위해 먹고보자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면서 빵과 우유로 허기를 달랜다

예전에 탄광이었는지 동굴같은 곳이 보이면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낙엽이 뚜렸한 길을 내려서니...

묘지(13:20)

안부(13:21)

안부에서 다시 오름길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지맥길이라 그런지 맥길이 그리 지저분하지는 않다

춘양목(木)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 소천() 일대 산지에서 자라 소나무로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금강산에서부터 경북 울진, 봉화를 거쳐 영덕, 청송 일부에 걸쳐 자라는 소나무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꼬불꼬불한 일반 소나무와는 달리 줄기가 곧바르며,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별나게 붉다. 이 소나무는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학자들이 금강소나무(金剛松), 혹은
줄여서 ‘강송’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흔히 ‘춘양목(春陽木)’이라고 더 널리 알려진 바로 그 나무다.

금강소나무는 결이 곱고 단단하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 썩지도 않아

예부터 소나무 중에서 최고로 쳤다

 

소나무는 자라면서 여러 가지 화학물질이 쌓여서 나무속이 진한 황갈색을 띠는데 이 부분을 옛사람들은

‘황장(黃腸)’이라 하였으며, 가장자리의 백변(白邊)에 비해 잘 썩지 않고 단단하기까지 하다.

황장이 넓고 백변이 좁은 금강소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로서 왕실에서 널리 쓰였다.

 

세종 2년(1420)에 예조(禮曹)에서는 “천자의 곽(槨)은 반드시 황장으로 만드는데, 견고하고 오래되어도

썩지 않으나, 백변은 내습성이 없어 속히 썩는데 있습니다. 대행 왕대비의 재궁(梓宮)은 백변을 버리고

황장을 서로 이어서 만들게 하소서”라고 임금에게 아뢴다.
조선왕조 내내 좋은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황장금표(黃腸禁標)를 세우고, 《경국대전》에는 좋은

소나무의 벌채를 법으로 금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795.5m봉(13:32)

날씨가 자꾸만 흐려지더니 비가 한방울씩 떨어지는데 괜스레 불안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순리대로 살아야지

고개(13:44)

이곳부터는 송이재취 지역인지 경고판이 붙어있다.

가을에는 맥산행이 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720m봉(13:47)

정상에는 묘지가 있고 우측으로 꺽어져서 내려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

암릉구간으로 내려간다

685m봉(13:49)

솔당재(13:52)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와 법전면 법전리로 가는 고개인데 인적이 드문 고개이다

솔당재의 지명유래는 찾을 길이 없으며 이곳부터 좌측은 도래기재에서 시작하여

같이 걸었던 춘양면과 작별을 하고 법전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707.8m봉(13:55)

저도 그리움 찾으러 헤매는 중입니다

춘양목 군락지를 지나간다

이곳부터는 송이채취 구역임을 표시한 하얀 노끈이 보인다 

흙목이재(14:00)

봉성면 우곡리에서 법전면 법전리를 잇는 고개인데 지금 흔적조차 잘 보이지 않는

희미한 고개인데 그 어디의 자료에도 흙목이재에 대한 것을 찾을 곳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우측의 사면길이 아닌 직진의 능선으로 올라간다

생각보다 잡목의 저항이 심하다

臥松이 있는 곳을 지나...

안부(14:14)

등로가 잘 보이지 않는 곳을 헤치고 나가니...

묘지(14:15)

낙엽이 수북한 등로를 걷는다

674m봉(16:20)

송이 채취 경고문 

무단 채취시는 7년이하 징역, 3천만원 이하의 벌금이란다.

송이채취 영역을 표시하는 노끈이 상당히 성가시다

계속되는 잡목의 저항

669.5m봉(14:25)

지나가신지가 오래된 듯...

下心을 하라네요

안부를 지나 능선을 올라서니 춘양목 군락지가 나오고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데 먹을거라곤 물과 새벽에 산악회 총무님이 준 초콜렛 밖에 없다

아무리 갈길이 바빠도 배고프면 못가제 가던 길을 멈추고 딸기를 따서 입에다 넣는다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비포장 임도가 나온다

붓든고개(14:45)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 우르실 마을과  법전면 법전리 붓든마을 잇는 고개인데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넓은 임도에 송이 채취 기간에 사용된 듯한 검은천 차양막이 씌어진 가건물이 보인다

지명의 유래는 좌측 아래에 있는 붓든마을에서 따온 듯 하며 붓든, 북둔(北屯), 부둔(浮屯)으로도 불리며

마을의 양쪽에 베틀 같은 산이 있고 가운데 북처럼 생긴 산이 있어서 유래된 동명이며 마을에 둔덕이 많아

교통이 불편한 오지부락이다. 이 마을에는 수년 전부터 마을 입구에 성황당을 모셔 놓고 매년 제사를 올렸다고 

하며 그 주위에는 수령 약 150년 되는 노목 한 그루가 있으며 (보호수 읍면나무 11-29-4-2호 지정)

그 이후 심겨진 배나무 1그루, 소나무 1그루가 함께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고개에서 우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이곳도 송이 채취구역인지 비닐 노끈이 계속 보이고 고개 아래의 붓든 마을에서는무슨 행사를 하는지

음악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린다

무명봉(14:55)

송이 채취 가건물을 지나 다시 오르막길

암릉을 지나 올라서니 675m봉이 나온다

675m봉(15:12)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갈방산으로 향한다

안부(15:13)

무명봉(15:20)

이곳도 광산의 흔적인지 깊게 움푹파인 굴을 지난다.

갈방산(葛芳山:711.5m:15:25)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와 봉성면 우곡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칡 갈(葛), 꽃다울 방(芳)...한문으로 풀이하면 칡꽃이 많은 산이라...웬지 좀 어색하다.

선답자의 산행기에서 산패도 몇개 있고 하였건만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갈방산’이라

써 놓은 코팅지 하나만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는데 이곳이 송이가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 그런지

송이 채취를 하는 사람들이 훼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갈방산 정상은 지금 짙은 박무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아쉬운 마음을 접고 내려간다

완만한 등로로 내려간다

잡목의 저항이 있긴 해도 아쉬운대로 걸을만 하다

583m봉(15:35)

뫳돼지의 식흔

묘지(15:40)

좌측으로 내려간다

다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유인 김녕이씨 묘(15:45)

유인 김녕이씨 묘를 지나 내리막으로 뚜렸한 임도가 보이나 트랙은 좌측 능선으로 가리키고 있다.

좌측 능선으로 가니 묘지가 보이고 내리막길에는 간간이 선답자의 시그널이 보인다

조금을 더 가다가 키작은 소나무에 갇혀 버렸고,엄청난 개고생을 하면서 내려선다

절개지를 내려서는데 미끄러운 마사토길에 한번 꼬꾸라지고

영주, 봉화를 거쳐 울진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36번 국도가 시원스레 보인다

다덕현(多德峴:432m:16:50)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와 법전면 법전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육교가 있으며 육교 윗쪽은 봉화와

춘양을  잇는 구36번 국도가 지나가고 아랫쪽은 시원스레 뚫린 신 36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지명의 유래는 우곡리에 있는 다덕 마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덕, 다대기로도 불리며

봉화의 3대 약수탕(오전, 두내, 다덕)인 다덕 약수탕이 있는데 봉화의 3대 청정 탄산약수 중에 하나이다.

 

옛날 스무나무아래 약수가 있어 이를 마시고 많은 사람이 덕을 보았다 하여 다덕 (多德)약수라 불리워지는

곳은, 탄산과 철분 등이 함유되어 있어 톡 쏘는 맛이 그만이다. 예로부터 피부병과 위장병에 많은 사람들이

효험을 보았다 하고, 지금도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

 

일제시대에는 다덕광산이 있었던 곳이며 금, 은, 동, 철, 아연 등 7가지 광물이 많이 생산되었고

광산이 번성할 시기에는 광산에 종사하는  종업원이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절개지를 내려서면서 꼬꾸라지긴 했지만 다행히 다친데는 없다.

그러나 솔잎과 흙을 뒤집어 쓴 나의 몰골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워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산행이 끝난 후라 천만다행이다.

베낭을 정리하고 있는데 택시 한대가 지나가고 있는게 아닌가...얼른 손을 들었다.

우곡리를 갔다 오는 춘양택시가 빈 차로 가고 있는데 세워주기에 요금 협상을 한다.

어차피 빈 차로 갈긴데 내가 지금 가진 돈도 별로 없으니 절반만 주고 가자고 하니까

만원만 달라고 한다...OK하고 택시를 타고 춘양으로 가는 길에 서울가는 교통편을

알아보니 춘양에서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버스는 2시간에 한 대씩 있는데 16시 10분

차는 이미 늦었고 그 다음 차가 18시 10분이란다 

서울가는 차가 타려면 2시간 가까이 춘양에서 죽쳐야하기에 일단 춘양에 도착하여

목욕탕에서 깔끔하게 샤워를 하고 의관정제를 한 다음에 춘양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터미널로 가려면 춘양 재래식 시장을 거쳐야 하는데 이름이 ‘봉화 억지 춘양시장’이다

이름을 보고 失笑를 금할 수가 없다

일제시대 당시 춘양목과 금광으로 명성을 날리던 봉화군 춘양면에 해방 후 철도가 우여곡절

끝에 놓여지게 되는데 이를 두고 생겨난 민요라 한다.'왔네 왔네 억지 춘양 나 여기 왔네……’

라는‘억지 춘양’민요는 '억지로 춘양까지 철로를 놓으면 변란이 생긴다’는 말이 돌면서

불려지게 됐다는 설이 있다.

 

억지춘양의 유래는 해방전부터 영주에서 철암까지 영암선 철도를 개설도중 8.15해방과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지금의 방전삼거리 근방을 지나 녹동방면으로 90%이상 공사가 진행중 당시 춘양면

서벽리에 고향을 둔 자유당 시절  2.3.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원내 총무를 역임한 정문흠씨의 주장에

따라 춘양면소재지를 거치도록 공사계획이 변경되어 법전면 소지리와 춘양면 의양리를 잇는 터널

300m와 연이어 당시 철교 공사로서는 보기드문 높이 30.7m 길이 60m의 철구조 빔다리가 놓여지는 등

우여곡절 속에 억지로 공사가 추진되어 영동선(당시 영암선)이 춘양면 소재지를 돌아가게 됨으로써

억지 춘양이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시장을 지나면서 하도 배가 고파서 갓 삶은 잔치국수에다가 맥주 한병을 마시고 터미널로 향한다

시장안 한쪽에는 아무도 없는데 노상 라이브 카페에서 7080 노래를 연주하고 있다

선 채로 혼자서 한참동안 공연을 구경하는 여유를 가진다

춘양 버스 터미널(17:15)

버스표를 예매하고 나니 1시간 가까이 시간이 남아 참으로 지루하다.

춘양에서 나를 포함해 2명, 봉화에서 2명을 태우고 서울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