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운면의 문촌리와 하눌리는 봉성현에 속하였고, 설매, 구천, 두월, 내림리는 영천군(현 영주시)의 임지면에 속하였다.
가곡리와 운계리 그리고 하눌리는 퇴관부곡과 내성현에 속하여 안동부의 관할구역이었다.
1914년 전국적인 부군면의 행정구역을 폐치병합에 따라 내성면 일부, 서면일부, 영천군 임지면 일부를
상운면으로 개편되었다. 면소재지인 가곡리의 자연부락을 까치골(鵲洞)이라 칭하였으며, 상서로운 조수의
"祥"자와 운계리(雲溪里)의 구름재(雲峴)"雲"자를 취하여 상운이라 명명한 것으로 전한다.
가곡1리 인구413명,139호 면적은 209.9ha,쌀이 주산물이며
특산물로는 고추농사로 주 소득원으로 김해 김씨,안동 권씨,경주 이씨, 밀양 박씨, 인천 채씨가 살며
그외 여러 성이 몇 집
살고 있다.
머름골 : 두암골이라고도 하며 약250년 전 안동 권씨 머름댁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고, 1933년
상운초등학교가 세워지면서부터는 학교마을,혹은 교촌이라고도 한다.
묘골 : 안동 권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선조의 산소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묘골이라 한다.
또 학교 뒤골이며 마을 윗쪽에 있는 골이라고 윗골,머름골 북쪽에 장구같이 생긴골이라고
장구맥이 옛날 어렵게 살 때 산전을 일구었으나 지금은 묵는다고 묵밭골 등이 있다.
더느실 : 드느실, 장터, 시장이라고 부른다.
약 200여 년 전 안동 권씨가 개척하며 마을이 더 커진다는 뜻으로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부터 지명을 가곡이라고 했다. 1921년 9월에 면사무소가 운계리에서 옮겨오면서 시장이
개설된 후 "장터"라고 부르며 면소재지 마을로 현재 각종 8개 기관단체가 있으며 195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농촌 생필품 등 유통구조 역할을 했으나 70년대 후반 정부 새마을 운동으로
농로개설과 80년대 후반부터 농촌버스운행 등 교통여건이 좋아짐에 따라 자연 소멸되어 시장역할을 하지 못했다.
1985년 면소재지 농촌 소도읍 사업으로 도로변 상가, 주택 증축,보수 등으로 면모를 일신하여 봉화군의
관문으로 손색이 없다.
도치장골 : 장터마을 뒷골에 소와 돼지 등 가축을 잡는 도축장이 설치되어 있어 도치장골이라 한다.
참새골 : 장터에서 까치골 가는 사이 산기슭에 작은 옹달샘이 있어 물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7년 가뭄에도
인근 민가에서 식수로 이용했으며 지금도 생수로 또 여름철 땀띠와 옻오른 사람들의 치료에
특효한 샘물이라 하여 붙인 지명이다.
까치골.작동 : 약 300년전 인천채씨가 이마을 개척하였고 인천채씨들이 모여사는 뒷산 봉우리모양이
까치가 알을 품고 있는 듯하다고 해서 까치골이라 부르고 있다.
신불동산 : 까치골 마을과 덕골 마을 사람들이 모여 까치골 뒷산 정상에 큰 소나무와 큰 소나무와
큰 바위에(모층교) 칠성당을 모시고 신수를 비는곳이라하여 신불동산이라 하며 지금도
정월달에 인근 주민이 모여서 신수를 빌고 있다고 한다.
그 외 까치골 마을에서 올려다보면 갓을 벗어 놓은 모양의 지형이라고 갓골, 뒷골, 건내골 등이 있다.
가곡2리 인구153명,59호,면적 309.7ha,주산물 및 소득작물은 과수가 주종을 이루며 단양 우씨가
많이 살며 인천 채씨, 평해 황씨, 봉화 금씨, 그와 각 성 11호가 살고 있다.
재궁마을 : 동마.정마라고도 한다.
진성 이씨 재궁이 있어 재궁마을이라고 하며 현재 단양 우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수고개 : 상운에서 봉화가는 지금길이기도 하며 무시무시한 고개라고 불여진 이름이다.
봉우골 : 동마 북쪽에 있는 골로 조선시대 통신시설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에 이웃마을로 국가비상사태를
알리는 봉화를 올리던 곳으로 지금은 그 잔존의 터만 남아 있으며 봉화대가 있던 골이란 뜻으로
봉화골, 봉두대라고 한다.
그 외 동마 동남쪽에 입구가 좁고 안쪽들이 넓다고 붙여진 큰광이골, 점치골 등이 있다.
반송 : 약 300여 년 전 풍산 유씨가 마을을 개척했는데 당시 마을 입구에 큰 소나무가 울창하며 위쪽이
반모양으로 생겨서 선녀가 옥녀봉에 내려와 감주를 먹다가 남은 것을 부어 떨어지는 것을 받아
먹게 되면 이 마을에 선비가 난다하여 그 자리를 빌려 동명으로 하였다.
또 동내 입구에 배를 만들만큼 나무둘레가11m가량 되는 큰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왜정 말엽(1943년)에
일본 정부에서 조선용재로 벌채했으며 당시 전국에서 제일 큰 나무였다고 한다.
또 280여 년 전 단양 우씨가 이주해오자 유씨들은 떠나고 우씨 단일성으로 동쪽마을, 웃반송,
반송의 자연부락으로 집성촌을 이루었고 우진규씨가 1919년 기독교를 받아들여 1925년에 반송교회를
세우고 신문명을 받아들여 타동네보다 개화가 일찍 되었다.
연대고 : 지형이 제비집과 같은 형상이라고하여 제비연자를 쓴 것으로 보아 제비와 연관이 있는 듯 하다.
또한 골안에 약물바위가 있어 옻오른 사람이 씻으면 특효하다고 전하나, 지금은 간이상수도로
인하여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위치는 교회마을 안쪽에 있다.
짐승골 : 웃반송이라고도 한다. 본동에서 상운방면으로 있으며 지형이 "金字"형으로 이루어져 "金生谷"이라고
부르다가 구전되어 오는 동안 짐승곡, 짐승골로 불러오고 있으며 또 옛날에 다래나무가 우거져
짐승이 많이 살았다고도 한다.
뱀재 : 조선시대 안동에서 봉화까지 걸어서 여행할 때 상운에서 봉화 가는 길이 이 뱀재를 지나는 큰 신작로로
지형이 뱀의 형상으로 구불구불하였다. 또 옛날 조선시대 천하술사 남사고는 선친의 묘터를 찾던 중
죽령에서 용의 형상을 보고 찾아왔으나 뱀의 형상이였다고 하는데 남사고의 무덤 전설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탑밭 : 옛날 유명한 풍수학자 남사고의 전설과 연계되며 남사고의묘를 돌탑으로 만들어 놓았으나 현재는
그 흔적이 없으며 과수원으로 경작하고 그 이름만 돌탑이라 불리고 있다. 가곡3리 인구 210명,
70호, 면적 306ha 쌀 농가가 주소득 작목이며 산약도 재배하고 있으며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영월 엄씨, 안동 권씨, 기타 여러 성도 조금씩 21호가 살고 있다.
석능 : 돌이라고도 하며 마을 중심언덕에 회장석으로 된 조그마한 능이 있다하여 석능, 돌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그 자리에 수십년된 소나무가 있었으나 약 8년 전 노거수로 고사되었으며 회장석 묘의
흔적만 남아있다.
동막골 : 석능 동쪽에 시묘를 위하여 막을 지어 3년동안 시묘한 막이 있다고 동막골이라 부른다.
뒷들 : 약 400년 전 엄경걸이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 뒷산 모양이 용이 돌아앉은 형상이라
하여 회룡동이라고 하였으나 그 후 엄경걸과 권유영 두 선비가 안동 북쪽 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후평이라 불렀다.
1920년 엄남술이 예수를 믿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복음을 전파하고 인근 동네 하눌, 운계 등지에서
교회를 세웠으며 1970년대 정부로 새마을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타 이동보다 열심히 마을을 가꾸어
봉화군의 시범마을로 선정되어 1979년 군내 두 번째로 취락구조개선 사업으로 9동의 주택을 개량하는 등
선진 마을이 되었으며 과수, 약초 등으로 주민소득이 상당히 높아 잘사는 마을이다.
중개들 : 1960년대 경지 정리로 면내에서는 10ha의 반듯한 넓은 들로 마을 앞들과 석능 사이에 있다하여
중개들이라 부르며, 1970년대에 정부의 녹색혁명으로 1R66(통일벼 처음 이름)을 처음으로 시작하여
식량증산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UR협상에 따른 대비로 앞선 농사개량으로 자동 하우스 시설영농으로
소득증산에 면내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외 큰마,지그막골,거바위골,앞실,이텃들,백골,조기골 등이 있다.
회룡산약수터 : 마을 뒷산에 있으며 용의 왼쪽 어금니에서 솟아나는 물은 약 300년 전 공동우물로 사용하다가
당시 물깃던 부인이 호랑이에 물려 갔다고 해서 지금까지 밀폐하였다고 전하며 오른쪽
어금니에서 나는 물은 나병치료도 했다고 전하며 요즘도 조금씩 나는 물은 피부병에 특효하다고 한다.
운계1리 인구 137명, 인구 60명, 면적 298.6ha 주로 고추농사가 주소득 작물이며 특산물로는
과수(사과) 농사도 많이 짓는다.
진주 강씨가 많이 살며, 경주 이씨, 경주 최씨, 김영 김씨 그 외 각성 22호도 같이 살고 있다.
소야 : 약 500년 전 안동 권씨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그 후 안동군 북후면 물한동에서 진주 강씨가 들어와
살면서 안동 권씨는 봉화닭실로 떠나고 현재 진주 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산다.
약 300여년 전 이 마을에 가뭄이 극도로 달하여 기우제를 올리니 비가 내려 농사가 대풍년을 이루었다
하며 소야라고 하고 운계1,2리 합하여 골이 많아 열두(12)소야라고 한다.
조선시대, 일제시대는 안동-봉성(봉화의 옛지명)간 큰길로 관통하는 길이였으며 본동은 골마, 버드나무골,
봉우골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강대봉이 일찍이 예수를 믿고 1957년에 운계교회를 세우고 주민계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착골 : 밤실 윗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의 언덕 모양이 완만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완만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온순하게 하고 자손들의 번성과 곱고 착한 마음을 비는 뜻에서 착골이라 하였다 한다.
탑골 : 탁괴라고도 하며 본동 남쪽으로 정확한 전래는 알 수 없으나 이 폐탑은 고려시대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왜정시대(1941년 경)상운 주재소(지금의 지서)순사와 면장이 탑속 에 있는 문서를 가져갔다고 하며 그
내용은 알수 없으며, 또 150여 년 전 진주 강씨가 여러집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농경지이다.
1994년 경북 문화재 자료 제238호로 지정된 것으로 보아 옛날에 절터로 추정되나 현재는 논 뚝에 서 있다.
구름재 : 옛날 안동부사가 봉화 행차 때 예고개재(평은면 오운리)에서 북쪽을 쳐다보니 산세와 경치가
아름답고 상서로운 구름이 가득차 있어 급히 말을 달려 50리를 와보니 재가 10리길(상운면 소재지에서)
이었으며 이 재를 넘을 때 갑자기 소나기 구름이 덮혀비를 피하기 위해 급히 말을 몰아 재 위로
올라갔으나 구름이 말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하여 구름재라고 하였다고 한다.
상운의 명칭도 상서로운 상자와 구름재의 ?만㎰樗美? 따서 상운면이라 칭한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봉고 : 소야 오른편골로 운계 문촌간 봉화산(해발200m)에 있으며 옛날국가 긴급사태를 알리는 봉수대가
있던 산밑 마을이라하여 봉화골,봉우골이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봉수대 터만 남았고 진주 강씨
10여호가 살고 있다.
우렁당 : 원당 위쪽 밤실 입구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로 동네 당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지금은 약200년 묵은
느티나무(당나무)열두 그루가 있으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수해로 인해 당집이 물에 떠내려갔으며
그 속에 보관 중이던 방울이 함께 떠내려가 운계2리 안마(더느실)에서 빨래하던 여인이 주어서 장롱
속에 깊이 감췄다가 당집을 새로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원당 : 약500년 전 경주 최씨가 마을을 개척하여 살던 곳으로 해마다 정월 그믐날 그해 모든 재앙을 물리치고
소원성취를 위해 연못에 당집을 지어 재를 올렸다 하여 원당이라 하고 현재는 경주 최씨15호가 살고 있다.
그외 주로 밭이 많고 어려운 시절에 죽 한 그릇에 밭을 팔고 샀다고 하는 주내밭골, 덕구재, 큰갓꿈, 물개자리,
짝짹골, 애들머리, 웃게, 갱투골, 고랭장골, 밤실, 말고개재, 비늪골, 풋구재 등 여러 골이 있다.
수박골 : 원당에서 상운방면 500m지점 왼쪽에 위치한 골로서 빈소에 상을 차려서 수박을 차려 놓은
형상이라고 하여 불려오고 있다.
비늪골. 비능골 : 수박골 건너편 골로서 빈소를 차려 놓은 형상이라 하기도 하며 능이 없는 골이라 하여
비능골.비늪골이라고 한다는 설이 있다.
운계2리 인구234명,89호 면적 39.2ha 고추가 주산물이며 특산물로는 사과농사를 한다.
김해 김씨, 영양 천씨, 밀양 박씨, 안동 김씨, 영월 엄씨 외 각 성 몇 집씩 살고 있다.
더느실 : 안마 익곡이라고도 한다. 운계리와 가곡리에 걸쳐 있으며 약 300여 년 전 전성 김씨가 개척하였다고
하며
본래는 면사무소가 있었으나 1921년에 가곡리 현재 자리로 이전하고 마을의 터가 넓고 발전될 전망이
밝아 번창하리라 하여 더느실 또는 익곡이라 하였다. 또 다른 유래는 백암선생의 묘자리가 학이 앉은 형태라
하여 더느실이라 하였으며 상운장도 옛날에는 더느실장이라 불렀다.
괴별, 오시레미, 소야 등 골짜기가 모이는 곳이라 하여 익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빗전모퉁이 : 마을 입구에 백암 선생의 비각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
당집골 : 운계1리 우렁당에 있던 방울이 수해에 앞개울로 떠내려오는 것을 여남이라는 부인이 빨래하다가
주워 보물같이 장롱 속에 보관하였다.
하루는 여씨 부인 꿈에 "내가 아무곳에 있던 서낭인데 당을 모셔라"하여 당을 짓고 방울을 보물같이
모셨으며 그 후 50세가 넘도록 아기를 못 낳던 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며 훗날 양쪽 가정이 크게
번창하였다고 전해지며 매년 정월 대보름날 당제를 올렸으며 당제에 성의가 부족하면 재난이 잦아
재차 올리기도 하였다.
현재 이 방울은 선성 김씨 제사 김용해씨 집에 보관중이고 옛날 더느실 장을 세울 때 이 서낭을
모셔다가 장을 세웠고 수십 년 동안 시장 상인들이 돈을 거춰서 제사를 지냈다.
이 당집골 안이 넓고 고요하며 장소가 좋아 근간에는 인근마을에서 화수회 등 놀이터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오시레미 : 일명 오사음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다섯 선비가 벼슬에 나가지 않고 글 공부만 하였다는 전설이 있고
마을형태가 까마귀 집같다고 오소음이라고 하였다가 구전이 변하여 오시레미라고 전하다.
장승백이 : 옛날 안동에서 봉성현(봉화)으로 가는 길몰 당집골 입구에 있으며 봉성 향교에서 십리를 알리는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괘별 : 일명 괘성이라고도 하며 약 300년 전 영월 엄씨, 영양 천씨가 개척하였으며 높은 지역에 위치하여 마을
모습이 마을 뒷산에 별이 걸려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괘성이라고 불렀으며 영양 천씨가 많이 살고 있다.
청고개 : 옛날 나무가 무성하고 인가가 없어 도둑이 많았다고 하기도 하며 또 봉화 군수가 목사 행차시 청하러간
고개라고도 하며, 청고개 재에 올라서서 보면 예고개까지 선명하게 보인다고 청골개라고 한다.
그 외 지금은 상운-문촌간 도로확장으로 깨지고 없지만 옛날에 바위형상이 범이 입을 딱 벌리고 있는
형상이라고 입범바위, 모든 골이 이름이 있으나 이 골만은 이름이 없어 고심 하던 중 사람들이 올해
새로 이름지었다는 올방골, 운계 남쪽에 우물이 많아 물이 풍부하여 농사가 잘 되고 인심이 후하다고
수듸 또는 수등이 골안에 밭이 산골로 뻗어 있어 꼭 디딜방아처럼 생겼다고 발닥골 또 검등골, 합정골,
사부랑이골, 머득골, 딱골, 뱀골, 송골 등이 있다.
장바우골.장암곡 : 골안에 큰 바위가 있는데 옛날 큰장수가 이 바위를 밟고 지나가서 발자욱처럼 생긴 모양이
바위에 있어 장바위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바우골 뒷산에는 일제시대에 운계1.2리 주민들의 공동묘지가 약 300기 정도가 안장되어
있으며, 이래서 일명 공동묘지라고도 한다.
괘별에서 상운방면 300m 지점 우측편에 위치한 골이다.
문촌리 인구286명, 97호, 면적 892.2ha 주로 농사이나 특산물로는 고추를 주소득원을 이루고 있다.
봉화 금씨의 시향지로 제일 많이 살고 전주 이씨, 평택 임씨, 진주 강씨, 안동 권씨 등이 몇 집 같이 살고 있다.
기촌 : 문촌 중심 마을로 550여년 전 동래공 금휘 선생(1435-1495)이 골안(고리안)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후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여 많은 선비가 배출되었으며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마을이라 하여
문촌이라하고 봉화 금씨 집성촌이다.
유형문화재 264호 종선정과 유종개 장군의 충신각 삼기당 금시양 선생의 위령비가 있다.
곳집 모퉁이 : 상여를 넣어두는 집을 일컬어 붙인 곳이다.
이 상여는 동래공 금휘 선생께서 충청도의 양전도경차로 계실 때 돌아 가시자 임금이 예관을
보내어 호상토록 할 때 특별히 하사한 것으로 조각이 정교하여 예술적 가치가 높았으나,
상여이므로 마을 사람들이 가까이 하는 것을 금하여 한적한 곳에 곳집을 지어
보관하여 장례 때 사용하였으나 1990년 6월경에 도난 당하였다.
특히 피리부는 총각, 처녀, 말탄동자, 메뚜기 등이 정교하였고 곳집 앞에는 옹기굴이 있었다.
사당골 : 동래공 금휘 선생이 사당이 있어 붙여진 골이다. 사당에는 임금이 선생에게 하사한 곤룡포가 보관되어
있었으나 걸인이 침입하여 곤룡포를 덮고 죽어 있어 버렸다고 한다.
충신각 :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유종개 장군의 충신각이 있었다. 충신각은 안동묘에 옮겨졌고 1964년
삼기당 금시양 선생의 처사각을 고지바위(고암)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다.
송실 : 종선정 옆에 큰 소나무 세 그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된다. 맨 아랫쪽에 있던 소나무는 적암공
금재순 선생(1545-1611)이 심었다고 하며, 1950년대에 베어졌다고 맨 윗쪽에 있던 소나무는 매년
단오 때 그네를 매던 동수였으나 1986년 솔잎흑파리 피해로 고사하고 현재 12그루가 남아 있어
(수령350년, 높이 20m,둘레 3m) 면나무 11-29-9-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안동묘 : 종선정 건너편에 있는 작은 등성이며 당초에는 종선정 옆 산등성이와 연결되어 있었으나 마을에 온
중(스님)을 몹시 괄시하여 보내자 이에 앙심을 품고 산등성이를 끊어 하천을 내면 동네가
잘 된다고 하여 그렇게 하자 학 3마리가 날아가 버려 그 후 마을이 쇠퇴 했다고 한다.
안동묘는 이때 생긴 조그마한 산으로 성황당이 있어 매년 정월 대보름 자정에 동네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신제를 지냈으며 1980년에 밖 안동묘에 있던 충신각을 이곳으로 옮겼다.
사고터 : 태백산 사고가 생기기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으로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지금은 부녀자들의 화전놀이터로 간혹 이용되고 있다.
마장들 : 옛날 봉성현 역마를 사육하던 곳이다. 또 사고에 관원이 올 때 타고온 말을 메어두던 곳이라고도 한다.
학생못 : 대청바위 아래에 학이 살던 곳이라 하여 학생못이라 추측한다.
대청넘이 : 종선정 좌측 얕은 등성이 넘어 있는 들이며, 높은 바위에 비봉대라는 각자가 있다.
뒷골 : 큰마 앞쪽 음지마, 뒤쪽으로 봄이면 외가리가 날아와 장관을 이루고 있어 군내있는 유일한 서식지이다.
승무지 : 성지미라고도 한다. 옛날 지라는 고승이 이곳의 산세를 살펴본즉 천하명당이라 너무 기뻐서 둥실둥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큰정지미,작은정지미가 있다.
부채등 : 마을 뒷산이 부채 형상이며 정상에는 큰바위로 되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산꼭대기 바위가
험하게 생겨서 마을에 젊은 사람이 죽는 참상이 많아 바위를 부수었다. 고 한다.
부채등 중간지점에 옻불탕이 있어 옛날에는 문둥이 치료에 특효하다고 하여 많은 환자가 몰려오자 마을에서
개를 잡아 물 탕에 넣은 후 효험이 없어졌다고 하며 지금도 피부병(옻 등)에 씻으면 잘 낫는다고 한다.
가뭄이 심해도 수량은 변함이 없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이면 망월놀이와 연날리기도 한다.
가시골 : 가시나무가 많다고 하며 100여 년 전에은 60여 호의 큰 마을이 있었다고 하고, 일설에는 이 계곡의
물이 나쁜 곳이 있어 이 물을 마시면 문둥이가 된다고 하였다. 10여년 전까지 두세집 있었으나
지금은 한집도 없고 산림만 울창한 매우 깊은 골이다.
사부랭이골 :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신라태자가 넘었다는 신라재 옆에 있으며 태자를 수행하던 사부랑이나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듯 하다. 또 작은 사부랭이골도 있다.
쿵자지골 : 신라골 안쪽에 있으며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신라 태자가 행차할 때 북치고 쿵짝거리며
지나가던 곳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라 추측되며 옛날에는 인가가 있었고 석굴이 있어 피난처로도
이용되었으며 일명 궁자지골, 군자지골, 준자지곡으로도 불리운다.
신라골 :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태자 내령군(봉화 옛지명)에 왔다가 아름다운 처녀와 사랑을 하게
되어 같이 서라벌로 돌아갈 때 이 재를 넘어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산중턱에 이쓴 약물탕은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
그외 변소같이 생겼?鳴? 통시골, 송구 벗겨먹뎐 송구대밭골, 꿩이 많이 살고 짐승이 많아 사람이 다니지
못하였다고 생치골 또한 안동묘에 있는 성황당 앞에 있는 곶감같이 생긴 바위를 곶감바우, 종선정
뒤쪽에 있는 정자등, 동래공 종택 뒷편에 있는 들이골, 저녁에 달뜨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다고 달기리,
봉황이 날아드는 형상이라하여 비봉대가 있는 비봉산, 골이 가마솥 형상이라하여 가매골, 큰 보가 3개
있다고 봇들,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는 토기를 굽던 골이라고 정골, 아름다운 새색시가 나물 뜯으러 갔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애달픈 사연이 있는 색시골, 산딸기인 멍두딸이 많다고 멍두골, 왜정시대 금광이
있었다고 금정골, 석이가 많이 난다고 석이바위골, 굴바위골, 숫돌이 많이나서 숫돌장수가 모이던 숯돌목,
숫돌목, 숫돌목에서 명호 고감리(골안) 삼거리로 가는재가 길어서 한나절 넘느다고 진송이재 등이 있다.
구진벨 : 구진이라고도 한다. 기촌에서 이 마을까지 오는데 냇물을 아홉번 건너야 한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낭떠러지 위에 길이 있어 구진벤달, 구진벨이라고 한다. 또 마을 뒷산이 큰 개가 새끼를 품고
누워서 젖을 먹이는 형상이라고도 하며, 옛날 구진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라고도 하며, 현재 김동대씨
집에는 절탑의 밑부분이 있으며 근처 밭에 오래된 기와 조각이 보인다.
묵노골 : 약 130년 전 평택 임씨가 개척하여 살던 곳으로 묵은 밭이 많다고 붙영진 이름으로 교통이 불편하며
산비탈에 다섯집의 각성이 살고 있다. 그외 옹기를 만드는 좋은 흙이 많이 나며 묵노골 뒤쪽에
있다고 뒷골, 골이 좁아 흙탕진다고 흘트골, 변두리에 있다고 갓골, 골이 깊고 옹기골이 있어 깊으실,
산이 불툭 튀어나오고 숲이 많아 범이 자주 나온다고 범돌이, 범등 등이 있다.
기프실 : 운계와 문촌의 경계에 집단부락을 이루고 있으며 지형이 깊은 골 안에 위치한다고 깊으실이라 하며
윗동네는 웃기프실, 아랫동네를 아릇기푸실이라고 하며 기프실앞 상운-봉성간 군도변에는 수령이
약400년 가량되는 느티나무가 있어 군 보호수(11-29-13)로 지정되었으며 1931년까지만 해도
7집 있었으나 이농현상으로 한집도 살고 있지 않다.
갈고 : 웃기촌 서쪽 산허리에 100여년 전에 촌락에 형성되었으며 특히 칡이 많이 나는 골이기도 하며
검성골과 웃기촌과는 갈라지는 곳이라 하여 갈래골, 갈골이라고도 부른다.
개척 당시 김해 김씨가 몇집 살고 있으나 지금은 경주 김씨 등 7가구가 살고 있다.
갈골 뒤쪽에 옛날에 커다른 우렁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그 밑에 여우들이 많이 살았다고 우렁바우골,
샘물이 기막히게 좋아 샘골, 갈골 윗쪽에 있다고 웃갈골,도장골,바당골,베신데이,장구 목 등이 있다.
웃기촌 : 기촌 위쪽에 있으며 상기촌이라고도 한다. 현재 경주 김씨 집단부락으로 주산물은 수박,고추 등으로
농사지어 인근부락 중에서 부자마을이라 일컫는다. 1962년 문촌국민학교가 설치되었으나 농촌 인구
감소로 1988년 폐교되어 학교 건물은 현재 동성섬유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치골 : 서창골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춘궁기 구휼곡 창고(나라에서 봄에 백성에게 식량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는 일)가 있던 자리라 한다.경상감영에는 이러한 창고가 몇군데 없었다고 한다.옛날에는 3집이
살았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검성골 : 마을 모양이 성을 쌓은 듯하고 약 400여년 전 봉화 금씨가 처음 정착한 곳이나 지금은 여러 성
15가구가 살고 있으며 특히 검소한 생활을 한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금성골 : 봉화 금씨가 터를 잡았다하여 부른 지명이리고도 하며, 지형이 비단같이 산세가 수려하여 금성골이라고
전하며, 또 옛날 안개가 뿌옇게 끼어 인적이 드물었으나 어느 날 수염을 가진 노인이 자리를 잡고 살아
사람의 왕래가 생기므로 골을 하나더 얻었다는 득골도 있다.
새터 : 신기라고 하며 200여 년 전 웃기촌에 살던 인동 장씨들이 새로 자리를 잡으니 그 곳을 새터라 했다.
장씨 문중의 장복우씨가 일찍 예수를 믿어 김종숙 목사와 함께 1908년 교회를 세워 신문명을 전파하여
개화가 일찍된 곳으로 교회역사는 86년으로 봉화군내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 깊은 교회가 있다.
무진장 : 무진장재가 옛 신라시대부터 있어 봉화 금씨가 제사를 지냈다고 하여 무진장으로 동네이름이 불리워졌다고
하며 신라시대 사찰이 있으며 경내에는 3층 석탑이 있으며 1963년도 경내에서 4cm가량의 소형 청동제
불상이 출토 되었으며 무진장재 현판이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자료 152호로 지정되었다. 또 무진장 뒤에
있다고 뒷실명바골, 말꼬리 형상의 마가미골, 등골 등이 있다.
하눌1리 인구159명,71호, 면적 340.7ha 쌀농사가 주산물이나 고추,수박 등 특수작물을 재배 하여 주소득원을
이루고 있으며 경주 최씨가 많이 살고 청주 한씨,안동 장씨, 충주 지씨, 청송 심씨 등이 살고 있다.
신기 : 서기 1500년경 최재형이란 선비가 개척하여 신기라 불렀으나 그후 최찬술이 후평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북평이라 개칭하였다가 그후 다시 신기라 부르고 경주 최씨, 청주 한씨, 인동 장씨 등 30여호가 살고 있다.
1969년 하눌국민학교가 설치되었으나 농촌 인구 감소로 하눌분교로 격하되었다가 폐교되고 지금은
상운초등학교로 통학버스를 이용하여 공부하고 있다. 또 골이 깊고 뒷산이 높아서 고산골, 개척 당시
새집지었다고 새집골, 배뱅이쑥이 많이 난다고 배뱅이골, 고개길이 구불구불하며 꼭대기에도 샘물이
솟는다고 수티재, 예수바우골, 가래나무가 많이 자생한다고 가래골, 용수골, 자재기골, 황새골 등이 있다.
산정 : 서기 1700년경 안동 권씨가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할 때 퇴계 이황 선생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목이 말라
길 옆 우물물을 마신 후 산중의 물맛이 아주 좋아서 산정이라 하였다 한다. 마우골 : 산정 남쪽에 200여년 전
청송 심씨가 개척하여 한곳에 산다고 마우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충주 지씨, 청송 심씨 10가구가 살고 있다. 옛날부터 우물도 없고 개울도 없어 매우 건조한 땅이라서
건재, 옛부터 샘이 좋아서 세네미,역시 찬물이 많이 난다는 참새미골,도적이 많았다고 도장골,그리고 언골,
재궁골, 셋골, 땅골, 세네골, 웃산너머 동래골이 있다. 하눌2리 인구155명,57호,면적 280.2ha 고추농사로
주산물을 이루고 주소득원이 된다. 강릉 최씨, 평산 신씨, 김해 김씨, 경주 이씨들이 살고 있다.
개밑 : 포저라고 한다. 200년 전 강릉 최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당시 옛고을이 가깝다고 개밑 또는
포저라 하였다고 한다. 하눌 회룡산 아래 관음사(조계종)라는 절이 1949년에 박연수씨가 설립하며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또 모든 지역이 산을 막혀 있고 들이 있는 골의 형상이 사람머리 정수리의 가마와 같다고 해서 가매골,
중이 도를 닦으려고 산중턱에 앉아 있는 형국의 중골(스님곡),회룡산이 있는 들을 찾아 돌아간다는
갓골,또는 회룡골, 바다같이 넓다고 바다골, 수평골 골이 넓지도 좁지도 않다는 진골,이터,큰골 등이 있다.
오로실 :오곡 또는 이나실이라고도 하며,동으로는 봉성면 외삼리,북으로는 봉성면 창평리에 접경하며
오동 나무가 많아서 오골이라고 하고 5집이 산다.
하눌저수지 : 면소에서 약 7km북쪽에 있으며 봉성면 외삼리와 인접하여 1985-1990년 12월까지 9억 8천만원의
공사비로 저수면적 8ha,저수유역 면적 380ha,저수량 364,992㎡ 봉리면적 50ha의 농업용수로
인근지역의 수해와 가뭄을 조절하여 재해를 막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1996년도 사업비
3억원을 조성, 암반관정 4기를 설치하여 담수능력 3억6천4백 만톤을 확보하여 수질 개선으로
인근 낚시객을 유치 주민 소득증대에 기여코자 확장 공사를 하고 있다.
그외 갓밭골, 배골, 삼정골, 담배밭골 등이 있다. 토일리 인구 158명,56호 면적 565.2ha
고추농사로 주산물을 이루고 주소득원이 된다. 특수 작목으로 담배농사도 많이 짓는다.
옥천 전씨, 안동 권씨, 무안 박씨가 살고 있다.
토일의 지형은 산에서 해가 돋는 모양이 불개가 해를 먹었다가 토하듯 한다고하여 불린 이름이며 마을
모양이 길다랗게 통 같다고하여 그렇게 부르기도 하며, 지형이 날일자 모양으로 생겨서 그렇다고도 한다.
또 조선조 효종왕때 옥천전씨의 전시천 선비가 개척시거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퇴일하여 산다는 뜻으로
퇴일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상토 : 자연부락 중 윗쪽에 있는 마을로 한티재를 뒤로하여 산밑 경사지에 형성되었으며 1970년대까지도
60여 호가 살았으나 근간에는 안동 권씨 16호만 살고 있다. 한티재 : 상토에서 상운, 가곡, 봉호 등지로
가는 지름길로 크고 높은 고개라고 하기도하고 뒷골이라고도 한다.
부종골 : 마을 뒷골중 작은골로 마을과 돌아져 있어 일제 때 마을 진흥 종합에서 종을 쳐도 들리지 않는다고
불려진 골이다.
팔인봉 : 쉽게 파리봉이라고도 한다.
상토 앞으로 해발 496m의 높은 봉우리로 옛날 천재개벽할 때 여덟 사람이 피신하여 살았다고 불리워진
이름이며 산 정상에는 헬리콥터 착륙장이 설치도어 있다.
지무실 : 골이 지루하게 길다고 생긴 이름이며 옛날에는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지분거린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는 말도 있으며 그외 한티재 오르는 뒷골 중 크다고 큰골, 호랑이가 자주나와 지분거려
한집도 없이 망했다고 망태골, 무쇠가마솥을 만들던 정골, 베짤 때 쓰던 도투마리 같이 생겼다고
도투말이골, 삼을 많이 심는다고 마골, 옆골절에 가기 위하여 말을 매어두기도 하고 기르던 골이라고
마골 등이 있다.
중토 : 자연 부락중 중간에 있는 마을로 옥천 전씨와 안동 권씨 등 13집이 살고 있으며 UR 농산물 국제경쟁력에
대비하여 상운면내에서 최초로 최신 자동하우스 시설 600평과 시설채소 등으로 선진 농업을 경영하는
앞서가는 농촌 마을이다.
여우목재 : 운계,상운장터로 나가는 토일 진입로이며 옛날에는 여우가 자주 나타났다고 하여 여우목재,
여수목재라고 한다.
도기재 : 중토에서 구천리 도기로 넘어 다니?? 재로 고개마루에 사갓모양의 큰 소나무가 있어 일명
삿갓재라고도 하나 진입로 확장 때 베어지고 없다. 그외 뒷골 전체를 뜻하고 골이 개미형상을 한
개미네,가미네, 옛날 상을 당해서 3년간 곡하여 시묘하뎐 사람이 있던 골이라하여 빈소골,
여우목재 오른쪽 골이 깊게 굽어져 있다고 꾀남실 등이 있다.
신토 : 가장 늦게 형성된 자연부락을 신촌이라고도 한다.
산들 등지고 길다랗게 남향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무안 박씨 등 23집이 살고 있으며 김화중씨가 헌신 노력하고 있다.
싸근절 : 신토 아랫쪽 뒤골로 절이 골양쪽에 있어 생긴 이름이며(1992년도에 석불이 출토되었음)바위가 대장간
풀무같다고 불미실이라고도 하나 1970년에 농로확장공사로 인하여 깨져 없어졌다.
토마령 : 도마티라고도 한다. 구천에서 신토마을을 지나 안동시 녹전면 매정리로 통하는 도로상의 군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로 안동 도산에서 영주,순흥 등지로 인마가 왕래하던 큰 길이였으나 지금은 농로로만
이용되고 고개가 높고 물이 없어 도마령에 모심기 마치면 온 나라가 모심기 마쳤다는 말도 있다.
그외 물고기 같이 생겼다고 어동골, 옛날 전염병 환자들을 결리수용했다는 옘뱅골, 바위가 여우같이
생겨서 예끼 바우골, 골무같이 생겼다고 골무재골, 옛날 조사의 묘를 찾으로 도마령에 오르다
마을사람들에게 물으니 마침 매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방향이라고 가르켜 주었다는
매방골도 있다.
하토 : 토일리중 제일 아랫쪽 자연 부락으로 물고기가 알을 낳는 형상이라고 어란이라고 하며 옛날에는
어리석은 사람(착한사람)이 산다고 우촌이라고도 하다. 옥천 전씨외 여러성으로 구성된 16집에
살고 있으며 UR 대비 농산물로 축산(한우사육)으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1970-1965년에 걸쳐
하토에 흑연광산이 생겨 영주 제련소로 반출이 되었으나 흑연의 질이 좋지 않아 폐광되고 지금 굴은
무너지고 근처에 검은 흙만 남아 옛날의 흔적만 있다.
막지고개 : 하토에서 녹전으로 통하는 고개로 옛날 봉성 감영에서 안동으로 가는 마지막 고개라고 붙인
이름이며 마지막 간다고하여 가마나 상여가 넘지 않았던 고개라고도 한다.
그 외 솔이 많아서 솔고개,뒷골이, 등처럼 오르막이 있다고 등골 등이 있다.
구천리 인구179명, 80호, 면적 648.4ha 쌀농사가 주산물이며 근간에는 고추농사로 주소득원을 형성하고
있는데, 특히 이 지역은 당근이 잘되는 토질로 과육이 연하고 선홍색으로 그향이 독특하여 고추농사와
버금가도록 확대 경작하고 배추농사도 많이 짓는다.
귀네 : 큰마리라고도 한다. 원명은 구천이며, 옛날에는 이천,조천이라고도 했다.
약 450년전 옥천 전씨 야옹공 진사 응방이 개척 시거하여 앞 개울에 거북형상의 큰 바위가 있어
구천이라고 쓰고 귀네라 불렀다.
그러나 일제가 마을에 들어모면서 일본 헌병대 주재소(요즈음 경찰지서와 같음)가 설치되고 우리민족의
정기를 꺾는다고 거북바위를 파괴하고 龜川을 九川으로 고쳐서 행정구역을 설정하여 지금은 그 바위의
흔적이 없어졌다...그리고 웃마 천방둑에는 약 300여 년된 노송이 20여 그루가 이루고 있어 지나가는
길손들 마음의 정취를 한껏 돋우고 있다.
야옹정 : 全氏종택 옆에 있으며 진사 야옹전응방 :1491, 성종 22년-1554년,명종 9년이 조부이신 단종절의신
휴계 전희철선생의 유훈을 받들어 관직에 뜻을 버리고 이곳 구천에 은거하여 정자를 세우고 도덕과
학문을 수련하고 평소 교분이 두터운 퇴계 이황과 도학을 강론하였다.
지월당과 장춘오 편액은 퇴계선생이 쓰고 야옹정 편액은 승지 이일삼이 썼다.
현재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자료 15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구산서당 : 웃마 등성이에 세워졌으며 귀암 전수동(1791, 정소 15년-1862,철종13년)이 문장과 덕망이
겸비하여 문중제족과 힘을 모아 후학양성을 위하여 건립된 서재이며 많은 후학을 배출했다.
그후 귀암공 5대 주손 전경우가 중심이 되어1994. 9. 29자로 지방문화재 자료 2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문동천 : 큰마에서 도기가는 길 오른편에 큰 바위들이 양족에 마치 출입문 같이 생겼으며, 그 안공에 들어서면
아늑한 골안에 동쪽 하늘잎이 맑게 보여서 옛날에는 정자와 연못이 있어 많은 시인 묵객이 거쳐 갔으며
퇴계선생도 여기에서 시짓고 글짓기를 즐겼으나 지금은 연못의 흔적만 남아 있다.
그 외 마을 건너편에 밭이 많은 골이있어 남밭골의 어원변천으로 남박골, 골안의 산세가 곱고 훤하여
분통 같다고 분통골,골안이 큰고 넓다고 광대골, 병풍 두른 듯한 훼방골,산등성이가 마치 어린아이를
업은 듯한 업은골, 골안사람들이 어리석기는 하나 착하게 산다고 우직이, 정월 대보름 달맞이 하는
망월장등이, 또 도장골, 먹골, 일레방골 등이 있다.
도기 : 옛날 도자기 굽던 굴이 있었다고 하며 아주 옛날에는 오치실이라고 부르다가 도개라고 불렀는데,
구전되었오면서 도기라고 부른다. 또한 마을 모양이 오목한 도자기 같다고하여 도기라고 부렀다고 한다.
격양당 : 격양당전시천(1647,인조 25년-1699,숙종25년)이 당세 거유로 일찍이 관직에 뜻을 버리고 심산심곡을
찾아 토일리에 정자를 세워 학문을 수련하던 서재로 당대의 학덕이 높은 선빌들과 교유한 창수록과
격양다운 등 많은 유고를 남겼다. 1980년에 후손들이 이곳으로 이건 하였다.
회랭이 : 옛날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이 많이 피었다고 호련이라고 불렀던 것이 현재의 회랭이로 어원이 변한 것 같다.
석문동천 건너편에 있는 골이기에 석문동천 정자에 모인 선비들이 건너산 밑의 호련을 보고 글을 짓던
연관된 곳이라고 짐작된다고 한다.
그 외 소죽통같이 길죽하게 생긴 골이라서 통박이라 부르는 통백이골, 도기마을 뒷재가 삿갓같이 생겼다고
삿갓재, 옛날 고개길 양쪽에 소나무가 많았다고 솔고개,골안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못(소류지)이 있다고
큰솔, 작은도기 넘어 돌아간다고 도래골, 고개가 길어서 장고개, 골이 깊고 등성이가 높아 어둠이 빨리든다는
검은들, 작은 도기 등이 있다.
방골 : 냇물이 마을을 빙 돌아 흐르고 앞산도 마을을 아늑히 품고 있어 봄이면 진달래, 철죽이 흐드러지게 피면 마치
꽃속에 마을이 있어 꽃다운 마을이라하여 방골이라 부른다.
서낭뎅이 : 옛날 마을의 태평을 기원하던 서낭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당집은 없고 돌무지만 남아 있다.
이곳은 이산면 두월리와 상운면 구천리의 경계지점이며 현재 영주시와 봉화군의 경계이기도 하다.
또 들이 넓어서 원들이,원들이 안에 있다고 안원들이 안에 있다고 안원들, 마을건너 있어 건내골,
옛날 복숭아 밭이 있었다는 복상나무골, 옛날 배씨 성의 조선시대 참판을 지낸 집이 있었다는
배참집골, 골안이 방같다는 골방골, 건내골 뒷산 큰바위 밑에 여우가 많이 살았다는 예수바골도 있다.
창팔 : 옛날 장수가 여덟이 났다고 하기도하고 또 옛적에 송계라는 분이 있었는데 호를 창의라 하였으므로,
호의창자와 장팔의 팔자를 따서 창팔이라 했다고 한다. 위쪽 마을을 웃창팔, 아래쪽 마을을 하창팔이라 부른다.
하창팔 : 야성 송씨외 여러 성이 살고 있으며 동편으로는 구천으로 상운 봉화로 가는 길이 있고 서쪽으로는
이산면 두월리 동창재로 가는 길이 있고 아래쪽에는 평은면 천본리 멀래를 통하여 안동시 원천동으로
가면 안동 봉화로 가는 포장된 지방도가 나선다. 또 벼락이 떨어져 못이 생겼다고 벼락친골, 숲이 많이
우거져 숲골이라 하다가 숫골이 된 숫골, 옛날 송씨 성을 가진 장수 두사람이 돌을 들이다 놓은 다리라는
돌다리, 바람이 많다고 풍대밭골, 골 입구는 하나이나 골안은 두갈래로 갈라진 이등골, 사람의 정수리
가마와 같다는 가매골, 가매실 건너 보이는 이명대골, 뒷골 가장골도 있다.
웃창팔 : 창팔 위쪽에 있는 마을로 영일 정씨, 안동 권씨가 여러집 살고 있으며 가장 북쪽에 산다고 북골이라고도
하며, 또 뒷등을 넘으면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덕골로 넘어가고 동쪽으로는 구천월들 방골로 가는 길이 있다.
창계 이사터 : 서원보다 낮은 곳을 이사라 하였으며 조선조 말엽 흥선 대원군(고종황제의 아버지)서원 철폐령에
철거 당하였으며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창계는 철거된 이사를 건립한 야성 송씨 선조의 호라고 한다.
봉우골 : 옛날 조선조시대 통신수단의 일종인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고 하며 그때부터 봉우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봉화대의 흔적만 남아있다.
벅골 : 옛날 법당(절)있었다고 해서 법곡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벅골이라 부른다.
동쪽은 큰벅골, 서쪽은 작은벅골이라 하며 요즘도 간혹 비가 올려고 하면 둥둥둥하는 북소리와 목탁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그 외 웃창팔 제일 넓은 들이라하여 큰골, 동쪽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뜬다는 동해골, 마당같이 적다는 마당골,
어린애를 죽으면 이곳에 묻어 애가 탄다는 애탕골, 외탕골, 옛날에 매를 날려 보내서 묘터를 잡았다는
매방재, 동예골, 갈구재 등도 있다.
설매리 인구 189명, 73호, 면적 413.6ha 고추농사가 주농업으로 특산물로는 사과농사도 짓는다.
파평 윤씨, 단양 우씨, 영양 김씨, 밀양 박씨, 진성 이씨, 달성 서씨, 경주 이씨, 충주 지씨 등 여러 성씨가
자연부락 단위로 산재하여 살고 있다.
설매 : 달성서씨가 처음 개척한 마을로서 조선시대 이곳은 안동에 속해 있는 지역이므로 안동설매, 또는
설무골 이라고 불렀으며 또 영주군에 속해 있을 때는 영천설매라고도 했다.
설매의 유래는 눈이 내렸을때의 마을 전체의 형상과 산의 줄기줄기가 어우러져 매화나무 가지에 눈이
쌓인것 같다고 하여 설매라 하였으며, 마을 북쪽에 위치한 가장 높은 산 명칭이 옥녀봉이라 하고 일명
설중봉이라고도 하며, 옥녀봉 능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가곡2리 독골 반송과 경계를 하고있고, 동쪽으로는
산 능선을 따라 가곡1리에서 운계1리까지 청현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남동쪽은 구천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는 주 능선을 따라 영주시 이산면 지동1리와 경계를 하고 있고, 남쪽은 이산면 두월2리 돌고개와
경계를 하고있다.
본마 : 설매에서 가장 중심되는 마을로 정미소, 마을회관이 있으며 큰마, 골마로 형성되었다.
1976년 우광석 외 몇 사람이 설매교회를 세우고 복음전파 및 주민계몽에 앞장서고 있다.
패장골 : 조선시대 과부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기도 하고 장수가 많이 나서 패장골이라 하였다 한다.
옥녀봉 : 산봉우리의 형상이 여성의 젖가슴과 같다고 하여 옥녀봉이라 전하며 눈이 내렸을때 마을지형이
매화꽃이 피어 있는 것 같다고 하는 명칭을 따서 설중봉 이라고도 한다.
해발 357m이며 가곡2리 반송마을과 경계를 하고 있어 반송의 전설과도 관련이 있다.
널미재 :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영주가는 첫 번째로 재로 올라서면 멀리 소백산(죽령재)을
한눈에 볼수 있으며 달개재라고도 한다.
닭이 알을 품은 듯하다는 달우실, 밭에 가면 웬지 쓸쓸함을 느껴 웬지 하는 괜지골, 옛날 고령장의
묘가 있었다는 고장골, 처녀가 댕개맨 듯 하다는 댕걸, 서내이 돌고개, 배나무골이 있다.
물윗골 : 설매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조 영조 때 영양 김씨 설매파 23세성진이 정착하여 개척하였고
지형이 높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의 물맛이 좋다하여 지여진 이름이며 독골과 새마을로 가는
길 옆 산 능선 독골재에 수령 300년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옛날 극심한 가뭄 때 첫아들을 낳은 아낙네 3명이
이 느티나무에 보름날 밤에 항아리로 물을 여가 부으면 비가 내려 가뭄이 해갈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마을 등성이에 보호수(느티나무 : 군자정 11-29-15)가 수령 약 300년 높이 15m, 직경 12m되는 나무가 있다.
독골재 : 독골로 가는 고개로 정상에는 약 300년 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옛날에는 이 나무에 와서 소원을 빌면
성취된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빌었다고 한다.
쇠진골 : 류씨 문중에서 묘를 쓰는데 뱀 아홉 마리가 나와서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먹은 후 문중이 쇠진했다고 한다.
설매에서 봉화장에 걸어가는 지름길이다. 그 외 소나무 숲이 밀생하여 빽빽히 우거져 있다고 하여 솔뱅이,
항아리 같은 골이라고 독골,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터마을, 가시나무 많다고 가시리, 새싱골 등이 있다.
새마 : 약 200여 년 전 경주 이씨가 마을을 개척한 이후 새로 생긴 마을이 라고 새마을이라 한다.
우렁바우 : 설매리, 운계리, 구천리의 접경지역으로 개울가에 큰 소나무 숲이 있어서 상운학교 소풍장소로
자주 이용되면, 학생들이 소풍오면 비가 온다는 말도 한때 유행되기도 했다.
골매 : 새마에서 설매로 가는 왼쪽에 논이 많이 있으며 못(소류지)이 있다. 또 물윗골에서 독골을 지나
뒷편에 위차한다는 뒷골, 우렁바위를 지나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골이 부자가 살았다는 장자골, 골매로
올라가는 우측편 산자락을 일명 뱀이 많다고 하여 독새벌(밸)이라 하였으며, 이곳은 양지바른 곳에
돌틈사이가 많아 겨울철에 뱀이 동면을 하기 좋은 장소로서 수십년전에는 땅꾼이 뱀을 잡으러 자연훼손을
많이 하였던 지역이기도 하다. 신라리 인구 224명, 77호, 면적 597 담배농사를 주로하며 고추농사와
사과농사가 특산물을 이루고 있다. 파평 윤씨, 평양 임씨, 김해 김씨 외 타성이 조금 모여 살고 있다.
신라 : 신라시대 어느 왕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태자와 함께 피난을 와서 임시 서울로 정하여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안동시 도산면과 봉화군 명호면과 인접해 있으며 거느미, 웃거느미, 아랫거느미,
모찌골, 산재, 새터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1983. 2. 15 행정구역 개편 때 명호면에서
상운면으로 편입되었다.
새터 : 신라 동쪽 마을로 안동군 태자동으로 통하는 다리재가 있으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하고
명호면 만리산 큰줄기의 일부로 그 아래 큰 골이 있다하여 큰골이란 곳 도 있다.
절골 : 새터로 들어가는 왼쪽 첫 번째 큰골로 옛날에 조금만한 절이 있었다고 하며 요즘도
가끔 사기그릇이나 놋그릇이 출토된다고 한다.
산재 : 북쪽에 있는 마을로 봉화 금씨 후손인 산재공이 터를 잡고 살았다 하여 산재라 부른다.
모찌골 : 모산이란 돌산의 모양이 메추라기가 일을 품고 있는 듯 하다고 불리운 이름이다.
거느미 :건음이라고도 한다. 아랫거느미와 웃거느미를 합하여 거느미라 한다. 본동으로 오려면
사방으로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고개너머라 하던 것이 변하여 거느미가 되었다 한다.
웃거느미 :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구에는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숲이 있다.
또 주눅골은 옛날에 사골돌이 나왔다고 하는데 사람의 관절이나 뼈가 아픈데 부수어
바르면 낫는다고 한다.
감의골 : 항상 물이 나서 가뭄이 들지 않는다고 하고 지금도 우물이 많아 학교촌의 식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웃거느미에서 학교방면 왼쪽골이다. 또 큰골 사이에 조그마한 골이라고 모듬골도 있다.
아랫거느미 : 신라리의 중앙지점으로 1947년 신라국민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농촌 인구 감소로 1993년부터 상운초등학교 신라분교로 격하되었다.
숲댕이 : 임당 또는 탄당이라고도 한다. 거느미 남쪽에 있으며 김해 김씨 입향시조인 김형임이 개척했다고 하며
마을 모양이 못과 같고 마을 앞에 숲이 우거져 임당이라 부른다고 한다. 1956년 김문두 집사가
교회를 세워 현재에 이르며 일찍이 한우사육으로 상운면사무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가장 잘사는 마을로 불리고 있다.
논실골 : 다락논이 많고 골안이 3km나 되는 가장 긴골이라고 논실골이라 한다. 해치골 : 뒷산 왼쪽에 있는 골로
옛날 명나라 이여송이 큰 인물(사명당같은)이 태어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하여 삭아 없어지는
쇠말뚝보다 오래 가는 사기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묘앞에 박힌 것은 뽑았다고 하나 그뒤에 있는 것은
아직도 못뽑았다고 하며, 또 이 골 우물에서 가뭄이 들 때 안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첫 번째로 올라가서
물을 푸면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다.
용수골 : 용소라고도 하며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개머리를 갖다 놓으면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다.
버스종점 왼쪽 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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