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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지명 유래

영월군 무릉도원면(舊수주면) 법흥리의 지명 유래

by 범여(梵如) 2019.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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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리(法興里) 영월군 우변면 지역으로 1914년 3월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자산 밑에 있는 사자리(獅子里)에다 도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법흥리'라 하였다. 법흥리란 법흥사 절집에서 따온 이름이며, 2개 행정리 103가구에 336명의 주민들이 콩, 옥수수, 감자 등의 밭농사와 사슴, 벌, 흑염소 등을 기르면서 생활하고 있다. 법흥리는 신라 말기 5교 9산의 선문중에 하나인 흥령선원지(興寧禪院址, 지방기념물 6호), 인왕산과 사천왕상이 조각된 팔각형의 부도, 징효대사 보인탑비(澄曉大師 寶印搭碑, 보물 612호), 사리보탑, 석함 그리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던 적멸보궁(寂滅寶宮)등 신라의 찬란했던 불교 문화가 숨쉬고 있는 곳이다. 울창한 적송과 산죽이 어우러진 천하의 명당터로 천연기념물인 까막딱따구리가 서식하고 있다. 법흥사, 관음사, 반야원 등의 절집과 백덕산(1,350m), 사자산(1,166m)이 있어서 절집을 찾는 신자들과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병지내 토실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다. 벼리 앞으로 흐르므로 '벼리내→병지내'라고 불렀다. 일설에는 뒤에 있는 도원산성에서 주둔하던 궁예의 군사들이 이곳에서 진(陣)을 쳤으므로 '병진내→병지내'라 했다는 얘기도 있다.

 

술면(術面) 무릉교를 지나 법흥리 입구에 있는 첫 번째 마을로 애운(靄雲) 남쪽이 된다. 백덕산(白德山, 1,350m)과 사자산(獅子山, 1,166m)줄기가 합치는 애운(靄雲, 알면)에서 생긴 구름과 안개가 이 곳에 와서는 흩어졌다 모였다 하면서 재주를 부리므로 '술운(術雲)→술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애운(靄雲), 알면 새터와 술운(술면)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사자산과 백덕산 줄기가 흘러내린 깊은 산간마을로 흐린 날이면 항상 구름이 끼었다가 바람을 타고 아랫마을인 술운(術雲, 술면)에서 흩어지므로 '애운' 또는 '알면'이라고 부르고 위쪽 마을을 상알면이라 하였다. '애(靄)'는 아지랑이 '애'자이다.

 

마장동(馬場洞) 알면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이 곳에는 궁예가 평창, 진부 등을 점령하기 위해서 말을 키우며 훈련하던 마장이 있었다고 한다. 일명 마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람밭이 마장동 북쪽 언덕 위에 있는 넓은 밭이다. 다른 곳에 비해 바람이 세차게 부는 곳이므로 '바람밭치'라고 불렀다. 그리고 마을 뒤에 있는 큰 바위는 바람을 막아주는 병풍바위라고 부른다.

 

적실(赤實)·반야사 알면에서 북서쪽으로 난 계곡길을 따라 가면 오른쪽으로는 마장동이고 왼쪽으로는 적실로 간다. 이곳은 다른 마을과는 달리 북은 색을 띠는 진흙밭과 이암이 많으므로 '적실'이라고 한다. '실(實)'이란 이두식 표기로 '골짜기, 마을'을 의미한다. 1988년에 대한 불교 본원종인 반야원(般若院)이 건립된 곳이다. 이 곳 절집은 3천불(三千佛)이 봉안되어 있다.

 

물안골 알면동 북서쪽 골짜기로 그 건너편이 화실이 마을이다. 이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났으며 계곡에는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으므로 '물안골'이라 한다.

 

가는골(細谷) 새터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은 판운리의 둔전동과 중선으로 가는 옛길인 작은 골짜기가 있으므로 '가는골'이 되었다. 즉, 작고 좁은 골이라는 뜻이다.

 

바랭이골 광대평 서쪽 산(뫼)안에 있는 골짜기이다. 밭에 많이 나는 잡초로 줄기에 수염뿌리가 달리고 잎은 긴 버들잎 모양인 바랭이풀이 많으므로 '바랭이골'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있다. 일설에는 이곳은 산(山) 안(內)에 있는 골짜기이므로 '바람(山內)+골→바란골→바랑골'이라고 불렀다 한다.

 

새터(新基洞) 푯대봉 아래 마을로 무릉리와 법흥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우축 약물탕골에는 굴속에서 많은 약수가 나온다. 화전민들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진 동네이므로 '새터'라 한다. 이곳 길옆에는 황장목을 보호하는 『원주사자산 황장금표비(原州獅子山 黃腸禁標碑)』가 자연석에 음각 되어 있다.

 

무릉치(茂陵峙) 법흥 1리의 끝마을인 새터에서 주천면 판운리(板雲里)의 중선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이 길이 많이 이용되었으므로 행인들이 쌓은 돌무더기인 서낭당(쿠시당)이 있었고 수풀이 무성(茂盛)하게 우거져 있으므로 '무릉치'라 불렀다. 임진왜란때인 1592년 8월 17일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과 영월의 의병장 고종원(高宗遠), 고종길(高宗吉)형제 등이 포로가 되어 영월 봉서루에 감금되었다. 이들은 주천, 신림을 지나 원주에 감금되었다가 9월 1일에 탈출하였으나, 고종길은 단구역에서 왜병에게 살해되고 종원은 하동면 진별리로 무사히 탈출하였다. 영월 군수를 겸하고 있던 권두문은 이방, 중방과 함께 이곳 무릉치를 넘어 평창으로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고종원이 쓴 「기천록」에 전해진다.

 

도마니 응어터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로 지금은 인가(人家)가 없다. 엄둔치(嚴屯峙)윗쪽을 큰 도마니, 그 아랫쪽을 작은 도마니라고 부르는데 '도마니'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마을인 '둠이→두무→도마'로 변하여 마을 이름이 되었다. 이 마을은 도마와 고기는 상극관계이므로 마씨(馬氏)와 어씨(魚氏)들이 살지 못한다는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진다. 일제시대 때 큰 도마니에는 수연(MoluBDAN)광산이 있었다.

 

엄둔치(嚴屯峙) 법흥리의 응어터에서 도마니골을 지나 도원리의 엄둔으로 넘어가는 험한 고개이다. 엄둔으로 넘는 고개이므로 '엄둔치'라 불렀다.

 

용어터(응어터) 법흥분교가 있는 곳으로 마을 어디엔가 용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는 유용농파형국(遊龍弄波形局)의 명당터가 있다고 하여 '용어터'라고 하는데 이 마을에 안개가 많이 끼는 이유도 용이 물장구를 치기 때문이라 한다.

 

성안(城內), 법흥산성 새터(新基洞)에서 무릉골로 약 2km정도를 올라가면 평평한 분지에 쌓은 옛 성터와 샘이 있는데, 한 때는 여섯 가구의 화전민(火田民)이 이 곳에서 살았으므로 '성안'이라고 불렀다. 법흥리에 있으므로 법흥산성(法興山城)이라고 부르는데 백덕산(白德山, 1,350m) 자락인 829고지를 중심으로 축조되었다. 평창을 바라보면서 축성되었는데 성안에는 우물과 석곽, 기와, 숫막새 등이 있다. 수십년전에 이곳에서 농사를 짓던 화전민이 고서(古書)가 담긴 큰 함을 발견했는데, 불에 태워 버렸다고 한다. 이 성은 후삼국시대에 치악산 석남사에 근거지를 둔 양길(梁吉)의 부하인 궁예(弓裔)가 891년(진성여왕 4)에 주천, 영월, 평창, 진부, 강릉 등을 공경할 때 쌓았다고 한다.

 

어리미골(餘林峙谷) 광대평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법흥리와 판운리의 경계를 이루는 여림치(餘林峙)로 가는 길이 있었으므로 '여림치골이→어림치골→어리미골'로 변했다. 어림치고개를 일명 여림치라고도 부르고 있다.

 

대촌(大村) 법흥사가 있는 절골과 무당들이 산신(山神)을 모시고 치성을 드리는 고인돌로 갈라지는 삼거리 부근이다. 법흥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예전에는 사자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므로 '사자리(獅子里)'라고 했었다. 지금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과 등산객을 상대로 식당과 토산품을 판매하는 신라가든이 있다.

 

메내기골 대촌 동쪽의 백덕산 줄기에 있는 골짜기로 흰바위골과 머리미골의 중간에 있다. 예전에 이 곳에는 생활이 어려운 화전민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본 마을인 대촌 사람들이 화전민들을 『산(메) 너머 골짜기에 사는 사람(내기)』이라고 얕잡아 부르는 뜻으로 '메내기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메내기에는 큰 공동묘지가 있고 골짜기가 깊어서 항상 어두운 곳이다.

 

흰바위골 대촌 앞에 있는 골짜기로 메내기골 위쪽에 있다. 이 계곡을 따라 오르면 백덕산(해발 350m)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 계곡 정상에는 흰색의 둥글고 큰 바위들이 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흰눈이 쌓여 있는 듯하므로 '흰바위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절골, 법흥사 대촌(大村) 북서족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이다. 예전에는 널목재를 지나 횡성군(橫城郡) 안흥(安興)으로 가는 안흥재에 있는 허공다리 밑이다. 연화봉 밑에 있어서 '연지동'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신라말기의 5교 9산의 하나인 사자산(獅子山) 흥령선원지(興寧禪院地)와 법흥사(法興寺)가 있는 곳이므로 '절골'이라고 한다. 흥령선원 절터에서 발굴된 금동불상은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법흥사 절집에는 『패엽경』이 보관되어 있다.

 

연화봉(蓮花峰) 영월, 평창, 횡성의 경계에 있는 사자산(獅子山)에서 뻗어 내린 강한 맥이 수주면 법흥리의 가래골과 능지동 사이에서 연꽃 모양의 높은 봉우리인 연화봉을 형성하였다. 풍수학에서 말하기를 혈(血)이 한곳으로 뭉쳐서 큰 명당터를 형성할 때는 벌의 허리모양으로 산의 지세가 좁아지는 봉요처의 지형을 형성하는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었다는 이곳 적멸보궁의 뒤쪽으로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폭이 10mm 길이가 70여m 정도의 능선이 벌 허리모양의 가느다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사자산의 강한 혈이 뻗어내려 봉요처의 지세를 이루었다가 다시 둥근 모양의 예약작화형의 명당을 형성했는데 그 자리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안치했던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한 것이다. 명당은 모든 사람에게 마음의 평안함을 가져와 고향에 온 듯한 포근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그곳이 곧 명당터인 것이다. 이곳은 수백 년을 곧게 자라온 수만 평의 소나무 숲이 있는데 산림청에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소나무로 지정한 보호수 4그루와 가막딱다구리가 서기사호 있다. 적멸보궁 밑에는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있으며, 지금도 전국에서 많은 신도들이 찾아드는 선문(禪門)의 도장으로 불교의 신비인 방광(연화봉에서 신비의 빛이 법흥사 계곡 전체를 내려 쏘임)이 자주 있는 곳이다.

 

흥령선원지(興寧禪院地) <지방기념물 6호 > 법흥리 절골에 있었던 절터로 사자산 줄기의 연화봉 밑에 조성된 신라 말기의 큰 절집으로 신라말기 5교 9산의 중심 선문(禪門)이었다. 자장율사가 창건했으며 도윤국사(道允國師, 798∼868)와그의 제자인 징효국사(澄曉, 826∼900)가 헌강왕때 흥령선원을 개원하여 선풍(禪風)을 일으켰던 곳이다.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 절터에는 여러개의 부도가 있었으나 소나무 밑에 있는 2개의 부도는 도굴꾼이 훔쳐가고 흥령사지의 초석과 섬돌은 절집 조경공사를 하던 주지스님에 의해서 파헤쳐져 마당앞 대문의 지주로 덩그렇게 포개져 있으며 자장율사가 참선을 하던 토굴도 대리석으로 덮여버렸다. 천연의 신비를 간직한 흥령사지는 결국 문화재의 가치를 이해못하는 후세들에 의해 훼손, 파괴되어 복원이 어렵게 되는 몸살을 앓고 있다. 지금은 법흥사(法興寺)라는 절집이 있어서 전국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찾아오는 곳으로 영월의 유일한 보물 612호인 징효대사 보인탑비와 부도, 적멸보궁, 사리탑, 석굴, 인왕산과 사천왕상이 양각된 팔각원당형의 부도 등이 남아 있다. 흥령사는 진성여왕 4년(891)에 병화로 불에 타자 고려 혜종원년(944)에 중건했으나 또다시 소실되었다. 그후 1902년 절집을 다시 지어 법흥사라고 했으나 1912년 화재로 일부가 파손되었다. 1931년에 큰 홍수로 석탑과 탑비가 유실되었는데 1995년 6월에 영월 향토사 연구회(회장 엄흥용) 회원들의 정기답사때 개울가에서 거북석과 지대석을 발굴하여 복원했으며 3층석탑과 비신을 찾기 위한 2차 발굴을 계획하고 있다.


병풍바위

법흥사가 있는 절골에서 안흥쪽으로 10여분즘 가다보면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장엄한 병풍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높이가 80m, 폭이 95m 정도나 되는데 마치 여인네의 치마폭을 펼친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일명 '치마바위'라고도 부른다.

 

구봉대(九峰臺) 동원리의 상터와 법흥리의 절골 사이에 있으며, 아홉 개의 산봉우리로 되어 있으므로 '구봉대'라 한다. 구봉대는 적멸보궁의 명당터를 보호하는 우백호의 역할을 한다. 구봉대 밑에는 절골에서 도원리의 상터로 가는 널목재와 엄둔으로 넘어가는 능목재가 있다.

 

큰골(大谷) 대촌 북쪽으로 백덕산에 딸린 골짜기로 가장 크고 길다, 큰 골을 중심으로 탕관바위골, 박덕술골, 벼락바위골, 대막대골 등으로 갈라져 있다.

 

대막대골, 관음사 큰골의 서쪽으로 그 입구에는 관음사(觀音寺)가 있다. 관음사는 태고종(太古宗)으로 1984년에 차보륜스님이 창공하였는데, 서울 관악산에 있는 사운암(紫雲岩)과 연관이 있는 사찰이다. 절집 앞의 넓은 너래 반석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흘러 여름한철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고인돌 관음사 동쪽인 백덕산 줄기에 있다. 선사시대의 지석묘가 아닌 석회암이 녹아서 형성된 종유석 모양의 큰 바위인데 자연적으로 네다섯 군데 돌이 고여져 있으므로 '고인돌'이라 한다. 그 안에는 대여섯 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굴이 있는데 고인돌 부근에는 산 기도를 올리거나 굿을 하는 무당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고 있다. 대촌에서 고인돌까지 가는 데 약 50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고인돌 뒤에 있는 당재(堂峙)를 넘으면 평창군 방림면(芳林面) 운교리(雲橋里)로 갈 수 있다.

 

구수와 큰골 서쪽으로 큰 구수와, 작은 구수와가 있다. 구수와는 소나무에서 나는 송이버섯과 깊은 산 속의 벼랑 꼭대기에서 나는 엽상체식물로 향기와 풍미가 짙어 석이(石耳)가 많이 나는 곳이다. 석이는 큰 잔치집에서 국수의 맛이나 모양을 내기 위한 고명으로 많이 쓰였다. 법흥리의 사자산과 백덕산 일대에서 자연산 약초를 캐는 한상웅씨는 지금도 많은 양의 석이를 따고 있다. 구수와 골짜기는 입구가 좁고 안쪽은 넓은데 그 속에 폭포와 소(沼)가 있으므로 '구소와→구수아'라 하였다.


탕관바위골

고인돌 마을의 북쪽에 있다. 이 골짜기 안에는 약을 다리는 오지그릇인 약탕관 모양으로 생긴 둥글고 큰 바위가 있으므로 '탕관바위골'이라 한다. 또는 예전에 관원들이 갓 아래에 받쳐쓰던 말총으로 만든 앞이 낮고 뒤가 높아서 턱이 진 탕건(宕巾)과 닮았다고 해서 '탕건바위골'이라고도 한다.

 

연지기 관음사 북동쪽으로 박덕술 골짜기 아래쪽에 있다. 대골에서 연지기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예전에 서낭당과 함께 큰 돌무더기인 국시당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연꽃 형상이므로 '연지기'라 부르게 되었다.

 

박덕술골(朴德術谷) 백덕산의 큰 골 막바지에 있는 골짜기이다. 지금으로부터 60∼70년전에 박씨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움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축지법, 차력등의 도술을 닦았는데, 어느 날 스스로 도술(道術)을 터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법흥리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마을어른들이 박덕술골로 가끔씩 장기를 두러 가면 잠깐 기다리라 해 놓고는 축지법(縮地法)을 이용하여 주천시장에 가서 생선이나 고기를 사다가 찾아온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였다고 한다. 또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종이에다 부적을 쓰고 돈과 함께 접은 후 상위에다 올려놓고 주문을 외우며 종이를 태우면 한참 후에 그 상위에는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후부터 수주사람들은 이 사람을 박천자(朴天子: 하늘에서 보낸 사람) 또는 도술(道術)을 얻은 사람이므로 (朴得術)이라고 불렀는데 그때부터 이 골짜기의 이름도 '박득술골→박덕술골'이라고 하였다. 박득술은 이 곳에서 생활하다가 일제(日帝)의 패망의 운이 짙어갈 때 기거하던 바위굴의 움막집에서 종적을 감추었는데, 1945년 충북 영춘면 백자리의 소백산(小白山) 연화봉(해발 1,430m)밑에서 도(道)를 닦다가 『억조창생 구세중생 구인사』의 염원을 펴기 위해 소백산에서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를 건립했다고 한다. 즉, 이곳 수주사람들의 주장은 구인사를 건립한 상월대조사가 바로 박득술골에서 공부를 하던 박천자라는 것이다.

 

사고지(史庫址) 법흥리의 대골(대막대골)입구에 있다. 조선시대 춘추관에서는 전국의 깊은 산중에다 사고(史庫)를 지어 전화(戰禍)로부터 사초(史草)를 보호사였는데, 법흥리에 사고가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대골에 '사고지(史庫址)'라는 지명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홍바위(弘岩) 큰골의 마지막 골짜기인 당재 밑에 있는 크고 둥근 바위로 그 옆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다. 무당이나 산제(山祭)를 지내는 사람들이 이 바위에다 늘 붉은 천을 감아두므로 '홍바위(弘岩)'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이곳 대골 홍바위와 박덕술골 홍바우샘터 옆에는 항상 무속신앙인(巫俗信仰人)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다.

 

허공다리 옛날 주천, 수주사람들은 안흥장(安興場)을 많이 다녔다. 법흥사의 절골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병풍바위를 지나고, 그곳에서 다시 두마장 쯤 위에는 허공다리(통나무를 베어서 여러 겹으로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다녔다. 합수거리와 전만이 무덤 사이로 약 5∼6m정도의 절벽사이에 놓여진 이 널다리와 허공다리 폭포는 주위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서 그 멋을 더했었다. 그러나 곡식이나 장보따리를 이고 지고 이 허공다리를 조심스레 건너다니던 장꾼들의 발걸음이 끊긴 지도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다. 허공다리의 뜻은 짐승이 다니는 길목에 웅덩이를 파고 그 위에다 나무나 풀을 깔고 산짐승을 사냥하던 '함정(허방다리)'처럼 위험한 곳이므로 '허방다리→허공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절골에서 허공다리와 전만이 무덤으로 가는 등산로에는 수백 평의 철쭉군락지와 산죽숲이 우거져 있어 전국에서 찾아드는 등산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 위쪽에는 법흥천의 발원지로 맑은 샘이 솟아나는 '물안이'와 암자터가 있다.

 

전만이 집터 법흥리에서 안흥으로 가는 안흥재 길목에 있다. 산삼, 식토, 석청, 참옷나무가 많아서 사재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이곳 산자락에는 산공부를 하면서 약초를 채취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전만이'라는 사람이 살던 집터가 있다. 어느날 기도터 제단 위에다 메를 지어 놓고 치성을 드리던 전만이는 여인으로 변한 커다란 구렁이와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그 여인이 죽으면서 뱀으로 변하자, 전만이는 구천에 떠도는 여인의 영혼을 달리주기 위해 돌탑을 쌓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안흥과 법흥리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안흥재에는 전만이가 살던 집터와 기도터, 돌탑, 재단이 남아있다.

 

당재(堂峙) 법흥리 큰 골(大谷)에 있는 고인돌에서 평창군 방리면(芳林面), 운교리(雲橋里)로 가는 큰 길이었다. 사자산(獅子山)과 백덕산(白德山)사이에 있는 이 고개의 산마루에는 당집이 있었으므로 '당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전에 방림장(芳林場)을 다니는 상인들이 많이 이용하던 고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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