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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내성(문수)지맥(終)

내성(문수)지맥 제3구간 - 신라재 임도에서 옛고개 삼거리까지

by 범여(梵如) 2019. 9. 2.

☞ 산행일시: 2019년 09월 01일

☞ 산행날씨: 흐린날씨에 높은 습도, 바람한 점 없는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24.7km / 10시간 5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신라재 임도-554m봉-성황당 고개-무명봉-안부-무명봉-갈림길-만리산-안부

                  770m봉-시멘트 도로-만리산 늘못-경주김공 묘-720m봉-안부-520m봉

                 신라리 갈림길-무명봉-유인 영천이씨 묘-유인 선성김씨 묘-월오현-무명봉

                 540m봉-임도삼거리-임당고개-김해김씨 가족묘-무명봉-560m봉-610m봉

                 642m봉-무명봉-안부-630m봉-용두산-600m봉-626m봉-안부-593.9m봉-용수재

                 542m봉-김해김공 묘-순흥안공 묘-500m봉-안부-임도-갈림길-임도-안부

                골티고개-갈림길-폐헬기장-복두산-495m봉-갈림길-김해김공 묘-도로

                삼거리-안부-무명봉-490.1m봉-요성산 분기봉-묘지-방아재-무명봉-폐헬기장

                480m봉-안부-묘지-녹전고개-560m봉-박달산-갈림길-안부-530m봉-임도삼거리

                멧돼지 농장-550m봉-임도삼거리-벙커봉-봉수산(용암지맥 분기점)-갈림길

                진주강공 묘-유인 안동권씨 묘-안부-갈림길-유인 함창김씨 묘-사과밭

               무명봉-안동권공 묘-인동장공 묘-옛고개 삼거리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명호면, 상운면 / 안동시 도산면, 녹전면 / 영주시 평온면

 

근  한달만에 문수지맥 3구간을 나서는데 처음에 고민을 많이했다

이곳은 송이버섯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 송이 채취 기간에 산행을 하면 서로가 

불편할  것 같아 망설이다가 영주쪽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만 높은 곳에는

송이가 한.개씩 보이나 낮은 곳은 아직 송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고

봉화가는 버스에 오른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동서울발 → 봉화행 버스표

집에서 이른 시간에 저녁을 먹고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니 벌초시즌이라 그런지 만차이다

정시에 버스는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말자 차들로 인헤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버스는 문막을 지나면서 정체가 풀리고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봉화 터미널에 도착한다

봉화공용주차장(21:20)

터미널에 도착하여 내성천 근처에 있는 여관으로 향한다

봉화읍 내성천변의 모습

봉화(奉化)의 지명 유래는 고려 공양왕때부터 붙인 지명으로 “이는 문헌(文獻:眞書)의

지방으로 화(化)하는 풍습으로 현민(縣民)들이  진서(眞書)를 받아준다”라는

의미로 구전되고 있다.

 

봉화는 예로부터 전국에서 ‘가장 작은 고을중에 선비는 가장 많은 고을’로 이름나 있다.

(조선총독부 문건 등) 따라서 역으로 말하면 봉화 지방에는 글을 하는 선비들이 많았고

서책의 가르침에 따라 문신과 충신 그리고 효자, 효녀, 열녀들이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이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아닐까 싶다

정도전은 고려말의 사회격동기에 태어나서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혁명의 주역으로 이성계를 왕위에 추대하고 본인은 한 걸음 물러섰지만 실제적으로

조선왕조의 밑그림을 그린사람도 그요, 기초공사를 튼튼하게 마무리지은 사람도 그다.

 

그에게 있어서 고려왕조는 썩은 나무둥지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썩은 나무에

새순이 돋는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역성혁명(易姓革命)만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芸敬 : 1304∼1366)도 경상북도 봉화지방의 향리출신으로

성리학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 개경에 진출하게 되었고 그의 선대는 고조인

정공미(鄭公美)가 봉화호장을 지낸 이후 계속 호장을 세습하였는데, 운경은 벼슬이

형부상서에까지 올랐으나 청렴하여 처자가 추위와 배고픔을 면하기 어려웠다고 하며,

처세가 깨끗하고 정의로워서 염의선생(廉義先生)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고려사'의

양리전(良吏傳)에 올랐다

 

봉화군이 배출한 정도전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관리는 백성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점에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은 하늘'이라고 까지 말하였다.

백성을 하늘같이 떠받들어 백성의 지지를 받는 권력만이 존재의 의의가 있다는

민주주의적인 발상을 지금으로부터 600전에 이미 생각하고 실천에 옮긴 선각자였다.


그리하여 백성의 생업인 농업·상업·수공업·광업 등 모든 산업을 공개념에 의하여

국가에서 통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며 기본적으로 공개념하에 토지사유를 인정하고

가정의 부업으로 하는 상업행위 등도 자유화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 주요 기간사업은 국유화하고 소규모 산업활동은 시장경제에 맡겨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아우르는 경제체제를 구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조선왕조

경제정책의 기본 틀이 되어 시간이 경과하면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그는 건국의 주역답게 조선의 수도인 서울을 스스로 설계하였다. 5부 49방의

행정구역을 비롯하여 왕의 정궁인 경북궁의 여러 전각들, 4대문과 4소문의 이름들이

모두 그에 의하여 명명되었으며, 그 이름들은 유교이념과 국가의 무궁한 발전을

원하는 원망(願望)을 담고 있다.

 

'조선'이라는 국호 역시 그의 아이디어인데 개국 시조인 단군 조선과 도덕문화를 꽃피운

기자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채택된 것으로 정도전은 일단 조선을 건국하고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 땅을 다시 찾고자 요동정벌을 꾀하였다.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에 힘의 공백지대였던 요동지방을 우선 탈환하고자 한 것이다.

이 계획은 명나라에 누설되어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의 요동정벌 운동은 이성계와

합의하여 이뤄진 것이므로 명나라는 이성계를 껄끄럽게 여겼다.

이러한 국제상황에서 권력투쟁의 도구화되는 개국 공신들의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국가의 공적 군사조직으로 개편하려는 과정에서 정도전은 제거되었다.


  이방원에 의하여 정도전이 피살(1398, 태조 7)되고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는

정계 개편은 왕위계승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도 원인이 되어 있었다.

정도전과 이성계 등의 온건파가 전면으로 부각된 것인데 혁명가는 혁명으로 끝난다는

역사의 진리를 확인시켜 준 셈이었다.


이후 조선역사에 '정도전의 난'으로 기록된 그의 피살사건은 사실은 '제2차 왕자의 난'임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은 계속 반역자로 낙인 찍혔다가 19세기 중반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복권되었다.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들의 이름을 그가 모두 지웠음을 확인하면서 조선왕조를 건설한 개국공신으로서의

그의 공적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낙원장 여관(21:30~05:00)

봉화읍내에는 찜질방이 없어서 부득히 비싼(?)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여관비 30,000원을 주고

방 키를 받아서 방으로 들어 갔는데 방은 깨끗하나 담배 냄새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렇다고 방을 바꿔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다.

난생 처음 봉화읍내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일어나 택시 정류장으로 가니 김밥집이 문을 열었다.

아침과 점심으로 먹을 김밥 2줄을 사서 베낭에 넣고 신라재 임도로 향한다

할머니 혼자서 하는 김밥집인데 김밥 한 줄에 1,500원밖에 받질 않는다...가성비가 굿이다 

신라재 임도(507m:05:58)

봉화 터미널에서 출발한 택시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따라서 신라재 임도에 도착한다

택시요금이 27,000원이 나왔는데 첫 손님이라고 하면서 25,000원만 달라고 한다

맥꾼들을 이곳을 신라재라고 하나 진짜 신라재는 조금전에 상운면 문촌리에서 신라리

넘어오는 고개이며 이곳은 봉화군 상운면 신라리에서 명호면 관창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신라리(新羅里)는 신라시대 어느 왕인지 알 수 없으나 태자와 함께 피난을 하여 임시 수도로

있었다고 하여 지명이 되었으며 안동군 도산면과 봉화군 명호면에 인접해 있으며 거느미.

윗거느미. 아랫거느미. 모찌골. 산재. 새터라 불리우는 자연촌락이 있으며 1983.2.15일 봉화군

행정구역 개편 때 명호면에서 상운면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신라재는 신라리와

독집골을 잇는 임도가 지나고 있으며 차량통행이 가능하다 

택시기사와 작별을 하고 산행을 준비하는데 생각보다 상당히 춥다

온도계를 보니 13도를 가리키고 있는게 아닌가...서울과10도 정도 차이가 나는것 같다

바람막이 자켓을 입고 산행을 준비한다

 산행을 시작하다(06:05)

임도에서 칡넝쿨을 치고 올라서니 급경사이나 등로는 뚜렸하다

544m봉(06:09)

가느다란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안부에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무명봉을 넘어서...

다시 내리막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성황당 고개(501m:06:20)

봉화군 상운면 신라리 웃거느미에서 명호면 갈골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녹이슬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입간판과 고개를 넘어면서 민초들이 소원을 빌면서 던져놓은 돌무기가 보인다

관창리(觀漲里)는 본래 마을 뒤 바위에서 낙동강 물이 불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여 관청이라

불렸으나, 후에 내자대수시()에 많은 강물을 보고 관창이라 부르게 되었다.

갈골은 옛날 만리산에 못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비가 많이 와 못 둑이 터지고 이무기가

떠나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또 못 둑까지 칡이 늘어져 있어서 갈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성황당 고개에서 급경사의 오르막 등로로 올라간다

 한많은 며느리밥풀꽃도 만나고...

간벌을 하여 마구 버려진 고사목으로 인해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무명봉(06:25)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 가는데 등로 좌측에는 잣나무 조림지가 보인다

안부(06:28)

등로는 멧돼지가 작살을 내놨다

또 다시 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의 오르막 등로로 오른다

독도님의 격려 문구를 만나고...

봉우리로 올라 섰다가...

안부로 내려선다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길

암릉 구간을 지난다

희미한 등로를 치고 올라서니 무명봉이 나온다

무명봉(06:48)

나뭇가지 사이로 해는 저만치 올라와 버렸다

우측으로는 가야할 만리산이 보인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서 걷는다

갈림길(07:00)

신라재 임도에서 이곳까지 약 400m정도의 고도를 높이며 올라왔다

평소 같았으면 수술 부위의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10번도 쉬어야만 올라올 거리를

오늘은 논스톱으로 올라왔다

초반이긴 하지만 느낌이 아주 좋다...수술이후 초반에 통증없이 걸어본 것은 처음이다

능선에 올라서니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으로 꺽어져 만리산으로 향한다

만리산 가는 길

만리산(山:791m:07:15~28)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와 상운면 신라리 사이에 위치한 산으로『조선지지자료』에 하남면 관창리

북쪽에 있는 산으로 기재되어 있다. 매우 높아서 '봉우리에 오르면 만리가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실제는 지명이 뜻하는 것과 달리 정상은 터가 다져져 있지 않아 숲이 울창하고

사람이 쉴 만한 공간도 없으며, 그곳이 정상임을 알려주는 작은 현판만이 나무에 걸려 있을 뿐이다.

이 산에는 옛날부터 윤달이 든 해에 이 산에 오르면 돌림병이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음력 4월 초8일경에

이 산정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만리산이란 이름도 이 산을 찾아 천리만리서 찾아 왔다는데서 유래

되었다고 하며 해방 후에는 ‘만리사(萬里寺)’라는 절을 짓고서 4월 초파일 놀이는 더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만리산 대삼각점

만리산은 낙동강(洛東江)을 사이에 두고 청량산(淸凉山;870m)과 문명산(文明山;894m)을 마주하고 있다

화전민(火田民)) 이주 지역으로 개간했으나 지금은 고랭지(高冷地) 채소 단지로 더 유명하다.

이무기가 살았다고 전하는 분화구같이 생긴 큰 못이 있으며 만리산 아래에는 관창폭포와 갈골계곡의

맑고 깨끗한 물과 청석바위와 자연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인증샷

음악을 들으면서 아침에 봉화에서 산 1500원짜리 김한줄과 김치로 아침을 해결한다

휴식을 겸한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난다

낙엽이 푹신한 등로로 내려선다

내리막길에 앙증맞은 바위도 보인다

안부(07:30)

770m봉(07:35)

770m봉을 지나자 마자  갈림길이 나오고 맥길은 좌측으로 내려간

완만한 내리막길

빨간 띠지가 오늘 맥길을 안내한다

암릉구간

나뭇가지 사이로 관창리 산허리의 임도가 보인다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시멘트 도로(07:43)

좌측으로는 명호면 관창리로 내려가는 길이며 청량산쪽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봉화군의 중남단에 위치하는 ‘관창리’는 최초 봉화금씨가 개척하였으며, 마을 뒤에서 낙동강의

물이 불어나는 것을 볼수 있다하여 관창(觀漲)이라 했다. 이 마을은 아홉 마리의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구우전이라 하고 이 곳을 지나 천리 만리를 내다 볼 수 있다하여 만리산 이라 했다.

이 늘못에 예전 이무기가 살았으며, 인근에 메 둔 황소를 잡아먹고 고삐와 코뚜레만 물에 떠다녔다고 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이고 조금전  내려온 서쪽은 상운면 신라리

남쪽은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가 되겠다... 신라의 지명과 관련된 듯 하다

 

신라리(新羅里)는 신라시대 어느 왕인지 알 수 없으나 태자와 함께 피난을 하여 임시 수도로 있었다고

하여 지명이 되었으며, 태자리(太子里)의 지명유래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고려 공민왕이의 난을 피해

안동을 왔을 때 태자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해서 불리워졌다는 설과, 신라의 마의태자가 금강산을 갈 때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불리워졌다는 설도 있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가니 늘못 안내판이 나온다

만리산 늘못 안내판

만리산 늘못(常池:705m:07:45)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 산60-3. 일대 만리산(萬里山) 정상부 아래에 있는 3개의 늘못중 하나이며

늘못(常池) 주변은 신생대 화산체가 폭발한 후 화산의 중심부가 함몰 2차적으로 큰 와지가 된 뒤 물이 고인

분화구일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곳이다.

이 못은 고라니, 토끼, 산새 등 수많은 산짐승과 수생식물의 생명수였큰 암벽과 흰구름이 맞닿을 둣한 절경,

낙동강변 수달래의 요염한태와 기암괴석과 절벽 등 산세가 수려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으로

인근 청량산의 무수한 문화유적과 자연자원, 문화적 생태적 가치가 상당히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쑥부쟁이가 피기 시작하니 가을이 성큼 우리곁에 다가왔나 싶다

늘못 주변에는 장대부들과 연꽃 등 습지식물이 늘비하게 자랐으며, 이 곳에 한 여인이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을 기다리다 호랑이에게 물려갔다는 전설이 있다.

여자의 가슴을 닮은 북부제일의 명당이라는 설의 옥산(玉山)이 있으며 고려 때 공민왕이

노곡공주와 피난했다는 각종 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내륙으로 군령 파발을 위한 봉수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내리막길에서 우측 숲속으로 들어선다

숲으로 들어섰다가...

곧 바로 내려서니 묘지가 나오고 조금전에 헤어진 시멘트 도로를 다시 만난다.

경주김공 묘지(07:55)

묘지를 지나 갈림길에서 능선으로 올라간다

 약초를 심어놨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판이 있지만 무시하고 올라간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청량산(좌)과 축융봉(우)이 멋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문명산(좌) 청량산(우)을 당겨본다

며느리밥풀

취나물꽃

뚝갈

야생화를 耽美하며 능선으로 올라간다

720m봉(08:05)

봉화군 상운면 신라리와 명호면 관창리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가 만나는 삼면 경계봉이다

이곳부터는 명호면과 작별을 하고 안동시 도산면으로 들어서는데 직진의 뚜렸한 등로는

투구봉으로 연결되는 등로이고 맥길은 90도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져 내려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이다 

멋진 소나무들이 많이 보이고...

등로는 주위에 솦이 많이 우거져 아무것도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급경사를 내려오니 지나온 만리산 능선이 얼굴을 빼꼼히 내민다

신라재 임도에서 월오현까지의 맥길은 우측에 신라리를 두고 ∪형태로 맥길을 이어간다

급경사에서 한번씩 꺽어질 때마다 멋진 소나무를 만난다.

급경사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싸리버섯이 많이 보인다

베낭을 벗어놓고 잠깐 수확을 하는데 꽤많이 땄다 

안부(08:20)

안부를 지나는데 갑자기 커다란 짐승소리가 들리더니 도망을 가는게  아닌가

멧선생이 땅을 파뒤집다가 내 베낭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소리에 놀라서 도망을

가는데 나도 엄청나게 놀랐다.

무명봉(08:25)

의연함을 잃지 않고 산을 지키는 멋쟁이 소나무

520m봉(08:27)

소나무 숲을 지나고...

신라리 갈림길(08:28)

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급하게 좌측으로 90도 꺽어져 내려간다

등로는 완만하고 뚜렸하다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무명봉(08:32)

다시 우측으로 내려서는데 대구 의산님의 낡은 표지기를 만난다

송이가 나오는 지역인가 보다

빛바랜 입산금지 표지판이 보인다

또 다시 우측으로 살짝 꺽어져 내려간다

묘지로 내려선다

유인영천이씨 묘(08:35)

우측으로 내려가는 희미한 임도를 만나고...

소나무숲을 지나니...

오래된 묘지가 나온다

유인 선성김씨 묘(08:40)

소나무 사이의 좁은길로 내려서니 월오현이 나온다

월오현(月午峴:463m:08:42)

봉화군 상운면 신라리 신라마을에서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다릿재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예전에 예안에서 봉화로 갈 때 이용하였던 고개였으며『해동지도[海東地圖]』(봉화)를

비롯한 여러 봉화의 옛 지도들에서 '월현[月峴]'으로 표기되어 있고, 월현 바로 위에 신라현

(지금의 봉화군 상운면 신라리/신라재)도 함께 표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월오현은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서 나온다.

 

즉 봉화군 하남면[下南面] 태자산리 월오현과 그 한글 명칭 '달애재'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 높은 재란 뜻으로 우리말 달애재 혹은 다랫재라고 부르다가,이를 한자로 표지하면서

월현,월오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이며 지금도 월오현 대신에 다랫재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이 고개의 지명유래로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1, 멍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반달처럼 생긴 고개가 있어 ‘다랫재’라고 불렀으며 한자로는 ‘월오현(月午峴)’이라 하였고,
다랫재 아래 마을 이름이 다랫재 마을이라고 한 것과 유관하다고 본다.
2. 또 일설에는 마을에 다래가 많아서 ‘다랫재’라 칭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3. 태자현으로 불리게 된 설화에는 신라의 태자가 지금의 영주(榮州) 땅인 내령군(奈靈郡)에 와서  놀다가

 

그 고을 아전의 딸과 사랑을 하여 오래 머물게 되었는데, 그 고을 사람들을 부끄러워하여 몰래 도망하여 이 고개를 넘어
이곳 태자사(太子寺)에 가서 잤다고 한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태자현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 안동의 지명유래(민속박물관) -

다른 설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서 이 고개를 넘을 때 달(月이 정오(正午)에 이른다고 해서
월오현이란  지명의 유래도 있다
이동통신탑 있는 쪽으로 올라간다
등로가 보이질 않는다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니...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멧돼지의 횡포
무명봉(08:53)
잡풀이 무성한 묘지가 나오고..
또 다른 묘지를 만나고...좌측으로 꺽어진다
박종율 선생의 개념도엔 두충나무 조림지라고 기록된 조림지가 나온다
조림지를 지나면서 우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등로에서 바라본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원태자 마을의 모습
등로는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100km가 넘는 맥길이라 그런지 등로는 살아있는 편이다
540m봉(09:10)
우측으로 내려간다
조그만 봉우리를 지나고...
좌측에서 내려오는 임도를 만난다
임도 사거리(09:25)
봉화군과 안동시의 경계 능선인데 우측의 신라리에는 사과밭과 고추밭이 보인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무룻꽃
금마타리
도로를 따라서 편하게 맥길을 이어간다
도로에서 바라본 태자리(太子里)의 모습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태자리는 용두산과 만리산 사이에 위치하여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을 가운데로 온은천이 발원하여 흐른다. 골짜기가 많은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태자산(자산), 강당마(강당촌), 개금두들, 구구마(구마동), 널매(여울머리), 말구산, 머골(하곡), 머구박골,

물구돌, 소정(반정), 송장골, 숫골, 장각골, 장승마(장승배기), 지경 등이 있다. 태자산은 태자산이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다.

널매는 전에 널(판자)이 많이 났다고 하여 널매라 불린다. 머골은 도산면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다.

소정은 외우형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고장승마는 장승이 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문화유적으로 태자사터가 있다.

도로옆에 있는 기독교인 묘지

임당고개(林塘峴:09:30)

봉화군 상운면 신라리 임당마을에서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넘어가는 고개인데 봉화쪽은 사과밭이 있고
시멘트 도로가 포장된 사거리인데 지명은 임당마을에서 따온 듯 하다
임당(林塘)마을은 숲댕이라고도 하는데  김해김씨 집성촌이다
고개에서 직진하여 가는데 인부를 데리고 사과를 수확하는 쥔장인듯한 자가 나를 쳐다보더니 지랄을 한다...
처음엔 라디오 음악소리로 인해 뭔 소리인지 알아지 못했다
혹 사과라도 하나 줄라고 하는가 싶어 귀를 쫑긋 세웠더니만 저거 밭 옆에 다닌다고 지랄을 하네
이보소!  내 발로 내가 걸어 다니는데 당신이 웬 참견이요 하니까 찍소리도 안한다...별 잡놈 다봤네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올라간다
김해김씨 가족묘(09:32)
짐승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묘지 주위에 철망을 둘러놨다
묘지 우측으로 올라간다
내 십일면관음상(十一面觀音菩像)

내 얼굴 이미 많은 걸 지녔다

얼굴 드리운 퀭한 눈빛

얼굴에 파인 깊은 그늘

자비상, 분노상, 백아상출상 열한 개 얼굴

보이지 않는 뒷모습 살의(殺意)

나는 내가 두렵다,

눈보라 속의 열매를

우리 상한 얼굴빛이라 썼던

젊은 날 회한의 시(詩)는 슬픔의 과잉―

그 얼룩진 눈 습지 보타지면서

가면(假面)도 얼굴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맨얼굴 옛 미소가

내 얼굴 정수리 불면(佛面)이 사라진 흔적

 

김영산님의 시집 『벽화』중에서

오르막길의 칡넝쿨 저항이 상당히 심하다

급경사의 오르막이 상당히 심하다

평소 같으면 수술 부위의 통증으로 인해 몇번이나 쉬었을텐데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컨디션이 좋아서 한번도 쉬지 않고 능선까지 올라선다

무명봉(09:40) 

안부를 지나 다시 능선으로 올라간다

560m봉(09:45)

희미한 임도가 나오고... 

임도를 버리고 직진 능선으로 올라간다

생각보다 등로는 뚜렸하다

610m봉(09:50)

봉화군 상운면과 안동시 도산면, 녹전면이 만나는 삼면 경계봉이다

이곳부터는 봉화군과 작별을 하고 온전히 안동시로 접어든다

안부를 지나고...

다시 완만한 오르막길

642m봉(10:03)

갈참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무명봉(10:10)

완만한 내리막길

안부(10:12)

630m봉(10:17)

630m봉 아래에는 묘지가 있다

묘지 아래로 내려선다

편안한 등로로 이어지고...

봉우리를 지나...

안부로 내려선다

등로 우측으로 약초 재배지가 보인다

깊은산 속 옹달샘

능선을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무명봉을 지나고...

낙엽이 푹신한 등로를 따라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칡넝쿨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용두산 정상에 도달한다

용두산 정상 뒷면의 모습

안동의 정기 용두산에서 발원하다

2018년 4월 도산면장

용두산(山:664.6m:10:30)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와 온혜리, 녹전면 매정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칡넝쿨이

산 정상을 점령하고 있고, 정상에는 최근에 세운듯한 정상석과 제단이 있다.

동쪽으로는 문명산과 청량산, 축융봉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용두산()이란 명칭은 산의 모양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전한다.

용수산()이라고도 불렀다고도 하며 또 용수사()에서 이름을 따와 용수산()이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이 산을 경계로 녹전면과 도산면이 나누어진다.

고려 때 창건된 용수사가 남쪽 자락에 있다.

 

정상에 옛날 기우제를 지내던 기우단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예안)에 "현 북쪽 22리에 있다.

최선()의 용수사()기에, 태백산() 남쪽으로 300여 리를 높았다 낮았다 하여 우뚝하게

빠져 나온 것이 있으니, 이것이 용두산인데 실로 영가군(, 지금의 안동)이 이 산을 짊어지고 도시가

된 것이라고 나온다."라는 기록이 있다. 용두산은 여러 옛 지도에 자주 등장한다.

『여지도』(예안)에도 용두산이 표시되어 있는데, 주변에 용수사, 도마현(도마현, 지금의 녹전면 매정리

도마치재), 원당촌(원당촌, 지금의 녹전면 원천리 원당마을), 신암(신암) 등도 함께 표현되어 있다.

인증샷

용수사 대웅전...사진 펌

용두산 아래에는 용수사가 있는데 개창기에 의하면 고려 18대왕인 의종의 발원으로

화엄종 사찰이 개창되어, 명종 때에 완성되었으며 이후 의종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운영되어 왔다

고려명종 11(1181)에 최선이 건립하였으며, 조선 선조때 극락전을  중수하였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전투 중에 용수사와 부속암자 '영은암'불에 타서 소실되었다.

그 후 터만 남은 곳에 1994년에 대웅전과 요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용두산 용수사(龍壽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용수사는 신라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수 차례 화재로 옛터만 남았는데

봉화의 각화사 주지 성원스님이 1146(의종원년)에 용수사 옛터의 남쪽에 암자를 지은 뒤

입적하자 각화사의 주지로 왕실과 가깝던 고승 석윤이 의종에게 용수사 창건을 건의하자

화엄교리를 펴고자 하였다.

 

이에 의종(1127~1173)은 석윤에게 용두산의 암자를 증축하여 용수사라 사액하고 크게

번성시켰는데 의종이 믿었던 장군에게 죽음을 당하자 명종1(1181)에 형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국왕의 원찰로 지정 최고 문신 최선에게 왕명으로 '용수사개창비문'을 짓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용수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형상의 용두산 자락에 여의주 부분에 자리하고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금계 황준량,간계 이덕홍선생이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던 곳으로 평소에 선비들의

도학 강마처가 되기도 했고 국란을 당해서는 의병과 승병의 본부가 되기도하고 지역민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였다.

용두산 정상에서 바라본 청량산의 모습

용두산 정상에 있는 제단석

정상석에서 직진하여...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져야 하는데 독도에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칡넝쿨을 헤치고 내려서니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좌측으로는 송이재취구역 표시와 비닐끈을 쳐놨다

600m봉(10:42)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분홍색 싸리버섯도 보인다

안부로 내려선다

아이쿠 무서봐라 겁나서 산에 다니겠나

626m봉(10:52)

좌측 사면으로 내려간다

계속만나는 경고 플랑카드

임도로 내려선다

안동시가 최근에 설치한 듯한 ‘선비 순례길’ 안내판이 있으나 사람들의 다닌 흔적은 안보인다 

완만한 등로를 따라서 걷는다

이곳의 식생대(植生帶)는 갈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안부(10:58)

맥산꾼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안되는 이정표를 만나고 안부를 지나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서 올라가니 593.9m봉이 나온다

593.9m봉으로 오르지 않고 우측으로 가는 뚜렸한 등로가 있다

593.9m봉(11:02) 

593.9m봉 삼각점(△춘양459 / 2007복구)

593.9m봉에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조금전에 헤어진 사면길을 다시 만난다

오랫만에 나산적님의 흔적을 만나는데 허벌나게 반갑구먼

산적두목님과 군이님 잘 사는지 궁금하다

용수재로 향하는 등로는 아주 뚜렸하다

좌측으로 살짝 꺽어지고...

조금을 더 내려가니...

임도가 보인다

용수재(首峴) 삼거리(506m:11:08)

안동시 도산면 매정리와 운곡리 갈현리로 이어지는 임도 삼거리인데 트럭이

다닐만큼 넓은 임도이다...예전에 용두산을 용수산이라 부르기도 했고 용수사란

사찰이 있어서 용수재란 지명을 따온 모양이다

용수재 이정표

ㅜ자 갈림길에서 좌측의 임도로 향한다

좌측 능선이 맥길이나 임도를 따라서 간다

임도를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오늘따라 바람한 점이 없다...만리산에서 아침 식사후 여기까지 걸어왔다.

오늘은 통증도 없고 컨디션도 좋고 기분도 쿨하다...다만 바람의 협조가 없어

물이 많이 먹히고 습도가 높아서 힘이든다

능선에 올라 물 한모금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는데 날파리와 산모기가 엄청 달라든다

등로에서 바라본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雲谷里)의 모습
운곡리는 용두산 자락에 위치하여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상계천이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가며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농촌 마을로 자연마을로는 구례실(운곡,운곡동), 갈골(깔곡), 도실(도곡),
황정 등이 있는데 운곡은 본래 용두산과 국망봉 사이 골짜기가 되므로 구레실, 또는 운곡이라 하였는데, 후에
운곡리가 되었다. 갈골은 갈나무가 많이 있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며 도실은 도서암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황정은 때 갈자리를 만들어 상납하기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문화유적으로 용수사 터가 있다.
급경사의 능선으로 올라간다
542m봉(11:28)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묘지가 나온다
김해김공 묘(11:30)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참봉을 지낸 순흥안씨 묘지로 내려간다
참봉 순흥안공 묘(11:34)
참봉(參奉)이란 조선시대 여러 관서에 두었던 최말단인 종9품직 벼슬로 관상감·군기시·군자감·내의원·
돈녕부·봉상시·사역원·사옹원·사재감·사직서·선공감·소격서·예빈시·오부·전생서·전연사·전옥서·전의감·제용감·
종친부·혜민서·활인서·각릉·각원·각전 등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초기에는 9품관을 두지 않았다가, 1466년(세조 12)
1월 관제개정 때 9품관을 모두 참봉이라 했으며 제릉·전직도 참봉이라고 불렀다 
묘지를 지나니...
갑자기 등로가 보이질 않는다
등로 좌측으로는 용수재 삼거리에서 운곡리로 내려가는 임도가 보인다
경북도립공원인 청량산은 시야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청량산(淸凉山):870m)은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 안동시의 도산면과 예안면에 위치한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며, 일명 소금강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명산이다. 본래 옛지명은 수산(水山)으로
불리워 지고 있었으나 보조국사 지눌(知訥)스님이 백운암을 창건할 시 당시의 제도를 청량(淸凉)이라 한것에
연원하여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안주한 곳의 의미를 갖는 청량산으로 이름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청량산은 12개(6.6봉)의 봉우리를 이루며, 태백산에서 시원하는 낙동강이 이 산의 웅장한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흘러가는 뫼 뿌리마다 많은 신화와 전설이 담겨있다.이 산 속에는 20여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던
유지(遺趾)가 있고 동양의 철학자 퇴계 이황(李滉)이 수도하며 성리학을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淸凉精舍)와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여지고 유리보전(琉璃寶殿), 천하명필로 이름 높았던
김생(金生)이 공부하던 김생굴,최치원(崔致遠)이 수도한 고운대와 독서당,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은신하면서 축조한 산성(山城)과 오마도(五馬道)등 많은 역사적 유적이 있으며,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1982년 8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만한 오르막길


500m봉(11:45)

우측으로 내려간다

안부(11:50)

오르지 않았던 무명봉

다시 봉우리로 올라서 정상에 오르지 않고 우측 사면길로 걷는다

벙커봉을 지나면서...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등로가 보이지 않는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져 내려간다

무심코 걷다보면 알바하기 딱 좋은 곳으로 독도에 상당히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용수재 삼거리에서 헤어진 임도를 다시 만난다

임도(11:53)

임도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간다

갈림길(11:58)

계곡같은 임도를 따라서 내려간다

계곡같은 길을 내려가니 우측에 넓은 임도가 나온다

묘지가 나오고...

계속되는 내리막길

임도(12:05)

등로를 따라서 내려가니 좌측에서 내려오는 넓은 임도를 만난다

안부(12:07)

안부를 지나니 등로 좌측 아래에 잘 가꾸어진 묘지가 나오고 가야할 요성산 능선이 보인다

묘지 윗쪽 능선이 맥길이다

묘지에서 바라본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新坪里)의 모습

신평리는 요성산과 국망봉 사이에 위치하여 골짜기가 많은 산촌 마을로 자연마을로는

두룻골(주곡), 듬벌(둔벌,둔촌), 문평(밧듬벌,외둔), 방우재(방하,방신), 배고개(이현),

범바우(호암), 삼대(안듬벌,대둔,인평), 새터(신기,녹전장,장터), 성천 등이 있으며 방우재는

방우재 고개 밑에, 배고개는 배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고 범바우에는 범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새터는 벌판에 새로 된 신평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신기와 문평의 이름을 따서 신평리라 하였다.

굴티고개로 내려선다

굴티고개(峴:350m:12:10)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와 갈현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2차선 도로가 지난다

주위에는 사과밭을 비롯한 과수농가가 많이 보이며 고개 아래에는 녹전초교의

갈현분교(폐교)가 지금은 민가로 변해 버렸다.

굴현(, 일명 굴티)라고도 불리며 우측의 갈현리쪽의 있는 굴이 있는 굴고개재

밑에 있는 마을로 지명은 갈현리 굴현 마을에서 따왔다

민가로 변해버린 갈현분교의 모습

민가 안쪽에 있는 갈현분교의 교적비

이곳에서 잠깐동안 휴식을 취한다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12:25)

 시멘트 도로에서 좌측으로 오른다

묘지가 보인다

묘지 옆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간다

급경사의 능선에 올라선다

선답자의 낡은 표지기도 보인다

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의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숨이 찬다

갈림길(12:45)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올라서는데 소나무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폐헬기장(12:48)

개념도상에는 이곳에 3등삼각점(△춘양 311 / 2004 재설)이 있다는데

식재한 키작은 소나무가 너무 빽빽히 들어서 있어 찾을수가 없어 포기한다 

멧돼지의 횡포로 등로는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폐헬기장에서 걷어낸 보도블럭이 쌓여 곳을 지난다

복두산(福頭山:503m:12:51)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와 갈현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묘지 1기가 있다.

복두산(幞頭山), 폭두산(幅頭山)이라고 하는데 산이름을 두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첫째는 ‘복두’는 원시어소 불+달로 이루어진 이름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는 원시어소 불+말로 이루어진 이름이라 보는 것인데 이 경우는 ‘복말’의

말→마리→머리를 ‘頭’라는 글씨로 썼다고 보는 것이다

『해동지도』(예안)에는 복두산(幞頭山), 『안동도회좌통지도』(예안)에는 폭두산(幅頭山),

그리고 『대동여지도』에는 '복두산(福頭山)'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다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복두산 표지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우측으로 내려간다

고사목이 갈길 바쁜 산꾼의 길을 막는다

송이가 나오는 지역인가보다

경고판이 산꾼을 겁박한다

495m봉(12:58)

폐헬기장이 나오고 ...

맥길은 우측으로 내려간다

갈림길(13:02)

등로는 좌측으로 급하게 꺽어진다

등로 우측 아랫쪽은  임도가 보인다

낡은 송이막사가 나오고...

김해김공 묘(13:05)

포장도로로 내려선다

도로(13:06)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와 사천리를 연결하는 도로인데 차량 통행은 전혀없다

도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도로 삼거리(13:12)

좌측은 녹전면 신평리 안흥마을 가는 길이고 우측은 녹천면 사천리 사기막골이다

삼거리에서 좌측 신평리로 내려가기 직전에 능선으로 올라간다

도로가에는 갈골마을 표시판이 보이고...

입산금지 표지판이 여러개 붙어있지만 가야할 길이기에 무조건 올라선다

저와 같은 생각이네요

안부(13:15)

등로는 비교적 뚜렸하다

등로 주위에는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무명봉(13:22)

등로 좌측은 장뇌삼 재배지이다

장뇌삼 재배지 노끈을 따라서 올라간다

능선에 올라서서 좌측 능선으로 향한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490.1m봉이 나온다

490.1m봉(13:50)

트랭글 앱에서는 이곳을 요성산이라고 하나 지도상의 요성산은 이곳에서 좀 떨어져 있다.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

계속되는 경고 플랑카드

등로를 따라가는데 경고 플랑카드 땜에 맘이 편치않다

요성산 분기점(13:55)

좌측 능선으로 내려가면 요성산 가는 길이고 맥길은 우측으로 향한다

요성산(曉聖山:481m)은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와 사천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고려 말 충신 김을방(金乙邦)을
입향조로 하는 의성 김씨 삼대종택이 요성산 남쪽에 있다. 『여지도서』(예안)에 "요성산(邀聖山)은 현 북쪽 18리에 있고
용두산(龍頭山) 서쪽 줄기에서 이어진다."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옛 문헌과 고지도에는 대부분 '요성산(邀聖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요성(邀聖)'을 풀이하면, '성인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다분히 유교식 명칭이다. 원래의 산 이름은 따로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요성산은 여러 옛 지도에도 자주 등장한다. 『해동지도』(예안)에도 요성산이 표시되어 있다
송이지역 표식을 따라서 걸어간다
송이채취꾼들이 움막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데 예리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움막쪽으로 맥길을 이 하는데 눈초리가 무서워 480봉과 460봉은 포기한다
들어오지 말라는 표식이 되어 있고 다른 맥꾼들도 이리로 갔는지 시그널이 많이 보인다
조금을 더 내려가니...
묘지가 나온다
계곡같은 안부로 내려서니...
묘지(14:05)
방아재로 내려선다
방아재(364m:14:07)
안동시 녹전면 사천리에서  신평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935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해동지도』(예안)에 '방하현(方下峴)'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예안에서 영주로 가는 길은 방하현을 넘어
영주시 평은면으로 가는 길과, 녹전면 신평리 굴티와 매정리 도마치재를 거쳐 가는 길, 2개의 길이
있었던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옛 예안현 지도들 대부분이 '방하현'을 표시하고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도 한자로 '방하현(方下峴)'과 우리말로 '방하재'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의 이름은
방하재에서 변음된 것이며, 방우재, 바우재. 방현, 방하리로도 불린다 고개의 지형이 디딜방아처럼 생겼다고해서
유래된 지명이다
고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간다
오르막 능선으로 올라간다
등로는 뚜렸하다
무명봉(14:22)
폐헬기장(14:33)
조금을 더 올라가니...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480m봉이 나온다
480m봉(14:35)
조금전에 지나온 요성산과 복두산은 시야에서 멀어지기 시작하고...
우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다른 맥길에 비해서 등로는 뚜렸한 편이다
안부를 지나...
묘지로 내려선다
편안한 등로를 걷다보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안부(15:00)
묘지(15:03)
우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조금을 더 내려가니 묵은 묘지가 나온다
묘지를 지나고...
조그만 봉우리로 내려선다
고속도로(?) 같은 넓은 등로를 내려서니 녹전고개가 보인다
녹전고개(祿轉峴:456m:15:10)
안동시 녹전면 사천리에서 녹전면소재지가 있는 녹래리로 내려가는 비포장 도로이다
녹전면소재지 윗쪽에 있는 고개라 녹전고개라 부르는 듯하다
안동시 녹전면은 동쪽으로 도산면(陶山面), 남쪽으로 와룡면(臥龍面)·북후면(北後面), 서쪽으로 영주시
평은면(平恩面), 북쪽으로 봉화군 상운면(祥雲面)에 접하며, 중앙부의 요성산을 중심으로 북부에는 산지가 많고,
남부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역계천(亦溪川)이 북류한다. 경지면적이 협소하여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우세하며,
사과·배추·무 등 원예작물 재배가 비교적 성하다. 안동~봉화 간 지방도와 감애~구송 간 군도가 지나지만 교통은
불편하며 효잠(孝岑) 마을 송자현(送子峴:효잠재) 고개에 얽힌 고려 때의 황효자(黃孝子) 전설이 전한다
문화재로는 남양사지 3층석탑(南陽寺址三層石塔:경북문화재자료 71), 임씨 효부비각(林氏孝婦碑閣),
이덕홍 사당(李德弘祠堂),
조계서원(鳥溪書院),김방경 묘(金方慶墓), 안동 사신동(四新洞) 선사유적 등이 있다
고개를 돌아 능선으로 올라간다
다시 오르막길
우측으로는 조망바위가 있으나 조망은 전혀 없다
체력이 고갈되는지 힘이들고 발걸음이 느려지는 기분이다
560m봉(15:28)
좌측으로 꺽어져 맥길을 이어간다
이곳부터 우측 능선은  안동시를 벗어나 영주시에 접어든다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는데...
생각보다 머리가 개운하다.
잠시 후 박달산 정상에 도착한다
박달산(博達山:580m:15:35)
안동시 녹전면 녹내리와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봉수산의 북쪽에 위치한다.
현대 지형도에서는 사천리에 있는 산을 박달산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또 다른 박달산이다.
해동지도』(예안)와 『조선지도』 등에 박달산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도들은 박달산과 함께 녹전산 및
봉수도 나란히 표시하고 있는데 이 세 개의 산에 대한 정확한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한데
박달산이란 명칭은 산에 박달나무가 많았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박달산 정상에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등로가 희미하다
相生
갈림길(15:39)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90도 꺽어진다
죽은 소나무가 살아있는 산꾼을 괴롭힌다
등로는 아주 지저분하다...조금을 더 내려가니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산꾼을 반긴다
群木一松
넓은 임도가 나오는데 좌측으로 녹천면소재에서 오는 길과 합류가 된다
능선 우측 아래에는 계곡이 보인다
우측으로 꺽어지고...
안부(15:48)
우측으로 내려가는 넓은 임도를 버리고 직진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등로 우측에는 송이재배지역인지 아니면 약초재배지인지는 몰라도 경고판이 붙어있다
오늘 따라서 산초나무가 유난히도 성가시게군다 
530m봉(15:53)
좌측으로 살짝 꺽어지니...
소나무숲 사이로 철망이 보인다
철조망 옆 잡목이 무성하다
길을 걸을수가 없어서 가지고 온 칼로 잡풀을 쳐내면서 맥길을 이어간다
임도 삼거리(16:03)
좌측 아래에는 사과농장과 멧돼지 사육장이 있고 우측으로 내려가면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 가는 길이다
주시 평은면 오운리는  산지를 끼고 있으며 박달산이 위치해 있는데 자연마을로는 금곡동, 고사동, 평지동,
연당골, 새터, 예고개, 갈분, 외뚜들,  멀래, 서부럼 등이 있다. 금곡동은 골짜기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평지동은 평지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터는 새로 개척하여 생겨진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멧돼지 농장(16:04)
참으로 산을 많이 걸어면서 산에서 야생멧돼지는 간간히 만나지만 워낙 빠른 놈이라 카메라 앵글로 담는 건 실패했다...
하지만 멧돼지를 사육하는 농장은 처음본다 꽤나 많은 멧돼지가 농장 안에서 놀다가 인기척에 도망을 가는 바람에
이곳에서도 앵글에 멧돼지를 담는 건 실패한다
멧돼지 농장 철조망을 따라서 올라간다

멧돼지 농장 철조망을 따라서 올라 가다가 우측 능선으로 향한다
능선으로 올라가니...
돌계단이 나오고...
550m봉(16:08)
550m봉 정상은 폐헬기장이고 식재된 소나무가 빽빽히 들어서 있다
우측으로 내려간다
조금을 더 내려가니...
임도 삼거리(16:11)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에서 봉수산과 용암산으로 이어지는 제도권 등로가 나온다
뭔지랄인지?
산은 그대로 있어야 제 맛이 나는데 인위적으로 데크목 계단을 깔아놨다.
등로가 험하다거나 급경사라면 이해라도 하겠다마는 둘레길보다 더 완만한 등로에다 뭔 지랄을 한 건지...
제발 민초들의 팔을 비틀어 뺏은 祿으로 헛지랄 하지마라 니 돈이면 이 지랄 안할거야
요즘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한 지 알기나 하나...ㅉㅉㅉ
안부에 올라서...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진다
벙커봉(16:17)
조금을 더 올라가니...
또 데크목 계단이 나오는데 평지와 마찬가지인 이곳에다 계단을 설치해놨다
이런걸 두고 개념이 없다고 하는 건 아닌지...하는 짓거리하고는...
조금을 더 올라가니 좌측으로 용암산 가는 길을 뚜렸하고 우측의 봉수산으로 올라서는데
이곳은 문수(내성)지맥에서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용암지(龍岩枝脈)개념도

용암지맥은 옥돌봉을 지난 1211.5m봉에서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로 이어지는 문수지맥이

봉수산(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와 안동시 녹전면 녹래리의 경계점)에서 남동쪽과

남서쪽으로 가지를 쳐 경상북도 안동시 천리동으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30.7km의 산줄기로,

분기점에서 시작하여 천리동에서 그 맥을 낙동강에 넘겨주고 있다.

 

이 산줄기를 따라가면 봉수산(569.6m), 용암산(470.1m), 금학봉(363.9m), 오로봉(343.5m) 등을

만날 수가 있고, 이 산줄기의 서쪽에는 송야천 등이 낙동강으로 흐르며, 이 산줄기의 동쪽과 남쪽에는

낙동강이 흐르는데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 산경표에서는 송야지맥((松夜枝脈)이라 부른다

봉수산(烽遂山:569.6m:16:22)

안동시녹전면 녹래리와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산 남쪽에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일출사()가 있으며 강원도 강릉시의 정동진보다 더 빨리 일출을

볼 수 있어서 해마다 1월 1일에는 다채로운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봉수산 명칭은 조선시대 때 봉수대가 있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예안)에 "봉화가 1곳이니,

녹전산()으로 현 서쪽에 있다. 서쪽으로 영천(, 지금의 영주) 소산()에 응한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를 통해 원래의 명칭은 녹전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에서는 또 일출봉()이란 명칭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일출사가 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는 설, 해맞이 장소로 유명하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한편 지역에서는 박달산()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예전에 박달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10여 분 내려오면 수령 200년의 박달산 신목이 남아 있다. 이로 인해 박달산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해동지도』(예안)을 비롯한 여러 옛 지도를 보면, 이 일대에는 위쪽부터

녹전산, 박달산, 봉수 세 개의 산이 나란히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고증이 필요하다
봉수산 정상 삼각점(24 재설  / 78.7 건설부)
예전에 봉수대가 있었다면 조망이 좋았다는 이야기인데 전망이 꽝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는 용암산으로 이어지는 용암(송야)지맥 분기점인데 문수(내성)지맥에서
갈라지는 새끼지맥인데 용암산쪽은 등로가 아주 좋고 시그널도 많이 붙어 있으나 100km가
훨씬 넘는 형님인 문수(내성)지맥쪽은 시그널도 거의없고 등로도 안 보인다
독도에 상당히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봉수산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묘지가 나온다
묘지를 지나...
우측으로 내려간다
지나온 박달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갈림길(16:26)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희미한 등로로 내려서니 ...
묘지가 나온다
또 다시 희미한 등로가 나온다
진주강공 묘(16:36)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묘지옆 등로로 내려간다
산으로님의 흔적을 만나고...
유인 안동권씨 묘(16:37)
송이가 나오는 곳인가 본다...입산금지 팻말이 보인다
안부(16:40)
안부를 지나니 망가진 송이 움막을 만난다
갈림길(16:41)
우측으로 내려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산꾼을 반긴다
함창김씨 묘(16:45)
묘지를 지나니 안부가 나온다
잡목을 지나 내려서니 사과밭이 보인다
사과밭(16:48)
잡풀을 헤치며 능선으로 올라간다
등로가 거의 보이질 않는다
무명봉(16:51)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로 내려선다
안동권공 묘(16:52)
옛고개 내려서기 직전에 영지버섯을 조금 수확한다
안동권공 묘를 내려서니 봉분이 왕릉만큼 커다란 묘지가 풀섶에 묻혀 버렸다
인동장공 묘(16:53)
옛고개로 내려선다
옛고개 버스 정류장 옆에 예고개 표시석이 보인다
영주시 면에 있는 오운리 오운이란 지명은 마을 주변에 오동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오동나무

오(梧)자에 이를 운(云)자를 써서 오운(梧云)이라 했다고 한다. 오운리는 예고개를 기준으로 남쪽은

오운1리이고 북쪽은 오운2리다.

옛고개 안동쪽의 모습
옛고개에서 안동쪽으로 가서 매점에 들려 캔맥주 하나를 마시면서 안동이나 영주쪽으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물으니 모른다는 대답이다...이곳에서 영업을 하는 사람이 그게말이 되는 얘기인가... 좀 불쾌하기도 하여 영주방향의
휴게소로 향한다 그런데 그때 안동에서 영주로 버스가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는게 아닌가
손을 들고 외쳐도 보질 못했는지 정류장이 아니라서 그런 버스는 가버렸다...난감하다 
옛고개 삼거리(300m:16:55)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와 안동시 녹전면 녹내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구5번 국도와 915번 지방도가
만나는 지점으로 서쪽으로는 안동과 대구방향 가는 길이고 북쪽으로는 봉화, 태백 방향으로 가는
길이고 남쪽으로는 영주와 예천 가는 길인데 생각보다 교통량이 많고 안동과 영주 방향쪽에 휴게소와
식당들이 많이 보인다 높은 고개라 하여 고현(高峴)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한자의 ‘높을 고(高)’자를
‘옛 고(古)’자 뜻을 빌려 옛고개라 한다고 한다
옛고개 영주쪽의 모습
일단 영주쪽 휴게소에서 3대째 닭발집을 운영한다는 식당의 화장실에 가서 문을 잠가놓고
간단하게 샤워를 한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닭발집이 많이 보인다

자료를 찾아보니 20여년 전, 가뭄에 콩나듯이 흙길을 지나가던 트럭의 기사들을 상대로 길가 외딴

함석집에서 술안주로 팔던 닭발이 맛있다고 소문이 퍼져 영주 안동 봉화에서 닭발을 먹으러 식도락가들이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오자 한집 두집 닭발집이생기면서 이제는 '닭발촌'을 이루고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영주가는 버스를 놓치고 영주쪽 휴게소 주차장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3대째 닭발집을 한다는 식당에서 식구끼리 식사를 하고 나오시는 분이
자동차에 시동을 걸기에 쫒아가서 서울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지금막 버스가 가버렸다고 사정을 하니
타라고 하여 영주로 가는데 일부러 방향을 돌려 영주터미널에 나를 내려주고 가신다
영주터미널(17:40)
貴人은 영주터미널 입구에 나를 내려주고 인사도 하기전에 가버린다
이 은혜 세세생생 복 받을깁니다 벌초객들이 많아서 그런지 버스표가 귀하다
지금이 오후 5시 반이 조금 넘었는데 가장 빠른 시간18시 50분에 한 장 남아 있다
얼른 예매를 한 다음에 터미널안 분식집에서 비빔국수로 저녁을 해결하고 커피 한잔을
마신 다음 무료하게 터미널에 죽치고 앉아 멍때리기를 한다 
영주발→동서울행 버스표
18시 50분에 출발한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버스는 원주 치악휴게소를 지난다
버스는 원주로 들어서 만종I.C를 지나 영동고속도로에 접어들면서 주차장으로 변해 버렸다.
영주에서 출발한 버스는 4시간정도 지난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한다
평소보다 배이상  시간이 걸렸다...아! 피곤하다

 

문수지맥 3구간에서 만난  버섯
1, 매화그물버섯
여름철에 혼합림 내 부식질이 풍부한 지상에서 산생 또는 소수 군생하며
조직은 비교적 두껍고 백색이며, 밀가루 냄새가 나고 맛은 부드럽다
2,가죽밤그물버섯
여름과 가을에 산림 내 그루터기 또는 그 주위에 산생 또는 소수 군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발생하며 갓과 대는 짙은 포도주 색이며 두꺼운 부피가
갈라져 국화꽃 모양을 이룬다
3, 노랑다발버섯
봄~가을에 보통 침엽수의 고사목이나 그루터기에서 발생하며 간혹 침엽수 뿐만 아니라
활엽수의 고사목에서도 발견되며 성장 초기에는 자실체 전체가 유황색이고 조직을 씹으면
매우 쓴 맹독성 버섯으로 식용버섯인 개암버섯과 매우 유사함으로 주의해야 한다
4,노랑싸리버섯
늦은 여름과 가을에 활엽수림 내의 지상에 무리지어 발생한다
싸리버섯 중에는 노랑싸리버섯과 유사한 황색을 띠는 싸리 버섯이 많이 있어 혼동하기
쉬우며, 위장 장에 작용하는 독소를 가진 준독성 버섯으로 종종 설사를 하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 치유가 된다 
5, 붉은싸리버섯
늦은 여름과 가을에 활엽수림 내의 지상에 무리지어 발생한다
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버섯으로 전형적인 특징은 신맛이 나고 마르면
분필처럼 부서지는데 준독성으로 오식(誤食)하면 주로 설사를 한다
6,졸각버섯
여름과 가을에 잡목림 내 지상 또는 도로변에서 군생하거나 산생하는 외생균근성균이며
맛과 향기가 부드럽다
7, 볏집버섯
봄에서 여름에 혼합림과 초지 등에서 군생하며 조직은 다소 두껍고 유백색이며 주름살 바로 윗쪽은 올리브 갈색을 띤다...
맛은 다소 쓰며 밀가루 냄새가 난다 
8, 진갈색주름버섯
여름이나 가을에 혼합림이나 대나무 숲 지상에 산생하며 조직은 다소 두껍고 백색을 띠나
후에 옅은 갈색으로 바뀌며 맛과 향기는 부드럽다
9, 노란망태그물버섯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중국, 유럽과 아메리카에 이르기 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하며
버섯의 크기는 10~20cm, 대의 굵기는 2~3cm에 이르며 주로 대나무밭이나 잡목림에서
서식하며 여름과 가을 사이에 볼 수 있다...버섯갓의 내면과 벗섯대 윗쪽 사이에서 망사같은
망태가 퍼져 드레스를 입은 것 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치마가 흰색과 노랑색을
띤 망태 버섯이 있다
10,솜귀신 그물버섯
여름부터 가을까지 숲속의 땅 위에서 무리지어 나며 지름이 5~14cm로 둥근 우산모양이며
표면은 어두운 적갈색의 심한 점액 표피로 덮혀 있지만, 점차 색이 연해진다
살은 흰색 또는 노란색으로 뚜껍고 부드러우며, 갓 밑면엔 처음에 흰색 또는 암자색의 내피 막으로 덮혀있고
, 식용을 할 수 있으나 사람에 따라 복통, 설사를 일으킬 수 있다
항산화, 혈당저하 작용이 있으며, 한방 관절약의 원료이다
11,마른산그물버섯

여름에서 가을철 사이에 활엽수림 또는 침엽수림 내 지상또는 산길에서 소수

군생하며 갓 표면은 건성이며 생장 초기에 융단상 털이 있으나 성장후에는 소실한다 
12,애기흰살버섯
활엽수의 고목나무나 단풍나무에 주로 서식하며 생김새는 반원형으로 겹겹이 발생하고 넓이는 3~21cm까지
자라며 매년 새로운 층을 형성한다 갓 표면에는 미세한 털이 밀생하고 백색, 누런색이나 조류가 발생한 부위는
녹색을 띠며, 관공은 4~7cm의 백색 또는 크림색이며 살은 코르크질이고 식용은 부적합하다
13,황갈색털대구멍 버섯
침엽수의 그루터기나 살아있는 나무의 뿌리에서 주로 균생하며 자실체의 지름이 10cm에 이르며
어릴때는 편평하고 무디고 둥글며 가장자리는 황백색이다가 나중에는 가운데가 약간 들어가고
가장자리는 약간 파형이 되며, 가장자리는 어릴때 보다는 약간 날카로와진다
어릴때는 펠트상으로 미세한 회색 털이 있으나 늙으면 없어지며 짙은 갈색이 된다
갓의 조직은 황갈색으로 해면상의 상층과 섬유상의 하층으로 되어있다.
공구는 담갈색~갈색으로 소형이며 대는 중심생~편심생~측심생으로 짧고 두꺼우며 암갈색~흑갈색이다
14,영지(靈芝)버섯

만년버섯·불로초·지초(芝草)라고도 하며 전면이 가죽 같은 각피로 덮여 있으며 조직은 코르크질로 단단하다.

살은 상하 2층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상층은 거의 흰색이고 관공 부분인 하층은 연한 주황색이다.

표면에 니스 같은 분비물을 생성하여 옻칠을 한 것처럼 윤기가 있으며 동심형의 고리홈이 뚜렷하고 방사형으로

미세한 주름이 있으며. 갓의 표면은 처음에 황백색이다가 점점 짙은 색으로 변한다. 갓의 밑면만이 황백색이고

그 밖의 부분은 다갈색·적갈색·자갈색·흑갈색을 띤다. 갓은 지름 5~20cm, 두께 1~2cm의 부채 모양을 비롯하여

신장형·원형·반원형 등 생김새가 다양하다. 갓의 밑면에 길이 5~10mm에 이르는 많은 관공(管空)들이 1층으로

늘어서 있다. 자루는 단단한 각피에 싸여 곧게 또는 비스듬히 서는데 높이 3~15cm, 지름 1~2cm이며 때로는

자루가 없기도 하다.

 

포자는 달걀꼴이고 2중막으로 되어 있는데 내막은 엷은 황갈색으로 섬세한 돌기가 빽빽이 나 있다.

참나무를 비롯하여 활엽수의 그루터기나 죽은 나무의 땅 부위에 잘 자라며, 때로는 살아 있는 나무의 밑동

또는 뿌리 부근에서도 자생하며 초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자라는데 주로 여름 장마철 무더위에 난다.

요즘에는 참나무 톱밥을 이용하여 재배하는 농가가 늘고 있지만 약효 면에서는 100년 이상 묵은 매실나무의

썩은 등걸에서 자생하는 영지를 으뜸으로 치는데 재배 영지보다 30배 이상의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불로장생의 효능을 가지고 있는 영지는 늙은 매실나무 10만 그루 중 2~3그루 정도에서 밖에

채취할 수 없다는 희귀품으로 진시황이 갈구했던 불로초가 바로 이 영지라는 속설도 있다.

 

또한 영지버섯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태초에 중국의 반고왕(盤古王)이 불사약을 관장하는 신녀(神女)인 서왕모(西王母)의 생일 잔치를 벌이자

신선과 선녀들이 선과·선초를 바쳤지만 영지선녀는 늦게 와서 영지를 바쳤는데 서왕모는 크게 노하여 영지선녀를

천봉산으로 쫓아 버렸는데 그곳에 사는 가난한 청년 강원을 만난 영지선녀는 곧 그와 사랑에 빠져 강원에게

영지를 먹인다.

이를 안 서왕모가 영지선녀를 잡아오게 하자 영지선녀는 잡혀 가기 전에 강원에게 병을 치료하는데 쓰라며 영지균을

전해 주었는데 이로써 인간이 영지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