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20년 03월 22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오후에 맑음 ...오전에 지독한 안개
☞ 산행거리: 도상거리 27.5km + 날머리 0.8km / 9시간 2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덧고개-갈림길-흑암동 갈림길-너덜겅-잘룩이 고개-두승산 끝봉-다시 잘룩이 고개
무명봉-430봉-안부-두승산 말봉-보문사 갈림길-두승산 상봉-441.0봉-유선사 갈림길
돌짐재-안부-안부-204.6봉-천치-146.3봉 갈림길-묘지-천치 갈림길-천치-묘지
새장터 갈림길-밀양박씨 가족묘-무명봉-이동통신탑-유인 진주강씨 묘-구파로 도로
85.4봉-성황당-은산리 고분군-무명봉-163.3봉-164.4봉-태산사 갈림길-순흥안공 묘
자라고개-천태산-171.3봉-갈림길-736번 지방도-여산송씨 가족묘-전원주택
경주이공 묘-48봉-시멘트 도로-매봉농장-갈림길-도로 삼거리-다원농장앞-청량리 입구
정애마을 삼거리-정자 -희망농장-도로 삼거리-705번 지방도-갈림길-거룡2마을 입구
거룡1마을-거룡교회-용출마을 입구-용출마을 버스 정류장-29번 국도 지하차도
석동마을 버스 정류장-29번 국도 지하차도-봉석 버스 정류장-백산-백산 삼거리
회포마을 입구-금판마을 입구-신상마을 입구-신금마을 입구-금판정미소-왕금마을
동진 갈림길-서해안 고속도로-현호마을 버스 정류장-마을회관-고부천/동진강 합수점
☞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용계동, 망제동 고부면, 흑암동, 덕천면, 영원면, 이평면 / 부안군 백산면
이번주에도 코로나바이러스가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낮은 남도지역으로 맥길을 이어가기 위해
이른 새벽에 일어나, 대충 베낭을 챙겨서 택시를 타고 집에서 그리 멀지않는 수서역으로 향한다
오늘 구간의 산행지도
택시를 타고 10분만에 수서역에 도착하니 04시 45분이다
좌우지간에 등산이고 골프고 간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운동을 할 수 없는 법이다
매표소에 가서 손님이 많지 않은 곳을 달라고 하니 8호 열차표를 주면서 현재 8호 열차에는
어르신 한 분 뿐이라고 한다...웬 어르신!...머리가 희어서 그런가...갑자기 서글퍼진다
수서발 → 정읍행 열차표
참으로 큰일이다...열차야 적자나면 국가에서 보조를 해 주겠지만 결국 우리의 부담이 아닌가
8호 열차 내부의 모습...손님이라곤 범여가 유일하다.
열차 1칸을 통째로 전세(?)내서 가는데 잠깐 사이에 졸다가 잠을 깨니
열차는 익산을 지나 정읍에 도착한다는 멘트가 나오는데 잘못하면 광주까지 갈뻔했다
정읍역(06:26)
정읍역을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에 가서 덧고개가 있는 서당촌가는 버스를 알아보니
첫 차가 08시 12분이란다...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야 할 듯 싶다
정류소 뒷편에 있는 육계장집에 영업을 하고 있어서 아침을 먹기로 한다
육계장 한 그릇이 8,000원인데 서울에서 먹는 육계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맛이 담백하고 깔끔한 게 먹을 만하다...역시 남도지방의 음식맛은 범여의 입을 호강하게 만든다
아침을 먹고 정읍역 앞에 택시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배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기에
역전파출소 안에 들어가 양해를 구하고 시원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정읍역 옆에 있는 동학혁명 농민군의 상
1894(고종 31)년에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도와 농민들이 일으킨 농민 운동으로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횡포와 착취에 농민들이 항거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정읍사 망부상(井邑詞 亡夫像)
정읍사는 백제시대 때 지어진 작자 미상의 가요로 이 노래의 가사는 『악학궤범』 권5
시용향악정재조(時用鄕樂呈才條)에 「동동」·「처용가」·「정과정」 등 고려가요와 함께
실려 전하고, 『고려사』 악지 2 삼국속악조에도 「정읍사」에 관한 기록이 있다.
백제시대부터 구전해 온 민간전승의 가요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사 본문 중 ‘全져재’의 ‘全(전)’자를 전주(全州)의 지명으로 보고, 백제시대의 완산주(完山州)를
신라 경덕왕 15년에 전주로 개명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동국여지승람 권32 전주부), 경덕왕 때 이후
내지는 고려시대 옛 백제지방의 민요로 보기도 한다 .
시가 형태면에서 보더라도 「정읍사」가 백제가요로 인정되기는 하나, 오랜 세월 고려속요와 함께
불려오는 동안 다분히 고려적인 성격으로 변모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바, 후렴을 지니는
모든 고려속요가 예외 없이 각 연마다 꼭같은 후렴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후렴이란 언제나 꼭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므로 고려속악과 함께 가창된 「정읍사」도 각 연마다 동일한 후렴을 지녀야만 형태상으로도
온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읍사 원문(前腔)
하 노피곰 도샤/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어긔야 어강됴리/아으 다롱디리(後腔) 全져재 녀러신고요/어긔야 즌
를 드
욜셰라/어긔야 어강됴리(過篇) 어느이다 노코시라(金善調) 어긔야 내 가논
점그셰라/어긔야 어강됴리(小葉) 아으 다롱디리
번역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어기야차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시장에 가 계신가요/어기야차 진 곳을 디딜세라/어기야차 어강됴리/
어느 것에다 놓고 계시는가/어기야차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박병채 역)
내용은 먼저
제1연에서 행상을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무사안녕을 달에게 기원하는 간절한
발원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곧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기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는지
몰라 초조하고 안타까운 불안한 심정을 달에 의탁하여 노래하되, 단순한 서정의 표출이 아니라 광명한
달에게 남편의 안녕까지 도모해 주기를 바라는 고대인의 소박한 발원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제2연에서는, 현실적으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행방도 소식도 몰라 애태우며, 불안과 의념
(疑念: 의심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히려는 자신의 마음을 붙들고자 ‘(혹시 지금쯤) 전주 저자에나 가
계시는지요’라는 가정(假定)의 의문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희구하는 가냘픈 여심(女心)의 발로로써 시작된다.
정읍역앞을 조금 머물다가 택시를 타고 산행 들머리인 덧소개로 향한다
덧고개(50m:07:25)
정읍시 고부면 만수리와 용계동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정읍에서 고부면으로 이어지는
4차선의 29번 국도가 지나가며 고개 근처에서 동진강으로 흘러드는 소성천의 지천인
만수천(萬壽川)의 발원지가 있으며, 지도상에서도 덧고개라 표기가 되어 있으나
정작 이 지역 사람들은 덧고개가 어디인지 모르며 그 유래도 알 길이 없다.
버스 정류장의 표기도 서당촌으로 되어있고, 이 지역 사람들도 서당골이라 해야 알아 듣는다
정읍역에서 택시를 타고 덧고개에 내리니 앞이 잘 안보일 정도로 안개가 심하다
이번 고부(두승)지맥길의 중심 산이며 부안의 변산, 고창의 방등산과 함께 삼신산으로
불리는 두승산을 바라보니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다.
(택시요금 6,000원)
산행을 시작하다(07:30)
마을 어귀에 있는 매화가 산꾼을 반긴다
오리농장 축사를 지나서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니 태양광 단지에서 길을 막는다.
그렇다고 안 가나...갈 사람은 다 간다...옆을 돌아서 도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태양광 단지 끄트머리까지 올라간 다음에 우측으로 꺽어지니...
군부대 철조망이 나오고...
부대 안에는 군인들이 연병장에 모여 점호를 취하고 있는 모양이다
철조망을 따라서 계속 올라간다
철조망 끄트머리가 올라간 다음에 철조망을 따라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갈림길(07:43)
철조망을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반가운 선답자들의 흔적들이 보인다
넓은 등로를 따라서 두승산으로 향한다
갈림길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흑암동 갈림길(07:54)
검은바위(黑岩)가 많아서 흑암동이라 부르는데 상흑암마을과 하흑암 마을이 있으나
하흑암 마을은 현암마을로 개칭했고, 관할 행정동은 농소동에 포함되어 있다
나무 계단을 따라서 올라간다
등로는 좁아지기 시작하고...
계속되는 오르막길
동쪽으로 바라보니 해는 저만치 올라왔으나 안개에 갇혀 버렸다
덧고개에서 두승산으로 오르는 길...고도를 50m에서 450m까지 올리려니 힘이 드는구나
흐미!...이쁜 넘들 니네들만 신이 났구나
지난 년말부터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우한 폐렴인가 코로나 바이러스인가 지랄같은 역병이
전 세계를 阿鼻叫喚를 만들어 중생들은 지옥같은 생활을 하느라 꽃구경도 못가게 생겼는데...
너덜겅(08:07)
지도 한번 쳐다봐 달라고 하는구나
힘들게 능선으로 올라간다
잘룩이 고개(295m:08:13)
끝봉과 말봉 그리고 직진 아래로 소성면 만수리로 내려가는 등로가 보인다
두승산 등산지도에는 잘룩이 고개로 표기가 되어 있는데 끝봉과 말봉 사이를
는 고개가 잘룩하여 붙혀진 고개라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잘룩이 고개에서 0.16km떨어진 두승산 9봉중의 하나인 끝봉으로 향한다
끝봉은 지맥길에서 좌측으로 살짝 떨어진 봉우리이다
끝봉 가는 길에서 만난 멋쟁이 소나무
두승산 끝봉(339.1m:08:18)
두승산의 아홉개 봉우리중에 맨 끄트머리에 있어 끝봉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정상에는 멋진 팔각정과 두승사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끝봉 정상의 모습
두승산 봉우리 중에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나 범여의 德이 모자람인가
짙은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든게 五里霧中이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정읍 내장산쪽의 모습
우측으로는 부안 변산반도쪽도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아침에 출발한 덧고개쪽만 가까워서 그런지 희미하게 보인다
끝봉에서의 진한 아쉬움을 간직한 채 잘룩이 고개로 되돌아 간다
다시 잘룩이 고개(08:22)
두승산 정상인 말봉으로 향한다
암릉구간을 지나고...
소나무와 암릉이 어우러진 멋진 길...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이 맛에 산에 오는 것 아닌가
조금씩 고도를 높혀가기 시작한다
떨어지겠다
무명봉(08:31)
두승산의 멋진 능선을 나홀로 전세(?)를 내어서 걸어간다
430봉(08:36)
무명봉 아래로 내려간다
안부(08:37)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 느낌이다
고도를 높이니 암릉들이 길을 막는다
좌측으로 우회를 하며...
두승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암릉에는 음각한 글씨들이 보인다
이곳은 글씨가 많이 마모되어 잘 보이질 않는다
두승산 말봉(斗升山 斗峰 :445.1m:08:40)
두승산은 전북 정읍시 용계동과 망제동, 흑암동, 소성면 만수리, 고부면 남복리, 덕천면
상학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정상은 넓은 공간이 있는 암릉구간으로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나
오늘은 안개로 인해 모든게 오리무중이다.우측 아래로는 덕천면 상학리에 있는 치재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산꾼들과 오룩스 트랙에서는 이곳을 두승산 정상이라 하나
트랭글앱이나 이 지역 사람들은 상봉을 두승산 정상이라고 하여 좀 헷갈린다
예부터 부안의 변산, 고창의 방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으로 추앙받아 온 두승산은 중국 진나라 때
삼신산 탐사표본으로 삼았을 정도였고 불사의 약이 있는 신령스럽고 평화스런 곳으로 알려졌다.
<영주읍지>>에는 도순산(都順山), 영주산(瀛州山)의 별칭을 갖고 있는 두승산은 아홉봉우리로
이루어져 있고, 동쪽 끝의 말봉에는 쌀의 용량을 재는 석두(石斗), 석승(石升)가 있었으나 1883년
나무꾼의 장난으로 없어졌다는 기록이 보인다.
두승(斗升)은 벼의 용량을 재는 용기(斗)와 쌀의 용량을 재는 용기(升)를 의미한다.
선조들은 호남평야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쌀의 정확한 계량의 필요성을 느껴 산의 이름을
두승은 (말 두(斗)와 되 승(升)으로 명명했으며,말봉 앞에는 볏단을 쌓아놓은 형상의 노적봉이 있다.
두승산 정상의 모습
지리적으로 두승산은 호남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올라 정읍지역의 길잡이 역할에 충실하고,
역사와 문화적 측면에서 고찰해 본 두승산은 상생과 개혁을 표방했던 동학혁명의 요람인 동시에
고부문화는 정읍역사의 중심이자 호남문화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보국안민을 주창하며 농민봉기의 횃불을 들었던 전봉준, 동학뿌리를 둔 증산교를 일으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원했던 강일순, 도교부활에 앞장섰던 권극중 등 정신적 지도자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으로 두승산 남동쪽의 선인봉은 옛적에 귀인봉으로 불렸고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선인봉
아래에 좋은 터가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며, 또한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백제유민들이 곡식이 풍부한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일부는 부안. 줄포를 통하여 일본 등으로 이주해갔던
거점인 동시에 애환이 서린 곳이다.
두승산 정상인 말봉에는 동초 김석곤이 새긴 망선대(望仙坮)와 수두목승(水斗木升)의 음각글씨와
곡식을 계량하는 말과 되의 형상을 새겨 놓은 바위가 있는데 망선대는 신선을 기다리는 곳이며,
산 아래에는 신선을 기다리는 선망(仙望)마을과 신선이 숨어있는 은선(隱仙)마을이 있어 큰 인물이
태어날 길지로 여겼는데, 이를 입증하듯 옛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는 증산교
창시자 강일순이 태어난 선바래기(仙望) 또는 손바래기(客望)으로 불려왔다.
마을을 감싸않은 시루산(甑山)은 풍수지리상 신선이 독서하는(仙人讀書穴) 형상이다.
두승산 말봉에서 바라본 조금전 지나온 끝봉은 안개로 인해 희미하기만 하다
수두목승(水斗木升)과 망선대(望仙坮)를 썼다는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은 태인 출신으로
전국의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며 바위에 글씨 새기는 것을 즐겨해 내장산 서래봉(西來峰) 불충암(佛充庵)
뒷쪽 바위에는 내장풍악(內藏楓嶽), 정읍의 두승산 정상에는 수두목승(水斗木升), 또 칠보산
(七寶山)에는 도불원인(道不遠人)’, 상두산(象頭山)에는 ‘산명수류(山明水流)’, 백운대(白雲臺)에는
‘유수불부(流水不腐)’라고 새겼다.
두승산은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말봉에서의 조망이 막힘없이 좋다.
정읍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두개의 삼각추 형상으로 우뚝 솟아 있으며, 고부면 입석리 에서
바라보면 아홉 개 봉우리가 천혜의 요새지 또는 병풍처럼 다가오며, 주능선을 걷노라면
호남평야가 눈앞을 가득 채우고 서로는 변산 칠산(七山)바다의 수평선이 아른거리며, 그 옆으로
계화도의 간척지가 다가오며, 동쪽은 정읍시가지 너머로 칠보산 망대봉,. 내장산이 한눈에 굽어보이고,
남쪽은 입암산과 방등산의 산줄기가 너울너울 춤춘다는데 오늘은 짙은 안개로 모든것이 아쉽기만 하다.
두승산 정상에서 조망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욱한 안개에 갇혀버린 두승산 상봉으로 향한다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묘지 한 기가 보이고 보문사 갈림길이 있는 안부가 나온다
보문사 갈림길(08:47)
지맥길은 유선사 방향으로 이어진다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안개가 걷힐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두승산 상봉(上峰:444m:08:50)
트랭글 앱과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두승산 정상이라고 하는데 지도에는 지나온 말봉이 정상이란다.
높이나 모든게 모든게 지나온 말봉이 정상이 맞은 듯 싶다
인증샷
다시 직진의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내리막으로 내려 갔다가...
유선사 방향의 직진 오르막길로 올라선다
두승산 자락에는 유선사, 두승사, 관음사, 보문사, 원통암, 미륵암, 금선암 등 사찰이 유난히 많다.
특히 백제 때 창건된 비구니사찰인 유선사는 대웅전 왼편이 풍수적으로 좌청룡이 강하고 우백호가 약
해서 세웠다는 호랑이 형상이 있으며 <한국지명총람>>에는 이충무공이 바다에 오색구름이 흐르는 것을
보고 원통암에 돌부처를 안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산불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441.0봉에 올라선다
441.0봉(08:56)
백제 때에 축조된 승고산성(두승산성)은 남쪽 산 중턱에 그 흔적이 남아 있고 고부 관음사 뒷산은
6백년 동안 외국과 외지녹차와 교잡되지 않은 순수 품종인 정읍자생녹차 보존지가 있다.
산줄기는 호남정맥이 내장산과 백암산 사이의 530봉에서 나뉜 영산기맥이 서진하며 동진강과 영산강의
분수령을 이루며 입암산, 방등산에 이르러서 두 갈래를 친 고부지맥이 북쪽으로 뻗어가며 두승산을 솟구쳤다.
물줄기는 서로는 고부천, 동으로 정읍천을 이루다가 동진강에 살을 섞고 서해로 흘러든다. 행정구역은 정읍시
용계동과 흑암동, 고부면, 덕천면 경계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아기자기한 산죽길이 일품이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미스트토릇에서 영탁이가
부른 ‘막걸리 한잔’이란 노래가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조금을 더 가니 갈림길이 나오고...
유선사 갈림길(09:00)
들머리부터 시작된 제도권 등로라 편하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곳에서 제도권 등로는
비구니 사찰인 유선사로 이어지고, 이곳부터는 행복 끝, 고생 시작인 苦行의 길로 들어선다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산죽에 등로는 막혀 버렸다
급경사의 내리막길
등로는 보이지도 않고...어디로 가라는 건지...
등로는 생각보다 상당히 미끄럽다
최대한 우측 능선으로 내려간다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며 내려서니...
반가운 선답자의 시그널 하나가 보인다
시누대 군락지가 보인다
시누대 군락지를 뚫고 내려서니...
넓은 안부 같은 공터가 나오고...
돌점재 윗쪽을 지나가는 좁은 동물이동통로가 나온다
돌짐재(113m:09:45)
정읍시 고부면 남복리에서 덕천면 하학리 중하마을 경계에 있는 고개로 2차선
도로에 좁디 좁은 동물이동통로가 있고, 하얀 건물의 태양광 발전소가 보인다
독점재 또는 돌짐재라고도 하며 석점치(石蛅峙)라고도 불렀으며,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학리에는 동학농민운동 때 관군이 전멸한 황토현이 있다
억새가 무성한 동물이동통로를 통과한다
돌짐재 좌측에는 태양광 발전소가 있고 뒤돌아 보니 유선사가 희미하게 보인다
돌짐재 위에 있는 동물이동통로의 모습
등로에서 바라본 유선사
유선사 대웅보전...사진 펌
유선사(遊仙寺)는 “하늘을 노닐며 바다를 희롱한다(遊天戱海)”는 말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며 두승산 정상부에 위치한 비구니 사찰이다.
신라 때 의상(義湘)이 창건하였고. 신선들이 놀다 간 곳에 절을 지어 유선사라고 이름지어 졌다.
전설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이곳에 와서 보니 산 정상에서 신선들이 놀고 있어서 뒤에 그 아래에
나무를 꽂고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 산 정상에는 신선들이 놀던 칠성대(七星臺)가 있으며,
절 뒤쪽에는 의상대사가 꽂았던 나무가 자라난 것이라고 하는 회화나무 8그루가 있다.
한편 절이 들어선 영주산은 두승산(斗升山)이라고도 불려 절도 한때 두승사라고 하였다.
창건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으며 조선시대에 몇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1982년 비구니
성수(性洙)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뒤부터 다시 불사를 진행하여 1990년에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건하였으며 대웅전은 본래 약사전이었다고 하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약사불·석가모니불의 청동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중 비로자나불은 본래 월출산 도갑사에 있던 것으로 불상이 울고 있어서 이곳에 옮겨왔다고 한다.
삼존불 뒤에는 삼세후불탱화와 칠성·신중·산신·독성탱화가 있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4m나 되는 호랑이상이 있는데, 절이 들어선 위치가 백호맥(白虎脈)이
약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태양광 발전소 옆에는 봄까치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태양광 발전소 휀스옆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에 오르자마자 찔레꽃 가시를 비롯한 잡목들이 산꾼을 괴롭힌다
안부(09:55)
안부에서 바라본 두승산의 모습...안개가 많이 걷혔구나
능선에서 올라가 좌측으로 살짝 꺽어져 맥길을 이어간다
등로는 상당히 지저분 하다
안부(10:00)
쩍벌나무
등로는 지저분한데 길은 보이지도 않는다...힘들게 올라서니 204.6봉이 나온다
204.6봉(10:15)
204.6봉에 있는 묘지
우측의 능선으로 내려간다
등로 주위 능선에는 진달래들이 많이 피어있다
암릉구간을 지나 계속되는 내리막길
조금을 더 내려가니...
여름철에는 지나가기가 힘들겠다
가야할 천치의 모습
좌측 능선으로 내려간다
끄트머리에 도착하니 천길 낭떠러지이다
등로 끄트머리에서 내려다 본 천치의 모습
좌측으로 내려간 다음에...
방호벽 아래로 내려간다
천치(天峙:80m:10:28)
정읍시 덕천면 도계리와 고부면 장문리 경계에 있는 고개인데 2차선 도로가 지나간다
하늘재인데 한문으로 표기를 하니 天峙로 불렀으며 옛날에는 치재(雉峙)라 불렀다고 한다
고개를 넘어서 덕천면쪽으로 넘어간다
뒤돌아 본 천치의 모습
도로 좌측의 능선으로 올라간다
칡넝쿨에 갇혀버린 통정대부 돈녕부도정 사헌부감찰 김제조공 묘지쪽으로 올라간다
통정대부 돈녕부도정 사헌부감찰 김제조공(司憲府監察 敦寧府都正 金堤趙公)묘(10:35)
사헌부(司憲府)는 시정(時政)을 비판하고 풍속을 바로 잡으며 관리들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임무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監察은 사헌부(司憲府)의 정육품(正六品) 관직이고, 돈녕부는
왕의 친족을 관리하던 기관으로 도정(都正)은 정3품 당상관이 맡았다.
묘지 뒷쪽으로 올라서니...
희미한 등로가 나온다
146.3봉 갈림길(10:45)
갑자기 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산에서는 전화를 잘 안받는 편인데 행여 몰라 전화를 받았더니만 낼 작업를 의뢰한 고객 전화이다
걸어가면서 전화통화를 하는데 끊을줄을 모른다...5분정도 통화를 했나보다
트랙을 확인해 보니 조금전 능선 갈림길에서 100여m 정도 벗어나 있는 삼각점이 있는
146.3봉을 놓치는 憂를 범한다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하여 그냥 맥길을 이어간다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가는 등로는 아기자기 하다
등로에서 바라본 정읍시 고부면 장문리의 모습
장문리(長文里)는 마을이 산 밑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 큰 저수지를 끼고있다.
자연마을로는 내건너, 등전, 양지, 음지가 있으며, 내건너는 마을이 음지 북쪽 내 건너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등전은 마을 지대가 높고 밭이 많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구슬 등잔을 벽에 거는 모습이라 하여 등지리라고도 부른다. 양지는 마을이 양지쪽에,
음지는 마을이 음달에 자리잡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특산물로는 내장산 복분자,
단풍미인쌀, 새송이버섯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전북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백제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고려시대 장문리 5층석탑이 있다.
묘지(10:50)
묘지 앞은 커다란 암릉구간이 길을 막고 있다
좌측의 능선으로 올라간다
천치 갈림길(10:57)
지맥길 등로에서 좌측으로 300여m 정도 떨어져 있는 천치로 향한다
천치(天峙:183.9m:11:00~11:08)
정읍시 고부면과 덕천면, 영원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름은 거창(?)하지만 막상
와보니 그저 밋밋한 봉우리에 불과하며 지명에 대한 유래는 알 길이 없고, 일부
지도에는 뒤뚱산으로 표기가 되어 있으나 그것 역시 자료는 전혀없다
그 대신에 고부출신 강일순이 창시한 증산교 자료에서 천치란 지명이 보이는 걸로 보아
아마도 증산교와 관련된 것은 아닌지?(범여의 생각中에서)
이곳부터는 좌측은 들머리부터 쭉 같이 걸어온 고부면과 작별을 하고 영원면으로
面界가 바뀌는 셈이다
인증샷
일찍 집을 나온 탓인지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양지바른 곳에 햇빛이 따스하여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증산 강일순...사진 펌
증산교(甑山敎)는 교주인 강일순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 다른 말로 흠치교(吽哆敎)라고도
하는데 많은 교단의 분열로 인한 60여 종의 종파를 통칭해서 증산교라 부르고 있다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은 1871년 9월 18일 전북 정읍시 고부면에서 출생했다.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창시자 강일순은 비교적 윤택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한 후
처남집에서 훈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갑오농민전쟁 때는 동학군을 따라 다녔지만 전쟁의 실패를 예언하고, 직접 전쟁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전쟁이 끝난 3년동안 전국의 순회하며 사회의 실상과 민중의 생활을
살핀 후 민심을 수습함에 있어서 갑오농민전쟁과 같은 인간의 인위적인 힘이나 지역의
기반으로 형성된 기성종교로는 역부족임을 깨닫고 1901년 김제 모악산에 들어가 도를
닦기 시작하여 그 해 7월에 성도했다고 한다
1902년부터는 그를 따르는사람들을 대상으로 훈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고통속에 있는 민중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 땅, 인간의 삼계대권을 가지고
이 땅에 금산사 미륵불로 강림했다고 한다
또 세상의 혼란을 괴질로 비유하고 자신이 모든 병을 대속했으나 오직 괴병만 남겨 두었다고
했는데 예언과 병든 사람을 고치는 의통을 세상 구원의 수단으로 삼았다
증산교는 한말기 개항기에 나타난 동학, 대종교와 함께 이 땅에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한다는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자생종교의 하나로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 문화, 특히 무속과
선도를 계승발전 시켜 한국 민중의 개인적인 신앙의식을 민간 중심의 공동 신앙체로 승화시킨 종교이다
갈림길로 되돌아 와서 좌측 능선 아래로 내려간다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묘지가 나온다
묘지(11:13)
좌측으로 내려가니...갈림길이 나온다
새장터 갈림길(11:14)
우측 내리막은 정읍시 덕천면 도계리 새장터로 내려가는 길이고 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새장터는 마을에 전에 장이 섰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직진으로 가니 산으로님의 흔적이 보인다
등로가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조그만 능선을 내려선다
직진으로 내려가니...
가야할 틈이 안 보인다...잡목 가시들이 엄청나게 괴롭힌다
무명봉을 넘어간다
능선 아랫쪽에는 묘지가 보이고...
너무 힘들어 묘지쪽으로 내려간다
밀양박씨 가족묘(11:25)
다시 등로로 복귀한다
밀양박씨 가족묘에서 바라본 천치봉 옆에 있는 230,3봉을 바라본다
무명봉(11:28)
무명봉 정상에는 묘지가 있고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져 내려간다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무명묘지가 나온다
이동통신탑(11:30)
이쪽으로 내려가니...
절개지라 내려갈 수가 없어서 옆으로 내려간다
유인진주강씨 묘(11:31)
묘지 아래로 내려간다
구파로 도로(11:33)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탑립마을에서 덕천면 도계리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이다.
좌측의 은선리에는 보물 제167호인 은선리삼층석탑이 있고, 우측 도계리에는 도계서원이 있다.
도계리쪽으로 내려가서 좌측 능선으로 내려간다
칡넝쿨 사이의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에서 바라본 정읍시 덕천면 도계리의 모습
도계리(道溪里)는 평지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작은 하천이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금계리, 다내골, 도마다리, 새장터가 있는데 금계리는 도계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금계포란혈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다내골은 마을 뒷산이 다락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마다리는 마을 앞 시내에 도마같이 생긴 돌다리가 놓여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장터는 마을에 전에 장이 섰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묘지를 지나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등로가 없는 능선을 치고 오르니...
85.4봉(11:43)
점심시간(11:43~57)
이상하게 오늘따라 베낭이 무거운 느낌이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성황당(城隍堂:11:58)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탑립마을에서 덕천면 도계리로 안부에 성황당의 흔적인 듯한
돌무더기와 성황당 안내판이 있는데 안내판에 이곳을 자라고개로 표기를 해놨지만
지형도상의 자라고개는 이곳이 아닌 조금 더 가면 천태산 아래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성황당 안내판
이곳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서해에서 자라가 육지로 올라오는 형국인 자라혈((鼈血)이라
하며, 이 고개를 자라고개(鼈血峙)라고 이름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성황당(서낭당)이 있고, 1894년 갑오동학혁명 당시 동학 농민군이 이 고개를 지나
진군하면서 진을 치고 군기를 꽂았던 군기봉이 있다.
성황당은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슬기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대개 지형이 높은 길가에 성황당을 만들고 길을 가는 나그네들은 이곳을 돌이나 동전등 쇠붙이와
그 위에 솔가지를 던지고 가면 다리가 아프지 않고 소원을 성취한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우리
선조들이 만약의 전시를 대비하기 위하여 산 기슭에 있는 돌을 일정한 곳에 한데 모아 전쟁시
용이하게 사용하고자 함이요, 쇠붙이는 화살촉 등, 병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며, 솔가지를
던진 것은 돌더미를 은페하고자 하는 지혜와 슬기를 연유한 것이라 한다
성황당에서 올라서니 묘지가 나온다
묘지옆에는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묘지 끄트머리에 있는 바위에 있는 구멍은 뭔 연유인지 모르겠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등로는 뚜렸해지고 우측에 잘 가꿔진 묘지에 측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묘지 윗쪽 능선에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로운 산꾼 범여를 반긴다
등로에서 바라본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隱仙里) 들녘의 모습
은선리는 경지가 넓게 분포하는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섬진강의 지류가 굽이져
흐르며, 선인봉 밑이 되므로 은선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은선, 모산, 갈선,
탑립마을 등이 있다.
은선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은선리의 그것과 같고 모산마을은
은선 북쪽에 있는 마을로, 갈대가 무성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갈선마을은 모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칡이 많았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탑립마을은 모산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백제탑이
세워져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갑자기 등로가 좋아진다
시누터 터널을 지나니 은선리 고분군 지대가 나온다
은선리고분군(隱仙里古墳群) 석실묘(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57호:12:00)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1-3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구덩식돌방무덤·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으로 지정면적은 110,768㎡이며 이 고분군은 고부면에서 북방으로 4㎞
떨어져 있는데, 현재 고부지역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본래는 고부군의 관할이었고
역사상 고부와 관계가 깊다.
탑동마을의 동쪽에는 천태산(天台山)이 있어 남방의 두승산에 연결되며, 천태산은 다시
서남방으로 지맥이 뻗어내리는데, 이 산줄기가 형성된 구릉의 남쪽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남으로 뻗은 능선과 서남의 지맥 사이로 이루어진 대지 안에 수십 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이 고분군은 백제계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으로 모두 파괴되고 10기만이 1973년
전주시립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고, 이후 2005년 지표조사를 통해 이 고분군이 3개 지점(A·B·C고분군)에
43기가 분포하고 있음이 추가로 확인되었으며, 2008∼2009년에 걸쳐서 1기의 고분이 발굴조사되었다.
은선리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조사되어 그 유형이 파악된 것은 A고분군에 해당하는 10기의 무덤이다.
돌방은 깬돌(割石)을 이용하였으며 벽면 위쪽을 안으로 기울여 천장 폭을 좁혔고, 동쪽에 널길羨道)이
달려 있으며 판석(板石)을 사용한 돌방은 위쪽 천장면석 사이에 안기울임시킨 장대석(長臺石)을 끼워
단면 6각형을 만들고, 앞면 중앙에 짧은 널길을 설치해 부여 능산리고분과 같은 형식을 나타냈다.
또한 그 중간의 과도적 형태인 아래쪽 벽면은 면석(面石)을 세우고 윗면은 깬돌이나 장대석을 안기울임
시킨 것이 있어 백제시대 돌방무덤의 변천을 엿볼 수 있다.
은선리고분군이 위치한 지역은 백제시대의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으로 사비시대의
지방제도였던 5방(五方) 중의 하나인 중방(中方)의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고분군은 공주시대에서 부여시대 말기에 걸친 약 1백년 동안의 묘역이었다.
이에 선행하는 백제고분으로는 은선리 북방의 운학리나 은선리 지사(知士)마을에 있는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이 있어 이곳이 공주시대 이전부터 백제의 중요한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은선리 고분군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간다
묘지를 지나고...
우측 450m 지점에 깃대봉이 있다지만 그냥 맥길로 이어간다
은선리고분군을 벗어나 능선으로 올라간다
무명봉(12:07)
능선 아래로 내려간다
안부를 지나 오르막으로 오르니 암반지대이고 돌탑 하나가 보인다
다시 등로는 좋아지고...
163.3봉(12:12)
좌측으로 내려간다
164.4봉(12:14)
태산사 갈림길(12:18)
지맥길은 무제봉쪽으로 향하는데 무제봉은 천태산을 말함이다.
정읍시의 산 지명에 대한 설명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엄연한 천태산이란 지명이 있음에도 무제봉이라니...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나무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내려서니 가야할 천태산이 보이고 바로 앞의 묘지는 고사리밭으로 변해 버렸다
순흥안공& 배부인 나주 나씨묘(12:21)
자라고개(鼈峙:12:22)
정읍시 이평면 산매리에서 영원면 은선리 탑립마을로 이어지는 고개인데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조금전에 지나온 성황당 안내판의 자료를 빌리면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서해에서 자라가 육지로
올라오는 형국인 자라혈((鼈血)이라하며, 이 고개를 자라고개(鼈血峙)라고 이름 하였다고 한다
우측의 산매마을은 마을이 천태산 밑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고 좌측의 탑립마을은 모산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백제탑이 세워져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자라고개에서 천태산으로 향한다
애기업은 바위?
힘들게 천태산으로 올라간다
천태산(天台山:197.2m:12:28)
정읍시 이평면 도계리와 산매리 영원면 은선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3등 삼각점과
운동기구 시설들이 있으며 정상에서 보니 이른 아침과는 달리 넓은 남도 들녘이 시원스레 보인다
천태산 일대는 백제 오방성(五方城)중의 하나인 중방고사부리성(中方古沙夫里城)의 옛 터라고 전해진다.
서쪽 기슭에는 은선리 고분군이라고 하는 백제의 횡혈식석실분 10여기 가량이 군집해 있으며
동쪽 사면의 이평면 산매리 백운사에는 문화재 자료 제139호인 석불입상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7년∼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한 전국 지방지. 읍지)》
고부에는 ‘천태산은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라는 기록이 있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천태산(天台山)이 군의 남쪽 5리에 있으며 위에 9개의 봉우리가 있고, 그 하나를 일컬어 국사봉(國師峰)
이라고 하며, 산세가 높아 그러하다고 하는 등 그 이후 많은 지리지에 천태산이 수록되어 있다.
동여도(東輿圖:철종 때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한국 색채 지도) 18첩 5변에
고부읍치 북동쪽과 달천 서면에 천태산이 묘사되어 있으며 대동여지도(17첩 5면), 1872년지방지도
등에도 천태산이 표기되어 있다.
백제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복한 뒤, 왜의 장수와 회맹을 맺었던 장소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한국지명총람에는 두승산 유선사 바로 뒤에 있는 바위에서 왜장 천웅장배(天熊長背)와 만남을 가졌다고
하고 천마산(天馬山)으로도 소개되어 있다
오마이 뉴스에 연재된 천태산의 자료를 보면 이곳 천태산 주변에는 마한 구소국의 역사와 백제의
지방 5대 거점중에 하나인 중방성의 역사와 유적, 유물이 발길마다 채이는데 백제시대의 은선리
3층석탑(보물 제167호)을 비롯하여 엄청난 백제의 역사적 흔적들이 흩어져 있는 곳이 이곳이다
천태산 아래에 있는 영원면은 백제의 중방성 지역으로, 충청도의 공주, 논산, 예산 지역에 설치된
방성(方城) 을 포함하여 오방성중의 하나이고, 그 오방성중의 하나인 남방성(南方城)이 이곳 영원면
지역 이라는 것이 여러 학자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그 규모를 대충 살펴보면 달솔계급의 방령 1인이 은솔계급의 방좌 2명과 함께 관장했으며, 군사가
1,200여명이었고, 민가 500호가 주어졌다고 하고, 또 10개의 군(郡)과 현(縣) 및 성(城)을 거느렸는데
정읍, 부안, 고창, 김제지역이 이에 속했다고 하는데 즉, 동진강 남쪽과 노령산맥 서쪽 변산반도 일대가
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방성이 설치된 이유는 이곳이 백제 남방 경영의 요충지이며, 한반도에서 비교적 빨리 벼농사
문화가 시작된 눌제천이 있으며 내륙 깊이 조수(潮水)가 들어와 물류 유통이 수월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태산 정상 삼각점(△정읍310 / 1984복구)
천태산의 역사적 배경만 있을 뿐, 지명 유래에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중국 절강성 태주부에 있는 천태종의 종조인 천태지의(天台智顗)대사가 수행했다는
중국의 천태산을 닮았다고 해서 부른 것은 아닌지? (범여의 생각中에서)
잠시후에 가야할 171,3봉이 보인다
천태산 정상에서 내려서니...
포토존 구역을 만들어 놨다
포토존에서 바라본 정읍시 이평면의 모습
바로 아래에 산매저수지가 보이고,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우측으로 망제봉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 지역은 옛날 고부(古阜) 땅으로 탐관오리 조병갑의 횡포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사진...펌
동학농민혁명의 제1기인 고부민란이 일어난 고부지역은 전라북도의 번성한 고을로써 인근 지역 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써 넓은 평야와 28개의 주변 촌락이 있었으며 주위의 나루들을 통해 어선과
상선이 활발하게 왕래, 인근의 농산물과 수산물은 모두 이곳에 모인 곳이다.
당시 지방 관리들의 학정과 탐학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탐욕스러운 중앙관리들이 부임을
노리던 고장이었다... 당연히 고부 농민들은 갖가지 세금과 잦은 부역에 시달리며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시달렸고 보다못한 녹두장군이라 부르는 지도자 전봉준이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1855~1895)...사진 펌
정봉준의 본관은 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여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뜻을 품게 되어 30여 에 동학에 입교,
얼마 안되어 동학의 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로서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고 시정개혁을 도모하였으며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썼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였다
천태산을 내려와서 뚜렸한 능선을 따라서 간다
천태산에서 내려서면서 바라본 황토현(黃土峴) 전적지쪽의 모습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있는 황토현 전적지(黃土峴 戰蹟地:사적제295호)는 동학농민혁명
발상지로서 1894년(갑오년) 동학혁명운동 당시 농민군이 관군과의 첫 싸움에서 크게
승리한 싸움터였으며, 조선 고종 31년 정월(양 2. 17)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령하여 학정을 일삼던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 해 백산에서 다시 봉기한 농민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이곳 황토현에 진을
치고 있던 전라감영의 관군을 4월 7일(양 5.11) 새벽, 기습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이곳에서의 승리는 농민군의 사기를 크게 높여주었고 당시 농민들이 외쳤던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의 혁명정신이 크게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농민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장성 등 각 현으로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으며 전주성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이때 조선침략을 노렸던 청나라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국정에 개입하자,
농민군들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정부와 화약(和約)을 맺고 전라도 53개 지역에 집강소
(執綱所)를 설치하여 스스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농민군은 9월에 삼례를 기점으로
다시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용감히 싸웠지만 공주의 우금치 전투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후 농민군의 세력이 크게 떨어지고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등
농민군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순국하게 되자,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부패한 정치를
바로 잡아 정의롭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30여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농민군이 부르짖은 민주(民主). 자주(自主). 평등(平等)의 숭고한 애국애족
(愛國愛族)의 정신은 그 뒤 우리민족의 독립운동과 민주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가니...
묘지가 나오고...
운동기구 시설과 오음처사의 묘지가 있는 171.3봉의 정상에 도착한다
171.3봉(12:38)
정상에는 묘지가 있고 운동기구도 보이는데 묘지 우측 아래로 치마바위 0.25km가 있다
171.3봉 정상에 있는 비석
梧隱處士 錦城묘公之墓라고 써 있는데 다른 묘비와 다른게 특이하다
171.3봉에서 등로로 되돌아와서 맥길로 이어간다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에 마사토 지역이라 상당히 미끄럽다
갈림길(12:44)
우측 내리막 임도는 정읍시 이평면 평령리로 내려가는 길이고 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희미한 등로에 산으로님의 흔적이 맥길을 안내한다
관리가 안되어 아카시아밭이 되어버린 묘지의 11시 방향으로 내려간다
뚜렸한 등로를 잠시 걷다가...
우측으로 내려가니 길은 보이지 않으나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길을 안내한다
희미한 등로를 내려선 다음에 시누대 군락지를 헤치며 내려선다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핀 조경수의 농장으로 내려간다
묘지 아래로 내려간다
736번 지방도(12:50)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와 영원면 운학리의 경계를 지나는데 운학리 쪽에
운학버스 정류장과 한길 타조농장 간판이 보인다
파란색 건물을 바라보면서 우측 시멘트 도로로 향한다
운학 버스 정류장과 한길타조농장 간판도 보인다
좌측으로 꺽어진다
노란색 타포린이 처진 타조농장도 보인다
마을 도로를 따라서 가는데 좌.우에 개나리와 목련도 滿開를 준비한다
갈림길에서 우측의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간다
봄 바람난 년들 / 권나현
보소!
자네도 들었는가?
기어이 아랫말 매화년이
바람이 났다네.
고추당초 보다
매운 겨울살이를
잘 견딘다 싶더만
남녁에서 온
수상한 바람넘이
귓가에 속삭댕께
안 넘어갈 재주가 있당가?
아이고~
말도 마소!
어디 매화년 뿐이것소
봄에 피는 꽃년들은
모조리 궁딩이를
들썩 대는디
아랫말은
난리가 났당께요
키만 삐쩡큰 목련부터
대그빡 피도 안마른
제비꽃 년들 까정
난리도 아녀라.
워매 워매 ~
쩌그
진달래 년 주딩이 좀보소?
삘겋게 루즈까정 칠했네
워째야 쓰까이~
참말로
수상한 시절이여
여그 저그 온 천지가
난리도 아니구만
그려 ~
워쩔수 없제
잡는다고 되것어
말린다고 되것어
암만 고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안혀라.
보소
시방 이라고
있을때가 아니랑게
바람난 꽃년들
밴질밴질 한
낮짝 이라도
귀경할라믄
우리도 싸게
나가 보드라고...
좌측에는 목련을 심어논 농장이 보이고...
여산송씨 가족묘(13:02)
여산송씨 가족묘를 지나 농로를 따라서 올라가니...
좌측의 운학리쪽으로 넓은 초지가 조성되어 있다.
난 처음엔 보리밭인줄 알았는데 소의 사료로 사용되는 풀이다
이곳 정읍땅의 한우가 유명해서 그런지 초지가 많이 보인다
전원주택(13:04)
주말이라 휴식을 취하러 온 모양이다
마당에서 고기를 구우며 술을 마시고 있기에 지나가면서 인사를 했더니만
오셔서 술 한잔 하고 가란다...참새가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맥주 2잔에 고기 서너점을 얻어먹고 다시 길을 떠난다
전원주택 옆쪽 농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정읍시 영원면 운학리(雲鶴里)의 모습
운학리는 영원면의 중심지에 가까이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자연마을로는 서당정, 태동이 있다.
서당정은 마을에 서당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태동은 마을이 천태산 아래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산물로는 참외, 고추가 있다.
농로를 따라가던 지맥길은 사라지고 잡목을 헤치면서 묘지로 올라선다
경주이공 묘(13:15)
묘비가 특이하다...커다란 묘비에 通德郎 慶州李公江之墓, 恭人東來鄭氏墓 淸州 石花里 合峯이라
써놨고, 그 옆에 조그만 오석(烏石) 비에는 恭人東來鄭氏之壇이란 써 놓은게 이채롭다
공인(恭人)이란 조선 시대에 정오품과 종오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는 품계를 이르던 말이다
묘지 뒷쪽으로 올라간다
48봉(13:17)
잡목의 저항이 엄청나게 심하다
두릅밭을 지나고...
두릅나무와 산딸기나무 가시에 몸뚱아리는 만신진창이 된다
천신만고 끝에 묘지 아래로 내려선다
시멘트 도로(13:19)
도로명 주소가 태평길로 되어 있다.
난 도로명 주소를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도로명 주소란 미국이나 유럽처럼 넓은 땅어리에나 필요한 것이지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떵어리에 자연부락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그게 왜 필요한 지 이해가 잘 안되고,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마을 이름을
버리고 도로명 주소를 쓰면 국제화가 되나?...뱁새가 황새 따라려면 가랑이 찢어져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여...
이곳에서부터 부안 백산까지 약 8여km 정도를 도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매봉농장(13:21)
농장앞 개사육장에서 개쉬끼 대여섯마리가 때거지로 짖어대며 지랄발광을 한다
매봉농장 우측 아래에는 한국농어촌공사 청량양수장이 있다
갈림길이 나오고 청량양수장 휀스를 끼고 우측으로 향한다
도로명 주소가 창동주산길로 되어 있다
갈림길(13:23)
도로가 맥길이다...평균 해발이 10m 정도이다
길을 잃어버릴까 염려되어...
태양광 단지들이 많이 보인다
축사도 지나고...
도로 좌측에는 청안이씨 세장비도 서 있다
뒤돌아보니 지나온 천태산과 두승산이 보인다
도로와 인공수로가 나란히 간다
오늘은 축사를 참으로 많이 만난다
맞은편에 도로 너머에 고부이씨 제주선묘의 잘 관리된 재실(齋室)이 보인다
도로 삼거리(13:38)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서 청량리로 가는 도로인데 좌측으로 꺽어져 청량리 방향으로 향한다
장내리(長內里)에는자연고 마을로 돌개명당, 돌못, 송곡, 월산, 조소가 있는데 돌개명당은
마을앞에 네 갈랫길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돌못은 마을 앞에 큰 못이 있었는데, 일곱개의
돌로 다리를 놓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송곡은 마을에 옛날 소나무가 많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월산은 달모양의 능선이 둘러싸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문화재로는 전봉준 선생 고택지가 있다.
도로를 따라서 가니 발바닥이 아프다.
산꾼이 산길을 걸어야지 아스팔트를 따라서 걸으니 엄청 불편하다
다원농장 앞(13:40)
청량리(靑良里) 입구(13:42)
정읍시 이평면 청량리는 자연마을로 궁골, 연지가 있는데 궁골은 마을 뒷산이 활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연지는 마을 앞 못에 연꽃이 많이 피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혼자놀기
외롭겠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서 간다
한우를 키우는 축사들이 많이 보인다
좌측은 정읍시 이평면이고 우측은 부안군 백산면으로 들어선다
정애(情愛)마을 삼거리(13:53)
정읍시 이평면 청량리에 있는 정애마을은 한센스병환자 정착촌이 있다
정애교회와 마을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데 이곳부터 좌측은 부안군 백산면으로 들어선다
정애마을 버스 정류장
버스 시간표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서 간다
울 엄니도 저렇게 사셨겠지..내 나이 열아홉에 돌아 가셨으니 이제 기억조차도 가물가물하다
정애마을 정자(13:58)
정자를 지나 직진길로 향한다
희망농장(14:00)
등로 우측으로는 태양광 단지가 보이고..
정애마을 축산 단지를 벗어난다
발바닥에 불이나는 느낌이다
도로 삼거리(14:05)
좌측은 부안군 백산면 대죽리이고 우측은 백산면 하청리이다
이곳부터는 정읍시를 벗어나 맥길은 온전히 좌.우 모두 부안군 백산면으로 들어선다
부안군 백산면 대죽리(大竹里)는 고부천이 마을을 따라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대머리,
작은대머리, 쌍교 등이 있는데, 대머리는 대죽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대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작은대머리는 대머리 뒤쪽 마을로 대죽보다 작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쌍교는 옛날 마을 앞에 두 개의 다리가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도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하청리 방향으로 향한다
도로에서 바라본 부안군 백산면 평교리 봉동마을의 모습
백산면 평교리에 있는 봉동마을은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풍수지리학적으로
봉황이 3개의 알을 품은 형상)의 명당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서 간다
부안군 백산면 하청리(河靑里) 들녘
백산면 하청리는 자연마을로 새터, 산지촌, 세가호뜸, 수성리, 진등, 해정이 등이 있다.
새터는 동쪽에 새로 된 마을을 말하며 산지촌은 해정이 서쪽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세가호뜸은 산지촌 북쪽에 위치하며 마을에 세 집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수성리는 각지의 물이 많이 모여든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진등은 산지촌 서쪽 긴 산등성이
아래에 있는 마을이고 해정이는 마을 앞 해정이 못에 큰 회화나무가 많았으므로 괴정을
속음으로 회정이라 하다가 변하여 해정이라 하였다 한다
705번 도로(14:16)
내가 걸어온 산을 뒤돌아 보는데 참으로 멋있어 보인다
자그만한 범여의 두 다리(足)가 참으로 고생하는구나
자고로 여자와 산은 멀리서봐야 멋이 있어 보이는구나
동학로 도로명 주소가 보인다
갈림길(15:20)
거령교회 표시석이 있는 곳에서 거룡마을쪽을 향해 좌측으로 꺽어진다
거룡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룡2마을 입구(14:27)
거룡1마을(14:30)
부안군 백산면에 있는 거룡리(巨龍里)는 섬진강의 지류가 흐르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경지가 넓게 분포하여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곳이며 자연마을로는 거룡, 새터, 새암, 산전,
가운데뜸마을 등이 있다... 거룡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다. 새터마을은 거룡 남서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암마을은 샘이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산전마을은 거룡 서쪽 산등성이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고 가운데뜸마을은
거룡리 복판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거룡마을 버스 정류장
버스 정류장을 직진하니...
거룡교회(14:32)
이 교회는 코로나바이러스와 상관이 없는지 주일예배를 보고 나오는 신도들이 보인다
교회앞에서 직진 도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등로 좌측에는 정읍에서 부안군 백산면으로 연결되는 29번 국도가 시원스레 달리고 있다
다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용출마을 입구(14:38)
교회에서 직진하면 100m도 안되는 거리를 애둘러 돌아왔다...직진 도로를 권장한다
계속 도로를 따라서 간다
용출마을 버스 정류장(14:42)
부안군 백산면 거룡리에 있는 마을이다
도로 우측의 소나무가 있는 곳이 지맥길이나 29번 국도가 막고있어 그냥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29번 국도 지하차도(14:47)
뒤돌아 본 지맥길과 지하차도의 모습
다시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도로를 따라서 가니 석동마을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석동마을 버스 정류장(14:51)
석동마을이 있는 부안군 백산면 오곡리( 梧谷里)는 고부천이 마을을 따라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난산리, 새텃뜸, 오신, 원머우실 등이 있는데 난산리는 황사포란형의 명당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새텃뜸은 머우실 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고 오신은 머우실 동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며 원머우실은 오곡리의 원마을을 말한다
23번 국도가 보이는 걸로 보아서 백산이 가까워진 느낌이다
넓은 들판이 나오고 고부(두승)지맥의 마지막 산인 백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29번 국도 지하차도(14:58)
지하차도를 지나니 인공수로가 보인다
봉석버스 정류장(14:59)
봉석 정류장 버스 시간표
봉석 버스 정류장이 있는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龍溪里)는 고부천이 마을을 따라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나무다리, 매안, 배가뜸, 장터 등이 있으며 나무다리는 나무로 놓은 다리가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매안은 용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백산 안쪽이 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배가뜸은 배씨들이 많이 산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장터는 백산 장터가 열렸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봉석 버스 정류장에서 우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좌측 백룡정미소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정미소 창고를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골목 깊숙히 들어간 다음에...좌측으로 꺽어진다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우측 밭으로 올라간다
콩밭을 가로질러서 올라간다
팔각정을 바라보면서 농로를 따라서 백산으로 올라간다
백산성 오르면서 바라본 부안군 백산면의 모습
부안군의 동쪽에 위치한 면으로 동진강 하류의 서편에 위치해 중부에 백산(47m)을
비롯한 낮은 구릉지대 외에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군이 첫 지휘소인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했던 백산성이 있다.
본래 조선 시대 고부군 지역으로, 1895년 전주부의 고부군으로 그리고 1896년 전라북도에
속하게 되었으며, 1914년 백산면(白山面) · 거마면(巨麻面) · 덕림면(德林面)을 중심으로 궁동면과
부안군 상동면 · 하동면 · 소산면, 김제군 공산면 · 부량면, 태인군 용산면 등의 일부 동리를 합쳐
부안군 백산면으로 하였고 현재 덕신리 · 용계리 · 죽림리 등 12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평교리에 있던 면 소재지는 현재 덕신리에 있다
백산 아래에 도착하니 백산면 전체가 한 눈에 보이는 최공 묘지가 나온다
8여km 가까이 도로를 걸어온 터라 다리도 아프고 배가 고프기에 남은 과일과
쥬스 하나로 원기를 보충하고 양지 바른곳에 10분정도 베낭을 베개삼아
누워서 하늘을 보면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정상으로 향한다
백산(白山:49m:15:25)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동학정이란 멋진 정자가 있고, 동학혁명 백산 창의비가 있다
지도상에는 높이가 47m라고 표기가 되어 있으나 오룩스 맵에서는 49m라고 나온다
백산 지명은 조선 시대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백산의 역사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산 정상에는
삼국 시대 산성으로 추정되는 백산성이 있는데, 산에 흰색의 화강암 바위가 많아서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백산이란 설도 있으며, 『여지도서』(고부)에 "백산은 군북 30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호구총수』
(고부)에는 신평리 · 하청리 · 대수탕리 등의 동리명이 확인된다
「조선지형도」(김제)에는 백산 동쪽 동진강 하도가 뱀의 꿈틀거림처럼 직강공사 이전의 심한 곡류하천
모습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는데, 산록에 위치한 용계리(龍溪里)는 백산의 모양이 마치 백룡이 물로 들어가는
형국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백산면 백산장 백산초등학교 등 관련 지명이 있다
산 정상에는 삼국 시대 산성으로 추정되는 백산성이 있는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동학군이 첫 지휘소인 '호남창의 대장소'를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농민전쟁 1차 기병 때 호남창의소가 설치되었던 백산은 높이가 47m로, 다른 지방에서라면
산도 아니라 할 만큼 나지막하나 사방이 들판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이곳에 올라서서 보면
주변에 펼쳐진 수십 리 들판이 한눈에 들어와, 관군이 어느 쪽에서 접근해오더라도 금세 알아챌
수 있는 대단히 유리한 지형이다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기병한 농민군은 곧장 고부를 들이치고 3월 25일에는 백산으로 본진을 옮겼다.
소식을 듣고 가까이서 멀리서 주먹을 부르쥐고 달려오는 사람으로 백산은 말 그대로 인산(人山)을 이루었다.
그들이 서면 온 산이 농민의 흰옷으로 덮이고 또 앉으면 손마다 쥔 죽창이 빼꼭하다고 해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지도부는 각지에서 몰려든 그들을 본격적 군대로 재편성했고 총관령에 손화중과 김개남, 총참모에
김덕명과 오시영,영솔장에 최경선, 비서에 송희옥과 정백현을 임명하고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추대하는 등 편제를 갖추었다.
또한 지도부는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충효를 다하고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權貴)를 모두 없앤다’ 등 4개 항의 강령을 발표하였다.
또 일반 백성과 하급 관리들에게는 동참을 권하는 격문을 발표했고 3월 26일경에는 ‘보국안민’이라
적힌 기를 앞세우고 전주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백산 정상의 삼각점(△정읍302 / 1984 복구)
인증샷
등로에서 바라본 백산면 평교리 외거마을의 모습
외거리는 평교의 남쪽 변두리 마을로 원래의 이름은 거마리(巨麻里)다.
거마면이 고부군에 속해있을 때 이곳이 거마면의 치소였다고 한다.
‘거머리’, 또는 ‘그머리’라 하기도 하였는데 일제 때 이후 외거(外巨)라 불렀다.
‘거마마을의 밖’ 또는 그 주변의 뜻이다.
혹 큰 삼밭(麻田)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나 근거가 희박한 말이다.
일제 때는 이 마을에 일본인 마에다농장(前田農場)이 있어서 대형의 미곡 창고들이
즐비하였었고 왜놈들의 집도 여러 채가 함께 있었다.
진등에서 평교로 들어서는 외거 옆에 토끼재(兎峙)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장이 섰음으로
‘토끼장터’ 또는 ‘평교장터’라 했다
부안 백산성 안내판(사적 제409호)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동진강 하류의 서안에 위치한 47.4m의 산성으로 토성의 모습은
지형에 따라 동남에서 서북으로 장축 120m이며, 폭 50~60m의 타원형의 둘레를 두른 테머리식
성책지로서 외곽에 폭 9m~13.5m 회랑을 설치하고, 이 토단위성에 목책을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북변 중앙에 복문의 흔적과 그 반대편인 중앙에 남문 흔적이 있다.
산성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산에 쌓은 성을 말한다. 백산성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660∼663년 사이로 생각되는데, 백산성은 백산 정상을 둘러 쌓아 만든 성으로 바깥성을
포함한 4개의 단이 있으며, 토단 바깥으로는 말뚝을 박아 울타리를 둘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훼손된 곳이 있으나 건물터, 옛 우물터, 삼국시대 토기조각들과 높이 3∼4m 정도의 토단이
잘 남아 있는데 이 산성은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이 근거지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성곽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동학혁명 백산 창의비
동학농민운동 지도자인 전봉준(全琫準)은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 조병갑의 거듭되는 악행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ㆍ무장(茂長)ㆍ금구(金溝)ㆍ정읍(井邑)ㆍ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ㆍ진멸권귀(盡滅權貴)ㆍ
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정읍·고창·
무장 등에 이어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봉기 하였다.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公州)에서 일본군과의 대격전 끝에
대패(大敗)하고 10월 금구싸움을 끝으로 종식되었는데 전봉준은 순창(淳昌)에 피신,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지방민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동지들과 함께 1895년 3월 사형당하였다
백산 정상에서 한참을 머무른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오늘 이곳까지 19km 넘게 걸으면서 산이란 곳에서는 처음으로 부부인지
연인인지 모를 남.녀 2명을 만났다...서로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산악회에서 온다거나 개인이 왔더라도 대부분이
아니 거의다가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는데 고부천과 동진강이 만나는 합수점까지
가보고 싶어 걸어가기로 한다...그 곳은 서울로 가는 버스가 있는 부안읍내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더 수월할 것 같다
원래 맥길은 동학정 앞 대나무 숲으로 가야하나 등로도 없고 채석장이 있어서 편한 우회길을 택한다
계단을 내려선 다음에...
좁은 골목길을 내려간다
백산에서 합수점까지의 트랙
백산 삼거리(15:35)
백산 삼거리에서 좌측의 2차선 도로를 따라서 간다
회포마을 입구(15:38)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회포마을의 모습
회포마을은 옛날에는 백산성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들이 회포마을에 들러 쉬어간
갯가라 하여 마을 이름을 ‘돌아올 회(回), 물가 포(浦)’를 사용하여 회포(回浦)라 하였다
회포마을 버스 정류장(15:40)
뒤돌아 본 회포마을의 모습
광활한 백산 들녘의 모습
백산면은 지리적으로는 동북으로 김제군과 접하고 동남으로는 정읍과 인접하여 동진강과
고부천(古阜川)의 유역에 위치하고 있는 평야지역의 비교적 부유한 면인 이 지역은 1914년
이전에는 고부군(古阜郡)에 속한 땅이었는데 일제가 한일합방 후 전국의 행정구역을 저들이
통치하기에 편리하게 대대적으로 개편을 하면서 군현을 통합 폐철도 하고 면방(面坊)을 합병
또는 폐지하면서 고부군을 폐군하였다.
그러면서 고부군의 백산(白山), 거마(巨麻), 덕림(德林)의 3개 면을 부안군에 편입시킨 땅이다.
서북지역과 둥북지역은 고부천과 동진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지역이요 동남부에는 약간의
야산과 구릉지역인데,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만석보(萬石洑)를 쌓아 농민들을 가렴주구로
착취한 곳도 이곳 백산과 이평 지역 땅이요 그로 인하여 동학군이 들고 일어나 3월기포를 선포하고
전주성에 입성한 곳도 이곳 백산산성에서였으며 일제가 가장 눈독을 드려 농지를 수탈했던 곳의
하나도 이곳 백산 땅이다.
동진강 합수점으로 이어지는 맥길은 채석장 옆 절개지 붉은 기와집 쪽이다
도로를 따라서 한없이 걸어간다
금판마을 입구(15:47)
부안군 백산면 금판리 원금마을로 가는 길이다
도로를 걸어가는데 산골에서 산과 하늘만 보고 살았던 범여는 이곳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부안군 백산면 금판리(金坂里)는 자연마을로는 거문구지, 고부뜸, 고신, 동강촌, 뒷뜸,
앞뜸등이 있는데 거문구지는 지형이 곶이로 되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며 고부뜸은
옛날 고부군에 딸렸던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고신은 고부뜸 동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동강촌은 현호 북동쪽
동진강가에 있는 마을을 말하며 뒷뜸은 현호 뒤쪽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앞뜸은
현호 앞쪽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상마을 입구(15:50)
산성마을은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마을이다
신금마을 입구(15:51)
부안으로 가는 2차선 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지니 신금마을 버스 정류장과
오석으로 된 신금마을 표시석이 있고, 인공수로가 지나가는 위에 사각정자가 있고
금판교회와 금판정미소 간판이 보인다
금판 정미소 간판을 보며, 들판 가운데 도로를 따라서 신금마을로 향한다
금판리 신금마을로 들어선다
금판정미소(16:00)
신금마을 가운데를 지나간다
신금마을을 빠져나오니 폐가 한 채가 오늘의 우리 농촌의 실상을 보여주는 듯 하다
도로를 건너서 농로를 따라서 가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가도가도 끝이없는 외로운 길, 나그네길...중략...
이별의 종착역’이 흘러 나오는데 마치 오늘 나의 현실을 이야기 해주는 듯 하다
뒤돌아보니 논 가운데 있는 금판교회 너머로 백산이 보인다
해발 50m도 안되는 산이 엄청 높아 보이는데 그도 그럴것이 이곳이 해발8m 이다
논 가운데의 농로를 따라서 가다가...
고부천의 제방뚝으로 올라서 현호마을로 향한다
제방에서 바라본 고부천(古阜川)의 모습
고부천은 고창군 신림면 도림리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다 송룡리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꾼 후 고창군 성내면과 흥덕면의 여러 동리를 지나 동림저수지를 만드는 하천이다.
계속 북쪽으로 흘러 정읍시 고부면 백운리 용수 마을 앞에서 소성천을 합류한다.
이어 용흥리의 신용(용흥) 마을 앞에서 운흥천을 합한 후, 북동쪽으로 약간 방향을 바꾸어
영원면 풍월리 · 앵성리 · 장재리를 지나 북류하며, 부안군 백산면 대죽리 · 평교리 · 덕신리 ·
금판리의 평야지대를 지나 부안군 동진면 장등리 앞에서 동진강에 유입되는 하천이다.
고부라는 명칭은 『삼국사기지리지』에 등장한다. 눌제천(訥堤川) · 눌천(訥川)으로도 불렸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고부)에 "눌제천은 근원이 흥덕현의 반등산에서 나와 군의 서쪽 10리에 와서
눌제천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부안의 동쪽에 와서 모천과 합하여 동진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부천 제방을 따라서 가는데 목장의 개들이 엄청나게 짖어댄다
왕금마을(16:17)
부안군 백산면 금판리에 있는 마을이다
고부천 뚝방을 버리고 마을 가운데를 질러서 간다
왕금마을 버스 정류장
하루에 3대밖에 안 다니는구나
현호마을로 가는 길
뒤돌아 보니 백산이 조그맣게 보이니 참으로 많이도 걸어왔구나
동진 갈림길(16:24)
좌측으로 가면 고부천 건너 부안군 동진면으로 가는 길이다
호남평야가 넓긴 넓다
현호마을 표시석도 지난다
서해안 고속도로(16:31)
현호마을 버스 정류장(16:35)
버스 정류장 옆에는 현호마을회관이 있다
현호마을회관
부안군 백산면 금판리에 있는 현호마을이 생겨난 유래는 약 200년전 동진면 하장리 원하장에
살고 있던 호조참판 최갑용이라는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분가할 때가 되어서
터잡을 걱정을 하여 오던중, 어느날 꿈에 허허벌판 갈대밭을 헤매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서기(瑞氣)가 어려있는 곳이 보이기에 그곳을 찾아가 보니 검은 암소가 무릎을 꿇고 일어서려 하고
그 편에 큰 아들이 서 있고, 그 옆에는 도복 차림의 도사 한 분이 있어 하는 말이 ‘이 놈에게 맡겨야 돼
너가 옳게봤어, 그래 옥답을 일구어야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이하다 생각하다 깨어보니 꿈이었는데 하도 신기해서 즉시 집을나와 마을길을 따라나서 강을 건너
강 기슭을 한없이 걸어갔더니 꿈속에서 본 곳이 눈 앞에 보였다.
깜짝 놀라서 필시 이는 선영께서 현몽하신 것이라 깨닫고 곧 바로 돌아서서 결단을 내려 둘째 아들을
분가시켜야 할 터인데도 선영의 가르침이라 생각하고 큰 아들을 분가시켰는데 과연 넓고 황량한
벌판을 개척하여 옥토를 만들어 십리 들은 남의 땅 한치도 밟지않게 되었고 슬하에 10여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마을이 번창하여 남쪽 들녘은 수복리, 북쪽 들녘은 삼선동, 동쪽 들녘은 유선동,서쪽 들녘은
야은동이라 이름짓고동쪽 강변에 선착장을 개설하여 동향이라 하였다
현호마을 들판 가운데를 지나...
동진강 제방에 올라서니 자전거 도로이다
제방 아래로 내려선다
억새밭을 치고 나가는게 장난이 아닐 정도로 힘이든다
좁은 개울을 건너야 합수점이 뚜렸하게 보이는데 폭이 2m 이상이라 숏다리 범여는 택도 없다
꿩대신 닭이라 했던가...합수점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고부천/동진강 합수점(16:50)
옥녀봉 아래에서 시작한 맥이 이곳 합수점에 入水하면서 범여도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인증샷
억새 너머로 보이는 동진강은 전라북도의 정읍시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새만금 사업지구로 유입하는
하천으로 동진의 지명은 동진나루와 관련이 있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부안)에 "동진은 통진(通津)
이라고도 하며 벽골제와 눌제의 물이 합해져 북쪽으로 흘러 이 나루가 된다 현의 동쪽 16리에 있다"라고
하는 관련 기록이 확인된다
현재의 동진강은 구간별로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우선 동진강 상류에 해당하는 상두산과 묵방산 자락에서 나온 물이 칠보천과 축현천을 합해 용호천을
만나기까지의 구간은 도원천(桃源川) 평사천(平沙川) 또는 남천(南川)이라 하였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
(태인)에 "남천은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상두산 남쪽에서 나와 이평에 이르러 정읍의 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김제군 동진으로 들어간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정읍시사」에 의하면 도원천이 상두산 북쪽에서 발원한 용호천(견천)과 합류하여 정읍천을
만나기까지의 구간은 대각천(大角川) 또는 태인천(泰仁川)이라고 하였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
(고부)에 태인수(泰仁水)「대동지지」(태인)에 대각천이라는 명칭이 확인된다
현재 태인면 거산리의 거산교 바로 아래에 있는 대각교는「해동지도」(태인)에도 표시되어 있다
또「신증동국여지승람」(고부)에 "모천(茅川 현 정읍천)은 근원이 정읍현의 내장산에서 나온다
북쪽으로 흘러 군의 동쪽 15리에 와서 서쪽으로 꺾여 태인수(泰仁水 현 동진강 중상류)와 합하여
부안현의 동진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여 결국 정읍천과 태인의 태인천 또는 남천이 합쳐진 이후의
구간을 동진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합수점을 뒤로 하고 현호마을로 되돌아 간다
참으로 평화롭다
현호마을 오는길에 부안 택시를 호출하고 마을에 도착하여 동네 어르신들에
양해를 구하고 회관안에 들어가서 깔끔하게 씻고 나오니 택시가 기다리고 있다
택시를 타고 부안 터미널로 향한다(택시비 11,800원인데 10,000원만 받는다)
부안터미널(17:30)
표를 예매하니 시간이 20분정도 여유가 있어 커피 한잔을 마신다
올해들어 3번째 이곳을 왔더니만 전혀 낯선 느낌이 들지 않는다
부안발 → 서울행 버스표
부안에서 17시 50분에 출발하는 버스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아 거리를 두면서 앉아 올 수가 있었다
정안휴게소에서 15분간 휴식을 취했는데도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아 집에 도착하니 저녁 9시 반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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