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도보고 뽕도 따겠다는 계획은
一場春夢이 되어버린 산행길...
☞ 산행일시: 2025년 09월 14일
☞ 산행날씨: 비 온후의 후덥지근하고 흐린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5.8km + 들머리 1.5km / 3시간 0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거조사- 거조사 일주문- 갈림길- 회향원- 부귀사 갈림길- 무명봉- 임도1
임도2- 임도 안부- 영천이공&파평윤씨 묘- 무명봉- 257m봉- 안부
무명봉- 안부- 파묘- 무명봉- 226.8m봉- 갈림길- 안부- 무명봉
천주교인 묘지- 갈림길-신원고개(구디터고개)- 안부- 무명봉- 199.6m봉
안부- 갈림길- 농장 철조망....... 넓문이고개
☞ 소 재 지: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청통면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로 활동한 지가 어언 25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이번주는 산행을 하지않고,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인 고운사에서 1박 2일간에
열리는 팔재계 수계식에 참석했다가 수계식이 끝나고 일요일날 김천에서 지인과
만나 점심 약속이 있어서 불가피하게 도반들과 같이하는 관광버스를 타지않고
자가용으로 가야 할 형편인데, 아무래도 체력에 무리가 올듯 싶으나,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입재식이 저녁 5시라 그래도 매주가는 맥길을 빠지자니 너무 아쉬운 생각이 들어서
이리저리 검색을 해본 결과 고운사에서 그리 멀지않은 미천(신산경표상:갈라)지맥과
의성(신산경표상:오토)지맥중에 한곳을 짧게 산행을 하려고 하는데, 미천지맥은
분기점을 내려오면서 날머리의 탈출거리가 만만찮아 포기를 하고, 비교적 날머리의
탈출구간이 편한 의성지맥을 택하고, 아침 7시에 집에서 출발한다.
집을 나와 국도를 따라서 여주까지 왔다가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가는데,
기상청의 예보로는 흐림이라 했는데, 자동차가 충주를 지나 괴산으로 향하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참으로 난감하다...기상청의 예보를 그리 신뢰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베낭이 아닌
소형베낭을 가지고 온 바람에 우중산행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으니 난감하다.
문경휴게소에 들려 유부우동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비는 잠깐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쏟아지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중부내륙고속도로
낙동J.C에서 상주~영덕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가다가 북의성I,C를 빠져나와
의성읍내를 지난 다음에 의성군 사곡면과 청송군 현서면의 경계에 있는 화목재에
도착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 4시간 10분이나 소요되었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2018년 4월에 위천(신산경표상:보현)지맥 첫 구간을 걸을때 왔으니
7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이곳 산행을 하면서 몸에 이상을 발견하여
폐암 초기라는 판정을 받고, 그 해 6월에 수술대에 누울때만 하더라도
내가 지맥 산행을 이어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다시 이곳에 오니
감회가 새롭구나...거기다가 그 당시에 날머리로 잡은 시곡재로 가려다가
이곳 화목재에서 구무산 주변을 매입하여 약초를 심어놓고, 가지 말라는
구무산영농조합의 山主들과 1시간 이상 실랑이를 하다가 포기한 아픈
기억도 있는 고개이다

화목재(和睦峙:395m:11:10)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신흥리와 청송군 현서면 화목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고개가 연결되는 화목리의 이름을 따서 화목재라 하였고 화목령이라고도
하며 현서에서 춘산으로 넘어가는 68번 도로가 지나가는데 이곳 사람들은
화목재보다는 춘산재로 더 알려져 있으며 고개 우측으로는 커다란 사과밭이
보이는데, 이곳도 유명한 청송사과의 산지인 듯 하다

산행을 시작하다(11:20)

고개 아래에 있는 현서면 화목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한 곳으로, 자연마을로는 화목, 원화목, 도토막, 댓골마을 등이 있으며,
화목마을은 화목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원화목마을은 화목의 원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도토막마을은 원화목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댓골마을은 도토막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두 개의 산줄기가 뻗어 골짜기가
대나무통처럼 쭉 뻗어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화목재에서 분기점인 구무산까지는 3km정도의 거리지만 주변에
사과밭이 있어서 차량이 다닐정도의 넓은 농로로 되어 있어서
아주 편하게 부담없이 구무산으로 향한다

농장(11:30)
산행을 시작한 지 10분만에 사과농장에 도착하니, 예전과 마찬가지로
많은 犬公들이 지랄발광을 하면서 격하게 환영을 하고 견공들의
울음소리에 쥔장인 듯한 남정네가 나타난다.
이 분은 구무산영농법인 소속이 아니고, 이곳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농장주인데, 나에게 하는 말...나에게 어디 가시냐고
젊잖게 묻는다...사실대로 말하니 자기하고는 상관이 없고, 가고
않가고는 어르신 맘이지만 지금 영농법인 산주들이 교대로 산을
감시하고 있기에 통과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예전에 겪어봤던 자들이기에 그냥 포기하는게 시간을 절약할 듯
싶어서 구무산으로 향하는 길을 포기하고 화목재로 되돌아 간다

화목재까지 태워주고 가는 사과농장 쥔장
허무한 발걸음으로 화목재로 내려가는데, 잠시후에 사과농장
쥔장이 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화목재까지 태워 달라고 하니
군말없이 태워주고, 난 화목재에 내린다(11:42)

이곳까지 산행을 못하다는게 너무나도 억울하다.
팔재계 입재식까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있어 어디가서 시간을
때우기도 너무 애매하여,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데, 갑자기 지난
7월말경에 산행을 하면서 식수가 바닥나서 중간에 포기란 신녕(유봉)
지맥 짜투리 구간이나 땜방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무작정 차를 몰고 영천시 청통면에 있는 거조암으로 향한다.
청송군, 현서면과 군위군 삼국유사면을 거쳐 영천시 신녕면에서
거조암으로 향하는데 다행히 길은 엄청좋고, 교통량이 별로 많치않아
60여km의 거리를 1시간 조금 넘게 걸려서 거조암 주차장에 도착한다.

거조사 주차장(12:55)
예전에는 거조암이라 불리던 곳이 거조사으로 사찰명이 바뀐 모양이다
이곳에 성지순래를 와본지가 30여년이 된 듯 하니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오후 1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이라 맘이 급하다.
이곳에서 산행을 끝내고 고운사까지 가려면 80여km가 넘는 거리라서
거조사 영산루 앞에있는 주차장에서 愛馬를 세워놓고, 거조사 내부는
산행이 끝나고 시간이 나면 둘러 보기로 하고 서둘러 산행을 준비한다

2번째 산행을 시작하다(13:05)
의성(신산경표상:오토)지맥을 하다가
쫒겨왔으니 2번째 산행을 하는 셈이다

접속구간을 가기 위해서는 조금전에 자동차로 올라왔던
길을 따라서 일주문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길 옆에는
조그만 저수지가 보인다

저수지를 지나니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에는 불호당이라는
멋진 건물이 나오지만 지금은 맘이 급해서 관심이 없다

거조사 일주문(13:15)
『 八公山居祖寺 』 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멋진
거조사 일주문이 맘 급한 범여에게 한마디 툭 내볕는다.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했잖은가 하면서...
선 채로 低頭三拜의 禮를 올린다
* 일주문(一柱門)이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주(四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문으로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건축양식은 주로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 문에 많은 현판(懸板)들을 걸어 사찰의 격(格)을 나타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일부문으로는 동래 범어사(梵魚寺), 양산 통도사(通度寺), 합천 해인사
(海印寺)의 일주문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중 통도사의 경우 문의 중앙에 ‘영축산
통도사(靈鷲山通度寺)’라는 현판을 걸어 사찰의 명을 밝히고 좌우 기둥에
‘佛之宗家(불지종가)’와 ‘國之大刹(국지대찰)’이라는 주련(柱聯)을 붙여서
이 절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갈림길(13:17)
일주문을 지나니 창고건물이 나오고 버스정류장
표지판이 있는데 안신원이라 표기되어 있는 이곳이
거조사의 버스정류장 종점인 듯 하다

좌측으로 들어서니...

풀섶에 묻혀버린 멋진 팔각정이 있고, 이정표가
나오는데 들머리로 가기 위해서는 부귀사 방향으로 가야 한다

회향원(13:18)

회향원을 지나 개울을 건넌 다음에 오색마루라는
찻집같은 민가 가운데를 통과하니...

산으로 올라가는 뚜렸한 등로가 나오는데 비가 온
이후라서 그런지 비포장 임도는 상당히 미끄럽다.

부귀사 갈림길(13:27)
부귀사로 가는 길은 직진으로 올라가지만
등로는 거의 보이지 않고, 마루금 접속구간은
우측의 뚜렸한 임도로 향한다

지난 7월에 걸었던 신녕(유봉)지맥 능선이
또 왔냐고 인사를 하면서 물끄러미 범여를 내려다 본다

마루금에 복귀하다(13:30)

지난 7월에 저 휀스속에 갇혀서 나를향해서 모질게도 짖어대던
멍멍이는 복날에 쥔장에게 목숨을 받쳤는지 보이지가 않구나...

본격적인 지맥길을 이어가면서 오르막으로 향한다

약초밭의 철조망은 우측으로 향하고
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무명봉(13:30)
본격적인 땜방(보충) 산행에 나선다
지난 7월에 식수가 떨어진데다가 폭염경보로 인한 무더위로
이곳에서 식수를 구하러 계곡으로 탈출했던 아픈 추억이
고스란히 베여있는 봉우리이다

무병봉 아랫쪽에 있는 묘지 너머로 보이는 청통면 들녘
비가 온 이후라서 그런지 모든게 흐릿하기만 하다
영천시 청통면(淸通面)은 현재의 서부동에 속해 있는 오수동에서
비롯되었는데, 오수동의 원래의 명칭은 ‘청통’인데, 이는 “항상 맑은
물이 흘러간다”는 뜻으로, 이 마을은 영천성(永川城) 밖에 있으며
역촌(驛村)으로 발달한 마을이었다.
여러 문헌에도 오수동을 청통역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근대 행정 체제가
확립되면서 오수동은 산저면에 속하게 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이 조정될
때에는 산저면·북습면·죽남면과 아촌면 일부가 통합되어 새로운 행정 구역이
형성되었는데, 이때 청통역의 이름을 따서 그 통합된 지역전체를 ‘청통면’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오수동은 1982년에 다시 영천시에 편입되었으나,
그 이름만은 여전히 청통면에서 사용하고 있다.
경상북도 『영천군지』에 보면, 역원(驛院)이었던 청통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장수도에 속하며 군의 서쪽 3리에 있으니, 본군의 청경역과는 40리를 거리하고 남쪽으로
경주의 아화역과는 30리를 거리하며, 서쪽으로 하양의 화양역과 30리를 거리하고, 북쪽으로
신녕의 장수역과 40리를 거리한다.”

무명봉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는데...

다시 가랑비가 조금씩 뿌리기 시작하지만
지금와서 산행을 중지하기도 그렇고 하여
그냥 비를 맞으면서 걷는다

잡목 사이로 이어지는 흐릿한 등로로 내려서니...

조금전 개집이 있는 곳의 임도에서 내려오는 길을 만난다

임도1(13:36)
우측으로 내려가는 임도로 가도되지만 오늘 산행
거리가 얼마되지 않는 땜방이라 그냥 트랙을 따라서 걷는다

소나무 숲길 사이로 희미한 맥길은 이어진다

산초나무들의 태클이 엄청나게 심하고 팔뚝이 할키면서
몸뚱아리에 생채기가 계속되면서 내리막길로 향한다.
늘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산에만 들어서면 그 힘듬은
어디로 가버리고, 현실을 망각한 체로 범여는 길을 걷고 있으니...

잠시후에 오를 257m봉이 얼굴을 내민다.
저 봉우리는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 등록된 족보있는
봉우리는 아니지만 일반산행기에는 257m봉으로 기록된
봉우리로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짧은 숲길을 헤치고 내려서니 조금전에 우측으로 돌아간
임도로 내려가는데, 쥔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치된
엄나무들이 임도 주위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임도2(13:40)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 임도를 버리고 다시 숲속으로 내려간다

다시 등로는 거칠어지고, 길게 드러누운 참취꽃이 마지막으로
정열을 불태우는데...그래! 올해도 참 열심히 살았구나.
또 내년에 봐야제...

임도 안부(13:43)
넓은 공터로 된 임도 안부 좌측 아래에는 느타리버섯을
재배하려는지, 토막난 통나무들이 많이 보이고, 앞에는
철조망이 길을 막고있다

임도 안부를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
다행히 우측으로 철조망의 구멍이 뚫려있어
그곳으로 올라서니 묘지가 보인다

영천이공&파평윤씨 묘(13:45)

구름 / 이성선
구름은 허공이 집이지만
허공엔 그의 집이 없고
나무는 구름이 밟아도
아파하지 않는다
바람에 쓸리지만
구름은 바람을 사랑하고
하늘에 살면서도
마을 샛강에 얼굴 묻고 웃는다
구름은 그의 말을
종이 위에 쓰지 않는다
꺾어 흔들리는 갈대
잎새에 볼 대어 눈물짓고
낙엽 진 가지 뒤에
기도하듯 산책하지만
그의 유일한 말은 침묵
몸짓은 비어 있음
비어서 그는 그리운 사람에게 간다
신선한 강에 쓰고 나비 등에 쓰고
아침 들꽃의 이마에 말을 새긴다
구름이 밟을수록 땅은 깨끗하다

가파른 묘지 위로 올라서 숲길에 접어든다
앞서간 선답자들의 시그널 등불 삼아 길을 걷고
있지만 내리다가 마다를 반복하는 이슬비가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감히 범접조차 하기 힘든 맥산꾼 代父의 흔적...

완만한 능선으로 따라서 무명봉에 올라선다

무명봉(13:48)

이슬비의 거추장스럼에 신경을 쓰다보니
지도상 표기조차 안되어 있는 무명봉인
257m봉에 도착한다

257m봉(13:51)

257m봉에서 맥길은 우측 아래로 내려서고...

무심코 걷다보면 알바하기 딱 좋은 코스이다

뫳돼지 사우나도 통과한다

가느다란 나무들 사이로 이어지는 지맥길
오늘은 길이 힘든게 아니라, 내렸다, 그쳤다하면서
산꾼을 괴롭히는 가랑비의 태클이 힘이드는구나.
하기사...살면서 어디한번 편한 삶을 살았던 있었던가...
운명이라 생각하면서 묵묵히 걷고, 또 걷는다

예전에 묘지가 있었던 넓은 공터도 지난다

이 넘들 몸은 정갈히 하는 모양이다

안부(13:55)

고도가 낮은데다 남녘지방이라 그런지 산모기와 깔따구,
쇠파리들이 물어대는 통에 비와 땀으로된 몸뚱아리는
가려워서 미칠 지경이지만, 이 역시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에
묵묵히 순응하며 걸어간다

무명봉(13:58)

우선 먼저
무엇이 옳고 그런가를 안 다음
그것을 남에게 가르쳐야 한다
자기 자신조차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런가를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남에게 가르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고통만 줄 뿐이다
- 법구경 중에서 -

아!...이게 뭐여, 남녘지방에서 보기 힘든 봉래꼬리풀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봉래꼬리풀(꽃말:달성)
금강산의 높은 곳에서 자라는데, 금강산을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비유하여 봉래꼬리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봉래꼬리풀은 현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서 꼬리풀이라는 이름이 붙은
품종은 아주 많지만 크게 꿀풀과와 현삼과의 두 과로 나뉘는데, 기본종인
꼬리풀은 현삼과에 속하고, 물꼬리풀은 꿀풀과에 속한다.
기본종인 꼬리풀에 비해 키가 20㎝로 매우 작으며, 잎의 표면은 녹색이고
뒷면은 붉은빛이 돌며 달걀형으로 어긋나고, 가장자리에 는 둔한 톱니가 있다.
줄기는 약하게 붉은빛이 돌며 긴 털이 있으며, 7~8월에 연보라색 꽃이 핀다.
꽃대에 꽃자루가 있는 여러 개의 꽃이 어긋나게 붙어 밑에서부터 피면서 위로
올라가며, 꽃받침은 5개로 갈라지고, 찢어진 잎은 길고 가장자리에 털이 있으며
달걀형이고 끝이 뾰족하고 수술은 2개이고, 꽃부리보다 2배 정도 길다.
열매는 9~10월경에 달리며,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며 멸종위기종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강원도 북부지역과 금강산에 분포한다.

안부(14:05)

파묘(14:08)

비가온 뒤라서 그런지 산모기의 극성이 도를
지나치는 느낌이나, 죽자사자 덤비는데 우짜겠나?
내 몸뚱이를 뜯어 먹다가 배부르면 그만 달려들겠지...
그래 내 몸뚱아리 좀 布施해서 니가 배부르면 그것도
좋은 일이제...

무명봉(14:10)

빗물을 머금은 나뭇잎은 계속 산꾼을 괴롭히지만
이런것쯤은 감수하고 걸어야 하는게 맥길이 아니던가...
묵묵히 오르다가 보니 묘지들이 나오는구나

묘비가 특이하다... 本貫을 표기하지 않았으니
어느 김씨는 알 길이 없는데, 후손들이 뿌리를
잃어버릴까 하는 괜한 걱정을 한다...그거야 자기들의
사정인데...

바로 윗쪽에 있는 묘비도 본관을 표기하지 않았고
기독교인 묘지를 올라서니 준.희쌤의 226.8m봉
산패가 산꾼을 반기는구나

226.8m봉(14:18)

226.8m봉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서니 묘지로
오르는 길인지 등로로 마치 고속도로(?) 수준이다

갈림길(14:19)
직진의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용당골로 내려가는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져서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맥길을 이어간다

등로가 처음에는 희미했지만 곧바로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땅 아래서 올라오는 풋풋한
흙냄새가 상큼하다

안부(14:22)

무명봉(14:27)

무명봉에서 등로는 갑자기 사라지고 선답자의
흔적을 보면서 내려서니 천주교인 묘지가 나온다

천주교인 묘지(14:29)

갈림길(14:31)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서니 차량소리가
간간히 들리는데 신원고개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신원고개로 내려선다

신원고개(구디터고개:145m:14:37)
경북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와 영천시 신녕면 매양리, 완전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신녕면 소재지에서 거조사로 이어지는
신원길(도로명 주소)의 2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고개에는 꽤나
큰 규모의 농장처럼 보이는 민가가 있는데 마당 한가운데 멍멍이
한마리가 짖지도 않고 산꾼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신원고개의 지명은 신원리의 이름을 따서 지은 고개이름이고
구디터고개는 좌측 아래에 있는 신녕면 완전리의 마을중 구디터의
지명에서 유래된 듯 하며, 완전리(莞田里)는 왕골논이 많으므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한다

도로옆 나뭇가지에 반바지님의 신원고개 코팅지
신원고개의 또다른 지명인 구디터고개는 군인터 또는 구돋터라고도
부르며, 조선 초기에 군인들이 있었다하여 군인터라 전하기도 하여
또 다른 설로는 아홉마리의 돼지가 죽을 먹는 형상처럼 보인다고 해서
구돈(九豚)터라 전해내려 오는 고개이다.

농장옆 도로에서 맥길은 도로를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간다

잠깐 소강상태를 보였던 빗줄기가 다시 굵어지면서
맥꾼을 괴롭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능선으로 오른다.
그냥 주어진 의무인양, 숙명적으로 걷고 또 걷는다

안부(14:43)

아주 짧은 거리라고 우습게 보고 땜방길에 들어섰는데
비가와서 그런지 그리 만만하지는 않구나...마치 골프장서
숨어있는 핸디캡이 있는 홀처럼...

무명봉(14:47)

무명봉에서 맥길은 우측으로 향하고...

잠시후에 족보있는 199.6m봉 정상에 도착한다

199.6m봉(14:50)

판독이 불가능한 199.6m봉 정상 삼각점

199.6m봉 정상에서 맥길은 3시 방향으로 이어지고
비야 오던말던 아무런 생각없이 길을 걸어간다

안부(14:52)

갈림길(14:54)

선답자의 흔적을 보면서 내려가니
갑자기 농장 철조망이 맥길을 막아선다

농장 철조망(14:57)

숏다리의 悲哀를 느끼면서 농장 대문을 넘어서 가는데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곳에서 중장비를
동원하여 산을 깍아내던 쥔장이 나를 보고는 사유지를
무단으로 침입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찍소리도 못하고 다시 되돌아 나온다

비는 더 쏟아지고 철조망 바깥쪽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사과밭을 보이고 트랙을 확인하니
지맥 마루금과 너무 많이 멀어지기에 다시
철조망 문이 있는 곳으로 다시 올라간다

아침에 구무산에 오르다가 쫒겨와서 이곳에서 산행을 하다가
이곳에서 또다시 봉변을 당하니 참으로 김이샌다.
거기다가 비가 계속 내리는데 비를 맞은 똑닥이 카메라가 멈춰 버린다.
사실상 김이 새니 사진을 찍고싶은 생각도 없다...울고 싶은데
빰맞은 꼴이랄까...

오늘 산행의 종점인 계지마을로 내려서고, 짧은 구간의
산행내내 산꾼을 괴롭혔던 비는 그치고, 구름 사이로
햇볕이 보인다...똑닥이는 완전히 맛이 갔고, 비닐봉지에서
꺼낸 스마트폰으로 기록을 시작한다
계지마을 뒷쪽으로 팔공산의 능선이 범여에게 고생했노라
하면서 산행을 하다보면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고 맥길을
걷는다면 뭔 재미가 있겠냐 하면서 위로를 한다

넓문이 고개에서 바라본 계지마을의 모습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에 속해있는 계지리(桂芝里)는 평지에 자리한 곳으로, 경지가
넓게 분포하여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곳으로 상계동과 지동을 병합하면서 두 마을의
이름을 따 계지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널문이, 망지동, 계림, 평지마마을 등이 있다.
널문이마을은 계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신령군이 있을 때, 이곳이 하양현으로 통한 큰 길이어서
크고 넓은 관문을 달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망지동마을은 계지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계림마을은 망지동 서쪽에 있는 마을로, 앞 냇가에 숲이 많았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평지마을은
평지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넓문이고개(16:10)
영천시 청통면 계지리에 있는 고개로 예전에 고개였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청통면소재지에서 신녕면으로 이어지는 919번의 4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있어서 고개라는 느낌은 전혀없고, 도롯가에는
아담한 카페 하나와 금강조각원이라는 석재공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지명의 유래는 청통면 계지리에 있는 자연마을중에 한 곳이 넓문이 마을
마을에 있는 고개라서 불렀으며, 넓문이 마을은 계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이곳이 예전에 신령군에 속해 있을 때, 이곳이 하양현으로 통하는 큰 길이어서
크고 넓은 관문을 달았다고 하여 붙혀진 지명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거조사 주차장에 세워둔 愛馬를 회수하기 위해서 신녕면
택시에 전화를 하니, 청통택시를 부르라면서 일방적으로 끊어 버린다
다시 114에 전화하여 청통택시를 연결해 달라니 엉뚱하게 영천택시를
해주는데, 영천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24km나 걸린다면서 신녕택시를
부르라면서 끊어 버리는데,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오지만 저녁에 팔재계
수계식에 참석하는데 화를 내면 안되지 하면서 신녕택시를 호출하여 거조사로 향한다

거조사 영산루(16:40~50)
넓문이 고개에서 택시를 타고 15분정도 걸려서 거조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나의 愛馬가 쥔장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그래!...고맙다.
차에다 베낭을 벗어놓고, 시간이 없어서 간단하게마 거조사를 참배하려고
거조사 영산루로 들어서면서 선 채로 저두삼배의 禮를 올리고 마당으로
올라간다...20년도 훨씬 넘은 시절에 성지순지 순례차 들렸던 거조사...
예전에는 거조암(居祖庵)이라 불렸는데, 2021년 3월 23일 문화재청이
거조사(居祖寺)로 명칭을 바꾸었다고 한다.

거조사 영산전의 모습
거조사라는 이름은 팔공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여,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이다.
원효대사가 거조암을 창건한 뒤 진평왕 13년에 혜림법사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하여 오백나한을 모시게 되면서 영험한 나한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며, 창건설은
신라 효소왕 2년(693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경덕왕(742~765) 때
왕명으로 창건하였다는 설, 738년(효성왕 2) 승려 원참(元旵)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693년 원효 창건설은 원효 입적 시기인 686년 이후이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편 1970년 영산전 해체 보수 당시 나온 묵서명에는 경덕왕 때 창건하고 1375년
중수하였는데, 원참조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원래 은해사보다
먼저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1912년에 은해사에 말사로 통합되어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銀海寺)의 산내 암자로 거조사(居祖寺)는 아미타불 (조, 祖)이
계시는(거, 居) 절(사, 寺)이라는 뜻으로 현재는 석가모니불이 주불(主佛)이다.
‘거조사 영산전’은 1962년 국보 제14호로 지정되었고, 석가모니불과 석조나한상
526위가 모셔져 있으며, 오백나한은 각각 표정과 자세가 모두 다른 걸로 유명하다.
1805년(순조 5년)에 영파성규(影波聖奎, 1728∼1812) 스님이 영산전 오백나한상에
각각에 모두 이름을 붙였으며, 현재 남은 고려시대 건축물은 거조사 영산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봉정사 극락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뿐이다
고려시대 지눌(知訥)이 결사를 약속했던 동지들을 모아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이라는 취지문을 선포하고 정혜결사를 맺어 왕족 및 관리, 승도 등 수백 명을 이끌고
수행하였으며, 지눌은 1182년(명종 12)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여 동료들과 함께 선정(禪定)을 익히고 힘써 지혜를 닦자는 맹서의 글을 지어 후일을
기약한 바 있었다.
이에 1188년 봄에 거조사의 주지 득재(得才)가 지난날 결사를 기약했던 수행자를 모으고
당시 경상북도 예천의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 머물렀던 지눌을 청하자, 지눌이
1190년 이곳에 와 『정혜결사문』을 선포하면서 처음으로 결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훗날 결사의 규모가 커지자 거조사에서 수선사로, 이후 송광사로 옮겨 갔으며, 1298년
(충렬왕 24) 원참(元旵)이 밤중에 낙서(樂西)라는 도인을 만나 아미타불 본심미묘진언
(本心微妙眞言)과 극락왕생의 참법(懺法)을 전수받아 기도 도량으로도 크게 부각되었다.

영산전은 거조사의 중심 전각(殿閣)으로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처음 지었으며,
석가모니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으며, 앞면 7칸·옆면 3칸 크기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부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며, 특히 영산전은 고려말·조선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으며, 1962년 국보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영산전 내부의 모습
영산전에 모셔져 있는 나한상은 촬영 금지라 사진을 찍지 못했고 선 채로 삼배의
예를 올린다.
나한(羅漢)은 일체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어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자격을 지닌
불교의 성자(聖者)를 말하며, 범어(梵語)인 아라한(阿羅漢, Arhat)의 줄임말이다.
소승불교에서는 수행자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자라는 뜻이며
대승불교에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로서 석가에게서 불법을 지키고 대중을
구제하라는 임무를 받은 자를 말한다.
불가의 불제자 가운데 부처의 경지에 오른 16명의 뛰어난 제자를 ‘16나한’이라고 하며
이들은 무량의 공덕과 신통력을 지니고 있어 열반에 들지 않고, 세속에 거주하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존자(尊者)로 부처가 열반한 뒤 제자 가섭이 부처의 설법을 정리하기 위해
소집한 회의 때 모였던 제자 500명을 ‘500나한’이라고 한다.
나한은 인간의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됐으며, 중국의
당송(唐宋)시대에 유행했던 나한신앙은 삼국 후기부터 소개되어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서는 국가적인 행사로 나한재(羅漢齋)가 행해졌으며, 조선시대에 복을주는
‘복전(福田)’의 의미로 신앙되어져 서민들과 가장 친숙한 존재로 여겨졌다.
나한은 그림이나 조각에서 종교성 색채가 짙은 불, 보살상과 달리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만드는 이의 개성이 한껏 드러나도록 자유분방하게 표현되기도 하였으며, 그 수효도 16나한,
500나한, 1200나한 등 다양하며 그 모습을 규정한 것이 없기 때문에, 나한들은 우리 민족의
소박한 심성을 닮은 익살스런 얼굴 표정을 넘어 파격적인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거조사 삼층석탑(居祖寺 三層石塔:걍상북도 문화재자료 104호)
거조사 영산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으며, 높이 3.15m로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탑의 몸돌과
지붕돌 모두 별석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면석 일부와 지대석은 후대에 보수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탑 구조와 마찬가지 상층기단 면석과 각층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으며, 상륜부에는 노반이 남아 있으며 기단에 안기둥 1개를 새긴 점,
덮개돌 상면이 경사진 점, 노반 낙수면이 짧은 점, 추녀가 두껍게 되어 있는 점 등에서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탑이다

급한 마음에 거조사 내부를 주마간산격으로 참배하고
거조사 주차장을 출발하여 신녕면 소재지로 향한다.
아침부터 일정이 꼬여버려 님(산행)도보고 뽕(팔재계)도 따겠다는 계획은
一場春夢이 되어버린 산행길...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거조사를
떠난다

신녕면 소재지(17:10)
일단 목욕탕에 들려서 깔끔하게 씻고나서 포교사복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점심을 굶었던 탓인지 엄청나게 배가 고프다.
목욕탕 근처에 있는 분식집에서 떡만두로 허기를 면하고
팔재계수계법회가 열리는 고운사로 가기위해 네비게이션에
입력을 하니 거리가 무려 74km가 나오는구나...도저히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것 같아서 후배 포교사에게 대신 點名을 부탁하고
부지런히 고운사로 향한다

고운사 일주문(18:40)
17시에 팔재계 입재식인데 너무 늦어버렸다...영천시 신녕면에서
무려 200여리를 과속으로 달려서 고운사로 향하는데 일주문
가까운 곳의 주차장은 滿車라 1.5km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
애마를 세우고 일주문에 도착하니 후배 포교사들이 반갑게
맞아주는구나.

‘팔재계(八齋戒)’는 팔계(八戒), 혹은 팔관재계(八關齋戒)라고도 하는데, 불자들이
살생을 금하는 것 등 여덟 가지를 금하는 것으로 ‘재계(齋戒)’란 식사와 행동을 삼가고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을 말하며, 재계에는 팔관재계(八關齋戒)가 있는데, 이는
오계(五戒)를 수지한 재가 신자가 매년 삼장재월(1월, 5월, 9월)의 육재일(六齋日)에
지켜야 하는 여덟 가지 계율이다.
팔관재계(八關齋戒)의 여덟 가지는 아래와 같다.
① 살생(殺生) ― 산목숨을 죽이는 것(을 금한다)
② 불여취(不與取) ― 주지 않는 것을 취한다는 것. 곧 도둑질(을 금한다)
③ 비범행(非梵行) ― 출가한 이의 계행으로서 사음(邪淫)과는 다르다
이것은 출가한 사람이 아내를 가지거나 남편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만약 출가한 사람이 부부의 관계를 가지면 그것은 출가의 본분에 어긋나는 일,
곧 청정한 수행을 더럽히는 일이므로 비범행이라 한다(비범행을 금한다)
④ 허망어(虛妄語) ― 남을 속이는 것(을 금한다)
⑤ 음제주(飮諸酒) ― 술을 먹는 것(을 금한다)
⑥ 도식향만 무가관청(塗飾香墁 舞歌觀聽) ― 도식은 몸에 향기 있는 것을
바르거나 몸을 장식하는 것이고, 향만은 좋은 향수를 머리에 바르는 것이며,
무가관청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가서 보고 듣고 하는 것(을 금한다)
⑦ 면좌고광 엄려상상(眠坐高廣 嚴麗床上) ― 높고 아름답게 장식한 상위에
앉거나 또는 자거나 하는 것(을 금한다)
⑧ 식비시식(食非時食) ― 끼니 밖의 음식을 먹는 것(을 금한다)

고운사(孤雲寺)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등운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
681년(신문왕 1)에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가 창건하여 고운사(高雲寺)라
하였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이다
그 후 최치원(崔致遠)이 승려 여지(如智) · 여사(如事)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립하고 이를 기념하여 최치원의 자(字)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헌강왕 때는 도선(道詵)이 약사여래석불과 석탑을 안치하였고,
948년 운주(雲住)가 중창하였다.
1018년(현종 9) 천우(天祐)가 대웅전 · 약사전 · 극락전 · 적묵당(寂默堂) · 설선당(說禪堂) ·
동별실(東別室) · 서별실(西別室) · 관음전 · 금당(金堂) · 백련당(白蓮堂) · 회운당(會雲堂) ·
청풍당(淸風堂) · 문수전(文殊殿) · 양로당(養老堂) · 백련암(白蓮庵) 등을 중창하였다.
극락전에 봉안한 관음상은 천해(天海)가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불상을 송도 대흥산(大興山)에서
찾아내어 고운사로 옮겨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서 행사장으로 향하는데, 지난 봄인 2025년 3월 25일 경상북도
의성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고운사의 대부분 전각들이 소실되었으며, 소장했던
여러 유형문화재는 산불을 피해 반출되었으나 교구본사인 고운사의 많은 전각과
주변의 사찰림이 입은 피해로 참으로 가슴이 아프구나.

입재식이 끝나고 본격적인 팔재계 행사가 준비중이다.
내가 조계종포교사로 활동한 지가 25년이 지났지만
늘 올때마다 가슴 설레는 행사가 이제는 체력적인 부담으로
철야를 하기에는 힘이든다...더군더나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고, 1회용 우의 하나로 광장에서 버티고
새벽 5시에 사홍서원을 끝으로 팔재계행사를 끝내고 집으로
와서 3일동안 아파서 참으로 굉장히 힘이 들었다
'신녕 서(유봉)지맥(진행중)'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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